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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diers' Stories: Leroy Fritz
내 개인적인 가족의 역사가 1863년 남북전쟁 빅스버그
전투에서 싸운 조지 프리츠가 내 조상이고, 어쩌면 나의
2차대전 참전도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웨스턴 켄터키 주립대학에 다니던 1942년 미 육군
예비군에 편입했고 현역으로 들어간 것은 1943년 4월이다.
내 형 리로이드와 함께 스코트 필드에 보고했다. 앨러바마
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육체적 정신적 검사를 통과했다.
그 다음 빌록시로 갔다가 MS 프로그램으로 난 아칸서스
대학으로 가서 비행에 관한 걸 배웠다.
그런데 다시 육군의 소환을 받고 아칸서스에 있던 제16기갑사단
으로 들어갔다. 들어가 보니 공군에서 끌려온 사람들이 많았다.
난 공수부대를 자원해 훈련을 기다렸는데, 그 당시 선임하사가
정말로 싫었다. 매일 나에게 보초를 서게 했고, 난 참전하겠으니
빨리 해외로 보내달라고 요청서를 올렸고, 10월 20일 드디어 유럽
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고 16일 만에 영국 리버풀에 도착했다.
난 D-Day 조금 뒤에 오마하 비치에 상륙했고 높은 고지에
더플백을 들고 올랐다. 하얀 십자가들이 보였다. 오마하
비치는 미군들의 공동묘지였다.
비가 오는 가운데 식사를 하고 1차대전 때 쓰던 열차 박스카에
올랐다. 우린 나폴레옹의 성이 있는 퐁텐블로(Fountainbleau)의
보충대로 갔다. 거기서 난 친구 얼 깁스와 헤어졌고 난 745탱크
대대로 배속됐다. 내가 알고 있는 건 탱크는 소총과 대포의 중간
이라는 것 정도.
동료 레로이는 좋은데 떨어졌다고 끝도 없이 떠들었고, 나 역시
나은 편이라고 생각했다. 대대로 갔더니 81밀리 박격포를 아냐고
그들이 물었다. 그래서 난 기초군사훈련에서 배웠다고 했다. 그러
자 날 박격포소대로 보냈다.
이 81밀리 박격포에 대해서는 조금 말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강철 포열은 약 1.2미터 길이고 직경은 81밀리미터다. 3인치 1/4
정도 된다. 보병 중화기중대에서도 세 명이 운영한다. 포열, 포판,
삼각대를 셋이 들고 다닌다.
우린 그 박격포를 9톤의 하프트럭 뒤에 장착했고 다른 하프트럭이
포탄을 적재하고 따라다녔다. 이 박격포는 매우 정밀해서 보병에게
는 아주 좋은 지원화기였다. 박격포는 보통 40도에서 90도까지 세웠
고, 포탄을 포구에 투하하면 공이가 포탄 뇌관을 터트려 발사된다.
어느 청명한 날,
우린 둥그런 고지에 포격을 위해 올라갔고,
다시 목표지역으로 내려왔다.
탱크대대는 본부중대, 그리고 A-B-C 중형탱크중대가 있고 D중대
는 경탱크 중대다. 본부중대는 돌격포 소대가 있고 그건 셔먼 탱크
에 105밀리 자주포를 장착한 버전이다. 그리고 정찰소대, 본부소대,
하프 트럭 4대로 구성된 박격포 소대가 있다. 3대는 박격포 트랙이
고 나머지 한 대는 탄약 트럭으로 트레일러를 끌고 다닌다.
우린 고폭탄도 쏘고 백린탄도 쏘고 가끔은 보병을 위한 연막탄으로
차장을 쏴주기도 했다. 내가 있던 745탱크대대는 미 육군에서 매우
훌륭한 부대 중 하나인 보병 1사단(Big Red One)과 같이 다녔다.
