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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행문 >
동남아시아 사찰 순례기- 라오스 편
첫번째 라오스사찰 방문기 (1)
이 글은 불교평론 69호에 실린 송위지 교수의 글 ‘라오스 불교의 역사와 현황’에서 많은 부분을 옮겨왔다. 기관도 많고, 수행하는 사람들도 많다. 한국에서도 위빠사나 관련 책도 많이 나오고 미얀마로 수행을 하러 갔는 사람도 많다.
필자는 2017년 말 부터 동남아시아 태국을 여러차례 방문하면서 태국지역의 유명사찰을 많이 소개하였다. 태국에서 치앙라이 지역과 태국 남부의 붓다다사 스님이 거주했던 ‘수안 모크(Suan Mokkh), 그리고 포틸락 스님이 이끄는 ‘아속’ 공동체를 방문하려고 하였지만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여행을 할 수가 없어서 우선은 태국불교 기행문은 치앙마이 사찰 소개로 끝낼 수 밖에 없었다. 기회가 되면 못다 한 태국 사찰 소개를 더 하려고 한다. 이번 호 부터는 2019년 11월에 라오스의 루앙프라방, 방비앵, 비엔티앤을 방문한 것을 토대로 라오스 불교를 소개한다.
글 | 김형근 (본지 편집인)
방비엥
버지니아 붓다 봉
방비엥 호텔 옥상에서 필자
1. 라오스에 대한 간략한 소개
유튜부에 라오스를 검색해보면 한국에서 많은 젊은 사람들이 라오스 여행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코로나19로 여행이 어려워지기 전까지 한국에서는 배낭 여행족들이나, 나 홀로 여행을 하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단체로 라오스 여행을 많이 하였다. 시기는 주로 비가오지 않는 11월부터 3월까지 많다고 한다. 라오스 여행은 목적에 따라 방비엥을 중심으로 수려한 자연 경관과 물놀이를 즐기는 휴양이 될 수도 있고, 루앙프라방과 비엔티엔을 중심으로 한 고대 왕국이 있었던 곳에 산재된 남방 불교문화를 살펴보는 것 같다. 비엔티엔, 방비엥, 루앙프라방 세 곳을 다 들리려면 10일간은 머무르는 것이 좋고, 이 세 곳 외에 ‘왓푸’사원이 있는 남부의 ‘팍세’까지 가려면 2주 정도면 좋다고 생각한다. 특히 1995년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루앙프라방은 탁발로 널리 알려졌고 역사적인 사찰과 박물관, 야시장 등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요즘에는 북부의 고원지대인 폰싸완(씨앙쿠앙)을 더 많이 간다는 말이 있다.
한국인들은 대개 방비엥 중심이 많은 것 같다. 여행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동남아 여행 패키지로 베트남, 태국을 거쳐 라오스로 가는 경우도 많다. 태국을 장기 체류하는 사람들은 롱까이에서 차로 1 시간 걸리는 라오스 수도 비엔티앙으로 가는 경우도 많다. 한국에서는 비엔티앙, 루앙프라방 직항 노선이 있다.
미국에는 아시아 전통 불교국가의 사찰이 다 들어서 있는데, 이 중에서 라오스 사찰은 다른 나라에 비해서 그 숫자가 적다. 라오스 큰 사찰은 버지니아에 있는 ‘붓다 봉’이다. 매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 휴가 기간에 전미국의 라오스 인들이 ‘붓다 봉’에 모여 큰 잔치를 한다.
라오스의 국명은 라오인민민주주의공화국(Lao People’s Demo-cratic Republic, Lao PDR)이며 수도는 비엔티안(Vientiane)이다. 바다가 없는 내륙국으로 인도차이나 반도의 중심에 위치한다. 국토 면적은 남북한 합한 것 보다 조금 큰 한반도의 약 1.1배이며 국토의 70%가 산악지대인 기후는 연평균 기온이 29°이고, 4월에는 평균 40°C로 가장 더우며 12월에 20°C로 최저를 보이고 있다. 5~10월이 우기이고 11~4월은 건기이다.
