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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강 하나님의 일꾼
(출31:1~11) 찬송 ; 349, 350, 356장.
2011. 6. 15. 수요일밤예배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막을 지을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막 안에 비치할 기구들을 만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는 그것들을 만들 사람들을 임명하시고 그들이 그 맡은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지혜와 능력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동안 애굽에서 430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대부분 벽돌 만드는 단순한 일만을 해 왔습니다. 따라서 성막을 만드는 일, 성물을 만드는 일은 그들에게 있어서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바라볼 때 꼭 기억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으로서 혼자서도 모든 일을 다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시대마다 사람들을 선택하여 일꾼으로 세우시고 그들을 통해서 일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야기 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고전 3:9).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 동역자로서 일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꾼은 어떤 사람일까요?
1,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부르신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브사렐과 오홀리압을 지명하여 불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원해서 된 것도 아니고 모세에 의해 지명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꾼들을 선택하여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셨습니다. 모세를 호렙산 불꽃가운데서 부르셨습니다. 사도 바울을 다메섹 도상에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하나님의 일꾼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영광된 사역에 참여하여 일을 했던 것입니다. 사43:1절 말씀에 보면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누구도 자격이 완비되어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하나님의 일꾼이 된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부패하여 쓸모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시고 일꾼으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쓰시려고 부르실 때에 자격을 논하는 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여 부르신 자들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세상의 지식과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부르신 일꾼들에게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그 일을 감당케 하십니다. 오늘 본문 3~4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공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신, 즉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서 슥4:6절 말씀에 보면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나름대로 어떤 분야에 재능을 갖고 있을 수 있습니다. 본문의 브사렐과 오홀리압도 그 분야에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재능이 하나님의 일에 쓰여지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분야의 산 증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3년 반 동안이나 동거 동락하면서 말씀을 듣고 배우고 훈련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까지는 무기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오순절 성령의 강림의 역사를 체험하고 그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했을 때 위대한 역사를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자신의 경험이나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여 일하는 사람입니다. 충성하려고 하는 마음만 있다면 하나님께서 나머지는 채워 주십니다. 지혜가 필요하면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물질이 필요하면 하나님께서 물질을 주실 것입니다. 건강이 필요하면 건강을 주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딤전1:12절 말씀에서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브사렐을 목공으로 일하게 하시고 오홀리압은 의복을 만드는 봉제의 일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자신들이 마음대로 할 일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정해준 일에 충성하였습니다. 이것은 일꾼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에 오신 것을 “내 뜻을 행하기 위함이 아니라”(요6:38)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에 의해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을 하고서도 그 일이 축복이 되지 못합니다.
여러분! 달란트 비유 잘 아시지요?
이 달란트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재능대로 일을 맡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맡은 자들은 그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여 충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자들은 이 사실을 바로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의 배려에 감사하며 그길로 가서 열심히 일을 해서 주인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드렸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의 마음을 바로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재능도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 재능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다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값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축복의 연결고리가 됩니다. 내게 주신 은사와 직분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당하지 못하면 그것까지 빼앗기고 맙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은혜로 충만케 하시고, 함께 하셔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다 만들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남다른 달란트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왜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잘 감당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제100강 영원한 표징, 안식일 준수
(출31:12~18) 찬송 ; 56, 57, 471장.
2011. 6. 22. 수요일밤예배
본문 14~15절 말씀에 보면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언약 백성으로서의 표징으로 할례를 주셨다면 모세에게는 안식일을 언약백성의 표징으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을 선민의 표징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지금도 성지에 가면 안식일에 식사하기가 힘이 듭니다. 어느 구역은 바리케이트를 치고 차도 못 다니게 합니다. 차를 타고 가면 돌을 던집니다. “안식을 범하면 돌로 쳐 죽이라.”고 하는 안식일의 규례에 따라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정하신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입니다. 이 안식일에 대한 규례를 보면 규제한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라고 했습니다(출35:3). 짐을 지고 다니지 못하게 했습니다(렘17:21). “안식일에 일하면 죽일지니라.” 이것이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이 안식일 준수 문제는 신약에 와서 예수님에게도 도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병 고치는 일로 인하여 비난을 받으셨습니다. 손 마른 사람(막3:1~3), 고창병 든 사람(눅13:10~17), 38년 된 병자(요5:1~18)를 고쳐 주셨는데 이 모두가 안식에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비난하고 심지어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막3:6, 12:14).
초대교회도 이 안식일의 문제로 인하여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골2:16~17절 말씀에서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평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먹고 마시는 음식에 대한 규례,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에 대한 규례는 그림자인데 이 그림자가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일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도들도 구약성경을 받아들이시고 안식일이 포함된 십계명을 강조하여 교훈하셨습니다.
그러면 지금도 토요일 안식일을 지켜야 할까요? 아닙니다. 지금은 토요일 안식일이 아니라 일요일 주일을 지킵니다. 주일은 재창조의 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심으로 부패 타락한 창조세계를 회복시켜 재창조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은 주일을 안식의 날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일을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1. 주의 날이라는 바른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주일은 단지 휴일, 공일, 쉬는 날이 아닙니다. 주의 날, 주님의 날입니다. 본문 14절 말씀에 보면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을 성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일은 주님의 날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을 우리의 삶을 위해서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 7일을 거룩한 날로 구별하여 성일로 삼으셨습니다.
쉬는 방법에 따라 인간은 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선택입니다. 주일도 선택입니다. 주의 날로 지키느냐? 공일로 써버리느냐? 또 내 유익을 위해 사용하느냐? 이것은 가장 중요한 선택일는지 모릅니다. 주일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에 따라 우리의 신앙은 현저한 차이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볼테르는 기독교를 핍박하는 자들에게 “만일 당신이 기독교를 없애고 싶으면 주일을 폐지하시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주일을 지키지 못하면 성도가 아닙니다. 공산주의자 레닌은 기독교의 주일을 말살시키려는 의도로 8일 일하고 하루 쉬게 하였습니다. 그러면 기독교인이 예배하는 주일이 1년에 7~8번 밖에 없기 때문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보니 생산지수가 30%나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반대로 5일 일하고 하루 쉬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6일 일하고 하루 쉬게 하는 주일로 환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일에 대한 개념이 없이 산다면 온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온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얼마 가지 못해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고갈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의 날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드리시기 바랍니다. 주일성수, 이것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축복된 삶입니다.
2. 일하지 말라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여기 일하지 말라는 말씀은 단순히 쉬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일을 그만두고 죄에서 해방되어 영적 안식을 누릴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칼빈 선생은 안식일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 일에서 쉬어야 한다는 진리를 말하기 위해서 예표와 모형으로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주셨다”고 말하였습니다. 히13:21절 말씀에 보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일에는 육체적 노동과 세속적인 일들을 제쳐놓고 하나님께 예배드림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주일에 하나님 앞에 모여 예배드림이 세상에서 얻는 그 어떤 이익보다도 더 소중하고 값진 것임을 우리 성도들은 마음속에 새겨 두어야 합니다.
한 시골 소년이 꿈을 안고 뉴욕에 왔습니다. 배운 것이 인쇄 기술이라 인쇄소에 취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토요일 주인이 너무 많은 양의 일을 받아서 밤늦게까지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일이 끝나지 않자 주인은 내일도 좀 일을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자 소년은 “제가 오늘 밤 12시까지는 열심히 일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내일은 주일이기 때문에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주인은 그러면 일을 그만 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소년은 “주일도 일해야 한다면 그만 두겠다”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주인은 주일을 지키기 위해 일자리도 포기하겠다는 소년의 신앙심에 탄복하여 그 소년을 해고시키지 않고 계속해서 일을 하게 했습니다.
여러분! 이 소년이 누군 줄 아십니까? 후일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 Harper Brothers 출판사의 사장인 John Harper입니다. 주일은 하나님께 예배하며, 주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의 일을 하는 날입니다. 단순히 일하지 않는 날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하는 날입니다.
3. 주일은 즐거운 날이어야 합니다.
본문 17절 말씀에 보면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은 평안하고 즐거운 날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주일은 축제일이었습니다. 죄인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주님이 죽으셨지만 그 주님이 다시 살아나심으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주님을 만나러 가는 날이 주일이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가 기쁨으로 나아갔습니다. 즐거움으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뻐하였습니다. 찬송을 부르며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들은 매 주일을 부활 주일처럼 지냈습니다. 축제의 분위기였습니다.
여러분! 교회에 나올 때마다 이 기쁨이 여러분에게도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이 감격이 여러분에게도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구약 백성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이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는 주일입니다. 주일은 하나님과 인간이 맺은 언약의 표징입니다. 유대인들은 생명과 바꿀 정도로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감옥에 가고, 순교할 각오를 가지고 이 날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주일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날로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일을 잘 지키는 자에게 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시92:12~14절 말씀을 찾아 읽겠습니다.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발육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복을 받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러면 주일 성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복을 받아 자손대대로 축복된 삶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제101강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출32:1~6) 찬송 ; 342, 357, 395장.
2011. 6. 29. 수요일밤예배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을 가는 과정에 있어서 백성들은 광야에 있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있는 장면이 출25장~31장까지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아론에게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우리를 인도한 모세는 어찌되었는지 알지 모르겠다고 아우성을 치고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에게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뛰어 노는 모습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우상을 만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을 믿을 때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대리자는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삶을 잃어버리면 그것을 되찾으려고 하는 시도를 하게 되는데 그것이 우상 숭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어라고 말합니까? “우리를 위하여 신을 만들라”(1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신을 만들라” 이 얼마나 교만한 마음입니까? 시대가 바뀌고 환경이 변한다 할지라도 인간의 부패한 이러한 심성은 변함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조심하지 않으면 이러한 죄에 빠질 위험이 큽니다. 물론 우리가 이 시대에도 금송아지를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유혹의 본질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것을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우상 숭배에 대한 문제는 구약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사도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고전10:7절 말씀에 보면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요일5:21절 말씀에도 보면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에 경계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쉽게 우상 숭배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 오래 참는 삶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4장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백성들을 떠나가면서 모세는 이스라엘 장로들을 불러 이렇게 부탁합니다. 출24:14절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기서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기까지 기다리라 아론과 훌이 너희와 함께하리니 무릇 일이 있는 자는 그들에게로 나아갈지니라 하고” 아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시내산에 올려 보내고 시내산에서 되어지는 일들을 목격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6일 동안 산을 가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출24:15~17). 그런데도 그들은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우상을 만들기 시작한 시점이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추측하기는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아가지고 이제 막 내려오려고 하는 시점이었을 것이라 생각되어 집니다. 조금만 인내했더라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순간을 참지를 못한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지나온 광야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했었더라고 하면 조금은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금까지 체험했던 하나님의 역사가 얼마나 많았고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까? 유월절의 기적, 홍해 도하사건,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인도, 반석을 통해서 얻은 생수, 그들의 양식으로 지금도 먹고 있는 만나와 메추리기 등 수많은 기적의 역사를 통해서 살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조금의 기간을 참지 못하고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은혜를 받기는 어려워도 그 받은 은혜를 소멸해 버리기는 한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받은 은혜를 소멸하지 않도록 꼭 붙잡아야 합니다. 인내의 삶이 우리 생활 속에 정착되기 위해서는 모든 삶을 내 시간에 맞추지 말고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어 사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약5:10~11절 말씀에 보면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기다리지 못해서 패가망신했던 사울왕의 말로를 여러분 아시지요? 성경학자인 메튜헨리는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백성들이 단 하루만 더 참고 기다렸으면 모세가 돌아와서 모든 것을 하였을텐데......”라고 주석하였습니다. 기다리는 삶이되시기 바랍니다.
2. 보이는 것을 우선시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사람이 만든 금송아지를 숭배하였습니다. 금송아지는 언제나 볼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언제나 보이는 것에 더 집착합니다. 감각을 충족시켜 주는 대상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형상화 하고 더 나아가서는 형상화된 신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제 2계명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것같이 믿는 것입니다(히11:1). 신실한 성도는 주 모습 내 눈에 안보여도, 그 음성이 내게 안 들려도, 영혼이 날마다 주님을 만나 신령한 말씀을 들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리며 삽니다. 이 은혜를 여러분이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2절 말씀에 보면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 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금송아지, 즉 우상을 만들자고 아우성치는 백성들에게 아론이 제안하는, 어쩌면은 타협안으로 내놓은 말씀입니다.
금으로 신상을 만든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론이 의도적으로 이러한 제안을 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아론이 앞장서서 우상을 만들자고 떠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론은 백성들의 요구사항을 그들 스스로가 포기하게 하려고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 고리를 빼어 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모두가 포기하리라 생각했는데 예상 밖에 모든 백성이 서로 경쟁이나 하듯이 앞을 다투어 금고리를 바친 것입니다(3절). 그래서 큼직한 송아지를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 헛된 것에 열심이고 헌신적인 이들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는 감사하다는 말 한 마디도 아꼈던 그들이 우상을 만드는 일에 앞을 다투어 자기들의 소중한 금 고리들을 바쳤습니다.
이러한 일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선한 일에 바쳐지는 우리의 시간과 물질, 헌신과 충성은 어느 정도입니까? 또 반면 세상적인 것에 육신적인 것에 바쳐지는 시간과 물질, 그리고 헌신과 충성의 정도가 어느 정도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아까와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역으로 남겨두신 십일조까지 떼어 먹고 도적질합니다.
아론은 처음부터 백성들의 요구사항을 거절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설프게 타협안을 내 놓았다가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우상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예”와 “아니요”를 분명하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믿음을 바로 세워 나갈 수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우상을 만든 사건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치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모세가 산에서 더디 온 것보다 그들의 마음속에 애굽으로 돌아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죽지 못하면 새사람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뒤엣것은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하여 나아간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의 푯대는 하나님의 나라요 우리 주님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목표만을 위하여 날마다 전진하는 신앙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제102강 하나님의 진노와 모세의 중보기도
(출32:7~14) 찬송 ; 319, 323, 331장.
2011. 7. 6. 수요일밤예배
지난 시간에 살핀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이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한 하나님이라고, 자기들을 앞으로 인도해 갈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경배하고 먹고 마시며 뛰놀았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희희낙락하던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는 드디어 모든 백성을 죽이고자 하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 모세의 뜨거운 중보기도가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렸고 내리시고자 하셨던 화를 거두시게 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1. 먼저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본문 9~10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아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패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7절). 하나님의 말씀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다고 말씀하십니다(8절). 그리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그것이 자기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자기의 신이라고 한다고 말씀하십니다(8절). 그러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 “목이 곧은 백성이라”(9절)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의 모습은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의 전형적인 모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우상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으로 섬깁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었고 오늘날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진노하십니다. 한번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진멸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에 빠진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채찍을 드시면 그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채찍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긍휼을 베풀어주시지 않는 한 소망은 그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최대의 위시상황이 온 것입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민족적인 대위기 상황을 맞은 모세의 모습을 보세요. 모세가 어떻게 합니까? 그는 민족적 최대의 위기상황을 맞이하여 그 문제를 안고 하나님 앞에 기도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의 삶입니다.
2. 하나님의 뜻을 감지한 모세는 곧바로 기도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7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으로 취급할 수 없다는 결연의 의미가 담겨있는 말씀입니다. 이제 더 이상 그들을 볼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이 어떤 민족입니까? 이들을 구해내기 위해서 애굽 왕 바로와 얼마나 밀고 당기는 싸움을 했습니까?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어렵게 구해내온 모세로서는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어떠했을까요? 참으로 가슴이 아팠을 것입니다. 죽어가는 자식을 둔 부모의 심정과 같이 절망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낙담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하여 괘씸하게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불쌍한 백성들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의 자리를 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3.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모세.
본문 11~13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아멘.
이 말씀은 모세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중보기도의 내용입니다. 정말로 간절한 기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세의 이 기도를 보면서 그의 기도에 특징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가 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응답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 계획을 상기시키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열거해가며 생명을 내걸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백성은 하나님께서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애굽 땅에서 구원해 내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애굽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진멸하려고 데려갔다고 하면 어찌하시렵니까?”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이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에게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시겠다고 언약하신 백성이 아닙니까?”라고 합니다.
