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afe 두레박 이주일의 팝(가요) 아티스트(가수) 자료 -
2008년 10월 26일(일) : Michael Jack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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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가 아홉 형제중 일곱째로 태어나
블랙뮤직, 즉 리듬 & 블루스, 고스펠, 소울 등은 다른 음악 장르에 비해 가족의 결속을 중요시하는 장르이다. 이들의 음악에는 가족의 결속도가 곧 성공의 원동력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족의 결속력이 급격히 약해지는 현대 문명사회에서 특히 '혈연'을 중시하는 흑인들의 풍조가 시대를 뒤로 돌아가는 경이감과 함께 기대를 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실제로 50, 60년대의 리듬 & 블루스나 소울의 대스타들은 가족과 함께 교회에서 고스펠을 부르며 어린 시절을 보낸 스타가 많았다. 그들은 성장한 후에도 혈연적 유대관계를 중시하여 글래디스 나이드 & 피플스, 아이들리 브라더스 등 형제나 자매로 그룹을 구성하는 일이 많았다. 마이클 잭슨을 길러 낸 잭슨 파이브도 바로 이러한 흑인 특유의 가족 유대에 의해 생성된 그룹이었다.
갈리 마을은 일리노이와 인디애나주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그레이트 레이크와 칼매트 강을 끼고 있는 중공업지대에 위치한 갈리는 194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는 철강 생산지로 유명했다. 더구나 갈리 마을은 시카고, 밀워키, 디트로이트, 신시내티 등의 주요 공업도시를 주변에 두고있어 매장된 철강이 고갈되지 않는한 영원히 번영할 도시였다.
자연히 갈리에는 남부의 가난한 농업 노동자들이 모여들었다. 역시 남부 출신이었던 16세의 청년 조 잭슨은 시카고 근교에 사는 캐서린이라는 소녀와 결혼하여 갈리로 이주했다. 그는 마을 철강소에서 크레인을 운전하는 일을 구했으며 밤에는 팰컨스라는 블루스 밴드에 가입해 기타를 연주하여 음악에의 꿈을 이어나갔다.
팰컨스는 대학의 축제에 불려다니거나 바에 출연하여 주로 척 베리나 머디 워터스 같은 블루스 스타일의 히트곡을 불렀다. 아내인 캐서린도 그룹에 합류하여 클라리넷을 불렀지만 가족이 급격히 늘어나게 되자 이내 집안일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조 잭슨과 캐서린 부부 사이에서 1950년에 태어난 첫 딸은 모린이었다. 그 후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1951년 5월 4일에 첫 아들 지그몬드 에스코 잭슨이 태어났다. 나중에 그는 간단하게 재키라는 애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2년 반 후인 1953년 10월 15일에는 토리아노 에이더릴 잭슨, 즉 티토가 태어났고, 그 1년 후인 1954년 12월 11일에는 저메인 라전느 잭슨이 태어났다. 그리고 또 1년 후에는 둘째 딸 라토야 잭슨이 태어났다. 1957년 3월 12일에는 네째 아들 마론 데이비드 잭슨이 태어났으며, 18개월 후인 1958년 8월 25일에는 다섯째 아들 마이클 조 잭슨이 태어났다. 캐서린과 조 잭슨 부부는 그 후로도 두 자녀를 더 낳았는데 1965년 10월 29일생의 스티븐 랜들 잭슨과 1967년생 자넷 잭슨이 바로 그들이다.
조 잭슨의 음악활동은 처음에는 휴식을 위한 취미생활이었으나 가족이 늘어나자 자녀들의 양육을 위한 일종의 부업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잭슨 가족들은 집안에서 자주 가족 음악회를 열었다. 큰 딸 모린이 피아노 반주를 맡고 아버지는 기타, 어머니는 클라리넷을 연주했으며 나머지 아이들은 새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Under The Board', 'Twist And Shout', 'Cotton Fields', 'You Are My Sunshine' 등이 당시 잭슨 가족들이 즐겨 연주한 레퍼터리였다.
평소에도 잭슨가의 형제들은 자주 아버지의 밴드인 팰컨스의 연습 광경을 구경하곤 했다. 그리고 집안에서는 고물 색서폰, 탬버린, 봉고 등 망가진 악기들을 가지고 놀았다. 어느 날, 아버지인 조 잭슨은 누군가가 자꾸 자신의 기타를 만진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실제로 큰 아이들인 재키, 티토, 저메인 들이 아버지 몰래 기타를 만지며 연습했던 것이다. 그 중에서 티토와 저메인이 악기를 다루는 데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조 잭슨은 아들들의 재능과 장래성을 간파하여 팰컨스를 그만두고 세 아들들에게 기타 연주의 기초와 화성학을 가르치는데 시간을 보냈다. 특히 그는 여러 클럽을 순회하며 여러 그룹들의 스테이지 매너를 연구해 그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둘째 아들 티토의 기타 솜씨가 눈부시게 향상되었다. 그러자 목소리가 좋아 보컬에 치중하는 저메인은 베이스 기타를 맡게 되었다.
이들보다 더 나이가 어린 마론과 마이클도 그룹에 참가하고 싶어했다. 두 꼬마들은 특히 유명한 가수들의 흉내를 내며 아버지와 형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했다. 마이클 잭슨은 제임스 브라운의 목소리와 복잡한 발놀림을 그대로 흉내낼 줄 알았을 뿐만 아니라 리듬 & 블루스 가수들 특유의 동작을 거의 똑같이 모방하곤 했다. 봉고를 두드리며 형 저메인의 노래를 그대로 흉내내는 다섯살짜리 마이클의 모습을 보고 조는 더 어린 아들들도 형들의 그룹에 참가시키키로 결정했다.
엄격한 지도와 천부적 재능의 결합
자식들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재능을 확신하게 된 조 잭슨은 아들들의 재능을 꽃피울수 있도록 해주어야겠다고 결심하여 직장도 그만두고 아들들의 음악 교육에 전력을 쏟았다. 가족들의 식료, 의료, 교육비에 충당되어야 할 돈들이 저메인의 중고 베이스와 앰프, 스피커 등에 사용되어 버려 조는 자주 아내 캐서린과 싸워야 했다.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절대로 말릴 수가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새로운 악기를 구하기 위해 집 안의 돈을 모두 긁어가곤 할 때마다 살림을 해야 하는 나도 짜증이 나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래도 그의 집요한 노력때문에 늘 물러서고 말았어요."
자식들의 쇼에 사용할 아이디어 수집에 여념이 없던 조는 음의 범위를 넓히기 위해 두 사촌을 가담시켰다. 드러머인 로니 랜시퍼와 오르가니스트 조니 잭슨이 그들이었는데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악기를 가지고 있어서 조에게는 경제적인 부담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밴드의 형태가 갖추어지자 조 잭슨은 자식들에게 스파르타식 훈련을 강행했다.
"갈리에 있을 때는 연습만 했읍니다. 방과 후 집에 돌아오면 매일 아버지가 연습 준비를 끝내고 기다리고 있었읍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완벽하게 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 연습을 시켰지요. 세시부터 연습을 시작하면 한밤까지 계속되곤 했읍니다. 하루에 일곱 시간 이상씩 연습하는게 보통이었지요. 대체 언제쯤이면 쇼를 할 수 있게 되느냐고 불평하고 싶어지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읍니다."
마이클 잭슨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조용하고 점잖은 편인 조 잭슨에게는 쇼맨으로서의 자격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방법, 또 그런 그룹을 만들어 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마이클 잭슨의 강력하고 천부적인 재능은 아버지 조 잭슨의 가르침이 거의 필요없을 정도로 뛰어난 것이었다.
"나는 누구에게서도 발성법을 배우지 않았읍니다. 그저 여러 가수들의 노래를 귀로만 듣고 노래를 익혔어요. 라디오난 레코드에서 나오는 노래를 한두 번만 들으면 그대로 따라 부를 수 있었읍니다."
