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 제주 올레 20코스가 드디어 길을 열었다. 동부 해안을 따라 닮은 듯 다른 7개 마을을 지나가는 20코스는 제주에서도 '바람'이 많기로 소문난 이른바 '바람길'을 따라간다. 바다를 지나온 바람은 해안가에 핀 해당화와 수줍게 입 맞추는가 하면, 순식간에 돌변해 우거진 덤불을 사정없이 흔들어대기도 한다. 제주의 바람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변화무쌍함 그 자체이다. 그래서일까. 언제 어디서 불쑥 나타날지 모르지만 이곳에서는 늘 바람이 그립다. 바람을 따라 검은 현무암 너머로 에메랄드 빛 바다와 새하얀 풍력 발전기가 어우러지고, 돌담 사이로 동네 어르신들이 묵묵히 마늘을 수확하는 정경이 마치 한 편의 동화처럼 펼쳐진다.
제주 올레 20코스가 새로 개장했다.
20코스의 출발점, 김녕 서포구 어민복지회관
김녕 서포구 어민복지회관 앞에 있는 20코스 스탬프 간세 / 올레길 20코스 방문을 환영하는 현수막
제주 올레 20코스는 한적한 어촌 마을인 김녕 서포구 부근 어민복지회관에서 출발한다. 이곳은 19코스 종점이기도 하다. 이제 막 길을 연 새 코스답게 출발 지점 한구석에 제주시 구좌읍에서 내건 20코스 방문 환영 현수막이 눈에 띈다. 20코스가 지나가는 길목에는 구좌읍에 속한 마을들이 해안을 따라 옹기종기 모여 있다. 올레길을 걷는 동안 시작점에 있는 김녕리와 월정리, 행원리, 한동리, 평대리, 세화리, 마지막으로 제주해녀박물관이 있는 종점인 하도리까지 총 7개 마을을 만나게 된다.
요트가 떠 있는 김녕 앞바다
약간 구름 낀 하늘. 오히려 걷기에는 딱 좋은 날씨다. 마을 안길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길은 이내 해안으로 향한다. 가슴 시리도록 푸른 바다가 이제 막 20코스 초입에 들어선 올레꾼들을 반갑게 맞는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마음이 풍족하게 차오른다. 마을 안을 들락날락하며 해안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김녕 성세기해변이다. 눈부신 백사장을 품고 있는 김녕 성세기해변은 함덕 서우봉해변과 함께 동부 지역에서 첫손에 꼽히는 이름난 해수욕장이다. 새하얗고 고운 모래사장과 새까만 현무암의 절묘한 대비는 그 누구도 표현할 수 없는 자연이 그려낸 작품이다. 그뿐일까. 옥빛으로 빛나는 바다도 자꾸만 감탄사를 연발하게 만든다. 그 해변에서 잠시 혼자만의 평화로운 시간을 가져본다.
왜 '바람의 길'일까?
해안가에 무성하게 자라난 수풀 사이로 길이 나 있다. / 현무암 위를 걸어가는 기분이 색다르다.
길은 계속해서 해안가 바위와 수풀 속으로 올레꾼들을 인도한다. 바위틈 사이로 낮게 깔린 이름 모를 꽃들과 무성하게 자라난 수풀이 오랜 시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올레길이 아니었다면 결코 밟아보지 못했을 미지의 땅. 오로지 바람만이 쉼 없이 이 길을 내달렸을 터. 낯선 사람들의 발걸음에도 길은 자신의 속살까지 아낌없이 드러내 보여준다.
만조와 간조 시, 길은 두 갈래로 갈린다. / 거대한 풍력발전기를 지나가는 길
월정마을에 들어서면 이 길이 왜 '바람의 길'인지 절로 답을 찾게 된다.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웅웅거리는 소리를 좇아 눈을 돌려보니 멀지 않은 곳에 거대한 풍력발전기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김녕마을에서 멀리 바라다보이던 바로 그 풍력발전기들이다. 20코스가 지나가는 해안 도로변에는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을 비롯해 풍력 발전을 연구하는 시설들이 모여 있다. 여기서부터 행원마을에 이르기까지 '바람의 길'을 따라 풍력발전기들이 쉼 없이 돌아가는 풍광과 마주하게 된다.
저 멀리 바다가 보이는 밭 사이를 이리저리 돌다 보니 배가 살짝 출출해오기 시작한다. 시장이 반찬이라 했던가. 지천에 널린 산딸기며 인동초를 한 움큼 따 입 안에 털어 넣었더니 그 맛이 꿀맛이다. 올레길은 단순히 풍경만을 감상하라고 열린 길이 아닌가 보다. 동행한 한 올레꾼은 먹을 것이 귀했던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처음 보는 열매들을 한두 개씩 따와 먹어보라며 권한다. "어릴 땐 이런 것도 참 맛있게 잘 먹었는데…." 길은 누군가에게는 옛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시간의 터널이 되기도 한다. 시간의 터널을 지나 다시 현실로 돌아오니 어느새 월정해변에 닿아 있다.