“하나님! 이 백성은 하나님께서 많은 땅을 주어 기업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백성이 아닙니까?”라고 합니다. 모세의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모세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이처럼 열심히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진정으로 기도하여 그 기도의 힘으로 그 사람에게 긍휼이 베풀어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보다 더 불행하고 죄가 클수록 더욱더 그를 위해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는 방탕한 그의 아들 어거스틴을 기독교 역사상 위대한 인물 인 어거스틴으로 만들어 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의 대가로 하나님 나라의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달라고 까지 하면서 기도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도고의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러한 기도의 사역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세의 이러한 간절한 기도는 결국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본문 14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할렐루야. 아멘. 모세의 중보기도는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심판에서 건져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이러한 기도는 여러분 주변의 많은 영혼들을 살리는 소중한 생명줄이 될 수 있습니다. 이 귀한 사역에 헌신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죄의 대가로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말씀을 전해 듣고 견딜 수 없었습니다. 눈앞에 다가온 백성들의 비참한 종말을 바라보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셨던 하나님의 언약을 제시하며 그들을 긍휼히 여겨 달라고 말씀을 합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한 중보의 기도에 들어갑니다. 그의 기도는 생명을 건 기도였습니다. 아주 절박한 기도였습니다. 그의 기도는 결국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리시고자 하셨던 심판을 거두시고 구원을 베푸시게 했습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이 귀한 사역이 위임되어 있습니다. 이 귀한 사역, 이 귀l한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사명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멘.
제103강 은혜와 축복을 저버린 이스라엘
(출32:15~24) 찬송 ; 193, 187, 206장.
2011. 7. 13. 수요일밤예배
우리가 지난번에 살폈던 말씀은 모세의 중보기도의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려 하시자 모세는 하나님 앞에 백성들을 위해서 간절한 기도를 드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백성들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제 모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아가지고 하산 하는 중에 있었습니다. 내려오는 가운데 백성들의 패역한 모습을 보고 분노하여 십계명 돌판을 던져 깨뜨리고 금송아지를 가루로 만들어 백성들에게 마시게 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우상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죄악 된 마음까지 제거하고자 하는 모세의 마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아론을 책망합니다. 본문 21절 말씀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 백성이 네게 어떻게 하였기에 네가 그들로 중죄에 빠지게 하였느뇨?”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론은 핑계를 대고 변명을 합니다. 22~24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아론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노라 하기에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어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사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우상을 섬기는 죄악에 빠지므로 스스로 은혜와 축복을 저주의 삶으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1. 이스라엘은 특별한 은혜를 받아 축복 속에 사는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해서 말씀의 두 돌판을 주셨습니다. 그들의 사는 모습을 보아서는 받을 수 없는 은혜입니다. 본문 출32:1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위인들이 아닌데도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용서해 주시고 화를 내리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두 돌판에 새긴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 속에 인간이 받아 누릴 축복의 비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풍요롭게 사는 비결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효능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19:7~10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시119편에서는 하나님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법에 행할 때 부끄럽지 않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위로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천천 금은 보다 더 승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얼마나 복 받은 사람들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 큰 축복으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 속에서 은혜의 삶을 살고 축복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모세의 분노를 일으킨 이스라엘.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산이 높고 구름에 둘러싸고 있어서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없었지만 아래에서 떠드는 소리가 산 위까지 들려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승전가도 아니고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도 아닙니다. 춤추고 노래하는 소리였습니다.
산에서 내려와 진중에 가까이 와서 보니 장관입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제물을 드리고 절을 하고 춤추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대노하여 손에 든 두 돌판을 아래로 던져 깨뜨렸습니다. 여기 “대노하였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을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모세의 분노는 자신의 이익에 관한 분노가 아닙니다. 자기감정에 의한 분노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 편에서 분노한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가 왜 이처럼 분노했을까요? 모세는 얼마 전에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쓸어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모세가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필사의 중보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곧 바로 이러한 죄악에 빠진 그들을 보면서 불같이 끓어오르는 그의 마음을 억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법을 따라야 할 그 백성들이 그 법을 따르지 아니하는 형편에서 더 이상 법은 필요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모세는 금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살라 부수어서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들로 하여금 마시게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상의 무력함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를 빻아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들이 이 우상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무엇이 우상입니까?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우상입니다. 그 자체로 아무런 해를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를 사로잡아서 주의 일과 주님께 예배하는 일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은 우상입니다. 이러한 삶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3. 아론이 보여준 인간의 패역한 모습.
모세는 아론에게 어떻게 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이런 중한 죄에 빠지게 했느냐고 추궁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론이 무어라고 대답합니까? 본문 22~24절 말씀을 보십시다. “아론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노라 하기에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어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패한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론은 마땅히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처럼 하와처럼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죄를 전가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성군이라 일컫는 다윗도 간음죄와 살인죄를 범하였습니다. 사람 앞에서도 하나님 앞에서도 깊이 숨겨 놓았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모르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눈을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죄를 추궁하셨습니다. 그 때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오늘 아론처럼 책임회피에 급급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자백하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고서는 해결 받을 길이 없습니다.
인생길에서 패배하는 사람들을 자세히 관찰하여 보면 하나같이 변명병에 걸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형편에 있든지 간에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임을 깨닫고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살다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감추고 숨기려고 하지 말고 솔직담백하게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여러분, 가장 불행한 사람, 가장 불행할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회개를 자꾸 뒤로 미루는 사람,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잠23:17~18절 말씀에 보면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성공할 때나 실패할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 때나, 세월이 지나고 변할지라도 하나님만 경외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제104강 하나님의 편에 있는 자
(출32:25~29) 찬송 ; 235, 236, 507장.
2011. 7. 20. 수요일밤예배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참 많습니다.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려고 해도 무엇을 먹을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대학을 가려고 해도 무슨 학과를 선택해야 할지, 또는 어느 대학을 가야할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신앙에는 중립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든지 우상이든지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의 기도의 대결에서 둘러 서 있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택하든지 바알을 택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여호수아도 마지막 고별 설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3:15~16)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앞에 복과 저주를 두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신11:26). 그리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노라”(신30:15)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신앙도 선택입니다. 순간순간의 삶의 길에서 한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라 우리는 성공과 실패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생명과 멸망의 열매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26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호와 편에 서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자기를 포기하고 부인해야 합니다.
본문 25절 말씀에 보면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방자하다”는 말씀은 “제멋대로 하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자기중심대로 사는 것이 방자하게 사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편에 서기 위해서는 이러한 삶의 철학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16:24절 말씀에서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는 것!” 이 신앙의 결단은 값싼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포기해야 하는 값비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신앙의 삶을 그리스도를 얻고 그 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 같이 포기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빌3:8). 모세는 하나님 편에 서기 위하여 애굽의 모든 보화와 심지어 왕이 될 수 있는 자리까지 포기하였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기 위해서는 이러한 용단이 있어야 합니다.
2. 성령의 검을 가져야 합니다.
모세는 진문에 서서 “누구든지 여호와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레위 자손이 다 모여 모세 앞으로 나왔습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각각 허리에 칼을 차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편에 서기 위하여 모세 앞에 나온 레위 사람들에게 칼을 차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도 칼을 차야 합니다. 그러면 무슨 칼을 차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칼을 휘둘러 말고의 귀를 잘라버린 베드로에게 칼을 접어두라고 말씀하시면서 “칼을 사용하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씀하는 칼은 사람을 죽이기 위한 살상 무기로서의 칼이 아니라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구비해야 할 영적인 검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 영적인 검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엡6:17절 말씀에서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칼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생명이 다하는 그 날까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힘과 능력이 장난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적인 힘으로서는 이겨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지 않고서는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자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져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3. 무조건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 편에 선 자들을 향하여서 그 형제를, 그 친구를, 그 이웃을 도륙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살육”이란 말은 “살해”라는 말보다 더 강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명령 속에는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강한 의지가 담겨져 있는 명령임을 알 수 있습니다. 3,000명가량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심판이 너무 가혹하지 않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이토록 가혹한 형벌을 내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칼빈은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보다 하나님의 거룩한 예배를 욕되게 하는 것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하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결코 과격한 처사일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영적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편에 선 자, 구별된 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자는 사사로운 인정을 끊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분명하게 “예”나 “아니요”를 하지 못하는 것도 이 인정 때문일 때가 많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순종 여부를 시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순종의 여부를 시험하기 위해서 명령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본문 29절 말씀에 보면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명령에 따라 레위인들이 순종했을 때 여호와께 헌신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게 된 것, 이것이 축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느 편에 서겠습니까? 지금이 바로 결정할 때입니다. 아멘.
제105강 모세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
(출32:30~35) 찬송 ; 483, 484, 480장.
2011. 7. 27. 수요일밤예배.
하나님께서는 죄를 그냥 넘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죄에 대하여 보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지난 수요일 밤예배 때에 살폈던 것처럼 죄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3,000명이나 죽임을 당하는 슬픈 일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회중은 적막하고 슬픔과 비애로 가득 찼습니다. 이 모습을 바라보는 모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오늘 본문 30절 말씀을 보면 모세의 심정을 알 수 있습니다. 30절 말씀을 다시 읽어볼까요?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의 죄를 속할까 하노라 하고”. 모세는 백성들을 위해서 다시 여호와 하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오늘은 모세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에 대하여 살펴봄으로써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1. 죄는 우리를 슬픔의 도가니로 몰아넣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합니다. 본문 31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사람들을 슬픔에 젖게 합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은 통한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눈물은 영원히 마를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의 자리로 들어가는 자는 긍휼과 죄사함의 은총을 입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5:4절 말씀에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가 왜 복이 있습니까? 용서를 받고 축복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자기 죄 때문에 애통해야 하고 다른 사람의 죄를 슬프게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의 도덕적 혼란과 불행을 보면서 즐기는 자들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애통하고 슬퍼해야 합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는 죄를 보고도 슬퍼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도 동족이 3,000명이나 죽었는데도 슬퍼하고 애통하는 사람은 모세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현대인들은 죄에 대해서 감각이 희미해져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영향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죄에 대하여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 못하고 둔감할 때가 많습니다.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잘 들을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도 자신의 죄로 인정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기에 바쁩니다. 아담의 피가 모든 사람들의 혈관에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하여 슬퍼하는 사람이 소망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겠지만 죄를 범했으면 그 죄에 대해서 슬퍼하고 애통해하며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에 대해서 아파하고 슬퍼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이 주신 은혜대로 살지 못한 것, 주님의 것을 내 것이라 내 마음대로 써 버린 것, 선을 알고도 행치 못한 것,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지 못한 것에 대해 회개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2. 자기 생명을 담보로 백성을 위해서 기도하는 모세.
여러분! 모세의 기도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본문 32절 말씀에 보면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합의하시면”이라고 했는데 이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 의미는 “원하시면”이라는 말씀입니다. 죄를 사하고 안하고는 우리의 뜻에 따라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려는 마음이 있어야만 가능하고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의 확신과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사1:18절 말씀에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자기 생명을 하나님께 내어 놓으면서 백성들을 사해 주시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백성의 모든 죄를 자신이 지고 죽더라도 백성을 살리고 싶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인도자로 부름받고 세움 받은 모세가 만약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광야에서 다 죽이신다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홀홀단신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까요? 옛날 모르드게는 궁중에 규례에 의해 왕 앞에 나아가기를 주저하는 에스더에게 “이 민족이 다 죽어도 너만 살기를 원하느냐?”는 비두로 이야기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하는 의식이 필요합니다. 공동체 의식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꿈꾸는 것이 무엇이며, 그 공동체적인 목표에 내가 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를 음미해 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롬9:1~3절에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동족에 대한 사랑과 그들의 영혼 구원에 대하여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나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생각,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 나만 생각하는 이기심을 버리고 남의 아픔을 돌아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자, 그러면 모세의 기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3. 이스라엘을 용서하시는 하나님.
본문 34절 말씀에 보면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습니까? 용서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용서 못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본문을 잘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번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어디로 인도하라고요? “내가 네게 말한 곳” 그러면 그곳이 어디입니까? 예 가나안 땅입니다. 그러면 용서하신 것이에요? 안하신 것이에요? 예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중보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기도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모세의 중보기도는 이스라엘을 죽음의 수렁에서 건져 올렸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까? 믿지 않는 가족들을 두고도 기도하지 아니하고 무사태평하게 지내는 사람들은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한 하나님께서 단서를 하나 붙이셨습니다. 한 번 더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죄의 형벌 가운데 집행유예라는 것이 있습니다. 집행유예 기간 동안에 더 이상 죄를 범하지 않고 지나가면 모든 죄가 소멸되지만 만약 집행유예 기간에 죄를 범하면 이전의 죄까지 합쳐서 가중처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집행유예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간 동안에 또 다시 죄악을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광야를 완전히 통과하지 못하고 여호수아와 갈렙만을 남기고는 출애굽 1세대들이 모두다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내가 하나님 앞에 범죄했는데도 하나님께서 처벌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기만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 드리지 않았는데도 아무 일 없다고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보응할 날에는 보응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보응할 날이 꼭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해방된 시대입니다. 자유분방한 시대입니다. 누구에게도 간섭받기를 싫어하는 시대입니다. 자기 좋은 대로 생각하고 행해 버리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원칙에서조차 해방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도전을 받습니까? 아니면 아무런 반응도 없습니까? 죄는 분명 우리를 슬픔의 도가니로 몰아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죄를 지었다할지라도 모든 소망이 끊어진 것은 아닙니다. 기도라는 열쇠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모세의 중보기도, 이 기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소중한 영적 무기를 냉동실에만 가두어 놓고 계실 겁니까? 그 무기를 언제 끌어내실 것입니까?
모세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죄악의 틈이 난 그 사이에 끼어서 백성의 죄를 홀로 지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우리도 모세처럼 기도의 두 손을 모으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다. 아멘.
제106강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
(출33:1~6) 찬송 ; 182, 184, 193장.
2011. 8. 3. 수요일밤예배
우리는 출애굽기 32장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금송아지 숭배사건을 보았습니다. 이 사건은 단지 하나의 범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에 맺었던 언약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린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물론 레위인들에 의해서 민족 청결 작업이 진행되기는 했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그 범죄를 단순하게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으로 갈 것을 명령하시지만 그들과 동행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1. 하나님의 결별 선언.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는 다시금 머리에 떠올리기도 싫은 비참한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동족의 손에 의해서 동족이 3,000명이나 살해되는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세상에 다양한 죄들이 있습니다만 하나님께서 가장 가증하게 여기시고 분노하시는 죄악은 바로 우상 숭배입니다. 동족의 손에 의해서 3,000명이나 되는 사람이 죽임을 당하게 하신 하나님의 심판을 보면서 우리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를 얼마나 미워하시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면 우상숭배가 무엇입니까? 단지 무슨 형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만이 우상숭배입니까? 이것은 극히 제한적인 의미의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보다 더 사랑하고, 위하고, 관심을 갖고, 친근히 하는 것을 모두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요소들은 없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보다 더 관심을 가지고 가까이 하고 사랑하는 것은 없습니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3,000명이 죽임을 당한 것으로 만족하시지 않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결별을 선언하십니다. 본문 3절 말씀에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동행하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동행하심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얼마나 큰 위안입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고아와 같이 그의 제자들을 이 땅에 남겨 놓고 승천하시면서 “보라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고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파선 직전의 노예 선(船)에서 “내가 함께하리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담대하게 로마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현실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그것으로 만족하였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이 축복이요 모든 문제의 해결의 비결입니다. 그런데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있을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인데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기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총체적 위기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결별선언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교만한 백성과는 함께 교제하시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교만의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아 버립니다. 은혜의 젖 줄기를 응고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가 풍성하지만 그것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이 곧은 백성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2. 단장품을 제하라.
하나님으로부터 결별선언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황송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아니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단장품을 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단장품을 제하라고 하십니까? 그 단장품이 죄악의 뿌리였기 때문입니다.
이수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 때 그 단장품을 사용했습니다(출32:2~3). 즉 그들은 그들의 부녀자들이 몸에 치장하고 있던 금 고리를 빼내어 금송아지를 만들었고 그 만들어진 우상을 섬겼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단장품이 그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단장품을 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심방하다 보면 어떤 가정은 양주병으로 진열장을 가득 채워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할 일이 아닙니다.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죄의 모습,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 신앙생활에 방해가 되는 것, 믿는 사람으로 덕이 되지 않는 것, 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이 말씀을 오늘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알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1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회개하고 단장품을 제해버리니 그제야 하나님께서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와 동행하시게 하는 일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이 얻은 교훈이 무엇입니까?
