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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세월의 축지법
지 성 용
J씨는 갑자기 십년의 세월을 뛰어 넘었다.
안타깝게도 그가 건너뛴 10년은 아무 기억도 추억도 자취도 남기지 않은 그런 세월이었다. 다만 순간순간들의 망각과 허무가 뭉쳐진,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그런 10년의 세월이었다.
J씨는 지난여름 옥구도(시흥시 정왕동 소재의 자연공원) 공설 육상 경기장에서 베풀어진 시민 문화축제의 현장을 찾았다. 갖가지 콘텐츠를 가지고 마련해 준 부스의“시니어 건강 상담센터”를 들렀을 때 자신의 건너뛴 10년의 세월을 여실히 실감할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
수개월 전 중대 복부 수술을 두 차례나 마친 J씨에게는 8월의 찌는 염천의 더위는 그에게 조금은 무리한 터, 벗겨진 머리를 가려줄 한 조각 그늘도 없는 아스팔트 바닥위에서 강력한 한줄기 빛을 얻어맞고는 “시니어 건강상담센터”로 빨려들다 시피 들어서니 이런 저런 구실로 찾아 들기에는 자연스레 안성마춤한 장소였다.
아들 같은 사십대 젊은이가 반기는데 마침 동행한 시흥 시니어 클럽에서도 요화(瑤華)처럼 통하시는 H여사의 인기가 반영되어 지레 알아본 몇몇 은발의 어르신들의 환대에 덩달아 힘 안들이고 대접받은 신세가 된 J씨를 예의 젊은이는 큰 눈망울로 뚜렷이 들여다본다. 어쩌다 찾아든 희귀 손님을 맞을 양인지 초롱한 눈매의 젊은이는 작은 키에 어울리는 다부진 몸매를 노인들 주위를 건드렁 거리며 부산스럽게 설치다가 생소해 보이는 건강체크기 하나를 J씨 앞 탁자에 턱 갖다 놓고는 뚫어져라 바라보는 J씨를 향해 “어르신!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한다. “Jㅇㅇ” “연세는요?”
J씨는 순간 망서렸다. 그러나 망설임이 1초도 채 될까 말까하는 사이 “이른 셋이요” 하는 말로 그의 빠른 두뇌 회전을 빛냈다. 솔직히 J씨가 그렇게 대답한 데 대해서는 그에겐 아무 책임도 미안해 할 이유도 없었다 해도 틀린 말을 아닐 것이었다. J씨는 올 해 만으로 예순 셋이다. 그러나 누가 보아도 그의 몰골은 이른 셋에 매우 어울리는 중 늙은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동반한 이른 다섯의 H여사와도 별반 차이 없어 누가보아도 이 둘의 동행하는 모습은 어색하지 않으리 만큼 잘 어울릴 정도였으니까.
정말 그에게 이른 셋의 복명은 너무나 자연스레 튀어나온 대답이지만 사실 J씨의 내심은 꼭 그런 건 아니었다. 최근 더욱 추수리기 어려운 거동은 가뜩이나 매일 아침 세면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절망감을 느끼곤 했는데 10년의 세월이 온 간데없이 사라진 몰골을 보노라면 어디 가서 나이 예순 셋으로 밝히기는 참으로 난감 그 자체였다. 그래서 J씨는 차라리 10년의 세월을 축지법 쓰듯 건너뛰기로 한 것이다.
다시 “시니어 클럽의 건강센터”로 돌아 가 보자.
“이른 셋 이시라구요? 네~, 그러시군요. 그러면~”하더니 탁자위에 놓인 낮선 체크기를 능숙하게 동작하는 그의 눈빛에는 10년의 나이를 축지법 쓰듯 접어버리는 J씨의 비열함에 아무 징후를 느끼지 못 한 듯하다. 팔뚝의 힘으로 세게 꺾어 당겨 올리는 기기의 요령이 있을 리 없지만 J씨는 성실히 그 음흉함을 상쇄라도 하려는 듯 매우 열심히, 그리고 노력하는 자세로 팔에 온 힘을 다 들여 꺾어 들어 올리고 당겼다.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진 젊은이가
“아니, 145까지 올라갔네요, 어르신! 이 정도면 50대 나이에 미치는 수치인데요. 정말 놀라우시네요. 어르신 근력 나이는 40대 50대 이십니다. J씨가 “그래요? 진짜요?” 하자
곁에서 음흉스레 내려다보던 H여사가 미소를 지으며
“어머, 145까지 올라갔어요? 대단하시네요.” 넌지스레 수작하며 음흉을 떨며 맞 장구 치시는 모습이 짐짓 공범이라도 되려는 자세다. 사태가 이러한데 젊은이의 대답은 더욱 점입가경이다. “어르신 건강관리를 어떻게 하시길래 이렇듯 하십니까? 비결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죠” 한다.
