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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소망을 이루다 -5- 터키 쿠사다시
11월 4일 Kusadasi,Turkey
정확히 08시에 선박은 터키의 구사다시항에 입항하였다
년간 300일의 태양을 가진 터키의 최고 휴양지 쿠사다시는 에페소스, 디디마.
필에네,미레토스등에 유명 유적지들이 있다
풍부한 태양으로 터키인의 여름 별장으로 최고 인기 지역이며 여름이면 관광객과
함께 활발한 상권이 형성되는 터키 최고의 도시 이다
또한 로마의 관습과 비잔틴 문화의 결합으로 태여난 터키 사우나의 원조로도 유명하다
성모 마리아의 집 ( The House of the Virgia Mary)
에페소스에서 9KM 떨어져 있는 Bulbul 산에 세워져 있는 성모 마리아의 집은
1878년 캐드린 수녀의 예언대로 성모 마리아께서 최후를 맞이한 집을 찾아
복원하였으며 1967년 교황 바오로 6세,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2006년에는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도 친히 다녀가신 성스러운 성지로
에헤게 해가 보이는 먼산 외딴 성지이지만 매일 미사가 열리고 마리아의 죽음을
아쉬워 하는 속세의 인간들로부터 보호 받고 있었다
이먼곳에도 한글입간판이 서 있는 것을 보니 반갑고 대단한 느낌이 들었다
마침 우리가 방문했을때 미사가 열리고 있었다
성모 마리아의 편안한 영민 모습을 보고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초 한자루의
불을 켜면서 우리의 존재를 인식해 보았다
아래로 내려오니 생명의 약수 물이 흐르고 있다
약수를 받아 한 목음 마시며 평안을 기도하려는 모습은 동양인이나 서양인이나
똑 같은 심정인가보다
우린 그 다음 목적지 에페소스로 향했다
에페소스 (Ephesus)와 아르티미스(Artimis) 신전
기원전1000년 경에 아테네 코드롯왕의 아들인 안드로 콜로스가 이오니아 인을
데리고 와서 피온산에 정착하여 도시 국가를 만들었으며 기원전 560년 경에는
리디아왕 크로에소스가 아르테미스 신전을 지어 에페소스를 아르테미스 신에게
바치니 에페소스는 종교적 성지가 되어 크게 발전 하였다
로마 제국때 에페소스는 인구 20만을 넘는 대 도시였으며 1세기경에는
기독교의 선교활동 중심지로 크게 발전했으나 비잔틴 제국시대 들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에페소스는 쿠사다시로 부터 12KM 떨어져 있으며 Cayster 강 입구에 세워 지면서
고대 동,서양의 무역 중심지로 번창하든 도시이고 아르티미스 신전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이며, 성 Paul, 사도 john, 성 마리아상, Celsus 도서관,
25,000명을 수용하는 대극장등의 종교적인 고대 유물등이 존재함으로 그 가치가
이태리 폼베이 보다도 더 값진 유적지로 생각 되었다
현재 약 20%밖에 발굴되지 않았으며 발굴작업은 계속되고 있었다
지금도 발굴은 계속되고 있었다
아르테미스 신전 (Artimis)
아르테미스 신전은 기원전 560년 약 120년에 걸쳐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크게 지어졌으며 높이 20m, 폭이 60M, 길이가 120M, 지름 1.2M의 흰 대리석
기둥이 127개나 되는 웅장한 신전으로 완공되어 고대 7대 불가사의로 알려지고
있으며 7번 파괴되고, 7번 재건 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356년 10월 헤로트라투스라는 자가 "나쁜 짓을 하여 내이름을 역사에 남기고 싶다고"
고 하며 고의적으로 방화하여 전소되자 알랙산도르 대왕이 재건을 지시하자 에페소스의