첫째,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죄 있는 인간과는 결코 교제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범죄한 영혼에게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자신의 내면과 외면에서의 죄를 청산하고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징계의 궁극적인 목적은 죄인을 진멸시키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회개시켜 당신의 품에 두시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버려야 단장품은 없습니까? 그것을 버려야만 축복이 여러분에게 다가옴을 믿고 축복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제107강 모세와 회막
(출33:7~11) 찬송 ; 245, 246, 248장.
2011. 8. 10. 수요일밤예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이 어디 계신다고 믿습니까?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를 말하기 전에 하나님의 존재부터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하나님이 계신 곳을 말하고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는 것을 증언한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야 눈만 들어도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섭리의 손길을 볼 수 있지만 어디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그럴 수 있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믿음은 모든 사람들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저와 여러분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그렇게 믿으십니까?
우리가 이 시간 이렇게 하나님께 모여 예배드리는 것도 큰 축복입니다. 예배 시간에 예배의 처소를 찾는 것 여러분 예사롭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이 하나님이라고 믿고 애굽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었던 모세는 진에서 떠나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장소 회막을 만들고 그곳에서 기도하며 예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사람들은 예배를 통해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복주시려고 하는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과는 이러한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회막에 대해서 살펴봄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그러면 회막은 어떠한 곳일까요?
오늘 본문 7절 말씀에 보면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회막은 성막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이미 출25장~31장까지에서 살핀 바 있는 성막은 아직 세우지 못한 때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난 수요일밤에 우리가 살폈던 것처럼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음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시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진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회막을 만들었습니다. 이곳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하는 처소가 된 것입니다.
히13:13절 말씀에 보면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곳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아갈 곳이고, 하나님을 만날 곳이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는 곳입니다.
2. 그런데 그곳에 들어가지 않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8절 말씀에 보면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기 위해 회막으로 나아가는데 많은 백성들이 그것을 구경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회막으로 갈 때에 여호와를 앙망하는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모세를 따라 회막으로 갔습니다. 믿음이 없는 백성들도 이 광경을 구경하다가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영적 교제를 나누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성도의 삶은 계시적인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삶이 불신자들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주위의 사람들 가운데 “당신을 보니 나도 예수 믿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신앙생활에 기쁨이 있고, 예배생활에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주위 사람들을 영적으로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에 소중함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영적 흡인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서 “아, 지금 예배 시간인데 저 사람 왜 교회 안 갔지?”하는 의구심을 불러 일으켜 신앙의 무용론을 정당화시키는 계기도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3. 회막에 임재하셔서 모세와 교제하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 9~11절 말씀을 우리 다 같이 읽겠습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모든 백성이 회막문에 구름 기둥이 섰음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문에 서서 경배하며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아멘.
여기 보면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문에 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회막문에 구름 기둥이 섰음을 보고 모든 백성들이 다 일어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름 기둥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습니까? 구름기둥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 기둥의 인도에 따라 그들의 행군이 멈추기도 하고 나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구름 기둥만 따라가면 가나안 땅에 이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모세가 지은 회막에 구름기둥이 서 있는 것은 지금 그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일제히 일어선 것입니다.
그런데 회막문에서는 또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기 대면이라고 하는 말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face to face입니다. 즉 얼굴과 얼굴을 맞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경배하러 나오는 사람들을 대면하여 만나 주십니다. 그러면 얼굴만 맞대고 있다가 그냥 헤어집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필요를 물으시고 우리의 요청에 따라 풍족하게 채워 주십니다.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예배를 통해서 어떻게 교제하고 헤어지십니까?
보스톤 교외에 “슬든 코넬”이라는 신학교가 있습니다. 이 신학교는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사연이 있습니다. 시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럿셀 코넬 지휘관이 전쟁에서 자신의 지휘도를 버리고 후퇴하였습니다. 이는 지휘관으로서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코넬은 짐이라는 소년을 시켜서 그 칼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이 소년은 목숨을 걸고 적진 속에 들어가 칼을 가져왔으나 총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장군 앞에 칼을 바치고 죽어가는 소년에게 장군이 물었습니다. “너는 죽음이 두렵지 않니?” 그러자 소년이 대답합니다. “예, 저는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 부활하신 예수님,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를 천국으로 영접하시니까요”라고. 그러면서 그는 얼굴에 환한 미고를 지었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무신론자 코넬은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오 주여! 이 아이의 하나님이여! 이 아이 대신 제가 하나님을 위하여 몸을 바치겠습니다.”라고 고백의 기도를 드리고 그 후 신학을 공부하고 자기 재산을 다 들여 코넬신학교와 템플 대학을 세웠습니다.
한 사람의 신앙의 확신이 이렇게 새 생명을 주고 큰 역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모세 한 사람의 신앙은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게 했습니다. 우리도 모세처럼 회막으로 나아갑시다. 회막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많은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믿게 하십시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회막은 모세가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소, 경배하는 장소였습니다.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교회라고 해도 지나친 해석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을 기뻐 찾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전에 엎드려 하나님과 깊은 교제의 시간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모세의 후계자가 될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며 갈망하는 성도, 그는 하나님의 큰 복을 받아 누릴 성도입니다. 아멘.
제108강 임마누엘과 성도의 안식
(출33:12~16) 찬송 ; 456, 457, 494장.
2011. 8. 17. 수요일밤예배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임마누엘의 축복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회막을 지어 놓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본문 12~13절 말씀에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한 마디로 임마누엘의 은혜를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가 임마누엘의 은혜를 간구하고 있을까요? 그는 지나온 광야생활 동안 하나님 없이 가는 길은 방황의 길이고, 두려움의 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홍해를 건넌 일, 여러 전쟁에서 승리한 일, 반석에서 솟아나는 물을 마신 일,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에 가능한 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임마누엘의 은혜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의 기도가 어떻게 나타납니까?
1. 임마누엘의 약속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금송아지 사건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결별을 선언하시면서 대신 사자를 보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동행하여 주실 것을 구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본문 14절 말씀을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아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변경시킬 수 있는 능력입니다. 심판을 축복으로 바꾸게도 합니다. 이 축복의 열쇠를 냉동실에 얼려만 두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내가 친히 가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이 무슨 약속입니까? 임마누엘의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28:20절 말씀에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사41:10절 말씀에서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사야 43장 말씀에서는 물 가운데서도, 불 가운데서도 함께 하사 지켜 보호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임마누엘의 은혜를 믿고 사는 성도들은 어떤 형편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성도의 본분을 다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다윗입니다. 그는 시23:4절 말씀에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곁에 계신 주님! 아니 내 안에 영원히 내주해 계시는 주님, 그 주님의 은혜를 의식하며 사십니까? 내 곁에 누가 있느냐고 하는 것 굉장히 중요합니다. 내 안에 누가 있느냐고 하는 것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고 하는 것은 기도를 통해서만이 알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2. 임마누엘의 유익.
그러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안식의 은혜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내가 친히 가리라고 말씀하시면서 너로 편케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14절).
낮의 뜨거운 햇볕과 밤의 찬 공기를 무엇이 막아 주었습니까? 구름기둥과 불기둥입니다. 그러면 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임재를 구름기둥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더위와 추위의 문제도 해결되었습니다.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양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그들은 광야 40년 동안 식량 문제로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축복은 안식의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이 유리방황하는 양들과 같은 인간들을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움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말씀하셨습니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주님 안에서 내가 안식을 얻기까지는 어디에서도 안식을 얻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는 이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도의 안식은 단순히 쉬는 것이 아닙니다. 즐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일은 즐거운 날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 가운데는 평일보다도 더 수고하는 성도님들이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불평 없이 감사함으로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와 함께 하는 일이요,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하여 20년 동안이나 고용살이를 해야 했지만 라헬을 연애함으로 그 20년을 수일 같이 보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의 일을 하면서도 짜증내고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무감에서 하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봉사는 어떤 편에 서 있습니까?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우리의 안식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친히 인도하셔서 영원한 안식처인 천국으로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소망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바르게 예배드리면서 살아가겠노라고 하나님과 약속하십시다.
다음에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겠노라고 약속하십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영광만 위하여 살겠노라고 약속하십시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축복으로 여러분에게 내려 주실 것입니다. 계22:12절 말씀에 보면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축복된 삶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제109강 모세의 소원
(출33:17~23) 찬송 ; 415, 375, 86장.
2011. 8. 24. 수요일밤예배
전도서 기자는 사람이 비록 천년의 갑절을 산다고 할지라도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말씀했습니다(전6:6).
즐거움이 없는 삶은 고통입니다. 다윗은 시23:1절 말씀에서 고백하기를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것은 소원이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다윗의 이 고백은 여호와 한 분, 그분 때문에 다른 것은 소원이 없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 한 분이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다른 것은 소원이 없습니다. 이대로 죽어도 좋습니다.”라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면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오늘은 모세의 소원을 통해서 우리도 모세와 같이 신령한 소원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모세의ㅐ 소원은 무엇이었을까요?
1.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였습니다.
본문 18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아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기도할 때마다 응답하여 주셨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모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마다 자기 문제로 기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모세의 소원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칼빈은 해석하기를 “모세는 마땅한 한계를 벗어나 필요 이상의 것을 요청하였다.”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우리 속담에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씀처럼 사람들은 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도 보아야 믿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앙은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확신시켜서 우리의 의지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게 합니다. 바로 이 믿음 때문에 잠간 있다가 사라지는 죄악의 즐거움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히11:25).
믿음의 성도들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3:10~11절 말씀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나머지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6:3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시37:4).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소원이 오늘 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듣는 여러분에게도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피조물들처럼 어떤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요4:24). 그러므로 그 하나님을 온전히 보려고 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자연의 표면 위에 반사된 햇빛을 볼 수는 있으나 태양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주의 영광을 내개 보이소서!”라고 소원을 아뢰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20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긍휼하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은혜”와 “긍휼”은 동의어가 아닙니다. “은혜”라는 말은 “호의를 주다”라는 뜻으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 동사의 주어는 대부분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긍휼”이라는 말은 “귀여워하다, 사랑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공로 없이 받는 호의로, 값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긍휼”은 은혜 다음에 따라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에 비유해서 말한다면 출애굽은 은혜이고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신 것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를 살펴보세요. 하나님께서 행위대로 심판하신다면 누가 이 자리에 올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제까지 신앙생활 할 수 있었던 것도 다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딤후1:12절 말씀에서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지키심에 대한 사도 바울의 확신,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이러한 그의 신앙이 그를 위대한 사도로 쓰임 받게 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근거로 하여 담력을 얻고 사십니까? 사업이 잘되고 직장이 튼튼하여 돈을 벌었다는 것으로 담력을 얻습니까? 아니면 젊고 건강하다는 것으로 담력을 얻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오직 은혜와 긍휼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나를 선택하셨으니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믿고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본문 21~23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위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아멘.
하나님의 영광은 어떤 형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은혜와 긍휼이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어떻게 봅니까?
본문 21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위에 섰으라.” 아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어디에 서 있으라고 말씀하십니까? 예, “반석 위에”입니다. 한 번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반석 위에 섰으라.” 아멘.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반석위에 섰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반석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본문 22~23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아멘. 이 말씀의 전체적인 의미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와 긍휼을 한없이 베푸시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못한 영혼은 그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떤 성도는 고난과 실패의 삶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감사하는데, 왜 어떤 성도는 고난 중에 낙심하고 좌절하고 실의에 빠지게 됩니까? 왜 그런 차이가 나타납니까? 바위틈에서만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때문입니다. 바위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찢으신 예수님의 몸입니다. 나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주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주의 영광을 내게 보여주세요.”라고 나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네가 내 얼굴은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내 손으로 덮었다가 손을 다시 거둘 때 내 등을 볼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바라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요1:14). 그리고 기록된 성경 말씀을 통하여 부분적으로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장차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와 “긍휼”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이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매일 매일 보아야 할 또 다른 부분의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은혜 속에 나타난, 그리고 긍휼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날마다 보며 누리며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제110강 이스라엘 가운데 돌아오신 하나님
(출34:1~9) 찬송 ; 313, 321 327장.
2011. 8. 31 수요일밤예배
구약의 선지서들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에게 임하니라”고 하는 말씀들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여기서 “임한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주시는 것을 말씀하는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달라고 해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계셔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이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백성들에게 전하면 그 말씀이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할 때 말씀을 받는 자들이 해야 할 일은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 에 따라 복이 임하기도 하고 화가 임하기도 합니다(요나의 사건). 오늘 본문 1절 말씀에 보면 “...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라 네가 깨뜨린바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라 네가 깨뜨린바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처음 것과 똑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처음 것은 어떤 것입니까? 모세가 깨뜨려 버린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가지고 산에서 내려오다가 우상을 만들어 놓고 섬기는 백성들을 보고 그 두 돌판을 던져서 깨뜨려 버렸던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것과 똑 같은 것을 만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다시 돌아오신 것입니다. 왜 오셨습니까? 말씀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축복의 길로 인도하시려고 오셨습니다.
1. 하나님의 명령.
이스라엘 가운데 돌아오신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세 가지를 명령하십니다. 우리 다 같이 본문 1~3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라 네가 깨뜨린바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아침 전에 예비하고 아침에 시내 산에 올라와 산꼭대기에서 내게 보이되 아무도 너와 함께 오르지 말며 온 산에 인적을 금하고 양과 소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명령하십니까?
첫째, 준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처음 것과 똑 같은 두 개의 돌판을 준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처음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모세에게 만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새겨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려면 준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마음을 준비해 가지고 하나님의 전에 나와야 합니다. 예배에 임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 은혜 받을 것인가 받지 못할 것인가는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됐는데도 잡담이나 하고 있는 사람은 십중팔구는 은혜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와 찬양으로 준비한 성도는 말씀을 잘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아침에 산에 올라오라고 명령하십니다.
아침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소중한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열매를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아침은 제일 먼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으로 구별해 놓아야 합니다. 식물의 세계에서도 열매는 아침에 맺어진다고 합니다. 꽃도 밤에 준비하여 아침에 핀다고 합니다. 이처럼 아침이 소중합니다. 그래서 새벽기도 시간은 축복의 시간입니다. 시46:5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그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벽을 축복의 시간으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 40여년 전 어떤 한 여행자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캐나다에서는 새소리에 잠이 깨었고, 일본에서는 기께 돌아가는 소리에 잠이 깨었고, 한국에서는 새벽기도 종소리에 잠이 깨었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 아름다운 풍토가 점점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기도의 소중성을 아는 성도들은 지금도 새벽을 깨워 하나님을 만나 축복의 시간으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준비하고 아침에 시내 산에 올라오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혼자서 올라오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그 시간에 그곳에 죄악된 것들을 없게 하시려는 뜻이 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데 방해되는 요소들을 없애려는 의도입니다. 예배 시간은 구약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시간입니다. 말씀 듣는 것에 온갖 정성을 다 집중시켜야 합니다.
2. 나는 여호와로라.
구름 가운데 강림하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나는 여호와로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란 이름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여호와는 어떠한 분이실까요? 본문 6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아주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첫째, 자비로운 여호와이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는 이 자비하심에서 출발합니다. 솔로몬은 여호와의 자비하심을 찬양하면서 “상천하지에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습니까?”(왕상8:23)라고 찬양하였습니다. 여호사밧 왕도 포로 된 환경에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성문을 열고 전쟁하러 나가면서 노래하는 자를 앞세워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대하20:21)라고 찬양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찬양해야 합니다.
둘째, 은혜로우신 여호와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주시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은혜 주시기 위해서 기다리시는 하나님께 여러분의 문제를 아뢰고 해결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여호와이십니다.
나훔 선지자는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 하신다.”(1:3)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마23:37절 말씀에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아오신 하나님은 왜 오셨습니까? 은혜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 위해서 오늘도 이곳에 임재하여 계십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물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제일 먼저이지만 또 은혜 받고자하는 기대감으로 항상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예비하신 그 은혜를 다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제111강 언약 백성의 세 가지 규례
(출34:10~17) 찬송 ; 212, 357, 399장.
2011. 9. 7. 수요일밤예배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두 돌판을 만들어 가지고 시내 산에 올라간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폈던 말씀의 마지막 절입니다. 출34:9절 말씀에 “가로되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컨대 주는 우리 중에서 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로 주의 기업을 삼으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기도에 대하여 응답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의 첫 절인 10절 말씀입니다.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치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 너의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소위를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 아멘.