당시 마이클 잭슨에게 영향을 준 뮤지션은 대개 리듬 & 블루스의 가수들이었다. 아레사 프랭클린, 리틀 리처드, 레이 찰스 등이 었다. 또 십대 후반에는 엘튼 존, 카펜터스, 사이먼 & 가펑클 등 백인 싱어 송라이터들의 레코드도 자주 들었다. 하지만 보컬에 관해서는 백인들에게 관해 별로 배울 점이 없었다고 덧붙여 회고한다.
기억력이 좋고 예민한 마이클 잭슨은 음악 연습을 즐거워하기까지 하여 그 점에 있어서는 조금도 문제가 없었다. 성격이 그다지 사교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집 밖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것보다는 밤이 될 때까지 음악을 반복 연습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집 뒤에 농구 코트가 있어 그곳으로부터 아이들의 노는 소리가 떠들썩 하게 들려 왔어도 마이클 잭슨은 조금도 그것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농구나 야구보다는 노래를 부르고 연주를 하는 것이 한층 즐거웠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 잭슨의 엄격한 지도와 아들들의 천부적인 재능, 그리고 서로 마음이 맞는 연습 등으로 인해 잭슨가의 그룹들은 서서히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키 큰 사람들이 가운데 서고 그 양쪽에 어린아이들이 앙증맞게 서 있는 광경을 보면 누구라도 빙긋 웃곤했읍니다. 진짜 형제일까? 서로 닮았고 게다가 하모니까지 멋지게 맞는 걸 보니 형제들인 모양인데.... 모두들 그러면서 관심을 보이곤 했지요."
조 잭슨은 그룹에 잭슨 파이브라는 명칭을 붙이고 사람들 앞에 선보였을 그때의 반응을 이렇게 말했다. 잭슨 형제들은 1965년, 고향인 루즈벨트고교에서 개최된 콘테스트에서 우승을 한 이후 본격적인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 콘테스트에서는 마이클 잭슨이 리드 보컬을 맡았는데 그들의 참가곡은 당시 템테이션즈의 대히트곡 'My Girl'이었다.
이때부터 지방 신문을 매체로 하여 잭슨 파이브의 이름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윽고 그들은 주말이나 방학 때면 폭스바겐을 타고, 악기를 가득 실은 한 대의 트럭을 따라 뮤직홀과 클럽 등지로 원정을 떠나곤 했다. 이에 따라 조 잭슨은 형제들이 탄 차의 운전사, 매니저, 또 공연장의 무대감독 겸 프러모터 등의 역할을 하며 그들의 공연에 필요한 모든 일들을 도맡아 했다.
잭슨 파이브가 처음 출연한 무대는 어느 병원에서 주최한 크리스마스 자선 콘서트였다. 이때는 거대한 산타클로스를 배경으로 무료로 연주했다. 그들이 고정적으로 한 첫 연주는 갈리의 미스터 럭키라는 클럽에서였는데 하루에 5달러 내지 8달러씩의 보수를 받았다. 그 후 그들은 여러 클럽 무대에 정기적으로 출연하게 되었다.
페퍼민트 라운지라는 클럽은 상당한 부유층이 드나드는 곳이어서 손님들이 무대 위로 지폐를 던지는 일도 가끔 있었다 한다. 마이클은 이 돈을 줍는 작업을 야무지게 자신의 기술로 해치웠는데 가벼운 동작으로 지폐 위를 춤추다가 이따금 몸을 낮추어 지폐를 집어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그런 다음 매끈한 동작으로 일어서서 자연스럽게 다시 춤추기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무대를 내려오면 형제 전원의 주머니에 10달러 또는 20달러씩이 넣어져 있곤 했다.
1967년 무렵에는 백 보컬을 맡고 있던 마이클이 리드 보컬을 맡게 되었고 노래에 맞추어 객석으로 내려와 여자 손님의 스커트를 넘겨 들 정도로 쇼맨십도 몸에 익혔다. 이미 여섯살 때 로즈마리라는 스트리퍼와 공연을 한 적이 있어 그 정도는 겁내지 않을 정도로 쇼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다이애나 로스의 추천으로 팝스계 정식 데뷔
심야 쇼에서 힘차고 세련된 동작으로 뛰어다니는 잭슨 파이브를 보고 사람들은 '그룹의 리드 싱어인 소년이 사실은 35세 난장이다'라는 악의에 찬 소문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클럽 순회공연의 횟수는 늘어났고 때로는 주말을 이용해 위스콘신이나 미주리 주까지 연주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이처럼 바쁜 주말을 보낸 후에도 월요일에는 8시에 일어나 학교에 가는 힘겨운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다. 더구나 성적이 떨어진 사람은 순회공연에서 제외시킨다는 엄격한 규정이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학교 수업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1968년에 잭슨 파이브는 소울, 리듬 & 블루스의 일류 스타가 출연하는 큰 극장에 진출하여 그들의 오프닝 그룹으로 출연하게 되었다. 시카고의 리갈 극장에서는 스모키 로빈슨 & 미라클스의 오프닝으로 출연하여 'Tabacco Road', 'You Don't Know Like I Konw', 'Get Ready' 등을 불렀다. 이 시점에서 마이클 잭슨은 확고하게 리드 보컬의 자리를 맡게 되었고 저메인 잭슨은 아주 가끔씩만 리드 보컬을 담당할 뿐 주로 백 보컬로 활약하게 되었다.
잭슨 파이브가 최초로 레코딩 계약을 맺은 것도 1968년이었다. 시카고의 스틸타운 레코드사가 그들에게 관심을 보여 싱글을 발매하게 된 것이다. 'I'm Big Boy Now'가 바로 잭슨 파이브 최초의 싱글이었다. 이 싱글은 시카고를 중심으로 4개 주에서 인기를 모으는 히트를 기록했다. 그러나 스틸타운 레코드사가 워낙 소규모의 레이블이었기 때문에 프러모션이 미약하여 그들의 레코드는 충분한 홍보가 되지 못했다. 잭슨 파이브 역시 아직 쇼비지니스에 관해서는 배워야 할 점이 많았던 것이다.
이윽고 잭슨 파이브는 필라델피아의 업타운 극장, 워싱턴의 하워드 극장, 뉴욕의 아폴로 극장 등으로 진출하여 대규모의 무대에서 공연하게 되었다. 물론 그들의 독자적인 콘서트가 아니라 제임스 브라운, 템테이션즈, 재키 윌슨, 이모션즈, 글래디스 나이트 & 피플스 등 당시의 대스타의 공연에 오프닝 그룹으로 출연한 것이었다. 수퍼 그룹들의 오프닝으로 출연하면서 그들의 무대 매너와 음악들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던 잭슨 파이브는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더욱 탁월한 라이브를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잭슨 파이브의 열성에 감동한 글래디스 나이트가 자신이 소속된 모타운 레코드사에 그들을 소개한 것은 1969년이었다. 글래디스 나이트가 그녀의 매니저인 테리 콕스에게 조 잭슨을 소개해 주었고 테리 콕스는 모타운 담당자에게 잭슨 파이브의 공연을 관람하도록 추천했다. 모타운의 담당자는 어느 날 밤, 리갈 극장에서 잭슨 파이브의 공연을 보고는 완전히 마음에 들어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신문에 '다이애나 로스, 잭슨 파이브를 발견'이라는 보도가 대대적으로 실렸더군요. 물론 기뻤읍니다. 누가 그들을 발견하여 팝스계에 추천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잖아요? 다만 내가 좋아하는 그룹이 빛을 보게 되었다는 것만이 중요한 일이지요."
