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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 조지훈
가야금&
□ 1
휘영청 달 밝은 제 창 열고 홀로 앉다
품에 가득 국화 향기 외로움이 병이어라.
푸른 담배 연기 하늘에 바람 차고
붉은 술 그림자 두 뺨이 더워 온다.
천지가 괴괴한데 찾아올 이 하나 없다
우주가 망망(茫茫)해도 옛 생각은 새로워라.
달 아래 쓰러지니 깊은 밤은 바다런 듯
창망(滄茫)한 물결 소리 초옥(草屋)이 떠나간다.
□ 2
조각배 노 젓듯이 가얏고를 앞에 놓고
열두 줄 고른 다음 벽에 기대 말이 없다.
눈 스르르 감고 나니 흥이 먼저 앞서노라
춤추는 열 손가락 제대로 맡길랏다.
구름 끝 드높은 길 외기러기 울고 가네
은하 맑은 물에 뭇별이 잠기다니.
내 무슨 한이 있어 흥망(興亡)도 꿈 속으로
잊은 듯 되살아서 임 이름 부르는고.
□ 3
풍류(風流) 가얏고에 이는 꿈이 가이 없다
열두 줄 다 끊어도 울리고 말 이 심사(心思)라.
줄줄이 고로 눌러 맺힌 시름 풀이랏다
머리를 끄덕이고 손을 잠깐 슬쩍 들어
뚱뚱 뚱 두두 뚱뚱 흥흥 응 두두뚱 뚱
조격(調格)을 다 잊으니 손끝에 피 맺힌다.
구름은 왜 안 가고 달빛은 무삼 일 저리 흰고
높아 가는 물 소리에 청산이 무너진다.
풀잎단장, 창조사, 1952
계림애창 조지훈
계림애창(鷄林哀唱)
임오년(壬午年) 이른봄 내 불현듯 서라벌(徐羅伐)이 그리워 표연(飄然)히 경주(慶州)에 오니 복사꽃 대숲에 철 아닌 봄눈이 뿌리는 4월일레라. 보름 동안을 옛터에 두루 놀 제 계림(鷄林)에서 이 한 수(首)를 얻으니 대개 마의태자(麻衣太子)의 혼(魂)으로 더불어 같은 운(韻)을 밟음이라. 조고상금(弔古傷今)의 하염없는 탄식(歎息)일진저!
□ 1
보리 이랑 우거진 골 구으는 조각돌에
서라벌 즈믄 해의 수정 하늘이 걸리었다
무너진 석탑 위에 흰구름이 걸리었다
새 소리 바람 소리도 찬 돌에 감기었다.
잔 띄우던 굽이물에 떨어지는 복사꽃잎
옥적(玉笛) 소리 끊인 골에 흐느끼는 저 풀피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첨성대 위에 서서
하늘을 우러르는 나의 넋이여!
□ 2
사람 가고 대(臺)는 비어 봄풀만 푸르른데
풀밭 속 주추조차 비바람에 스러졌다
돌도 가는구나 구름과 같으온가
사람도 가는구나 풀잎과 같으온가
저녁놀 곱게 타는 이 들녘에
끊쳤다 이어지는 여울물 소리
무성한 찔레숲에 피를 흘리며
울어라 울어라 새여 내 설움에 울어라 새여!
조지훈시선, 정음사, 1956
고목 조지훈
고목(枯木)&
영(嶺) 넘어 가는 길에
임자 없는 무덤 하나
주막이 하나
시름은 무거운데
주머니 비었거다
하늘은 마냥 높고
고목(枯木) 가지에
서리 까마귀 우지짖는
저녁 노을 속
나그네는 홀로 가고
별이 새로 돋는다
영(嶺) 넘어 가는 길에
산 사람의 무덤 하나
죽은 이의 집
풀잎단장, 창조사, 1952
고사 1 조지훈
고사(古寺) 1
목어(木魚)를 두드리다
졸음에 겨워
고오운 상좌아이도
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
웃으시는데
서역(西域) 만리(萬里)길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진다.
청록집(靑綠集), 을유문화사, 1946
고사 2 조지훈
고사(古寺) 2
목련(木蓮)꽃 향기로운 그늘 아래
물로 씻은 듯이 조약돌 빛나고
흰 옷깃 매무새의 구층탑 위로
파르라니 돌아가는 신라(新羅) 천년(千年)의 꽃구름이여
한나절 조찰히 구르던
여울 물소리 그치고
비인 골에 은은히 울려 오는 낮종소리.
바람도 잠자는 언덕에서 복사꽃잎은
종소리에 새삼 놀라 떨어지노니
무지개빛 햇살 속에
의희한 단청(丹靑)은 말이 없고……
청록집(靑綠集), 을유문화사, 1946
고조 조지훈
고조(古調)
파르롭은 구름 무늴 고이 받들어
네 벽에 소리 없이 고요가 숨쉰다
밖에는 푸른 하늘 용(龍)트림 우에 이슬이 나리고
둥글다 기울어진 반야월(半夜月) 아래 설움은 꽃이어라
당홍 악복(樂服)에 검은 사모(紗帽) 옷깃 바로잡아
소리 이루기 전 눈 먼저 스르르 나려감느니
바람 잠잔 뒤 바닷속같이 조촐한 마음
아으 흘러간 태평성세!
가락 떼는 손 소릴 따라 황홀히 춤추고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잇기는 듯 다시 끊어져
흐득이는 갈대청 대금 소리야 서러워라
청상(靑孀)의 정원(情怨)보담 아픈 가락에 피리는 울고
이십오현(二十五絃) 금슬(琴瑟)이 화(和)하는 소리
퉁겨지는 줄 위에서 원앙새야 울어라
호박(琥珀) 종(鐘) 술잔에 찰찰히 담아 든 노란 국화주(菊花酒)
아으 흘러간 태평성세!
건곤(乾坤)이 불로(不老) 월장재(月長在)하더니
꽃피던 영화(榮華) 북망(北邙)으로 가고
빈터에 잡초만 우거진 것을
밤새가 와서 울어옌다
무희(舞姬) 흩어진 뒤 무너진 전각(殿閣) 뒤에
하이얀 나비는 날아라
난 이는 모두 죽는 것을
달 진 뒤 천심(天心)에 별이 늘고 어제도 오늘도 다 한 가지
아으 흘러간 태평성세!
조지훈시선, 정음사, 1956
고풍의상 조지훈
고풍의상(古風衣裳)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 끝 풍경이 운다.
처마끝 곱게 늘이운 주렴에 반월(半月)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 가는 밤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가지빛 호장을 받친 호장저고리
호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살살이 퍼져 나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곡선을 이루는 곳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초마 끝에 곱게 감춘 운혜(雲鞋) 당혜(唐鞋)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古典)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蝴蝶)
호접(蝴蝶)인 양 사푸시 춤을 추라 아미(蛾眉)를 숙이고……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눈감고 거문고 줄 골라 보리니
가는 버들인 양 가락에 맞추어
흰 손을 흔들어지이다.
청록집(靑綠集), 을유문화사, 1946
그대 형관을 쓰라 조지훈
그대 형관(荊冠)을 쓰라
그대 칠보의 관(冠)을 벗고
삼가 형극(荊棘)의 관(冠)을 머리에 이라.
그대 아름다운 상아(象牙)의 탑에서 나와
메마른 황토 언덕 거칠은 이 땅을 밟으라.
노래하는 새, 꽃이팔 하나 없는 이 길 위에
그대 거룩한 원광(圓光)으로 빛부시게 하라.
눈물 이슬 되어 풀잎에 맺히고
양심의 태양 하늘에 빛내고저
그대 너그러운 덕이여
소란한 세상에 내리라.
날 오라 부르는 그대 음성
언제나 귓가에 사무치건만
아직도 내 스스로
그대 앞에 돌아가지 못함은
사악(邪惡)의 얽힘 속에 괴롬의 쓴 잔을 들고
불의에 굽히지 않는 그대의 법도를 받음이니
그대 약한 자의 벗,
맨발 벗고 이 가시밭길을 밟으라
여기 황야에 나를 이끌어
목놓아 울게 하라.
