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당, 당황의 차이를 아십니까?
한 사람이 볼일이 급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큰 트럭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잘됐다고 생각해서 그 뒤에 가서 큰 트럭을 이용하여 자신은 은폐시키고 볼일을 보기 시작합니다.
이때 사건이 발생합니다. 열심히 볼일을 보며 집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차가 시동이 걸리더니 자신을 향하여 뒤로 오기 시작합니다. 황당한 일입니다. 그런데 차가 시동이 걸리더니 자신을 남겨두고, 휙 떠나버립니다. 이렇게 당황스러운 적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당황스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의 사건의 시간을 꺼꾸로 돌려 보겠습니다. 어떤 말씀이냐 하면 베드로 사건이 먼저 일어나고 야고보 사건이 그 다음에 일어 낫다고 가정해 보는 것이죠. 제가 조금 엉뚱해서 이렇습니다.
베드로가 군사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감옥을 유유히 빠져나가 도망간 있을 수 없는 황당한 사건을 경험하며 당황한 헤롯이 다시 사도들이 있는 곳을 급습합니다. 그리고 성과를 얻습니다. 야고보를 잡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아니지만 그래도 야고보면 충분했습니다.
베드로의 사건을 알고 있는 야고보가 헤롯에 의해서 잡혀 가면서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요? 기대감말입니다. “그래 너희들이 잡아 봐라, 하나님의 사자가 베드로처럼 나를 또 살려 주실 텐데......, 너희는 지금 헛수고하는 거냐?” 이런 생각 가지지 않았을까요? 감옥에 있지만 두렵지 않았습니다. 능력의 하나님이 계셨고, 그는 그 하나님을 확실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죽인다고 군사들이 데려고 나갑니다. 칼을 든 군사들이 그를 향하여 오지만 그래도 그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확실한 베드로의 간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야고보의 목은 그들의 칼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목이 잘려 나갑니다. 하나님은 움직이시지 않았습니다. 살줄 알고 있다고, 그대로 목에 칼을 맞는 야고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야고보가 칼에 맞으면서 잠깐이라도 생각할 수 있다면, 하나님을 향하여 말할 기회가 있었다면 어떤 말을 했겠습니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그래도 사랑합니다. 하나님 괜찮습니다. 제가 야고보였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왜 차별대우 하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동일한 상황 속에서 다른 사람에 비하여 차별대우를 받아 보신 적은 있는 지요? 왜 없겠습니까? 있겠지요. 그럴 때, 분명히 내가 잘 못했는데도 억울합니다. 야속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억울한 일이, 차별대우가 사람이라면 그래도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부터 그런 일을 당한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가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가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헤아려 주셔서, 우리의 가 이해할 수 있는 일들이 일어난다면 참 좋은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상황을 보면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 고민을 시작해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은 뜻은 무엇일까요? 이 일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헤아릴 수없는 우리는 고민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벌어진 이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예루살렘 교회에 다시 핍박이 일어납니다. 그 핍박은 왕이었던 헤롯을 통하여 일어나게 되니다. 1절입니다. 같이 볼까요?
[1]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그렇게 야고보가 사는 시대는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해를 당하는 시대입니다. 우리가 시대와 환경을 선택하지 못합니다. 요즘은 태어나고 난 다음에 우리가 는 환경을 어느 정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라는 것은 큰 범주 안에서 보면 똑같은 것입니다. 다르지 않은 것이지요.
그 시대를 살던 야고보는 이런 희생을 당합니다. 2절입니다. 같이 보겠습니다.
[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그 희생 양으로 사도 야고보가 죽임을 당합니다. 칼로 죽임을 당하게 되지요.
이미 스데반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순교를 당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아쉽고, 안타깝지만 그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이 당하는 아픔 중에 하나이었습니다.
앞에서 잠간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태어나는 환경도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져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를 감당해야 합니다. 그 시대 속에서 일어나는 그 일들이나 상황들은 그 시대 사람들이 감당해야할 몫입니다.
야고보는 그 시대에 악함에 죽임을 당합니다. 그는 자기의 믿음을 가지고 죽임을 당합니다. 비겁하지 않습니다. 구걸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신앙을 가지고 가기의 길을 갑니다.
시대가 어떠하든지 우리가 삶아야할 삶은 동일합니다. 우리가 살아야할 삶 때문에 시대가 목숨을 요구한다면 드려야겠지요. 지조와 정절을 가지고 살아가십니다. 우리는 사는 것이 목적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살아나는 베드로
사람들이 야고보의 죽음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3절입니다.
3]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일이라
사람의 욕심이란 그런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더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겠지요. 그래서 베드로까지 잡아 버리고 맙니다.
그때가 유대인 명절인 무교절입니다. 무교절은 유월절과 연관이 있는 명절입니다. 유월절을 중심으로 일주일 그들이 누룩없는 떡을 먹어야 하기에 우리는 무교절이라고도 합니다. 베드로를 잡아 놓고 그 절기가 지나면 죽이려고 감옥에 넣고 군사로 지키게 합니다, 4절입니다.