종족은 타이계, 중국계, 인도계, 베트남계가 다양하게 섞여서 평야지대에서 살아온 라오족으로 대표되는 라오룸족(50%), 낮은 산을 터전으로 살아온 카뮤족으로 대표되는 라오텅족(30%), 고산지대에서 살아온 몽족으로 대표되는 라오쑹족(10%) 등과 마오족, 야오족, 쿰족 등 48개 소수민족(10%)이 있다. 인구수는 700만 명이라고 하나 정확한 통계라고 보기는 어려운데, 그 이유는 마오족, 야오족, 쿰족 등 산지에서 화전을 하는 소수민족이 많아서 그 수를 파악하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언어는 태국어와 유사한 라오어를 사용한다. 프랑스 식민지로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어도 통용되고 있다. 인구의 90%가 불교도이며 나머지는 정령신앙과 기독교인들이며 기독교의 포교 활동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미종족전도선교회’등 한국의 선교단체가 이곳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정치체제는 1975년 12월 개최된 전국인민대표자회의(National Congress of People’s representatives)에서 왕정이 공식 폐지되고 라오인민민주의공화국이 수립된 후, ‘라오인민혁명당’을 중심으로 1당 독재체제가 지속되고 있다. 당 중앙위원회의 최고의사결정을 담당하는 정치국원이 국가원수인 대통령, 행정수반인 총리와 국회의장 등 정부 요직을 겸하는 집단지도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2. 라오스 역사와 불교의 역사
지금 라오스가 위치한 곳에서 선사 시절부터 청동기, 철기 시대의 유물이 발견되고 4세기 전에도 중국 및 인도 문명의 유입이 있었다 한다. 4세기에서 8세기에 이르는 기간에 매콩강 유역을 중심으로 무앙(muang)이라 불리는 소규모 촌락 형태로 공동체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라오스를 시대적으로 대략 분류하면 란상(Lanxang) 이전 시대, 란상 시대, 프랑스 식민지 시대,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독립국 시대로 나눌 수 있다.
(가) 란상 이전 시대
란상 시대가 전개되기 이전의 라오스는 중국 · 베트남 · 미얀마 · 태국 · 캄보디아 등 열강 사이에서 독립된 왕조를 이루지 못하고 계속 속국으로 지냈다. 라오스에 불교가 처음 소개된 것 역시 빠알리어 역사서에 의한 설명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라오스 역시 동남아의 많은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듯이 불교의 전래가 국가의 건국보다 앞선다. 이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남아시아나 동남아시아 지역의 역사 서술이 고대로 올라갈수록 해당 지역의 역사를 대표할 수 있는 온전한 역사서에 의존하지 못하고, 외부의 역사서나 문헌 특히 빠알리어로 기록된 자료들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라오스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기원전 309년이라 되어 있으나 이 역시 라오스를 수완나부미로 생각해서 주장하는 것으로 확실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기원전 3세기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까 황제(B.C. 269~232)에 의해서라고 전해지고 있다. 아쇼까 황제는 아시아는 물론 유럽이나 아프리카까지 전법사를 파견했는데 그중의 한 지역이 소나(Soṇa) 스님과 웃따라(Uttara) 스님에 의해 불교가 전해진 수완나부미 즉 ‘황금의 나라’라고 불렸던 현재의 라오스 지역이라고 추정되었다. 수완나부미는 미얀마 · 타이 · 말레이반도· 수마트라라는 이설도 있다. 이후 기록에 의하면 라오스에 상좌부불교가 전래된 것은 기원후 7~8세기 드와라와티 왕조 때로 추정된다. 7세기에는 주로 타이족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현대 중국의 윈난(雲南) 지역에 있었던 난차오 왕조 때는 밀교가 소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라오스에 불교가 전래된 루트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다. 1602년에 셋타티라트 왕의 재세 시 건립된 루앙프라방 비문에 라오어로 기록된 프라방 이야기에 따르면 란상 개국 이전인 874년에 스리랑카의 춘나카 스님에 의해 행해진 ‘불안을 고요하게 하는 결인’과 금, 은과 다른 금속들의 합금에 관한 기록이 전해진다.
