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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1948년 7월 20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나서 2위 김구, 3위 안재홍을 누르고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48년 8월 15일에 정부수립을 선언하였으며 1948년 8월 13일부터 1960년 4·19 혁명으로 하야하기전까지의 시기(제1공화국)의 대통령이었다. 초기에 집권 여당은 없었으나, 1949년 친이승만계 정당 대한국민당 창당 이후 독립촉성중앙회를 중심으로 이승만의 직계 정당인 자유당이 1952년 창당되었다. 그는 반공·반일적 정치성향으로 일본과의 외교하자는 의견을 묵살하고, 철저히 반일외교 노선을 지향하였다.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직후 이승만은 연호를 '대한민국 30년'으로 정하고, 공식 문서에서 쓰는 달력은 단군기원(4281년)을 사용하도록 했다. 1948년 8월 15일은 단기로 4281년 8월 15일이었다. 8월 26일 이승만은 한미상호방위원조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9월 30일 대통령 시정방침을 발표하였고, 10월 8일 미국 국무성에 미군철수 연기를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월 9일 서울 운동장에서 열린 민족청년단 창단 2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낭독하였다. 10월 19일 주일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왔으며 11월 6일 여수순천반란 사건에 따른 국가위기를 맞아 수습책을 국회에서 발표하였다.
12월 12일 한국대표단의 노력으로 파리 유엔총회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에 간신히 대한민국 승인안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1949년 1월 6일 민족청년단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던 그는 족청을 해산하여 대한청년단에 통합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범석은 족청을 완전히 해산하지 않고 일부 보존하였다. 1월 7일 일본에 대한 배상금을 요구할 것이라고 언급하였으며, 1월 8일 일본에 대마도의 반환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였다. 1월 9일 반민특위의 친일파 처벌에 신중해야한다고 담화문을 발표했고, 2월 18일 유엔의 북한과 협상소식을 듣고 유엔기구가 북한과 협상하는 데 대해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3월 23일 필리핀 퀴리노 대통령이 제안한 반공적인 태평양동맹안을 지지하였고, 5월 20일 일본에 대한 대일배상요구 관철을 주장하였다. 6월 9일 일본의 어업구역 확대에 반대 성명을 발표하였고, 7월 1일 한국에 대한 미국의 추가 원조를 요청했다. 7월 20일 반공적인 태평양동맹의 체결 협의를 위해 퀴리노 필리핀 대통령, 장개석 중화민국 총통을 초청하였다. 8월 8일 장제스와 진해에서 회담하고 돌아왔다. 10월 18일 대통령관저 담벼락 근처에 폭발물 장치를 매설한 것을 터지기 전에 경관이 발견하였고, 이승만도 이를 확인하였다. 10월 28일 일본과의 강화조약 체결까지 임시통상협정을 체결할 용의가 있다고 언명하였다. 11월 26일 남북통일방안으로 북조선 정부 해체후의 총선거를 주장하였다. 11월 29일 귀속재산인 일본인 주택을 매매할 것을 발표하였다. 12월 16일에는 군사원조에 비행기 등의 포함을 미국에 요청하였으나 묵살당하였다.
1949년 1월 장면(張勉)을 한국정부 특별대표(Special Representative)로 임명하여 미국으로 파송하였다. 1월 2일 이승만은 장면을 주미대사로 인정해달라는 붓글씨를 친필로 작성해서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에게 보냈다.
1949년, 미국측에서는 한국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모병제를 권고하고 이에 대한 기반을 다지는 데 전력을 다해 도와주겠다고 권유했으나, 물자원조를 하나라도 더 받아내려는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C레이션 박스 한상자라도 더 원조받기 위해 징병제를 고집하였다.[출처 필요] 이후 한국군은 60년이 넘게 징병제를 고수하게 되었다.
1949년 미군이 철수하자 이승만은 1949년 12월 중순 주미한국대사 장면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서 이승만은 미국의 편향적인 친일정책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일본의 한국 합병에서 보았듯이 일본을 위해 한국을 포기할 수 있음을 주장하며 심각하게 우려를 표했다.[90] 자신의 전기인 우남이승만전에 아버지 이경선에게 공(公)이라는 존칭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여 판매금지조치 시켰다. 그해 6월 부활된 대한적십자사 개소식에 아내 프란체스카 도너를 대동하고 참석하였다.
1949년 이승만은 기자회견을 통해 무력을 통한 북진통일을 피력하였다.
“ | 한국은 한 몸뚱이가 양단된 셈이다. 한국은 앞으로 장기간 남북 분열을 용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전쟁으로서 이 사태를 해결하여야 할 때는 필요한 모든 전투는 우리가 행할 것이다.……이 대사상 냉정 전쟁(大思想冷靜戰爭)에서 우리는 공산주의를 저지하기 위한 가능한 모든 일을 할 것이다. | ” |
해방 직후 가졌던 좌익과의 협상이 결렬되자 우익, 친일파를 기반으로 권력을 유지하였다. 귀국 초기에는 대동단결론을 주장하며 "선통일, 후친일파청산"의 논리를 내 세웠지만 친일 세력의 지원없이는 권력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수립 후에도 친일관리를 대거 등용하였다.
반민족행위처벌법은 1948년 9월 22일 법률 제3호로 제정된 법률로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반민특위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특별담화를 발표하거나 특위 위원들에게 직접 압력을 가하는 등 활동을 노골적으로 방해하였다.
“ | 정부와 국회의 위신을 보존하여 반민 법안을 단속한 시일 내에 끝마치도록 할 것이다. (중략)....지금 반란 분자와 파괴 분자와 각처에서 살인, 방화를 하며 인명이 위태하고 지하공작이 긴밀한 이때 경관의 기술과 성격이 아니면 사태가 어려울 것인데 기왕에 범죄가 있는 것을 들춰내서 함부로 잡아들이는 것은 치안 확보상 온당치 못한 일이다. | ” |
반민족행위 처벌법안이 발의되자 친일파들은 국회와 서울 시내에 협박장을 뿌렸다. 내용은 "민족 처단을 주장하는 놈은 공산당의 주구다."라는 것이었다. 이승만도 이에 동조하여 "친일파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한 것은 공산당이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친일청산을 빨갱이와 연관시켰다.
결국 반민특위는 해산되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국회 프락치 사건과 6.6 특경대 습격사건등이 결정적이었다. 이는 당시 내무차관으로 재직하고 있던 장경근의 지시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반민특위 특경대 해체에 결정적인 권한을 내린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이때문에 반민특위 특경대는 '친일파들과 결탁한 이승만 정권의 탄압'[에 의해 해산되었다.
이러한 이승만의 친일파 포용은 민족문화의 정상적 발전을 저해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남게 되었다.
초대 내각의 대부분은 독립운동가 출신자로 기용되었다.제1공화국 연인원 96명의 각료 가운데 30자리 이상을 구연수 등 친일파 또는 친일파 후손에게 주었다는 견해가 있다.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협조하는 대신 그는 한민당에게 총리직과 내각 각료직의 일부를 약속했다. 그러나 한민당의 세력이 강해지자 경계한 이승만은 총리직을 한민당에 안배하지 않기로 생각을 바꾼다. 당시 총리 후보자로 지명되는 인사로는 김성수, 조소앙, 이윤영, 이범석 등이 있었다.
1948년 7월 22일 초대 총리를 한민당이 아닌 조선민주당의 당수 이윤영(李允榮)을 천거하자 한민당은 집단으로 반대하여 총리서리 인준을 부결시켰다. 7월 29일 이범석을 서리로 천거하자 반대할 명분이 없었던 한민당은 이범석을 인준하였다.이윤영의 총리인준이 실패하자 그는 이윤영을 지청천과 함께 초대 내각의 무임소 장관으로 임명하여 입각시킨다.
내각 인선시 그는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으로 발탁하기도 했다. 조선공산당 출신 전향자였던 조봉암의 발탁은 파격인사였으며, 이후 이승만은 조봉암 등을 통해 농지개혁을 추진하기도 한다. 토지개혁을 통해 그는 한민당과 토착 지주세력의 기반인 농지를 실제 농민에게 분배하여 한민당과 지주세력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이었다. 상공부 장관에는 그의 측근이었던 임영신이 발탁되었는데, 한국 최초의 여성 재상으로, 신라 이후 여성 재상을 발탁한 적이 극히 드물었던 한국 사회에서는 이색적인 발탁으로 인식되었다.
정부수립 직전, 한민당에게는 내각 장관직의 절반 또는 총리직을 주겠다는 약속과는 달리 재무부 장관 1석만을 부여하였다. 단독정부 수립에 협조하였음에도 이승만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한민당은 이번 내각은 실패한 내각이라며 즉각 반발하고 야당화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국회 내의 한민당의 영향력, 4.3 사건, 여순 반란 사건 등의 후유증이 나타나자 이승만도 한발 물러서, 2대 내각에는 한민당이 당명을 바꿔 만든 민국당계 인사들을 대거 입각시킨다.
독도 문제로 일본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1945년 9월 27일 미국이 일본어업의 조업구역으로 설정한 '맥아더 라인'이 1952년 무효화되면서 이승만은 이를 대체할 법안으로 당시 한국과 일본과의 어업분쟁에서 대한민국의 주장에 의한 방위 수역을 설정했다. 이어 1952년 10월 14일 대통령 긴급명령 제12호로 '포획심판령'을 제정 공포하고 포획심판소및 고등포획심판소를 개설 하였으며 1953년 해양경찰대 설치계획을 수립하고 이해말에 180톤급 경비정 6척으로 부산에서 한국해양경찰대를 창설하여 평화선을 침범하는 외국선박과 밀무역을 단속하도록 하였다.
