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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とはなにか
(역사란 무엇인가)
筆花 黃 晋 燮 (飜譯家)
岡田 英弘(오카다 히데히로)
1931. 도쿄태생, 전공은 중국사,
만주사, 몽골사, 일본고대사,
53‘도쿄대학문학부 동양사학과 졸업
57‘『만문노당(滿文老檔)』의 연구로
일본학사원상 수상, 도쿄외국어대학
아시아⦁아프리카 언어문화연구소를
거쳐 현재 도쿄외국어대학 명예교수,
저서
『倭國』(中公新書), 『倭國의 時代』
(朝日文庫), 『진 키스 ⦁칸』(同)
『세계사의 탄생』(치쿠마 문고)
『일본사의 탄생』(弓立社)
『妻도 적이다』(자 마사다)
『中國 意外史』(新書館) 등
文春新書
155
목 차
(큰 채프터)
第一部 역사가 있는 문명, 역사가 없는 문명
역사의 정의
역사가 없는 문명의 예
중국문명이란 무엇인가
지중해문명이란 무엇인가
일본문명의 성립경위
第二部 일본사는 어떻게 만들어 졌는가
신화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魏志倭人傳」의 고대와 현대
이웃나라와 역사를 공유하는 어려움
第三部 현대사의 포착방법
시대구분은 2가지
고대사 속의 단락
국민국가란 무엇인가
결어
누가 역사를 쓰는가
第一部 역사가 있는 문명, 역사가 없는 문명
역사의 정의
역사는, 인간이 사는 세계의 설명이다.
시간과 공간에 따라, 한 개인의 체험을 넘어서 파악하는 것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라고 하면, 우리들은 누구든지, 무엇인가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사실이라고 대답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고 끝내지 않고 한걸음 더 들어가, 그러면 「과거에 있었던 사실」이라는 것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게 되면, 이것이 좀처럼 간단히 결말나지 않는다. 사람에 따라 의견이나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과거의 사실은 이러했다, 아니, 그렇지는 않았다고, 언쟁이 되기 쉽다.
요컨대, 무엇이 역사인가 하는 것은, 무엇을 역사로 인식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역사가 손에 잡혀서 볼 수 있는 것이라면, 역사에 대하여, 여러 가지 다른 의견이나 논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무엇이 역사라고 하는 것인가, 왜 좀처럼 간단히 결말을 낼 수 없는가, 그 이유를 생각해 본다. 이유는 몇 가지나 된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역사가, 공간과 동시에 시간에도 관계된다는, 그 성질이다.
공간은, 우리가 육신을 사용하여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두 손과 두 발을 뻗어서 커버할 수 있는 범위의 공간은 알았던 것이라도, 양쪽 다리를 써서 걸어서 이동하면, 훨씬 멀리까지 커버할 수 있다. 가보아서 확인할 수가 있다.
그러나 시간에 있어서는 그렇게는 되지 않는다. 옛날 시간에 잠간 가서, 보고, 다시 돌아올 수는 없다. 공간과 시간은 이 점이 다르다. 이 다른 점이 역사라는 것의 성질을 결정하는, 근본적인 요소이다.
「옛날에는 이랬다」고 생각하고, 주장하는 것은, 그렇게 말하는 개인의 체험에 근거를 두고 있다. 공간과 시간이 공통적인 곳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도, 그것을 말하는 사람이, 어떤 생애를 살아왔는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인식을 갖는다. 이와 같이 엇갈리는 점은, 우리들의 신변에도,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전혀 같은 시대에 대하여 「그것은 좋은 시대였다」 고 하는 사람도 있고, 「암흑적인 나쁜 시대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것은 말하는 사람의 개인적인 사정에 따라, 단순히 받아들이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으로, 묵과하기 십상이지만, 실은 역사에 대하여, 무엇인가 중대한 것을 암시하고 있다. 개인의 경험에만 의지하여, 그 안쪽에서 역사를 말하려고 해도, 그것은 역사가 되지 않는다. 역사에는 그럭저럭 「개인이 체험할 수 있는 범위를 넘는 것을 말 한다」는 성질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의 생각으로 역사를 정의해 보면,
「역사란, 인간이 사는 세계를 시간과 공간의 양쪽 축(軸)에 따라서, 그것도 한 개인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범위를 넘는 척도로, 파악하며, 해석하고, 이해하며, 설명하고, 서술하는 작업이다」(岡田英弘OKADA HIDEHIRO『세계사의 탄생』치쿠마 문고 32쪽)
라고 정의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한 개인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범위」라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를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의미가 없어진다. 요컨대 역사의 본질은 인식이며, 그것도 개인의 범위를 넘는 인식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역사는 인간이 사는 세계에 관계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인간이 없는 곳에 역사는 있을 수 없다. 「인류발생 이전의 지구의 역사」라든가, 「은하계가 생기기까지의 우주의 역사」라든가 하는 것은, 지구나 우주를 인간에 비교해서, 인간이라면 역사에 해당할 것이라는 것을, 비유해서 「역사」라고 부를 뿐으로, 이런 것은 본래의 역사가 아니다. (‘20.1.2譯)
②
인간은, 시간을 직접 인식할 수 없다.