이 세상 더러움
오로 다 나로 하여 있는 듯
오늘 신음하는 무리 앞에
진실로 죄로움을
제 눈물로 적시어 씻게 하느니
오오 시(詩)여 빛이여 힘이여!
역사 앞에서, 신구문화사, 1959
그들은 왔다 조지훈
그들은 왔다
아득한 옛날 먼 서쪽에서 길 떠나
해 돋는 아침의 나라, 그들 마음의 고장을 찾아서
동방(東方)으로 동방(東方)으로 물결쳐 내려오는
한 떼의 흰옷 입은 무리가 있었다.
세월은 고난(苦難)의 길 그들 만년(萬年)의 요람(搖籃)을 버리고
새로운 꿈은 새로운 땅에서 이룩하려
어둠을 멸(滅)하는 새벽을 불러일으킬 수탉의 넋을 가슴마다 지닌 채
몇만리 앞길에 향방(向方)을 그르치지 않는
무궁한 성좌(星座)를 우러르며 그들은 왔다.
거룩한 보람에 소용돌이치는 심장(心臟)의 고동(鼓動)을
이 가슴에서 저 가슴에로 울려 나가는 종소리로 들으며
한 줄기 광명(光明) 앞에 무릎 끓어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들은
눈물과 노래로 영혼을 달래며
피 비린 세기(世紀)의 밤길을 가는 나그네――
때로 어둠을 틈타 몰려오는
사나운 도적서리에 무찔리어
그들의 순(純)한 피 흰 옷자락에 반반(斑斑)히 아롱졌나니
별빛 아래 눈물로 간 돌칼 돌창도
오로지 불의(不義)를 막기 위한 것
꽃보담 더 붉은 피 사악(邪惡) 앞에 뿌리고
오만(傲慢)한 무리의 가슴에
화살을 겨누며 그들은 왔다.
꿈을 찾는 가슴일래 목숨은 새털보담 오히려 가볍고
처음이요 마지막인 피의 계시(啓示)는
의(義)를 위한 죽음 속에 깃들어 있어……
불의(不義)의 원수의 독한 이빨에 온 족속(族屬)이 무찔리기로
무슴다 잊을리야 그 맑은 꿈의 빛나는 아침을 비는 마음이
가고픈 나라를 찾지 못하고 비바람에 낡아 가는 흰 뼈가 된들
거룩한 보람에 회한(悔恨)은 없노라
가슴 깊이 새기며 그들은 왔다.
암흑(暗黑)의 원수 앞에 맨발벗고 달릴 때
피 맺힌 손길이 창과 활을 잡았으나
마음 가난하고 착한 백성 함께 춤추기 위하여
품 속 깊이 피리 한 쌍 지니기를 잊지 않은 그들은
실상 싸움보담 평화(平和)를
칼보담은 피리를 사랑하는 백성이었다.
아 눈보다 흰 옷, 옷보다 더 흰 마음이
순하디 순한 양떼처럼 풀밭에 머리 모아
먼 하늘에 흐르는 별빛을 손짓하고
굽이치는 강물에 귀기울이느니
언제사 언제사 그들 가슴에
환히 트이는 새론 하늘과
아름다운 산천(山川)의 눈부신 태양(太陽)이 솟아오려나.
조지훈시선, 정음사, 1956
그리움 조지훈
그리움&
머언 바다의 물보래 젖어 오는 푸른 나무 그늘 아래 늬가 말없이 서 있을 적에 늬 두 눈썹 사이에 마음의 문을 열고 하늘을 내다보는 너의 영혼을 나는 분명히 볼 수가 있었다.
늬 육신의 어디메 깃든지를 너도 모르는 서러운 너의 영혼을 늬가 이제 내 앞에 다시 없어도 나는 역력히 볼 수가 있구나
아아 이제사 깨닫는다. 그리움이란 그 육신의 그림자가 보이는 게 아니라 천지에 모양 지을 수 없는 아득한 영혼이 하나 모습 되어 솟아오는 것임을…….
풀잎단장, 창조사, 1952
기다림 조지훈
기다림&
고운 임 먼 곳에 계시기
내 마음 애련하오나
먼 곳에나마 그리운 이 있어
내 마음 밝아라.
설운 세상에 눈물 많음을
어이 자랑삼으리.
먼 훗날 그때까지 임 오실 때까지
말없이 웃으며 사오리다.
부질없는 목숨 진흙에 던져
임 오시는 길녘에 피고져라.
높거신 임의 모습 뵈올 양이면
이내 시든다 설울 리야……
어두운 밤하늘에
고운 별아.
역사 앞에서, 신구문화사, 1959
길 조지훈
길&
나는 세월과 함께 간다. 세월은 날 떨어뜨릴 수가 없다.
다만 세월은 술을 마실 줄 모른다. 내가 주막에 들어 한 잔 기울이고 잠이 든 사이에 세월은 나를 기다리며 저만치 앞서간다. 나는 놀란 듯이 일어나 세월을 따라간다. 나는 벌써 세월보다 앞에 가고 있었다. 숨이 가쁘다. 길가에 쓰러진다.
또 하나 세월이 달려와서 나를 붙들어 일으킨다. 다시 조용히 걸어간다. 먼저 가던 세월이 따라와서 풀밭에 주저앉는다.
두 세월이 무슨 얘기를 속삭인다. 나는 혼자서 그들을 기다리며 저만치 앞서간다.
나는 또 주막에 들어 한 잔 기울일 수밖에 없다. 한잔 마시고 싸움하는 구경 좀 하고 나도 덩달아 큰 호통을 치고 멱살을 잡히고 이내 긴 노래 한 굽이를 꺾어 넘길 수밖에 없다. 그 무렵은 대개 황혼이었다.
새 세월이 작은 종이쪽 하나를 가지고 온다. 죽은 세월의 유서(遺書)! 종이를 펴 든다. 거기 내가 그에게 들려준 노래가 적혀 있다.
조지훈시선, 정음사, 1956
꽃 그늘에서 조지훈
꽃 그늘에서
눈물은 속으로 숨고
웃음 겉으로 피라
우거진 꽃송이 아래
조촐히 굴르는 산골 물소리……
바람 소리 곳고리 소리
어지러이 덧덮인 꽃잎새 꽃낭구
꽃다움 아래로
말없이 흐르는 물
아하 그것은
내 마음의 가장 큰 설움이러라
하잔한 두어 줄 글 이것이
어찌타 내 청춘의 모두가 되노
역사 앞에서, 신구문화사, 1959
꿈 이야기 조지훈
꿈 이야기
문(門)을 열고
들어가서 보면
그것은 문(門)이 아니었다.
마을이 온통
해바라기 꽃밭이었다
그 헌출한 줄기마다
멧방석만한 꽃숭어리가 돌고
해바라기 숲속에선 갑자기
수천 마리의 낮닭이
깃을 치며 울었다.
파아란 바다가 보이는
산 모롱잇길로
꽃상여가 하나
조용히 흔들리며 가고 있었다.
바다 위엔 작은 배가 한 척 떠 있었다.
오색(五色) 비단으로 돛폭을 달고
뱃머리에는 큰 북이 달려 있었다.
수염 흰 노인이 한 분
그 뱃전에 기대어
피리를 불었다.
꽃상여는 작은 배에 실렸다.
그 배가 떠나자
바다 위에는 갑자기 어둠이 오고
별빛만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문(門)을 닫고 나와서 보면
그것은 문(門)이 아니었다.
여운, 일조각, 1964
낙화 조지훈
낙화(落花)&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청록집(靑綠集), 을유문화사, 1946
낙화 2 조지훈
낙화(落花) 2
피었다 몰래 지는
고운 마음을
흰무리 쓴 촛불이
홀로 아노니
꽃 지는 소리
하도 가늘어
귀기울여 듣기에도
조심스러라
두견(杜鵑)이도 한목청
울고 지친 밤
나 혼자만 잠들기
못내 설어라
조지훈시선, 정음사, 1956
눈 오는 날에 조지훈
눈 오는 날에
검정 수목 두루마기에
흰 동정 달아 입고
창에 기대면
박 넌출 상기 남은
기울은 울타리 위로 장독대 위로
새하얀 눈이
나려 쌓인다
홀로 지니던 값진 보람과
빛나는 자랑을 모조리 불사르고
소슬한 바람 속에
낙엽처럼 무념(無念)히 썩어 가면은
이 허망한 시공(時空) 위에
내 외로운 영혼 가까이
꽃다발처럼 꽃다발처럼
하이얀 눈발이
나려 쌓인다
마음 이리 고요한 날은
아련히 들려오는
서라벌 천년(千年)의 풀피리 소리
비애(悲哀)로 하여 내 혼이 야위기에는
절망이란 오히려
나리는 눈처럼 포근하고나.