여인들은 보석등을 팔아 자금을 마련하였고 왕들도 기둥을 기증하여 파르테논
신전보다 더 아름다운 신전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러차례 수난을 거친 신전은 결국 260-268년 고트인에 의하여 철저히
파괴 되어 신전의 흔적조차 찾을 길 없었으나 1863년 영국의 고고학자
J.T 와트에 의하여 발굴되였으나 중요 문화재는 계약에 의하여 대영 박물관에 보관중이며
지금은 기둥 하나만 남아 있어 그 화려했든 신전의 아픈 역사를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아르테미스 신
제우스 신과 레토 신 사이에 태어난 딸인데 사냥의 여신이며 다산과 풍요의
여신이고 순결의 여신으로 아폴로 신과는 형제간이며 시녀 칼리스트가 처녀성을 잃고
아들을 낳자 곰으로 변해 살게 하고 후일 아들이 곰사냥을 할때 아들이 어미를 사냥할까
측은하게 생각하여 아들도 곰으로 변하게 하여 우주로 내 보내어 큰곰자리 작은곰자리를
만들었으며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 오리온과 사랑하는 사이인 아르테미스의 처녀성을 잃을 가
두려워 아폴론은 함께 사양을 즐기다 물위에 떠있는 머리를 활로 쏘아 죽여버렸는데
그것이 오리온 인것을 알고 의학의 신 이스클레피오스에게 부탁했으나 결국 살리지
못하여 그 시신을 우주로 보내 오리온 자리를 만들었다는 신화가 있는 아르테미스신은
유방이 여러개 달린형상으로 다산, 풍요의 신이다
남문을 통하여 에페소스를 들어가면 제일 먼저 공중 목욕탕인
바리우스(Varius Bath) 목욕탕이 나타난다
전형적인 로마식 목욕탕으로 냉탕, 온탕, 열탕으로 나누어 A.D.2세기 경에
동서양 무역의 중심지 였기에 이곳 사람들은 부자가 많아 육식을 많이 하여
체중 조절을 위해 사우나가 필수적이 었다고 하며
로마 전성기에 도시로 들어가는 통행자에게 반드시 목욕을 하고 들어가야한다고 했다(?)
2000년 전에 지금과 같은 토관을 지하에 뭍어 배수로를 만들어 사용 헀으며
그 잔재들이 아직도 주위에 흩어져 있었다
오데온 소극장
그곳을 조금지나면 약 14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오데온(Odeion)의 반원형소극장이 있고 이곳에서 귀족들의 의회를 비롯하여 연극 시 낭송등 문화 활동을
개최하였다고 하며 또한 이 극장은 2세기경 이곳 귀족인 베리우스 안토니우스와
그의 부인 플라비아 파파아니에 의하여 세워졌으며 22계단으로 되어 있고 천정도
있었다고 한다
바실리카 거리
오데오 원형극장 앞의 이 거리를 바실리카라하며 오른쪽에는 시청사, 공회당
관공서, 때로는 궁전 의식의 장소로 사용되는 공공 건축물을 있었고
반대편에 넓게 펼쳐진 광장은 아고라인데 정치적 종교적 회합이 열리고,
새로운 사상과 철학을 접하며 토론장소로 사용되었다
로마총통 관저자리이며 디모테오가 순교한 장소라고 한다
성 바올이 '리스트라' 순례 중에 만난 디모테오(17-80)는 3번째 전도여행에서는 선구자로
바올을 수행하지만 에페소스로 돌아와 주교로 임명되고 바올이 순교하자 에페소스에서
아르테미스 여신의 제사시 그 여신은 우상에 불가하고 진정한 우리들의 신은 하느님
뿐이라고 설득하자 썽난 관중에 의하여 곤봉에 맞아 순교한 성인이다
갈리우스, 멤미우스(Memmius) 기념비
기원전 1세기 아우구스투스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내부에 새겨진 비문은
'구세주는 카이우스(Caius)의 아들이요 크르넬리우스 술라(Sulla)의 손자다'
라고 기록 되어 있었다
로마 공화정 당시 과중한 세금에 못이겨 폰토스의 왕인 미트라다테스 6세에게
에페소스를 헌납하니 그는 여기 살든 8만명의 로마인을 하루 아침에 학살 하여
버리니 로마에서는 솔라를 보내 그를 정복하고 다시 로마의 속국으로 만드니
술라는 에페소스에 살던 로마인들에게는 영웅으로 받들어 지게 되었으며