글래디스 나이트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 무렵, 잭슨 파이브에게는 또 하나의 행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1968년, 인디애나 주 갈리에 본부를 둔 한 흑인단체에서 주최하는 축제 '소울 위크엔드'에 출연하여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다. 그런데 이 단체의 창립자인 리처드 고든 해처는 나중에 갈리 시장이 된 인물로 잭슨 파이브를 다이애나 로스에게 소개한 바로 그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그 후 잭슨 파이브는 흑인 가수들의 메카인 모타운 레코드사에서 몇 차례 오디션을 받았다. 모타운의 사장인 배리 고디의 자택에서 연주를 하기도 했다. 다이애나 로스는 특히 마이클 잭슨에게 흥미를 가져 그 후로도 계속 잭슨가의 형제들을 후원해 줄 것을 약속하였다.
1969년 11월, 최대의 흑인 레이블인 모타운 레코드사와 계약을 체결한 잭슨 파이브는 데뷔 싱글 'I Want You Back'을 발매했다. 이 싱글은 곧장 팝 차트에 진입하여 2백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B. J. 토마스의 '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를 밀어내고 차트의 정상에 올랐다. 마이클 잭슨을 포함한 잭슨가 형제들의 성공을 향한 질주가 본격화된 것이다.
당시 마이클 잭슨은 11세였다. '나는 10대가 되기 전부터 이미 베테랑 싱어였읍니다'라고 회고하는 태연스러움이 조금도 능청스럽지 않을 정도로 마이클 잭슨은 그 당시부터 이미 스타였다.
조 잭슨으로부터 음악적 감각과 쇼맨십을 철저하게 훈련받은 그를 모타운 레코드사의 간부들은 더욱 완벽하게 다졌다. 모타운의 스텝들은 먼저 마이클 잭슨의 안무를 재검토했다. 그 결과, 제임스 브라운의 색채가 강했던 그때까지의 액션에서 다른 형제들과의 조화와 균형도 고려해 독창적인 춤을 개발했다. 또한 대스타가 되었을 때 매스컴에 대응하는 자세, 나아가 대중의 흥미를 자극할만한 대답을 하는 방법까지 훈련시켰다.
특히 마이클 잭슨은 유난히 자유분방한 성격이어서 저메인과 짖궂은 장난을 많이 하곤 했다. 두 사람은 장난기가 가득 담긴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무언가 재미있는 말썽을 일으킬 일이 없는가 틈을 엿보곤 했다. 그토록 장난기 넘치던 소년 마이클을 지금처럼 쓸쓸해 보일 정도로 과묵한 청년으로 변화시킨 것 역시 조 잭슨과 모타운의 노력의 결과였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소년 마이클에게서 소년시절의 즐거움을 앗아간 것이기도 했다.
잭슨 파이브를 위한 제작팀 코퍼레이션 결성
60년대 말의 미국은 흑인 인권운동이 고조되고 인종차별 반대, 비폭력 투쟁 등 흑인에 의한 새로운 의식혁명이 일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회현상으로 인해 가장 크게 환영받은 그룹이 슬라이 & 패밀리 스톤이었다. 그들은 정치의식이 강하면서도 새로운 감각의 음악을 구사하여 흑인과 백인의 모든 팬들로부터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모타운에는 그처럼 참신한 감각의 스타가 없었다. 마침내 규중처녀인 다이애나 로스 & 수프림스까지 끌어내어 1968년에 'Love Child'를, 1969년에는 'I'm Living In Shame'을 통해 흑인들의 비참한 생활을 묘사하는 참여의식을 보였다. 이는 'Where Did Our Love Go' 같은 노래에 비하면 확실히 사회성이 짙은 곡이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모타운의 'Sound Of Young America'의 노선을 적극 떠맡은 그룹이 잭슨 파이브였다. 젊은 미국인들, 사회의식이 강할 뿐 아니라 자기주장이 곧고 윤택한 환경 속에서 활기차게 살아가는 세대, 그리고 자신들과 비슷한 존재를 우상으로 섬기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을 겨냥해 잭슨 파이브는 등장했던 것이다.
베리 고디는 코퍼레이션이라는 레코드 제작팀을 새로 짜서 잭슨 파이브를 위해 활기차고 신선하며 감각적인 사운드를 만들도록 했다. 코퍼레이션은 슬라이 & 패밀리스톤의 사운드를 분석해 그 중 대중들에게 어필하는 요소를 추출해 냈다. 코퍼레이션은 전원이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잭슨 파이브의 능력과 화려한 액션, 춤 등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곡을 만들었다.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코퍼레이션의 결정이 반드시 잭슨 파이브의 의사에 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직 신인 그룹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반대의 의견을 제시할 수는 없었다.
우선 마이클 잭슨의 리드 보컬이 녹음되고 나면 다음으로 형제 전원의 하모니 코러스가 녹음되었다. 그러나 스튜디오가 언제나 긴장된 상태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직 어리고 장난기가 많았던 마이클 잭슨은 자주 프로듀서나 엔지니어를 상대로 장난을 치곤 했다. 의자에 화병을 올려놓기도 했고 구두 뒤축에 성냥개비를 끼워 불을 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 레코딩이 시작되면 멤버 전원이 진지하게 일에 임하곤 했다.
코퍼레이션의 치밀하고 강력한 후원에 힘입어 잭슨 파이브는 드디어 한 곡 한 곡씩 싱글 히트곡을 내기 시작했다. 그들의 첫번째 히트곡은 이미 말한 'I Want You Back'이었다. 피아노 반주의 도입부가 지나면 기타와 베이스가 등장하고 다시 한 번 피아노 연주가 흐른 뒤 어린 소년의 낭랑하고 귀여운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어린 소년이 자기를 떠난 여인에게 '내가 잘못했소, 돌아와 주오'라고 애원하는 노래는 묘하게 역설적인 설득력을 지닌다.
"그 곡을 들으면 지금도 놀라울 정도입니다. 감정이나 호흡의 처리가 마치 35세의 베테랑 싱어 같아요. 다섯 살때부터 노래했기 때문에 당시에도 이미 5,6년의 경험이 있었긴 했지만 그래도 능청스럽다고 느껴질 정도로 어른스럽게 노래했더군요."
마이클 잭슨 자신도 그때의 곡에 대해 놀랄 정도로 당시 그의 창법은 완숙한 것이었다. 애드 설리번 쇼에 출연하여 귀엽고 장난기 넘치는, 그렇지만 예의바른 태도로 인터뷰를 하고 춤을 추어 보이는 마이클 잭슨에게 많은 사람들은 호기심 이상의 사랑을 보였다. 진지한 표정으로 실연의 깊은 상처를 애절하게 호소하는 11세의 소년을 보며 사람들은 그의 나이에 의혹을 품기까지 했다. 아뭏든 이러한 관심을 모으며 잭슨 파이브는 데뷔 싱글 'I Want You Back'을 2백만 장이나 파는 좋은 성과를 올렸다.
다이애나 로스가 잭슨 파이브를 후원하기로 했다고 한 기사도 거짓이 아니었다. 1969년에 수프림스를 떠나 솔로 싱어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 다이애나 로스는 자신의 콘서트에 잭슨 파이브를 출연시키기도 했던 것이다.
'I Want You Back'이 크게 히트하자 모타운에서는 이 싱글을 담은 앨범 제작을 서둘렀다. 코퍼레이션이 잭슨 파이브를 위해 제작한 오리지널 곡에 예전 모타운의 히트곡을 첨가하여 모두 17곡이 수록된 앨범이었다. 이 앨범에서 '다이애나 로스가 잭슨 파이브에게/I Want You Back'라는 타이틀이 붙여졌다.
이 앨범은 전체적으로 중후하고 펑키한 사운드를 띠고 있었는데 이는 분명 슬라이 & 패밀리스톤에 염두에 둔 탓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들은 슬라이 & 패밀리스톤의 히트곡 'Stand!'를 리바이벌하여 수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곡은 그리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대신 포 톱스의 히트곡 'Standing In The Shadows Of Love'는 오리지널보다 템포를 느리게 편곡하여 실연의 공허함을 적절히 표현한 곡으로 인기를 모았다. 스티비 원더의 대히트곡 'My Cherie Amour'도 리바이벌되어 크게 인기를 모았으며 스모키 로빈슨의 러브 발라드 'The One Who Really Loves You'도 마이클 잭슨의 설득력있는 솔로로 사랑 받았다.