역사 앞에서, 신구문화사, 1959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조지훈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그날 너희 오래 참고 참았던 의분이 터져
노도와 같이 거리로 거리로 몰려가던 그때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연구실 창턱에 기대 앉아
먼 산을 넋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오후 두시 거리에 나갔다가 비로소 나는
너희들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물결이
의사당 앞에 넘치고 있음을 알고
늬들 옆에서 우리는 너희의
불타는 눈망울을 보고 있었다.
오늘이라 왜 이다지 더욱 세찬고
이룩하기도 전에 흔들리는 사직(社稷)의
그 간난(艱難)한 운명 속에
아 십년이란 세월이
흘러간 오늘
하늘이여 또 한 번
열리라 비는 마음!
산천도 많이는 변했구나
봉황(鳳凰)은 오지 않고
까마귀떼만 어지러이
우짖는다 해도
이 터전은 조상이 점지하신
못 잊을 고장
우리의 소망은
끊일 수 없다.
오늘도 국토의 둘레를
바닷물은 꿈결같이 찰싹이고
하늘은 예대로 비취빛 하늘
한 떼의 단정학(丹頂鶴)은 훨훨 날아오르라.
이는 흰옷 입은 겨레의
조촐한 마음의 상징이어니
아 그런 날을 기다리며 산다.
나의 조국아!
여운, 일조각, 1964
다부원에서 조지훈
다부원(多富院)에서
한 달 농성(籠城) 끝에 나와 보는 다부원(多富院)은
얇은 가을 구름이 산마루에 뿌려져 있다
피아(彼我) 공방(攻防)의 포화(砲火)가
한달을 내리 울부짖던 곳
아아 다부원(多富院)은 이렇게도
대구(大邱)에서 가까운 자리에 있었고나
조그만 마을 하나를
자유(自由)의 국토(國土) 안에 살리기 위해서는
한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
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니
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
이 황폐(荒廢)한 풍경(風景)이
무엇 때문의 희생(犧牲)인가를……
고개 들어 하늘에 외치던 그 자세(姿勢)대로
머리만 남아 있는 군마(軍馬)의 시체(屍體)
스스로 뉘우침에 흐느껴 우는 듯
길 옆에 쓰러진 괴뢰군(傀儡軍) 전사(戰士)
일찌기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생령(生靈)들이 이제
싸늘한 가을 바람에 오히려
간 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多富院)
진실로 운명(運命)의 말미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면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安息)이 있느냐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多富院)은
죽은 자(者)도 산 자(者)도 다 함께
안주(安住)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역사 앞에서, 신구문화사, 1959
대금 조지훈
대금&
어디서 오는가
그 맑은 소리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데
샘물이 꽃잎에
어리우듯이
촛불이 바람에
흔들리누나
영원은 귀로 들고
찰나는 눈앞에 진다
운소에 문득
기러기 울음
사랑도 없고
회한도 없는데
무시(無始)에서 비롯하여
허무(虛無)에로 스러지는
울리어 오라
이 슬픈 소리
조지훈시선, 정음사, 1956
도리원에서 조지훈
도리원(桃李院)에서
그렇게 안타깝던 전쟁도
지나고 보면 일진(一陣)의 풍우(風雨)보다 가볍다.
불타 버린 초가집과
주저앉은 오막살이――
이 붕괴와 회진(灰燼)의 마을을
내 오늘 초연히 지나가노니
하늘이 은혜(恩惠)하여 호전(互全)을 이룬 자(者)는
오직 낡은 장독이 있을 뿐
아 나의 목숨도 이렇게 질그릇처럼
오늘에 남아 있음을 다시금 깨우쳐 준다.
흩어진 마을 사람들 하나 둘 돌아와
빈 터에 서서 먼 산을 보는데
하늘이사 푸르기도 하다.
도리원(桃李院) 가을 볕에
애처러운 코스모스가
피어서 칩다.
역사 앞에서, 신구문화사, 1959
동물원의 오후 조지훈
동물원의 오후
마음 후줄근히 시름에 젖는 날은
동물원으로 간다.
사람으로 더불어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짐승에게라도 하소해야지.
난 너를 구경 오진 않았다
뺨을 부비며 울고 싶은 마음.
혼자서 숨어 앉아 시(詩)를 써도
읽어 줄 사람이 있어야지
쇠창살 앞을 걸어가며
정성스레 써서 모은 시집을 읽는다.
철책 안에 갇힌 것은 나였다
문득 돌아다보면
사방에서 창살 틈으로
이방(異邦)의 짐승들이 들여다본다.
`여기 나라 없는 시인이 있다'고
속삭이는 소리……
무인(無人)한 동물원의 오후 전도된 위치에
통곡과도 같은 낙조(落照)가 물들고 있었다.
역사 앞에서, 신구문화사, 1959
마을 조지훈
마을&
모밀꽃 우거진
오솔길에
양(羊)떼는 새로 돋은
흰 달을 따라간다
늴늬리 호들기가 없어서
소 치는 아이는
잔디밭에 누워
하늘을 본다
산너머로 흰구름이
나고 죽는 것을
목화(木花) 따는 색시는
잊어버렸다
풀잎단장, 창조사, 1952
매화송 조지훈
매화송(梅花頌)
매화꽃 다 진 밤에
호젓이 달이 밝다.
구부러진 가지 하나
영창에 비치나니
아리따운 사람을
멀리 보내고
빈 방에 내 홀로
눈을 감아라.
비단옷 감기듯이
사늘한 바람결에
떠도는 맑은 향기
암암한 옛 양자라
아리따운 사람이
다시 오는 듯
보내고 그리는 정은
싫지 않다 하여라.
조지훈시선, 정음사, 1956
맹세 조지훈
맹세
만년(萬年)을 싸늘한 바위를 안고도
뜨거운 가슴을 어찌하리야.
어둠에 창백한 꽃송이마다
깨물어 피 터진 입을 맞추어
마지막 한 방울 피마저 불어 넣고
해 돋는 아침에 죽어 가리야.
사랑하는 것 사랑하는 모든 것 다 잃고라도
흰 뼈가 되는 먼 훗날까지
그 뼈가 부활하여 다시 죽을 날까지
거룩한 일월(日月)의 눈부신 모습
임의 손길 앞에 나는 울어라.
마음 가난하거니 임을 위해서
내 무슨 자랑과 선물을 지니랴.
의(義)로운 사람들이 피흘린 곳에
솟아오른 대나무로 만든 피리뿐
흐느끼는 이 피리의 아픈 가락이
구천(九天)에 사무침을 임은 듣는가.
미워하는 것 미워하는 모든 것 다 잊고라도
붉은 마음이 숯이 되는 날까지
그 숯이 되살아 다시 재 될 때까지
못 잊힐 모습을 어이하리야
거룩한 이름 부르며 나는 울어라.
역사 앞에서, 신구문화사, 1959
묘망 조지훈
묘망(渺茫)
내 오늘밤 한 오리 갈댓잎에 몸을 실어 이 아득한 바닷속 창망(滄茫)한 물구비에 씻기는 한 점 바위에 누웠나니.
생은 갈수록 고달프고 나의 몸둘 곳은 아무데도 없다. 파도는 몰려와 몸부림치며 바위를 물어뜯고 넘쳐나는데 내 귀가 듣는 것은 마지막 물결 소리 먼 해일에 젖어 오는 그 목소리뿐.
아픈 가슴을 어쩌란 말이냐 허공에 던져진 것은 나만이 아닌데 하늘에 달이 그렇거니 수많은 별들이 다 그렇거니 이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우주의 한 알 모래인 지구의 둘레를 찰랑이는 접시물 아아 바다여 너 또한 그렇거니.