[4]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베드로가 감옥에 있는 상태로 헤롯에 죽이기로 약속된 전날까지 그대로 흘러갑니다. 6절입니다. 같이 볼까요?
[6]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바로 그 전 날 밤에 하나님께서는 주의 사자를 보내십니다. 7절입니다.
[7]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8-11절을 보면 하나님은 베드로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십니다. 그렇게 베드로는 살아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계획과 그 능력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능력을 여기서 맛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보면서 그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쯤에서 일어나서 기립하여 박수로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 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베드로에게 일어난 일이지만 그 일은 우리에게도 일어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과정을 다음 주에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같은 일 다른 결과
그런데 이쯤 되다 보면 고개를 끼우뚱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야고보는 죽고, 베드로는 살고 하는 식으로 그럴수도 있고,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고 넘어 간다면 특별히 이상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좀 더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상한 일을 발견합니다.
동일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결과가 전혀 달랐습니다. 야고보 사도와 베드로 사도가 헤롯의 손에 잡혔습니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는 칼로 죽임을 당하고, 베드로는 살아 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슴드리면, 야고보의 죽음 앞에서는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셨고, 베드로의 죽음 앞에서는 사자를 보내어 멈추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 사도는 살리신 것입니다.
물론 야고보 사도와 베드로 사도의 삶이 다르다면, 크게 차이가 난다면, 한 사람은 악한 사람이요, 다른 한 사람은 선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우리는 이해하기 쉽니다. 그러면 우리는 권선징악이라는 사회의 기본 개념을 도입하면 아주 쉽습니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도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께서 항상 함께 다시던 제자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비중은 똑같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살리시고, 다른 한 사람은 죽이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야고보의 형제라면 아쉬울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왕에 베드로를 살리시면서 야고보를 왜 살리시지 않았냐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해하자
그러면 이쯤에서 우리 다시 한번 이런 전제를 해 보십시다. 만일 우리 하나님이 공평하신 하나님이라면 야고보에게 일어난 일과 베드로에게 일어난 일은 똑같은 가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보기에는 한 사람은 죽고, 하 사람은 살았기 때문에 전혀 다른 결과처럼 느껴지고,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은 한 사람을 방치하시며 죽게 만드시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똑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바꾸어야 할 것은 우리의 가치의 변화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에 의해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배우는 책을 만든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철저한 무신론자들입니다. 때로는 신실한 불교신자입니다. 때로는 극련한 이단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 또한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 교육을 배격해서는 안되겠지만 우리가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들이 가르친 가치관이 여러분도 모르는 사시에 여러분의 생각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인간 세상을 뒤덮고 있는 생각이란, 복과 성공은 모두 나를 중심으로 이루어 진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잘되는 것이 하나님의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면, 하나님이 방치하시는 것이나,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시편 1편에서 우리에게 복있는 사람을 이렇게 정의 합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그렇다면 성공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 하나님의 사람의 성공은 “내가 하나님의 말슴대로 사는것”이 성공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복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살면 그렇게 사는 가운데 우리의 삶이 더 풍성해 질 확률이 많은 것이지요. 이것은 덤입니다.
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복은 받아 들이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진정한 복은 우리가 왜 더듬거려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잘 쓰는 말로 “여러분! 우리 쿨하게 받아 드리십시다”
목회자의 성공은 무엇입니까? 인원이 많이 모이는 것입니까? 요즘 교회가 제가 쓰는 차를 바꾸려고 합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보는 관점에서 보면 이제 아름당ㄴ 교회가 어느 정도 좋다고, 괜찮다고 생각하겠지요. 교회의 성공은 이런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양을 위하여 생명을 버리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보이신 본을 따라 성도를 위하여 자신의 삶을 희생할 수 있는 정도가 되면 목회가 성공한 것입니다. 이런 목회자와 하나님의 말슴이 내게 복이요, 성공으로 알고 살아가는 성도가 있으면 그 교회는 성공한 교회입니다. 우리 이런 측면에서 성공하십시다. 2012년 한해 이렇게 성공하십시다.
올해 한해 성공하십시오. 성공의 삶을 사십시오. 그러면 재물을 더불어 따라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때로는 다른 사람과 다른 경우에 수에 황당한 경우들이 있습니다. 왜 나만 그러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보십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동일한 것입니다. 죽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요, 살아나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한 사람이 더 악하기 때문에 죽이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를 위한 것이라면
로마서 14:8절에는 우리가 사는 것도 주를 위해서요, 죽는 것도 주를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살고, 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 되고 못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주를 위한 것이야 하는 것이지요.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하여 라는 가치가 있다면 그 일이 어떤 일이든지 다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결과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이익을 따라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주를 위한 것이었느냐 하는 동기가 더 중요한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 마음 속에 있던 것, 이제 쿨하게 다 버리십시다. 그리고 “주의 위하여”라는 단어를 우리 가슴속에 담으십시다. 마음 판에 새기고, 그 기준으로 살아가십시다. 2012년 한해가 이런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