이처럼 리바이벌 곡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는 것은 다른 의미로는 앨범에 통일성이 적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결함들은 11세의 소년 마이클 잭슨의 깜찍한 춤과 탁월한 보컬로 얼마든지 커버될 수 있었다.
비틀즈의 'Let It Be'를 밀어낸 앨범 'ABC'
'I Want You Back' 이후 잭슨 파이브는 9개월만에 두 장의 넘버 원 싱글을 더 히트시켰다. 두번째 싱글은 'ABC'라는 타이틀이었는데 'I Want You Back'에서 사랑에 매달려 간절히 애원하는 것과는 달리 '사랑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라고 노래하는 밝고 경쾌한 곡이었다. 탄력있는 리듬과 호흡이 잘맞는 잭슨가 형제들의 하모니가 한층 매력적이었다.
'ABC'는 1970년 3월에 단숨에 차트 20위에 첫진입하여 4월 25일에는 2주 동안 톱의 자리를 지키던 비틀즈의 'Let It Be'를 밀어내고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또한 잭슨 파이브는 그해 그래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유럽에서의 인기도 순조로왔다. 잭슨 파이브가 TV에 소개된 적이 한번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에서는 'ABC'가 차트의 8위까지 올라갔다.
잭슨 파이브의 세번째 싱글은 'The Love You Save'였다. 이 노래는 자신의 여자친구가 여러 남자를 사귀는 것을 보고 '그런 행동을 계속하면 결국 버림받을 뿐이다'라고 충고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사춘기적인 사랑에의 호기심과 또 그에 부합되는 정도의 도덕적인 교훈을 담은 가사이다. 마이클 잭슨의 흡인력있는 고음과 저메인을 중심으로 한 잭슨 형제들의 저음 하모니가 묘하게 엉켜드는 매력적인 곡이었다.
'The Love You Save'는 저메인 잭슨이 부른 'I Found Jet Girl'과 짝지어져 한 장의 싱글로 발매되었다. 저메인은 특히 십대 소녀들 사이에서 급속히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사실 당시 11세였던 마이클은 젊은 여자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어렸다. 그러나 한창 피어나던 나이의 저메인은 달랐다. 베이스를 치는 핸섬한 용모의 사나이, 더구나 리드 보컬까지 한다니.... 저메인의 핸섬한 용모는 나중에 베리 고디의 사위가 되는 결과까지 낳는다.
저메인 다음으로 소녀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사람은 재키였다. 그러나 조용하게 기타연주나 전념하는 티트는 마이클과 마찬가지로 소녀들의 로맨스 대상으로는 적합하지가 않았다.
싱글 'The Love You Save'는 1970년에 비틀즈의 'The Long And Winding Road'를 차트에서 밀어내고 정상의 자리를 차지했다. 연이어 세 장의 싱글을 차트의 넘버원에 올린 뒤 네번째 싱글을 발매하게 되었을 때 코퍼레이션은 노선을 바꾸었다. 전작까지는 비교적 경쾌하고 춤추기 쉬운 곡들이었으나 네번째 싱글 'I'll Be There'는 촉촉한 발라드 스타일이었던 것이다.
저메인 탈퇴 후 잭슨스로 새출발
가족들과 헤어져 모타운에 남은 저메인의 솔로 활동은 그다지 성공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비교적 성공적인 앨범으로는 그의 네번째 앨범 'Let's Get Serious'를 꼽을 수 있다. 이는 스티비 원더가 프러듀서를 맡은 것으로 앨범의 성공은 그에게 힘입은 바가 큰 것으로 보인다.
1980년에는 'Let's Get Serious'의 히트로 인해 솔로로서의 안정기에 들어선 것으로 보였으나 같은 성격의 앨범 'Jermaine'과 'I Like Your Style'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이후 저메인은 자신이 직접 프러듀스를 맡으면서 모타운의 다른 아티스트들과 함께 일하게 되는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드바지 형제를 중심으로 한 스위치이다. 스위치는 후에 드바지라는 6인조 그룹으로 성장하게 된다. 마이클이 계속 형제들에게 둘러싸여져 있는 한편, 저메인은 실력파의 새로운 친구들로부터 자극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한편 마이클, 재키, 티토, 매론, 랜디는 에픽이 주선한 프러듀서와 일을 시작했다. 케니 갬블과 레온 하프로 구성된 콤비 프러듀서였는데 강렬한 댄스 비트에 세련된 오키스트라 편집을 엮는 아슬아슬한 묘기를 이룬 전력이 있었다. 이들이 필라델피아 출신이었기에 잭슨스의 녹음은 필라델피아에 있는 갬블 & 하프의 시그마 사운드 스튜디오에서 했다.
첫번째 앨범은 1976년에 발매된 'The Jacksons'이고 두번째는 1977년에 발매된 'Going Places'였다. 'The Jacksons'의 매상은 만족스러운 것이었지만 비평가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상업적인 성공은 거두었지만 예술적인 성공은 거두지 못한 것이다.
갬블 & 하프는 초기에는 신선한 시도들을 많이 한 콤비였지만 너무 폭넓은 프로젝트에 관계하고 있었기에 그 독특한 사운드의 신선함을 잃어가고 있었다. 또 저메인이 빠져서 잭슨스도 사운드의 손실을 보았다. 마이클의 목소리를 감싸는 듯한 저메인의 목소리는 균형있는 사운드를 얻는 데 꼭 필요한 것이었다.
마이클의 목소리 자체는 변하지 않았지만, 혼자서는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이것이 음악적인 실패의 원인이었다. 하지만 마이클의 목소리는 한 옥타브를 내리고 이를 보충하기 위해 여러가지 재미있는 시도를 했다. 숨차하는 소리를 내거나 우-하는 외침을 넣어 부른다든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앨범 'The Jacksons'와 'Going Places'는 평론가에게 혹평을 받았지만, 모타운을 떠나서 그룹의 재능을 자유로이 펼쳤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 저메인이 떠난 것을 느끼면서 마이클은 자신들을 위해 곡을 쓰고 보컬 표현의 폭을 넓히는 실험을 했다. 그것이 5년 후에 활립된 그의 보컬 스타일의 바탕이 되었다.
저메인이 떠난 후 잭슨스는 약간 분위기가 침체되었지만 그들의 인기는 여전해서 에픽에서의 첫앨범 기념 사인회에서는 팬들이 너무 많이 몰려와 13명의 부상자를 낼 정도였다.
1977년 5월의 유럽 순회공연을 마치고 온 잭슨스는 다시 새로운 일에 착수했다. 그 하나가 그들 자신의 프러덕션인 피콕을 창립한 것이었다. 모든 것을 그룹이 스스로 판단하고 실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71년 당시의 기세를 되찾기 위한 활동으로 보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모타운의 화려한 복귀를 겨냥한 전주곡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또 하나의 새로운 활동은 각 멤버들의 솔로 레코딩에 착수한 것이었다. 우선 마이클이 예정되었고 차례로 다른 멤버들도 착수하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이 새로운 모험에는 약간의 휴식이 필요했다. 1977년 겨울, 마이클이 영화 로케이션에 들어 간 것이다.
영화 '위즈'에서 다이애나와 공연
1977년 10월부터 12월까지 마이클은 영화 '위즈'(Wizz)에 몰두하게 된다. '위즈'는 '오즈의 마법사'를 모방한 흑인들만의 뮤지컬이다. 그 내용은 폭풍에 휩쓸려 길을 잃은 도로시와 그 애견이 집으로 가는 길을 찾는 중에 용기를 찾는 사자, 마음을 찾는 남자, 머리를 찾는 허수아비를 만나 그들이 잃은 것을 찾기 위해 오즈나라의 에메랄드 시티에 있는 마법사의 성에 간다는 것이다.