내 오늘 바닷속 한 점 바위에 누워 하늘을 덮는 나의 사념이 이다지도 작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풀잎단장, 창조사, 1952
무고 조지훈
무고(舞鼓)
진주 구슬 오소소 오색 무늬 뿌려 놓고
긴 자락 칠색선(線) 화관(花冠) 몽두리.
수정(水晶) 하늘 반월(半月) 속에 채의(彩衣) 입은 아가씨
피리 젓대 고운 노래 잔조로운 꿈을 따라
꽃구름 휘몰아서 발 아래 감고
감은 머리 푸른 수염 네 활개를 휘돌아라.
맑은 소리 품은 고(鼓) 한 송이 꽃을
호접(蝴蝶)의 나래가 싸고 돌더니
풀밭에 앉은 나비 다소곳이 물러가고
꿀벌의 날개 끝에 맑은 청 고(鼓)가 운다.
은무지개 너머로 작은 별 하나
꽃수실 채색 무늬 화관(花冠)몽두리.
청록집(靑綠集), 을유문화사, 1946
민들레꽃 조지훈
민들레꽃
까닭 없이 마음 외로울 때는
노오란 민들레꽃 한 송이도
애처롭게 그리워지는데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소리쳐 부를 수도 없는 이 아득한 거리(距離)에
그대 조용히 나를 찾아오느니
사랑한다는 말 이 한마디는
내 이 세상 온전히 떠난 뒤에 남을 것
잊어버린다. 못 잊어 차라리 병이 되어도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
조지훈시선, 정음사, 1956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조지훈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나는 아직도 작은 짐승이로다.
인생은 항시 멀리
구름 뒤에 숨고
꿈결에도 아련한
피와 고기 때문에
나는 아직도
괴로운 짐승이로다.
모래밭에 누워서
햇살 쪼이는 꽃조개같이
어두운 무덤을 헤매는 망령(亡靈)인 듯
가련한 거이와 같이
언젠가 한 번은
손들고 몰려오는 물결에 휩싸일
나는 눈물을 배우는 짐승이로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풀잎단장, 창조사, 1952
밤 조지훈
밤&
누구가 부르는 듯
고요한 밤이 있습니다.
내 영혼의 둘렛가에
보슬비 소리 없이 나리는
밤이 있습니다.
여윈 다섯 손가락을
촛불 아래 가즈런히 펴고
자단향(紫檀香) 연기에 얼굴을 부비며
울지도 못하는 밤이 있습니다.
하늘에 살아도
우러러 받드는 하늘은 있어
구름 밖에 구름 밖에 높이 나는 새
창턱에 고인 흰 뺨을
바람이 만져 주는
밤이 있습니다.
풀잎단장, 창조사, 1952
범종 조지훈
범종(梵鐘)
무르익은 과실이
가지에서 절로 떨어지듯이 종소리는
허공에서 떨어진다. 떨어진 그 자리에서
종소리는 터져서 빛이 되고 향기가 되고
다시 엉기고 맴돌아
귓가에 가슴 속에 메아리치며 종소리는
웅 웅 웅 웅 웅……
삼십삼천(三十三天)을 날아오른다 아득한 것.
종소리 위에 꽃방석을
깔고 앉아 웃음짓는 사람아
죽은 자가 깨어서 말하는 시간
산 자는 죽음의 신비에 젖은
이 텡하니 비인 새벽의
공간을
조용히 흔드는
종소리
너 향기로운
과실이여!
여운, 일조각, 1964
별리 조지훈
별리(別離)&
푸른 기와 이끼 낀 지붕 너머로
나즉히 흰구름은 피었다 지고
두리기둥 난간에 반만 숨은 색시의
초록 저고리 당홍치마 자락에
말 없는 슬픔이 쌓여 오느니――
십리라 푸른 강물은 휘돌아가는데
밟고 간 자취는 바람이 밀어 가고
방울 소리만 아련히
끊질 듯 끊질 듯 고운 뫼아리
발 돋우고 눈 들어 아득한 연봉(連峰)을 바라보나
이미 어진 선비의 그림자는 없어……
자주 고름에 소리 없이 맺히는 이슬 방울
이제 임이 가시고 가을이 오면
원앙침(鴛鴦枕) 비인 자리를 무엇으로 가리울꼬
꾀꼬리 노래하던 실버들 가지
꺾어서 채찍 삼고 가옵신 님아……
조지훈시선, 정음사, 1956
병에게 조지훈
병(病)에게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生)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는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虛無)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즉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 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생(生)에의 집착과 미련(未練)은 없어도 이 생(生)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지옥(地獄)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說服)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잘 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 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리 다시 인생(人生)을 얘기해 보세그려
사상계, 1968
봉황수 조지훈
봉황수(鳳凰愁)
벌레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 소리 날아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위엔 여의주 희롱하는 쌍룡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正一品) 종구품(從九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둘 곳은 바이 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에 호곡하리라.
청록집(靑綠集), 을유문화사, 1946
비가 내린다 조지훈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
목 마른 땅 위에
오뇌하는 생령(生靈)의 가슴 위에
촉촉히 젖어들도록 비가 내린다.
거룩한 제단(祭壇) 위 타오르는 횃불 아래
피로 물들인 잔을 들어
값진 희생으로 사라진 이와
팍팍한 황토(黃土) 위에 엎드려 울던 사람들
아아 백성의 마음은 하늘이니라 내리는 비는
얼마나 달고 아름다운가
사슴과 비둘기 포기포기 푸나무도
조용히 목을 축이자.
우리 다 함께 바라거니
어린 무리를 이끌어
이 귀한 물을 홀로 탐하는 이 누군가.
우리 다 함께 바라거니
지내간 날의 공을 자랑하여
이 맑은 샘을 흐리는 이 있는가.
이리와 배암도 회오(悔悟)의 잔을 들어
마지막 목을 축이라
병든 겨레의 피를 빨던 입술에
아아 백성의 마음은 하늘이어니
이 샘은 얼마나 달고도 두려운 것인가
비가 내린다
물 소리 예런 듯 새론 하늘이 트이고
풀 향기 솟치는 언덕 위에
칠색 무지개를 놓으려
여기 포근히 비가 내린다.
조지훈시선, 정음사, 1956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조지훈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부제: 사월(四月) 의거(義擧) 학생(學生) 부모(父母)의 넋두리에서
어머니들은 대문에 기대어서 밤을 새우고
아버지들은 책상 앞에 턱을 괴고 앉아 밤을 새운다.
비록 저희 아들딸이 다 돌아왔다 한들 이 밤에
어느 어버이가 그 베갯머리를 적시지 않으랴.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우리는 늬들을 철모르는 아인 줄로만 알았다.
마음 있는 사람들이 썩어가는 세상을 괴로워하여
몸부림칠 때에도
그것을 못 본 듯이 짐짓 무심하고 짓궂기만 하던 늬들을
우리는 정말 철없는 아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니 어찌 알았겠느냐 그날 아침
여늬때와 다름없이 책가방을 들고
태연히 웃으며 학교로 가던 늬들의 가슴 밑바닥에
냉연(冷然)한 결의(決意)로 싸서 간직한 그렇게도 뜨거운
불덩어리가 있었다는 것을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우리는 아직도 모른다.
무엇 때문에 어린 늬들이
너희 부모와 조상이 쌓아온 죄를 대신 속죄하여
피 흘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을
연약한 가슴을 헤치고 목메어 외치는 늬들의 순정을
총칼로 무찌른 무리가 있었다는 것을
아무리 죄 지은 자일지라도 늬들 앞에 진심의 참회
부드러운 위로 한마디의 언약만 있었더라면
늬들은 조용히 물러나왔을 것을
그렇게까지 너희들이 노(怒)하지는 않을 것을
그 값진 피를 마구 쏟고 쓰러지지는 않았을 것을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너희는 종래 돌아오지 않는구나
어느 거리에서 그 향기 높은 선혈을 쏟고 쓰러졌느냐.
어느 병원 베드 위에서 외로이 신음하느냐 어느 산골에서
굶주리며 방황하느냐.
고귀한 희생이 된 너희로 하여
민족만대(民族萬代) 맥맥(脈脈)히 살아 있는 꽃다운 혼(魂)을
폭도라 부르던 사람들도 이제는 너희의 공을 알고 있다.
