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문진 / 조온윤
찬 바람이 책장을 넘기네
열린 창으로 네가 바깥을 보고 있었어
나보다 몇 배는 키가 커서 난간에 팔을 걸친 채로
무의미하게 영혼을 한 모금씩 소모하듯
날숨을 허공으로 흘려보내고 있었어
네가 무엇을 보는지 궁금해서 너의 다리 사이로
창살 사이로 머리를 집어넣었어
맞은편 아파트 동의 불 꺼진 복도들만 보였지
읽을 수 없게끔 검정으로 죽죽 그어버린 줄글처럼
실은 네 눈이 아무 것도 담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았어
그때 너는 네 몸에 비해 지나치게 가벼워 보였어
너덜거리는 너의 영혼이 허공으로 날아갈까 봐
나는 목놓아 울었어
이봐, 나를 보라고
치렁치렁한 외투와 모자를 벗어 조그만 못에 걸어놓듯
필요하다면 이 작은 내게로 시선을 걸쳐두라고
슬픔의 냄새가 밴 품이 썩 편안하지만은 않지만
아무렴 어때?
네가 몸을 돌려 이윽고 나를 내려다보았을 때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눈높이까지 나를 들어 올렸을 때
내가 너의 누름돌이라는 걸 알았어
너는 홀연 날아가지 않기 위해 나를 데려왔구나
매일 밥을 먹으며 튼튼하고 무거운 몸을 가지자
그리고 언젠가 눈높이만큼 자란 내가 창가에 다가가
네 어깨를 지긋이 누른다면
나눠줄 수 있겠니?
내가 읽는 책에 어떤 절망이 쓰여 있는지
내가 있는 세상에 어떤 절망이 휘날리고 있는지
우리는 우리가 끝나지 않는 장면을 펼쳐두자
귀퉁이에 가만히 손가락을 얹고
같은 쪽을 오래도록 바라보자
≪조온윤 시인≫
201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으로『햇볕 쬐기』가 있다.
며칠 전 주민 센터에서 독거의 안부를 물었다. 나는 잘 지내고 있으니 염려 말라고, 이 다음에 도움을 달라며 전화를 끊었다. 그것은 고마운 동시에 뒷맛이 씁쓸한 안부였다. 먼 훗날 그 전화를 간절히 기다리는 날이 내게도 올 것이다.
시에서“너”의 반려동물인“나”는“너”를 걱정하며 지켜보고 있다. 기특한 동물이다. 나는 강아지나 고양이와 함께 살지 않지만, 가끔 강아지나 고양이는 하루 종일 무슨 생각을 하고 놀까? 공부도 하지 않고 유튜브도 보지 않고 먹방도 음악도 없이 그들의 하루는 얼마나 심심하고 따분할까?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그들의 눈에 인간은 어떻게 비춰질까? 세상 진지한 얼굴로 별 거 아닌 삶을 별 거인양 살아내고자, 심각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 내 꼬락서니를 보고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그들은 침묵한다. 침묵은 침묵 자체로서 말을 한다. 그들은 도통한 큰스님 같기도 하다. 내려놓으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을 사람이든 물건이든 명예든 무엇이 되었든 가지고 싶어서, 더 많이, 더 자주 가지고 싶어서, 욕망의 아가리를 다물지 못하는 나를 그들은 가만히 지켜본다. 가소로워서일 것이다. 그들은 알고 있다. 그들은 말하고 싶을 것이다. 때가 되어 어리석음을 알아채고 한탄하지 말고, 느긋한 마음으로 네 길을 가라. 고 일갈하고 싶을 것이다. 온갖 소란스러운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라고, 때가 되어 가장 많이 소유한 자가 가장 많이 잃을 것이라고, 흔들림 없이 적막한 네 길을 가라. 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들은 침묵으로 말하고 있다. 침묵이야말로 가장 큰 말인 셈이다. 침묵 속에서 온갖 꽃들이 피어난다. 화엄은 침묵에 있고 행동하지 않음에 있다.
우리들은 반려동물을 씻기고 입히고 보살피며 먹여 살리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큰스님처럼 겸허하고 우주처럼 넓고 깊은 말을 감추고 있는 반려동물인 “나”가 “너”를 돌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소로운 듯 보살핌을 당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너는 홀연 날아가지 않기 위해 나를 데려왔구나 매일 밥을 먹으며 튼튼하고 무거운 몸을 가지자”
날아갈 듯 가벼운 우리들 삶의“누름돌”이 되어주는“너”에게 고백할 일이다. “내가 읽는 책에 어떤 절망이 쓰여 있는지/ 내가 있는 세상에 어떤 절망이 휘날리고 있는지”, 소복소복 내리는 눈처럼 한 줄 한 줄 고백할 일이다. (홍수연)
* 우리에게는 나를 돌봐줄 문진,‘생각하는 문진’, 그 반려사물(반려동물)의 온기가 절실하다. - 오연경 교수
< 조온윤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