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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지리교육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서태동
커리의 지구사
책소개
음식의 지구사로 읽는 커리의 모든 것. 인도에서 시작된 커리는 영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데 이어 미국과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카리브 해 지역, 모리셔스, 스리랑카, 피지, 그리고 아프리카에까지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커리가 전파된 경로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영국을 통해 유럽과 영어권 국가로 전파된 것. 또 하나는 인도인 디아스포라에 의한 전파다.
유럽과 영어권 식민지에 전해진 커리가 '희귀한 동양의 스튜'라는 고급 이미지로 인식된 것과 달리, 인도인 이주 노동자들의 소박한 '커리'는 일반 대중의 식탁에도 퍼져나갔고, 토착 문화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여러 나라의 국민 음식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커리는 가장 대표적인 혼성 문화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식민지 시기 일본을 통해 커리가 들어왔다. 인도 음식임에도 서양 음식점에서 판매하면서 양식으로 인식되었으며, '라이스카레' 혹은 '카레라이스'는 근대의 상징으로 모던보이와 모던걸에게 인기를 끌었다. 일제 시기 이후부터 현대에 이르는 한국 '카레'의 역사는 음식인문학자 주영하 교수의 특집글 '한국 '카레'는 일본 '카레'의 아류인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목차
초대의 글 커리가 걸어온 세계화의 길
0 커리란 무엇인가?
1 커리의 탄생
2 제국의 향수, 영국의 커리
3 식민지 커리의 발자취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4 인도인 디아스포라와 커리 카리브 해, 모리셔스, 스리랑카, 피지
5 커리의 맛에 빠져든 아프리카
6 동남아시아, 문화와 커리의 만남
7 커리의 다양한 변주와 진화
8 주목받는 커리의 미래
특집 한국 ‘카레’는 일본 ‘카레’의 아류인가?
다양한 커리 요리법
부록
감사의 말
본문의 주
참고문헌
이미지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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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커리는 어떻게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았을까?
- 음식의 지구사로 읽는 커리의 모든 것
한국인이 통상 ‘카레’라 부르는 ‘커리’는 인도 음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작 인도에서는 ‘커리’라 부르는 음식이 없다. 그렇다면 ‘커리’란 무엇일까?
한국에서 ‘카레’는 강황을 주재료로 하는 노란 향신료 가루를 감자, 당근 등의 채소와 고기를 볶아 끓인 물에 넣어 걸쭉하게 만든 요리를 말한다. 하지만 커리는 강황뿐 아니라 커리 잎, 커민, 코리앤더, 호로파, 고추, 후추 등 다양한 향신료로 구성된 커리 가루 또는 소스가 들어간 스튜나 국수, 볶음밥, 튀김 등의 모든 음식을 일컫는다. 즉, 커리는 단일한 형태를 갖춘 요리가 아니라 향신료가 들어간 커리 가루 또는 소스로 만든 모든 요리를 일컫는다. 이렇게 커리를 넓게 정의한다면 고추장과 마늘, 생강 등이 들어간 떡볶이도 커리라 할 수 있겠지만, 커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향신료를 쓰는가가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떡볶이를 커리라 부를 수는 없다.
‘커리’라는 단어의 유래는 식민지제국 영국에서 찾을 수 있다. 인도는 1600년부터 1947년까지 영국의 지배를 받았는데, 초기 영국령 인도에 머물던 동인도회사의 관리와 장교 들은 인도 음식을 즐겨먹었다. 남부 인도에서는 채소와 고기를 기름에 볶은 매콤한 요리를 카릴(karil) 혹은 카리(kari)라 불렀는데, 이것을 당시 영국인들은 ‘커리(curry)’라 불렀고, 여기서 ‘커리’가 유래했다.