1952년 1월 18일 이승만은 동해에 평화선을 선포하였고 세계를 놀라게 했다. 2월 12일 미국은 이승만의 평화선을 인정할 수 없다고 이승만에게 통보해왔으나 그는 이를 묵살하였다.
1952년 2월 4일에는 일본 어선이 제주도 남쪽 바다를 침범, 이를 나포하는 과정에서 한국 경찰이 총을 쏘아 일본선박의 선장이 사망했다. 이후 한국 영해를 넘나드는 일본 선박에 대해서는 체포, 억류 등의 강경대응을 하여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로 평화선이 새로운 한일어업협정으로 대체되기 전까지 한국 해경은 328척의 일본 배와 3929명의 선원들을 나포, 억류하였으며 나포한 일본 배를 해양경비대의 경비정으로 쓰게 하기도 했다.
중국측의 영해침략에 대해서도 강경대응을 하였다. 1955년 12월 25일엔 해양경찰대 866정이 흑산도 서남방 근해의 평화선을 침범한 중국 어선 15척을 나포하려다가 총격전이 벌어졌다.한국 경찰관 네 명이 중국 배에 납치되어 가서 12년 5개월간 옥살이를 해야 했으며 1960년 1월10일엔 해양경찰대 701정이 서해 서청도 부근에서 중국 어선단을 검문 중 총격을 받고 두 사람이 사망하고 세 명이 부상당하기도 했다.
피란가지 못한 수많은 서울시민들은 북한군에 의해 강제동원되었는데, 전쟁 후에는 북한군에 부역하였다고 감시받고 공무원이 되지 못하고 여권을 발급받지 못하는등 수십년 동안 고초를 겪었다.
이 무렵에 '대국민 사상통제 목적'으로 조직된 반공단체인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이 조선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부역행위 등 협조할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그래서 이승만은 김창룡의 CIC 특무 헌병대에 지시하여 '인민군 점령 수중에 들어가지않은 지역'에 보도연맹원들을 잡아 처형하도록 명령했다. 이를 보도연맹사건이라 한다. 당시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 가운데 실제 공산주의자가 아닌 관리들의 실적을 위해 문서에 기록되거나 배급타먹기위해 가입한 양민들도 있었다. 현재 보도연맹원 처형자들에 관해 발굴조사를 진행 중이다.
한때 이승만은 일본 야마구치 현에 망명정부를 설치하는 방안도 세우고 있었다.정권 관리들은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야마구치현에 망명정부 수립의사를 일본에 전달했으며, 일본 정부는 야마구치현 지사 다나카에게 6만여명을 수용할 시설 및 식량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 했다 당시 다나카 지사는 현의 소학교를 망명정부 시설로 확보하는 방안과 일정부에 대해 특별 식량배급요청 여부를 검토하기도 했다. 1950년 6월27일 이승만은 대통령과 내각으로 구성된 망명정부를 일본에 수립하는 방안을 주한미대사에게 문의해왔고 이는 그대로 미 국무성에 보고되었다.
한국전쟁 휴전 후 국회의장 신익희, 국회부의장 장택상, 조봉암은 이승만을 찾아가 '수도 서울을 지키겠다고 약속해놓고 약속을 위반하고 도주한것에 대한 대국민사과를 발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내가 당 덕종이냐면서 거절했다. 그래도 조봉암은 끝까지 이승만에게 국민앞에 사과하라고 요구하자, 이승만은 제스처를 하며 '다 과인이 부덕한 탓이오 이럴까?'하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한다.
1951년 1월 4일에 중화인민공화국이 궁지에 몰린 북조선을 도와주자 예상치 못한 반격에 국군과 유엔군은 200만 중공군을 상대로 후퇴하였다. 이때 중공군이 다시 서울을 점령하에 따라 전쟁을 원점으로 돌아갔고, 유엔군과 이승만 대통령은 북쪽 땅인 원산 등 기타 지역에 폭격이 일어났다. 1월 12일 일본군의 참전설이 나오자 이승만은 이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였다. 2월 38선은 공산군의 남침으로 이미 없어진 것이므로 북진 정지는 부당하다고 선언하였으며 2월 15일 북진통일을 전쟁 목표로 분명히 밝히고 미국에도 통보하였다. 3월 24일 한만국경까지 진격하기 전에 정전은 안 된다고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6월 9일 38선 정전의 결사반대를 선언하였고 6월 27일 소련의 정전안을 거부하였다. 9월 20일 이승만은 휴전수락의 전제조건으로 중공군 철수, 북한 무장해제, 유엔감시 하 총선거를 요청하였다.
1950년 12월 미국에 체류중인 장면을 국무총리로 내정하였다. 당초 이승만은 장면에게 인사권을 위임하겠다고 하였으나, "5석 중 3석을 총리가 정하였으니 내무에는 이순용, 국방에는 이기붕을 써 주시오"하고 종용하자 장면은 받아들이고 말았다.한국 전쟁 중 2년 동만 이렇다 한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중국의 개입으로 전선이 고착화하자 미국은 현상유지 차원에서 휴전을 서둘렀다. 미국은 소련 및 중공 측과 휴전을 논의한다. 1952년 3월 이승만은 분단 상태에서의 휴전은 한국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다고 주장하며, “민족국가로 생존하기 위해 단독으로라도 계속해 싸워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1953년 7월 27일에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 만에 한국 전쟁 휴전으로 매듭을 지어졌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고집하며 휴전에 협조하지 않았다. 휴전 협정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다시 서울에 올라왔다.
한국전쟁 휴전 후 북조선과의 재충돌을 우려한 이승만은 미국에 남한의 안전보장을 담보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미국에 요구하였다. 중공의 개입으로 부담스러워한 미국은 휴전협정을 추진하였다. 이에 반대한 이승만은 휴전 협정을 방해할 목적으로 수감된 포로들 중 반공포로들을 대규모로 석방했다. 전격적인 반공포로 석방에 격분한 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할 작전을 계획한다.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인해 예비병력 확충에 어려움을 겪자, 중공군 및 조선인민군에 대항하고자 제2국민병을 편성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국민방위군이다. 그러나, 국민방위군에게 군수보급, 물자를 지급해야 할 것을 고급 장교들이나 간부들이 이를 부정 착복, 횡령하여 수많은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된 이들이 아사하거나 동사하는 사태가 속출하였다. 이를 국민방위군 사건이라 한다.
공비 소탕 명목으로 500여명을 박산(朴山)에서 총살하였다. 그 후 국회조사단이 파견되었으나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 김종원(金宗元) 대령은 국군 1개 소대로 하여금 공비를 가장, 위협 총격을 가함으로써 사건을 은폐하려 하였다. 국회 조사 결과 사건의 전모가 밝혀져 내무·법무·국방의 3부 장관이 사임하였으며, 김종원·오익경·한동석·이종배 등 사건 주모자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얼마되지 않아 모두 특사로 석방되었다.
이는 거창양민 학살 사건으로 국민방위군 사건과 함께 대통령 이승만 정권의 평판을 크게 실추시키는 실정으로 비판받았다.
전시 중에도 부분적 지방 자치를 실시하는 등[107]의 정책을 폈다. 그러나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김구, 김규식 계열의 남북협상파와 무소속 계열의 후보의 대거 당선되고, 거창양민 학살 사건과 국민 방위군 아사 사건 등으로 이승만 정부는 지지 기반이 약화되어갔다. 이승만과 신성모는 용공분자의 음해라는 국민 방위군 사령관 김윤근의 주장을 그대로 믿었으나, 국민 방위군 아사자를 목격한 윤보선 등의 진언을 거절함으로써 윤보선 등은 그로부터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이승만은 결국 국민 방위군 총책임자 김윤근을 사형시킨다. 민주국민당 의원이었던 서민호가 기생집에서 현역 육군 대위를 사살하자 이승만은 사형을 선고한 뒤 자비를 베풀어 사형을 면제시키는 것처럼 하려 하였으나 육군중장 최경록을 비롯한 군관과 법관들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이승만은 이들에 대한 인사보복으로 대응하였다.
1951년 11월 19일 독립촉성중앙회를 기초로 자유당이 창당하고 자유당 총재직을 수락하였다. 이승만은 수도경찰청 인사참모 겸 경기도경찰청 보안과장 최연(崔燕)에게 자유당의 청년조직을 만들 것을 지시하였다. 최연은 이원국에게 청도관 관원 5천명을 자유당에 입당시키게 하였으나실패하고 말았다.
1952년의 남북협상파와 무소속 의원들이 국회를 주도하게 되고, 한민당과 갈등을 겪게 되면서 대통령 재선이 어렵게 되자, 이승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추진한다. 이승만은 백골단, 땃벌떼 등을 동원하여 관제 데모를 획책하고, 부산정치파동에서 발췌 개헌을 시도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내,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될 수 있었다. 한편, 부통령 김성수는 부산정치파동 사건을 지켜보면서 '민주주의를 유린한 행동'이라며 장문의 항의서한을 남기고 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체결로 일본의 주권이 회복됨으로써 일본의 오래된 야심이 다시 재발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일본인들은 한국이 또다시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미국과 그 밖의 지역에 있는 한인 친일분자들은 일본인들의 생각에 맞장구를 칠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전파하고 있다."며 비판했다.실제로 이승만은 대통령 재임기간 내내 일본의 한반도 재침략 가능성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었다.
1952년 10월 초 이승만은 주미대사 양유찬에게 편지를 보내, 미국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필리핀, 일본 등과는 안보조약을 맺으면서 왜 유독 대한민국과는 그러한 조약의 체결을 거부하는 것인가 하고 반문하며, 미국 행정부 내의 친일인사들은 일본이 군사적으로 충분히 재무장되면 "한국은 일본에게 또다시 넘겨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아직도 노골적으로 갖고 있다고 비판했다.