도로시 역에는 다이애나 로스가, 허수아비 역에는 마이클이 정해졌다. 허수아비 역은 평소에 마이클이 좋아하던 역이었다. 촬영 장소는 원작의 시골이 아닌 뉴욕. 여행에 나선 도로시가 최초의 친구를 만난다. 멍청한 얼굴에 흐릿한 시선을 던지는 허수아비. 까마귀에게 싸움을 걸기는 커녕 시종 떨고 있다. 그의 머리에 채워진 것은 지푸라기뿐, 싸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그는 업 템포곡 'You Can't Wing'을 노래한다. 자신의 의지를 잃고 불행한 인생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허수아비와 같은 사람들의 절망감을 슬프고도 긴장감 있는 소리로 표출해낸다. 이런 허수아비를 설득하는 도로시. '자신의 두 다리로 서세요.' 하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주저하는 허수아비가 에메랄드 시티를 향한 제 일보를 내딛는 순간 축하 댄스가 시작되면서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노래 'Is On Down The Road'가 시작되고, 그들은 여행을 떠난다.
이 영화는 막대한 제작비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이클은 TV 출연이나 순회공연의 중압감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행복해 했다. 촬영이 끝나고도 의상을 벗기 싫어할 정도로 허수아비 역을 좋아했던 것이다. 또 그의 평범한 연기가 호평을 받는 의외의 결과를 낳았다.
마이클은 삽입곡 'You Can't Wing'을 퀸시 존스의 프러듀스로 사운드트랙으로 레코딩하게 된다. 이때 같이 레코딩한 다이애나 로스와의 친교가 깊어지고 퀸시 존스와는 공동제작을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퀸시 존스는 마이클이 12살쯤에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Ben'을 노래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퀸시는 그 노래를 듣고 안정감 있는 가창력이 뛰어났다고 평했다. 프러듀서로서의 퀸시 존스의 경력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것이었다. 그의 눈에 비친 마이클은 음악적인 감각과 비지니스맨으로서의 재질을 겸비한 성실한 일꾼이었다. 10살무렵부터 아첨과 입발림에 능한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던 소년이라면 이기주의 덩어리이가 되었기 쉬울 텐데 모타운에서의 심한 트레이닝을 겸해 온 탓인지 마이클에게는 그런 점이 보이지 않았다.
마이클과 퀸시는 '위즈'작업을 통해 관계가 더욱 친밀하게 되어 작업 이외에서의 상호이해도 깊어 갔다. 그러던 어느날 마이클이 퀸시에게 전화를 걸어 솔로로서 크기 위해서 어느 프러듀서 밑에서 활동하는게 좋겠느냐고 물었다. 퀸시가 말한 프러듀서 이름은 바로 퀸시 존스 자신이었다.
하지만 전화를 건 마이클 자신은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퀸시 존스 & 마이클 잭슨의 콤지가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아직 마이클에게는 형제들과 에픽에서의 세번째 앨범 제작에 들어갈 일이 남아 있었다. 이 앨범에서 잭슨스는 자신들 손으로 프러듀스하는 모험을 하게 되었다.
잭슨스의 'Destiny' 플래티넘 획득
앨범 'Destiny'는 잭슨스가 자신들의 프러덕션 겸 출판사인 피콕을 설립하고 만들어 낸 첫번째 앨범이다. 피콕이란 이름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예전에 마이클이 키우던 공작새 몇 마리는 꼬리를 세우고 집 주위를 마구 돌아다니곤 했다. 그런데 매일 아침 동네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고 믿었던 울음소리가 실은 근처의 불만을 사, 유감스럽게도 공작새는 처분되고 화려한 깃털만이 남게 되었다. 형제들은 이 새를 비유해서 자신들이 추구하는 바를 이렇게 표현했다.
'새 중에서 모든 색을 하나로 융합하는 것은 공작색뿐이지요. 특히 공작새가 빛나는 것은 뭔가를 사랑할 때만입니다. 우리는 공작새와 같이 모든 민족을 하나로 융화시키고 싶어요. 음악을 통해서 말이죠.'
이러한 포부로 설립된 것이 피콕이다. 형제들은 모든 것을 그들의 손으로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1978년 가을에 발매된 'Destiny'에서 마침내 형제 스스로의 손으로 프리키 소울 녹음처리를 해냈다.
이 무렵 새로운 매니지먼트 팀인 롱 와이즈너와 하비 드 맨 팀도 갖추어졌다. 이들은 조 잭슨과 교묘한 연계 플레이어로 마이클과 잭슨즈의 재능을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또한 키보드와 신서사이저에 그랙 필링게인스, 기타리스트에 글랜드 보디스와 마이클 셈벨로, 베이스를 맡은 네이슨 와츠, 드러머에 에드 그린 등 쟁쟁한 세션 연주자들도 속속 모여 들었다.
잭슨스는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앨범 'Destiny'에서 제작, 프러듀스와 연주에 이르기까지 모든 요소를 사용해 완전히 현대적이고 새로운 방법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저메인이 빠짐으로 해서 곡에 가사를 붙이는 데 애를 먹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앨범 'Destiny'에서 그들은 디스코 등의 댄스 뮤직에서 제 기량을 맘껏 발휘해 보였다. 랜디와 마이클의 'Shake Your Body<Down To The Ground>'에서는 율동감 넘치는 키보드의 흥이 끊임없이 스피드감과 긴장감을 준다. 'All Night Long'은 정말로 몸을 저절로 흔들게 만든다.
앨범 'Destiny'는 중간 템포에 웅장한 스케일을 느끼게 하는 편집이 행해졌다. 매우 가벼운 어쿠스틱 기타로 시작되어 차츰 강렬하고 화려하게 변해나가는 것이다. 곡의 마지막에는 실로 강력한 하드 록적인 기타 연주가 튀어 나온다. 이는 마이클이 나중에 'Beat It'에서 보여주는 백인 록 사운드와 팝 소울의 융합이 돌연히 나타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Destiny'에서는 모타운에서 각 멤버가 대등하게 참가하던 것과는 달리 마이클을 리드 보컬로서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아직 그다운 스타일이 확립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후에 앨범에서 볼 수 있는 작곡과 표현의 뛰어남, 그리고 감각적인 가락은 충분히 엿볼 수 있는 앨범이다.
앨범 완성과 동시에 마이클과 형제들은 대규모의 세계 순회공연에 나섰다. 이는 앨범 프로모션을 겸한 것이기도 했다. 순회공연 도중 기후변화와 무리한 일정으로 마이클이 감기에 걸리는 등 멤버들의 몸 상태가 나빠지는 곤란을 겪기는 했지만 그룹 내의 분위기는 좋았다.
공연에서는 그룹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했고 그룹의 프러듀스 능력도 인정받은 것이다. 스테이지에서도 예전의 캬바레 시대의 유물처럼 깃이 넓고 촌스러운 의상을 벗어 버리고 깔끔하고 세련된 옷차림을 했다. 랜디는 어릴 때부터 연주했던 콩가뿐 아니가 키보드도 치게 됐다. 티토는 이제 훌륭한 기타리스트였다. 마이클은 그 매력적인 목소리에 딱 맞는 얼굴로 그룹의 간판이 되었다.
순회공연을 마치고 미국에 돌아오자 성대한 파티가 잭슨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앨범 'Destiny'가 플래티넘 디스크가 된 것이다. 이 축하 파티의 무대에 선 마이클을 보기 위해 약 1만 7천명의 군중이 아틀랜타 극장으로 몰려 들었다.
퀸시 존스와 손잡고 솔로로 나서
잭슨스가 집으로 돌아와 겨우 휴식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1979년 겨울이었다. 대부분의 멤버는 그룹 일을 떠나 가정으로 귀착했다. 만일 이때 은퇴의사가 있었다면 허용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마이클은 그런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음악은 그의 존재 그 자체이고 그가 지금까지 익혀 왔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필요하다면 독신으로 지낼 각오까지 돼 있었다. 이때 마이클이 좋아한 뮤지션은 프랭크 시내트러, 냇 킹 콜, 폴 매카트니, 스티비 원더 등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음악의 명수들로서 그 생애를 예술에 쏟아 넣었던 사람들이다. 마이클은 아티스트들에 대해 나름대로 이렇게 평가한다.