J씨는 비교적 양심이 바른 사람이라는 주위 평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않는 그런 사람이지만 그런 그가 이만한 일로 양심이니 비양심이니 따질 아무런 당위도 찾지 못 할 그런 용렬한 위인인데 오늘은 어찌하여 이런 수모를 격어야 하는지. 스스로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에 그의 두뇌는 빠른 회전으로 당위성을 찾아 보았다. 사실 독자들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생각과 추리라는 것이 실제의 정황보다 훨씬 빨라서 일초의 수백분의 일 찰나에라도 아주 먼 시공을 단번에 뛰어넘어 수천억 광년까지도 여행하는 가하면 수만 년 전의 세월을 거슬러, 아니면 앞으로의 미래를 상상하며 여행해 보기도 하지 않는가.
‘흠, 그렇지, 그야 내 책임은 아니지. 모든 것이 지난 이 월, 그러니까 그 한 달 사이에 일어난 일야’. J씨는 자시 그렇게 자위 하고는
“별로 하는 건 없고요, 그저 아침으로 걷기운동 한두 시간 하는 정돈데요”하자
젊은이는 매우 진지해 보이는 표정으로 지으며 열심히 그리고 아주 빠른 속도로 정해진 양식의 노트 위를 정신없이 휘갈기고는 “네~, 단지 매일 걷기 한두 시간 하는 정도가 다 시라고요?” J씨가 수술을 받기 전이라면 사실 그 말은 다 사실이었다. 지난해 말 까지만 해도, 아니 그가 최종 위와 대장에 상상도 못할 병마들이 도사리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그때 까지는 J씨는 정말이지 매일 매일 열심히 운동했었다.
그래서 불과 수개월 남짓 사이에 육 칠 킬로나 빠진 몸무게를 그 효과로 확신하고 매우 만족 해 하였었다. 말을 마친 J씨의 얼굴은 저으기 안도의 빛이 돌고, 더하여 그의 마음은 본연의 양심으로 평심을 찾을 수 있었다.
H여사께서 “우리 선생님이세요” 하며 뒤 늦은 소개를 하면서도 다행히 10년의 세월을 훌쩍 넘은 내막을 폭로 안하길 다행으로 알라는 얄궂은 표정을 진다.
J씨는 그 점에 매우 안도감을 느끼며 약간의 선물을 받고는 나서는데 찌는 장마 뒷 더위에도 버석버석한 얼굴은 작은 행사용 부채 하나에 달랑 태양을 가려보지만 역부족이다. 그날 오후 J씨는 강렬한 태양이 머리위로 작열함을 느꼈으며 그 순간 그의 두뇌의 여행은 갑자기 청년기 문학시절로 여행했다.
열 다섯에 읽은 까뮈의 이방인 ‘뫼르소’는 그 저주스러운 강렬한 태양의 빛을 맞아 불쌍한 아랍인을 죽이지 않았던가. 그가 법정에서 진술한 살인이유가 반짝이는 태양의 강력한 빛살이었다고 진술하지 않았던가.
J씨가 늘 자신의 상징으로 내 세운 양심이 아까 그 저주스러운 태양의 빛 때문이었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머리가 따끔할 정도로 강렬했던건 사실이었다. 뒤 미처 따라오시는 H여사의 몇 가지 둘러대는 위로의 말이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의식도 못한 채 자꾸 떠오르는 ‘뫼르쏘’ 생각으로 중심 잡히지 않는 걸음을 애써 의식하며 걸었고 점점 자신이 정말 십년의 세월은 넘은 듯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J씨는 수 개월 전, 재앙 같은 KCC 에서의 중대 수술의, 문자 그대로 억장이 무너지는 수술을 두 번이나 받고는 완전 1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아직도 동안(童顔)과 노안(老顔)사이에서 정신을 못 차리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요즘 J씨는 점점 자신의 조로 현상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차라리 그 특권을 향유하는 편을 택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전철에서 일반좌석을 양보 받기는 고사하고 언감 노약좌석을 넘 보기 조차 못 하던 처지 였지만 요즘은 그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으니 불과 한 살 미달이지만 노년의 특권을 실감있게 즐기고 있다.
