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 28살의 나이로 요절한 러시아 록음악의 태두 빅토르 최. |
1990년 8월 15일 28세의 나이에 요절한 빅토르 최는 러시아 록 음악의 태두이자 변화를 갈구하는 젊은이들의 상징처럼 되어 있다. 특히 올해에는 탄생 50주년을 맞아 각종 기념행사가 팬들의 주도로 열렸다. 동시에 팬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나 모스크바 등 대도시의 번화한 거리 중 한곳에 빅토르 최의 이름을 붙이자는 요구를 강력히 해왔다. 하지만 시 당국은 이를 한사코 거부했다. 거부의 배경에는 변화를 상징하는 구심점이 되는 인물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를 꺼리는 의도가 있는 듯하다. 실제 지난 7월 상트페테르부르크 경찰 당국은 그룹 ‘키노’의 팬들에 대한 감시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시인했다. 그룹 키노(KINO·영화라는 의미)는 빅토르 최가 결성한 록 그룹이다.
빅토르 최 ‘키노’의 팬클럽을 감시하라
경찰이 밝힌 키노 팬들에 대한 감시 이유는 이들의 극단주의적 행동(extremist activities)을 억제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경찰 당국은 “극단적 특성을 띠는 비공식 조직들의 행동을 조사하는 기구를 구성했다”고 밝혔다. 한 지역 경찰 형사과는 ‘스킨헤드’ ‘공격적인 축구팬’ ‘펑크’ ‘블랙메탈러’ ‘밴드 키노의 팬들’ ‘얼터너티브 록 팬’ ‘무정부주의자’ 등이 조사대상이라고 밝혔다. 지금은 해체된 러시아 록의 전설 빅토르 최의 키노 팬클럽이 조사 대상에 들어 있었다는 것은 놀라움을 안겨줬다. 러시아에서는 일단 경찰의 감시 대상에 오르면 경찰의 치안 유지를 위한 예방활동이 가능해진다.
즉 이들 팬들의 “극단적인 활동을 포함한 범죄를 막기 위해” 사전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실제로 올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아르크티가라는 클럽에서 열린 한 콘서트를 경찰이 덮쳐서 관객 400명을 수시간 동안 구금하고 지문 채취, 사진 촬영 등을 했다. 이러한 조치의 근거가 되는 법률은 2006년 푸틴이 서명한 극단주의 예방법이다. 이 법을 토대로 러시아 경찰 당국은 푸틴의 반대파들이나 인권운동가들을 광범위하게 감시할 수 있게 됐다. 아무리 그래도 키노 음악 팬들을 친나치주의자들인 스킨헤드나 무정부주의자들과 같은 극단주의자의 범주에 넣고 감시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이에 대해 인권운동가들은 경찰 당국에 공식 해명을 요구하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시에선 도심에 기념물
1962년 6월 21일 태어난 빅토르 최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인 핏줄이다. 고려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빅토르 최는 옛 소련 시절 레닌그라드에서 예술학교를 다녔으나 록 뮤직에 심취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 그후 엄혹한 소련 공산주의 체제에서 언더 활동을 하다 1982년 그룹 키노를 결성했다. 작사와 작곡, 연주, 노래를 동시에 했던 재능 있는 록 뮤지션 빅토르 최는 주로 반체제적이고 소련 사회의 변화를 갈구하는 젊은이들의 열망을 담은 노래를 만들어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그의 목소리는 특히 절망을 담은 허스키 톤으로 마치 미국 얼터너티브 록의 상징적 인물인 그룹 너바나(Nirvana)의 싱어 커트 코베인을 연상시킨다.(궁금한 사람은 유튜브에서 KINO VIKTOR TSOI를 치고 감상해보라!) 빅토르 최는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집권하여 개혁·개방 정책을 펼치면서 성가를 더해 해외 공연과 영화 출연 등으로 더욱 인기를 얻었다. 그는 국제적 명성을 떨치면서도 자신이 근무하는 보일러실에 출근하는 등 겸손한 생활태도로 일관해 더욱 사랑을 받았다.
절망의 로커 커트 코베인이 입에 엽총을 물고 자살한 것과 달리 빅토르 최는 1990년 8월 15일 28세의 나이에 라트비아에서 차를 몰고 가다 전속력으로 마주 달려오는 버스와 충돌해 즉사했다. 당시에도 그의 엄청난 영향력 때문에 죽음을 둘러싸고 공산당이나 비밀경찰의 소행이라는 등 각종 음모설이 꼬리를 물었다. 아직도 그는 러시아의 전설이자 젊은이들의 우상이다. 모스크바의 중심가인 아르바트 거리나 페테르부르크에는 빅토르 최를 기념하는 벽화들이 들어서 있으며 각종 기념행사가 열린다.
지난 7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시의 도시계획 및 건축위원회는 빅토르 최의 기념물을 제작하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위원회는 빅토르 최의 아버지 로베르트 최와 함께 기념물 후보작 2건을 선정했는데, 2명의 조각가가 빅토르 최가 연주하던 기타의 형상을 청동조각으로 만들어 빅토르 최가 부모와 함게 살던 집에서 가까운 코르준 거리에 세울 예정라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독재체제로 유턴?
이처럼 전설적 록 그룹 키노에 대한 러시아 사법 당국의 인식이 우려스러워지는 상황은 푸틴 대통령이 권위주의 체제를 강화하고 있는 상황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최근 벌어진 여성 펑크 록 그룹 푸시라이엇에 대한 재판 역시 러시아가 푸틴 대통령 치하에서 차르 시절의 제정러시아나 옛소련을 방불케 하는 독재체제로 넘어가는 것 아닌가 하는 국제적 우려를 불러일으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