추수감사절 날, 우린 대대 지휘소에서 칠면조 요리를 먹고 다시 차량
에 올라 전선으로 나갔다. 앞으로 가는데 우리 중형 탱크 네 대가 박살
난 게 보였고, 독일군 탱크 하나도 불타고 있었다. 우리는 독일 영내
후트겐 숲(Hurtgen)에 정지에 포병 거점을 형성했다.
거기서 3일째 되는 날 매우 흥미로운 교전이 있었다. 진짜 전쟁에 관한
첫 번째 느낌이라고 할 수 있었다. 독일군이 개활지를 통해서 공격할
준비를 했고, 포병 관측병이 무전으로 곧바로 포격 준비를 하라고 알려
왔다. 독일군이 그 개활지 중간에 이르렀을 때 관측장교가 사격 명령을
내렸고 우리는 맹렬하게 박격포를 거기에 대고 쐈다. 독일군은 거의
전멸 당했다. 처음으로 죽음에 대한 걸 체감했다. 매우 섬뜩했다.
그 다음주 동안, 우린 밤에 독일군의 무거운 기갑이 이동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공격할 것 같았지만 그 어떤 정보도 없었다. 결국 1사단
과 배속부대는 12월 8일 뒤로 빠져 벨기에 우펜의 거대한 벽돌집 호텔
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건 정말 행운이었다. (그때 1사단을 대신해 들어
간 것은 88연대와 106연대였다.) 그러던 3일 차, 난 게시판에 내 경계
근무를 확인하려고 섰다.
그런데 거기 깁스의 이름이 있었다. 물어봤지만 아무도 깁스를 몰랐다.
난 소대장 레디츠 중위에게 찾아가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아마
도 앞으로 올 신병 중에 한 명일 거야.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그래서 난 트럭에 내리는 병력들에게 깁스를 아냐고 물었다. 소대장이
신병을 한 명 데려올 것이라고 하기에 얼 깁스가 있다면 꼭 데려오라고
했다. 결국 소대장은 얼 깁스를 데려왔고 난 친구와 그때부터 같이 다니
기 시작했다.
짧았던 휴식은 독일군의 아르덴느 공세, 다시 말해 벌지 전투로 인해서
끝나고 말았다. 12월 15일 그것이 터졌고, 우린 다시 전선으로 돌아갔다.
탱크와 하프트럭 등등 모든 병기들이 이동을 시작했다. 우린 벌지전투의
틈새에 끼워져 버렸고, 독일군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날 밤, 미군 복장을 하고 있는 독일군을 경계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어느 날 밤에 서는데 한 보초가 다가와 소리쳤다. “우린 항복한다!” 문득
나는 내 호주머니에 들어 있던 25구경 자동권총으로 쏠 뻔했다. 장난이
심했다.
벌지전투 첫째 날은 참 불가사의했다. 구름이 잔뜩 끼었고 공중재보급은
없었고 루머들이 난무했다. 어느날 밤, 우린 지프차에 탄 미군 군복을 입은
독일군 한 명을 쏴 죽였다. 우리가 머물던 집에 들어오려고 하다 우리에게
맞았다. 어두웠기에 우린 집에 그냥 있었고, 아침이 나가보니 지프차가 도랑
에 빠져 있었다. 그게 직접적으로 우릴 쏘려고 한 마지막 경우였다.
벌지 전투를 통해서, 미군은 전투 역사상 정말 많은 전상자가 났다. 벌지
전투 동안의 눈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내렸다. 눈으로 인해 탱크나 하프트럭
의 자국은 정확히 남았다. 어느 날은 하프트럭이 시동은 걸렸는데 꼼짝도
하지 않았다. 땅과 함께 트랙이 얼어 굳은 것이다. 도끼로 그걸 마구 때려서
결국 움직였다. 눈은 30인치(76.2cm)나 내렸고 더 깊은 곳도 있어 부상당해
쓰러지면 보이지가 않았다. 지뢰를 찾는 건 더욱 불가능해져서 많은 차량을
잃었다.