1일, 1월, 1년, 1년을 넘어.... 무엇을 기준으로 시간을 가늠 하는가
역사를 생각하면 금방 부딪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시간을 어떻게 인식할까 하는 문제다. 공간 쪽은, 시각(視覺))을 통해서 상당한 정도 커버할 수 있기 때문에, 문제가 적지만, 시간의 측면은 인간이 직접 인식할 수가 없다.
이것은, 우리들이 일상으로 경험하는 것이지만, 얼마 전 무엇인가 있었다, 라는 것은 생각하고 있어도, 그것이 이틀 전의 일이었었는지, 사흘 전의 일이었는지, 1주간 전의 일이었는지, 1개월 전의 일이었는지, 아니면 지난해의 일이었는지, 그렇게 되면 극히 막연한 기억밖에 없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은 왜 그런가 하면, 시간에는 눈금이 없다는, 시간의 본질에서 오는 것이다. 시간이라고 하면 무엇인가 알 듯 한 마음이 들어도, 실은 붙잡을 곳이 없는 것이 시간이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경과했다는, 시간의 길이를 직접 잴 수 있는 기준이 도대체 없다. 인간의 감각에는, 당초에 시간을 재는 기능은 구비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다만 한가지 밖에 방법이 없다. 그것은, 공간을 일정한 속도로 운동하고 있는 물체를 보고, 그 진행하는 거리를 시간의 길이로 옮겨놓는 방법이다. 대체로 「시간의 길이」 라는 말 자체가, 시간을 공간에 바꿔놓은 표현이다.
그, 시간을 공간에 바꿔놓는 방법으로 가장 좋은 것은, 무엇인가 주기운동을 하고 있는 물체를 이용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팔에 매고 있는 손목시계다. 손목시계 침이 한 바퀴 도는 시간의 길이는 언제나 같다고 가정하고, 그것으로 시간을 구획 지워, 눈금을 대신하게 한다. 그 길이가 같은지 어떤지는 우리들에게 실증할 방법이 없지만, 같다고 생각하기로 한다는 뜻이다.
손목시계 침의 운동의 원형은, 천체의 운동이다. 지구가 지구축의 둘레를 한 바퀴 자전하는 공간 중의 운동을 「1눈」으로 해서, 그 사이에 지구가 운동하는 거리의 길이를 시간의 길이로 바꾸어 시간의 기본 단위로 한다는 데서, 시간의 측정이 시작되었다. 나아가 달이 지구의 둘레를 도는 공전 1회전을 「1月(한달)」이라고 부르고, 이것을 1日(하루)보다 긴 시간의 눈금으로 한다. 나아가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도는 공전 1회전을 「1年(한해)」이라고 하고, 이것을 한 달 보다 긴 시간의 눈금으로 한다. 전 세계의 인류는, 대체로 이 3가지 단위를 써서 시간에 눈금을 붙이고, 시간의 길이를 가늠해 왔다. 지구의 자전, 달의 공전, 지구의 공전, 이 3기지 이외에는 손쉽고 빠르게 시간의 경과를 대중할 기준이 되는 주기운동은 없기 때문에, 일, 월, 년이 보편적으로 시간의 단위가 되었다.
거기까지는 좋다. 그 다음에 중대한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인간의 일생 사이클은, 대체로 1년보다 길다. 1년 보다 긴 시간을 구획 짓는 방법은, 자연계에는 간단히 발견되지 않는다. 고작 「태어난 해부터 몇 년」이라고 헤아리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시간을 구획 짓는 방법으로서는 보편성이 없다. 태어난 해는 개인마다 각기 다르고, 사망할 때까지의 길이도 개인에 따라서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의 범위를 초월하는 시간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일어난다.
대저 시간이라는 것은, 빅뱅(Big Bang)으로 우주가 생겨났을 때, 공간과 함께 생겨난 것이라고 하지만, 적어도 인간이 경험으로 알고 있는 한도의 세계에서는, 시간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이것이 최초의 년, 최초의 월, 최초의 일이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거기서부터 가르쳐 주면 「몇 번째의 년」이 되고, 「몇 번째의 월」이 되고, 「몇 번째의 일」이 된다고 할 수 있는, 알기 쉬운 표준이 되는 시점은, 자연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많은 인간이 모여서, 어떤 시점으로부터 헤아려 나가기로 할까 협정하지만, 누구에겐가 에게 적당히 정하도록 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결정이 「크로놀러지(Chronology/年代)」라는 것이다.
시간이라는 것은, 그렇게, 극히 인공적으로 잴 수밖에 없다. 자연계에, 절대적인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때문에, 시계라든지 달력 같은 것이 없는 사회에서는, 시간의 경과를 정하는 것은 인간의 기분에 따른다. 사람이 「지금이다」라고 생각할 때가 「그때」라는 것이, 그런 사회에서의 시간의 감각이다.
이런 시간의 감각은, 절대적인 시간이라든가, 시각이 라든가에 옮겨놓을 수가 없다. 그것이 인간본래의, 시간의 자연스러운 느낌의 방법이다.