"프레슬리는 확실히 좋아요. 하지만 록 혁명을 일으켰던 것은 리틀 리처드와 척 베리 등 정말로 뿌리를 가진 싱어들이지요."
음악에 생애를 건 마이클이 싫어하면서도 견뎌내야만 하는 거싱 화려한 선전과 기사였다. 그러나 그가 성형 수술을 한 것은 매스컴에 대한 반동 때문은 아니었다. 확실히 'Destiny'의 속 내킷에 있는 사진과 'Off The Wall'의 재킷 사진은 서로 차이가 있다. 뭉실뭉실하던 코가 뾰족하게 위로 솟고 흑인 특유의 곱슬머리는 약간 젖은 듯하면서 흘러내리는 스타일로 바뀐 것이다. 평범한 아티스트로 있으면 상업적인 의미에서의 성공에 한계가 있을 것이란 것을 마이클은 의식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노력이 정말로 의미있는 일인가는 좀더 두고 봐야 알 일이다.
솔로로서 발벗고 나선 마이클은 퀸시 존스와 함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퀸시는 우선 앨범 타이틀 곡으로 폴 매카트니의 'Girlfriend'를 추천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폴 매카트니 역시 이 곡을 마이클에게 주려 했다는 것이다. 한 파티 석상에서 얘기가 된 것이었는데 아깝게도 폴이 전화번호를 적은 수첩을 잃어버려 허사로 돌아갔던 것이다.
퀸시는 또 히트 웨이브의 키보드 연주자 로드 탠파든을 스카웃해 올 것을 제안했다. 그는 영국의 클리소프스 출신의 작곡가이고 주로 독일에서 활동했다. 퀸시는 일찌기 로드의 작품에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마이클의 솔로 활동의 기반이 다져진 것이다.
앨범 'Off The Wall'은 퀸시 존스가 프러듀스를 맡은 것으로 곡의 대부분은 세계 순회공연을 가기 전인 1978년 11월에 녹음이 끝났다. 퀸시의 프러듀스 방법은 독특해서 먼저 아티스트와 함께 작업에 들어가고 그 다음에 계획을 짠다. 그래서 처음에는 꽤 화려하게 편집되었던 악기도 서서히 억제되어 결과적으로는 멋진 팝 소울 보컬을 끌어내는 것이다.
특히 업 템포의 댄스 트랙인 마이클의 곡 'Don't Stop Till You Get Enough'와 'Working Day And Night'의 두 곡에서 마이클 특유의 보컬 스타일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마치 여태까지 모아 두었던 재는을 자유롭게 펼쳐 보이는 듯하다. 여러가지 의성어와 숨차하는 듯한 소리, 우는 소리, 웃는 소리 등 그는 목에서 나오는 어떤 소리라도 리드믹한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매카트니 작품인 'Girlfriend'와 톰 베리 작품인 'She Is Out Of My Life'에서 마이클은 발라드를 소화해야만 했다. 'Girlfriend'는 매카트니 특유의 멜러디와 긴장감이 있는 곡이다. 섬세하면서도 귀엽고 밝아서 기억하기가 쉽다. 'She Is Out Of My Life'는 더 표준적인 발라드이다. 이 곡에서 마이클의 애절하게 울리는 하이 테너 보이스는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솟구치는 듯한 슬픔을 감추고 있다. 마지막에 가서는 마이클이 눈물을 참으며 노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가수가 자신의 곡에 푹 빠져 있는 절박감 넘치는 발라드는 아무 때나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퀸시가 마이클에게 다시 한번 부르게 했을 때 마지막 부분이 잘 되지 않았다. 며칠 수 다시 시도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맨처음 녹음한 것을 사용했는데 정확한 선택이었다는 것은 한 번만 들어봐도 알 수 있다.
'Off The Wall'에서 또 흥미로운 것은 마이클 자신이 백 보컬을 넣었다는 점이다. 이처럼 마이클 자신에 의한 오버 더빙은 형제들에 의한 것보다 좋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Destiny'의 어는 곡보다도 그의 리드 보컬에 딱 맞는 음색을 갖추고 있다.
앨범 'Off The Wall'에 수록된 싱글이 대다수 히트를 할 것이라는 예상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퀸시와 마이클을 놀라게 했다. 앨범에 실린 곡들이 발매된 1979년 말부터 1980년 말까지 계속 앨범 차트에 넘버원을 기록한 것이다. 1979년에는 'Don't Stop Till You Get Enough'와 'Off The Wall'이, 80년에는 'Rock With You'와 'She Is Out Of My Life'가 차트에 올랐다.
영국에서는 또 다섯번째의 싱글로서 'Girlfriend'가 발매되어 히트 차트에 올랐다. 판매고는 700만 장을 넘어 마이클을 다시 십대의 우상으로 만들었다. 1980년초에는 미국 뮤직 어워드의 3개 부문에서 톱에 오르는 성과를 거두었다. 최우수 소울 보컬과 최우수 소울 앨범 'Off The Wall', 그리고 최우수 싱글( 'Don't Stop Till You Get Enough')상을 받은 것이다.
한편, 이러한 인기와 성공에 비례해서 마이클의 고민은 심각해져 갔다. 모든 매스컴이 그를 화제거리로 주목하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고충을 이렇게 토로한다.
'만일 내가 차례차례로 다른 여자와 함께 나가 보세요. 섹스광으로 꾸며낼 거예요. 그저 사소하게 누구와 밖을 나가기라도 하면 모두 결혼 상대자가 되어 버리지요.'
매스컴은 마이클의 일거수 일투족을 과장해서 보도했고 무엇이든 이야기거리로 만들려 했으니 자연 마이클은 매스컴에 과민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침묵을 지킬 수는 있어도 허황된 소문을 없앨 수는 없는 것이다. 침묵을 하는 것 자체가 논평자가 끼어들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1980년 마이클의 앨범이 날개 돋힌듯이 팔리는 한편, 형제들은 가을에 발매 예정인 에픽에서의 네번째 앨범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중심적인 작사가로서 마이클이 활약하고 랜디와 재키가 몇 곡을 작사했다. 'Destiny'에 참가했던 기본적인 세션 멤버가 이번에도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전작과의 차이는 키보드의 사운드를 보강했다는 것과 스티비 원더의 멤버로 활약했던 올리 브라운에게 드럼을 맡긴 것이다.
앨범 'One Day In My Life'는 그 오프닝에서 타이틀 그대로 기운찬 승리의 분위기를 냈다. 첫 곡은 'Can You Feel It'으로 형제애를 노래한 곡이다. 알맞은 성가대의 코러스를 사용해서 심포니와 같은 웅장함을 지니게 했다.
또 하나 중요한 곡은 마이클 자신이 만든 'Heartbreak Hotel'이다. 이 곡은 다음의 솔로 앨범 'Thriller'에서 볼 수 있는 영화적인 이미지를 반영하면서 뭔가에 홀린 듯한 확각, 그리고 영원히 계속되는 악몽의 어두운 테마를 담고 있다.
또 재키와 랜디의 곡 'Time Waits For No One'에서 마이클은 'She Is Out Of My Life'에서 들려 준 눈물을 자아내는 듯한 슬픈 보컬을 재현했다. 여기서 그는 발라드에 푹 빠져 들어가 노래할 수 있는 기술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한 것 같다.