하나님께서는 기적의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생활 가운데 인도해 가셨고, 가나안 땅의 토착민들도 쫒아내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터전을 삼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행하신 이적이요, 기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아가는 가운데 행해야 할 일들을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환경의 지배를 받고 삽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선하고 의로운 것보다는 악하고 죄악된 것에 더 빠르게 영향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이러한 연약함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이방의 죄악된 풍습에 물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는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언약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규례에 대해서 세 가지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상고하면서 은혜 받고자 합니다.
1. 이방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12절 말씀에 “너는 스스로 삼가 네가 들어가는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 그들이 너희 중에 올무가 될까 하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거민과 언약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올무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빼어내신 기업입니다. 시33:12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빼내셔서 구별하여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특별히 구별하여 부름 받은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합니다.
성도는 거룩한 무리입니다. 귀한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기를 “할 수 있는 대로 착한 일을 하되 믿음의 가정과 하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6:14절 말씀에서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올무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시기 바랍니다. 고전3:9절 말씀에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일 뿐만이 아니라 모든 일에 하나님을 동업자로 모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우리 예수님을 회장 자리에 모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는 일마다 형통할 수 있습니다(눅5:1~11, 요21:1~6). 잠언서 기자는 경영은 사람에게 있을지라도 그 응답은 하나님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잠16:1). 우리의 언약의 대상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방 거민과 언약을 세워서는 안 됩니다.
2.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13~14절 말씀에 보면 “너희는 도리어 그들의 단들을 헐고 그들의 주상을 깨뜨리고 그들의 아세라 상을 찍을지어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 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주상”은 종교적인 목적으로 세운 비석입니다. 우상에게 봉헌된 기념비입니다. 또 “아세라 상”은 풍요의 신으로 알려진 가나안의 여신입니다. 생산의 신인 바알과 부부의 신입니다. 따라서 바알과 아세라 신은 항상 함께 했고, 이 두 신을 숭배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성적타락과 성적인 범죄가 자행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분으로 성경은 묘사하고 있습니다. 슥1:14절 말씀에 보면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여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사62:4절 말씀에 보면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헵시바”라 부르시고, 그 땅을 “쁄라”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헵시바”라는 말은 “나의 기쁨이 그에게 있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쁄라”라는 말은 “결혼한 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결혼한 자처럼 기쁨의 대상으로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만 그렇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도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을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질투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대신하시겠습니까? 사랑은 사랑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 사랑도 대등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상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은 다 우상입니다. 주일날 예배드리는 것 제쳐놓고 다른 것 하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우리가 우상숭배의 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향하여서 늘 하나님을 앙망하여야 합니다. 시25:15절 말씀에 보면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만 주인으로 삼아야 합니다.
3. 이방인과 결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 16절 말씀에 “또 네가 그들의 딸들로 네 아들들의 아내를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 신들을 음란히 섬기며 네 아들로 그들의 신들을 음란히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이 말씀을 받을 당시 이스라엘을 중심한 그 주변의 나라들은 여자가 시집갈 때 자기가 섬기던 우상까지 가지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계속하여 섬겼습니다. 솔로몬 왕국의 후기에 이스라엘이 우상왕국이 되어버린 것은 1000명이나 되는 그의 처첩들이 가지고 들어와 섬긴 우상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하지 말 것을 명령하십니다. 이미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해서 부부관계가 이루어졌다고 하면 빨리 예수님을 믿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 결혼하지 아니한 우리 청년들이나 청소년들은 믿는 자를 배필로 맞이하기 위하여 기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을 결혼 시킬 때에도 절대로 이방 결혼을 시켜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지옥불에 집어넣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불신자와 결혼해서 예수님을 믿게 하면 더 좋을 것 아니냐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고 안 믿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삼손의 인생 실패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한 마디로 불신 결혼 때문입니다. 삼손은 나면서부터 나실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가 불레셋 여인과 결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의 부모가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삼손이 계속 고집하자 그의 부모가 그 불레셋 여인과 삼손을 결혼을 시켰습니다. 결국은 그 가정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삿14:20).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사는 삶은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은 가나안 땅에서 행복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세 가지를 금하셨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만 잘 순종하여 준행하면 더할 나위 없는 축복된 삶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방인과 결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순종하심으로 항상 행복하고 축복이 넘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제112강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절기
(출34:18~26) 찬송 ; 404, 405, 455장.
2011. 9. 14. 수요일밤예배
오늘 본문의 말씀은 출애굽기 13장과 23장 말씀에서 이미 말씀하신 내용을 반복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3대 절기를 지켜야 했습니다. 무교절(유월절)과 맥추절(오순절)과 수장절(장막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중 남자들은 1년 세 차례씩 하나님 앞에 나와 이들 절기를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18~20절 말씀까지는 무교절을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21절 말씀은 안식일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22절 말씀은 맥추절과 수장절에 관한 말씀입니다.
1. 무교절을 지키라.
무교절은 유월절을 시작으로 하여 7일간의 축제일로 지키는 절기입니다(출12:15~20절). 이 기간에는 누룩을 넣지 않는 무교병을 먹기 때문에 무교절이라고 부릅니다. 무교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면 무교절은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무교절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드리는 절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압제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애굽의 모든 장자들과 생축의 첫 새끼들을 죽이시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나 생축의 한 마리도 손실이 없이 지켜 주셨습니다. 유월절 예식을 통해서 속량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초태생은 나 내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본문 19~20절 말씀에 “무릇 초태생은 다 내 것이며 무릇 네 가축의 수컷 처음 난 우양도 다 그러하며 나귀의 첫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장자는 다 대속할지며 빈손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본문의 말씀에서 눈여겨 볼 말씀이 있습니다. 나귀에 대한 부분입니다. 나귀는 부정한 짐승입니다(레11:1~8). 그러므로 나귀 자체로는 하나님께 드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양으로 대속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생활이 어려워서 대속할 양이 없을 경우에는 그 나귀 새끼는 목을 꺾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의 것은 내가 소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것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빈손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 20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빈손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항상 제물을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오늘 신약에 있어서는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헌금을 준비하여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자녀들의 감사하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여기 “빈손”이라고 하는 말은 “공허하게, 쓸데없이, 헛되이”라는 뜻으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빈손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헛되이 하나님 앞에 나오지 말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나오실 때에 어떠한 마음으로 나오십니까? 마2:11절 말씀에 보면 동방박사들은 인류의 구원자 아기 예수가 태어났다는 말씀을 듣고 아기 예수께 드릴 예물을 드리고 경배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때에 동방 박사들과 같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감격으로 찬양하고, 내 모든 것이 주의 것이라는 마음으로 드리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배자의 마음자세입니다.
2. 안식일을 지키라.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에서만 네 번이나 안식일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본문 21절 말씀에 “너는 엿새 동안 일하고 제 칠일에는 쉴지니 밭 갈 때에나 거둘 때에도 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출16:4-5절 말씀에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제 육일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예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출20:8~11절 말씀에서도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출31:13~17절 말씀에서도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은 쉬라고 말씀하십니다. 농한기, 또는 한가할 때만 쉬는 것이 아니라 본문의 말씀에 보면 밭갈 때에나 거둘 때에도 쉬라고 말씀하십니다. 농사짓는 사람에게 있어서 “파종기”와 “수확기”는 1년 농사의 성패를 좌우하는 소중한 시기입니다. 파종할 기회와 수확할 기회를 놓쳐버리면 농사를 망쳐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안식일은 거룩하게 지켜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안식일이 오늘의 주일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축복된 삶의 여부는 그가 주일을 어떻게 지키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3. 맥추절을 지키라.
성경 전체에서 “맥추절”이라고 하는 단어는 출23:16절에서만 발견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도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맥추절, 칠칠절, 오순절, 또 초실절이라는 절기가 다 동일한 의미를 가진 맥추절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이 맥추절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을까요? 신16:12절 말씀에 보면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네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맥추감사절에는 하나님은 은혜에 대한 감사를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맥추절도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감사 절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맥추절을 지키는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억매임과 속박 속에서 자유함을 얻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민으로 구별되어 특별한 은혜가운데 있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엡2:1절 이하에서 우리를 가리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라고 말하고 있고, 저주와 진노가운데 있어야 마땅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를 유월절 어린 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와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녀의 권세를 주셨고, 더 나아가서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후사가 되게 하셨으니 이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둘째, 지금도 계속해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자연신론자들은 하나님의 창조는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섭리는 부인합니다. 즉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자연법칙에 그대로 맡겨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창조의 세계를 계속 붙드시고 섭리하실 뿐만 아니라 친히 죄 가운데서 구원하여 내신 백성들을 고난과 빈핍 중에서도 계속적으로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이러한 은혜를 눈동자와 같이 지키신다고 말씀하시고,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면서 그의 백성들을 지키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4. 수장절을 지키라.
수장절은 초막절이라고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40년간 광야생활을 하면서 천막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 7일간 종려나무 가지나 잎이 많은 가지로 초막을 만들고 거기서 기거하면서 지난날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초막절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지막 농사를 다 끝내고 지키는 절기이기 때문에 수장절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 초막절에는 과거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이 중요함을 교훈하는 절기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받았던 은혜를 잊지 말고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은 현재에 평안하면 지난날을 잊어버리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나 안락하고 평안할 때에도 고생했던 지난날들을 되돌아보고 현재의 안일함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그러면 이 초막절이 예표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생활을 한 것은 신약시대의 성도들이 이 땅에 나그네와 행인같이 살면서 영원한 가나안,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을 예표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나그네 인생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본향입니다. 그 나라를 소망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 나라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서 공급하시고 채워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지켜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24절).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는 자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아멘.
제113강 모세의 얼굴의 광채
(출34:27~35) 찬송 ; 483, 486, 259장.
2011. 9. 21. 수요일밤예배
오늘 본문의 말씀은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십계명을 받고 있는 장면과 그 말씀을 받고 내려 올 때 있었던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1. 말씀을 받기 위해서 금식하는 모세.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두 돌 판을 만들어 가지고 시내 산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40일을 금식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려고 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경건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을 준비를 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준비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은혜가 다릅니다. 제가 예배드리려는 여러분에게 예배에 대한 준비를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서 40일 동안 기다렸습니다. 그것도 그냥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금식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밥만 안 먹은 것이 아닙니다. 물도 마시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과학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람은 물을 마시지 않고는 9일을 넘기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서 얼마나 어떻게 준비하십니까? 몸의 수분이 다 고갈되기 때문에 결국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40일 동안을 물도 마시지 않고 지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그러면 모세는 음식만 섭취하지 않고 가만히 지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모세가 하나님께 무슨 기도를 드렸을 것 같습니까? 먼저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백성들이 우상 숭배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하나님께 받은 십계명 돌 판을 던져 깨뜨려 버렸지만 그래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던져 깨뜨려 버린 것에 대한 허물을 하나님께 회개하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위해서 도고의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이 이제는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사는 백성들이 되게 해 주시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하며 기도하는 모세였기에 40일 동안의 금식 기간에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으로요?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힘으로 이 일을 해 낸 것입니다.
2.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의 광채.
오늘 본문 29~35절 말씀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증거의 두 돌 판을 받아 가지고 내려 올 때 모세의 얼굴에 영광의 광채가 난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영광의 광채 때문에 백성들이 두려워서 모세 앞에 가까이 나오지 않자 모세가 얼굴을 수건으로 싸고서 백성들을 만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러면 모세의 얼굴에서 왜 광채가 났을까요?
모세의 얼굴의 광채는 하나님의 영광의 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영광중에 하나님과 함께 있는 동안 하나님의 영광이 모세의 얼굴에 그대로 전이된 것입니다. 모세는 전에 하나님께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 적이 있습니다. 출33:18절 말씀에 보면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시31:16절 말씀에서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취시고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사도행전에 보면 스데반 집사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보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우편에 예수님께서 서신 것을 보고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행6:15, 7:55~58)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를 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로 빛나는 얼굴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받으면 성도들의 얼굴에서 은혜의 광채가 보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나타나십니까? 오늘 집에 가시면 꼭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둘째, 그러면 모세는 왜 자기 얼굴의 광채를 보지 못했을까요?
본문 29절 말씀에 보면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깨닫지 못했을까요? 거울로 자기 얼굴을 확인해 보지 않아서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는 자기 편견 때문에 자기 자신을 볼 수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영적 의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본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앞에서 우리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감히 우리 존재를 내세울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바라보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로다.”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전에는 백성들을 향하여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면서 노를 발했던 선지자였지만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자신의 존재가 죄 덩어리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는 삶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셋째, 그러면 왜 모세가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을까요?
모세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나타났습니다. 이 빛이 백성들의 허물과 죄악의 양심을 찌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백성들은 모세 앞에 나오기를 꺼려하였습니다. 이것 때문에 백성들을 만날 수가 없고 또한 말씀을 전달할 기회를 잡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얼굴의 광채를 수건으로 가린 것입니다.
모세는 자기 얼굴의 광채만을 자랑하며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모세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얼굴의 광채를 수건으로 가린 것입니다. 때로 우리에게 이적과 기사가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빌1:20절 말씀에서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만 존귀히 되게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만 나타나게 하고 우리는 십자가 뒤에 숨어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애굽 궁궐에서의 40년의 삶은 영광스러웠지만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는 동안 모세의 얼굴은 태양 볕에 많이 그을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80세의 할아버지입니다. 또한 40일 동안 금식하였습니다. 얼굴이 매우 초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모세의 얼굴은 광채로 빛났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통해서 얻은 영광의 광채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통해서 그 은혜의 빛에 거할 때 우리의 얼굴도 모세의 얼굴처럼 광채로 빛날 수 있습니다. 그 은혜를 여러분이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제114강 안식일의 축복을 누립시다
(출35:1~3) 찬송 ; 56, 57, 377장.
2011. 9. 28. 수요일밤예배
구약 성경에 나타난 안식일에 대한 말씀들을 보면,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곧 일을 하지 않음을 뜻하였습니다. 출20:10절에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였고, 출31:15절에는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고 쉬어야 한다는 것은 쉬어도 좋고 일해도 좋은 것이 아닌 절대적으로 쉬어야 한다는 명령입니다. 오늘 읽어 드린 본문의 말씀도 안식일에 일하지 말 것을 강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안식일에 일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계명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안식일에 절대로 일하지 말고 쉬라고 하셨을까요? 그 대답은, 그 날은 하나님이 거룩하게 구별하신 날이기 때문에 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안식일을 거룩한 날로 구별하셨을까요? 출애굽기 십계명에 따르면, 하나님이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레째 되는 날 쉬셨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설명만 가지고는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그렇게 강력하게 지켜야 한다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안식일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레째 되는 날 쉬시면서 그 날을 거룩하게 구별 하셨다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일까요?
1. 사람을 위한 안식일.
이스라엘 자손들은 안식일이라는 그 날 자체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규정하고 그것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 안식일 논쟁이 자주 벌어졌습니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걸으면서 밀 이삭을 손으로 따먹었다는 것이 시비가 되었고,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것이 또한 비방거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현대 정통 유대교인들은 안식일에 전기 스위치를 켜고 끄는 것조차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이런 안식일 규례를 비판하셨습니다. 안식일 규례가 하나의 멍에가 되어 사람들을 짓눌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막2:27절 말씀에 보면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중요한 점을 지적하셨는데 그것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겼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안식일이면서 동시에 사람을 위한 안식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레째를 안식하는 날로 거룩하게 구별하신 이유는 바로 창조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아름답고 조화롭게 운영하고 보존하는데 있어 안식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악보에 쉼표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도 반드시 쉼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날을 거룩하게 구별하셨다는 의미는 쉼표라고 하여 결코 우습게보지 않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안식은 해도 좋고 안 해도 무방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안식.
그리고 특히 하나님이 안식하셨다고 성경은 강조를 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것입니다. 창조주가 안식하실 때에 지음 받은 인간이나 다른 피조물들도 같이 안식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안식하실 때 사람들이 일을 해보아야 헛수고일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운전하시는 세계인데 하나님이 쉬시면 그 세계도 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휴식을 하시지 않아도 아무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지으신 세계를 위하여 하나님이 안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안식은 우리 인간을 위한 것이며 모든 피조세계를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지음 받은 인간들이 이런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고 휴식할 때 휴식하는 것,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안식을 파괴한 인간의 욕심.