떳떳하고 귀한 일 했으며 너희
부몬들 또 무슨 말이 있겠느냐마는 아무리 늬들의 공이
조국의 역사에 남아도
너희보다 먼저 가야할 우리 어버이 된 자의 살아남은 가슴에는
죽는 날까지 빼지 못할 못이 박히는 것을 어쩌느냐.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참으로 몰랐다 너희들이 이렇게 가야 할 줄을
너희 부모들은 길이 두고 마음 속에 너를 기다려
문에 기대 서고 책상 앞에 턱 괴고 밤을 새울 것이다.
모진 바람에 꽃망울조차 떨어지고
총소리 속에 먼동이 터 온다.
아 우리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고이 잠들거라.
여운, 일조각, 1964
사모 조지훈
사모(思慕)
그대와 마주앉으면
기인 밤도 짧고나
희미한 등불 아래
턱을 고이고
단 둘이서 나누는
말 없는 얘기
나의 안에서
다시 나를 안아 주는
거룩한 광망(光芒)
그대 모습은
운명(運命)보담 아름답고
크고 밝아라
물들은 나뭇잎새
달빛에 젖어
비인 뜰에 귀또리와
함께 자는데
푸른 창가에
귀기울이고
생각하는 사람 있어
밤은 차고나.
풀잎단장, 창조사, 1952
산방 조지훈
산방(山房)
닫힌 사립에
꽃잎이 떨리노니
구름에 싸인 집이
물소리도 스미노라.
단비 맞고 난초잎은
새삼 치운데
볕바른 미닫이를
꿀벌이 스쳐간다.
바위는 제자리에
옴찍 않노니
푸른 이끼 입음이
자랑스러라.
아스럼 흔들리는
소소리 바람
고사리 새순이
도르르 말린다.
청록집(靑綠集), 을유문화사, 1946
산상의 노래 조지훈
산상(山上)의 노래
높으디 높은 산마루
낡은 고목(古木)에 못박힌 듯 기대어
내 홀로 긴 밤을
무엇을 간구하며 울어 왔는가.
아아 이 아침
시들은 핏줄의 구비구비로
사늘한 가슴의 한복판까지
은은히 울려 오는 종소리.
이제 눈감아도 오히려
꽃다운 하늘이거니
내 영혼의 촛불로
어둠 속에 나래 떨던 샛별아 숨으라.
환히 트이는 이마 위
떠오르는 햇살은
시월 상달의 꿈과 같고나.
메마른 입술에 피가 돌아
오래 잊었던 피리의
가락을 더듬노니
새들 즐거이 구름 끝에 노래 부르고
사슴과 토끼는
한 포기 향기로운 싸릿순을 사양하라.
여기 높으디 높은 산마루
맑은 바람 속에 옷자락을 날리며
내 홀로 서서
무엇을 기다리며 노래하는가.
역사 앞에서, 신구문화사, 1959
산중문답 조지훈
산중문답(山中問答)
ꡒ새벽닭 울 때 들에 나가 일하고
달 비친 개울에 호미 씻고 돌아오는
그 맛을 자네 아능가ꡓ
ꡒ마당가 멍석자리 삽살개도 같이 앉아
저녁을 먹네
아무데나 누워서 드렁드렁 코를 골다가
심심하면 퉁소나 한 가락 부는
그런 멋을 자네가 아능가ꡓ
ꡒ구름 속에 들어가 아내랑 밭을 매면
늙은 아내도 이뻐 뵈네
비 온 뒤 앞개울 고기
아이들 데리고 낚는 맛을
자네 태고(太古)적 살림이라꼬 웃을라능가ꡓ
ꡒ큰일 한다고 고장 버리고 떠나간 사람
잘되어 오는 놈 하나 없데
소원이 뭐가 있능고
해마다 해매다 시절이나 틀림없으라고
비는 것뿐이제ꡓ
ꡒ마음 편케 살 수 있도록
그 사람들 나랏일이나 잘하라꼬 하게
내사 다른 소원 아무것도 없네
자네 이 마음을 아능가ꡓ
노인은 눈을 감고 환하게 웃으며
막걸리 한 잔을 따뤄 주신다.
ꡒ예 이 맛은 알 만합니더ꡓ
청산(靑山) 백운(白雲)아
할말이 없다.
여운, 일조각, 1964
석문 조지훈
석문(石門)&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여기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뭇사람이 조바심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안에는 석벽난간(石壁欄干) 열두 층계 위에 이제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다. 이는 당신의 그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 앞에 어리울 때까지는 천년이 지나도 눈감지 않을 저의 슬픈 영혼의 모습입니다.
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우는 이 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남긴 푸른 도포자락으로 이 눈물을 씻으렵니까.
두 볼은 옛날 그대로 복사꽃빛이지만 한숨에 절로 입술이 푸르러감을 어찌합니까.
몇만 리 굽이치는 강물을 건너와 당신의 따슨 손길이 저의 흰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 그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어두운 밤하늘 허공중천(虛空中天)에 바람처럼 사라지는 저의 옷자락은 눈물어린 눈이 아니고는 보지 못하오리다.
여기 돌문이 있습니다. 원한도 사모칠 양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이 있습니다.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년토록 앉아서 기다리라고 슬픈 비바람에 낡아가는 돌문이 있습니다.
풀잎단장, 창조사, 1952
설조 조지훈
설조(雪朝)
천산(千山)에
눈이 내린 줄을
창 열지 않곤
모를 건가.
수선화
고운 뿌리가
제 먼저
아는 것을――
밤 깊어 등불 가에
자욱히 날아오던
상념의
나비떼들
꿈 속에 그 눈을 맞으며
아득한 벌판을
내 홀로
걸어갔거니
여운, 일조각, 1964
송행 1 조지훈
송행(送行) 1
그대를 보내노니
푸른 산길에
자욱히 꽃잎이
흩날리노라
가고 가면 꽃비 속에
백일(白日)은 지리
날 두고 그대 홀로
떨치고 간 소매가
섧지 않으랴
조지훈시선, 정음사, 1956
승무 조지훈
승무(僧舞)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훠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청록집(靑綠集), 을유문화사, 1946
십자가의 노래 조지훈
십자가(十字架)의 노래
눈물 머금은 듯 내려앉은 잿빛 하늘에
오늘따라 소슬한 바람이 이는데
오랜 괴로움에 아픈 가슴을 누르고
말없이 걸어가는 이 사람을 보라.
뜨겁고 아름다운 눈물이 흩어지는 곳마다
향기로운 꽃나무 새싹이 움트고
멀리 푸른 바다가 솨 하고 울어 오건만
만백성의 괴로움을 홀로 짊어지고
죄없이 십자가에 오르는
이 사람을 보라.
조종(弔鐘)은 잠자고
침묵의 공간에 거미는 줄을 치는데
머리에 피맺힌 형관(荊冠)을 이고
풀어진 사슬 앞 새로 세운 십자가에
못박히는 수난자 이 사람을 보라.
칼과 몽치를 들고 온 무리에게 나를 팔고자
내 뜨거운 가슴에 입맞추던 유다여
스스로의 뉘우침에 목을 매고 울어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닭 울기 전 세 번이나 배반한 베드로여
내려뜨린 검은 머리 창백한 뺨에
불타는 듯 비춰 오는
이 골고다의 저녁 노을을 보라.
이미 정해진 운명 앞에 내가 섰노라
겹겹이 싸여 오는 원수 속에서
이제 다시 죽음도 새로울 리 없노니
망멸(亡滅)할진저 망멸(亡滅)할진저 십자가를 세운 자(者)는 망멸(亡滅)할진저
내 부활하는 날 온몸의 못자욱을 너는 보리라.
언제나 비최는 저 맑은 빛과
어디서나 피는 꽃 내 보람이여!
죽지 않으리 죽지 않으리
천 번을 못박아도 죽지 않으리.
이 절망 같은 언덕에 들려오는 것
바위를 물어뜯고 왈칵 넘치는
해일이여 마지막 물결 소리여!
아아 이 사람을 보라
죄없이 십자가에 오른 나를 보라.