인도에서 시작된 커리는 영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데 이어 미국과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카리브 해 지역, 모리셔스, 스리랑카, 피지, 그리고 아프리카에까지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커리가 전파된 경로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영국을 통해 유럽과 영어권 국가로 전파된 것으로, 영국 출신의 식민지 정착민들이 가져간 요리책을 통해 미국과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도 커리가 소개되었다. 또 하나는 인도인 디아스포라에 의한 전파다. 19세기 초 노예무역과 노예제도가 폐지되자 서인도 제도와 남아프리카, 말레이시아, 모리셔스, 스리랑카, 피지 등의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해방된 노예들을 대신해 인도인 계약 노동자들이 대거 이주했는데, 이 인도인 디아스포라들은 자신들의 음식 문화도 함께 가져왔다. 쥐꼬리만 한 월급과 약간의 식재료를 배급받은 이주 노동자들은 그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 야생에서 자라는 식물들을 이용해 향신료를 만들어 요리해 먹었다. 이주 노동자들의 커리 음식 문화는 토착 식재료와 식문화를 만나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진화되어 각 지역의 고유 음식으로 뿌리를 내렸다. 유럽과 영어권 식민지에 전해진 커리가 “희귀한 동양의 스튜”라는 고급 이미지로 인식된 것과 달리, 인도인 이주 노동자들의 소박한 ‘커리’는 일반 대중의 식탁에도 퍼져나갔고, 토착 문화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여러 나라의 국민 음식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커리는 가장 대표적인 혼성 문화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식민지 시기 일본을 통해 커리가 들어왔다. 인도 음식임에도 서양 음식점에서 판매하면서 양식으로 인식되었으며, ‘라이스카레’ 혹은 ‘카레라이스’는 근대의 상징으로 모던보이와 모던걸에게 인기를 끌었다. 일제 시기 이후부터 현대에 이르는 한국 ‘카레’의 역사는 음식인문학자 주영하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의 특집글 〈한국 ‘카레’는 일본 ‘카레’의 아류인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커리는 향신료를 넣은 고기, 생선 또는 채소로 만든 스튜로, 밥과 빵, 옥수수 가루를 비롯한 탄수화물 음식과 함께 먹는다. 향신료는 가루나 소스 형태로 만들어 쓰거나 이미 만들어놓은 것을 구입해 쓴다.” 이 정의대로라면 향신료가 들어간 모든 음식은 커리가 된다. 이렇게 넓은 의미로 커리를 정의할 경우, 고추장과 마늘, 생강 따위가 소스 형태로 들어간 한국의 떡볶이도 커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매운 떡볶이를 두고 커리라 부르지는 않는다.
커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향신료를 쓰느냐가 중요하다. 커리 잎과 강황, 그리고 후추는 커리를 커리답게 만드는 데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향신료다. 여기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럽과 아시아로 옮겨온 고추가 커리를 더욱 맵게 만들었다. 이런 의미에서 커리는 인도 음식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콜럼버스 교환’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콜럼버스 교환’이 유럽인이 주도한 신대륙과 구대륙의 교류로 이루어졌다면, ‘커리의 지구화’는 인도 아대륙과 영국이 교류한 결과라 할 수 있다. 18세기 이후 대영제국이 탄생하면서 인도의 커리는 영국을 비롯해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로까지 확산되었다. 노예무역 금지 이후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식민지 인도의 가난한 노동자들이 계약을 맺고 여러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 이주 노동자들에 의해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의 플랜테이션 농장에도 커리가 소개되었다.
― <초대의 글: 커리가 걸어온 세계화의 길>(7~8쪽) 중에서
커리, 영국인의 일상 깊숙이 뿌리 내리다
이 책의 주요 내용 1
18세기 말 동인도회사 관료들이 영국으로 돌아오면서 제국의 본국에도 본격적으로 ‘커리’가 소개되었다. 커리는 처음 빅토리아 여왕을 비롯해 귀족과 상류층 사람들이 즐기던 고급 음식이었지만, 인도 아대륙과의 교역이 활발해져 커리의 주원료인 향신료 수입이 늘어나면서 중산층도 즐길 수 있는 서민 음식이 되었다. 커리의 인기가 높아지자 상인들은 직접 향신료를 배합해 커리 가루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커리는 간편성과 더불어 먹다 남은 음식을 재활용할 수 있는 음식으로 인식되면서 노동 계급의 식탁에도 급속히 퍼져갔으며, 수많은 인도 음식점과 커리하우스가 생겨났다. 1840년대 아일랜드에 극심한 기근이 발생하자 노퍽 공작이 굶주린 노동자들에게 “뜨거운 물에 커리 가루를 타서 배고픔을 달래라” 할 정도로 커리 가루는 당시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식재료였다.
