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이름 찾아 떠나는 여행 22>
만두(饅頭)
“만두집에 만두 사러 갔더니만/ 하회 아비 내 손목을 쥐더이다. ··· ” 고려가요 <쌍화점>의 한 구절입니다. 쌍화(雙花)란 만두를 말하며, 얇은 밀가루 반죽에 소를 넣어 빚은 모양이 한 송이 꽃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고려 충렬왕 때 향악곡 ‘쌍화점(雙花店)’에 언급되었지만 정확히 어떤 음식인지는 확인되지는 않았습니다. 음식 칼럼니스트 박정배씨는 중국 문헌을 뒤져 이를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서 만든 만두의 일종’으로 추정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에서 만두(만터우)는 발효시켜 만든 반죽에 속을 넣거나 넣지 않은 채 쪄낸 찐빵을 닮은 음식을 말합니다. 요즘 흔히 ‘만두’로 불리는 음식 즉 다진 고기와 채소로 소를 넣어 만든 만두는 원래 교자(餃子 · 자오쯔)라고 불렀습니다. 자오쯔는 청나라 황제의 수라상에 반드시 올리는 음식이었습니다, 중국의 각 성(省)에서 올린 특산물로 혼합 만두소를 만들어 천하통일을 상징했기 때문입니다. 서민들은 새해 금전 운을 기원하며 즐겨 먹었는데, 자오쯔의 반달 모양이 청나라 때 은화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섣달 그믐날 밤이면 중국인들은 고향집에 모여 앉아 만두를 빚습니다. 그러다가 묵은해와 새해가 교차하는 자정이 되면 가족의 화목과 복을 기원하며 만두를 먹기 시작합니다. 만두의 종류 중 하나인 교자(餃子)를 뜻하는 ‘자오쯔’가 ‘자시가 되다’(交在子時)는 말과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새해의 첫 식사가 만두인 셈입니다. 이외에도 중요한 명절에 중국인들은 자주 만두를 먹습니다. 쫄깃한 만두피 속에 가득 찬 고기와 채소를 씹는 맛이 일품입니다.
우리나라에 만두가 처음 전해진 고려시대에는 채소나 팥 같은 소를 넣어 찐빵에 가까웠습니다. 1643년에 발행된 <영접도감의궤>에는 중국 사신에게 특별히 만두를 대접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순록>에 따르면 전복만두를 좋아하는 인조를 위해 생신날 왕자와 비가 직접 만두를 빚어 올렸다고 합니다. 주로 정초에 먹는 명절음식이었던 만두는 복(福)을 싸 먹는다는 의미와 명절에 한꺼번에 찾아오는 손님들을 손쉽게 치르기 위해서였습니다. 경사스러운 잔치에는 특히 고기만두를 많이 먹었습니다.
고기만두 하면 중국 4대 기서 ‘수호전’에 나오는 손이랑(孫二娘)이라는 여자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별호가 모야차(母夜叉)인 그녀는 양산박 108두령 명단에 이름을 올린 세 여성 중 하나로, 특기할 점은 사람의 고기로 만든 인육만두(人肉饅頭)의 제조자라는 것입니다. 네 갈래 길 오르막에 주막을 차려 놓고 남편 장청(張靑)과 함께 사람 고기를 잘게 썰어 만두로 만들거나, 쇠고기로 위장해 장에 내다 팔았던 소설 속 인물입니다. 호랑이도 때려잡은 장사 무송(武松)을 혼미케 한 뒤 만두소로 만들려 했습니다. 이를 소재로 삼았던 홍콩영화 ‘신용문객잔(新龍門客棧)’의 장면들도 떠오릅니다.
만두가 처음 우리나라에 전해졌을 당시, 만두를 훔쳐 먹은 사람을 처벌했다는 ‘고려사’의 기록으로 보아 아주 귀한 음식이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큰 잔치를 마무리하는 음식으로 쓰일 경우 호두알만한 작은 만두를 큰 만두 속에 가득 집어넣어 대만두를 만들었고, 이 대만두의 껍질을 가르고 작은 만두를 하나씩 꺼내 먹었습니다. ‘떡 먹자는 송편이요 소 먹자는 만두’라는 옛 속담처럼 만두는 껍질이 얇고 소가 충실해야 맛있습니다. 소는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꿩고기뿐만 아니라 새우, 숭어 등을 쓰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평양과 개성에서 발달했으며, 북쪽에 비해 남쪽의 만두는 크기가 작고 만두피를 오므릴 때 모양을 내는 것이 특징입니다. 특히 추운 북부 지방에서는 꿩고기로 육수를 내서 설날이나 귀한 손님이 오신 날 만둣국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꿩이 귀하다 보니 닭고기로 육수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어 ‘꿩 대신 닭’이라는 속담까지 생겼습니다. 만두에 대해 가장 자세하게 소개한 기록은 조선시대 이익의 ‘성호사설’이라는 책입니다.
고려시대의 음식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만두의 이름은 ‘쌍화(雙花)’ 또는 ‘상화(霜花)’라 하였습니다. 박정배 씨는 “고려시대 이후 한글은 ‘솽화’를 거쳐 ‘상화’로 통일된 반면 한자 표기는 ‘쌍하(雙下)’ ‘쌍화(雙花)’ ‘상화(霜花)’ ‘상화(床花)’ 등 다양했다. 금나라 음식을 음차(音借)했기 때문에 한자 표기가 여러 가지인 것”이라 했습니다. 박씨는 “이후 여러 문헌에서 만두의 일종을 가리키는 말로 나온 ‘상화’가 1670년경 쓰인 최고(最古) 한글 요리책 ‘음식디미방’에 상화병(霜花餠)으로 나온 것으로 봤습니다.
중국 삼국시대 때 제갈량이 칠종칠금(七縱七擒)의 고사로 유명한 남만의 맹획으로부터 완전한 항복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양쯔강의 한 지류인 운남성의 노수에서 풍랑을 만났는데, 선원이 “사람의 머리 49개를 베어 제사를 지내야 강물의 신을 달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갈량은 무고한 생명을 죽일 수 없어 양고기, 돼지고기, 염소고기로 속을 채우고 밀가루 반죽으로 사람 머리 모양을 빚어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 같은 설화에 따라 ‘만이족의 머리’를 대신했다 해서 만두(蠻頭)라고 했다가 한자가 饅頭로 변했다는 유래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귀신의 눈을 속였다고 해서 속인다는 뜻의 ‘瞞(만)’자를 썼다고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