1952년 이승만은 "여성은 이르니 가당치 않다"라며, 김병로 대법원장이 요청한 판사 임용 후보 중 이태영을 제외시켰다.
1954년 3월초 한미상호방위조약이 공식적으로 체결된 직후 양유찬 대사에게 다시 보낸 편지에서도 여전히 미국이 언젠가는 일본을 위해 한국을 희생시킬 가능성이 많다는 점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4월과 11월 한표욱에게도 편지를 보내 "덜레스는 일본을 증강시키기로 작심한 인물", "덜레스는 일본 때문에 한국군대를 증강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4월 7일 미군 제315공수사단을 방문하여 직접 표창장을 수여하였다. 195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하고 돌아왔다.
일본의 전통적 팽창주의 야욕에 대한 경계와 미국의 일방적인 친일정책에 대한 이승만의 심각한 우려는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와 닉슨 부통령에게도 여러 차례 전달되었다. 1953년 11월 중순 닉슨이 방한하자 이승만은 아시아인들은 소련과 일본의 결탁을 우려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미국은 일본을 너무 강하게 증강시키지 말 것을 주문했다.1954년 2월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승만은 일본을 군사적, 경제적으로 재건시켜야 되겠다는 미국의 정책은 한국민의 마음을 엄청나게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하고, 미국정부는 일본을 너무 신뢰하지 말라는 한국의 우정어린 경고를 무시하면서, 한국의 입장은 옹호하지 않고 일본의 편만 들어왔다고 주장했다. 같은해 12월 말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승만은 미국의 친일정책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1954년 3월 5일 그는 국제사회에 국제반공십자군 창설을 제의하였고, 3월 27일에는 일본제상품의 몰수를 지시했다. 3월 28일 대한민국 국군의 증강을 미국이 보장하면 제네바 정치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겠다고 미국에 통고하는 한편 4월 28일 일본의 반공연맹 가입을 반대하였다. 5월 6일 제네바 정치회의에 참석한 6.25전쟁 참전 16개국 대표들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소련과 중국의 동의를 얻기 위해 대한민국 정부를 해체하고 국제연합 감시하의 선거를 통해 한반도에 통일정부를 수립하기로 합의했다. 미국은 로버트 올리버 박사를 통해 이승만을 설득시키려하였으나 5월 12일 이승만이 맹렬히 반대하자 대한민국 재선거안을 철회했다.
그 후 1954년 사사 오입 개헌을 통해, 초대 대통령의 3선 제한을 철폐하여 1956년의 3대 정부통령 선거에 대통령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부통령 선거에서는 야당인 장면이 당선되었고,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당의 대통령 후보인 조봉암이 선전하여 매우 거센 저항에 휩싸였다. 이 저항에 이승만 정부는 1958년 진보당 사건을 터트려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대한민국 최대사법살인을 자행했다.[112] 1954년 7월 미국을 방문했고 모교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콜롬비아대학교에서도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5년 3월에는 자유수호에 힘쓴 공로로 미국 금영자유훈장을 받았다.
한편 미국이 일본을 통해 한국문제를 해결하려 하자 54년 8월 3일 이승만은 유엔총회에서 한국 통일에 대한 지원을 역설하고 8월 9일에는 한일회담 재개용의를 표명하는 한편, 일본의 반성을 촉구했다. 8월 30일 일본에 대한 미국의 편파적 정책을 경고하고, 11월 4일 일본의 한국 재침략 망상을 비난했다. 11월 14일 미 국무부가 제안한 일본의 반공동맹 참가 반대 성명을 발표했고, 12월 15일 적성 중립국감시위원단 축출을 언명하다.
1948년 대한민국 성립 시에 대통령을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선출하도록 되어있던 헌법을 1952년에는 대통령 직선제안 헌법으로 개정하여(발췌개헌) 이승만(李承晩)이 중임되었다. 이승만과 자유당은 3선을 하고자 하였으나 당시의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는 4년제이며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고 제한하고 있었다. 이에 이승만과 자유당은 초대 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 철폐를 골자로 한 개헌(改憲)을 준비했다. 1954년 5월 20일에 실시되는 민의원 선거에서, 3선 개헌에 찬성하는 사람을 후보로 추천하여 다수 당선시켰고, 무소속 의원들도 다수 유인하여 개헌 정지작업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시점에서 UN에서 한국 통일을 위한 선거안이 제기되었다. 정부는 이에 대하여 국가 안위에 관한 사안은 국민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국민투표제를 제기하였다. 이를 위해 정부는 국민투표제를 대표 안건으로 내세우고, 이와 더불어 3선금지조항 폐지·국무원의 연대 책임제 폐지·개별 국무원 불신임 인정·부통령의 대통령 승계권 부여 등을 골자로 헌법 개정안을 제출하려 하였다. 그리고 여당인 자유당에서는 김두한(金斗漢)을 제외한 전 의원과 다수의 무소속 의원이 서명에 참여하여 국회에 개헌안을 제출하였다. 국회에서 비밀투표를 한 결과(1954. 11. 27), 재적의원 203명, 참석의원 202명 중, 찬성이 135표, 반대가 60표, 기권이 7표로 나타났다. 당시의 개헌 가능 의결정족수는 재적의원의 2/3 이상이었으므로 이 개헌안이 가결되기 위한 충분한 선은 136명이어야 했다(재적의원 2/3는 135.33…명이므로, 자연인은 136명이어야 함). 따라서 당시 사회자였던 부의장 최순주(崔淳周)는 부결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자유당은 수학의 4사5입론을 적용하여 135.33명은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으며 0.33이란 자연인으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반(半)도 안되는 소수점 이하는 삭제하는 것이 이론상 옳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자유당은 의원총회에서 이 안을 채택하여 국회에서 재론하기로 하였고 이에 반발한 야당 의원들은 모두 의사당에서 퇴장하였다. 자유당 의원들만 남은 자리에서, 자유당 의원 125명 중 123명이 찬성하여(김두한, 민관식 의원만 반대), 개헌안을 통과된 것으로 결정하고(11월 29일) 이를 정부로 이송하여 결국 개헌안을 공표·발효하였다.
이미 부결 선언된 개헌안을 번복하여 가결시킨 행위(위헌), 야당이나 국회의장, 사회자의 의견을 무시한 행위(국회법 위반), 이론적으로도 필요충분한 가결선은 136명이어야 함에도 이치에도 맞지 않은 이론을 적용한 행위(비법리, 비논리 강제 적용) 등은 의회 사상 초유의 사건으로 국민들을 크게 자극하였다. 이러한 행위가 가능했던 것은 자유당 정부의 독재적 행태가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토대로 이승만은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3선 대통령의 뜻을 이루었고, 이는 자유당의 장기 집권과 독재가 연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자유당 내 양심적 의원들이 탈당을 하면서 점차 당의 정당성과 위력이 붕괴되어 갔다. 상대적으로 야당세력은 호헌동지회를 설립하면서 한데 뭉쳐 강력한 야당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헌법을 불법적으로 개정하면서까지 장기 집권하려는 사례는 훗날 우리 헌정사에서 대통령이 장기집권과 독재를 하기 위해 헌법을 마음대로 변개하는 취약성을 드러냈다.
1955년 3월 15일 이승만을 암살하려 한 대통령 암살음모자 이성재 외 6명을 검거했고, 10월 7일 대통령 암살기도사건 관계자 김동훈 등 8명을 체포했다.
1956년 2월 김창룡 특무대장이 암살되자, 2월 5일 직접 헌병 총사령부내에 김창용 중장 피살사건 전담 수사본부 설치를 지시하였다. 2월 13일 일본의 공산국가들에 대한 타협정책에 경고를 보냈고, 2월 21일 국회 연설에서 판사의 월권행위에 유감을 표명했다. 3월 5일 자유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자 이승만은 불출마 서한을 전달했다. 56년 3월 5일 자유당이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이기붕을 추대하자 이승만은 "출마 않기로 작정했다."는 유시를 내렸다.그러나 3월 6일 국민회·노총·부인회 등이 궐기대회를 갖고 민의를 전하기 위한다는 목적으로 서울로 상경했다. 이승만은 3선 출마를 강권하는 집회가 열리자 서울 시내의 집회현장을 다니면서 이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3월 9일 전국 각지에서 측근들과 자유당, 국민회, 애련, 노동조합 등 친위단체들의 주최로 '이 대통령 3선 출마 호소 궐기대회'가 열리고 3월 13일 이승만 재출마를 요구하는 관제 노총이던 대한노총의 정치파업이 있자 이승만은 3선 출마를 결심하게 된다. 3월 10일 이승만은 외신 기자들에게 "(국민이) 자살을 원한다면 자살이라도 하겠다"고 말해 민의 수용의사를 표명했다.
그러자 3월 11일부터 어용 민의가 전국 각지에서 발동되었다. 영화인, 무대예술인, 댄서도 가만 있지 않았다. 우마차 조합에서 우마차 8백대를 동원하여 소와 말까지 출마를 원하는 우의마의를 이승만한테 알렸다.우의마의 소동으로 서울 거리는 똥바다가 되었다. 3월 12일 이승만은 민의는 글로 써서 해도 된다고 타일렀다. 3월 17일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이 한국을 방문, 그를 만나 통일방안 협의하였고 일주일쯤 지난 3월 25일 공보실 통해 재출마 결의 담화를 발표했다.
3월 20일 이승만은 공보실을 통해 민의는 글로 써서 해도 된다는 말을 다시 전달했다. 3월 23일 이승만은 3백만 명 이상이 날인한 탄원서와 혈서가 들어와 할 수 없이 민의에 양보하기로 했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는 이 담화에서 '대통령 후보 한 사람의 선거 비용으로 백만 환 이상 쓰지 못하도록 법률을 만들어야 한다'고 피력했다. 3월 28일 이승만은 이기붕이 부통령 후보로 적격이라고 말했다. 3월 29일 서울운동장에서 이승만의 81회 탄생 경축식이 정부 및 서울시 주최로 열렸다.(이승만의 생일은 3월 26일이었다.)