(나) 란상 시대(1353~1694)
라오스의 역사는 1991년 제정된 라오인민민주주의공화국 헌법 전문에 나타나 있다. “다민족에 의해 형성된 라오스 인민은 몇 천 년을 걸쳐 사랑하는 이 땅에 정주하며 발전했다. 지금으로부터 600년 전 우리 조상들은 통일된 란상 왕국을 건국해 번영을 누렸었다.” 이 전문에서 알 수 있듯이 라오스의 역사는 란상(Lan xang, 1353~1694)부터라고 할 수 있다. 란상 왕국을 건국한 것은 타이계 라오족인 파군(Fa Ngum, 1353~1373) 왕이다. 파군은 젊은 나이에 이 지역을 지배하던 쑤코타이 세력을 몰아내고 흩어져 있던 소수종족들을 규합하여 왕국을 란상이라고 하고 수도를 무앙수와로 정했다. 란상은 ‘백만 마리의 코끼리’라는 뜻으로 옛날 이 지역에 코끼리들이 많이 살아 중국에서 붙인 이름이다.
이 시절 불교가 언제 어떻게 전래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라오스불교의 발전은 대개는 캄보디아와 타이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때는 캄보디아가 불교를 통한 이웃과의 선린외교를 펴던 시절로, 캄보디아와의 관계가 돈독하였으며 캄보디아 왕조와 결혼을 통한 교류도 이루어졌다. 당시 라오스 왕조로 시집온 캄보디아의 공주는 상좌부불교를 직접 교육받았던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파군의 왕비인 케오 켕 야는 라오인들이 코끼리와 물소를 죽여서 제단에 바치는 영혼공희 의식에 반대하여 라오 왕조에서 불교를 신봉할 것을 파군에게 간청하였고, 만일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자신은 크메르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파군은 장인의 국가인 크메르로 사신을 보내 불교 승려들을 초대하였다. 이에 크메르의 왕은 왕사인 마하 파스만를 비롯한 20명의 승려와 다른 세 분야의 기술자들을 파견하였다. 이들을 이끌었던 승려인 마하 텝랑카는 스리랑카 출신이었다. 이때 함께 온 스리랑카 승려는 그의 사형인 마하데와랑카, 사제인 마하데와랑카와 마하나디판나들이었는데, 이는 스리랑카식 불교인 상좌부불교가 라오스에 뿌리내렸음을 말해준다. 이를 계기로 라오스 왕실은 물론 라오스에서 주종을 이루고 있던 타이계의 라오족들은 주로 상좌부불교를 믿기 시작했다. 이는 파군의 정통성을 높여주었을 뿐 아니라 국민의 정신적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비엔티엔에서 만난 스님들과 기념촬영
파군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 삼센타이(1373~1416)는 43년간 통치했는데 베트남과 센강 · 삼누아 전투에서 승리하여 라오스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 그는 불교가 국민과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사원을 건립하고 불교를 공부할 수 있는 사원 학교들도 세웠다. 그는 마하텝랑카 스님과 마하파스만 스님을 국민에게 일체감을 심어주고 통합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특별히 건립된 왓캐오 왕실사원의 수장으로 삼았다. 또 프라방 불상을 보존하는 것으로 유명한 왓마노롬 사원 역시 삼센타이 왕에 의해 세워졌다. 그의 재임 말기까지 루앙프라방을 불교교육과 전파의 핵심적인 곳으로 삼았다고 라오스의 역사학자 마하 실라 워라웡은 기록했다.그가 죽은 후 100년간 계속되는 파벌 싸움으로 라오스 국력이 쇠진한 시기라고 한다.