영국인들은 입에 불이 날 만큼 매운 ‘빈달루’를 먹으며 맥주를 어마어마하게 마시는 것을 남자다움의 상징처럼 여겼는데, 이런 이미지 때문에 1998년 프랑스 월드컵 기간에 <빈달루>라는 노래는 영국 축구 팬들의 비공식 주제가가 되기도 했다. 또한 외무부 장관을 지낸 로빈 쿡은 2001년에 영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커리 요리인 ‘치킨 티카 마살라’를 진정한 국민 음식이라고 선언하기도 했는데, 이처럼 인도 음식에 ‘병적이라 할 만큼 애착’을 가지고 있는 영국인들의 모습을 보면 커리가 영국인의 일상 깊숙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애착은 영국이 인도를 통치했던 식민지제국 시대에 대한 향수를 반영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한다.
2001년 전 외무부 장관 로빈 쿡(Robin Cook)은 치킨 티카 마살라가 ‘진정한 영국의 국민 음식’이라고 선언했다. 그 이유는 “단지 인기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 어떻게 외부의 영향을 흡수하여 영국에 맞게 변화시켰는지를 잘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왜 영국인들은 인도 음식에 ‘병적이라 할 만큼 애착’을 갖고 있을까? 쿡이 설명한 대로 이런 현상은 영국의 다문화적 특성을 반영한다. 그뿐만 아니라 인도 요리와 재료를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중략) 어쩌면 영국인들의 애착은 인도를 통치하던 시대와 영국이 해상을 주름잡던 시대에 대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향수를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 <2. 제국의 향수, 영국의 커리>(59~60쪽) 중에서
수많은 문화와 만나 진화한 커리
이 책의 주요 내용 2
인도인 디아스포라들이 전파한 커리는 향신료의 가짓수만큼이나 다양한 문화와 만나 새롭게 진화해나갔다. 트리니다드 토바고의 길거리 음식인 ‘로티’(121쪽), 가이아나의 매운 생선 커리(122쪽), 자메이카에서 나는 스카치 보닛 고추를 넣은 볶은 생선 요리인 ‘솔트피시 앤드 아키’(123쪽), 모리셔스의 인기 있는 인도식 간식 ‘달푸리’(125쪽), 향신료와 바나나 잎의 향이 물씬 풍기는 스리랑카의 ‘람프라이스’(128쪽), 피지의 통조림 생선 커리(129쪽) 등이 모두 새롭게 탄생한 커리 요리들이다.
커리가 지역의 역사와 결합해 변주된 예로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커리 음식 ‘버니 차우’를 들 수 있는데, 버니 차우가 탄생한 배경에는 아파르트헤이트(흑인 분리 정책)가 있다. 당시 흑인들은 식당 출입이 금지되어 뒷문으로 드나들며 몰래 식사를 해야 했는데, 한 인도 식당 주인이 이들을 위해 작은 빵 덩이 속을 파내 커리를 붓고 인도식 피클을 얹은 다음 포크와 나이프 없이 선 채로 빠르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고안해냈는데, 이것이 바로 ‘버니 차우’이다. 지금도 남아프리카공화국 사람들이 즐겨 먹는 ‘버니 차우’에는 뼈아픈 차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음식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면 또 다른 모습의 음식으로 진화하게 마련이다. (중략) 본래 인도 아대륙에서 탄생한 커리는 결코 하나가 아니었고, 그것이 지구촌 곳곳으로 퍼져나갈 때에도 반드시 단일한 줄기를 따라간 것만은 아니다. (중략) 그렇게 봤을 때 커리는 가장 대표적인 혼성 문화(hybrid culture)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커리에 뒤섞인 향신료의 가짓수만큼이나 다양한 문화가 섞여 있다. 하지만 그 혼성은 그냥 뒤죽박죽 섞인 것이 아니었다. 포괄적으로 커리라 불리는 이 음식은 제각각 자신의 독특한 향과 맛을 지니고 있고, 지역마다 다른 역사와 문화를 품고 있다.
