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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나의 수치와 야곱가의 복수
창 34:1-31
요절: 34:1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더니“
오늘의 본문도 우리들에게 깊이 생각할 만 것을 던져줍니다. 우리가 무슨 판단을 내리기 전에 먼저 본문을 깊이 분석하여 우선 무슨 일이 왜 일어났는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하나님의 전체 역사안에서 조명을 해야 합니다. 먼저 사건을 살펴 보겠습니다.
1절을 보시겠습니다: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더니”
야곱이 세겜앞에 땅을 산 것으로 보아 그는 그곳에 오랜 기간을 정착하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100 크시타, 즉 100개의 금돈이면 상당히 큰 돈입니다. 큰 도시 옆에 정착하는 것은 여러모로 보아 유리합니다. 우선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하고 도시 주민과의 물물 교환을 통하여 부유해 집니다. 짐승은 관리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야곱은 부지런히 짐승을 팔아서 돈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그 지역이 목축에도 이상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도시 옆에 사는 것은 이렇게 많은 잇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가? 이방 풍습과 더불어 이방신이 들어 온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삶은 우상숭배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디나가 욕을 당하기 전에 야곱의 아들들이 이미 얼마 기간동안 도시 사람들과 교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곳의 신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즉 우상이 이미 야곱의 가족으로 들어 갔을 것입니다.
이러한 정황에서 디나가 도시의 딸들을 보러 나간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결코 잘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부모와 형제들이 이것을 허락했을 것입니다. 야곱이 그곳에 정착함으로써 그러한 기회를 준 것이고 이것을 통해 문화와 우상의 교류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2-4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의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 그 마음이 깊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연하며, 그 소녀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고,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청하여 이르되 이 소녀를 내 아내로 얻게 하여 주소서 하였더라”
세겜 성 도시 제후의 아들 세겜이 디나를 보고 사랑에 빠져서 강제로 자기 집에 데려와서 욕을 보이고 자기 집에 가두어 놓았습니다. 이러한 강제 사건은 지금까지도 있는 사건으로서 인류 역사가 흘러가는 한 뿌리가 뽑히지 않을 것입니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문화에서는 추행자는 사형을 당했습니다. 가장 문화가 발달한 유럽에서도 사형이 없어진 지 불과 몇년이 되지 않았습니다. 즉 세겜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가 타 종족의 여성일 경우에는 문제는 훨씬 커집니다. 강간은 단지 그 여성만의 문제만이 아니고 그 집안 전체를 모욕한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종족 전체의 명예가 걸린 일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꼭 피를 흘려야 해결이 되는 문제입니다. 이 법칙은 오늘날까지도 아랍 국가에서 시행되고 있는 것입니다(Blutrache – 피의 복수)
세겜은 디나를 사랑하게 되어 위로하고 결혼을 약속하였습니다. 당시의 결혼은 부모들의 일이었으므로 아버지에게 부탁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큰 실수를 했습니다. 아들을 잡아서 야곱가에게 넘겨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용서를 빌고 청혼을 해야 사회정의가 실현됩니다. 그들이 아들을 죽인다고 해도 아버지는 할 말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눈먼 사랑으로 결국 자기도 죽고 한 부족이 몰살했습니다.
5-7을 보시겠습니다:
“야곱이 그 딸 디나를 그가 더럽혔다 함을 들었으나 자기의 아들들이 들에서 목축하므로 그들이 돌아오기까지 잠잠하였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은 야곱에게 말하러 왔으며, 야곱의 아들들은 들에서 이를 듣고 돌아와서 그들 모두가 근심하고 심히 노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야곱의 딸을 강간하여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 곧 행하지 못할 일을 행하였음이더라”
야곱의 아들들은 심하게 분노를 했습니다. 분노가 그들의 마음을 끓게했습니다. 그 분노는 살인 의지로 정착되었습니다. 자매가 수치를 당했을 경우에는 성년이 된 바로 위 형제가 복수를 해서 가문의 수치를 씻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의 누이의 안전과 순결에 책임을 집니다. 이러한 고대 근동의 풍습은 모슬렘에 정착해서 오늘날에 까지도 그대로 시행이 됩니다. 아직까지도 누이가 남자와 함께 걸어가기만 해도 오빠가 누이를 죽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는 처녀가 강간을 당했을 경우에 살인을 금합니다. 이 경우에 결혼을 하여 같이 살거나 한 쪽이라도 이것을 원치 않으면 많은 돈(은 50세겔)으로 변상을 해 주어야 합니다. 남자는 돈을 지불할 능력이 없으면 한시적인 노예가 되어야 합니다.
“야곱의 딸을 강간하여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 곧 행하지 못할 일”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강간 사건은 단순하게 강간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집안 전체에 수치를 불러왔고, 그 수치로 인해 몹시도 분노한 것입니다. 즉 “강간을 당한 누이의 마음이 얼마나 슬프고 괴로울까”가 일차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 집안이 망신을 당했다”가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수치문화”에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가 목숨을 걸고 범인을 죽여서 그 수치를 풀어야 하는 것이 당시의 문화입니다.
8-10절을 보면 세겜의 아버지 하몰이 문제 해결을 위해 야곱의 가족에게 매우 매력적인 제안을 합니다. 통혼 정책을 제안했습니다. 단순히 디나만을 아내로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두 민족이 서서히 서로 합치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상당히 현명한 제안입니다. 그러면 강간 사건은 자연히 해결이 될 수가 있습니다. 당시 문화가 높은 도시민이 유목민을 업신여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유목민으로서는 가장 바람직한 것이 도시민과 같이 사는 것입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시가 우선 안전하고 삶이 안정되기 때문입니다. 하몰은 야곱이 이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고 본 것입니다.