삼센타이의 후계자 중 한 사람인 위소운(Vixoun) 왕은 불교를 전파하는 데 매우 공이 컸다. 1503년 위소운 왕은 대불상을 안치하기 위해 왓위소운(Wat Vixoun, 大寺)을 건립하였다. 1504년에는 대불상을 완성하여 왓위소운에서 대규모 의식을 봉행했다. 이 시절에 빠알리 삼장을 라오어로 번역하는 불사를 하였으며, 그 시절부터 번성했던 위슈말리(Visumali) 같은 시적인 통치규칙이 제정되었다.
위소운 왕의 아들 포티사라트 왕(1520~1550)도 독실한 불교도였다. 그는 현재의 태국인 치앙마이와 아유타야에서 온 두 명의 공주와 각각 결혼했으며 이들 왕국과 불교를 바탕으로 교류했다. 이로 인해 라오스는 물론 치앙마이와 아유타야에도 불교도가 늘어나게 되었다. 1523년에 포티사라트 왕은 치앙마이로 프라텝몽콜 스님이 이끄는 불교사절단을 통해 라오어로 쓰인 경 · 율 · 론 삼장 60부를 보냈다. 1525년에는 왕은 치앙마이에서 율사로서 교육받은 마하 수무다코테 스님이 주재한 왓위소운의 수여식에서 큰스님에 준하는 성직자로 임명된 이후, 매우 깊이 있는 종교교육을 받았다. 1527년에는 국민에게 영혼숭배를 금지하고 불교만을 믿도록 지시했으며 그동안 영혼숭배가 행해지던 곳에 사원을 지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라오스뿐 아니라 이웃 나라들부터도 대단한 호평을 얻었다. 얼마 동안 치앙마이에 머물렀던 왕은 돌아올 때 에메랄드 불상과 스리랑카 양식의 불상인 프라시캄을 모셔왔다.
란쌍 시대 지도
그 후 사이세타티라트 왕(1548~1571) 때 라오스는 현재의 베트남인 안남과 태국 아유타야의 침입으로 내부적인 갈등을 겪었다. 또한 태국 북부 치앙마이 왕국에서 왕위 계승 문제로 전쟁이 발생하여 버마족과 40년이 넘는 기간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사이세타티라트 왕은 버마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해 새로운 수도로 비엔티안을 건설했다. 그는 루앙프라방에는 프라방 불상을 남겨두고 고승을 머물게 해서 일반 국민이 예배할 수 있게 했으며 에메랄드 불상과 프라 시캄은 수도로 모셔 갔다. 1566년에는 원래 힌두교 사원이 있던 곳에 왓탓루앙 사원을 중건하고 탓루앙 대탑을 건립했다.
세타티라트 왕은 치앙마이와 힘을 합해 버마족을 물리쳤는데 이때 왕은 포티사라트 왕의 어머니 즉 자신의 할머니-치앙마이족의 공주였던-와 국가를 위한 사원을 건립했다. 이 사원이 바로 오늘날까지 라오스 국민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오고 있는 비엔티안 시의 케오사와 루오사이다. 하지만 이후 버마와 씨암의 침공으로 나라가 피폐해졌으며 불교 역시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다.
비엔티엔시
1639년에는 수리야봉사가 왕위에 올라 55년간 라오스를 다스렸다. 그는 자신의 재위 동안 비엔티안을 불교의 중심지로 만들었으며 많은 시와 문학작품을 통해 불교 연구를 진작시켰다. 서양과의 접촉도 이루어져 네덜란드 상인이 라오스에 들어왔다. 1641년에 네덜란드 상인 게리트 반 우이스토프가 비엔티안을 방문했을 때 왕은 왓탓루앙 사원에서 그를 맞았는데 먼 도시에서 많은 순례자가 찾아오는 아름다운 사원들과 조각, 건축, 벽화와 음악과 춤이 가득 찬 활기찬 왕국의 모습을 자랑했다. 1670년에 왕은 아유타야로 사절단을 보내 선린외교를 회복했다. 또한 그는 백성들의 사회적 지위와 관계없이 모든 이들이 공평하게 지위를 누리는 법률을 제정하였다. 이때를 라오스의 황금 시기라 부른다. 수리야봉사가 사망하자 란상 왕조는 막을 내렸는데, 이와 함께 불교 역시 쇠퇴하기 시작했다.
