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년을 살아서 거슬러 60년 전 기억을 끄집어 내어놓으라면 무엇이 딸려 나올까. 오밀조밀 모여 앉아 소리 내 읽고 쓰던 교실 작은 학교였던 분교가 떠오른다
다섯 살 아이가 갈 학교도 아니었지만 한적한 어촌 작은 학교이다보니 네 살 위 언니따라 줄기차게 다녔던 나의 최초 학교였다
이 분교는 3학년까지만 다닐 수 있었고 고학년이 되면 버스를 타고 덕산초등학교로 옮겨가게 돼있었으니 언니가 다니던 마지막 행암분교를 나랑 같이 한 반에 다닌 셈이다
당시로선 동생을 업고 온 아이도 흔케 있었을 시절이었으니 동생 하나쯤 데리 와서 앉혀 놓은들 별 이상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 나는 책만 들면 삽화만 보고도 지어낸 말로 마치 남 보기엔 다 읽는 듯 해 보였기 때문에 웬만한 책읽기에 자신을 보이는 것이 누구에게나 재밌어 보여 자꾸 시키는 바람에 그게 잘하는 건 줄 알고 시키면 시키는대로 큰 소리로 잘도 읊어대던 아이였다
하교하는 길에 논밭에서 김 매던 어른들이 불러세워 책 읽어주고 가라고 하면 척하니 책보에서 책을 빼내들고 목청껏 지어낸 말로 읊어대니 그 재미로 어른들은 자꾸 시켰던가 보았다 모두 다 뒤집어질 감도우 사건도 그 무렵 있었다.
"자 오늘은 '감동'에 대한 발표를 해보겠습니다 누구든 감동 받았거나 감동적인 일이 있었다면 손들고 나와서 발표하기 바랍니다"
숫기 없는 시골 아이들이라 쉬는 시간이면 교실 천정 떠나가라 소릴 질러대지만 정작 수업 시간만 되면 그 목성은 어디로 흘러내렸는지 허리뿐 만아니라 목고개조차도 세워 둔 책 속으로 바싹 숨기는 버릇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 세상 거칠 것 없는 다섯 살 나였던지라 얻어 듣는 청강생 신분을 망각한 채 일착으로 손을 번쩍 들었다
웬만하면 곁의 언니가 서둘러 든 손을 잡아끌어 내리건만 책 속에 깊이 파묻힌 목고개로는 미처 나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집에는 감도우가 하나 둘 셋..이렇게나 (손가락을 꼽아가며)많습니다 우리 할머니는 매일 새벽이면 뒤뜰에 나가 떨어진 감을 주워 감도우를 만드십니다"
행여 자기 차례로 지목될까 고개 숙인 언니들이 책상을 두드리고 웃는 난리통에 발표도 못 끝내고 교단에서 내려오고 말았다
감동과 집뜰에 떨어진 떨감을 삭히려고 담궈 둔 감동이(독)를 구분 못하고 벌인 헤프닝이었다
그 다음 해 집성촌 전체가 일거에 일어나 도심 진출하는 바람에 분교의 추억은 딱 여기까지이다 원래 서당이었던 것을 1960년 초에 분교로 변경되어 1990년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다 덕산국민학교와 통폐합 되면서 소실되었다
그러니 집터마저 제 4비료 공장 부지로 선정돼 사라진 이후 학교까지 없어지다보니 그 곳에서의 기억은 늘 넘실대는 앞바다에 모든 기억들이 다 잠기고 그저 파편조각 같은 기억만이 일렁일 뿐이다
오래 전 '선생 김봉두' 영화를 보면서 문득 잊었던 행암 분교가 떠올랐다 영화 속 분교가 내 기억 속 분교 위치와 오버랩되어 그 학교가 궁금해졌다 나의 분교가 오독하니 높은 곳에 올라 앉아 아래 바다를 두고 있었다면 영화 속 분교 위치도 그러했으며 다만 앞에 펼쳐진 것은 바다가 아닌 강 정도의 차이 뿐이었다.
시나리오도 시나리오이려니와 실제 영화를 찍은 장소가 궁금해 뒤져 본 결과 영화 속 무대가 되는 곳은 강원도 정선이었으며 실제 분교였던 곳이었다
그런 중에 사진 하나를 찾게 되었다 1999년에 찍은 그 곳을 무대로 한 흑백 사진 속엔 쌍둥이 자매가 비포장된 강가를 걷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영화 속 분교 바로 아래 풍경이 고스란히 담긴 사진이었던 것이다
자료를 찾다가 알게 되었다 영화 속 학교는 연포 분교였고 영월과 정선을 가로지르는 동강 기슭에 위치해 있었다
분교가 처음 선 시기는 1969년이라고 나와있었다 내가 초등 3학년 즈음 분교가 세워졌고 영월쪽 아이들은 분교를 가려면 동강을 건너야 했기 때문에 줄배를 타고 다녀야 했던 것이다 강폭이 만만치 않아 누군가가 아이들을 모두 태워 옮겨주어야하는 수고로움이 있는 통학길이었을 것이다 그마저도 명맥이 끊긴 것은 1999년이었으니 흑백 사진 속 쌍둥이 자매는그 해 마지막 학교를 다니던 영월 쪽 아이들이었을 것이다 깡총한 걸음으로 줄배를 타러가는 모습이 찍힌 것이다
1969년에서 1999년까지 30년간 150명 졸업생이 나왔다 하니 한 해 약 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그 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자료를 찾다보니 유독 1999년 학교 통폐합 기사가 많이 떴다 헤아려보니 IMF 사태가 터지고 비용 절감 차원에서 전국적으로 수많은 분교들을 정리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연포 분교가 없어지고 꽤나 떨어져 있는 예미 초등학교로 다닐 수밖에 없었던 그 지역 아이들은 부모들이 직접 차로 등하교를 시켰다는 기사도 있었던 것으로 봐서 스쿨버스 운행도 하지 않았던가 보았다.
내 눈 앞에서 영영 사라진 감도우, 나의 분교도 놓친 터라 이 학교라도 눈에 넣어야겠다고 나선 것이 이번 기행이었다 학교로서의 기능은 못하지만 건물은 터와 함께 남아서 캠핑 장소로 쓰인다고 하니 언젠가 그마저도 사라질까 나서 본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