솔직히 그의 주민증은 ‘4901~’어쩌구 하며 시작되는 나이이니 이제 이른을 정확히 절반 꺾기도 전의 나이, 예순다섯의 노인 대우 받기는 아직 이를뿐더러 자신이 노인의 반열에 든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도 상상도 않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부담 없는 마음으로 일반석을 서성거리다 자리 양보를 받기를 꺼리지 않음은 물론 아예 노약자석을 점령하다 시피하고도 스스럼 조차 없어 참으로 양심의 화인 맞기를 버팔로에 낙인찍기보다도 더 수월하게 생각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이처럼 쉽게 일반화되기 까지는 그에게도 끓어오르는 자괴감을 억지로 참고 억눌러야 했던 시간이 있었으니.
예를 들면, 항상 신경 쓰는 그의 자세는 잠시라도 소홀히 하는 사이면 여지없이 등 휘고 구부러진다. 일전, J씨는 부인으로부터 신신당부 들어온 금기식품중 하나인 밀것 음식을 유혹에 견디다 못해 범했다.
춥고 배 곪아 서러웠던 시절, 그것은 오갈 곳 없어 떨어진 인천의 어느 부두가 골목이었던가. 십 원짜리 지폐 한 장에 배불리 먹었던 국화풀빵 향수가 그리웠는지 J씨는 그날 집근처 가로형 공원에 있는 어느 잉어 풀 빵집 포장집을 자연스레 들렸다. 그가 먹은 풀빵은 국화에서 잉어로 바뀐 이름이 전부이지 정말 스무 살도 채 안된 옛날의 향수가 그대로 전달된 그런 맛이었다.
그런데 그가 부인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자존심은 자유로울 수 없었으니 1000원을 내민 그의 손에 건네진 풀빵은 족히 이천원 상당에 해당하는 무려 여섯 개나 봉지에 담겨져 있지 않은가.
J씨는 그것을 절대로 횡재로 생각지 않았다. 작달막하게 생긴 풀빵 주인아주머니는 J씨의 절반이나 반달모양으로 휜 등이며 부석부석한 건조한 피부에 퀭한 눈빛을 응시하고는 마치 행려노인으로 연민하여 동정한 것이 틀림없다.
풀빵 몇 개를 더 얹어준 선심에 늙은이 특권을 향유할 J씨가 결코 아니지만 백만 원이 넘는 임플란트를 선심 받았을 때는 그의 자존심이 자유로울 수 있느냐 없느냐를 따질 양심이 아니었다. 실제 그런 일이 그에게 있었으니 이천 십 이년이 저물어 갈 무렵 똑 떨어진 어금니 이빨 하나를 도로 때울 요량으로 인근 E치과를 찾았을 때 J씨는 예상 밖의 노인우대접을 받았다. J씨의 꺼져가는 젊음의 내막을 대강을 파악한 원장은 흔쾌히 임플란트 시술을 선물했다.
100만 원에 사야 할 그의 건강을 되 팔아 100만 원을 번꼴이 되었으니 J씨로서는 이 점을 몹시 애석해 하였다. 그런데 J씨에게는 단순 조로(早老)현상이 아니니 애석해야 할 일이 그 뿐이어야 할 텐데 두 번의 중대수술을 겪고 나서 몹시 추스리기 어려운 몸가짐에 더하여 점점 조여 드는 모멸과 동정사이에서 고민해야 했고 노인으로 인한 인식에서 얻어지는 특권과 상실사이에서 방황해야 했다.
그런데 참으로 다행한 것이 그에게 찾아온 병마는 그에게 부부간 위상(位相)의 도치倒置)를 상당부분 날려버린 꼴이 되었으니 이 아니 축복인가? 내심이야 어떠하든 병고에 시달려야 하는 남편에 대한 정성이 요즘 남다름을 그는 십분 느끼고 있다.
오늘 J씨는 18층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일면부지(一面不知)의 여성으로부터 인사를 받는다. 이런 일은 일 년 전만 해도 흔치 않았던 어르신 대접이었으니 “이것도 노인이 누리는 특권인가?”하지만 이제는 전혀 생경(生硬)하지 않아 다행이다.
엘리베이터에 비친 반들반들한 스테인리스 거울은 오늘따라 J씨의 유난이 굽은 등을 활처럼 휘어 비친다.
그는 여전히 특권과 연민의 동정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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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 즐감하고 갑니다 꼭자화상을 보는것 같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