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건봉사
유적지종류 : 사찰
관련사찰: 건봉사(乾鳳寺)
설화종류 : 사찰전설
시대 : 통일신라
연도 : 520
<요약>
고성 건봉사의 유래
<내용>
533호 7면 설화와 전설
고성 건봉사
일만 이천의 봉우리가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사계절을 따라 기기묘묘하게 단장을 하고 사람들을 맞이하는 금강산. 그 절경의 장엄은 사람의 솜씨로는 가히 흉내도 못 낼 일이로되 신(神)의 조화라 한다 해도 그 놀라움에는 거듭 거듭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곳이 금강산이기도 하다.
그 웅장한 산자락이 남쪽으로 내리 뻗으며 완만하게 숨을 돌리는 곳, 뒤로는 울울한 산림의 계곡과 거대한 자락의 산세지만 앞으로 나아가면 푸르디푸른 동해가 가슴을 탁 틔워 주는 그 곳에 절이 있었다. 원각사(圓覺寺 후에 도선
스님이 서봉사라 개칭했고 고려말 나옹 스님이 건봉사로 개칭해 오늘에 이른다). 고구려의 승려로 나중에는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阿道)화상이 처음 절을 지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영토를 각축하며 변방을 빼앗고 뺏기기를 반복하는 시대적 상황은 여러 신을 섬기는 스승들을 배출하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여러 토착 신앙의 세력은 불교를 숭상하는 스님들에게 교화되곤 했다. 아도 화상이 처음 절을 지은 자리는 피폐해 있었으나 이제 신라의 영토가 된 시절인연을 따라 신라의 스님이 중건의 원력을 세우게 되었다. 바로 발징(發徵) 화상이 그 원력의 주인공.
발징 화상의 원력은 단지 절을 다시 중건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수행자가 된 바에야 기어이 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스스로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태어날 대까지 용맹정진을 해야 하리라는 신념을 가슴 가득 담고 있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절이 중건되면서부터 단 하루도 끊이지 않은 염불소리. 발징 화상이 개설한 만일염불회의 염불기도는 참으로 대단한 원력의 실현 그 자체였다. 정신(貞信)과 양순(良順) 스님을 비롯해 만일염불회에 염불승으로 동참한 스님은 모두 31명이나 됐다. 염불승을 자처하고 기어이 미타국에 왕생하리란 뜨거운 발원을 한 스님들의 정성 어린 기도로 금강산은 온통 염불도량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런 후끈한 기도열기는 사바세계의 중생들에게도 커다란 희망이었다.해를 거듭할수록 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기도에 동참하는 사람이 늘고 비록 이름은 올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한 두 번의 인연으로 기도에 동참하는 사람은 부지기수였다.
염불만일회 결사에 동참한 스님들은 말 그대로 만일 동안을 염불로 수행했다. 아침공양을 하고 한차례 북과 대징을 치면서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고 전심공양을 마치고 또 염불을 했다.
저녁시간에도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염불을 했으니 그야말로 하루종일 다른 소소한 말을 하는 시간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오직 아미타불을 부르는 데만 입과 마음을 쓰는 그런 수행이었다. 동참한 신도들은 집에서 생활하는 가운데 늘 아미타불을 염원하고 시간이 되는대로 절을 찾아 스님들의 염불정진에 동참했다.
그렇게 뜨거운 열기를 만일간 이어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그 일이 생사를 걸어두고 매달린 필생의 기도였기에 어지간한 어려움은 스스로 극복되며 만일간의 염불정진은 그 날짜를 소복소복 채워가고 있었다.
동참 신도들도 아예 탁발 나가는 일마저 생략해 버리고 정진에 매달리는 스님들을 위해 각종 공양물을 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참여대중이 무려 1천8백 2-인이나 되었으니 그들의 작은 시주도 모아지면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의복을 담당하기를 자처한 신도가 120인이나 됐으므로 그들이 매년 한 단씩의 포를 냈고 나머지 1천7백의 신도들은 곡식과 기름을 비롯해 각종 생활 용구를 시주했다.
염불만일회를 이끄는 발징 화상에게는 그 기도의 대의를 묻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 발징 화상의 정진 가운데는 절을 찾아와 염불공덕과 기도법을 묻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일도 중요한 것이었다. 발징 화상은 아미타불이 누구이며 극락세계는 어떤 곳인가를 묻는 사람들에게 친절히 설명했다.
옛날 옛적 세자재왕(世自在王)이란 부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법장(法藏)이라는 비구가 있었는데 그는 항상 부처님의 법을 칭송하고 보살의 행을 닦아 온갖 중생을 제도하려는 원을 세웠다. 하루는 세자재왕 여래를 찾아 뵙고 여러 가지 시로써 부처님을 찬탄한 후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세상에 고통없는 세계가 있습니까. 저는 위없는 깨달음을 얻어 그 세계에 나기를 원합니다."