― <초대의 글: 커리가 걸어온 세계화의 길>(8~9쪽) 중에서
주목받는 커리의 미래를 살피다
이 책의 주요 내용 3
커리는 영국인과 인도인 디아스포라에 의해서만 전파된 것은 아니었다. 동남아시아에는 기원전 4세기부터 인도 상인들을 통해 향신료를 포함한 인도 문화가 전파되어 다양한 커리 문화가 이어져왔다. 커리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나라 중 하나가 독특한 커리 문화를 가진 일본이다. 일본에는 1869년 메이지 초기 영국 상인들이 커리 가루를 들여오면서 처음 커리가 소개되었다. 초기에 일본인들은 식재료 본래의 맛과 모양 유지를 중시하는 일본 요리와 정반대인 커리를 먹을 만한 음식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커리는 1980년대의 한 조사에서 일본인들이 집에서 즐겨먹는 세 가지 음식 중 하나로 꼽혔을 뿐 아니라, 이제는 일본 초등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급식 메뉴가 되었다. 커리를 변주한 ‘카레라이스’를 포함해 카레라이스 위에 돈가스를 올린 ‘가쓰카레’, ‘카레빵’ 등 다양한 커리 음식 덕분에 외국에서도 일본식 커리를 ‘카레’라 부를 정도로 일본 커리는 이제 커리의 지구사에서 한 장을 차지하고 있다.
커리에 들어간 수많은 향신료와 고추 등의 강하고 오묘한 맛과 향이 커리가 글로벌한 음식이 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면, 요즘에는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커리가 한층 주목받고 있다. 향신료에는 항생제 역할을 하는 성분이 있어 음식을 상하게 하는 박테리아와 균을 죽이거나 억제하기도 한다. 인도와 중국, 인도네시아에서는 수천 년 간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데 커리를 사용했는데, 오늘날 이것이 의학적으로도 타당하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커리 가루의 주성분인 강황이 질병의 예방과 치료에 효험이 있는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이처럼 맛뿐 아니라 효능 면에서도 인정받은 커리는 앞으로도 세계인의 식탁에서 꾸준히 주목받을 것이며,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진화를 거듭해나갈 것이다.
커리가 일본에서 인기를 얻은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메이지 시대와 다이쇼 시대(1912∼1926)에 일본인들이 서양의 모든 것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커리는 요쇼쿠(洋食)라 불리는 일본인의 입맛에 맞게 변형된 서양 요리의 범주에 들어간다. 이런 음식에는 일본 요리에서는 잘 쓰지 않는 감자와 토마토, 양파, 달걀, 닭고기, 쇠고기, 돼지고기, 버터를 사용한다. 일본 군부는 젊은이들의 체격을 키우는 방법으로 고기 소비를 장려했는데, 저렴한 한 끼 식사로 채소와 쌀, 고기를 모두 먹을 수 있는 이상적 방법으로 카레라이스를 꼽았다.
― <7. 커리의 다양한 변주와 진화>(188쪽) 중에서
오늘날 저명한 의학연구소들이 발표한 여러 연구 결과에 따르면 (중략) 향신료 중에서 커리 가루의 주성분인 강황은 질병의 예방과 치료에 가장 효험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강황은 소화불량이나 입술에 작은 물집이 생기는 구순포진부터 당뇨, 암, 다발성 경화증, 관절염, 심장질환, 알츠하이머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만성질환을 완화하거나 심지어 치료까지 할 수 있다. 계피와 마늘, 생강을 비롯한 향신료를 대상으로 비슷한 연구가 진행 중이다. 따라서 가장 세계적인 요리인 커리는 앞으로도 여러 해 동안 세계인의 식탁에서 주목받을 것이다.
― <8. 주목받는 커리의 미래>(194쪽) 중에서
한국 ‘카레’는 일본 ‘카레’의 아류인가?
이 책의 주요 내용 4
커리와 한국의 만남은 어땠을까? 커리를 한반도에 처음 소개한 것은 20세기 초 식민지 시기 한반도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었는데, 이 영향으로 한국에서도 커리를 ‘카레’라 부르게 되었다. 식민지 시기 일본식 ‘카레라이스’는 인기가 많아 양식당 외에 법원 구내식당에서도 판매했다. 1936년 특급 쌀 1킬로그램이 25전이었는데 카레라이스가 한 그릇에 1원 20전이었던 것을 보면 카레라이스는 부자들이나 맛볼 수 있는 고급 음식이었으며, 근대적인 모던보이와 모던걸의 사회적 위상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음식이었다.