기원전 87년 술라의 승리를 기념하고 그 당시 숨진 로마인 8만명의 영혼을 달래기
위하여 그의 손자 맴미우스가 만든 기념비이다
도미티아누스 신전과 폴리오 샘
옆에 보이는 건물이 폴리우스라는 귀족이 만든 폴리오샘과
앞쪽 2층으로 지은 신전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재위기간 81-96년까지 로마의 황제로서 자신이 바로 주인이자 신이다 라고
부르게 했고 남을 절대로 믿지 않았으며 결국 기독교를 탄압하다가 왕후에게
죽임을 당한 불행한 황제 였다
니케의 여신상 (나이키)
오른손에는 종려나무 잎을, 왼손에는 월계수를 들고 독수리의 날개가 붙은
비상청 같은 옷을 입고 있는 승리의 여신 니케, 옷과 날개 때문에 날아
다니며 승리를 안겨주었다는 일명 나이키 여신상
원래 이 여신상은 헤라클레스기둥 위 아취형 천정에 있었든 것으로 아직
복구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헤라클레스 문
길의 끝부분에 헤라클레스 상이 양쪽 기둥에 새겨져 있는 개선문이
헤라클레스 문이다 4세기경 돌기둥으로 지어진 헤라클레스 문은 2층으로 된
개선문으로 6개의 기둥 중 현재는 2개만이 남아있다.
헤라클레스의 상징인 사자의 가죽을 지닌 모습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는데,
크레테스 거리를 오르내리는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 잠시 멈추어 서서
헤라클레스의 개선문을 매만지며 슬픈 역사의 흔적과 숨결을 느껴보기도 한다
헤라클레스 양문에 새겨진 그림들은 불교의 사천왕과 같은 의미의 조각상이
새겨져 있으며 꼬리는 헤라클레스의 어깨에, 머리는 배에 대고 있는 사자의 모습이
헤라클레스 앞에서는 불상하게 느껴지는데 이 사자가 바로 '네미아의 사자'이며
헤라클레스가 이룬 12대업 중에서 제일 먼저 불사신의 사자 네미아를 잡아
그 가죽을 걸치고 다니면서 용맹을 자랑 했다고 한다
헤라클레스 문은 셀소스구역과 오데온 구역을 구분하는 위치에 있고
좌우 대칭이며 여기서 부터 귀족들도 말에서 내려 걸어서 가야하는
좁은 길이 이어진다.
트리야누스(Trianus)샘
A.D.102~104, 사이에 건축 되었으며 트리야누스 황제에게 바쳐졌다
코린트식 기둥의 머리장식만 남아있는 입구의 높이는 원래 12m나 되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정면에 연못이 있었고 그곳에 세워진 트라야누스 황제 동상의 발끝에서
물이 흘러나오고 그 물을 먹을때 자연히 황제의 발아래 머리를 숙이게
되어 있어 황제께 위엄을 갖추게 하였다
셀소스 도서관 으로 이어지는 큐레테스(Curetes) 거리
큐레테스는 반신 반인의 인물이고 에페소스에서 큐레테스하면 아르티미스
신전의 승려를 지징하는 말이다
승려들이 셀소스 도서관에 가기 위하여 이 길을 자주 걸었을 것으로 생각되어
이름이 붙여졌다고 생각되는 길이다
스콜라스티카 목욕탕(Scholasticia Bath)
스콜라스티카 목욕탕 건물 주변에 무너진 잔해들이 가득하다
4세기경 사업가 스콜라스키아(scholasticia)라는 여성이 이 목욕탕을 증축 하여
기증하였으며 남여 혼탕은 물론 때로는 여자는 오전, 남자는 오후로 나누어 사용한
기록도 있으며 터키 사우나의 모테가 된 하만처름 요일에 따라 남여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하니 터키 사우나의 원조가 여기인 것이 틀림 없는 듯 하였다
하드리안(hadrian, Hadrianus)신전
서기 138년 에페소스 시민들에 의하여 지어진 하드리아누스 신전은 도미티안
신전 이후 두번째로 로마의 황제 하드리아누스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하나로 추앙받았고 내정에 치중하여 태평성대를 누리도록 노력한 황제 였기에