많은 병사들이 참호족과 동상에 걸렸다. 야전에서 살고 노천에서 많이 잤기
때문에 우린 동상에 많이 걸렸다. 첫주가 지나서야 하늘이 맑아졌고 B-17과
리버레이터가 하늘에 나타나자 너무 기뻐했다. 폭격기는 하얀 도화지 위의
후추가루처럼 보였다. 독일군 쪽에서 쏘는 대공포들이 악-악 하면서 폭격기
주변에 터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대공포에 맞아 나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것
도 있었고, 그럴 때마다 우린 승무원들이 낙하산을 타고 탈출하기를 빌었다.
1월 동안, 참 많은 벨기에 마을을 지났고 강한 눈보라와 함께 눈이 또 내렸다.
대지는 눈이 없는 곳이 없었다. 벌지 전투 동안 우린 우리를 겨냥하거나 영국
으로 날아가는 로봇 폭탄에 대해서 많이 들었다. 그건 밤에 빨간 제트 섬광으
로 반짝이며 날아왔다. 우린 그 로켓을 ‘울부짖는 미미’라고 불렀다. 밤에는
참호에서 절대 나오지 않았고 점차 참호를 깊게 팠다.
고지대의 좁은 길로 돌파하려는 우리 미군 탱크는 번번이 적에게 막혔고,
어떤 도로는 하프트랙 정도만 지나갈 수 있었다. 그때 우리 지휘관 하프
트랙이 눈 밑에 있던 지뢰를 밟았고, 2번 트랙은 진창으로 곤두박질쳤으며,
3번은 더 멀리 밀려났고 4번도 옴짝달싹 못했다. 결국 나무에 케이블을
걸어 윈치로 끌어냈다.
2월 1-5일 우린 육군 부대 중에서 가장 조명을 받았다. 우린 12월 이후 쉬어
본 적이 없었다. 결국 우린 벨기에의 한 마을에서 휴식을 명령 받았다. 그 마
을의 각 가정에 홈스테이처럼 들어가 쉬었다. 우리 소대는 Leone Uban 부부
의 집에 들어갔다. 40대 초반으로 고모가 한 명 있었고 2-15세의 아이들 여섯
명이 있었다. 남녀 각각 3명.
이 5일의 휴식 동안 우린 추위와 감기로 인해서 대부분 많이 아팠다. 부인은
우릴 보살펴주었고 사랑과 좋은 음식을 주었다. 난 독일에서 얻은 바이올린
이 있어 매일 밤 연주했고, 그 고모는 피아노를 같이 연주했다. 우린 각자의
언어로 같이 노래했다. 전쟁을 떠나 정말 놀랍고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었고
정말 진심으로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했다. 정말 평화로웠다. 우린 정말 친해
졌다.
2월 5-6일, 우린 다시 장비와 닦고 트럭에 탄약을 받아 독일로 향했고, 많은
도시를 지나쳤다. 우린 보병을 뒤따르며 근접 포격지원을 했다. 뤼르 강에
도착하자 우린 정지했고 강 건너편에는 독일군이 참호를 파고 있었다. 자욱
하게 안개가 끼었다.
그곳은 참 경치가 좋았고 거기서 사진을 많이 찍었다. 이제 우린 본(Bonn)을
공격할 거라 들었다. 3월 8일 경에 본에 입성했고 보병이 선도했다. 우린 하프
트랙의 50기관총과 30기관총을 쏘고 부무장인 화기도 사용했다. 마을은 국민
방위군이 지키고 있었다. 많은 포로를 잡았고 그들 중 다친 사람들에게는 정말
미안했다. 40대에서 70대 노인까지 있었다.
본(Bonn)에서 재미있는 일이 하나 있었다. 우린 숨어 있는 독일군이 없나 색출
작업을 했다. 얼 깁스가 골목을 돌아서는데 독일 장군이 갑자기 나타났다. 장군
은 깨끗한 복장에 훈장도 달고 있었다. 얼은 장군에게 소총을 겨누고 본부로 데
려갔다. 결국 그의 정체가 밝혀졌다. 우체부였다. 정말 우스워 눈물까지 흘렸다.