아름다운 해변, 그리고 커피 한 잔
[왼쪽/오른쪽]사람들로 북적이는 월정해변 / 이국적인 정취가 가득한 해변 전경
월정해변은 요즘 동부 지역의 '핫 플레이스(hot place)'로 떠오르고 있는 곳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아는 사람들만 알음알음 찾아오던 한적한 해변에 불과 1년여 사이 카페, 베이커리, 게스트하우스 등이 들어서며 북적북적한 장소로 변모하고 있다. 무엇보다 아름답게 펼쳐진 해변은 이곳을 그냥 지나쳐가지 못하게 만든다. 목도 축일 겸 잠시 해변에 앉아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부려보는 건 어떨까. 해변 끝에 홈메이드 베이커리가 있으니 출출한 배를 채우기도 좋다. 주말이나 휴일이 아닌 평일에 찾는다면 한결 조용하고 차분한 해변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마늘을 수확하는 마을 사람들 / 해안도로를 따라가는 길은 자전거 여행 코스이기도 하다.
김녕리에서 행원리까지 약 7km. 행원포구는 올레 20코스의 중간 지점이다. 행원마을은 조선시대 제주로 유배를 왔던 광해군이 처음 도착한 곳이다. 옛 시절의 한 많은 사연을 품고 있지만 마을은 그저 고요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마을 밖 돌담을 따라 지나는 길에 한창 마늘을 수확하던 동네 어르신이 어디서 왔냐며 말을 건넨다. 그러고는 뭐라 뭐라 이르시는데 제주 사투리를 도통 알아들을 수 없어 괜스레 민망해진다. "제주 말로 '폭삭 속았수다'는 '고생 많이 하셨다'는 말이에요." 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거들어주는 소리에 "아!" 하며 모두들 고개를 끄덕인다. "제주에 왔으니 제주 말도 좀 배워가라고 하시는 거예요." 아주머니가 또다시 통역 아닌 통역을 해주신다. 워낙 바람이 거센 지역이라 제주 사투리는 얼핏 들으면 성난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오해는 마시라. 마음은 따뜻한 분들이니 말이다.
올레길이 가져온 시골마을의 변화
시골집을 예쁘게 꾸민 이정현씨 집. 올레꾼들의 쉼터로 조성 중이다.
행원에서 한동마을을 지나 평대리까지 가면 이제 올레 20코스도 막바지에 접어든다. 올레길은 작은 시골마을까지 크고 작은 변화를 몰고 왔다. 평대리 해안가에 접한 작은 상점은 요즘 지나가는 올레꾼들 덕분에 전에 없이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올레꾼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내주던 주인 할머니는 "사람들이 많이 와서 하나씩들 사주고 하니까 고맙지" 하며 함박웃음을 지으신다. 평대리에서 일명 '그림집'으로 통하는 피오피(POP) 디자이너 이정현 씨 집도 올레꾼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집 바로 아래 골목으로 올레길이 나 있거든요. 가끔씩 길을 물어오거나 집이 예쁘다며 구경 오시는 분들도 계세요. 여기까지 걸어오느라 목도 마르고 힘드실 텐데 올레꾼들이 좀 쉬어갈 수 있도록 마당 일부를 쉼터로 만들어보려구요." 마을 주민들의 열린 마음이 없다면 어쩌면 올레길도 그저 그런 길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해녀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제주해녀박물관
평대리를 지나면 구좌읍에서 가장 큰 오일장이 열리는 세화리이다. 5, 10일에 어김없이 오일장에 열리는데, 아침 8~9시부터 시작해 보통 오후 3~4시 정도면 장이 파하니 구경을 하려면 정말 부지런히 걸어야 한다. 장터에는 없는 게 없지만, 그 중에서도 바다를 바라보며 한 잔 쭉 들이켤 수 있는 막걸리가 최고다. 장이 서지 않는 날에는 종점인 제주해녀박물관을 관람하는 것도 괜찮다. 제주 해녀들의 역사와 삶, 문화, 생활상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문의 064-782-9898, www.haenyeo.go.kr
여행정보
* 올레 20코스
김녕어민복지회관에서 종점인 하도리 제주해녀박물관까지 총 16.5km 구간이다. 제법 긴 구간이지만 길이 비교적 평탄하고 포장된 곳이 많아 누구나 어렵지 않게 다닐 수 있다.
1.찾아가는길
* 자가운전
제주국제공항 → 용문로 → 월성사거리에서 우회전(시청, 종합경기장 방면) → 오라오거리에서 좌측 방향(시청, 종합경기장 방면) → 일주동로 → 북촌삼거리에서 우회전(성산, 김녕 방면) → 김녕 입구에서 좌회전 → 첫 번째 사거리에서 좌회전 → 김녕로1길 → 서포구 어민복지회관
* 대중교통
제주국제공항에서 100번 버스를 타고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하차. 동회선 일주노선을 타고 김녕리 남흘동 정류장 하차 후 바다 쪽으로 도보 5분.
2.맛집
템푸스 : 구좌읍 월정리 / 홈메이드 베이커리, 와플, 커피 / 064-783-4979
하이앤바이 : 구좌읍 월정리 / 레모네이드, 커피, 맥주 / 010-3111-4228
기쁨이네감자탕 : 구좌읍 세화리 / 콩나물국밥, 감자탕 / 064-783-4477
다시버시 : 구좌읍 세화리 / 고등어조림 / 064-783-5575
3.숙소
대명리조트 제주 : 조천읍 함덕리 / 1588-4888 / www.daemyungresort.com
씨월드펜션 : 구좌읍 월정리 / 064-784-7447 / www.seaworldpension.com
준하우스 : 구좌읍 평대리 / 064-783-2508 / www.junpension.com
글, 사진 : 정은주(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