에패소스시민들의 존경을 받아 이 신전을 지어 받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관에는 4개의 기둥이 있는데 입구의 아치 기둥에는 운명의 여신인 티케(Tyche)의
머리가 조각되어 있고 그뒤 현관 중앙 아치에는 메두사의 모습이 나무잎과 함께 있으며
그 아래에는 아네나 신, 셀레나 신,아폴로 신, 아르데미스 신,에페소스의 창조자
안드로 클로스,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아버지,데오도시우스 황제,
데오도시우스의 아내와 아들이 차례로 부각되어 있었다
또한 신전 전면의 4개의 기둥중 2개의 기둥을 잇는 아치는 에페수스 유적지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오현제 [Five Good Emperors]
로마 제국의 최고 융성기를 주재했던 다섯 황제를 말하며 네르바(96~98 재위),
트라야누스(98~117 재위), 하드리아누스(117~138 재위), 안토니누스 피우스
(138~16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의 5명의 황제재위시가 황금기 였다
신전과 아고라,귀족의 저택이 있든 자리였지만 지금은 페허만 남아 있다
수세식 공중 화장실
대리석으로 된 좌석 아래부분은 물이 흘러 자연 배수로가 되도록 만들었으며
칸 막이는 없이 3면에 약 50개의 좌석이 있고 중앙에는 분수 정원을 만들어
연주하게 하였고 대리석 좌석이 차거울때는 노예가 먼저 앉어 주인을 위해
데워주었다 하며 유로 화장실로써 수세식용 물이 들어오는 곳이 흘러나가는
곳보다 비싼 가격이라고 한다
특히 로마인들의 옷은 토가(Toga)라고하여 치마 비숫한 만도를 입었기 때문에
화장실에서 가릴수 있어 편리 헀을것 같았다
이후는 후편 수정 에페소스 셀소스 도서관이 정본이다
샐소스(Celsos) 도서관 (에페소스샐소스 도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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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데스 거리의 끝자락에 셀소스(Selsos) 도서관이 있는데 서기135년 이곳의
로마 집정관이었던 셀소스 플레마이아누스의 무덤 위에 아들 율리우스 아퀼
(Julius Aquila)가 아버지를 위한 기념관을 만들었으며 에페소 유적들 가운데
드물게 2층 전면구조가 거의 원형 그대로 이름답게 남아있다
이 도서관은 당시 세계 3대 도서관중 하나로 12,000여권의 두루말이 장서를
보관중이였으나 화재로 도서관이 폐허로 되고, 10세기경에 지진 등으로 많이
훼손으나 1970년대 오스트리아에 의해 복원작업을 했으며
1층 전면으로 8개의 기둥이 있고 도서관 입구벽면에는 4개의 여인 조각상이
있는데 지혜, 사색, 학문 및 미덕을 의미한다고 하며 이곳에 있는 조각상들은
복제품이며 진품은 비엔나 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여자는 평생 이틀 만 즐거움을 준다 그 가운데 하루는 결혼하는 날이고 또
다른 하루는 그녀를 묻는 날이다" 라고 패러디로 유명한 패러디의 원조 철학자
히포닉스도 이곳에서 생활했으며
"불을 만물의 근원"이라 고 생각하고 "만물은 유전한다" 라는 철학자 헤라크레토스의
인생 절정기에 이곳에서 생활하였으며 하였다한다
도서관 옆 공터에 유곽이 있었기 때문 유각으로 가는 길을 인도한 발자국
문양의 보인다
세계 최초의 광고판이라고 광고업계에서 인용하는 그 유명한 홍등가의 입구표시 이다
대리석판위에는 아코로디아(나를따라 오세요) 라는 문구와 화살표가 있고,
구멍(돈)이 파여있다 하트모양, 머리를 치장한 여자모습, 발모양, 직사각형그림등
하트는 마음이 아프고 지친 사람은 이리로 오세요 여자모습은 제가 위로해 드릴께요.