자유당은 3월 6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자유당 총재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그런데 선거운동기간 중인 5월 5일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신익희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여 선거운동의 양상은 급변하였다. 그에 따라 대통령은 당선은 ‘이승만’이 당연시되었으나, 선거결과는 이승만에게 부정적이었다. 무효표가 무려 20.5%에 이르렀고, 특히 서울은 투표자수 608,741명 중에 284,359명이 무효표를 던져 유효투표율은 53.8%밖에 되지 않았다. 거기다 서울의 유권자들은 부통령선거에서는 96.4%의 유효투표율에 야당의 장면 후보에게 76.9%의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던 것이다. 또 조봉암이 30% 가까이 확보하였다. 이것은 이승만에게는 부담스런 장애물이었다.
이승만은 후보로서 단 한번도 공식적인 정견 발표를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서중석은 이를 유권자를 바보 취급하고 스스로를 위대하다고 생각한 망자존대 의식의 소치였다고 보았다. 이승만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신익희와 조봉암을 비판했다.5월 3일 신익희는 한강 백사장에서 장시간의 선거 유세를 했다. 신익희는 "만약 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일본 지도자들과 회담할 용의가 있다. 한일 양국 정부는 무엇보다 먼저 부당한 감정을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기염을 토하자, 이승만은 그날로 바로 역전 유세 보다 훨씬 강도를 높여 두 후보를 공격했다. 5월 3일 이승만은 유세를 하지 않겠다고 밝히고는 논산훈련소와 논산, 대선 등 7개 역 플렛폼에서 유세를 벌였다. 그는 역 구내에 가득 모인 군중 앞에서 "일본과 회동하여 국가의 독립과 자유를 발전케 하겠다든가 또는 공산당과 싸우지 않고 평화적으로 통일을 하겠다든가 하는 것은 다시 국권을 일본에게 빼앗겨도 좋다는 것이고, 또 소련을 조국이라고 하는 류의 언동이다."라고 역설했다."이들이 정권을 잡게 되면 이것은 반역분자들이 나라를 팔아먹는 것뿐만 아니라 민중이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5월 5일 신익희는 호남유세를 다녀오던 중 열차 호남선에서 갑자기 급서하였고, 이승만은 무난히 3선에 성공한다.
5월 22일 선거 결과 대통령에는 자유당의 이승만, 부통령은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되었다는 당선공고를 접하였다. 이후 이승만은 6월 25일 6.25동란은 미국의 오판에서 일어났고 중공군 철수가 통일의 선행조건임을 강조하였고, 7월 8일에는 환율 고수 및 공무원 인력 감원을 단행하였으며, 7월 26일 휴전협정은 이미 사문화되었음을 강조했다.
8월 15일 제3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는데, 취임식에서는 부통령 자리를 내주지도 않는 등 부통령인 장면은 홀대하였다 한다. 8월 16일 취임 3기 첫 국무회의에서 군비 증강과 경제 부흥을 강조하였고, 9월 1일 미국의 극동정책은 패배주의와 유화주의로 전락했다고 비판하였으며 9월 13일 유엔가입을 적극 추진하도록 임병직 대사에게 훈령을 내렸으나 한국의 UN가입은 무산되었다. 9월 17일 기자회견에서 야당의 지나친 반정부적 태도를 비난했고, 9월 22일 대통령령으로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공포하였다. 대선 전부터 일본에서 한일관계 개선을 요구해왔으므로 9월 30일 한일관계 개선 조건으로 한국에 대한 재산권 청구 철회를 일본에게 요구하는 한편 11월 4일 동해안을 시찰하였다. 동해안 시찰 도중 이북동포 구출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1월 7일에는 소련에 항거한 헝가리 국민들을 예찬하며, 헝가리 국민을 돕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1957년 1월 휴전협정 폐기와 군비강화를 강조하였고, 3월 21일 82회 생일을 맞아 우남장학회를 발족하였다. 8월 31일 방한한 UP통신의 극동 총국장인 호브라이트씨 부자를 면담하였으며 미국 오크라호마 주지사가 증정한 명예 시민증을 전달받았다.
1957년 11월 경제 4부 장관들이 경무대를 찾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필요성을 설명하였으나, 이승만은 스탈린식의 사고방식이며 불구대천의 원수인 공산주의자 방식을 따르자는 것이냐며 한마디로 거절했다.1959년에 가서야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의 초안을 짰다. 그러나 4.19로 3개년 계획은 전면 중단되고, 제2공화국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재수립된다.
1958년 1월 1일 이북동포에게 메시지를 보냈으며, 1월 21일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강조하였다. 2월 23일 유엔군의 철수가 불가하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3월 8일에는 북조선을 비난하며 북조선에 납북된 KNA 민간여객기 기체 송환을 요구했다.
앞선 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의 장기집권과 독재체제에 커다란 위협이 되었던 자신의 정적 조봉암을 제거하기 위해 1958년 1월 13일 진보당 사건을 조작하였다. 조봉암은 간첩혐의로 사형 당했다.
1958년 8월 11일 제4대 총선의 부정선거에 대한 국민들과 야당의 불만이 팽배했던 시기에서 위기감을 느낀 이승만은 제4대 대통령 선거를 위해 공안 정국을 조성하려고 국가보안법 개정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야당은 야당 탄압의 수단으로 사용될 법이라고 주장하며 강력히 반대했으나, 12월 24일 무술 경관을 국회에 투입하여 야당을 감금하고 국회의사당의 정문을 폐쇄시킨 채 여당인 자유당만이 출석한 국회에서 국가보안법과 지방자치법 개정안을 비롯해 1959년 예산안 등 10개 법안 27개 의안이 통과시켰다.
1959년 2월 4일자 경향신문 조간에는 무기명 컬럼 여적을 통해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인 내용에 대한 단평이 게재되었다. 이를 계기로 장면을 지지하였던 경향신문이 이에 따라 폐간되었다.
한편 계속 미국의 한일회담 압력이 들어오자 이승만은 3월 28일 일본 총리 기시(岸信介)의 한일회담 재개 요망 친서에 동의를 표한다. 3월 31일 미국 기자와의 회견에서 인도차이나에 한국군 파견용의를 표명했고, 4월 26일 멘델레스 터키 총리에게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훈1등)을 수여했다. 58년 5월 19일에는 일본 총리가 보낸 특사를 면담하였으나 협의점은 찾지 못하였다. 58년 6월 29일 AP기자의 서면질문에서 유엔 감시 하의 북한 선거를 주장했고, 8월 5일 외신 기자와의 서면회견에서 국군 감축에 반대하고 장비 현대화를 강조, 8월 29일 아시아의 집단안전보장체제를 강조하고 대만에 유재흥 국군 연합참모총장을 특사로 파견했다. 9월 13일 대만과 중공의 충돌 사태(금문도-마조도 사태)에 미국이 적극 개입하자, 이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10월 28일 원자력 연구를 지시하여, 원자력 연구를 실시하게 하였으며 11월 월남대통령의 초청으로 월남을 순방하고 돌아왔다. 12월 12일 CBS 방송국과의 기자회견에서 기자에게 UN군 철수 불가, 국가보안법의 필요성을 언명하였다. 1959년 1월 국가재산의 효율적인 운영을 지시하였고, 1월 26일 일본에게 약탈문화재에 대한 반환을 외신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요구하였다. 2월 일본이 재일동포를 북송하자 추방이라며 강하게 비난하였다.
1959년 3월 1일에는 3.1절 기념식에 참석하여 일본을 규탄, 일본에 대항한 국내 안전보장이 필요하다 주장했으며 3월 25일에는 미국에 서한을 보내 남북통일을 위한 미국의 결단 요구했다. 59년 3월 29일에는 미국 언론에 자유진영의 단결을 위해 미국의 강경정책이 필요하다고 미국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1959년 4월 초부터 미국과 소련이 정상회담을 계획하자 4월 15일 이승만은 미국과 소련의 정상회담이 쓸모없음을 강조했고, 6월 8일에는 대한민국 국내에서 열리는 제5차 아시아민족반공대회 대표들을 환영하는 시민대회에 환영과 반공 메시지를 전달했다. 6월 24일 UPI 기자를 면담하고, 기자의 서면질문에 북진통일을 강조했으며 59년 6월 25일 미국 적십자사에 일본의 재일동포 북송을 저지해줄 것을 요청했다. 1959년 9월 2일 국무회의에서 학원(학교)에 잡다한 부과금 등을 근절할 것을 지시하였다. 9월 10일 국제 적십자 부위원장에게 북송은 적십자정신에 위배된다고 강조했다. 1959년 12월 북한 송환 저지 공작원을 비밀리에 일본에 파견했다.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가 있었고, 개표 과정에서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 위해 부통령후보자의 표를 개표조작하는 일을 벌였다. 이에 대한 항의로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 부정개표를 항의하는 마산 3·15 의거가 발생했다. 그러나 관계자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사태는 확대되었다.
1960년 4월 11일 한 낚시꾼이 3·15부정선거에 반대하는 마산부정선거반대시위에 참가했던 고등학생 김주열의 시체를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했다. 시체는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것이 확인되었고 이는 부정선거를 비판하는 시위를 확대시켰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언론을 통해 이를 남한에 잠복한 공산주의자 간첩이 배후가 된 폭동이라고 간주하면서 마산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그러나,4월 19일,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을 중심으로 하여 사회 전 계층으로 확산된 시위인 4·19 혁명이 일어났다. 이승만은 자유당 당직을 사퇴하고 대통령직에만 전념하겠다 하였다. 그러나 시위가 확산되자, 주한 미국대사였던 매카나기가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갔다. 이승만은 이 모든 사태가 장면시와 교회세력의 지시라고 설명했지만 메카나기 대사는 3.15부정 선거와 이를 저지르고도 숨긴 각료들 특히 경찰의 탓이라고 이야기하였고, 즉각적인 개혁을 강력히 촉구했다. 이를 들은 이승만 대통령은 이렇게 답변했다고 전해진다.
