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오신 날은 가까운 절에 가서 합장하고 소원 빌고 등을 하나 달고 왔다. 어릴 적 어머니와 손을 잡고 다니던 절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내가 고집이 있어서 시집가서 잘 살 수가 있을까 걱정하셨다. 스님이 다행히 이 처자는 어려울 때마다 귀인이 도울 상이라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며 한시름 놓으셨다고 했다. 나는 궁금해서 어머니께 그럼 귀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어야 도움을 받을 거 아니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웃으시며 네 귀인은 네가 단박에 알아볼 텐데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살면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무슨 동화책에 나오는, 열어볼 수 있는 빨강 주머니 파랑 주머니 하나를 가진 것처럼 위안이 되었다.
때로 내게 도움을 주는 분을 만났을 때 어쩌면 그분의 이마를 문지르면 '동쪽 귀인' 이렇게 쓰여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했다. 귀인은 깃발을 들고 서 있다가 우물쭈물 결정을 내리지 못할 때 방향을 가르쳐주고 위험한 일에 가지 못하도록 잡아주기도 하는 분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귀인은 언제나 인자하고 좋은 일로 나를 이끌어준다고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도움의 손길이나 좋은 말씀이 들리면 귀를 쫑긋 열고 따라 해 보려고 애썼다. 때로는 아주 팔랑귀처럼 되어 귓바퀴가 토끼 귀속처럼 말갛게 비치는 게 아닌가 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도 세월이 달라져 컴퓨터가 들어온 이후에는 마우스를 클릭하며 앉아서 가르치는 일이 많아질 무렵이었다. 교감 선생님은 교실에서 선생님들이 책상 사이를 돌며 아이들을 지도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계신 분이었다.
어느 날 회의 시간에 본인의 신념을 말씀하며 앉아서 수업하는 분이 있으면 교실로 들어오셔서 바로잡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후로 선생님들은 컴퓨터를 사용하는 수업 중에도 어정쩡하게 종일 서서 수업했다. 어머니의 말씀처럼 나는 때로 쓸데없이 간섭하는 것을 무척 싫어해서 그럴 때 청개구리처럼 고집을 피울 때가 있다. 필요하면 앉고 필요치 않으면 돌아다니며 가르치는 것이지 않고 서는 일에 간섭은 질색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일부러 꼼짝하지 않고 앉아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우리 교실로 들어오시면 한바탕 해 볼 것이다.'라고 하면서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내 심사를 알아채셨는지 한 달이 족히 지나도록 그분은 들어오지 않으셨다.
그 대신 한 달쯤 지나니 사달이 났다. 허리가 아프기 시작한 것이었다. 의사는 요사이 오래 앉아 있던 적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우물쭈물 둘러대었다. 너무 오래 앉아 있으면 장요근이 짧아져서 통증이 심해지니 자주 일어나걸으라고 했다. 예전에 스님이 해주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고집이 있지만 귀인이 도울 상이라고 하셨는데 나의 치기 어린 고집에 허리가 아파지고 나니 내 고집이 불러온 일이 드러났다. 다시 생각해 보니 이걸 깨닫게 하신 그분이 바로 귀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어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전세를 얻어 살 때 집주인이 자꾸 전세를 올려달라고 해서 힘이 들었던 적이 있다. 그냥 편히 살라고 해서 같은 가격으로 지내던 지인이 부러웠다. 지인은 정작 전세 기간이 마무리되고 집을 마련하려고 했더니 집값을 따라잡지 못해 다시 전세를 전전하는 일이 있었다. 전세를 올린 주인이 그 당시에는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었지만 막상 세월이 지나고 보니 오히려 큰 도움이 되었다. 어쩌면 귀인은 당장 눈앞에서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좀 더 흐른 뒤에야 알게 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고집불통 성격으로 그나마 학교에 다녀서 다행이지 일반 회사 같았으면 진즉에나와야 했을 것이라고 놀리는 짝을 흘겨보며 자신이 없어지기도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치솟는 혈기에 세상에 이런 법은 없다면서 푸르릉거리며 뛰쳐나갈 때 잡아주고 달래가며 다독이던 선배들이 있었다. 눈에 띄는 도움의 손길이 있었다. 문간방을 전전하며 갈 곳을 찾고 있을 때 이사 갈 곳을 알아봐 주는 선배, 아침밥을 같이 먹자며 하숙생처럼 챙겨주시던 주인아주머니, 셀 수 없는 도움을 받으며 직장을 다녔다.
이런 수많은 귀인 덕에 네발로 엉금엉금 기다가 겨우 두 발로 서있는 내가 있었다. 생각이 좁고 미련하여 시간이 흘러서야 겨우 깨닫는 성정에 제대로 고마움도전하지 못하고 헤어진 분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어머니 옆에서 갸우뚱하며 바라보든 소녀를 내려다보던 스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세상 도움 중에, 눈에 띄는 도움보다 더 큰 도움이 있다면 아마도 공기처럼 나를 둘러싸고 있는 천지의 도움이 얼마나 더 큰 것이었을까. 부처님 오신 날 받아든 종이 연꽃을 살며시 유리병에 꽂아 본다. 촘촘히 접은 사이사이로 바람결에 향이 배어 올라온다. 스님의 미소와 어머니의 웃음이 풍경 소리처럼 싱그럽게 나를 둘러싼다. 소리에 문득 생각이 울린다.
어쩌면 혹 귀인은 내가 아닌가.
강희정 2025 <인간과 문학> 수필 등단. 수필집 「숲속 도서관 고양이」. 아침문학회 회원. 인간과 문학회 회원love0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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