(다)프랑스 식민지 시대
수리야봉사 왕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 아들은 간통죄로 처형시켰고, 둘째 아들마저 배다른 여동생과 공공연히 동거하는 것을 발견하고 처형을 명했는데 그는 타이족의 나라 아야디아 왕국으로 도피하여 후계자가 없게 되었다.
수리야봉사 사망 후, 그의 조카가 베트남 망명에서 돌아와 수리야봉사의 손자인 키트사라트와 함께 비엔티안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왕국을 건설하고자 싸움을 벌였다. 1707년 루앙프라방에 머물던 수리야봉사의 조카 옹로(ONG Lo)가 왕이 되어 세타디라트 2세라 칭했다. 그의 사촌이기도 한 킷사라트(Kitsarath)가 이 왕권을 인정하지 않자 그의 동생을 보내 손볼려 하자, 킷사라트는 시암에 지원을 요청하여 란상으로부터 독립을 승인받게 되어 비엔티엔 왕국과 루앙프라방 왕국으로 나뉘어 경쟁관계가 된다.
1713년 참팍삭에 머물던 수리아봉사의 손자이자 킷사라트의 사촌이기도 한 노카사트 송(Nokasat Song 왕위 1713-1737)은 남쪽에 있는 참파삭 또한 분리될 기회가 왔음을 이용하여 시암에 요청하여 독립 왕국을 이루게 된다. 이로서 통일 란상 왕국은 그 시대를 다하고 ‘비엔티엔’, ‘루앙프라방’,‘참팍삭’ 라오스의 삼국시대가 출현하게 된다. 이렇게 란상 왕국은 분열로 몰락을 길로 들어섰다.
그 후 1778년에는 베트남의 식민지가 된 이후,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라오족의 왕조들은 내부적인 갈등과 외침으로 이렇다 할 사회 · 문화적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일시적으로 라오족의 차오아노(1805~1828) 왕자가 비엔티안을 되찾았으나 차오아노 왕자 사후 다시 씨암족 보딘 장군의 지배를 받았다. 라오스는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베트남과 씨암의 침입에 시달려야 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 세력이 베트남, 캄보디아를 지배하면서 인도차이나 반도의 정세가 급변했다. 라오스 역시 통킹, 안남, 코친차이나와 함께 1893년, 다른 세력을 몰아낸 프랑스 파비에게 지배를 당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라오스를 가톨릭 국가로 만들고자 시도했으나 불교 승려들의 도움을 받은 반식민주의 투쟁 운동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베트남, 일본과 미국의 지배를 받은 라오스인들은 가(ga)족이 퐁슬레이 지방에 침입한 운남 공비 사건(1901~1907), 묘족(猫族) 습격 사건(1919~1921) 등을 거치면서 부단히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프랑스의 식민지 시대를 벗어날 수 있었다.
라오스는 태국과 베트남과 역사적으로 많이 얽혀졌는데 미국과 베트남과의 전쟁에 베트남 편으로 깊이 개입하게 되었다. 미국은 라오스가 베트남의 보급로라는 이유로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셀 수 없이 많은 폭탄을 투하해 영토를 많이 훼손시켰는데 그 양이 2차 세계대전동안 사용된 폭탄수보다 많다는 글도 있다. 지금도 고산지대에는 불발탄이 산재하고 있어 종종 사고가 발생한다고 한다.