“ | In my younger days I certainly knew my people well and even now felt myself certainly one of them. (내가 젊었을때에는 우리국민들을 잘 알고 이해해 왔었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
” |
비슷한 시간 양유찬 주미 대사는 쿼터 미 국무장관을 만나 정부 입장을 전달했으나 미국 측은 주한 미 대사관이 진술한 4.19혁명 진상보고 전문을 그대로 보여주며 이대통령의 무지를 오히려 공격했다.
이어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할것을 결정하게 되었으며, 4월 23일 시위진압경찰의 발포로 시민들의 사망이 전달되자 애도의 뜻을 발표한다. 4월 24일에는 유혈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유당 총재직을 사임하였다.
한편 이승만은 4·19 의거 부상자들이 수용된 병원을 찾아 부상자들을 위문하였다. 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은 대국민 담화문을 통해 자진 퇴임을 선언하였는데, 연설 내용 전문은 다음과 같다.
이승만 대통령 대국민 담화문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돌아 와서 우리 여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 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할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보고를 들으면 우리 사랑하는 청소년 학도들을 위시해서 우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 가지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 하니 내가 아래서 말하는 바대로 할 것이며, 한가지 내가 부탁 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동포들이 지금도 38선 이북에서 우리를 침입코자 공산군이 호시탐탐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도록 힘써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 3·15 정부통령 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다.
- 선거로 인연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게 하기 위하여 이미 이기붕 의장에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하였다.
-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겠다.
단기 4293년 4월 26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북한의 지도부는 4월 19일 '피의 화요일'에 분명히 이승만의 사퇴를 예견하였다. 김일성은 4월 21일 이승만의 후계자를 언급하며 반공연맹 의장 장택상을 그 후계자로 지목하였다.그러나 장택상에 대한 미국의 신뢰를 의심했다.이어 김일성은 이승만의 후계자들에 대해 전망하면서 미국이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연령상 도저히 안되는 상태인 바, 특히 최근들어 권위를 엄청나게 훼손당하였다고 말했다
4월 26일 이승만 사퇴성명 이후 조선로동당 중앙위 국제부장 박용국은 평양주재 대사들에게 브리핑했다. 브리핑에서 박용국은 "시위대가 탱크병과 좋은 관계를 맺는 데 성공했으며, 부통령인 이기붕의 집을 박살냈고, 전 내무장관인 최인규가 대만으로 도망갔고, 남조선 경찰들도 동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이어 미국이 이승만을 남기고 그 정부만 교체하길 원했지만 이승만의 사퇴는 불가피하다고 발표했다.
이승만은 1960년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그는 처음에 한국을 떠날 때 영구 망명을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한 달 정도 잠시 피하는 걸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허정 과도내각과 제2공화국 장면 정권은 이승만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와이에서 망명생활중이던 이승만은 향수병에 걸렸다. 한국에 돌아오고 싶어 1962년 3월 17일자 비행기표까지 끊어놓고, 3월 16일 '사과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3월 17일 박정희는 특별지시를 통해 입국을 거부, 이승만의 귀국을 막았다. 3월 18일자 신문들도 사설을 통해 이승만의 귀국을 반대했다.[125] 이승만은 실어증에 걸려서 고생했다. 영어에 유창했던 이승만은 실어증 이후 프란체스카 도너의 간호를 받으며 약간의 한글과 한문으로 대화할수 있었다.
거주지를 정하지 못해 수시로 거처를 옮겨다니던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도너는 하와이 한국인 교포단체의 유지인 최백렬(崔伯烈), 오중정(吳重政), 윌버트 최 등의 도움으로 한 빌라에 머무르다가 이승만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하와이의 요양원으로 옮겨졌다.
한편 미국 하와이 망명 이후 교민들의 성금과 후원금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자신에게 오는 후원금을 거의 쓰지 않고 아꼈는데, 그는 이 돈을 모으는 이유를 귀국비용을 마련해야 한다고 이인수에게 말했다. 이후 이승만은 망명생활중 병세가 악화되면서 망명지 하와이에서 조용히 살다가, 1965년 7월 19일 한국 시간 19시 35분에 하와이 호놀룰루 요양원에서 병으로 별세하였다. 이때 이승만의 나이는 향년 91세였다.
바로 미국에서 데스마스크를 만든 뒤 유해는 비행기편으로 하와이 호놀룰루를 출발, 1965년 7월 22일 경기도 김포비행장을 통해 입국하였으며, 7월 27일 서울특별시 정동 교회에서 영결식을 마치고, 가족장으로 서울 시가행진 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7월 23일 오후 3시 미 공군 수송기가 '고향생각'이 연주되는 가운데 이승만의 유해를 운구하여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대통령 박정희, 국회의장 이효상, 대법원장 조진만, 국무총리 정일권 등 3부 요인들을 대동하고 공항으로 나가 시신을 영접하였다.그밖에 내외 귀빈으로 윤보선, 허정, 장면, 윤치영, 이범석, 장택상 등이 김포공항에 나와 이승만의 시신을 영접했다.
시신은 운구차량과 경찰의 호송을 받고 서울 이화장에 안치되었다가 호상기간을 마친 뒤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정치 부문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시신 귀국 이후 장례 문제를 놓고 논란이 일었다. 1965년 7월 20일 박정희는 이승만의 장례를 국민장으로 결정하였으나 이승만의 문중 사람들과 이승만 측근들은 정부의 국민장 결정은 이승만에 대한 홀대라고 생각했고, 4월 혁명동지회 등 4·19 혁명 관련 단체들은 이승만의 국민장은 과분한 조치라며 3일간 항의 농성을 하였다. 이승만의 시신이 운구되자 민중당 대변인 김영삼은 '적잖은 정치적 과오가 있으나 평생을 조국의 독립투쟁에 몸바쳐왔으며,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는 것을 감안하여 전 국민과 더불어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애도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965년 7월 19일 이승만의 부음 소식을 듣고, 허정, 윤치영, 이범석, 장택상 등은 7월 22일 비행기를 통해 이승만 시신이 귀국하자, 오전 8시경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이승만의 시신을 영접하였다. 허정, 윤치영, 이범석, 장택상 등은 국장을 요구하였다.
4월 혁명동지회 등 일부 단체에선 국장, 국민장, 사회장도 안된다며 반발하였다. 동아일보는 1965년 7월 23일자 사설에서 국장도, 국민장도 불가하다며 정부는 즉시 이승만의 장례에서 손을 떼라고 항의하였다. 대통령 박정희는 이승만의 국민장을 추진하였으나, 허정, 윤치영, 이범석, 장택상 등은 국장을 고수하였다. 4.19 관련 단체에서는 국장도 국민장도 안된다며 대규모 시위, 집회를 열었다.
양자의 의견 조율이 안되자 박정희는 이승만의 유족에게 국민장을 권유하였으나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국민장을 거부하고 가족장을 하겠다고 응답하였고, 구 자유당측 인사들은 국민장을 거부하고 국장을 요구하였다. 화가 난 박정희는 '가족장으로 하려면 마음대로 하라'며 내버려두었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결정되었고, 박정희는 국무총리 정일권을 보내 추도사를 대독하였으며, 기타 허정, 이범석, 윤치영, 장택상, 윤보선, 장면 등 이승만의 측근들 및 정관계 인사들이 다수 참석하였고 대통령 권한대행 허정 등이 친히 추도사를 지어 낭독하였다.
이승만은 미국을 불신하면서도 강력한 동맹상대로 미국을 지목하였다. 이승만은 대한제국 시절에 밀사로 파견되었을 때 미국이 일본과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1905년부터 이승만은 미국의 대한국 정책에 대한 강력한 불신을 품어왔다. 미국은 비밀리에 대통령 루스벨트가 파견한 윌리엄 태프트 국무장관과 일본 총리 가쓰라가 비밀 회담으로 일본이 한국 점령을 용인하는 대신 미국은 필리핀을 점령하는 것을 일본이 침해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1940년대에도 임시정부 승인을 미루거나 회피하는 미국에 대한 이승만의 불신은 계속되었고, 한국 전쟁의 원인도 1949년 주한미군이 철수하는 것이 원인을 제공한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일본에 대한 외교정책은 시종일관 반일노선과 경계를 지향하였다.그러나 일본에 대표부를 파견하여 연락을 유지하였고, 이는 이승만 퇴진 후 주일한국대사관으로 승격되었다. 6.25 전쟁 당시 미국에서 일본군의 개입을 천명하자, 이승만은 주한미국 대사에게 일본군이 개입하면 일본군부터 먼저 축출할 것이라고 하여 일본군 참전을 취소시켰다. 한편 서울이 점령되었을 무렵, 이승만은 일본에 임시 망명정부를 수립할 계획도 고려하고 있었다. 54년 3월 27일에는 국내에 유통중인 일제상품 몰수를 지시했고, 55년 6월 20일에는 일본제품 특혜수입 금지령을 내렸다. 한편 일본인을 만났다는 이유로 국무총리 장택상을 해임시키기도 했다.
대아시아 관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한 대만과는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장개석을 방문하여 면담하기도 하였고, 에는 내한한 장개석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남베트남의 고 딘 디엠과도 우호관계를 수립하였고, 고 딘 디엠 방한 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친히 수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도의 네루와는 사이가 안좋았는데, 네루는 이승만에게 부정적이었다. 네루는 1949년 대한민국 정부의 승인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의 대표단인 조병옥의 설득으로 반대에서 기권으로 돌려놓게 되었다.