본을 점령한 뒤로, 우린 한 내 고위관리의 아름답고 거대한 저택에 들어갔다.
거기 차고와 주차장에는 튜닝이 된 대형 메르세데스-벤츠 세 대가 있었다. 지
금 생각해도 얼마나 갖고 싶었던 자동차였는지! 저택을 정찰하다가 우린 거의
지하 3층 규모의 대형 포도주 창고를 발견했다. 우린 5갤런 물통을 가져다가
포도주통에 붓고 물통에 그 좋은 포도주를 부어 대대본부로 2톤 정도 가져왔다.
그러나 군사정부(미군 민사팀)가 들어오자 우린 저택에서 나와 계속 독일을
이동했다. 이때 레마겐은 조금 설명을 해야 할 것 같다. 레마겐의 철교는 라인
강에 걸려 있는 것으로 우리가 점령했다. 그리고 우린 도하할 곳을 찾기 시작
했다.
당시 레마겐의 시장은 이 다리를 전후에 복구해서 다시 사용하게 된다. 당시
독일군은 미군이 이 교량을 점령하기 전에 폭파하려고 했었다. 독일군은 직강
하 폭격기를 보냈고 미군은 엄청난 서치라이트를 상공에 밤새 비추며 직강하
폭격기를 격추시키려고 노력했다. 직강하폭격기는 다리에 피해를 주었으나
미군은 가교를 가져와 부서진 부분을 연결했다.
우리 소대는 첫날 아침 도하를 완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거기에 우리가 도착
하자 일대는 칠흑이었고, 포탄이 날아왔으며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정말로 알 수
없었다. 이때 우리 트랙 조종수가 갑자기 운전 컨트롤을 잃어버렸고 하프트랙은
제방 쪽으로 내려가면서 세 바퀴 정도 돌았다. 9톤이나 되는 탄약 트랙이 굴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우린 손전등으로 동료들을 찾았다. 그때 시카고에서
온 내 좋은 친구 프레디 차페타가 죽었다는 걸 알았다. 난 머리에 자상을 입었고
나머지는 무사했다.
우린 다른 차량에 짐을 싣고 대대 의무대로 가 내 상처를 치료했다. 2-3일 뒤에
소대와 합류했다. 그 부상으로 난 퍼플 하트를 받았고, 입술이 깊게 베이고 후두
부에도 큰 자상이 생겼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 어머니가 준 손목시계도 그때 사
라졌고 그날 이후 내 아랫 입술은 두툼한 상처가 남았다.
레마겐의 철교에 도착했을 때는 교전이 매우 격렬했고 하룻밤에만 포탄 800발
이 떨어졌다. 우리 미군은 레마겐 귀퉁이로 돌파를 시도해 결국 라인강을 건넜
고 매일 몇 마일 정도씩 진군했다. 우린 베를린을 향해 직선으로 가고 있었다.
할레라는 큰 마을에 도착했을 때 난 시청 위를 기어올라 거대한 나치 만자장기
를 떼어 기념품으로 가졌다.
이 시기에 내가 만난 독일군은 나치의 엘리트 병사들이 아니었다. 대부분이
어린 소년이거나 노인이었다. 포로는 수백 명에서 수천 명으로 늘었다. 그들
은 이미 전쟁에 졌다는 걸 알고 있었고 차라리 포로가 되는 게 안전하다고 생
각하는 것 같았다. 한 고지에서 적이 세 그룹으로 나눠 백기를 들고 내려왔고
우린 톰슨 기관단총과 권총으로 그들을 접수했다. 그런데 몸수색을 하던 중
한 명이 해골이 달린 은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 반지는 나의 기념품이 된다.
어느 날 하루의 휴식이 주어지자, 난 B중대의 내 친구 아트 그리셀을 만나러
갔다. 그리셀은 탱크 위에 앉아서 기관총을 닦고 있었고 난 포탑에 기어올라
대화를 나눴다. 그리셀이 나에게 물었다. “넌 뭐 찾은 거 없냐?”