비엔티앙 공항에서 필자
3. 태국의 비엔티엔의 파괴
위에 설명한 미얀마와 타이의 흥망성쇠에 따라 북쪽에 위치한 비엔티엔 왕국과 루앙프라방 왕국은 1763년에서 1769년 사이 미얀만의 속국이 되었다가 1779년 시암(태국) 왕국에 의해 속국이 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반면 이 시기 라오스 남부에 위치한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었던 참파삭 왕국은 타이와 캄보디아와 국경을 나누고 있었으나 캄보디아가 16세기에 쇠퇴하여 타이의 속국화 되어 타이의 영향권 안에 머물게 된다.
비엔티앙의 아누웡(Anouvong) 왕은 당시 타이와 베트남(응우엔 왕국) 두 나라에 조공을 받치는 열악한 상황을 타개하고 옛 란상 왕국의 재통합을 계획했던 위대한 왕이었다. 시암(태국)의 도움을 받아 왕위(1805)를 얻게 되어 집권 초기에 시암과 협력했으나 1819년 새로 세워진 베트남의 응우엔 왕국과 동맹을 맺고 외교력을 발휘하여 당시 참파삭 지역 부웬에서의 반란을 시암(타이)를 도와 평정하고 그 대가로 그의 아들을 참파삭 왕으로 세움으로서 분열된 3국 중 비엔티엔과 참파삭의 통합을 이룬다. 내부의 힘을 키워 오던 중 1826년 미얀마가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타이마저 영국과 조약 체결 후 힘을 잃고 있는 등 유리하게 보이는 당시 주변의 정세를 이용, 1827년에서 1828년 사이 타이를 공격 여러 도시를 정복하며 타이 수도 방콕 10km까지에도 이를 정도의 성공을 초기에 이루기도 했다.
이에 타이는 전열을 정비 아누웡의 라오 군을 격퇴시키며 비엔티엔까지 역으로 공격해 오게 된다. 신하 국의 반란을 괘씸히 여긴 타이 왕의 명령으로 1828년 비엔티엔에 있었던 6천 채 이상의 가옥이 파괴되고 거주하던 10만 명의 라오 인은 강제로 집을 몰 수 당한 후 비엔티앤을 떠나 메콩강 맞은편으로 쫓겨나게 되어 비엔티엔은 철저히 파괴되어진 숲 속에 묻혀 사라진 도시가 된다. 사원의 불상을 포함한 거의 모든 공예품들이 시암 군대에 의해 약탈되어 국외로 탈취되고 이 중 잘 알려진 에머날드 불상이 태국으로 갔다.
패배 후 아뉘왕은 베트남으로 도피하여 그들의 도움으로 폐허된 비앤티엔을 일시 회복하지만 대세는 기울어 패배하고 뒤에 방콕에 잡혀가 죽게 된다. 이로서 비엔티엔 왕국과 참파삭 왕국은 타이 영토에 복속됨으로써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모든 사원이 이 시기에 파괴되었으나 아누워 왕에 의해 1818년 세워진 왓 시사켓(wat sisaket) 사원은 비엔티엔 사원 중 유일하게 1828년 침입한 타이군에게 파괴되지 않아 비엔티엔에서 최고 오래 보존된 사원으로 기록되고 있다. 태국식으로 건설된 사찰 이라고 한다.