측근이었던 허정에 의하면 자신을 대단히 높게 평가하였으며, 한국인 중에 자신과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봤다고 한다. 누구든지 그에게 복종하고 그를 따르기만 하면 그는 그 사람을 동지로 간주하였으며, 그 외의 사람은 모두 그의 적이었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허정은 '그가 대단히 성격이 급하고 남들과 쉽게 싸웠으며 주요 정치문제에 대하여 대단히 완고했다'고 평하였다.
초기에 그의 신임을 받기도 했던 장면에 의하면 '그분의 성격 소치인지 자존심이 너무 지나쳐 ‘나’ 이외에는 이 나라를 다스릴 사람이 안중에 보이지 않는 양 정치 면에 나타난 그분의 개성은 독재의 전형적인 감을 주었다. 정적을 용서 않고 때로는 고도의 술책과 잔인성을 주저 않고 드러냈다. 국회에서 통과된 법률도 비위에 안 맞으면 공포 안하기가 일쑤이며, 그의 유시나 담화가 법률 이상의 위력을 휘둘렀다. 구속된 국회 의원에 대한 석방 결의도 아랑곳없고, 헌법 기관인 참의원, 헌법 위원회, 탄핵 재판소 등도 필요 없다고 구성해 주지 않았다. 장기 집권을 위하여 때로는 비민주적인 방법의 정치 파동도 일으킨 사실은 우리가 다 잘 알고 있는 바다'라고 비판하였다.
해방 직후 조선체육회를 이끌던 여운형은 이승만이 귀국한 후 서울운동장에서 전국체육대회를 개최했다. 그때 몽양은 비록 노선은 다르지만 이승만이 해외에서 독립을 위해 수십년을 일하다 돌아왔으므로 일장기가 아닌 태극기를 가슴에 단 우리 청년들이 대회장에 위풍당당하게 걸어들어오는 것을 보면 얼마나 감격할까 하는 생각에서 이승만을 개회식에 초대했다고 한다. 여운형에 의하면 이승만은 윤치영과 함께 와서 내빈석에 자리를 잡았는데 식이 시작되어도 각도 청년들이 줄을 지어 씩씩하게 입장하자 몽양은 이박사가 얼마나 흐뭇해할까 하고 감격을 나누기 위해 그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청년들을 보지도 않고 수행한 윤치영과 귓속말로 정치 이야기만 하더니 "일이 있어 그만 가봐야겠다"며 곧 퇴장해버리고 말더라는 것이다.정치적 노선은 다르지만 인간적인 입장에서 그를 초청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여운형은 인간적으로 섭섭했다면서 자기가 이박사에게 가장 실망을 느낀 때가 바로 그때였다고 했다.다음은 1947년 가을 당시 돈암장 신문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친이승만 신문이었던 민중일보의 사장이자 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 회장인 윤보선의 요청으로 서정주가 이승만의 집을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무슨 자료를 찾아오라고 프란체스카에게 시켰다는데 조그마하고 가냘프고 유순한 부인은 묵묵히 명령대로 나가 꽤 오랜 뒤에 돌아와서 그게 어디에 있는지 아무리 찾아봐도 잘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일은 어느 집에서나 가끔 있는 일로 자세히 오래 찾아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나는 다음에 와서 가져가겠다 하고, 여기를 뜨려 했다. 그러자 이 박사는 침대에서 허리를 반만 일으키고는 들어와 서 있는 프란체스카 부인을 화난 눈으로 바라보며 영어로 "겟 아웃!"하고 크게 소리치고는 나보고 거기 앉으라고 했다. 나는 그의 부인이 마치 꾸지람 들은 어린애처럼 풀이 죽어 주춤주춤 물러나가는 것을 보았다.
– 서정주
소설가 미당 서정주는 우여곡절 끝에 이승만의 전기를 완성했다. 그래서 1949년 10월 삼팔사에서 이승만 박사전이라는 제목의 책이 나왔다. 그러나 이 책은 나오자마자 발매 금지 처분을 당했고, 내무부 치안국이 압수 명령을 내려 서점에 깔린 책들은 다 몰수되었다. 이승만은 대변인 김광섭에게 자신의 아버지 이름 밑에 경칭을 안 붙인 것을 문제삼았다. "서정주는 그래 얼마만큼이나 되는 시인인가?"하는 질문에 김광섭이 좋은 시인이라고 대답하자, 이승만은 이렇게 비판하며 말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저의 집 어른도 못 모시어 봤나?"[강준만에 의하면 서정주가 어른을 모셔 보지 못해 경칭을 생략하지는 않았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조지 워싱턴대 학사, 하버드대 석사, 프린스턴대 박사로서 서양 물을 40년 넘게 먹은 이승만이 서양의 전기에선 경칭을 쓰지 않는다는 것쯤은 이해할 것이라고 믿은 것뿐이었다. 서정주는 이승만이 오히려 정반대로 40년 넘게 외국을 떠돌아야 했기에 조선, 그것도 구한말 조선의 전통에 대한 집착이 더욱 강렬했다는 것을 이해하긴 어려웠을 것이라는 평을 내렸다.도덕적인 인물이라는 주장
이승만은 전형적인 조선의 선비사상과 미국의 감리교사상이 혼합된 인물로서 평생을 매우 금욕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살았다는 평가가 있다.이와 관련된 후문으로 인권운동가 박소영은 그가 하와이 망명생활 도중 임영신에게 청혼하였으나 거절당했다는 후문이 있는 것뿐, 그의 뒷얘기는 깔끔했다는 예를 제시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당시의 일화는 다음과 같다.
독립협회 활동과 수감, 미국 활동 등으로 아내와 친밀감을 가질 사이가 없었던 그는, 첫 아들인 이태산(이봉수)이 사망하면서 아내 박씨와 이혼하게 된다. 박씨부인과 이혼 후 오랫동안 혼자 살았으며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1930년 미국 워싱턴에서 이승만은 독립운동가 겸 교육자인 임영신에게 청혼을 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1931년 이승만은 자신의 측근이며 임영신의 기전학교 은사인 이순길을 통해 임영신에게 청혼할 뜻을 밝혔으나 거절당하였다. 아내가 될 것인가 동지로 남을 것인가를 고민하던 임영신은 단독으로 이승만을 만나 거절하였다.
"아마 이 밤이 박사님을 뵈옵는 마지막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는 그날까지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 생각입니다...(이하 생략)...저는 이미 독립운동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앞으로 선생님 곁을 떠나서나, 선생님 곁에 있을 때나 언제든지 동지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이승만은 실망하였으나 임영신을 측근으로서 신뢰하였고, 임영신은 그의 가깝고 충실한 측근이 되었으며 자신의 호를 이승만의 이름에서 따 승당(承堂)이라 짓기도 했다.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은 홀로 귀국했다. 33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이 박사는 돈암장에 거주했다. 이때 윤치영의 부인 이은혜와 대한여자국민당의 당수였던 임영신 등이 돈암장을 자주 드나들며 그를 도왔다.[135] 당시 이 박사는 71세, 임씨는 47세였는데, 두 사람이 불륜관계라는 소문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고, 이 소문은 이 박사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미국 캘리포니아대에 유학 중이던 임씨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확대 재생산됐다.[135] 남편에게서 한국에 들어오라는 전갈이 있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프란체스카 도너에게 먼저 날아든 소식은 이 박사와 임씨의 관계에 대한 낯 뜨거운 소문이었다. 소식을 접한 그는 대로(大怒)했고 한국행을 서둘렀다. 귀국 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남편과 임씨를 떼놓은 것이었다. 이승만이 돈암장에서 이주한 후 마포장에 머무를 무렵, 김구 외에 임영신과 윤치영만이 마포장을 통제받지 않고 출입하였다. 이때 이승만이 임영신과 동침한다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프란체스카 도너는 임영신을 마포장에 출입금지 시켰다.
1920년대부터 1960년 망명 전까지 가까이에 있었던 허정에 의하면 대단히 두뇌가 명석한 인물이라 평가하였다.
전북대학교 신방학과 교수 강준만에 의하면 '이승만은 비난과 독설에 매우 능숙했다' 한다. 이승만의 미국인 고문 로버트 올리버가 언젠가 이승만에게 그런 문제점을 제시했더니 이승만은 이렇게 답했다.
“ | 나도 알고 있소. 나는 평생을 선동가로 살아 왔으니까 그렇게 할 도리밖에 없었던 것이오.[136] | ” |
1919년에는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국제연맹의 감시하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청원서를 올리고 후에 다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이 때문에 이승만은 신채호, 신성모 등 임시정부의 무장투장파와 갈등하였고, 박은식 일파의 공격을 받았다.[출처 필요] 결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 의해 탄핵까지 가게 되었다. 이때 임정에서 이승만의 편을 들던 인물은 내무부총장 김구, 의정원 의장 최창식(崔昌植) 등 소수였다.
이때, 단재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었다.' 라고 성토를 했었다.거기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임하면서도 임시정부 청사가 있는 상하이에서는 활동이 거의없어 1925년에 탄핵을 당하게 된다.[139]
조소앙은 이승만에게 쿠테타를 종용하는 편지까지 보내기도 했다. 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을 탄핵하자 이승만은 미국내 재미 한인 교포들에게 임시정부로의 송금을 중단하게 하였다.
이승만의 반대파들이 국민대표자 회의 소집을 요구하며 임시정부를 부정하고 임정의 해산과 재창조 등을 주장하는 창조파, 개조파 등으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 내에서의 이승만의 위치가 자연스럽게 다시 복권될 수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1932년 11월에는 33년에 열리는 스위스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의 전권대사로 파견되었고, 1934년 국무위원회 회의에서는 신익희·조소앙 등과 함께 임시정부 외교위원의 한 사람으로 신임되었다.