그 때 부처님은 삼 백 십억이나 되는 무수한 부처님의 세계를 보며 법장 비구로 하여금 깨끗한 행을 일으키게 하면서 말씀하셨다.
"법장아. 그대 자신이 그런 세계를 하나 지으면 어떠한가. 세계는 오직 마음의 산출(産出)이니 그대 원한다면 마땅히 그렇게 될 수 있으리라."
법장 비구는 이 많은 세계를 낱낱이 관조하고 그 세계 가운데 오직 좋은 점만을 선택하여 더러움이 없고 고통이 없는 극락세계를 세우고자 48가지의 원을 세웠다.
그 48가지의 원이란 3악도의 불행이 없고 그곳에 나는 이는 누구나 6신통을 갖추고 수명이 한량없고 성불의 인연이 무루익어 누구나 성불토록 하고집착과 애착과 걸림이 없어 항상 지혜가 충만하고 그리혀 해탈삼매에 들지 않는 이가 없는 그런 지극히 좋은 곳이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저의 불국토에 이와 같은 일을 이루지 않는다면 저는 결코 성불하지 않겠나이다."이렇게 원력을 세운 법장 비구는 여러 생을 거치며 수행학도 정진하여 덕행과 인욕을 닦아 마침내 그 원을 성취해 극락세계를 장엄하여 아미타불이 되었다.
그러면 극락세계란 어떤 곳인가.
극락세계는 땅이 칠보로 되어 광채가 나고 기묘하고 천장하기가 시방세계의 으뜸이고 그 넓기가 한량이 없으며 땅이 평탄하여 구릉과 골짜기가 없고 바다와 강이 없으며 크고 작은 연못이 있으며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그리고 용이 없다.
또 비와 운이 없고 해와 달이 없으나 항상 밝고 낮과 밤도 없으나 꽃이 피고 새가 우는 것으로 낮을 삼고 꽃이 지고 새가 쉬는 것으로 밤을 삼으며 극락세계의 일 주야는 사바세계의 일 겁에 해당되고 기후도 차고 더운 것이 없어 항상 온화한 봄과 같다....
발징 화상이 경전에 묘사된 극락세계를 이윽히 설명하면 그 설법을 듣는 신도들은 자신이 그 극락세계에 들어 가 있기라도 하는 듯한 즐거움에 빠지곤 했다.
화상은 그 즐거움은 반드시 한 순간의 착각이 아니라 누구나 염불 정진하여 다다를 수 있는 곳임을 강조했다.
실제 중국 동진의 혜원대사도 여산의 동림사에서 승속의 볼제자 123명으로 염불 수행을 30년이나 지속해 마침내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극락왕생을 했던 일도 소상히 설명했다. 그렇게 하여 원각사의 염불소리는 날로날로 우렁차게 일 만 이천 금강산의 봉우리들을 뒤덮고 있었다.
만일을 어떻게 염불로 채울 것인가. 의심하는 사람에게 일 만 일은 수억 만 일이 될 것이고 능히 가능함을 믿는 이에게 일 만 일은 일년의 시간도 아님을 누가 부정할 것인가.
원각사의 염불승 31명과 동참 재가신도 1천 8백 20명. 그들에게 일 만 일은 쏜 살 같은 세월이었다. 매일의 염불정진은 흐르는 세월마저 염불삼매로 빠뜨렸던 것이다.
원성왕 3년(757).
이해는 원각사 염불기도가 장장 30여 년의 긴 여정을 마감하는 해였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금강산에 구름이 모여드는 어느 날, 염불승들이 단정히 앉아 염불삼매에 빠져 있을 때 천지가 진동을 하는 듯한 기운이 절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러나 평온하게 앉아 염불정진을 하는 스님들의 마음자리는 옛날 법장 비구가 세웠던 48대 원력이 이슬처럼 맺혀 있을 뿐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그저 아미타불을 염원하는 간절함이 있을 뿐. 구름 사이로 오색의 광채가 내리고 금강의 자락들이 춤을 추며 일어 나는 듯한데 아, 염불승들의 몸이 칠보로 단장되고 그 눈에 아미타불이 여려 천신과 보살들에 호위되어 찬란한 허공을 밝고 서 있는 모습이 또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미타불께서 현신 하셨다."
누구도 입밖에 말을 내지 않았으되 그 외침은 사방 수 천리를 뻗어 나가고 있었으니 그 순간 31명의 염불승은 극락왕생의 무루한 가피를 입었다. 발징 화상을 비롯한 염불승들은 그날로 아미타불의 국토로 왕생했다.
이승에서 걸쳤던 육신을 태운 재가 원각사 주변에 흩뿌려지는 소신공양의 아름다운 의식으로 원각사도 극락정토의 한 자락이 되고 있었다.
첫댓글 감동이 느껴지는 설화 ~ ~ 나무 아미 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