그래서 난 호주머니에서 25구경 권총을 꺼냈다. 그건 정말 작았고
난 “그리셀, 조심해야 돼. 실탄이 장전되어 있어. 자물쇠만 안전으로
해놓은 거야.”하고 말했다.
그때
아트 그리셀은 자신도 모르게 스위치로
안전을 풀었다는 걸 몰랐고,
이어 커다랗게 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내 왼쪽 눈이 갑자기 하나도 안 보였다.
물론 난 맞았다고 생각했다. 그리셀은 내가 맞았나 나를 살폈다.
난 “눈이 안 보여!”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리셀은 “피는 하나도 안
보인다”라고 했다. 그래서 손을 머리로 가져가는데 갑자기 두통이
몰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아침 여명이 트듯이 시력이 돌아왔다.
작렬화약(powder burn)이 날아온 것이다. 총알은 1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내 머리를 지나갔고 화약 작렬로 잠시 눈이 멀었던 것.
독일 남부의 하르츠 산맥은 평시에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지만, 전투로는
돌파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어느 날 우린 경계상태만 유지하고 사격은 안
하고 있었는데, 그때 신병이 들어왔는데, 놀랍게도 내 친한 친구인 오하이
오 우체국장 출신 진 모리스가 들어왔다. 그때 난 계곡 밑에서 우리 하프
트럭을 향해 발포하는 독일군 탱크를 발견했다. 모리스가 놀라 물었다.
"지금 어떻게 해야 돼?"
"닥치고 피해!"
난 하프트럭 밑으로 다이빙했다.
모리스는 잘못 들어가서 결국 온통 진흙을 뒤집어썼다.
[웃음] 참 그때 우스운 일도 많았다.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패튼에게 베를린을 향해 곧장 진격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우린 길을 넘어 달렸다. 우리 1군은 독일 남쪽 바바리아 지방을
향해 진격했는데, 정말 태어나서 그렇게 아름다운 곳은 처음이었다. 그
때 거기서 친구 마지도 다시 합류했다. 우린 체코슬로바키아까지 진격
해서 독일 전력을 반으로 갈랐다. 독일의 전운은 그걸로 끝이 난다.
3월 초 V-E Day가 발표되자 우린 도로를 막고 항복을 위해 도착하는
차량과 병사들을 검문하느라 바빴다. 자동차 버스 트럭 등에 독일군이
가득 차 들어왔다. 그들의 의도는 간단했다. 러시아군에게 포로가 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영어를 좀 하는 한 독일 병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봐, 미군병사들!
러시아군을 두들겨 패주는 걸 도와주지. 이제 그럴 수 있어."
우린 웃었다.
독일이 항복하자 이제 태평양 전선으로 가 일본 본토 침공에 참가할
거란 말을 들었다. 우린 편안하게 쉬면서도 또 이동할 거라 생각했다.
우린 시설이 좋은 독일군 부대 막사로 들어갔다. 첫 번째 독일군 제트
기를 봤을 때 정말 무서웠는데 이제 공포도 끝이었다.
원자폭탄이 일본의 무릎을 꿇게 한 뒤에, 우린 집에 갈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전쟁이 끝난다는 건 참 이상한 느낌이었다. 우리 745탱크대대
는 밤부르크에서 해체되고 우린 70탱크대대로 들어갔다. 이제 우리 차량
들은 주기장에 나란히 세워졌고, 우린 그걸 승리의 무덤이라고 불렀다.
그때 래디츠 중위가 나와 몇 명에게 동성훈장을 상신했다는 걸 알았다.
내가 뭘 어떻게 했다 이런 말을 하기 싫었다. 전쟁의 끝에, 보병1사단은
우리 745탱크대대에게 1사단 마크를 붙이도록 허가했고, 우린 오른쪽
어깨에 Big Red One 마크를 붙이고 기갑 마크는 왼쪽에 붙였다.