예를 들면, 지금도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 애버리지니(Aborigine) 사회에서는, 축제의 시작시각이, 밤이라는 정도는 정해져 있으나, 정확하게 몇 시에 시작 한다는 것과 같은 것은, 누구도 합의하지 않는다. 축제가 열리는 장소에 모여서 왁자지껄 하는 동안에 왠지 모르게 모두가 기분이 고양되고, 이제 슬슬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때가 시작시간이 되어, 축제가 시작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물며, 일기도 쓰지 않는 시대에는, 자기가 몇 살인지도 알 수도 없으며, 생일을 알고 있는 사람도 거의 없다. 동아시아에서 생일에 대한 관념이 발생한 것은, 기록되어 있는 한에서는, 唐나라의 玄宗皇帝가 729년, 자기가 태어난 날을 축하해 「千秋節」이라고 부른 것이 처음이었고, 748년에는 「天長節」이라고 개칭하였다. 그 이전에는, 탄생일을 의식하는 일은 전혀 없었던 것 같다.
우리들 현대인의 감각으로서는, 시간이라는 것은, 무한의 과거부터 시작되었고, 바른 규칙으로 째깍째깍 같은 보조로 현재를 향해 진행해 왔으며, 현재부터는, 무한의 미래를 향해, 째깍째깍 같은 보조로 일직선으로 진행해 가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와 같은 시간의 감각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고, 문명이 만들어낸 것이다. 내일이라는 날이 올지 오지 않을지는 정말로 아무도 모른다. 그 같은 시간의 감각이 자연이다. 그런 이유로 인간에게 있어서는, 시간은 다루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 다루기 어려운 시간이 닥아 오는 것이 역사인 것이다. (‘20.1.5譯)
③
역사가 성립되는 4가지 요소
직진하는 시간의 관념, 시간을 관리하는 기술, 문자, 인과율(因果律) 의 관념
역사는, 처음에 말한바와 같이, 세계를 공간만을 따라서 보는 것이 아니고, 시간에 따라서도 보는 것이다. 그 시간을 어떻게 인식하는가는, 인간 집단마다 매우 다르다.
지난해 일이라도, 3년 전의 일이라도, 100년 전 일이라도, 단지 「옛날」이라고 할 뿐 구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오늘 오전에 일어난 사건과, 오후에 일어난 사건의 시간차를 문제로 해서, 구별하는 사람들도 있다. 시간의 인식에 관한 방법은 문화인 것이다.
시간의 관념은 문화이기 때문에, 문명에 따라서, 사회에 따라서, 크게 다르다. 또 다른 것이 당연하다. 때문에 시간관리의 방법도 문명에 따라서 달라진다.
시간을 일정불변의 보조로 진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일(日), 월(月), 년(年)에 일련번호를 매겨서 달력을 만들었으며, 시간 축에 따라서 일어나는 사건을 달력에 의하여 관리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기술은, 극히 고도로 발달된 기술이며, 인류가 저절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과 공간 양쪽에 걸쳐서, 인간세계를 설명하는 역사라는 것도, 자연계에 처음부터 존재한 것은 아니고, 문화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역사는 문화이고, 인간집단에 따라서 문화는 다르기 때문에, 집단마다 각각 「이것이 역사다」 라고 하는 것이 이루어지고, 다른 집단이 「이것이 역사다」라고 하는 주장과 다르게 일어날 수도 있다.
게다가, 달력을 만들어 시간을 관리하는 것과, 기록해 두는 것만으로는 역사가 성립되는데 충분한 조건이 되지는 못한다.
역사의 성립에는, 또 하나의 매우 중요한 조건이 있다. 그것은 사건과 사건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는 감각이다. 여차여차 이런 사건은, 시간으로는 그 앞에 있었던 여차여차 이런 사건의 결과로서, 또는 그 영향으로 일어났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각각 관련이 있고, 또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현대인, 특히 일본인 사이에서는, 극히 당연한 사고방식이지만, 실은 세계 속에서도, 인류 가운데서도, 정말 소수파의 느낌, 사고방식인 것 같다.
여기에서 거듭 확인하면, 직진하는 시간의 관념과, 시간을 관리하는 기술과, 문자로 기록하는 기술과, 여러 가지 인과관계의 사상, 이 4가지가 갖추어지는 것이, 역사가 성립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곳에는, 이 책에서 문제로 하고 있는, 비유로서 쓰지 않는, 엄밀한 의미의 「역사」는 성립될 수 없게 된다. 현하 세계의 문명 속에는, 역사라는 문화요소가 전혀 없던가, 있어도 약한 문명이 얼마든지 있다. (‘20.1.6譯)
④
역사가 없는 문명의 예
인도문명은 「역사가 없는 문명」이다
윤회(輪廻)⦁전생(轉生)이라는 사상
그 가운데서, 본디부터 역사라는 것이 없는 문명의 대표는 인도문명이다. 인도에는, 아주 오래전 시대부터 도시생활이 있었고, 정치가 있었으며, 문자의 기록이 있었고, 상업, 공업, 그 밖의 산업이 있어 부(富)도 축적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에 역사라는 문화는, 극히 최근까지 전혀 없었다.
인도인이 역사를 의식하게 된 것은, 엄밀히 말하면, 1858년에, 마지막 무갈 황제가 폐위되고, 잉글랜드의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황제가 되고부터이다.
즉, 동인도회사로부터 대영제국이 인도 통치를 이어받은 시점부터, 인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은 유럽적인 상식으로 말하는 역사의 관점에서, 인도라는 세계를 다룰 수 있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그 유럽적인 역사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논의 되지 않았지만.