루앙프라방 박물관, 왕궁
4. 루앙프라방 왕국
이들 두 왕국에 속했던 라오인에게는 18세기 중반이후 19세기 초 대부분은 잊고 싶은 역사의 시기로서 대부분이 타이 계 왕이나 왕자의 지배를 받고 살았던 시기이었다. 대부분은 농토를 빼앗기고 부유한 타이 귀족의 농장에서 농노로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루왕프라방 왕국은 비엔티앤 왕국과 달리 타이에 협조적이어서 속국이긴 하나 란상 왕국을 잇는 단 하나의 살아남은 왕국이 되었다. 19세기 말(1893) 중국의 비적 패인 장족 출신 흑두당무리가 루앙프라방을 침입해 약탈을 자행하자 프랑스는 이로부터 보호를 명목으로 루앙프라방을 인도차이나의 속지로 만들게 된다. 그 후 뒤 이어 옛 비엔티엔 왕국과 참파삭 왕국도 지역도 프랑스령 보호지역으로 편입되게 되어 옛 란상 왕국 전지역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식민지에 속하게 된다. 프랑스인들에 의해 비엔티엔이 폐허에서 복구되어 수도로서 역할을 할 만큼의 도시로 재건되었고 타이 왕국에 의해 파괴되었던 기념비적 건축물인 파 타 루앙 사원과 하우 프라 바에우(Haw phra Kaew )사원을 비롯한 많은 유적지가 복구 되었다. 1904년 라오스에서 제일 아름다운 빌딩이라는 루앙파르방의 현재 박물관인 라오스 왕궁(하우 캄-kaw kham) 또한 이 때 지어진 기념비적 건축물이기도 하다.
5. 라오스불교의 현황
라오스에서 불교는 1947년 제정된 헌법에 의해 국교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불교가 개개인의 생활에 깊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라오스인들에게 불교는 나서 죽을 때까지 모든 일상생활을 지탱해주는 정신적 지주이다. 그래서 국가의 기념행사는 물론 개인적인 행사나 관혼상제까지도 모두 불교식으로 한다. 평소에 인사할 때에도 불교식 합장을 하며 살아 있는 생명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
(가) 라오스 승단
승단에 관한 모든 사항은 1951년 제정된 ‘라오스 승가법’에 의거하여 결정한다. 승려는 사회에서 존경받는 계층으로 사회적인 지위 역시 왕족 다음으로 높다. 승려들이 지위가 높다고 해서 인근 국가인 베트남처럼 정치적인 문제에 깊게 관여하지는 않는다. 승단인 라오상가에는 뜨스이프라상라오라 불리는 종단이 유일하다. 과거에는 캄보디아와 마찬가지로 승단은 진보적 입장을 견지하는 마하니까야파(MahaNikaya, 大宗師派)와 1940년대 초반에 타이에서 소개된 보수적 입장의 담마유트파로 나뉘어 있었다. 하지만 담마유트파는 1975년에 금지되었다.
현재 라오스의 사원수는 약 2,830여 곳이며 이 중 618곳은 인도차이나 전쟁 때 파괴되어 지금도 복구 중이다. 아시아의 다른 불교국가들처럼 라오스의 사원은 각 지방에서 교육, 문화, 예술 및 건축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도심의 사원들이 학교에 가거나 직업을 구하는 이들의 일시적인 숙소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로 인해 젊은 층의 불교도가 꾸준히 늘고 있다. 이처럼 사원에 거주하며 사원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고 학교에 다니는 젊은이들을 소위 ‘템플 보이스(사원 소년들)’라고 부른다.
라오스 지도
(나) 라오스불교의 특성
라오스의 불교가 태국이나 캄보디아와 다른 점은 일반 가정 자제들의 출가 문제이다. 태국이나 캄보디아에서는 거의 모든 이가 일생에 한 번은 승단의 생활을 해야 하나, 라오스에서는 출가 생활을 전적으로 본인의 의지에 맡긴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자는 전통적으로 하안거 3개월이나 그보다 짧은 기간 동안 임시 출가해서 수행한다. 승려가 되기 위한 출가는 보통 10세 때 하지만, 더 늦는 예도 있다. 하지만 18세가 넘어서 출가할 때는 부모뿐 아니라 촌장의 허락도 받아야 한다. 일정 기간이 되면 계를 받아 비구가 되나 (동남아시아 대부분의 불교교단이 그러하듯이) 여성의 경우 비구니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평생 사미니로 지내게 한다. 사미니들은 8계나 10계를 수지하고, 사원의 조그만 건물에 머무르면서 흰색 승복을 입고 지낸다. 그들은 경전을 학습하고 참선 수행을 하며 재가자들을 위한 간단한 종교적 의식을 행한다. 승려들은 평소 새벽 4시에 일어나고 5시까지 좌선을 하며 6시에 탁발을 나간다. 예불은 하루 세 번인데 새벽 4시와 오전 7시, 오후 6시에 한다.