그러나 인간들은 이런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보다는 자기 욕심을 따라 쉬어야 할 때 쉬지 않고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6년 농사를 짓고 1년 땅을 쉬게 하여야 하는데 계속 농사를 지으므로 지력은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약화되었습니다. 동시에 남보다 1년 농사를 더 지으므로 수확을 많이 거두어 들일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점점 부자가 되었습니다. 여유 있는 돈으로 남의 밭을 더 사들이고 그 땅까지 쉬지 않고 계속 농사를 지으므로 점점 더 큰 부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50년 희년이 되면 샀던 땅을 되돌려 주도록 율법은 규정하고 있지만, 돈의 맛을 알게 된 부자들은 결코 땅을 돌려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본의 힘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 인간들에게 안식일이나 안식년은 그들의 부를 축적하는 일에 걸림돌이 될 뿐이었습니다. 부를 남보다 더 많이 축적하기 위해서는 쉬지 않고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지주 봉건사회로 발전하면서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불균형을 이룬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노동 착취가 이루어지고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새로운 산업을 일으키면서 이 세계는 안식이 없는 산업사회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다 많은 생산을 이루려고 머리를 싸매고 과학을 발전시켜 마침내 증기기관을 만들어 내고 그것은 곧 산업혁명을 일으켰으며, 급속한 산업 사회로 발전하게 만들었습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넘어 오면서 도시가 발전하게 되었고, 자본주의가 더욱 발전하게 되면서 이 세계의 발전은 점점 속도가 붙기 시작하였고, 잠시도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려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밤낮 없이 일하였고, 공장의 기계들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계속 돌아가면서 수많은 물건들을 쏟아냈던 것입니다. 산업사회로 발전하면서 이 세계에는 사람에게나 피조세계에 안식은 사라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점차 산업이 발전하면서 풍요로운 사회를 맞이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휴식을 찾기 시작하였으나 여전히 공장의 기계는 쉬지 않고 돌아갔으며, 자본의 흐름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계속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환경은 오염되고 자원이 고갈되기 시작하였으며, 휴식을 잃어버린 자연계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4. 파괴되는 피조세계.
사람들이 휴식을 찾게 되면서 등산을 하고 낚시를 즐기며 골프를 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인간의 휴식 때문에 자연은 더욱 파괴되고 더러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박세리가 세계적인 골프대회에서 몇 차례 우승하면서 골프 바람이 한국을 뒤덮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산야가 골프장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자연이 얼마나 파괴되어 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녹색평론}이란 잡지를 발간하는 영남대 김종철 교수는 골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습니다. “골프는 변명의 여지가 없이 당장 폐지되어야 하는 퇴폐의 극단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장의 생계를 위한 어쩔 수 없는 문제도 아닌 사치스러운 놀이를 위해서 삼림을 거덜내고, 지하수를 오염시키고, 농경지를 파괴하고, 마을 공동체를 망가뜨리는 골프를 장려한다는 건 제 정신 있는 사람들의 일이라고 할 수는 없는 거예요.”라고.
5. 인간의 끝없는 욕심에 제동을 거신 하나님의 안식.
어떤 사람은 안식만을 주장하다보면 가난해 질 것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난과 죽음 두 가지 중 어느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부자가 되려고 쉬지 않고 일을 하면 결국 우리 모두가 죽게 될 것입니다. 자연이 파괴되고 인간이 파괴되면 결국 하나님의 세계 모두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원치 않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셔서 철저하게 지키라고 하신 이유는 바로 부자가 되려는 우리의 욕심에 제동을 거신 것입니다. 부자가 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눅12:24절 말씀에 보면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고 말씀하십니다. 까마귀에게는 부자가 되려는 욕심이 없음을 지적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곳간이나 창고가 없다는 것은 내일을 위해 양식을 비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곳간이나 창고를 만드는 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안식은 단순히 휴식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해질 수 있는 마음, 모든 생활의 편리함을 멀리할 수 있는 용기, 피조세계와 호흡을 같이하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지혜를 회복하는 것이 진정한 안식의 의미입니다. 룻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하였지만, 진정한 안식은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과 자연을 있게 하신 하나님에게로 돌아갈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안식을 잃었고, 그래서 자연을 파괴하고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간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하루 쉬면서 예배당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것은 단순하게 하루 휴식하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며, 그러므로 욕심을 버리고 가난한 마음을 배우며, 높아지려는 것 대신 겸손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므로 부자가 되기를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는 가난하게 살아도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이 되고, 나의 영혼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으로 만족함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일주일에 한 번씩 조용히 나와 예배를 드리므로 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정신을 잃고 거기에 떠내려가지 않고, 그 무한 경쟁의 끝이 파멸임을 바라보면서 거기서 벗어나 좁은 길을 택하여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안식을 깨트리고 욕심을 따라 부자가 되려하였던 세계는 지금 큰 어려움을 만났습니다. 이대로 나가면 결국 지구는 파멸되고 말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를 구경만 하지 말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인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무한 경쟁에서 이기겠다는 생각을 버리면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면 우리는 다시 안식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편안하게 살아보겠다는 생각을 버리면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의 진정한 은총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쾌락을 누리며 살겠다는 마음을 버리면,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의 기쁨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분주하고 정신없는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일의 축복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제115강 헌신과 섬김의 원리
(출35:4~36:1) 찬송 ; 349, 352, 362장.
2011. 10. 5. 수요일밤예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임재 처소인 성막을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짓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막의 양식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말씀하심으로 성막이 하나님의 뜻대로 지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바로 성막을 짓는데 있어서 필요한 인력과 물자 조달에 대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고 섬기는데 있어서 어떠한 마음과 자세로 해야 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는 성막 건축을 위해서 백성들이 바칠 각종의 물품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4~9절). 그리고 성막 건축에 필요한 인재들의 부름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에 나타난 헌신과 섬김의 원리는 무엇입니까?
1. 헌신과 섬김의 원리는 자원하는 마음입니다.
본문 4~5절 말씀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일이 이러하니라 이르시기를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취하되 무릇 마음에 원하는 자는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21절 말씀에서도 “무릇 마음이 감동된 자와 무릇 자원하는 자가 와서 성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 여호와께 드렸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고 섬기는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원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에 있어서도 그 예물의 물질적 가치보다도 드리는 자의 정성과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러 나오는 자들에게 빈손으로 오지 말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출23:15절 말씀에 보면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어떤 물질적인 것만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하나님께 경배하는 자의 온 인격을 요구하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6:21절 말씀에 보면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우리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소유하고 있는 소유물 가운데 이것은 내 것이라고 주장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내 것이라고 주장할만한 것은 사실 하나도 없습니다. 다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다만 관리하고 다스리라고 우리에게 잠시 맡겨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요구하실 때 우리는 기꺼운 마음으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에 나타난 자원하는 심정으로 예물을 드리는 자들을 살펴보면 남녀의 구분이나 신분의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21~29절). 이것은 하나님께 예물 드리는 일에 있어서는 결코 인간적인 차등이나 장애 요인이 있을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헌신과 섬김은 자원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고후9:7절 말씀에서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자원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헌신과 섬김이 이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헌신이요 섬김입니다.
2. 헌신과 섬김의 원리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헌신과 섬김이라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헌신과 섬김을 받으시는 대상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의 뜻을 헤아리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실한 헌신과 섬김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0절 말씀에 보면 “무릇 너희 중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와서 여호와의 명하신 것을 다 만들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헌신된 자들이 만들 것이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명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제자의 삶을 살기 원한다면 십자가에서 죽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2:20절 말씀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내 자아가 아직도 내 안에서 왕 노릇하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헌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의 삶에서 이러한 면을 수없이 경험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고 했던 것입니다.
3. 헌신과 섬김의 원동력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의 헌신과 섬김이 아름다운 것이면서도 아름답게 꽃피우지 못하는 것은 내 것으로 헌신하며 내 것으로 섬긴다는 잘못된 마음이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물질로 하나님께 헌신하고 섬길 때 그 물질이 여러분의 것입니까? 여러분이 지식과 능력으로 하나님을 섬길 때 그 지식과 능력이 원래부터 여러분의 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 출처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30~31절 말씀에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사렐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케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34~35절 말씀에서도 “또 그와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감동시키사 가르치게 하시며 지혜로운 마음을 그들에게 충만하게 하사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조각하는 일과, 공교로운 일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로 수놓은 일과 짜는 일과 그 외에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고 공교로운 일을 연구하게 하셨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과 섬김이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비물질적인 것이든 모두가 하나님께서 공급하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으로 우리의 삶을 누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그것으로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드리면서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고 섬기는 일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헌신할 수 있는 기회까지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헌신도 자원하는 마음으로, 섬김도 자원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하라고 해서가 아니라 은혜에 감사해서 드리는 헌신과 섬김, 이것이 값진 헌신이요 섬김입니다. 아멘.
제116강 넉넉하여 남음이 있는 봉헌
(출36:2~7) 찬송 ; 351, 354, 353장.
2011. 10. 12. 수요일밤예배
지난 수요일 밤에는 “헌신과 섬김의 원리”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눈바 있습니다. 헌신과 섬김의 원리는 자원하는 마음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헌신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헌신이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헌신이 될 수 있고, 섬김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지혜와 은사를 지녀야 하나님의 일을 넉넉하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본문 1절 말씀에 보면 “브사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심을 입은 자들은 여호와의 무릇 명하신 대로 할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건축하기 위해서 일할 사람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위한 자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꾼에게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마음은 있는데 능력을 부여받지 못했다느니 능력은 있으나 마음이 없는 경우에는 결코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막 건축에 동참할 사람들에게 헌신의 자원하는 마음과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러한 성막 건축자들이 일을 시작할 때 성막 건축에 소용되는 모든 물품들이 넉넉하고 남음이 있을 정도로 봉헌되어서 성막 건축을 시작하게 되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 7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 아멘.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을까요?
1.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삶을 지속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3절 말씀에 보면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의 성소의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가져 온 예물을 모세에게서 받으니라 그러나 백성이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가져오는 고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여 볼 말씀은 “연하여 가져오는 고로”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한두 번, 일이년 헌신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이것은 책임의식과 의무감에서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계속적으로 끊임없이 한다고 하는 것은 책임의식과 의무감으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제가 전에 섬겼던 교회에서 매월 첫날이면 어김없이 감사예물을 준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이제 금년에 만 70세가 되셔서 은퇴하시게 됩니다만 그 장로님은 서리집사 때부터 그렇게 하셨습니다.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 일을 누가 하라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여러분, 매 주일마다 감사헌금을 드리세요.” 하면 여러분 할 수 있습니까? 안 됩니다. 그것은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삶은 은혜의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지속적인 은혜를 받으며 그 은혜를 감사로 깨닫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2. 그들이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누가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대하여 자원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짓기 위해서 헌물을 드리는 이 시기가 오늘날처럼 산업사회가 아닙니다. 그들의 활동 반경은 광야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그 어떤 생필품도 얻을 수 없는 핍절한 곳이 광야입니다. 절대 빈곤의 처소가 광야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광야에서도 “넉넉하여 쓰고도 남음이 있는 봉헌”을 한 것입니다.
무엇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습니까?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철학 때문입니다. 이것은 청교도적 신앙의 바탕이었고 오늘 우리가 간직해야 할 신앙의 본질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물론 오늘날도 이러한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복 받을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신앙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사르밧 과부의 헌신이 생각나십니까? 사심이 없이 온갖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에게 봉사했던 그녀는 3년이 넘는 기근 중에서도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는 기적을 체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봉헌은 낭비가 아니라 투자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은 성막 건축을 위한 이스라엘 배경들의 헌신과 봉헌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기적적인 역사를 이루었다고 하는 것이 더욱 더 우리의 머리를 숙이게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는 이러한 사람들을 통해서 세워지고 확장되어 나갑니다. 여러분의 헌신이 이러한 헌신이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의 봉헌이 이러한 봉헌이기를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은혜가 없이는 이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생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없이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헤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말세에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 소중하게 쓰임 받는 일꾼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117강 성막과 하나님의 임재
(출36:8~38) 찬송 ; 446, 447, 417장.
2002. 10. 19. 수요일밤예배
오랫동안 준비해 오던 성막 건축의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건축 설계도도 이미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설계도에 따라 일할 건축자들도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건축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건축 재료들도 성막 건축에 쓰고도 남을 만큼 준비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드디어 역사적인 성막 건축의 대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 첫 번째 역사로 “앙장”과 “성막 덮개”, “띠”와 “성막 휘장”의 제조에 관한 기록입니다. 이러한 모든 구조물들은 모두 다 각각 종교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1. 그룹들은 수놓아 짜서 만들었습니다.
본문 8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일하는 사람 중에 마음이 지혜로운 모든 사람이 열 폭 앙장으로 성막을 지었으니 곧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 들을 무늬 놓아 짜서 지은 것이라” 아멘.
성막의 열 폭 앙장에 그룹들을 색실로 무늬를 놓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룹”은 천사들을 말합니다. 성막 앙장에 “그룹”을 수놓은 것은 그룹이 하나님의 임재, 호위, 수행의 역할을 하는 천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막 앙장에 그룹을 수놓았다는 사실은 이 성막 안에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을 모시고(수행) 있다는 것과 아무나 하나님 앞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경호)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그룹의 역할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역할과 같습니다. 성도가 있는 곳은 그리스도가 계신 곳이며, 성도는 항상 주님과 동행하는 존재이며, 주님의 영광을 보존하고 지켜야 하는 임무를 띠고 있습니다.
2. 성막을 덮는 덮개를 만들었습니다.
성막을 덮은 첫 덮개는 수양의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붉은 물로 염색한 것이었습니다. 출36:19절 말씀입니다.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웃덮개를 만들었더라.” 아멘.
그리고 수양의 가죽 덮개 위에 해달의 가죽으로 웃 덮개를 만들었습니다. “해달의 가죽으로 그 웃덮개를 만들었더라.” 해달은 홍해와 인도양에 서식하는 바다 동물로 그 가죽은 매우 튼튼하고 질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성막의 덮개를 육지와 바다 동물의 가죽으로 덮으라고 하신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봉사해야 함을 뜻하고, 가죽으로 이중의 덮개를 한 것은 하나님의 보호가 견고함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3. 성막에 세울 널판을 만들었습니다.
이 널판은 조각목으로 만들었는데 이 조각목은 애굽과 아리비아 일대의 사막에서 자라는 나무로 잘 썩지 않으며 내구성이 아주 강한 것이었습니다. 이 널판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또 성도들을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생애 30년 동안은 아버지 요셉과 함께 죽은 나무에 새 생명과 기능을 부여하는 목수로 사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공생애는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는 복음으로 사셨고 마지막에는 죽은 나무인 십자가 위에서 영원한 생명의 길을 이 땅의 모든 인류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땅과 하늘을 잇는 사닥다리입니다(요2:51).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이어 놓으신 사닥다리(십자가)를 통해 영원한 생명에 접붙인 바가 된 사람들입니다.
4. 성막의 문에 휘장을 만들어 쳤습니다.
성막 두 곳의 문에 이 휘장을 쳤는데, 성막 입구에 그리고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이 휘장을 쳤습니다. 휘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실 때 이 휘장들이 찢어졌습니다.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들고 모든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 모두가 주님이 열어 놓으신 기 길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제118강 언약의 상징인 법궤
(출37:1~9) 찬송 ; 193, 194, 210장.
2011. 10. 26. 수요일밤예배
오늘 본문의 말씀은 법궤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법궤는 “여호와의 궤”, “증거궤”, “언약궤” 등으로 불렸습니다. 이 법궤 속에는 두 개의 십계명 돌판과 만나가 담긴 금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들어 있었습니다. 조각목으로 만든 이 법궤는 안팎을 정금으로 쌌으며 법궤 뚜껑도 역시 금으로 쌌습니다. 그리고 법궤 뚜껑 좌우에는 금으로 만든 그룹 둘이 서로 마주 대하여 날개를 펴고 서 있었습니다. 바로 이곳을 속죄소, 또는 시은소라고도 부릅니다.