실은 그 이전의 인도에서도 날짜가 있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13세기 까지 밖에는 올라가지 않는다. 13세기 초두에, 북인도의 델리(Delhi)에 「노예왕조」라는, 이슬람교도인 터키(Turkey)인과 아프간(Afghan)인의 정권이 생겼다. 그때부터, 역대군주의 재위기간이나, 정치적인 사건이 기록되었다.
인도문명에는 본디부터, 역사라는 문화요소가 없었는데, 이슬람문명이 역사를 가지고 들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인도문명 전체로서는, 역사는 지배적인 문화요소에는 되지 못했지만, 13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인도의 지배계급은 이슬람교도였기 때문에, 그 범위에서는 이슬람적인 역사가 이해되고 있었다.
그러면, 인도문명은, 그처럼 기원이 오래되고, 수준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역사라는 문화가 왜 발달하지 못했던가. 그것은 인도문명에 특유한 전생(轉生/혼이 다시 태어남) 사상에서 온다.
일본에 전해진 불교용어로 설명하면, 중생(衆生/생물)은, 그 모양에 따라서, 「六道」라는, 6종류의 존재로 나누어진다. 「天」(신들), 「阿修羅」(악마), 「人間」, 「畜生」(동물), 「餓鬼」(유령), 「地獄」의 6가지 중생이 있다.
하늘의 신들로부터 지옥의 주민에 이르기까지, 각각 길고 짧은 차이는 있지만, 수명이 있어서, 수명이 다하면, 혼이 사체를 빠져나가, 77, 49일간 「中有」(중간적 존재)로 있고, 中有의 기간이 지나면, 다음 生物로 다시 태어난다(전생한다). 이 사이클이 「輪廻」다.
이 윤회⦁전생의 사상은, 인도문명에 고유한 것으로, 불교에 국한되지 않고, 자이나(Jaina)교와 힌두(Hindu)교도 이 사상이 기본이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윤회사상에서는, 내세에서 어떤 종류의 생물로 다시 태어나는가, 또 다시 태어나서부터, 어떤 생애를 더듬을지는, 금생(今生)에서 어떤 행위(業)를 쌓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 전세(前世)가 원인이고, 금생(今生)이 결과가 되며, 금생이 원인이고, 내세(來世)가 결과가 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윤회⦁전생의 사상이 기초에 있는데, 역사가가 태어났다고 하자. 거기에 역사를 쓰려고 해도,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 인간계의 사건만을 기록해 보아도, 인간계의 사건은, 인간계의 범위 내에서 인과관계가 성립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계에 있는 사건은, 천상계 사건의 결과일지도 모르고, 마계(魔界)사건의 결과일지도 모르며, 동물계 사건의 결과일지도 모르고, 도깨비세계 사건의 결과일지도 모르며, 지옥계 사건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런 것처럼 인간인 역사가의 눈이 이르지 못하는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까지 고려에 넣지 않으면, 인간계 사건의 인과관계는 더듬을 수 없게 된다. 결국 인간계에만 범위가 한정된 역사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윤회⦁전생을 부정하는 이슬람교가 들어올 때까지, 인도에는 역사라는 관념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이는 방법이, 문명에 따라 다르다는 문제가 있다. 윤회⦁전생이라는 사상의 기본에는, 시간은 직선적으로 무한히 진행되는 것이 아니고, 되풀이를 거듭해서 맨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는 감각이 있다. 시간을 이런 식으로 느끼는 곳에서는, 시간축(時間軸)에 따라서, 사물의 조리를 말한다는, 일본이나 서유럽과 같이 역사가 있는 문명으로, 역사가 달성하는 중요한 기능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인도문명에서는, 눈앞의 현상을 설명하는데 신화가 쓰인다. 예를 들면, 이 세계는 위대한 신의 꿈속 세계라든지, 신의 어떤 변덕이, 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일으킨다든지 하는 상태에, 신화와 현실이 직결해 버린다. 인도문명에서, 신화와 현실, 종교와 일상생활, 신들의 세계와 인간계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은, 그런 데서 오는 것이다.