어쨌든 앨범 'One Day In My Life'는 앨범 'Destiny'를 거쳐서 태어난 것이다. 그 2년 사이에 밴드는 충분한 레슨을 받은 결과 여러가지 의미에서 성숙한 팝 레코드 제작에 성공한 것이다. 확실히 마이클이 주로 리드 보컬을 맡고 있지만 랜디나 재키도 리드 보컬을 맡아 공동 제작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앨범이 발매된 것은 1980년대말인데 그룹은 이때 다시 36개 지역을 도는 전미 순회공연에 나섰다. 순회공연은 550만 달러나 되는 매상을 올릴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그들은 또 현대 음악에 큰 공로를 했다는 이유로 '명예의 전당'에 잭슨스의 마크가 새겨지는 영예도 얻었다. 그와 더불어 레코드 판매 1억 장을 돌파하는 경사도 맞게 되었다.
동물들을 사랑하는 천진함을 간직하고
청중을 눈앞에 둔 무대야말로 마이클에게 있어 정말로 마음 푸근하고 사는 실감이 나는 장소다. 신경질적이고 소심한 마이클은 공연 시간이 가까와짐에 따라 변해 간다. 분장실로 나와 문을 통과해서 계단을 오르면 그곳은 환성과 조명이 빛나는 중앙 무대. 긴장감으로 곤두세워졌던 그의 신경은 무대에 서는 순간 해방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음악 자체가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생동감있는 그의 노래와 춤이 관중을 완전히 매료시킨다. 무대야말로 이 세상에서 얻게 된 사명이라고 마이클은 믿고 있다. 그는 마치 전염병처럼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이러한 그의 흡인력은 순전히 그의 뛰어난 재능 뿐만은 아니다. 자신의 재능에 자만하지 않고 그 자신 역시 자연스럽게 자신의 재능을 즐기고 있기때문인 것이다.
마지막 박수소리가 끝나면 마이클의 즐거움에도 막이 내린다. 그래도 계속 주목받는 그는 갑자기 상처받기 쉬운 인간이 된다. 팬들은 근접해 올것이고 질문도 퍼부을 것이다. 비명을 지르고 몸에 닿아보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호텔로 돌아오면 복도에서, 계단에서, 엘리베이터에서, 소녀들이 온갖 트릭을 써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팬을 가진 마이클로서는 참으로 고역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일단 방에 들어가면 팬들의 맹렬한 부르짖음에도 아랑곳 없이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대에 서면 마이클은 자신의 온 몸을 띄워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청중을 사로잡는다. 전세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마이클 잭슨은 바로 그 두 시간 동안의 마이클인 것이다.
11세 때부터 인기 스타라는 아성속에서 생활해야 했던 마이클은 70년대가 끝날 무렵에는 보통사람들과 거의 사귈 수 없게 되었다. 그러한 보통 사람들은 마이클은 '열광적으로 나를 환영하면서 나를 쫓아오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한다. 마이클은 군중을 무서워한다. 리포터와의 인터뷰에도 결혼한 형들을 대신해 자매 중의 한사람이 일일이 질문을 다시 말해 주어야 할 정도이다.
인기 스타가 겪어야 하는 고독감으로 인해 마이클의 성격은 양면적인 모습을 보인다. 하나는 일에 대해 절대적인 힘을 주장하려고 하는 프로의 모습이다. 어느 때나 감정에 좌우됨이 없이 확고한 현실적 판단을 내린다. 또한 우아하고 화려하고 완벽한 테크닉을 지닌 무대의 직업인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소심하고 세련되지 못한 웬지 어설퍼 보이는 마이클이 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자꾸 '마법'이나 '현실 도피' 같은 말로 제자리 돌기를 할 뿐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다. 때로는 약한 바람에도 쓰러질 것 같은 연약함이 그의 모습에 드러나기도 한다.
마이클의 일상생활은 신체단련과 건강유지 그리고 훈련으로 이루어진다. 일요일 특별훈련은 특히 유명한 것으로 미용과 건강을 위해 취저 30분간 쉬지 않고 춤을 춘다. 더구나 그 날은 야채 주스밖에 마시지 않고 체내의 불순물을 배출하는 데 힘쓴다.
최근에는 쇼핑도 그를 위해 특별히 가게를 열어 줄 때밖에 가지 않고 잡화용품은 거의 다른 사람에게 부탁한다. 그가 나가면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부산을 떠는 것이다. 한번은 슈퍼마킷에서 마이클을 만난 소녀가 무서운 비명을 지른 적도 있다. 그는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건강 식당에 자주가는데 거기에는 모두 친숙한 얼굴들로 특별취급은 받지 않기 때문이다. 휴가는 대개 마이애미나 스위스로 간다.
한때 마이클의 발언 모두가 부정적인 적이 있었다. 차 운전은 하지 않겠다, 결혼은 하고 싶지 않다. 자신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사적인 생활을 바랄 수 없다는 등등. 그러나 최근에는 부모의 권유로 차를 운전하는 등 차츰 그러한 상태가 개선되고 있다.
마이클은 어린이를 좋아한다. 어린이는 부담없는 친구들인 것이다. 마이클의 가장 친한 친구는 역시 가족이다. 그 외에는 음악이나 영화스타 친구들이 있지만 비지니스상의 사귐 이상의 것은 못된다. 마이클은 한때 일 이외로 사귄 두 명의 친구들과의 관계를 매스컴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적도 있다.
연애에 있어서는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1977년에 테이텀 오닐에게 정열을 바쳤으나 매스컴의 농간으로 깨져 버리고 말았다. 그 이후 그는 매스컴에서 짝지어 주는 대로 십대 여배우와 애인이 된다. 브룩 실즈, 조디 포스터, 린다 블레어 등등.
이렇게 무례한 매스컴에 대한 반동으로 마이클은 한때 연배의 연예인들과 친구관계를 맺기도 했다. 같은 세트 안에서 만난 제인 폰다는 그를 '걸어다니는 부상자'라고 표현한다. 쉽게 상처 받고, 피터 팬 같은 이미지가 그런 표현을 하게 했으리라.
마이클이 현재 살고 있는 집은 튜더 양식을 닮은 것으로 거대한 정도는 아니지만 사치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약 1에이커의 대지에 여섯 개의 침실, 체육관, 수영장, 비디오 오락실, 16밀리와 35밀리용의 프로젝터가 설비된 4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영사실 등이 있다. 영사실에는 전문 영사기 담당자가 있다.
이 중 마이클이 가장 아끼는 방은 디즈니랜드의 '걸리브의 해적'을 그대로 본뜬 동화의 방이다. 또 동물의 우리가 있는데, 여기에는 시끄럽게 우는 공작과 침대를 갉아 먹는 너구리, 서커스 재주가 있는 라마 루이, 양 미스터 티브스, 두 마리의 어린 사슴과 여러 종류의 새들, 그리고 잠을 방해하면 광폭해지는 전설적인 보아뱀이 있다. 이 보아뱀은 이름이 매슬스인데 리포터가 올 적마다 거칠어지도록 길들어져 있다.
마이클은 동물 이외에 영화에도 관심이 많아서 현재는 영화수집에 열심이라고 한다. 덕분에 전속 영사기 담당자는 항상 바쁘다. 마이클은 'E·T'(마이클은 이것을 35번 보았는데 그때마다 울었다고 전해진다)나 동화, 월트 디즈니의 만화, 옛날 코미디를 즐겨 본다.
마이클이 즐기는 운동은 수영뿐이다. 춤을 잘 춰서 운동도 좋아할 것 같지만 부상을 두려워해서 수영 외의 다른 운동은 하지 않는다.
영화에 대한 관심으로 마이클은 'E·T/그 이야기책'(E·T/Story Book)이라는 사운드트랙 앨범에 관여하였다. 처음으로 테마 곡 'Once Upon A Dream'을 부르지 않겠냐는 권유를 받았는데 마이클이 워낙 열심이었기 때문에 내레이커 역까지 맡게 되었다. 마이클의 목소리가 나래이커에 적당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감정이 깃들어 있고 호소력도 있었다.
그런데 레코딩 중에 문제가 생겼다. E·T가 죽는 장면이 되면 마이클이 항상 울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E·T의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마이클을 이렇게 평했다.