하와이에 있는 재미교포 사회에서도 분열을 조장한 원흉이라는 비난의 소리도 제기되고 있다. 하와이 재미교포들은 "반목과 적개심을 불러 일으켜 서로 앙숙이 되게 이승만은 철저히 양극화 시켰다 . 하와이 교민 1세대들은 분열로 인한 큰 고통의 상처로 남게되었고 이들은 이승만이 교포사회에서 잔악한 위험인물" 이라는걸 서슴없이 증언하고 있다.'재미한인 50년사'를 저술한 김원용에 의하면 '이승만은 미주 한인사회에서 파쟁과 모함과 비난과 재판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마침내 대한인 국민회와 별도로 자기를 지지하는 '동지회'라는 단체를 따로 조직해서 국민회와 적대관계를 지속하여 한인사회를 분열시켰다.'고 비판하였다.
1983년부터 하와이 이민 1세대 중 장금환의 딸 로베르타 장은 지금 살고 있는 하와이 이민 1세대를 상대로 인터뷰를 하였는데, 하와이 이민 1세대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승만을 부정적 시각으로 증오하는 사람들과 긍정적으로 보는사람들 등등 각각 서로 반반씩 존재했었다. 이승만에 부정적 시각가진 이들은 대한인 국민회 철폐한것과, 자신의 부모를 죽이려고 든 기억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박용만과의 갈등 중 하와이 대한인 국민회 활동에서 자금을 유용했다는 의혹을 끊임없이 받기도 했다.
이승만은 하와이에 온 초기부터 하와이 실력자이면서 군사양성에 열중하는 박용만을 맹렬하게 비난했고, 박용만 반대세력을 규합했다. 이승만은 대한인 국민회의 운영권 곧 회비관리권을 움켜쥐려고 온갖 공작을 벌였으나 쉽게 실현되지 않았다. 박용만은 다른 농장으로 군영을 옮겨가면서 군사훈련을 거듭했으나 두 사람의 대립은 그칠 줄 몰랐다.
1910년대 중반 무렵 일제는 밀정을 통해 박용만의 군사훈련 사실을 캐냈다. 주미 일본 대사관에서는 미 국무장관에게 이를 항의했고 국무장관은 하와이 총독에게 그 실정을 알아보게 했다. 1918년 박용만이 살인미수 혐의로 재판을 받자,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증언을 했다.
“ | 그는 미국 영토에 조선국민군단을 설립하고 배일활동을 하면서 일본군함 출운호가 호놀룰루에 도착하면 파괴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 이는 미국과 일본 사이에 중대사건을 일으켜 평화를 방해하려는 짓이다.[145] | ” |
박용만은 온갖 음모에 시달리면서 주도권을 잃어갔다. 이승만은 자금횡령 혐의로 대한인 국민회 간부들을 고소했고, 국민회 간부들은 법정에서 고통을 받아야 했다. 서로 벌인 소송사건이 열 차례나 있었다. 국민회와 이승만파(동지회)가 서로 테러를 가하기도 하고 국민회 대포회의때 총격이 가해지는 일도 벌어졌다. 이런 분쟁 속에서 마침내 국민회 주도권이 이승만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분쟁이 야기되는 속에서도 독립기부금은 잘 걷혀 1915년 1,523달러에서 해마다 늘어나 1918년도에는 3,775달러를 기록했다.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 출신들과 한인 사업가들이 조국 독립을 바라는 일념에서 대한인 국민회에 꾸준히 회비를 냈었는데, 하지만 미주 재미 한국인들은 이승만을 두고 '협잡배'라 매도했고 돈을 너무 밝힌다고 비난을 가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이승만과 국민회가 독립자금 문제로 분란을 겪어 끊임없이 의혹을 받고 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족되자 국내외에 걸쳐 많은 독립자금이 들어왔는데, 1919년 미주의 국민회에서 임시정부에 송금한 내역을 보면 공식적으로 36,000달러였다고 한다. 다음 해 이승만도 많은 돈을 가지고 상하이로 왔는데, 1920년도에는 미주에서 200만 달러를 모금했는데, 이는 오늘날 가치로 보면 2억 달러가 된다.
이승만이 구미위원부를 발족한 뒤, 미주 동포들이 낸 독립자금은 구미위원부에서 마음대로 전용하고 임시정부로 보내주지 않았다. 그리고 독립자금 모금을 두고 다시 주도권 분쟁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해방정국의 이승만의 주장이 한국의 분열을 고착화시켰다는 주장과 공산주의에 맞서서 반공국가를 건설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1970년대부터 윤치영, 박용만 등에 의해 이승만 재평가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특히 윤치영은 제1공화국 기간 중의 부패와 선거 관련 문제는 이승만과는 무관하다고 확신했다. '얼마간의 무리도 따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50년대 들어 저질러진 그러한 행태들은 자유당 정권의 부패한 세력들에 의해 주도된 것이다. 가령 이기붕, 박마리아 같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유지시키고 심지어는 대권을 생각해서 저지른 짓들입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1970년대부터 이승만이 독재자라는 주장은 낭설이며 우의마의라는 단어의 어원을 설명, 이승만이 3선으로 퇴진하려 했으나, 이승만을 등에 업고 권력을 행사하려는 자유당 측근들의 간계로 관제 3선 출마 시위가 있었고, 이승만은 속은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역설했다. 1979년 이후부터는 공공연히 이승만의 3선 퇴진설과 우의마의라는 단어의 어원을 역설하며 학생 운동권의 이승만 독재자설에 반론을 제기했다.
1991년의 한국논단과의 인터뷰에서 윤치영은 '우리는 거시적인 차원에서 이박사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분은 평생을 독립투쟁에 몸바쳐 온 분이고, 민주주의를 가장 신봉하는 인물이었다.라고 평하였다.
2001년 이후 결성된 뉴라이트 계열은 이승만을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건국대통령', '국부'로 재평가, 상정하자는 의견도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명박 정부에서는 국가적 차원으로 이승만 정부의 건국을 기념하는 행사를 개최한바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이승만 박사는 국민학교 의무교육 실시했다는 점에 있어서 한국 근현대 교육사에 획을 긋는 자취를 남겼다는 주장이 있다.
박용만은 이승만과 김구는 민족의 쌍벽이었고 민족진영 인사들은 두 영도자를 모시고 반석위에 놓인 것과 같은 안도감과 신뢰감을 가지고 무조건 두 분이 영도하는 대로 마음놓고 따랐던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
2대 국무총리와 4대 부통령을 지낸 장면은 '이 박사 밑에 국무 총리로서 1년 가까이 지낸 내가 본 그분은 장점도 많고 단점도 많았다. 그분의 애국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일평생 독립 운동에 바친 공적이 이를 말하고도 남는다. 특히 대외적으로 철석 같은 반공 태세, 의연한 대일(對日) 태도, 과감한 반공 포로 석방 등은 이 박사의 용단이 아니고는 아무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 독립 주권 의식의 철저한 시범도 경복할 만큼 위대했다.' 고 평가하였다.
13대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은 그를 당시 가장 현실적인 지도자였다.대한민국의 건국의 주역이되 4사 5입 개헌 시기부터 잘못되기 시작했다고 평가하였다. 한편 김영삼은 또 '이 박사가 너무 노인이었고 기억력이 약했던 것 같다.' '밑에 사람들이 보좌를 잘 못했고 이기붕이 건강이 안 좋은 사람이었는데도 대통령 욕심이 있었다' 고 평가하였다.
전북대학교전북대 신방학과 교수 강준만은 '이승만의 시계는 구한말에 멈춰져 있었다. (많은 부정적평가와 긍정적평가를 이루면서도) 이승만은 평생을 복고적 투쟁을 위해 바친 인물이었다.'고 했다. 강준만은 또 '이 점을 무시한 채, 오늘날의 잣대로 이승만을 평가하는것은 이승만에 대한 불필요한 악의적 해석만을 낳을 뿐이다' 라고 평가하였다.
농지개혁법을 시행했다. 이승만의 승인 하에 농지개혁을 주도한 사람은 당시 농림부 장관이었고 이승만의 진보당 사건 조작으로 사형당한 조봉암이다. 1948년 8월 이승만은 농림부 장관 조봉암의 건의와 설득을 받아들여 농지개혁을 승인한다. 농지개혁으로 왕조시대 이후 대지주에게 집중된 농토를 실제 농민에게 나누어주는 것이었다.
인천의 지역 유지이며 인천시 의회 제1대 의장인 이명호는 조봉암의 농지개혁에 반발하였으면서도 이승만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참았다고 한다. 이명호의 다섯째 딸 이양숙의 증언에 의하면 이명호는 토지개혁으로 그 많은 땅을 빼앗겼으면서도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고. 워낙 이승만 대통령을 존경했는데, 그 이승만 대통령이 장관으로 임명한 조봉암이 나서서 한 일이니 이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농지개혁으로 인한 효과는 남다른 것이었다. 비록 일부에서는 '실패한 토지개혁'으로 폄하하는 의견도 있으나, 정설로는 '토지개혁을 통해 주인의식이 생긴 농민들이 많아져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 박헌영 등이 주장하던 100만 봉기설이 무용지물이 됐다는 것이다.
비판론
대한민국정부 수립이후, 1949년 반민특위 습격사건에 최종적 결정 승인과 지시를 내린것으로 알려져있으며, 친일 경찰, 군인, 관료 출신들을 '반공투사'라 칭송하면서 대거 등용했다는점과 한국 전쟁 시기에 대통령으로서의 평판을 실추시킨 행동들과 책임들, 토지개혁과 귀속재산처리 문제에 소극적인 태도로 나아갔다는점, 이후 자유당과 사사오입 개헌, 3·15 부정선거, 인의 장막에 가려져 있었던 점, 집권욕, 고집 등에 대한 비판들이 있다.