그런 일로 세계문명에는, 역사가 있는 문명 뿐 아니라, 역사가 없는 문명도 있다. 역사가 성립되지 않는 원인 가운데 주요한 것은, 시간의 관념이 다르면, 인과관계 관념의 유무가 된다. (‘20.1.7譯)
⑤
이슬람문명도, 기본적으로 「역사가 없는 문명」이다
신의 의지가 제일의(第一義)
앞에서 이슬람문명이 인도에 역사를 들여왔다고 했다. 그러면 이슬람문명은 역사가 있는 문명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은 실은 불가사의하다. 이슬람교의 교의로 말하면, 이슬람문명에서는 역사는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슬람교도의 시간에 대한 관념과, 인과관계의 관념은, 일본문명과 서유럽문명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들에게 있어서, 시(時)는 과거⦁현재⦁미래가 인과관계에 따라서 고정되지 않는다. 한순간 한순간이, 신의 창조와 관계되어 있다. 이 한순간과 다음 한순간과는 연결되지 않는다. 과거의 사건에 따라서, 현재가 매이는 것이 아니고, 미래는 신의 영역에 속한다. 미래에 대해서 말할 때는 언제나 『인지어 알라(신의 의지가 오기를)』라는 어구가 덧붙여진다. 어떤 약속이든지 정확히 지키고, 근대 서구의 잣대로 부터도 매우 신뢰받는 과학자라도, 그가 무슬림(Mslim/이슬람교도)이라면 미래와 관계되는 것을 말할 때는 당연히 “인지어 알라”가 들어간다.」
「뉴턴(Newton)역학 이래의 서양에서는, 인과율(因果律)이라는 패러다임(Paradigm/규범)이 지배적 이자만, 무슬림에서 말한다면, 서양적인 시간관은 기이하게 비치는 것같다. 『서양인은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한다.』고 하며, 역겹게 얼굴을 찌푸린다.」
「이슬람에서는, 신의 말은 불변이지만, 인간은 변하고, 바뀌는 것이라고 인식한다. 『일관(一貫) 한다』든지, 『전혀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치에 따라 한다는 것은 그때그때의 상황에 충실 한다는 것밖에 다름 아니다. 세월과 함께 움직여 나가고, 변천해 나가는 자체에 가치를 찾아낸다.」(片倉 모토코 『이슬람의 일상세계』 이와나미 신서(岩波新書), 171~172page)
여기에 나오는 「인지어 알라」는, 비 이슬람교도에게는, 자주 오해를 받는다. 그리스도교도는, 이 표현을 「이슬람교도는 불성실하고 무책임한 놈들이다. 마음이 변하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라고 받아들이기 쉽다. 그러나 이슬람교도에게 들으면, 전력을 다해 약속을 지키려고 하지만, 자기가 약속을 지키는 것을 하느님이 바라지 않으시면, 지키지 않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이 「인지어 알라」를 붙이지 않고 「그럼 내일, 반드시 여기서 만납시다」라고 하면, 신의 의지보다도 자기의 의지를 우선하게 되는, 중대한 불경의 죄가 된다.
그런 사정이 있기 때문에, 이슬람교도가 역사를 서술한다는 자체가 모순(矛盾)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슬람문명에는, 교조(敎祖) 무함마드(Muhammad/마호메트)가 죽은 직후 시대부터 기록이 있고, 본격적인 역사도 빈번하게 쓰여 져 있다. 그 이유는, 역사의 또 하나의 중요한 기능에 있다. (‘20.1.8譯)
⑥
역사는 자기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무기」가 된다
때문에 「역사가 없는」 이슬람 문명이 역사를 가졌다.
또 하나의 역사의 중요 기능이란, 「역사는 무기」라는, 그 성질을 말한다. 문명과 문명이 충돌하는 전장에서는, 역사는, 자기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무력으로 위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이슬람문명이 어떤 문명인가 하면, 당초 지중해문명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었다. 이슬람이라는 종교는 아라비아반도의 내부에서 일어나, 지중해안에서는 떨어져 나왔지만, 교조 무함마드가 받은 신의 계시의 기초에 있었던 것은, 유태교였다. 무함마드 자신도, 예배의 대상이 최초에는 메카(Mecca)의 카바(Kaaba)신전이 아니고, 예루살렘의 야웨(Jahweh) 여호와(Jehovah) 신전의 방향으로 예배를 들였다. 또 당시 아라비아반도에는 유태교도인 부족이 많았다. 무함마드는 최초에는 그들과 동맹을 했고, 그 후 싸워서 멸망시켰다.
유태교는 말할 것도 없이, 지중해세계의 일부인 팔레스티나에서 성립된 종교이며, 유태교의 교조 모세(Moses)는, 지중해문명의 원천인 이집트에서 나왔다는 전승(傳承)이 있다.
이슬람교는 그 계열에 속하기 때문에, 역시 지중해세계의 일환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무함마드의 사후, 이슬람교단은, 아랍제국이 발전하는 건국의 과정에서, 로마제국과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로마제국은 물론 지중해문명이며, 지중해문명은 당초부터 역사가 있는 문명이다. 역사가 있는 문명인 로마제국과 대항할 필요상, 이슬람문명도 역사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외교교섭에 있어서, 이슬람문명은 지중해문명에 대해 언제나 수세(守勢)에 몰리지 않을 수 없다. 상대가 차례차례로 고증문(古証文)을 꺼내오는데 대해서, 「현상은 그렇지 않다」고 우기기만 해서는 상대를 설복시킬 수 없고, 외교교섭에는 결정적으로 불리하다. 결국 지중해문명의 대결장에 오르는 형태로, 이슬람문명의 기초이념과 모순되는 역사라는 문화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이슬람문명은, 역사라는 문화를 가지게 되었으나, 당초부터 역사가 성립되는 기초가 걸려있는 이슬람문명이기 때문에, 역사라고 해도, 문명의 내부에서는 의의가 가벼운 것으로, 이슬람의 역사학은 지리학의 보조분야였다.
이런 사정은, 현대의 중근동 정치정세에도 뚜렷이 반영되고 있다. 이슬람 여러 나라 측은, 이스라엘이나 유럽⦁미국 여러 나라와의 관계에 있어서, 자기의 할 말이 좀처럼 통하지 않고, 항상 불리한 입장에 선다. 역사라는 문화에 단련되지 않았으므로, 역사를 다루는 방법이 서툴고, 미래의 전망이 능숙하지 못하며, 알라(신)의 의지가 나타나 있는 현상만을 중시하기 때문에, 역사가 있는 문명에 의해서 매사에 따돌리게 된다.