사원은 화교파(華僑派), 베트남파, 라오파로 나뉘는데, 모든 사원이 방법의 차이는 있으나 고아원 등 사회복지 시설은 물론 일반 시민들이 필요로 하는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운영하고 있다. 특히 화교계 사원이나 베트남계 사원에서는 대승불교의 영향으로 상좌부불교에서 잘 시행하지 않는 49제는 물론 지장보살, 관세음보살 등을 모시며, 대승 경전인 《아미타경》을 주로 독송하며 대비주나 능엄주도 낭송한다. 하지만 상좌부불교를 따르는 사원에서는 빠알리어를 강의하고 있으며 매월 2회의 포살(uposatha) 때에는 많은 신자가 모여 5계와 8계를 받는다. 라오어로 쓰인 패엽경은 정보와 문화부 소속의 문학과 대중문화국에서 제작해서 사용하고 있다.
(다) 선 수행
라오스에서는 선 수행으로 위빠사나(vipassana, 觀法)를 행하고 있다. 상좌부불교의 선 수행법인 위빠사나에 관한 설명은 빠알리 경전인 《대념처경(Mahāsatipaṭṭhāna sutta)》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부처님이 직접 행한 수행법으로 알려져 있다. 이 경에서 부처님은 “존재의 정화를 위해, 슬픔과 근심을 극복하기 위해, 고통을 없애기 위해, 바른 도를 얻기 위해 그리고 열반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여기 오직 한 길이 있다. 그것이 사념처(四念處)이다”라고 했다. 사념처란 신념처, 수녀처, 심념처, 법념처의 네 가지를 말한다. 라오스에도 위빠사나 선수행 센터가 여러 곳 있는데 비엔티안 남동쪽 3km 지점에 있는 왓파루앙(Wat Paluang) 사원이 유명하다.
(라) 불교축제
라오스의 불교축제는 캄보디아와 태국처럼 공덕 즉 복(punna)을 나타내는 말 분(boun)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피(phi)라고 하는 영혼숭배와 더불어 불교에 조화롭게 습합된 축제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가장 보편적인 축제로는 우안거 때 행해지는 물축제가 있다. 우안거축제(Boun Ok Vassa)와 물축제(Boun Lay Heua Pay)가 우안거 3개월 중 마지막 달인 양력 10월의 보름날(음력 9월 15일 혹은 8월 15일)에 행해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보름날에는 스님들에게 공양과 더불어 새로운 승복을 제공한다. 저녁에는 연꽃 형상의 공양물과 촛불, 꽃들과 쌀을 실은 뗏목을 강에 띄워 보내서 우안거 기간 동안 쌓였던 악이 제거되기를 기원한다. 이 축제는 농민들에게는 농사를 시작하는 의식이 되며 수상생활을 하는 주민들에게는 건기 동안 강에서 살고 있다는 용(龍)을 달래는 의식이다.‘위대한 탓의 축제(Boun Maha That)’는 11월의 보름날 거행된다. 여기서 탓(That)은 부처님의 사리를 의미한다. 축제는 도시의 수호신이 있다고 믿는 사원인 왓시무앙(Wat Si Muang)에서 보름날 전날 시작된다. 사람들은 달밤에 바나나 잎으로 싼 촛불을 들고 거리를 행진한다. 다음 날 아침 라오스 각지에서 모인 스님들에게 보시하고 저녁때는 불꽃놀이를 즐긴다.
이 글은 불교평론 69호에 실린 송위지 교수의 글 ‘라오스 불교의 역사와 현황’에서 많은 부분을 옮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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