발 모양은 발 크기가 이것보단 커야합니다.(미성년자 입장불가)
동그란구멍은 돈을 가지고 오셔야합니다 네모모양은 현금이 없을 경우엔 크레딧 카드도
받는다 ?는 뜻이라고 하지만 그 안에는 유곽의 규칙들을 적어 놓은
공간이라고들 한다
이 길은 로마의 황제 아카디우스때 복구하여 항구까지 길이가 53M, 폭이 11M나
되는 동 서양 문물의 출입로 로써 에페소스에 풍요를 안겨준 길이기도 하다
이 도로의 끝이 부두까지 이어지는 도로이며 모든 물류는 이 길을 통하여
반입되었을 것 같다
이 도로의 양옆으로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는 아고라 이며 그 뒤에는 주택들이 들어서
있었다고 한다 아고라는 시장을 뜻하며 대리석 도로의 서쪽에 위치한 아고라(Lower Agora)
는 네로 황제 시대에 건축된 것으로 아직도 발굴중이다
아고라는 두 줄의 화랑으로 둘러싸여있고 그 뒤에 상점들이 줄서 있어 청동, 구리제품,
등잔을 비롯한 많은 도자기 제품, 포도주, 꿀, 고기, 비단, 보석 등이 거래되었다
도서관을 지나 마블 스트리트를 걸어 내려오면 항구에서 올라오는 길인
아카디우스 길과 만나게 되는데 그 만나는 곳에 유명한 대극장이 있다
피온산의 경사를 이용하여 만든 25,000명을 수용할수 있는 음악당 또는 극장으로
리시마쿠스 시대에 지어졌으며 현재의모습은 트라얀(Trajan) 황제 시대의 모습이다
약 18m 높이의 무대 정면 건물은 3층으로 되어있고 각종 부조와 조각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
약 40 m 지름의 중앙 무대는 정교한 음향학적 구조로 되어 있다고 한다
사도바울이 3차 전도 여행 중 이곳에서 선교 연설을 하였다고 한다
마침 우리가 도착 했을때 크레오 파트라의 행렬이 시작되었고
두 검객이 칼싸움을 하고 패배자에게는 죽이라는 엄지손 가락을 꺼꾸로 표시하는
시녀들과 관중들의 요구에
크레오 파트라는 패배자를 죽이라는 신호를 보낸다 비티오를 찍었으나 조작 잘 못으로
날아 가 벼렸네
우린 기원전 27년 아우구수투스 황제시대의 화려한 번성기를 보며
로마황제 뿐아니라 바울 요한 그리고 성모 마리아까지 이곳을 방문
거주 했다는 것은 이 도시가 로마 다음으로 기독교 시대에 최고의
순레지 였을 것을 생각하며
에포소스 박물관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황제 모형옆의 우리집사람
풍요와 다산의 신인 아르테미스신의 모습도 보였다
여러 여인상들이 진열되어 있는데 그당시의 여인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금강산도 식후경 우린 쿠사다시로 돌아오는 길에 최고의 휴양 호텔 Korumar에서
중식으로 터키 부페와 몇잔의 와인을 들며 오후 한때를 즐겼다
점심 식사 후 자유시간을 가져 우린 터키 카펫 공장을 방문하여 최고급 카펫을 구경하며
그들의 장인 정신에 놀랐고 그들의 숙명 정신에 존경을 표시했다.
15,000불 이면 터키 최고급의 양탄자를 구입할 수 있었으나 욕심만 내다가
이곳 Bazar에서 아이 쇼핑을 즐기고 크루즈선으로 돌아 왔다
우린 저녁식사후 쇼 한 프로를 보고 깊은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