일예를 들면, 걸프 전쟁이 있다. 1990년부터 1991년에 걸친 이 전쟁에서, 사담 후세인 대통령의 이라크군이 쿠웨이트를 침공한 것은, 미합중국을 비롯한 서쪽에서 보면, 영토보전의 원칙이 분명한 침략이다. 전력을 다해서 때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라크 쪽에서 보면, 도대체 쿠웨이트 같은 나라는 영국이 사정상 1961년에 세운 것으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란⦁이라크 전쟁(1980~88년)으로 부담한 외채800억 달러를 해결하기 위해, 간단하게 생각해서 병합한 것이지만, 이외에도 전 세계의 반발을 사, 그런 대사건으로 발전된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가 있는 문명이 있고, 또 역사가 있어도 빌려온 것으로 역사가 약한 문명이 있다. 이슬람문명과 같이, 먼저 있었던 문명으로부터 문화요소를 빌려와서 독립한 문명을 「대항문명((對抗文明/counter-civilization)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슬람문명은, 지중해문명의 대항문명이며, 일본문명은 중국문명의 대항문명이다.
(‘20.1.9譯)
⑦
「역사가 없는 문명」 미국은, 현재와 미래 밖에는 관심이 없다.
과거와 단절하고, 헌법만으로 세운 나라
또 하나, 매우 중요한 문명이지만, 기본적으로 역사가 없는 문명이 있다. 미국문명을 말하는 것이다. 미합중국은 세계문명 가운데 가장 특이한 문명이며, 미국문명에는 보편성이 거의 없다. 미국인 자신은, 자기문명의 특이성을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 전 인류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문명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미국문명은, 서유럽문명의 대항문명이기 때문에, 서유럽계의 문화를 가지고는 있으나, 서유럽과는 달라서, 역사는 미국문명에서, 거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이 말은 미국 서점에 가보면 알 수 있다. 「역사」(History) 라는 코너에 꽂혀 있는 것은, 유럽 역사와, 그리스 로마의 고전시대에 대한 책뿐이다. 로마 이외의, 아시아나 이슬람 지역을 다룬 책은 「지역연구」(Area Studies)에 들어가 있다. 역사로서 다루어지지는 않는다. 중국마저도 미국에서는 「지역연구」이며, 역사의 대상으로 되어있지 않다.
중국이 역사의 대상으로 되어있지 않은 근본적인 이유는, 한자(漢子)같은 야만적인 것이, 성실한 자료가 되지 못한다는, 감각인 듯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알렉산드로스(Alexsander) 대왕의 정복이 미치는 범위만이 역사의 무대이므로, 그 바깥쪽을 다루는 것은 역사가 아니다. 깊이 파고들면 그런 말이 된다.
게다가, 미국 자체는 그 「역사」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미국연구」(American Studies)로 독립되어 있다.
미국이 역사가 없는 문명이라는 것은, 7월4일 독립기념일 축하행사의 텔레비전 중계를 보면 곧 알 수 있다. 이날은 전 미국 각지의 중요한 곳 축하모임 실황중개가 있다. 축하행사가 가장 고조되는 순간은, 합중국 국적을 딴 지 얼마 안 되는 전 외국인이 단상에 올라가, 자기가 미국인이 되는 것을 결단한 이유를 사투리가 섞인 영어로 말하고, 「나는 미국인이 되어, 지금 대단히 행복하다」라고 선언하면, 회장의 군중이 감동하여 와 하고 환호하면서, 「아메리카 만세」를 외치는, 그 순간이다. 이 현상은 미국문명의 본질을 나타내며, 중요한 의미를 품고 있다.
다시 말하면, 「미국인은, 기본적으로는 자기의 의지로 되는 것이며, 태생적인 미국인은 본래의 의미의 「미국인」 이 아니다. 이런 나라는 아메리카합중국 이외에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인구통계로 봐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아직, 합중국 인구의 과반수가 이민 1세대 째인 시기가 있다. 그것이 역전되어, 합중국에서 태어난, 2세, 3세의 미국인 쪽이 많게 된 것은, 1950년대부터다. 그렇기 때문에 미합중국에서는, 지금까지도 이민의 나라 기분이 주류다.
이것은, 합중국의 성립에서 생각하면 이해된다. 18세기 말 미국독립 전부터, 미국이라는 사회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북아메리카의 대서양연안에 있었던, 잉글랜드왕의 13개 식민지 주민이, 왕에 반항하여, 잉글랜드 왕이 정당한 소유자였던 재산을 빼앗아 각각 「스테이트」(State)라든지, 코먼웰스(commonwealth)로 개칭하고, 한데모여 연방(聯邦)을 결성했다. 이것이 아메리카합중국의 기원이다.
미국 독립 이전에, 토착 아메리카 왕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것이 아메리카를 통괄한 것도 아니다. 아무런 통합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만들어진 나라다. 애당초 처음 시작될 때, 역사와 절연하고 출발한, 역사를 거부한 나라다.