1. 법궤에 나타난 삼위 하나님의 모습.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법궤 속에는 십계명 돌판 두 개와 만나를 담은 금으로 만든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들어 있었습니다. 히9:4절 말씀에 보면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법궤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법궤 안에 담겨 있었던 세 가지 물품은 삼위이신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십계명 두 돌판은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성부 하나님, 만나는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말씀하시며(요6:51) 영생과 생명의 양식이 되신 성자 하나님을, 그리고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우리를 늘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죽은 생명을 부활시키는 성령 하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성물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시고 내려주시고 또 역사하신 것들입니다.
이 법궤는 성막 중에서도 지성소에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면 지성소는 어떤 곳입니까?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신 곳으로서 성막 안에 있었고 이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중심이었고,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궤 위에서 대제사장 아론을 만나 하나님의 뜻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출25:22절 말씀에 보면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곳에서 백성들의 죄를 사하시고, 그곳에 항상 임재해 계셨으며(수3:1~4; 6:6~7), 또한 하나님의 영광이 항상 이곳에 머물러 있었습니다(삼상4:21~22).
2. 속죄소에 나타난 십자가의 의미.
법궤의 뚜껑 부분을 속죄소 또는 시은소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속죄소에서 대제사장 아론을 만나 그의 속죄를 위해 피 뿌림을 통하여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이 속죄소는 율법과 은혜가 만나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법에 의하여 정죄된 인간이 이 속죄소에서 은혜를 입어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서 대신 죽어주신 십자가의 의미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만남이며, 인간의 죽음과 삶의 만남이며, 멸망과 영생의 만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속죄소에서 매년 대제사장 아론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속죄의 제사를 받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사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영원한 속죄 사역을 완성하였습니다. 히9:25~26절 말씀에 보면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까요? 평생을 요한복음 번역에 헌신했던 8세기의 유명한 신학자 “비도”는 죽음을 맞이할 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은, 없던 가운데서 나를 만든 이에게 가는 기쁨의 순간이다.”라고. 피조물의 가장 큰 기쁨이란 조물주를 기억하는 시간이 아닐까요? 날마다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평생 후회 없는 나날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제119강 진설병 상과 예수 그리스도
(출37:10~16) 찬송 ; 234, 235, 82장.
2011. 11. 2. 수요일밤에배
오늘 본문의 말씀은 진설병 상, 즉 떡 상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살피는 가운데 이 떡 상이 가지고 있는 영적 의미를 상고하며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1. 떡 상의 모양.
여기 진설병 상은 가로 100cm, 세로 50cm, 높이 75cm의 크기(출25:23)의 조각목으로 만들었으며 금으로 입혔습니다. 채의 재료도 동일합니다. 그 위에 12덩이의 떡을 6개씩 두 줄로 놓았습니다. 그리고 떡 위에 유향 두 그릇이 각각 놓여 졌습니다. 매 떡은 안식일마다 바뀌어졌습니다. 바뀐 떡은 거룩한 성막 안에서 제사장들이 나누어 먹었습니다. 떡 상 위에는 대접, 숟가락, 잔, 붓는 병을 놓았습니다.
2. 떡 상의 의미.
떡 상은 감사와 헌신의 표로 백성들이 바치는 거룩한 떡을 진열하는 곳입니다. 제사장들은 매안식일마다 이곳에 12개의 떡을 두 줄로 늘어놓아야 했습니다(레24:5~8). 사실 진설병 상은 상 그 자체보다 그 위에 올려지는 “떡”이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떡 상 위에 매일 올리는 진설병은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데 결국 12개의 떡을 헌상하는 것은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바쳐진 떡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대제사장들과 그의 자손들이 성막 뜰에서 먹었습니다(레24:9). 떡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일용양식으로서 여기서는 생명을 하나님께 헌상하고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는 이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진설병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바치셨으며 또한 당신을 믿고 의뢰하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제공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며 매 순간 우리에게 구원과 힘과 능력을 제공해 주시는 분이십니다(요6:35, 48, 58).
떡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요6:47~51). 더 구체적으로 떡은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번제단에서 죄 사함을 받았고, 물두멍에서 성결함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리고 등대에서 사명적 빛 된 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성막의 밑은 흙바닥 그대로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의적으로 또 타의적으로 언제나 더러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영생의 양식인 그리스도의 말씀을 날마다 먹으며 늘 새롭게, 더 뜨겁게, 좀 더 강하게 영을 재창조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속적인 신앙생활의 승리를 위하여 떡 상, 즉 그리스도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이 말씀을 날마다 새롭게 공급받아야 합니다.
3. 떡의 특징.
그러면 우리는 어떤 떡을 먹어야 할까요? 대답은 진설병입니다. 그러면 진설병은 어떤 떡입니까? 그 떡의 의미는 무엇을 간직하고 있습니까?
1) 레마의 원칙입니다.
우리가 먹어야 할 진설병은 고운가루로 만들어야 합니다(레24:5). 말씀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로고스와 레마입니다. 성경말씀 66권은 로고스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 내게 힘을 주고 능력을 주는 것은 가루가 되어 소화될 수 있는 레마입니다.
2)교제의 원칙입니다.
진설병은 교제의 원칙으로 먹어야 합니다. 꼭 같이 나누어 먹어야 합니다. 떡 상은 사랑의 자리입니다(행2:46~47).
3)선교의 원칙입니다.
떡 상 위에는 12개의 떡이 놓여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합니다. 떡 상 위에는 전 민족의 떡이 올라와야 하고 또 그 모든 떡을 다 같이 교제를 나누며 먹어야 합니다.
4)오직의 원칙입니다.
진설병 외에 다른 떡을 떡 상 위에 올려놓아서는 안 됩니다. 또 진설병 외에 다른 떡을 성막 안에서 먹어서도 안 됩니다. 오직 진설병입니다. 오직 예수, 오직 성령, 오직 말씀입니다. 영의 사람은 오직 진설병, 즉 그리스도의 말씀만으로 살아야 합니다.
5)항상의 원칙입니다.
진설병은 하루 24시간, 1주 7일, 1년 365일 늘 떡 상 위에 차려져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잠시라도 우리에게서 떠나서는 안 됩니다. 복음은 영원합니다. 항상 먹어야 합니다.
6)성령의 원칙입니다.
진설병은 기름을 부어서 반죽하였습니다(레2:5). 그리고 12개의 떡 위에는 유향 2병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먹을 때는 그 기름과 함께 먹었습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말씀을 먹어야 함을 강력하게 의미하고 있습니다.
7)성결의 원칙입니다.
진설병은 바로 앞에 빛나고 있는 등대 앞에서 먹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빛이 없으면 먹을 수 없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빛 된 생활을 하며 말씀을 먹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8)번철의 원칙입니다.
불, 화로 즉 번철에 구운 떡을 먹으라고 했습니다. 불은 연단과 시험을 말합니다. 연단을 통과한 말씀만이 정말 굳센 믿음의 말씀이 됩니다.
9)성숙의 원칙입니다.
진설병, 곧 전병은 이리 저리 뒤집어 잘 익혀야 합니다. 골고루 익혀야 합니다. 진설병은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다 잘 익어야 합니다.
10)무교병의 원칙입니다.
진설병에는 효소가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레2:5, 출12:15). 왜 누룩을 넣지 말아야 할까요? 누룩은 악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누룩은 악독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설병에 누룩을 넣지 말라는 것은 복음의 순수성을 의미합니다.
11).사명의 원칙입니다.
반드시 거룩한 곳에서 먹어야 합니다. 거룩한 곳은 성막입니다(레25:9). 성소, 지성소, 성막 안에는 의자가 없습니다. 앉을 수가 없습니다. 늘 서서 일해야 합니다. 서서 진설병도 먹어야 합니다. 이것은 사명을 위해서 먹으라는 의미입니다.
12)안식일의 원칙입니다.
떡 상 위의 떡은 매 안식일마다 새것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레25:8). 이는 주일마다 새롭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공급받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진설병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또한 우리가 영원히 먹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제120강 등대와 예수 그리스도
(출37:17~24) 찬송 ; 276, 277, 259장.
2011. 11. 9. 수요일밤에배
성막 문에 들어서서 번제단을 거쳐 물두멍에서 손을 씻고 성소에 들어서면 휘황찬란한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정금입니다. 천장은 아름다운 앙장이요, 앞에 휘장은 찬란한 수를 놓은 휘장이요, 사면은 모두 금이기 때문입니다. 성소에 들어섰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왼쪽의 금으로 만든 등대입니다. 창문이 하나도 없는 집이지만 성소 안이 밝은 것은 이 등대의 빛 때문입니다.
1. 등대의 모양.
등대는 정금으로 만들었습니다. 정금 1달란트를 쳐서 등대를 만들었습니다. 등대의 모양을 보면 가운데 한 줄기가 있고 양편에 각각 3개의 가지가 나 있습니다. 그리고 등잔은 살구꽃 형상입니다. 불집게 불똥 그릇도 정금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그러면 이 등대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2. 등대의 특징.
성막 안에 등대를 두는 목적은 빛을 발하기 위해서입니다. 등대의 목적은 빛에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빛 된 생활, 사명의 생을 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빛 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믿음의 법칙을 따라야 합니다. 등대는 금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금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신랑 신부가 결혼할 때 금반지를 신물로 교환하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을 약속하는 의미입니다. 빛 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둘째, 고난의 법칙을 따라야 합니다. 등대를 만들 때 금을 녹여 만든 것이 아니라 쳐서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고난의 삶을 의미합니다. 성도가 세상에 살면서 빛 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고난의 삶을 각오해야 합니다.
셋째, 사명의 법칙이 있습니다. 성막 안에는 창이 하나도 없습니다. 단 하나의 빛이 있었는데 그것은 등대에서 비취는 빛입니다. 등대의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요8:12, 마5:14~16). 성도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넷째, 성령의 법칙입니다. 등대가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그 등대에 감람유를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등대 빛을 내게 됩니다. 감람유 없이는 절대로 빛을 낼 수 없습니다. 감람유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성도가 빛 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늘 성령의 은혜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다섯째, 연결의 법칙입니다. 등대는 가운데 줄기에 여섯 개의 가지가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 곳에 감람유를 부으면 모두에게 공급되어 빛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가운데 줄기는 그리스도, 여섯 개의 가지는 우리 성도를 의미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붙어 있어야만 빛을 낼 수 있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여섯째, 연속의 법칙입니다. 등대의 빛은 밤낮 계속 켜져 있어야 합니다. 늘 우리의 심령 안에는 그리스도의 빛이 꺼져서는 안 됩니다.
일곱째, 닮음의 법칙입니다. 등대는 살구꽃 형상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살구꽃은 꽃 중에서 가장 먼저 피는 꽃입니다. 따라서 열매도 첫 열매입니다. 그리스도는 첫 열매입니다(고전15:20). 빛 된 생활을 하려면 첫 열매인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여덟째, 완전의 법칙입니다. 등대는 가운데 줄기 하나에 가지 여섯 개가 붙어 일곱 개의 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일곱은 완전수입니다. 빛 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완전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홉째, 간검의 법칙입니다. 등대의 불은 늘 꺼지지 않도록 저녁부터 아침까지 간검해야 합니다(출27:20~21). 빛 된 생활을 하려면 늘 내 안에 불이 꺼져 있지 아니한 가 간검해야 합니다.
열째, 연합의 법칙입니다. 빛을 내되 한 개만 내서는 안 됩니다. 일곱 개가 같이 빛을 내야 합니다. 연합된 힘으로 빛을 내야 합니다. 교회란 독창이 아니라 합창입니다. 성도가 함께 연합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열한째, 무용의 법칙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하는 등대는 버림받았습니다. 무용지물이기 때문입니다(계2:25). 빛을 내지 못하는 등대는 이미 등대가 아닙니다(마5:13). 빛을 내지 못하는 성도는 성도가 아닙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멘.
제121강 분향단에 계시된 성도의 삶
(출37:25~29) 찬송 ; 480, 483, 484장.
2011. 11. 16. 수요일밤예배
성막에는 두 개의 단이 있습니다. 둘 다 나무로 만들었지만 하나는 놋으로 입혀서 놋제단이라고 하였습니다(출38:30). 그러나 또 하나는 금으로 입혀서 금단이라고 불렀습니다(출39:38). 또 놋제단은 희생을 드리는 곳이기에 번제단이라고 부르고, 금단은 향을 피우는 곳이기에 향단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우리가 살피고자 하는 것은 분향단입니다. 이 분향단에서 피어오르는 향은 기도를 상징합니다. 시141:2절 말씀에 보면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같이 되게 하소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계5:8절 말씀에도 보면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 눅1:9~10절에도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을 살펴보면 분향단에서 피어오르는 향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임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본문의 말씀에 나오는 분향단의 상징적 의미를 통해서 우리의 기도생활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살피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기도는 은혜 받은 자, 또는 은혜 받을 자만이 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향을 사르는 불은 번제단에서 취해 왔습니다. 번제단은 희생제물을 사르던 곳입니다. 희생제물을 사르던 불을 가져와 향단의 향을 피웠다고 하는 것은 깊은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또 번제단에서 속죄제물의 피를 가져와 분향단의 뿔에 바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가능하게 했습니다. 기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기도는 인간의 의지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 받은 자, 은혜 받을 자만이 할 수 있는 축복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 없습니다. 혹 인간적으로, 문장을 쓰는 식으로 기도의 흉내는 낼 수 있을는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기도는 드릴 수 없습니다.
2. 기도는 생활입니다.
분향단에 향을 피우는 제사장들은 매일 조석으로 성소에 들어가서 향을 피웠습니다. 출30:7~8절 말씀에 보면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정리할 때에 사를지며 또 저녁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지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향을 피우는 일은 날씨에 따라 변동될 수 없었습니다. 애경사 때문에 변개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제사장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경건한 마음으로 성소의 문을 열고 들어가 분향단에 향을 피웠습니다. 제사장의 형편에 따라서 피우기도 하고 안 피우기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 생활이 어떻게 유지되어야 하는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흔히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왜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조금이라도 쉬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가 영혼의 호흡임을 여러분의 실제 생활 속에서 경험하며 사십니까? 우리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을 때 우리의 영혼이 피폐해 감을 모두가 느낄 수 있습니다. 여러분! 기도가 성도들에게 있어서 단순히 위안과 평안을 추구하는 방편만은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최대의 무기요 유일한 축복의 원동력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조그만 시험에도 쉽게 넘어집니다. 믿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복음서에 보면은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고백함으로 예수님에게서 큰 칭찬을 받았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내가 네게 천국 열쇠를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바로 알지 못하고 그 길을 가로 막기도 하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베드로가 믿음이 없어서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기도하지 않음으로 시험에 빠져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겟세마네 동산에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를 생활화하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향을 피우라고 말씀하셨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제시하신 방법에 따라 향을 피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29절 말씀에 보면 “거룩한 관유와 향품으로 정결한 향을 만들었으되 향을 만드는 법대로 하였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거룩한 관유와 향품”이라고 했는데 여기 향품은 다른 성경 구절에서 소합향, 나감향, 풍자향, 유향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향은 쉽게 얻을 수 있는 향이 아닙니다. 팔레스틴, 인도, 아라비아 등지에서 나는 향품입니다. 이 네 가지 향을 한데 섞어서 복합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부패하지 않도록 소금을 섞었습니다.
왜 이렇게 까다롭게 지시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과 뜻에 순종하는 것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러나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마지막 죽음을 눈앞에 두고 십자가를 져야 하는 괴로운 순간에도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원대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나의 원대로 기도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기도는 영적 전쟁의 무기입니다. 기도는 만능이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기도는 여러분에게 허락된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의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시34:4절 말씀에 보면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미국의 16대 대통령인 아브라함 링컨이 손으로 짚어가며 일생 동안 묵상했던 말씀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로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제122강 번제단과 물두멍에 계시된 성도의 삶
(출38:1~8) 찬송 ; 182, 184, 219장.
2011. 11. 23. 수요일밤예배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따라 번제단과 물두멍을 만든 것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이 번제단과 물두멍이 가지고 있는 영적 의미를 통해서 우리 성도의 삶을 조명해 보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번제단을 통한 성도의 삶.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조각목으로 장이 5규빗, 광이 5규빗, 고가 3규빗으로 하고 그 네 모퉁이 위에 뿔을 만들고 그 뿔이 그것을 연하게 하고 그 단을 놋으로 입혔습니다. 즉 길이와 넓이가 2.25m, 높이가 1.35m의 네모난 제단을 만들고 놋으로 입혔습니다. 이것을 놋으로 입혔기 때문에 놋제단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불로 때우는 곳이기 때문에 번제단이라고 부릅니다(출30:28, 레4:7).