이는 동방의 아들 평화의 왕
눈물과 양심 속에 촛불을 켜고
나를 부르라 다시 오리니
하늘이여 열리라 이 사람을 보라.
――미소공위(美蘇共委)에
역사 앞에서, 신구문화사, 1959
아침 2 조지훈
아침 2
약초밭머리로 흰 달이 기울면
안개 솔솔 풀잎에 내리고
노고지리 우지지다 하늘도 개인다.
떨어지는 구슬 속에
새 울음소리도 들릴 듯이……
여울물 돌 틈으로 돌고
산꿩이 포드득 날아간다.
버드나무 선 우물가엔 물동이 인 순이가 보인다.
`마을에서는 보리밥 뜸지고
된장이 보글보글 끓으리라'
김매던 호미 상긋한 풀섶에 자빠지고
햇살이 다복히 퍼지는 아침 마을이 웃는다.
여운, 일조각, 1964
앵음설법 조지훈
앵음설법(鶯吟說法)
벽에 기대 한나절 조을다 깨면 열어제친 창으로 흰구름 바라기가 무척 좋아라.
노수좌(老首座)는 오늘도 바위에 앉아 두 눈을 감은 채로 염주(念珠)만 센다.
스스로 적멸(寂滅)하는 우주 가운데 먼지 앉은 경(經)이야 펴기 싫어라.
전연(篆煙)이 어리는 골 아지랑이 피노니 떨기나무에 우짖는 꾀꼬리 소리.
이 골 안 꾀꼬리 고운 사투린 범패(梵唄) 소리처럼 낭랑(琅琅)하고나.
벽에 기대 한나절 조을다 깨면 지나는 바람결에 속잎 피는 고목이 무척 좋아라.
풀잎단장, 창조사, 1952
여운 조지훈
여운
물에서 갓 나온 여인(女人)이
옷 입기 전 한때를 잠깐
돌아선 모습
달빛에 젖은 탑(塔)이여!
온몸에 흐르는 윤기는
상긋한 풀내음새라
검푸른 숲 그림자가 흔들릴 때마다
머리채는 부드러운 어깨 위에 출렁인다.
희디 흰 얼굴이 그리워서
조용히 옆으로 다가서면
수줍음에 놀란 그는
흠칫 돌아서서 먼뎃산을 본다.
재빨리 구름을 빠져나온
달이 그 얼굴을 엿보았을까
어디서 보아도 돌아선 모습일 뿐
영원히 얼굴은 보이지 않는
탑(塔)이여!
바로 그때였다 그는
남갑사(藍甲紗) 한 필을 허공에 펼쳐
그냥 온몸에 휘감은 채로
숲속을 향하여
조용히 걸어가고 있었다.
한 층
두 층
발돋음하며 나는
걸어가는 여인(女人)의 그 검푸른
머리칼 너머로
기우는 보름달을
보고 있었다.
아련한 몸매에는 바람 소리가
잔잔한 물살처럼
감기고 있었다.
여운, 일조각, 1964
여인 조지훈
여인
그대의 함함이 빗은 머리결에는
새빨간 동백꽃이 핀다.
그대의 파르란 옷자락에는
상깃한 풀 내음새가 난다.
바람이 부는 것은 그대의 머리칼과
옷고름을 가벼이 날리기 위함이라
그대가 고요히 걸어가는 곳엔
바람도 아리따웁다.
여운, 일조각, 1964
역사 앞에서 조지훈
역사(歷史) 앞에서
만신(滿身)에 피를 입어 높은 언덕에
내 홀로 무슨 노래를 부른다
언제나 찬란히 틔어 올 새로운 하늘을 위해
패자(敗者)의 영광이여 내게 있으라.
나조차 뜻 모를 나의 노래를
허공에 못박힌 듯 서서 부른다.
오기 전 기다리고 온 뒤에도 기다릴
영원한 나의 보람이여
묘막(渺漠)한 우주에 고요히 울려 가는 설움이 되라.
역사 앞에서, 신구문화사, 1959
염원 조지훈
염원(念願)
아무리 깨어지고 부서진들 하나 모래알이야 되지 않겠습니까. 석탑을 어루만질 때 손끝에 묻는 그 가루같이 슬프게 보드라운 가루가 되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촛불처럼 불길에 녹은 가슴이 굳어서 바위가 되던 날 우리는 그 차운 비바람에 떨어져 나온 분신이올시다. 우주의 한 알 모래 자꾸 작아져도 나는 끝내 그의 모습이올시다.
고향은 없습니다. 기다리는 임이 있습니다. 지극한 소망에 불이 붙어 이 몸이 영영 사라져 버리는 날이래도 임은 언제나 만나 뵈올 날이 있어야 하옵니다. 이렇게 거리에 바려져 있는 것도 임의 소식을 아는 이의 발밑에라도 밟히고 싶은 뜻이옵니다.
나는 자꾸 작아지옵니다. 커다란 바윗덩이가 꽃잎으로 바람에 날리는 날을 보십시오. 저 푸른 하늘가에 피어 있는 꽃잎들도 몇 만년(萬年)을 닦아온 조약돌의 화신이올시다. 이렇게 내가 아무렇게나 바려져 있는 것도 스스로 움직이는 생명이 되고자 함이올시다.
출렁이는 파도 속에 감기는 바위 내 어머니 품에 안겨 내 태초의 모습을 환상하는 조개가 되겠습니다. 아― 나는 조약돌 나는 꽃이팔 그리고 또 나는 꽃조개.
조지훈시선, 정음사, 1956
영 조지훈
영(嶺)&
흰구름에 싸여 십리길 높은 고개를 넘어서면 마을로 가는 작은 길가에 보리밭이 바람에 흔들린다. 내가 고개로 넘어오던 날은 마을에 삽살개 짖고 망아지 송아지 염소 모두 달아나고 멧새 비둘기도 날아가더니 사흘도 못 가 나는 잔디밭에서 그들과 벗을 한다. 내가 알던 동무 같이 자란 계집애는 돈 벌러 달아나고 먼 마을로 시집가고 마슬의 어린애야 누구 아들인지 알 리 있나. 내가 떠날 때 망아지 송아지 염소가 서러웁다 하면 영(嶺) 너머 가기 어려우리만……내가 간 뒤에는 면서기가 새하얀 여름 모자를 쓰고 산밑 주막에서 구장(區長)과 막걸리를 마실 게고 나는 서울 가는 기차 속에서 고향을 잃은 슬픔에 차창에 기대어 눈을 감을 것이니 이 영(嶺)을 넘는 날 나에게는 낡은 트렁크와 흰구름밖에는 아무도 따라오질 않으리라.
조지훈시선, 정음사, 1956
영상 조지훈
영상(影像)
이 어둔 밤을 나의 창가에 가만히 붙어 서서
방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은 누군가.
아무 말이 없이 다만 가슴을 찌르는 두 눈초리만으로
나를 지키는 사람은 누군가.
만상(萬象)이 깨어 있는 칠흑의 밤 감출 수 없는
나의 비밀들이 파란 인광(燐光)으로 깜박이는데
내 불안에 질리워 땀 흘리는 수많은 밤을
종시 창가에 붙어 서서 지켜보고만 있는 사람
아 누군가 이렇게 밤마다 나를 지키다가도
내 스스로 죄의 사념을 모조리 살육하는 새벽에――
가슴 열어제치듯 창문을 열면 그때사 저
박명(薄明)의 어둠 속을 쓸쓸히 사라지는 그 사람은 누군가.
조지훈시선, 정음사, 1956
완화삼 조지훈
완화삼(玩花衫)
차운 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리(七百里)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청록집(靑綠集), 을유문화사, 1946
월광곡 조지훈
월광곡(月光曲)
작은 나이프가 달빛을 빨아들인다. 달빛은 사과 익은 향기가 난다. 나이프로 사과를 쪼갠다. 사과 속에서도 달이 솟아오른다.
달빛이 묻은 사과를 빤다. 소녀가 사랑을 생각한다. 흰 침의(寢衣)를 갈아입는다. 소녀의 가슴에 달빛이 내려앉는다.
소녀는 두 손을 모은다. 달빛이 간즈럽다. 머리맡의 시집(詩集)을 뽑아 젖가슴을 덮는다. 사과를 먹고 나서 `이브'는 부끄러운 곳을 가리웠다는데…… 시집 속에서 사과 익는 향기가 풍겨온다.
