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은이 소개
금남(錦南) 최부(崔溥)의 자(字)는 연연(淵淵)이고, 본관은 탐진(耽津), 나주 태생이며 진사 택(澤)의 아들로 1454년(갑술)에 출생하였다. 24세 때 진사시에 세 번 째로 합격하였고, 29세(성종 13년, 1482)되던 해 봄, 성종이 성균관 문묘 참배 후 인재를 골라 쓸 때에 그는 정통책(正統策)으로서 답안을 올려 제삼(第三)에 등재하였다. 이후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있으면서 그 재주와 명망을 크게 떨쳐 경향간에 알려졌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전적(典籍)에 임하였다. 그는《동국통감》(東國通鑑) 편찬에 참여하였는데, 이 때 지은 백여 수가 넘는 동국통감론은 논설이 명백하여 그 당시 여론에서 그의 재지에 대한 기대가 컸었다. 1486년에는 중시(重試)에 아원(亞元)으로 합격하였다.
관직은 날로 올라 사헌부 감찰(監察)에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을 지내다, 얼마 후에 수찬이 되었으며, 1487년에는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 그 해 9월에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의 임무를 띠고 제주에 갔다. 그런데 다음해인 1488년 윤정월에 부친상 소식을 듣고 급히 고향 나주로 가다가 폭풍을 만나 중국 태주(台州)에 표착, 그해 7월에야 환국, 한양 청파역(靑坡驛)에 도착하였다. 그 때 임금의 명으로《표해록》을 찬술하여 올렸다. 그 후 연이어 모친상을 당하였다.
1492년에 상기(喪期)를 마친 후, 간관(諫官)인 지평(持平)에 제수되었다. 그런데 앞서 부친상 때 임금의 명에 응하여 표해록을 찬술한 것을 두고, 일부에서 트집을 잡고 논박하였다. 성종은 일부의 비난을 심각하게 여겨 선정전(宣政殿)에서 친히 최부에게 표류한 전말을 하문하였다. 최부의 자세한 진언을 끝까지 들은 성종은, “공은 발섭사지(跋涉死地)하면서도 국위선양을 유감없이 잘 하였다”하며 옷 한 벌을 하사하였다.
이 해에 서장관(書壯官)의 직책으로 중국 북경을 다녀왔으며, 1493년 봄에 세자시강원문학(世字侍講院文學)에 임하였고, 4월에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었다. 그런데 대관(臺官)들이 또다시 앞서 있었던 일을 트집을 잡자, 홍문관의 여러 학사들이 성종에 아뢰기를, “최부는 연상(連喪) 4년에 한 번도 집에 가지 않고 여막에서만 수상(守喪)한 사람으로 효행이 탁이(卓異)합니다. 동료들과 함께 봉사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진언하였다.
성종은 공경들과 논의한 후, 5월에 승문원 교리를 제수하였다. 1494년 5월에는 다시 홍문관 교리로 제수되었고, 8월에는 부응교(副應敎) 겸 예문관 응교로 승진되었다. 예문관 응교는 파격적인 등용으로 장차 대제학의 재목이 아니면 그런 영광을 얻을 수 없었다. 1495년 봄에 생원회시참고관(生員會試參考官)이 되었는데, 명참고관으로 알려졌다. 1496년 5월 호서지방에 큰 가뭄이 들었을 때, 연산(燕山)은 최부를 호서에 보내 중국에서 배워온 수차(水車)제조 방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9월에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고, 11월에 상례(相禮)에서 사간(司諫)으로 이동하였다. 1497년 2월에 최부는 연산의 실정을 극간(極諫)하는 상소문을 기초하였으며, 공경대신들을 비난하였다. 이에 다시 상례로 좌천되고 질정관(質正官)으로 북경에 다녀온 후, 그 해 가을에 예빈정(禮賓正)이 되었다. 좌천의 이유는 모든 권세가들로부터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최부는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로서 1498년(무오) 7월에 사화(史禍)가 일어났을 때, 다른 문인들과 함께 가택을 수색당하였다. 그런데 유독 최부만《점필재집》(佔畢齋集)을 소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것을 이유로 고문을 당하였으며, 장형(杖刑)을 받고, 단천(端川)으로 귀양갔다. 1504년 4월에 연산의 명으로 다시 옥에 투옥되고 사형에 처해졌다. 처형되던 전날 밤, 김전(金詮), 홍언필(洪言弼)등도 경죄(輕罪)로서 같은 옥에 구금되었는데, 참형을 앞두고서도 태연하게 술을 준비하여 그들을 전별해 주었다 한다. 그 때 최부의 나이 51세였다. 그 후 1506년에 통정대부 승정원도승지로 추증되었다. 젊었을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포부와 경세제민의 재능을 백분지 일도 펴보지 못하고 비운을 만나 끝내는 죄없이 죽고 말았으니, 그 당시 사림(士林)들은 몹시 애석해 마지않았다 한다.