이 번제단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역 안으로 들어갈 때 제일 먼저 대하는 장소요 물건입니다. 번제단에서 제물을 태우지 않고서는 성막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번제단은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으로 백성들의 죄가 사함 받는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번제단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과 인간의 중재역할을 하는 장소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와 교제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교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름다운 교제의 삶이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 막혀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최대의 비극입니다. 하나님과 영원토록 교제하며 그 안에서 은혜와 축복을 누리며 살아야 할 인간에게 그 길이 막혀 버렸으니 치명적인 위기 상황을 만난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은혜의 통로를 만들어 주신 것이 바로 이 번제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번제단에서 죄로 말미암아 사망 가운데 있는 인간을 만나 주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번제단은 어떠한 장소입니까? 번제단은 희생의 장소입니다. 죽음의 장소가 이 번제단입니다. 누군가가 이 희생의 장소, 죽음의 장소에서 죽어야만 하나님의 노가 풀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간 대신 그 곳에서 짐승의 피를 대신 받으시고 인간을 용서해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흠이 없고 점이 없는 정결한 짐승이 우리를 위해 그곳에서 죽어 줄 때에 우리는 이제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제단에 올려진 흠이 없고 점이 없는 정결한 짐승은 무엇을 예표하는 것입니까?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한 마리의 속죄 양으로 죽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우리에게 얼굴을 향하시고 화해의 손을 내미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번제단을 바라보고 생각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 은혜를 마음속에 새겨야 합니다. 죄의 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하나님께 화목제물로 드리심으로 범죄한 인간과 하나님과의 사이를 화해시키셨던 것처럼 우리도 화목케 하는 직책을 잘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2. 물두멍을 통한 성도의 삶.
본문 8절 말씀에 보면 “그가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하였으니 곧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막의 기구 가운데 하나였던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만들어 제사장들이 손과 발을 씻고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성막 문을 들어서면 번제단이 있고, 번제단을 통과하면 물두멍이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십자가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로 이어지는 것이 물두멍입니다. 물두멍은 성결의 상징입니다. 번제단이 성도에게 칭의를 선언하는 것이라면 이 물두멍은 성도의 성화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칭의는 일회적입니다. 그러나 성화는 우리 삶이 다하는 날까지 계속되어야 할 성도의 삶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면 물두멍을 통해서 비추어 보아야 할 성도의 삶은 무엇일까요?
첫째, 물두멍은 분리된 삶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물두멍은 놋으로 만들었습니다. 출38:8절 말씀에 보면 “그가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하였으니 곧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받은 속전으로 은받침을 만들어 성막의 기초를 놓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인들이 드린 거울로 물두멍을 만들었습니다.
옛날에는 오늘날처럼 수은으로 거울을 만들지 않고 구리로 만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다”고 말씀했는데 바로 이것을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이지요? 거울로 보면 희미합니까? 아닙니다. 똑똑합니다. 실물과 똑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희미하다고 한 것은 그 당시 거울이 구리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희미하게 보였던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여자 성도님들 왜 거울을 봅니까? 자신을 좀 더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 단장하기 위해서 보시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여인들은 성막을 지을 때 거울보기를 포기하고 그것을 물두멍을 만드는데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거울을 버렸다고 하는 것은 허영적인 옛 성품을 버렸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사실 여인들이 거울을 포기하고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은 구원 받은 사람들로서 세상과 구별, 즉 분리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롬6:1절 말씀에 보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전에 붙잡고 있었던 세상의 정욕과 죄악의 생활에서 분리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많은 것 같은데 세상이 변화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옛 생활을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서 나의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성도”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구별된 사람, 깨끗하게 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물두멍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자아를 부인하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하여 세상과 분리되어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고백은 세상과 분리된 자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세상에 대하여서는 죽고 의에 대하여서만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물두멍은 정결한 삶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성막 안은 마루바닥이 아니고 흙이 있는 땅바닥입니다. 제사장은 이 땅위를 걸어 다니면서 일을 합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발은 더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가운데서도 더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씻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사장이 취임할 때도 그를 회막문으로 데려다가 온 몸을 씻어 주었습니다. 이때는 다른 사람이 씻어 주었습니다(출29:4). 이렇게 해서 제사장에 취임하고 성막에 들어가서 섬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성막에 들어갈 때마다 씻어야 합니다.
중생의 씻음은 한번입니다. 그리고 그 씻음은 영원한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화의 씻음은 매일 아니 수시로 반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평생에 세례를 한번 받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 주님이 우리의 몸을 씻어 주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손발을 씻는 일은 자주해야 합니다. 자주 더러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막 안에 자리 잡은 물두멍은 우리의 삶이 정결해야함을 웅변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번제단과 물두멍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에게 있어서 아주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속죄함을 받고 정결함을 얻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번제단과 물두멍을 통과하지 않고는 안 되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묵상하며 그 보혈로 씻음 받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회개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물두멍은 성막 안에 두었습니다. 아무 장소에나 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지 아니하면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없습니다. 나의 모습을 바로 볼 수 없습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이 정결의 비결입니다.
여러분! 물두멍이 성막, 즉 교회 안에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멘.
제123강 성막 뜰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
(출38:9~20) 찬송 ; 415, 424, 427장.
2011. 11. 30. 수요일밤예배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성막 뜰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을 가는 동안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위해서 모세로 하여금 성막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성막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그 성막은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1. 성막 뜰의 크기.
남쪽으로 100규빗, 북쪽으로 100규빗이며, 서쪽으로 50규빗, 동쪽으로 50규빗이었습니다. 이것을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1규빗이 약 50cm이니까 길이 50m, 폭 25m의 땅입니다. 그리고 이 성막의 위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치고 있는 곳에 정 중앙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방향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길게 서 있는 모습이며 그 성막의 뜰 안에 성막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막 뜰의 모양은 기둥을 세우고 포장으로 쳐 놓은 모습입니다. 북쪽과 남쪽은 각각 20개, 동쪽은 6개, 서쪽은 10개의 기둥을 세웠습니다. 동쪽과 서쪽의 기둥 개수가 다른 것은 동쪽에 출입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매 기둥마다 놋으로 만든 받침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가름대와 가름대를 끼울 고리, 그리고 기둥의 머리싸개를 은으로 만들었습니다.
다음에 그 기둥을 따라 사면에 칠 포장을 세마포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성막 뜰에 들어가는 유일한 출입구를 휘장으로 만들었는데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뜰의 문장”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막을 단단하게 고정시키기 위해서 성막 말뚝과 뜰의 사면 포장을 견고하게 고정시키기 위해서 사면 포장 말뚝을 만들었는데 이것도 다 놋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성막과 성막 뜰을 만들어 세움으로 성막이 완벽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다시 한 번 성막과 성막 뜰을 정리하면 동쪽에서 서쪽으로 50m, 남쪽에서 북쪽으로 25m의 뜰 안에 안쪽(서쪽)으로 성막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성막의 규모는 길이가 15m, 넓이가 5m, 그리고 높이가 5m입니다. 그리고 이 성막은 성소와 지성소로 나누어지는데 지성소가 5m, 성소가 10m의 길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2. 성막의 각 성역에 자리 잡고 있는 것들.
1) 지성소에 있는 것들.
법궤, 속죄소, 그룹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 법궤 윗부분이 속죄소이며 이 속죄소에 그룹들이 있습니다.
2) 성소에 있는 것들.
진설병 상과 등대와 분향단이 있는데 진설병 상은 북쪽에 자리 잡고 있고, 등대는 남쪽에, 그리고 분향단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 출입문 쪽에 있습니다.
3) 성막 뜰에 있는 것들.
번제단과 물두멍이 있는데 번제단은 성막 뜰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고, 물두멍은 번제단과 성소로 들어가는 출입문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2. 성막 뜰에 계시된 영적 의미.
1)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나타나 있습니다.
성막 뜰은 희생의 장소입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제물들이 피 흘리며 죽어 갔습니다. 그리고 그 희생을 통하여 많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릴 수 있었으며 또한 죄 씻음을 받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뜰에 거하는 무리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 머물 수 있는 것은 피 흘린 희생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 희생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어주신 희생의 사역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그 희생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히10:19절 말씀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막 뜰의 이 번제단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사역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화목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성막 뜰은 희생을 상징할 뿐 아니라 제사장의 가족들이 음식을 나누어 먹는 장소로서 회목을 상징하기도 합니다(레6:16). 그곳에서는 거룩한 제사에서 물려진 음식물들을 놓고 제사장의 온 식구들이 둘러 앉아 하나님의 은혜를 기리며 즐거운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목,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목이 전제됨으로서 가능한 일입니다. 이 은혜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사역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성막 뜰에 거하는 성도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성막 뜰에 거하는 우리는 매일 매순간 하나님과 화목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과도 화목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머지않아 우리 주님 오시는 날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주이신 주님께서 성막 뜰에 거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별하여 따로 세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성막 뜰에 있었다 할지라도 단순히 뜰만 밟고 서 있었던 사람 또한 주님의 책망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거룩한 뜰에 서 있는 자로서 날마다 거룩한 삶을 힘쓰며 이웃과도 화목한 생활을 이루어 나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성도들 되시어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제124강 성막 건립의 경과보고와 그 의미
(출38:21~31) 찬송 ; 245, 246, 378장.
2011. 12. 7. 수요일밤예배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성막 건립의 경과보고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건축에 사용된 금, 은, 놋의 용도와 분량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금은 29달란트 730세겔, 은은 100달란트 1,775세겔, 놋은 70달란트 2,400세겔이었습니다. 그러면 금과 은과 놋은 각각 어디에 쓰여졌으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1. 성막에 쓰여진 금과 은과 놋의 용도와 그 의미.
첫째, 금의 용도와 그 의미.
금을 사용하여 만든 성막의 기물들은 하나님의 법궤, 속죄소와 그 위에 서 있는 두 그룹, 그리고 떡상과 그 부속 기물들과 분향단을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법궤는 지성소에 있었습니다. 떡상과 등대 그리고 분향단은 성소에 있었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는 곳이며 성소는 하나님을 섬기는 곳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지성소와 성소는 이스라엘의 사상과 생활의 핵심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지성소는 하나님을, 성소는 성도의 신앙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은의 용도와 그 의미.
은이 사용된 곳은 성소의 판장과 문장 기둥의 받침, 성소의 기둥 가름대와 기둥 갈고리를 만드는데 사용되고 또 그 기둥머리를 싸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은이 성소의 기둥에 많이 사용되었다고 하는 것은 상징적인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은은 어떤 기능이 있습니까? 은은 제독작용을 합니다. 그런데 그 은이 성소의 기물에 사용되었다고 하는 것은 제독, 즉 속죄의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셋째, 놋의 용도와 그 의미.
놋으로는 회막 문이나 뜰 사면의 기둥 받침, 번제단과 거기에 속한 부속 기물, 놋 그물, 놋 물두멍 등을 만들었습니다. 이 모든 기물들은 성막 마당에 있는 기물들입니다. 성막 마당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거기에서 번제의 제물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성도의 삶은 제사 즉 예배드리는 삶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그러면 이제 전체적으로 성막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첫째, 성막은 지은 죄를 용서받고 찬양과 감사를 드리며 위로받고 회복되는 축복의 장소입니다.
성막의 축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율법으로 절망하고 좌절하고 있는 자들이 용서받는 자리가 바로 성막입니다. 만약에 성막이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말씀은 죄를 깨닫게 합니다. 죄를 지었는데, 잘못을 했는데 해결할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죄를 해결하는 것은 십자가로 인해서이지 말씀자체가 우리 죄를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아야 하는데 이 죄 사함을 받는 장소가 바로 성막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막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와서 죄 용서를 받을 수 있도록 성막을 주신 것입니다. 일 년에 한 번씩 내가 죽을 수 없으니까 염소나 양이나 송아지를 대신 죽게 함으로써 그 피를 가지고 내가 죽을 죄를 대신해서 그 성소에 가서 뿌리게 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내 죄를 용서받도록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막의 축복입니다.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성소에 들어가면 그동안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성소에 들어가서 감사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 경배하고 예배하고 찬양하고 싶을 때 그 성소에 가서 경배하고 예배하고 찬양하게 됩니다.
따라서 성소에 들어가면 죄 용서를 받고,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성소에 들어가면 감사가 넘칩니다. 성소에 들어가면 경배와 찬양이 흘러넘칩니다. 하나님이 다시 나를 세탁해 주시고 새롭게 거듭나게 해주셔서 그 더럽고 추잡하고 형편없던 나를 깨끗이 씻어서 이 세상으로 돌려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안심하고 살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광야의 40년 동안 축복 받았던 성소가 바로 오늘날의 교회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습니까? 그런데 만약 교회가 없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얼마나 방황하겠습니까? 세상에 예수님을 믿고 제일 불쌍한 사람이 교회를 정하지 못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이 교회, 내일은 저 교회하는 사람은 장례식 치를 곳도 없습니다. 자기가 제사 드리는 제단, 자기가 위로받을 곳, 자기가 치유 받을 곳, 자기가 회복 받을 곳이 없다면 우리는 예수님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축복 중에 축복은 여러분이 나와서 예배드릴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눈물을 흘리고 하소연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위로와 격려를 받고 세상을 향하여 다시 나갈 수 있는 그런 장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을 넉넉히 버틴 이유는 성소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고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먹었습니다. 쓴물이 변하여 단물이 되는 것도 보았고 원수도 다 물러갔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매일 매일 절망하고 좌절하고 실수를 반복하는 그들에게 다시 죄 용서함 받고 회개하고 위로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새 힘을 얻어 다시 광야로 나갈 수 있게 했던 성소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넉넉히 이길 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책임이 막중합니다. 교회가 힘이 들면 성도들은 어떻습니까? 힘이 듭니다. 또 반대로 한 성도가 힘이 들면 어떻습니까? 온 교회가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시끄러우면 내 생활이 얼마나 복잡해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날마다 기적이 일어나고 축복이 넘치고 찬송이 흘러넘치고 예배가 이루어지면 어떻습니까? 그 예배를 잘 드리고 나면 일주일동안 구름에 뜬 것처럼 은혜 가운데 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것이 성막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 때문에 40년 동안을 넉넉히 버티고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교파나 제도가 아닙니다. 건물이나 교파나 제도로 교회를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교회에 와서 누구를 만납니까?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사람을 만나는 곳이 아니고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여기서 누구로부터 위로를 받아야 합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다시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광야에 있는 성막이요, 교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하여 성막의 축복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둘째, 죄 사함을 받던 구약시대의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성도를 상징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성막이 바로 여러분들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고전6:19절 말씀에 보면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이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요 교회라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몸인 교회를 우리가 깨끗하게 만들고 거룩하게 만들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인 우리의 몸이 깨끗하면 이 세상에서 우리는 승리하며 살 수 있습니다. 롬12:1절 말씀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절망한 인간이 성소에 들어가면 예수님을 만납니다. 구약에 나타난 성막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오신 이후 예수님을 만나서 믿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았지만 구약의 사람들은 성막에 들어가면 예수님을 느끼고 만나고 거기서 죄 용서함을 받고 회개를 하고 회복을 하고 변화를 받고 위로를 받았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여러분이 매일 매일 승리하며 살 수 있는 비결은 예수님을 매일 만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부활 앞에 매일 나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삶을 매일 살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풍성한 은혜를 더하여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를 잘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다니는 교회가 정말 성령님이 임하시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교회가 되도록 힘써 기도하셔야 합니다. 마귀의 최대 전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회를 싸움시키는 것입니다. 교회가 싸움나면 어떻게 됩니까? 부모가 싸우고 이혼하는 것 같이 됩니다. 부모가 싸우고 이혼하면 자식들은 다 방황합니다. 여러분, 마귀는 여러분이 다니는 교회를 어떤 수단과 방법을 막론하고 자꾸 싸움시키고 분열시켜서 교인들이 신앙생활 못하도록 만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 땅의 모든 교회는 하나이며 교회 구성원은 한 식구입니다. 그러나 지역상 지교회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나 다른 교회 성도나 우리 모두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를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다니는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교회가 부족하면 눈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좋은 교회를 만드십시오. 그래야 할 이유는 교회가 행복해야 내가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힘이 들면 어디를 가나 힘이 듭니다. 그런 마음이 없는 사람은 진정한 성도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다니는 교회를 눈물이 있고, 기도가 있고, 감사가 있고, 위로가 있고, 축복이 있는 교회로 만들 때 이 광야 같은 세상은 축복의 도시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막의 주인이며 교회의 주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높여질 때 여러분의 삶에 고통과 염려와 근심과 걱정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축복은 계속될 것입니다. 아멘.