친일 경찰의 활용
제주4.3사건, 여순사건, 반민특위 습격사건, 장면 부통령 암살사건등의 배후에는 친일 경찰이 있었다고 한다.[누가?] 노덕술, 이구범, 최운하 등은 일제 강점기부터 고문을 잘해서 출세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반공'을 이용해 국민들에게 공포를 심었다. 당시에는 친일행위 청산을 주장하면 빨갱이로 몰리기 쉬웠다고 한다. 이승만도 친일파청산 주장은 공산당의 연관성이 긴밀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의혹과 논란
정치 깡패의 활용이범석 등 족청계를 밀어내고 이기붕은 제2인자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이정재와 손을 잡아 김상도 테러사건을 시작으로 3·15 부정선거 등에 정치테러하였다.또한, 곽영주를 경찰관으로 기용하여 최측근으로 두었다. 곽영주는 4.19 혁명 당시 경무대 앞에서 시위하는 학생들로 부터 이승만 대통령의 안전을 지키기위해 발포명령을 내려 사상자를 발생시키기도 했다.
한편 이승만이 국제연합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일을 놓고 이승만을 '없는 나라도 팔아먹는 매국노'라며 격한 반발을 했던 신채호의 유족들은 이승만 집권기간 중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신채호의 둘째 아들 신수범은 일제 강점기 때 은행원으로 일했다.그러나 신수범은 광복 후 직업을 잃었다. 신채호가 임시정부 초기 이승만의 정책에 반대했기 때문에 신수범은 자유당 정권에서 신변을 위협받았다. 죽을 고비도 몇 번 넘겼다고 한다. 신수범은 넝마주이·부두 노동자 등 떠돌이로 살아야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3·15 부정선거로 하야한 이후에야 은행에 다시 취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선구회(先驅會)라는 단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지목하는 설문조사 결과에 9%가 이승만을 지목하였다.[4] 그뒤 11월 선구회에서 다시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을 설문조사했을 때는 1957명 중 431명이 이승만을 선택하여 1위로 집계되었다.[4] 한편 최고의 혁명가를 꼽는 설문에서는 978명 중 176표를 얻어 2위였다.[4] 1946년 7월 조선 여론협회가 서울에서 누가 초대대통령에 적합한가를 조사한 설문결과에는 1961표로 전체의 29%를 확보했다 한다.[4] 1947년 1월, 이승만 지지단체인 '한국애국부인회'가 이승만과 여운형 두 사람에 대한 모의투표를 실시했는데, 여기서 결과는 1000표(이승만) 대 900표(여운형)로 근소한 차이를 나타냈다.[161][162] 1948년 6월 23일 조선여론협회에서 다시 조사한 결과(누가 초대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가?)에서는 1024표로 1위를 하였다
개신교 보급
대학교수이자 역사학자인 이주영은 그를 윤치호와 함께 지난 1세기 동안 한국의 역사에서 개신교와 문명 개화의 연결 고리가 가장 확실하게 드러난 대표적 인물로 평가하기도 했다. 이주영은 이승만에 대해서 “이승만 전 대통령은 통치 기간에 모두 135명의 장관과 장관급 부서장을 임명했는데, 그 가운데 기독교인은 절반에 가까운 47.7%였다. 그리고 군대와 감옥에 기독교를 보급하기 위해 군목제도와 형목제도를 도입했다”고 말했다. 또 사회 전반의 미성숙으로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개인의 평등을 전제로 하는 자유선거제도의 확립에도 많은 노력을 쏟았다고 덧붙였다.
한국 전쟁 이후 급격하게 성장한 국군 세력을 이승만은 경계했다.
1954년 5월 정일권 참모총장이 그와 친밀한 사이에 있던 공국진을 육군 헌병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군내 부패의 척결과 수사기관 사이의 갈등 해결 등을 주요 과제로 지시했다. 공국진은 이 과제들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직무한계를 자의로 무시하는 김창룡 특무대장과 잦은 갈등을 빚게 되었고, 김창룡은 이 과정에서 공국진이 탄피를 일본에 밀수출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씌워 해임을 기도했다. 소위 경무대 유시를 근거로 하는 김창룡의 공세 앞에 정일권 참모총장도 역부족으로 그가 임명한 헌병사령관의 해임을 명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후 공국진이 강문봉이 군단장으로 있는 2군의 참모장으로 발령되는 것도 김창룡의 방해로 무산되었고, 이 과정에서 김창룡은 참모총장 정일권의 명령을 정면으로 무시하고 공국진의 보좌관을 체포, 연행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김창룡의 월권행위에 분노한 정일권과 강문봉은 1955년 10월 진해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에게 직접 찾아가 김창룡의 전근 내지는 유학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들의 건의를 수용하지 않음으로써 김창룡에 대한 신뢰를 재확인하였다. 김창룡은 정일권과 강문봉의 비리에 대한 집중 수사로 이에 대응하였고, 이는 정일권과 강문봉의 김창룡 암살음모와 교사 라는 극단적인 대응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이승만은 김창룡에게 정일권의 비리를 수사하게 했고, 정일권에게는 역으로 김창룡의 비리를 수사하라는 밀지를 내렸다는 것이다.
군인들의 쿠데타 기도를 두려워하던 이승만은 국군 내 일본군 파벌, 만주군 파벌, 광복군 파벌 간의 헤게모니 쟁탈 갈등을 알고도 묵인했다.
1958년 이승만은 에너지를 발전을 위해 핵력이 필요하다는 전문가의 조언을 듣고 핵력 공학과 개발을 추진한다. 그러나 핵력 공학과 개발 시도는 2년 만에 1960년 4.19 혁명으로 권좌에서 축출당하고 만다. 절반도 시공되지 못했던 핵력 공학과 개발 계획은 그대로 백지화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하지만 휴전 이후 미국은 북방한계선을 그어 이승만의 북진을 막았다. 이승만은 미국의 개입없이 북진하려면 핵폭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많은 학생들을 유럽으로 유학보냈다. 하지만 일부 학생들은 이승만의 의도를 알고 독일 등에 망명하는 경우가 있었다.
장덕수 사건 이후 사이가 틀어진 김구가 이승만의 암살을 시도하려 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안두희 공판기에 의하면 김학규는 홍종만을 통해 안두희를 알게 되었다고 하며 김학규와 만나기 전부터 홍종만을 통하여 한독당에 입당할 것을 이야기하여 3, 4월경에 입당 절차를 밟았으며, 비서를 통하여 당원증을 내주게 했다고 하며 안두희가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한 일은 없다고 한다. 김학규는 안두희와 만났을 적마다 대한민국에 대한 불평을 말하였으며, 때때로는 듣기에도 위험한 이야기까지 하고, 또 김구 자신의 증명서까지 얻어달라고 말하여 왔다며 김학규는 그 후로 홍종만을 통해 찾아주지 말기를 요구하며 김구의 암살 약 1달 전부터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다고 말했다. 또한 김학규는 한국독립당에서 비밀당원증이란 것이 없다고 했다.그런데 진술과는 달리 김구가 경교장에서 암살되던 날 김학규는 경교장에 모인 한 측근에게 혈서를 하나 보여주었다.
사건 직후 경교장에서 보좌진을 부른 김학규는 자신이 소지하던 손수건 두 장 크기의 하얀 천을 한장 보였다. 천에는 "나는 미국제국주의의 주구 이승만을 타도한다"는 혈서가 쓰여 있었다.[167] 보좌진들이 누가 쓴 것이냐 라고 붇자 김학규는 "안두희가 백범 선생 앞에서 쓴 것"이라며 믿었던 안두희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사실을 분해하며 부르르 떨었다.
이 사건 직후 김학규는 안두희의 혈서를 그대로 불에 태웠다.그러나 김학규가 안두희를 김구에게 소개해서 이승만 암살을 도우려 했다는 정보는 이미 유출된 뒤였다.
한국 전쟁 이후 이승만이 반휴전 태도를 고수하자 미국 정부는 이승만을 제거하고 유엔군사령부 주도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는 '에버레디 작전'(Operation Everready)을 수립했다.
1952년 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하고 새로운 지도자를 수립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이승만 정부의 전복을 후원할 경우 전쟁 수행에 대한 정당성이 훼손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미국은 이 계획을 실행할 수는 없었다.마땅한 대안자를 찾지 못하던 미국은 이승만을 유지하되 그의 주변 측근들 중 강경파를 숙청하는 방안을 추진하였다.
미국 정부는 이승만의 제거가 더 큰 혼란을 부를 수 있으며, 한국민의 민족 감정을 자극할 수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미국은 그 계획을 완전히 폐기하지는 않았다. 그 후에도 이승만이 계속 미국의 정책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일 때마다, 미국은 이승만의 제거를 고려했다.4·19 혁명 당시 이승만의 퇴진에 대해 윤치영은 '미국 사람들이 앞장서서 한 짓이나 다름이 없다.라고 증언하였다.
1950년대 말에 있어서는 한때 장면을 대안으로 세웠으나 실패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자유당 내 온건파인 이기붕 등을 통한 자연스러운 세대교체를 추진하려 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자신이 대통령직을 내놓을 경우, 자신 대신 대통령이 될 인물로 장면과 조병옥을 꼽았다.그러나 이승만은 이 두 사람의 도덕성과 능력, 그리고 애국심(특히 미국에 대한 독립적인 자세)을 의심하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 있는 나라를 맡기느니 차라리 욕을 더 먹더라도 자기가 좀 더 오래 집권하면서 나라를 보위하고 그 기반을 다지는 것이 대한민국을 위해 낫다고 판단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