11-12에는 사랑에 빠진 한 젊은이가 구애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세겜이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의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원하는 대로 다 주겠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죄의 대가를 받겠다는 의미입니다. 형제들이 혼수와 예물의 액수를 정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13절에 보면 하몰의 매력적인 제안이나, 세겜의 구애가 디나의 형제들의 마음을 돌이킬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죽이고자 결심을 굳게 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몰과 세겜의 제안이 참으로 시기 적절하다고 느꼈습니다. “이때다! 바로 하늘이 주신 기회다!”하며 속으로 쾌재를 울리며 그들을 속여 기가 막힌 지혜를 짜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잃어버린 가문의 명예를 찾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더우기 이들을 죽이지 않고서는 잡혀있는 누이를 구해 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흉계를 꾸몄습니다.
14-19은 일이 진전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야곱 아들들의 속셈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20-24은 세겜 시민들이 할례를 받게 된 경위를 설명합니다. 하몰의 화술은 놀랄만 합니다. 전 도시민을 설득시킵니다. 야곱이 재산이 많아서 그 재산이 자기의 도시의 소유가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도시를 키우는 것은 당연히 시민에게도 이득이 되는 일입니다. 하몰은 도시민에게 야곱의 일행이 친절하고 평화롭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들이 속아도 단단히 속습니다.
할례는 벌써 기원전 40세기에 이집트에서 행하여 지고, 주변 국가로 퍼져나갔습니다. 세겜 사람들도 이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할례가 고통스럽고 할례를 받으면 오랬동안 몸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열이 많이 납니다. 심하면 30일간을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할례는 어린 아이들에게 합니다.
25-26을 보시겠습니다:
“제삼일에 아직 그들이 아파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버니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몰래 그 성읍을 기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칼로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오고”
시므온과 레위가 복수자로 선정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성경에서 그 당시까지만 본다면 인간이 범한 사건중에서 가장 끔찍한 사건입니다. 인종박멸 사건입니다. 그들이 하몰과 세겜만 죽였다면 그들의 행위는 정당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비겁합니다. 서부 영화에서도 뒤에서 총을 쏘지 않습니다. 더우기 그들은 아무 죄도 없습니다. 이것은 복수를 위한 복수요, 무고한 사람들의 살륙입니다.
후환을 없애기 위해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야곱의 힐책에 그들은 단지 복수를 했다고 합니다(31). 그들의 증오는 얼마나 무섭습니까? 왜 무고한 사람들을 죽여야합니까? 이것은 정당한 복수가 아니라 증오가 그들의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그들의 증오가 하늘을 찌른 것입니다.
또한 이 비극적 사건은 인근의 모든 도시국가 사람들을 흥분시켰을 것입니다. 증오는 또 다른 증오를 불러 일으킵니다. 이들이 그들을 치기 위해 몰려 올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렸습니다.
27-29을 보면 시몬과 레위만 잔인한 것이 아니라, 나머지 야곱의 아들들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와서 모든 물건을 노략했습니다. 여자들을 모두 잡아서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야곱이 어떻게 아이들을 키웠을까요? 이들은 앞으로 큰 민족을 이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할 자들이 아니겠습니까?
30-31은 아버지와 아들의 논쟁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불의를 책망하기 보다는 앞으로 자신이 처할 위험을 더 두려워 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들은 그들의 행위에 대해 조금도 후회를 하지 않습니다. 자기 방어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흉칙한(makaber) 사건을 보고 과연 무엇을 배울 수가 있습니까? 성경은 과장없이 우리 조상의 범죄사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백성을 만드시기 위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축복하시고 기르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손들은 왜 그렇습니까? 또한 하나님은 어떻게 그러한 잔인한 사람들을 통하여 일을 하십니까?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두 가지 점을 추려보았습니다:
첫째로 야곱의 죄입니다. 그는 벧엘로 돌아가서 자신이 스스로 서원한대로 하나님의 집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겜옆에 살면서 장사를 하여 돈을 만들고, 안전하고 안락한 삶을 살려고 했습니다. 그 댓가는 야곱가에 세겜의 우상이 들어 왔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로서의 삶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늘 떠나는 삶입니다. 비신자와 함께 삶을 섞어서는 안됩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구분되고 구별된다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도 정들고 안전한 도시, 친척 일가가 있는 도시 하란을 떠났습니다. 이것이 부르심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는 떠나야 합니다. 이삭도 일생을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이 땅에서는 불편하고 안정성이 없지만 나그네로 사는 길만이 하나님만 의지하며 사는 길이요 하나님과만 교제하고 사는 삶입니다. 야곱은 이방의 땅에서 둥지를 트려고 할 때에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방법입니다. 흉악한 범죄자들이 거룩하고 선택받은 이스라엘의 선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들의 범죄를 간과하시지 않습니다. 야곱은 죽기 전에 두 아들을 저주하였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창49:5-7
이렇게 야곱은 후에 회개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깨닽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아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이루시고, 이스라엘을 축복하시고 수없이 용서하시고 또 축복하셨습니다. 그들이 범죄를 할 때마다 선지자들을 보내시고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훌륭한 자들로만 그의 구속사를 이루신다면, 하나님은 한 발자욱도 내 디디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부르시고, 용기를 주시고, 용서하시면 이끄십니다. 바로 이러한 역사에 우리도 지금 서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입니까? 결코 그 자체로 구원을 받은 단체도 하나님의 단체도 아닙니다. 단체로서의 교회는 믿을만한 곳이 못됩니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교회들 중에는 범죄자들이 더 많은 범죄단체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합니다. 구원은 단지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면서 사는 소수의 성도들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 순종하는 자 만이 진정한 보이지 않는 교회의 구성원이 됩니다. 우리가 모두 이러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