(최부 표해록 http://www.goodsociety.co.kr/pyo/ 인터넷 홈페이지 참조)
▶ 이 책의 내용과 나의 감상
얼마 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주관하는 한국사 능력시험 1급 시험을 응시하였었다. 역사지식을 등급화 점수화 한다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응시를 하였는데 주관식 서술형 5점짜리 문제에 동북공정에 관련하여 최부의 표해록의 내용이 나왔다. 예전에도 표해록을 읽어보았지만 왠지 읽어보고 싶은 마음에 그리고 최부일행이 왜구의 무리로 오해를 받아 죽을 위기에 쳐했는데 마침 제가 쓰는 사학과 졸업논문 주제가 ‘왜구’에 관련했기 때문에 주말을 이용하여 표해록을 다시 한 번 읽어보았다.
이 책의 내용에는 저자가 당한 처절한 고난과 역경의 서술 속에서 포기하지 않는 최부의 선비정신을 보면서 나의 나약한 지구력과 인내심을 비교해보니 참 부끄러웠다. 지난번 윤증고택 답사에서 종손께서 양반을 전부 탐학한 무리로 일반화 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고 박경하 교수님께서도 조선시대 양반(선비)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명문가가 많았다는 데 최부 역시 극한 상황 속에도 조선 선비의 기개를 떨친 인물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간단한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500여 년 전, 제주도에 파견된 전라도 나주 출신의 한 선비가 아버지의 부음을 듣는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 배를 마련하고 노 젓는 사람을 비롯해 일행 42명과 함께 고향을 향해 나서지만, 바다에 나갔을 때 뜻하지 않은 큰 태풍을 만난다. 거기다가 도적 떼까지 만나고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를 넘기며 간신히 닿은 낯선 중국대륙 고향에서 들려온 슬픈 소식을 감당할 여력도 없이, 서슬 퍼런 유교 종법제 아래 망자를 위한 예를 갖출 새도 없이, 중국이란 낯선 땅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부 일행은 왜구로 오인 받아 심한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 구사일생으로 귀향길에 올랐다. 장장 6개월 동안 중국 강남 지방 태주(台州)에서 북경을 거쳐 마침내 압록강을 건너 함경도 의주에 도착하게 된다.
최부의 표해록(漂海錄)에는 다른 문헌에서는 찾을 수 없는 당시 중국 명나라의 모습을 담은 생생한 정보들이 보화처럼 담겨 있다. 유교(儒敎) 이상주의로 여기며 받들었던 중국의 명나라가 최부의 표해록(漂海錄)에서 그 실체가 하나하나 빠짐없이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옛 문헌 중에 세계에 내세울만한 것은 무엇일까. 왕오천축국전, 직지심체요절, 조선왕조실록…. 여러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많은 문헌학자들은 최부의 ‘표해록’을 꼽는다고 한다. 약 520년 전인 1488년 쓰여진 이 책은 1769년에 일본에서도 번역되었고 최근에는 영문이나 중국어로도 번역되어 세계적인 여행기록으로 정착되어. 세계 3대 여행기로 꼽히고 있다고 한다.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과 ‘하멜표류기’와 함께 근대 이전의 세계적 여행기로 거론되었다는 데 아직 그 홍보는 미흡한 것 같다. 그리고 우리자신이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알면서 정작 우리의 ‘표해록’에 대해서는 무지했던 것이 안타까웠고 그만큼 사학을 전공하는 학생이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좋은 문학작품을 소개·홍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해록은 최부 일행이 겪은 고난과 역경, 그리고 중국의 풍물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표류기의 백미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위에서도 잠깐 언급하였지만 눈여겨 읽어야 할 점은 5개월동안 난민들을 추스리며 한명의 낙오자 없이 귀국시킨 최부의 지도력이다. 풍랑에 언제 난파될지 모른다. 배 안에 남아 있는 음식이라곤 밀감 50개와 술 두동이뿐.... 참 절망적인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 때 최부는 ‘같이 죽고 같이 살자’며 일행을 진정시킨다. 노련한 선장을 떠올리겠지만, 당시 최부는 당시 34세의 청년 관리였을 뿐이다. 나라면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책을 덮으며 혼자 자문해 보았다...
한 배를 탔다면 비록 원수라 하더라도 한마음이 되어야 한다.
하물며 우리들은 모두 한 나라 백성으로 정이 육친과 같음에랴.
살게 되면 모두 같이 살 것이요, 죽게 되면 모두 한시에 함께 죽을 것이다.
이 엄혹한 상황에서 이 밀감과 술 한방울은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것을 잘 관리하여 허투루 쓰지 말고 사람들의 급한 갈증을 고르게 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