"마이클은 천진난만하면서 자신의 고민을 혼자 힘으로 개척하는 부류의 드문 인물이다."
한편, 'Girlfriend' 이래 마이클과 폴 매카트니의 친교는 계속되었다. 마이클은 비틀즈를 위해서 듀엣곡 'The Girl Is Mine'을 작곡했다. 후에 마이클은 폴 매카트니와 공동으로 'Say Say Say'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런데 'The Girl Is Mine'은 방송을 타지 못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The Girl Is Mine'은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백인남자와 흑인남자가 다툰다는 내용인데 이런 내용의 곡은 도저히 방송할 수 없다는 이유로 미국 라디오국이 거부를 한 것이다. 여전히 인종차별이 심한 백인사회의 폐쇄성을 느끼게 하는 사건이었다.
'Thriller'에서 위선과 진실의 갈등 묘사
1980년 앨범 'Off The Wall'에 이어 마이클은 프러듀서에 퀸시 존스, 작곡가에 로드 댄파튼, 스튜디오 뮤지션에 혼 세션을 스탭으로 기용하여 새앨범에 착수하게 된다. 마이클은 이 앨범을 위해 로드 댄파튼의 곡을 세 곡 뽑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타이틀 곡인 'Thriller'였다.
그 외에 마이클의 곡이 4곡, 제프 포카로와 존 베티스 작의 'Pretty Young Thing', 퀸시 존스와 제임스 잉그램의 공동작인 'Human Nature' 등이 실렸다. 밝고 외향적인 곡은 모두 마이클 이외의 작곡가에 의한 것이고 마이클의 작품은 모두 어둡고 내향적인 것이었다.
마이클의 곡 'Wanna Be Starting Something'에서는 마이클의 행동을 (노이로제에 걸렸다거나 임신을 시켰다는) 중상하는 평론가가 너무 많다고 노래한다. 매스컴의 횡포에 질린 마이클이 그 공격의 화살을 평론가에게 겨눈 것이다.
이어 이중인격의 친구와 빌리 진의 위선을 비난한다. 그러나 마지막 일절에서 그러한 위선을 자존심과 진실로서 극복하게 된다. 'Beat It'은 춤추기 쉬운 곡으로 중간에 에디 반 헤일런의 헤비 메틀 기타가 들어가 분위기를 돋군다.
'Billie Jean'에서는 절세의 미녀 빌리 진으로부터 아이의 아버지이므로 책임을 지라고 책망을 받는다. 이것은 마이클이 실제로 겪은 실화이다. 많은 팝스타와 마찬가지로 마이클도 숨겨둔 자식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마이클만큼 그런 사건과 무관한 남자도 없다. '빌리 진은 나의 애인이 아니오'라고 마이클은 강력하게 반박한다.
'Thriller'는 빈센트 프라이스의 공포영화에서 힌트를 얻어 만들어진 공포 조성의 곡이다. 이 앨범에서는 'Off The Wall'의 즐거운 파티 기분이 가시고 마음 속의 어두운 면이 표면화되어 있다. 항상 소심한 젊은이가 그 마음 속에는 진실을 드러내는 마지막 말은 기다리는 결의를 갖고 있는 것이다.
앨범 'Thriller'는 어른이 된 마이클의 고민이 엿보이면서, 위선과 진실의 다툼이 주 테마인 작품이다. 한 장의 앨범에서 4장의 톱 텐 싱글을 낸 'Off The Wall'은 마이클의 솔로 아티스트로서의 판매 기록을 세웠는데 앨범 'Thriller'에서는 'The Girl Is Mine', 'Billie Jean', 'Beat It', 그리고 'Wanna Be Starting Something'이 6월까지 4장 모두 톱 텐 싱글이 되었다. 또 5월에는 'Billie Jean'과 'Beat It'이 미국 차트에서 동시에 1위와 5위에 오르는 기록을 세웠다.
'Billie Jean'이 미국과 영국의 팝 차트 톱에서 빛나고 있을 때 마이클은 미국의 리듬&블루스 차트, 앨범 차트, 그리고 싱글 차트를 동시에 제패한 첫 아티스트가 되었다. 앨범 'Thriller'는 미국, 영국에서 넘버 원 팝 앨범이 되어 리듬&블루스 댄드 차트에서 2개월간 선두자리를 독주하는 등 눈부신 기록을 세워 나갔다.
레코드 판매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획기적인 것이었다. 8월까지 마이클은 세계 19개국으로부터 35개의 상을 수여받았고 미국 CBS는 마이클을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아티스트로 인정하게 되었다.
마이클은 비디오에서도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 1983년 봄 비디오 'Billie Jean'은, 백인 록 그룹만을 방영한다는 미국 MTV사의 불문율을 깨고 MTV에 정기적으로 나오게 되었다. 공식적으로는 부정되고 있지만, CBS측에서 마이클 잭슨을 필두로 한 흑인 아티스트를 방송하지 않는 한, 이후 모든 비디오 제공을 중단하겠다는 압력을 가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무근의 얘기만은 아닌 것 같다.
'Beat It'은 결투에서 궁지에 몰린 마이클이 마지막에는 모두 무기를 버리고 적까지 춤추게 한다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디스코 판이다.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안무가 뛰어나고 영상적으로도 성공적인 작품이었다. 또 마이클이 늑대 사나이로 나오는 'Thriller'도 절찬을 받았다.
마이클은 다른 아티스트들과의 공동작업에도 열심이어서 글래디스 나이트 & 피플스와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퀸의 프레디 머큐리 등과의 공연을 고려하기도 했다. 또 다이애나 로스에게는 'Muscles'라는 곡을 줘서 그녀의 앨범 'Silk Electric'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곡이 되기도 했다.
1984년 그래미상 8개부문 석권
1984년 1월, 마이클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11회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시상식에서 7번이나 시상대에 오르내리는 기쁨을 누렸다. 최우수 팝 앨범, 최우수 소울 앨범, 최우수 팝 싱글, 최고 인기 남성 팝 보컬, 최우수 소울 남성 보컬리스트, 팝&소울 베스트 비디오 부문에서 수상한 것이다. 또 같은 주에 그래미상 14개 부문에 지명되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그러나 1월의 마지막 주말, 잭슨스와의 대대적인 순회공연의 촬영현장에서 마이클은 특수효과용의 발연등이 폭발하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타고 두부에 2~3도의 화상을 입는 불운을 겪었다. 하지만 부상 회복이 생각했던 것보다 빨라서 한달 후인 2월 28일에 행해진 그래미상 수상식에서는 기운찬 모습으로 8개 부문상을 수상했다.
앨범 'Thriller'로 전 세계에 선풍을 일으킨 마이클은 한동안 팬들을 궁금하게 하며 침묵을 지켰다.
최근 그는 마틴 스콜세지가 감독을 맡은 비디오 '능란한 범죄자'(Smooth Criminal)의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제작비도 'Thriller'의 1백만 달러를 넘는 것으로, '택시 드라이버'(Taxi Driver) 등의 화제작을 만든 뉴욕 출신의 감독 마틴이 마이클 잭슨의 모습을 어떻게 담아낼지 자못 궁금하다.
그러나 최근에 무엇보다 기쁜 소식은 마이클 잭슨의 솔로 싱글 'I Just Can't Stop Loving You'를 발매해 차트에 진입시킨 것이다. 이 싱글은 8월 15일자 빌보드 차트에 2주만에 16위에 오르는 쾌거를 올렸다.
그는 또 곧 솔로 앨범을 발매할 예정인데 타이틀은 'Bad'일 것이라 한다. 앨범 발매 후 그는 9월부터 월드 투어에 돌입할 예정인데 9월 12일부터는 일본 공연을 실시할 것이라 한다.
아뭏든 마이클의 그 풍부한 재능이 앞으로의 음악계에서 어떻게 자기변화를 시도할 것인지 여러 면에서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끝>
출처 - 음악세계 1987년 7월호,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