달이 창을 열고 나간다.
시계가 두시를 친다. 성당 지붕 위 십자가에 달이 걸려서 처형된다. 낙엽 소리가 멀어진다. 소녀의 눈이 감긴다.
달은 허공에 떠오르는 구원(久遠)한 원광(圓光) 그리운 사람의 모습이 달이 되어 부활한다. 부끄러운 곳을 가리지 못하도록 두 팔을 잘리운 `미로의 비너스'를 생각한다. 머리칼 하나 만지지 않고 떠나간 옛 사람을 생각한다.
소녀의 꿈 속에 달빛이 스며든다. 소녀의 심장이 달을 잉태한다. 소녀의 잠든 육체에서 달빛이 퍼져 나간다. 소녀는 꿈 속에서도 기도한다.
조지훈시선, 정음사, 1956
율객 조지훈
율객(律客)
보리 이삭 밀 이삭
물결치는 이랑 사이
고요한 외줄기 들길 위으로
한낮 겨운 하늘 아래 구름에 싸여
외로운 나그네가 흘러가느니.
우피(牛皮) 쌈지며 대모(玳瑁)안경집이랑
허리끈에 느즉히 매어 두고
간밤 비바람에
그물모시 두루막도 풀이 죽어서
때묻은 버선이랑 곰방대 함께
가벼이 어깨에 둘러메고
서낭당 구슬픈 돌더미 아래
여울물 흐느끼는 바위 가까이
지친 다리 쉬일 젠 두 눈을 감고
귀히 지닌 해금(奚琴)의 줄을 혀느니.
노닥노닥 기워진
흰 조고리 당홍치마
맨발 벗고 따라오던 막내딸년도
오리목(木) 늘어선 산골에다 묻고 왔노라.
솔나무 잣나무 우거진 높은 고개
아스라이 휘도는 길 해가 저물어
사늘한 바람결에 흰 수염을 날리며
서러운 나그네가 홀로 가느니.
청록집(靑綠集), 을유문화사, 1946
잠언 조지훈
잠언(箴言)
너희 그 착하디 착한 마음을 짓밟는
불의(不義)한 권력에 저항하라.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는 세상에
그것을 그런 양하려는
너희 그 더러운 마음을 고발하라.
보리를 콩이라고 짐짓 눈감으려는
너희 그 거짓 초연한 마음을 침 뱉으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둥근 돌은 굴러서 떨어지느니――
병든 세월에 포용되지 말고
너희 양심을 끝까지
소인(小人)의 칼날 앞에 겨누라.
먼저 너 자신의 더러운 마음에 저항하라.
사특한 마음을 고발하라.
그리고 통곡하라.
역사 앞에서, 신구문화사, 1959
절정 조지훈
절정(絶頂)&
나는 어느새 천길 낭떠러지에 서 있었다. 이 벼랑 끝에 구름 속에 또 그리고 하늘가에 이름 모를 꽃 한 송이는 누가 피워 두었나 흐르는 물결이 바위에 부딪칠 때 튀어오르는 물방울처럼 이내 공중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 그런 꽃잎이 아니었다.
몇만 년을 울고 새운 별빛이기에 여기 한 송이 꽃으로 피단 말가 죄 지은 사람의 가슴에 솟아오르는 샘물이 눈가에 어리었다간 그만 불붙는 심장으로 염통 속으로 스며들어 작은 그늘을 이루듯이 이 작은 꽃잎에 이렇게도 크낙한 그늘이 있을 줄은 몰랐다.
한 점 그늘에 온 우주가 덮인다. 잠자는 우주가 나의 한 방울 핏속에 안긴다 바람도 없는 곳에 꽃잎은 바람을 일으킨다 바람을 부르는 것은 날 오라 손짓하는 것 아 여기 먼 곳에서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 보이지 않는 꽃나무 가지에 심장이 찔린다는 무슨 야수의 체취와도 같이 전율할 향기가 옮겨 온다.
나는 슬기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한 송이 꽃에 영원을 찾는다 나는 또 철모르는 어린애도 아니었다 영원한 환상을 위하여 절정의 꽃잎에 입맞추고 길이 잠들어버릴 자유를 포기한다.
다시 산길을 내려온다 조약돌은 모두 태양을 호흡하기 위하여 비수처럼 빛나는데 내가 산길을 오를 때 쉬어가던 주막에는 옛 주인이 그대로 살고 있었다 이마에 주름살이 몇 개 더 늘었을 뿐이었다 울타리에 복사꽃만 구름같이 피어 있었다 청댓잎 잎새마다 새로운 피가 돌아 산새는 그저 울고만 있었다.
문득 한 마리 흰나비! 나비! 나비! 나를 잡지 말아다오 나의 인생은 나비 날개의 가루처럼 가루와 함께 절명(絶命)하기에――아 눈물에 젖은 한 마리 흰나비는 무엇이냐 절정의 꽃잎을 가슴에 물들이고 사(邪)된 마음이 없이 죄 지은 참회에 내가 고요히 웃고 있었다.
풀잎단장, 창조사, 1952
종소리 조지훈
종소리&
바람 속에서 종이 운다. 아니 머리 속에서 누가 종을 친다.
낙엽이 흩날린다. 꽃조개가 모래밭에 딩군다. 사람과 새짐승과 푸나무가 서로 목숨을 바꾸는 저자가 선다.
사나이가 배꼽을 내놓고 앉아 칼자루에 무슨 꿈을 조각한다. 계집의 징그러운 나체가 나뭇가지를 기어오른다. 혓바닥이 날름거린다. 꽃같이 웃는다.
극장도 관중도 없는데 두개골 안에는 처참한 비극이 무시로 상연된다. 붉은 욕정이 겨룬다. 검은 살육이 찌른다. 노오란 운명이 덮는다. 천둥 벽력이 친다.
아―.
그 원시의 비극의 막을 올리라고 숨어 앉아 몰래 징을 울리는 자는 대체 누구냐.
울지 말아라 울리지 말아라 깊은 밤에 구슬픈 징소리. 아니 백주 대낮에 눈먼 종소리.
조지훈시선, 정음사, 1956
지옥기 조지훈
지옥기(地獄記)
여기는 그저 짙은 오렌지빛 하나로만 물든 곳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사람 사는 땅 위의 그 황혼과도 같은 빛깔이라고 믿으면 좋습니다. 무슨 머언 생각에 잠기게 하는 그런 숨막히는 하늘에 새로 오는 사람만이 기다려지는 곳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여기에도 태양은 있습니다. 태양은 검은 태양, 빛을 위해서가 아니라 차라리 어둠을 위해서 있습니다. 죽어서 낙엽처럼 떨어지는 생명도 이 하늘에 이르러서는 눈부신 빛을 뿌리는 것, 허나 그것은 유성과 같이 이내 스러지고 마는 빛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이곳에 오는 생명은 모두 다 파초잎같이 커다란 잎새 위에 잠이 드는 한 마리 새올습니다. 머리를 비틀어 날개쭉지 속에 박고 눈을 치올려 감은 채로 고요히 잠이 든 새올습니다. 모든 세포가 다 죽고도 기도를 위해 남아 있는 한 가닥 혈관만이 가슴속에 촛불을 켠다고 믿으십시오.
여기에도 검은 꽃은 없습니다. 검은 태양빛 땅 위에 오렌지 하늘빛 해바라기만이 피어 있습니다. 스스로의 기도를 못 가지면 이 하늘에는 한 송이 꽃도 보이지 않는다고 믿으십시오.
아는 것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첫사랑이 없으면 구원의 길이 막힙니다. 누구든지 올 수는 있어도 마음대로 갈 수는 없는 곳, 여기엔 다만 오렌지빛 하늘을 우러르며 그리운 사람을 기다리는 기도만이 있어야 합니다.
조지훈시선, 정음사, 1956
창 조지훈
창(窓)&
강냉이 수숫대 자란
푸른 밭을 뜰로 삼고
구름이 와서 자다
흘러가고……
가고 가면 무덤에
이른다는 오솔길이
비둘기 우는 밭머리에
닿았습니다.