제125강 제사장의 성의(聖衣)
(출39:1~31) 찬송 ; 197, 200, 212장.
2011. 12. 14. 수요일밤예배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28장 말씀에서 제사장의 옷을 지을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에 따라 오늘 본문에서 제사장의 옷이 만들어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 속에서 구별된 자들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제사장들은 성도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구별하여 하나님의 일을 전담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은 구별된 사람들 중에서도 구별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들이 입어야 할 옷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입는 옷은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냅니다. 교복은 학생임을 나타내고, 제복은 그 사람이 몸담고 있는 일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따라서 제사장은 그가 입은 옷으로 그의 신분을 나타내고 또한 구별하였습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누가 되었습니까? 제사장은 시험을 치러서 선발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어떤 자격에 의해서 선발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지명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아래 선택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부름 받은 일꾼들은 다만 감사할 따름이지 다른 조건을 내세울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신약시대에는 누가 제사장들입니까? 오늘날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 받은 모든 성도들이 다 제사장적 사명을 가지고 있고, 제사장적 위치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만인제사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제사장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오늘은 제사장의 옷에 대하여 상고함으로 이 옷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살피면서 은혜 받고자 합니다.
1. 제사장의 에봇(2~7).
이 에봇은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공교하게 짜서 만든 옷입니다. 이 에봇은 일종의 조끼형식으로 제사장의 앞면과 뒷면을 가리는 옷입니다. 제사장이 입는 옷 중에 제일 겉에 입는 옷이 바로 이 에봇입니다.
그러면 이 옷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옷은 제사장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에봇에 두 견대를 달아 두 끝을 연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견대에 호마노 보석 두 개를 취하여 어깨에 놓고, 그 보석에다가 각각 6개씩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이름을 새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제사장의 두 어깨에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진 보석이 달렸습니다.
여러분, 그러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제사장은 온 백성의 짐을 져야 하는 직책입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우리 주님께서 온 인류의 모든 짐을 다 지고 계십니다. 그 주님의 대속의 사역이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사도 베드로를 통해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제자장작 사명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2. 흉패와 열 두 보석(8~21).
가슴은 사랑과 마음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이스라엘 각 지파의 이름이 새겨진 보석을 부착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상징합니다. 또한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하나님께 기억된 존재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가슴에 부착된 흉패는 아로새겨진 이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한 실과 변치 않는 금실로 엮어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가를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롬8:30절 말씀에 보면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이름도 우리의 유일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아로 새겨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귀한 보석으로 여기시고 사랑이 풍성한 품에 품어주십니다.
3. 제사장의 겉 옷(22~26).
겉옷은 청색으로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겉옷은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청색, 자색, 홍색실로 석류를 수놓고 일정한 간격으로 금방울을 달았습니다. 여러분! 청색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청색은 생명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을 얻은 자들입니다. 이 생명은 7, 80평생 살다가 죽는 유한한 생명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된 영원한 생명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4. 제사장의 속 옷(27절).
제사장의 속옷은 가는 베실로 짠 하얀 세마포입니다. 제사장의 몸을 하얀 세마포로 가렸습니다. 여러분, 세마포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마포는 순결을 상징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주님이 오실 때까지 흠 없이 보존되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우리 성도는 순결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갈등에 쌓이게 됩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리 힘으로 우리 자신을 순결하게 유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포기해 버릴까요? 아닙니다. 순결할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순결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방법이 무엇일까요? 의의 세마포 옷을 입는 것입니다. 여기 의의 세마포 속옷은 그리스도의 의로 이루어진 옷을 가리킵니다. 갈3:27절 말씀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로 속사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5. 띠(29절).
띠는 제사장이 허리에 두르는 끈으로서 옷이 내려오거나 흐트러지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띠의 상징적 의미는 봉사를 위한 준비입니다. 사도 바울은 엡6:13~14절 말씀에서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한 싸움을 해야 할 십자가의 군병들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로 허리를 단단히 매고 죄악 된 세상과 싸워 날마다 승리하여야 합니다. 그 외에도 관이 있고, 고의가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이 모두가 다 소중한 옷들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옷들이 담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거룩함입니다. 그러나 제사장의 옷은 제사장의 위용을 나타내기 위한 장식품이 아닙니다. 제사장의 옷을 보는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을 인식하고 그 분의 거룩함을 느끼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자신의 명예나 만족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공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제사장적 직분을 맡겨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멘.
제126강 성막 역사의 준공
(출39:32~43) 찬송 ; 377, 378, 248장.
2011. 12. 21. 수요일밤예배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성막 건축의 주책임자인 부사렐과 오홀리압 그리고 지혜로운 자들이 제사장의 의복 제작(1~31절)을 끝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모든 성막 제작을 완료하고 모세에게 그 결과를 보고하는 장면입니다.
모세에게 보고된 성물들을 보면 하나같이 하나님의 대언자 모세의 지시에 따라 그 규격과 모양이 제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32~41절). 하나님께서는 출25:40절 말씀에서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식양대로 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이 말씀에 따라 성막 건축에 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고, 그들 또한 그 말씀에 따라 조금도 틀림이 없이 모든 성물들을 다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받는 모세의 마음은 너무도 기뻤습니다. 또 너무도 감격스러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또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만나주시며 또한 사죄의 은총이 행해지는 성막을 건축하여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는 것이 너무도 기쁘고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권위로서 그들에게 축복합니다. 본문 42~43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이스라엘 자손이 모든 역사를 필하매 모세가 그 필한 모든 것을 본즉 여호와께서 명하신대로 되었으므로 그들에게 축복하였더라.” 아멘.
그러면 성막 건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1. 그들은 참으로 열심히 일함으로 이 일을 이루었습니다.
성막이 건축될 당시는 오늘날처럼 건축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모든 작업을 손으로 해야만 했으며 특히 잔손질이 많은 복잡한 공정들을 다섯 달 동안에 완성했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열심히 성막 건축에 임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필요한 마음 자세는 말씀에 따른 열심입니다. 롬12:11절 말씀에 보면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렘48:10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자기 칼을 금하여 피를 흘리지 아니하는 자도 저주를 당할 것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필요한 것은 열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건축하는 과정들을 보면 그들은 분쟁하지 않았으며 교만한 마음으로 일을 그르치는 자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기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성막을 짓는 일에 써 주신 것에 감사해서 다만 열심히 일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일감을 맡기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모든 일이 축복으로 여러분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2. 그들은 자신의 생각은 뒤로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본문 32절 말씀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주관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생각을 관철시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서 다 좋은데 이 점에 있어서 조금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기 보다는 내 뜻대로 일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기 전에 내 편한 대로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정말로 아쉬운 부분입니다. 내 뜻대로 하고 내 마음대로 한다면 그것은 내 일이지 하나님의 일이 결코 아님을 우리 성도들은 명심해야 합니다. 마7:21~23절 말씀에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아무리 주의 이름으로 큰일을 하고 능력을 행하고 모든 사람들이 다 박수쳐주는 일을 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일을 불법이라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할 때에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일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일이고 여러분에게 축복이 되는 일입니다.
3. 그들은 끝까지 충성하므로 이 일을 이루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성막 기구를 만들어 모세에게로 가져왔습니다. 본문33절 말씀에 보면 “그들이 성막을 모세에게로 가져왔으니 곧 막과, 그 모든 기구와, 그 갈고리들과, 그 널판들과, 그 띠들과, 그 기둥들과, 그 받침들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마지막까지 충성했고 신실했음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모든 성막 기구들을 모세에게 가져왔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대리자인 모세의 판결을 기다린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무슨 일을 할 때 마지막에 다다르면 불성실하고 해이해 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것은 끝까지 충성하지 못하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끝까지 충성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는 주의 일은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인정해 주셔야 하고, 잘했다고 칭찬하시면서 결재를 해 주셔야만 비로소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충성해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본문 43절 말씀에 보면 “모세가 그 필한 모든 것을 본즉 여호와께서 명하신대로 되었으므로 그들에게 축복하였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시는 모든 주의 일도 주의 종을 통해서 축복을 받으시고 하나님에 의해 복을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서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서 믿음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아멘.
제127강 성막의 준공과 봉헌
(출40:1~33) 찬송 ; 245, 372, 376장.
2011. 12. 28. 수요일밤예배.
이제 출애굽기 마지막 장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성막의 모든 구조물들이 만들어지고 성물들이 완성됨으로 인하여 그것을 각각의 장소에 배치하고 하나님께 봉헌하는 장면과 이 성막 봉헌을 받으신 하나님께서 성막 안에 영광스럽게 임재하시는 장면을 묘사하는 부분입니다.
이 말씀을 둘로 나누어서 오늘은 본문 1~33절 말씀까지를 중심으로 하여 “성막의 준공과 봉헌”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성막의 모든 부분 부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성막 건축은 그 시작부터 마칠 때까지 인간의 생각으로 되어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구약에서 믿음이 좋은 사람을 들라고 하면 다윗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가리켜서 “이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원했고, 또 그렇게 산 사람입니다. 이 다윗이 하나님 앞에 죄송스러운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자기는 백향목 호화찬란한 궁궐에 거하는데 하나님의 성막은 바람에 흩날리는 천막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의 전, 즉 성전을 지어서 봉헌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손에서 성전 받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군인으로서 피를 많이 흘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막이나 성전은 내가 짓겠다고 해서 짓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운데 허락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아주 소중한 교훈을 주는 원리입니다. 즉 하나님의 일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봉사도 충성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내게 은혜와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성막 건축의 내용들을 보면 그 구상과 설계에서부터 완성 및 실제적인 효력 발생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하나님의 계시를 중심해서 실행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성막과 하나님의 사역자는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셔야 효력을 발할 수 있습니다.
본문 12~16절 말씀에 보면 성막 봉사에 임할 제사장의 정결의식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아론과 그 아들들을 회막문으로 데려다가 물로 씻기고 아론에게 거룩한 옷을 입히고 그에게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여 그로 내게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게 하라 너는 또 그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겉옷을 입히고 그 아비에게 기름을 부음 같이 그들에게도 부어서 그들로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그들이 기름 부음을 받았은즉 대대로 영영히 제사장이 되리라 하시매 모세가 그같이 행하되 곧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행하였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막은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가운데 실제적인 쓰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당을 건축하면 어떻게 합니까? 봉헌식을 갖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지은 예배당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식을 거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해 드리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겠다는 서약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역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아론에게 기름을 부어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임재와 승인,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른 제사와 경배제도를 통해서만이 그 가치와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막은 봉헌예식, 사역자는 기름부음의 예식을 거행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3. 성막의 봉헌.
본문17~33절 말씀까지는 성막 봉헌식을 위한 여러 준비와 성막 조립이 진행되는 장면을 묘사하는 부분입니다. 모세는 순서에 따라서,
첫째, 성소와 지성소로 이루어진 성막 본체를 세웁니다(18~19절).
둘째, 지성소 내부의 성물을 완비합니다(20~21절).
셋째, 성소 내부의 성물을 각각의 위치에 따라 정렬시킵니다(22~28절).
넷째, 성막 뜰에 배치될 번제단, 물두멍, 및 울타리를 배치합니다(29~33절).
이렇게 해서 성막의 완전한 형태를 갖추었습니다. 이 일이 있기까지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에 따라 모든 성물들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만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조립하고 배치하여 완벽한 성막을 완성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들의 삶의 원리입니다. 내 뜻대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입니다. 내 영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이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질까요? 이제 이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중심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 동안 모세를 통하여 들어왔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이제는 성막이라는 확고한 실체적 대상으로 나타나 그 성막을 중심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이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예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곳에서 그의 백성들을 만나주시고, 죄 사함의 예식을 받으시고 죄를 용서하시며, 새 은혜를 힘입어 세상 삶의 현장으로 나가게 하십니다.
여러분! 그러면 오늘 우리 시대에 있어서 성막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 모든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그 은혜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제128강 성막에 임한 여호와의 영광
(출40:34~38) 찬송 ; 331, 35, 9장.
2012. 1. 4. 수요일밤예배.
오늘 본문의 말씀은 출애굽기의 결론의 부분으로서 성막이 완성된 후 그 위에 구름이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히 임하는 장면(34~35절)을 기록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지 만 일 년 되었을 때 비로소 그들이 바라고 바라던 성막이 완성되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무한한 기쁨이었습니다. 성막 완공을 기뻐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헌신과 봉사를 즐거이 받으셨습니다. 본문 34절 말씀에 보면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했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헌신과 봉사를 통해서 건축하여 드린 성막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받으셨다는 것을 증명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 위에 머물렀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1. 하나님께서 성막을 기쁘게 받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헌신과 봉사는 우리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헌신과 봉사여야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여야 합니다. 창세기 서두에 보면 아담의 아들인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 즉 오늘로 말하면 예배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나름대로 하나님께 정성을 드려 예배를 드렸는데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인류 역사에 큰 오점을 남기는 살인사건으로 비화되어 버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내가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항상 받으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십니다. 광야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여 헌신과 봉사를 해서 성막을 지어 하나님께 드리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뻐 받으셨다는 표시로 구름과 영광으로 성막 가운데 임재하셨습니다.
2. 성막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나타냅니다.
성막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성막을 건축하기 위하여 드린 예물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들은 자기가 소유하고 있던 금붙이도, 건축 자재도, 성막을 건축하기에 필요한 것이라면 모든 것을 기쁨으로 드려서 성막을 완성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고와 땀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하나님께 봉헌을 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소유권이 하나님께로 넘어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성막이 이제 내 것이라고 하는 의미에서 그 성막 안에 영광 가운데 임재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교회를 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6:16~20).
3. 하나님이 성막을 거룩하게 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출29:43~44절 말씀에 보면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을 인하여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 내가 그 회막과 단을 거룩하게 하며 아론과 그 아들들도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외형상으로 본다면 다른 건물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립한 성막이나 별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성막은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는 곳입니다. 거룩한 장막입니다. 그래서 거룩할 성(聖 )자를 써서 성막이라고 부릅니다. 그곳에 이제 구름이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임했다고 하는 것은 그 전을 하나님께서 거룩한 처소로 인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거룩한 처소로 인치셨습니다. 신약시대의 성전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거룩한 자로 인치셨습니다. 흠이 없는 자로 여겨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4. 하나님의 계속적인 인도를 의미합니다.
본문36~38절 말씀에 보면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민9:17절 말씀에 보면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진행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막에 덮였던 구름은 그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했습니다. 그들이 광야 길을 다 마치고 가나안 땅에 정착할 때까지 이 구름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그들과 함께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 주시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사7:14)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 보좌에 계셨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함께 계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임마누엘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은 세상을 떠나가시면서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약속대로 성령님을 보내주시고 우리 심령에 영으로 임재하셔서 우리를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의 보호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들어온 지 이제 1년 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39년을 광야에서 지내야 합니다. 이 광야는 살기 좋은 유토피아가 아닙니다. 혹독한 추위와 싸워야하고 때로는 혹독한 더위와도 싸워야 합니다. 이방 민족들과의 싸움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짐들입니다. 그러므로 전능자의 보호가 절실히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름으로 임재하신 하나님은 그들의 보호자가 되실 것임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 동안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추위와 더위에서 보호해 주셨습니다. 이방 민족들의 공격에서도 보호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랑으로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여러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6. 하나님의 승리케 하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적들에게서 보호하신다는 것은 승리로 이끄신다는 의미입니다. 출34:10~11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치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 너의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소위를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것을 삼가 지키라 보라 내가 네 앞에서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곧 승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주님을 모시지 않고 사는 사람들 중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 보셨습니까? 그들의 삶의 목적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족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대로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늘 불안의 그림자가 그들의 뒤를 따라 다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어서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만족하며 여유만만 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좋은 길로 인도하시며 보호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에 어떤 환경 속에서도 만족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기뻐하며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첫댓글 오직 예수! 좋은 말씀 항상 감사 드립니다 큰 은혜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