누렌베르그 공장에 도착하니 그들의 모토가 적혀 있었다:
Our tracks lead to victory!
병사의 귀국은 근무 기간, 해외참전 기간 등의 점수를 고려해 순서대로
귀국해야 했다. 귀국을 기다리는 동안 난 70탱크대대 보급하사관으로
계속 근무했다. 마침내, 내 귀국 서열이 다가왔고, 난 내 친구 얼 깁스와
이별해야 했다. 난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배를 탔고, 가는 내내 바다에는
폭풍이 불었다. 일부 배멀미가 심한 사람들은 유럽으로 다시 돌려보내
달라고 했을 정도였고, 17일이 지나 1945년 12월 말일 뉴욕 항에 도착
했다. 우리가 도착하자 서치라이트를 비추고 사이렌을 울리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 장면을 보려고 병사들이 뱃전에 몰려 배가 전복될 뻔했다. 자유의
여신상을 보고 한 GI가 말했다. "Lady, if you wanna see me again,
your gonna have to turn around!"
군대는 참으로 이때 빠르게 돌아갔다. 우린 뉴욕 캠프에 내려
그해 신년 정찬을 먹었고 그 다음 모두 부대를 무단이탈했다.
이후 시카고의 캠프 그랜트로 갔고 거기에서 마지막 월급과 여비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 벨레부의 광장에 도착한 건 1946년 1월 7일. 그
때 택시 사무실에 갔는데 운전사가 “몇 명 탈거요? 난 차가 꽉 차야 출발
합니다.”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나도 대답했다. "Buddy, 난 당신을 위해 전쟁터에서 싸웠고 지금 돌아왔다.
나를 태우지 않으면, 이 차를 빼앗아 내가 몰고 갈 거야." [웃음]
그가 택시에서 뛰어나오더니 나에게 사과했다.
“난 당신이 스코트 공군기지에서 밤 동안 빈둥거리던 병사로 착각했어.”
그는 내 집까지 태워주었다. 내가 현관 벨을 누르자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오셨고, 어머니는 “내 아들 레로이야!”라고 비명을 지르셨고, 아버지
는 웅크리고 우셨다. 내가 보낸 사진을 보고 아버지는 내가 손을 잃었
다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이게 나의 2차대전의 경험이다. 전쟁 후에 나는 유럽으로 가 Uban 가족
을 여러 번 방문했고, 1974년 처음 어머니와 같이 방문했을 때는 참 뜻
깊었다. 동료들과 같이 차를 타고 그 집 앞에 도착했는데 어머니가 먼저
내려 그 부인과 포옹했고, 나도 내려 서로를 포옹하며 같이 기쁘게 울었
다. 몇 년이 회귀한 느낌이었다.
그날 밤, 나와 동료들은 1945년처럼 그 집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마지가
나에게 와서 뺨에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리(Lee), 넌 언제나 사람들이
정말 아름답다고 했어. 난 믿지 않았지, 바로 지금까지. 네가 옳았다."
난 기억을 떠올리고 수정하고 추가하고를 반복하면서 이 글을 썼다.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이 글을 읽어준 분들에게 감사한다. 관심이
있었다면, 난 그것에 기쁘다.
첫댓글 윽 여단장님 오타. 1861-1865 미남북전쟁
하하하 월남전과 남북전쟁이 공존할 뻔했군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전리품을 너무 밝히면 안 좋다는 말을 자주 들었던 것 같습니다.
서경석 장군의 저서에도 보면 노획한 달러, 월남화폐를 그냥 막 섞어 되는대로 한 줌씩 집어 공 순서대로 나눠줬다고 하더군요. 군인의 본분은 전투에서 적을 죽이는 건데 엉뚱한 것에 한 눈 팔다간 죽기 쉽상이라는 의미일 겁니다. 제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도 부족할 판인데...
전리품획득을 이용해 전쟁이 이긴 경우도 들었는데 어느 전투인지 기억이 안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