외로이 스러지는 생명(生命)의
모든 그림자와
등을 마주 대고 돌아앉아
말없이 우는 곳
지대(至大)한 공간을 막고
다시 무한에 통하나니
내 여기 기대어
깊은 밤 빛나는 별이나
이른 아침
떨리는 꽃잎과 얘기하여라.
풀잎단장, 창조사, 1952
첫 기도 조지훈
첫 기도
이 장벽을 무너뜨려 주십시오 하늘이여
그리운 이의 모습 그리운 사람의 손길을 막고 있는
이 저주받은 장벽을 무너뜨려 주십시오.
무참히 스러진 선의의 인간들
그들의 푸른 한숨 속에 이끼가 앉아 있는 장벽을
당신의 손으로 하루아침에 허물어 주십시오.
다만 하나이고저――둘이 될 수 없는 국토를
아픈 배 부벼 주시는 약손같이 그렇게 자애롭게
쓸어 주십시오.
이 가슴에서 저 가슴에로 종소리처럼 울려나가는
우리의 원(願)이 올해사――
모조리 터져 불 붙고, 재가 되어도 이 장벽을 열어 주십시오.
빛을 주십시오. 황소처럼 터지는 울음을 주십시오. 하늘이여――
역사 앞에서, 신구문화사, 1959
청마우거유감 조지훈
청마우거유감(靑馬寓居有感)
경인동란(庚寅動亂)에 통영이 적군에 점령되자 청마(靑馬)는 부산(釜山) 복악산(伏兵山) 하(下)에 우거해 있더니라. 삼면이 포위된 대구에 같이 있다가 발병한 미당(未堂)이 여기 와서 정양하고 있었으니 때는 9․28직전이라 내 잠시 여기를 찾아와 셋이 함께 몇 날을 보냈더니라.
찌그러진 등의자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노라면
가을은 어느덧 등뒤에 와서
어깨 위에 두 손을 얹는다.
바둑이가 밟고 오는 잎새 소리에
문득 그리운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낙엽이 뿌리로 돌아가듯이
내가 잠시 죽음 앞에 눈을 뜨고 있기 때문.
감나무잎아
네 인정 있거든 더디 붉어라.
청령장 지붕 위엔
비행기만 어즈럽다.
역사 앞에서, 신구문화사, 1959
추일단장 조지훈
추일단장(秋日斷章)
□ 1
갑자기
산봉우리가 치솟기에
창을 열고
고개를 든다.
깎아지른 돌벼랑이사
사철 한 모양
구름도 한 오리 없는
낙목한천(落木寒天)을
무어라 한나절
넋을 잃노.
□ 2
마당 가장귀에
얇은 햇살이 내려앉을 때
장독대 위에
마른 바람이 맴돌 때
부엌 바닥에
북어 한 마리
마루 끝에
마시다 둔 술 한잔
뜰에 내려 영영(營營)히
일하는 개미를 보다가
돌아와 먼지 앉은
고서(古書)를 읽다가……
□ 3
장미의 가지를
자르고
파초를 캐어 놓고
젊은 날의 안타까운
사랑과
소낙비처럼
스쳐간
격정의 세월을
잊어버리자.
가지 끝에 매어달린
붉은 감 하나
성숙의 보람에는
눈발이 묻어 온다.
팔짱 끼고
귀기울이는
개울
물소리.
여운, 일조각, 1964
파초우 조지훈
파초우(芭蕉雨)
외로이 흘러간 한 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성긴 빗방울
파초잎에 후두기는 저녁 어스름
창 열고 푸른 산과
마주앉아라.
들어도 싫지 않는 물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온 아침 나의 꿈을 스쳐간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청록집(靑綠集), 을유문화사, 1946
풀밭에서 조지훈
풀밭에서&
바람이 부는 벌판을 간다. 흔들리는 내가 없으면 바람은 소리조차 지니지 않는다. 머리칼과 옷고름을 날리며 바람이 웃는다. 의심할 수 없는 나의 영혼이 나직히 바람이 되어 흐르는 소리.
어디를 가도 새로운 풀잎이 고개를 든다. 땅을 밟지 않곤 나는 바람처럼 갈 수가 없다. 조약돌을 집어 바람 속에 던진다. 이내 떨어진다. 가고는 다시 오지 않는 그리운 사람을 기다리기에 나는 영영 사라지지 않는다.
차라리 풀밭에 쓰러진다. 던져도 하늘에 오를 수 없는 조약돌처럼 사랑에는 뉘우침이 없다. 내 지은 죄는 끝내 내가 지리라. 아 그리움 하나만으로 내 영혼이 바람 속에 간다.
풀잎단장, 창조사, 1952
풀잎 단장 조지훈
풀잎 단장(斷章)
무너진 성터 아래 오랜 세월을 풍설(風雪)에 깎여 온 바위가 있다.
아득히 손짓하며 구름이 떠 가는 언덕에 말없이 올라서서
한 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풀잎을 바라보며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아 우리들 태초의 생명의 아름다운 분신으로 여기 태어나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히 웃으며 얘기하노니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곳에 그윽히 피어오르는 한 떨기 영혼이여.
풀잎단장, 창조사, 1952
피리를 불면 조지훈
피리를 불면
다락에 올라서
피리를 불면
만리(萬里) 구름길에
학이 운다
이슬에 함초롬
젖은 풀잎
달빛도 푸른 채로
산을 넘는데
물 위에 바람이
흐르듯이
내 가슴에 넘치는
차고 흰 구름.
다락에 기대어
피리를 불면
꽃비 꽃바람이
눈물에 어리어
바라뵈는 자하산(紫霞山)
열두 봉우리
싸리나무 새순 뜯는
사슴도 운다.
청록집(靑綠集), 을유문화사, 1946
향문 조지훈
향문(香紋)
성터 거닐다 주워 온 깨진 질그릇 하나
닦고 고이 닦아 열 오른 두 볼에 대어 보다.
아무렇지도 않은 곳에 무르녹는 옛 향기라
질항아리에 곱게 그린 구름무늬가
금시라도 하늘로 피어날 듯 아른하다.
눈감고 나래 펴는 향그러운 마음에
머언 그 옛날 할아버지 흰 수염이
아주까리 등불에 비치어 자애롭다.
꽃밭에 놓고 이슬 받아 책상에 올리면
그밤 내 베갯머리에 옛날을 보리니
옛날을 봐도 내사 울지 않으련다.
풀잎단장, 창조사, 1952
호수 조지훈
호수(湖水)&
장독대 위로 흰 달 솟고
새빨간 봉선화 이우는 밤
작은 호수로 가는 길에
호이 호이 휘파람 날려 보다
머리칼 하얀 옷고름
바람이 가져가고
사슴이처럼 향긋한
그림자 따라
산밑 주막에서
막걸리를 마신다
조지훈시선, 정음사, 1956
화체개현 조지훈
화체개현(花體開顯)
실눈을 뜨고 벽에 기대인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짧은 여름밤은 촛불 한 자루도 못다 녹인 채 사라지기 때문에 섬돌 위에 문득 석류꽃이 터진다
꽃망울 속에 새로운 우주가 열리는 파동(波動)! 아 여기 태고(太古)적 바다의 소리 없는 물보래가 꽃잎을 적신다
방안 하나 가득 석류꽃이 물들어 온다 내가 석류꽃 속으로 들어가 앉는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조지훈시선, 정음사, 1956
흙을 만지며 조지훈
흙을 만지며
여기 피비린 옥루(玉樓)를 헐고
따사한 햇살에 익어 가는
초가삼간(草家三間)을 나는 짓자.
없는 것 두고는 모두 다 있는 곳에
어쩌면 이 많은 외로움이 그물을 치나.
허공에 박힌 화살을 뽑아
한 자루 호미를 벼루어 보자.
풍기는 흙냄새에 귀기울이면
뉘우침의 눈물에서 꽃이 피누나.
마지막 돌아갈 이 한 줌 흙을
스며서 흐르는 산골 물소리.
여기 가난한 초가를 짓고
푸른 하늘이 사철 넘치는
한 그루 나무를 나는 심자.
있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
어쩌면 이 많은 사랑이 그물을 치나.
풀잎단장, 창조사, 1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