나아가, 미합중국이 건국된 후, 확장된 국토의 대부분은 아메리카 인디언(지금에 와서 네이티브⦁아메리칸과 같이 바꾸어 부르지만)의 땅에 멋대로 들어간 합중국민이, 스테이트를 건설하여, 이것이 합중국에 가맹한다는 형식으로 획득한 토지에서 이루어졌다. 아메리카⦁인디언의 기득권을 합법적으로 계승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서로 같은 친구다」 라는 의식을, 아이덴티티(identity)라고 한다. 유감이지만 일본어에서는, 달리 말할 방법이 없다. 하여튼 「아메리카 인」이라는 아이덴티티는, 18세기 말의 아메리카 독립국에서 19세기에 걸쳐, 전혀 무(無)에서 만들어졌다. 거기에 먼저 「역사적」인 경위가 있어서, 아메리칸 ⦁아이덴티티가 생겨난 것이 아니다. 잉글랜드왕의 재산을 폭력으로 빼앗은 혁명이, 왕권과의 연결을 끊고, 아메리카 합중국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데 잉글랜드 왕은, 대서양 저쪽에 있어, 한 번도 북아메리카에 온 일이 없었으며, 아메리카 독립에 의해서 타도된 일도 없었다. 북아메리카가 잉글랜드 왕령(王領)에서 이탈했을 뿐이다. 본래부터 약했던 잉글랜드 왕의 존재감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아메리카 건국에는. 잉글랜드 왕권으로부터 계승해야 될 틀은, 거의 없었다. 아메리칸 아이덴티티의 기초는, 1776년의 「아메리카 독립선언」과, 1787년의 「아메리카 헌법」의 전문(前文)뿐이다.
헌법에 따라서만 만들어진 국가는, 아메리카 합중국이 세계최초다. 진실을 말한다면
그 이후에도 예가 없다. 현재의 일본국은, 1946년의 「일본국 헌법」이 만든 것은 아니다. 1889년의 「일본제국 헌법」이 만든 것도 아니다. 일본국은 그보다 1200년이나 이전부터 존재해 왔으며, 현대 일본국의 제도는, 그 유산의 기초 위에 성립되어 있다. 공포(公布)로부터 경위가 반세기인 「일본국 헌법」이, 일본국의 기초일 수는 없다.
이야기를 아메리카로 되돌아가면, 아메리카의 아이덴티티의 기초는, 역사가 아니다. 아메리카합중국은, 순수한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두고 성립된 국가다. 때문에 미국문명에서는, 역사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기 때문에 중요한 문화요소가 될 수 없다. 아메리카문학에서. 우리들 일본인이, 일응(一應) 역사의 범위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는 분야는「전기」라는 장르뿐이다. 미국인은 바이오그래피(biography)를 매우 좋아하지만, 그러나 전기를 좋아하는 것과 역사를 좋아하는 것은 다르다. 미국인은 위인의 전기를, 성공의 입문으로 읽는 것 같다.
조지 ⦁미케슈라는 유태계 헝가리인인 유머 작가가, 현대 미국 탐방기를 썼다. 미케슈가 지적했지만, 미국인이 역사를 논하는 경우는, 반드시 현대세계의 패러렐(parallel)로서, 유럽의 전례를 인용한다. 이것도 로마제국이 이러했기 때문에, 미국도 그렇게 되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는 것과 같은 조잡한 비교론을 한다고 한다. 이런 식의 역사를 대하는 자세는. 역사의 본바탕에 사는 유럽인의 감각과는 차이가 크다.
서유럽으로 말하면, 로마시대의 유적은 어디에도 있다. 마을의 중심을 파면, 반드시 로마군단의 유적이 있다. 게르만 왕의 묘가 나온다. 사교(司敎)의 전설이 있다. 교회의 건물이 묻혀있다. 마을의 공동건물이 있다. 이런 곳에서는. 역사는 이렇게 작용해서, 그래서 지금의 우리들이 있다고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역사는 공리공담이 아니고, 실재(實在)다. 되돌아가면, 미국인은, 역사를 가까이 느끼는데 부족하고, 역사의 실감이 없다.
역사(History)라는 말은, 미국에서는 「누구나 아는 이야기」정도의 의미로 가볍게 쓰인다. 어느 유명인의 부인이, 자기와 남편이 만난 것에 대해 말하면서, 「그로부터 이후에는 역사에요(The rest is history)」라고 말한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이러한 「역사」의 사용법은, 우리들에게는 이상하게 비치지만, 이는 건국으로부터 200년 밖에 지나지 않았으며, 게다가 국민의 대다수가, 세계 각지에서 온 초대이민의 2세나 3세이기 때문에, 국민전체가 공유하는 과거가 거의 없는, 미국의 특수한 사정을 반영하고 있다.
미국문명에 역사라는 요소가 걸려있는 결과, 미국인은 현재가 어떻게 되어 있는가 라는 것밖에 관심이 없다. 과거는 이제 지난 것이다. 때문에 미국에서는, 과거를 묻는 역사 대신에 현재만을 다루는 국제 관계론과 지역연구에 인기가 있다. (‘20.1.12譯)
⑧
역사가 없는 미국문명의 인간관계
모두 제로에서 출발한다는 원칙
아메리카합중국이, 역사를 거부하고 성립된 문명이며, 역사가 없는 문명이라는, 그 본질은, 미국이 일본 등 역사가 있는 문명과 교섭할 때 취하는 태도에, 뚜렷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무역마찰을 둘러싼 교섭에서, 현상(現狀)은 불합리하다는 「역사적인」 사정이 있어서, 그것이 원인이기 때문에, 개선하기 위해서는, 거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조처를 할 필요가 있다고 응대한다. 일본인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정직한 말이지만, 미국인은 그것을 듣고, 역사로 숨어들어가는 것은 비겁하다, 역사 따위를 말하는 것은 단순한 발뺌이다,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고 현상(現狀)이다, 곧 법률이라도 만들어 현상을 개선하자, 라고 되받아 말하게 된다.