밥 위에 ‘카레’를 얹어 스푼으로 떠먹는 일본과 달리 한국인은 카레라이스를 비빔밥처럼 비벼 먹었는데, 이처럼 한반도라는 새로운 지역 문화와 만나 진화한 한국의 ‘카레’ 문화는 일본과 다른 길을 걸었다.
식민지 시기 이후에도 카레라이스의 인기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일본과 수교가 단절된 탓에 미국에서 커리 가루를 수입했는데 한국인들의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이로 인해 한국 ‘카레’는 독자적인 발전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1960년대 들어 한국에서 직접 커리 가루를 가공하기 시작했으며, 덕분에 가격이 낮아지고 소비가 촉진되었다. 1969년에는 (주)오뚜기가 처음으로 인스턴트 카레를 판매하면서 ‘카레’는 급속도로 대중화되었다. 박정희 정부 시절에는 ‘혼·분식장려운동’과 ‘식생활개선운동’으로 한때 카레라이스 대신 ‘카레국수’가 판매되기도 했다.
카레가 보편화되었지만, 모든 사람에게 카레라이스가 인기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60년대 이후 태어나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 10대를 보낸 사람은 카레라이스를 만들어 먹기 편한 음식으로 생각하는 반면, 1960년대 이전에 태어나 지방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은 카레라이스를 마땅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음식인문학자 주영하 교수는 말한다. 2000년대 이후 인도를 방문하는 한국인이 증가하면서 ‘카레’는 다시 ‘커리’로 바뀌고 있다. 단일한 ‘카레’에서 벗어나 다양한 커리를 즐기기 시작한 한국 사회 또한 커리의 지구사에 편입되기 시작함을 보여주지만, 그 이면에 담긴 식민지와 디아스포라, 차별의 역사에 대한 편견과 무지를 깨지 않는다면 한국 ‘카레’는 여전히 ‘아류’로 남을지도 모른다.
양식당 말고도 법원 구내식당과 같은 곳에서도 카레라이스를 팔았다. 독립운동가 안창호는 1932년 4월 윤봉길이 일으킨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 폭탄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경찰에 붙잡혀 경성으로 송환되었다. 6월 7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호송된 그는 서대문 경찰서장을 비롯한 사복 경관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 낮 12시에 법원 구내식당에서 카레라이스를 먹었으며, 이후 취조를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 <특집: 한국 ‘카레’는 일본 ‘카레’의 아류인가?>(206쪽) 중에서
식생활개선운동의 일환으로 각종 영양식이 초·중학교 여자 교사를 대상으로 소개되었다. 그중에 카레는 카레국수라는 메뉴로 소개되었고, 교사들이 직접 조리 실습까지 했다. 카레라이스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 카레국수는 생뚱맞겠지만, 미국의 잉여농산물로 들여온 밀가루를 소비한다는 측면에서는 식생활 개선에 매우 적절한 음식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1970년대 초반까지도 점심 메뉴로 카레국수를 먹도록 국민을 계몽했다. 쌀을 아낄 수 있는 음식인 국수에 간편한 ‘카레’를 올려 먹는 것은 정부의 분식운동 차원에서 매우 적절한 대안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카레국수는 그다지 큰 인기를 누리지 못했다.
― <특집: 한국 ‘카레’는 일본 ‘카레’의 아류인가?>(212~213쪽) 중에서
2000년대 이후 인도를 방문하는 한국인이 증가하면서 카레는 다시 커리로 바뀌고 있다. 서울 이태원에 자리한 많은 인도 음식점에서 맛볼 수 있는 커리가 들어간 음식들은 인도에 대한 환상만큼이나 독특하면서도 맛있다. 이제야 비로소 커리의 지구사에 한국 사회가 편입되기 시작한 셈이다. 그러나 커리의 지구사에 담겨 있는 제국과 식민지의 불균등, 인도인 노동자의 표류, 그리고 인도 아대륙의 다양한 민족집단이 겪은 갈등과 질곡의 역사에 대한 편견과 무지로 인해 한국 사회는 여전히 ‘커리의 아류’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 <특집: 한국 ‘카레’는 일본 ‘카레’의 아류인가?>(218쪽) 중에서
출처: 알라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