역사에 관심이 없는 보통의 미국인에게 있어서는, 역사 있는 문명에 속하는 외국인이, 현재의 세계를 볼 때, 동시에 과거의 세계까지 시야에 넣는 것은, 매우 이상하게 느껴진다. 미국은 항상 현재이고, 언제나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미국인의 역사 감각 결여라는 특징이, 다른 형태를 취하여 나타나는 것은 친자관계(親子關係)다. 저자가 1959년에 처음 미국으로 유학을 갔을 때의 경험이지만, 미국인 친구의 가족을 관찰하고 불가사의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친자(親子)와 형제간이라도, 개인의 행동에 말참견을 해서는 안 된다는 감각이 있는 것 같다. 딸이나 누이동생이 이상한 사내와 사귀고 있어, 매우 걱정스러워도 당자가 행복해질지 불향해질지, 인생의 선택의 자유는 개인의 기본적 인권이며, 선의로라도, 주의를 주는 것은 인격의 존엄을 침해하는 것이므로, 잠자코 보고 있는 경우가 많다.
미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모두 제로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로부터 은혜를 입는 것은, 인간으로써 부끄럽게 생각해야 될 부도덕한 행위다. 부모의 직업을 이어받는 것은 문제 밖이다. 대체로 부모에게서 학비를 받아, 고교나 대학에 가는 것까지도 부끄러운 일이며, 스스로 일해서 학비를 벌어 학교에 다니는 일이야 말로, 멋진 인간으로서의 삶의 모습이다. 대학을 나와도, 일자리를 스스로 찾아서, 가장 밑바닥부터 출발하여, 지위를 쌓아올리고, 재산을 쌓아올리는 것이 미국인다운 삶의 이상적인 모습이다.
이런 것이 「아메리칸⦁드림」이라고 하는 것으로, 그것이 실현되는 것은 미국뿐이라는 게, 미국인의 신념으로 되어 있다.
실제로, 최근에는 아메리칸⦁드림의 실현이 어려워져서, 부모가 1대에서 쌓아올린 생활수준까지, 아들세대가 이루기 어렵게 되어 간다. 이것은 미국사회가 성숙해온 필연적인 결과이지만, 미국인에 있어서, 아메리칸⦁드림의 소멸은. 미국 아이덴티티의 중대한 위기인 것이다.
그것은 하여튼, 이아기를 본래로 돌아가면, 모두가 같은 스타트라인에 서서, 거기에서 출발하여, 자력으로만 자기의 일생을 쌓아올리는, 자기보다 앞 세대로부터, 일체 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생활방식이 원칙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부모로부터 부를 물려받아, 안락한 생활을 하는 사람은, 은근히 자기를 부끄럽게 생각한다. 이러한 심리는, 우리에게는 이상하게 보이지만, 그것은 아메리카문명이 과거를 거부하는 문명이며, 역사가 없는 문명이라는 데에 원인이 있다. (‘20.1.13譯)
⑨
중국문명이란 무엇인가
자기 나름의 「역사」라는 문화를 낳은 것은, 지중해문명과 중국문명뿐
역사는 헤로도토스와 사마천(司馬遷)에서 시작되다
그러면, 역사가 있는 문명은, 어떤 문명인가.
앞에서 이슬람문명에 대해서 말한 것과 같이, 역사가 있는 문명이라도, 2차적인 문화요소로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문명이 몇 개 있다.
국민국가라는 관념이 19세기에 발생하고부터, 국가에는 국사(國史)가 필요해 졌다. 그래서 지금은 모든 나라에서 국사를 만들고 있지만, 18세기까지의 세계에서는, 자기 나름의 역사라는 문화를 가진 문명은, 단지 2개밖에 없었다. 그 하나는 중국문명이고, 또 하나는 지중해 문명이다.
중국문명은, 일본문명의 원류이므로, 우리 일본인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하며, 게다가, 그것이 지금의 일본인의 역사의식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 일본인에게 있어 역사의식 혼란의 근본적인 원인은, 중국문명이 가지고 있는 특이한 역사문화에 있다.
중국의 역사문화를 만들어낸 것은, 사마천(司馬遷)이라는 사람이 기원전 2세기 말에서 기원전 1세기 초기까지에 걸쳐 쓴 『사기(史記)』라는 서책이다. 『사기(史記)』는, 모든 중국 「정사」의 최초이며, 그 체제와 내용이, 후세 중국인의 역사의식과 의식을 결정했다.
같은 의미로, 지중해세계문명에서 역사라는 문화를 만들어낸 것은, 기원전 5세기의 헤로도토스이고, 중국의 사마천 보다는 더 오래 되었다. 사마천과 헤로도토스 2사람은, 각각 독자적으로, 그 이전에는 없었던 역사라는 장르(genre)를 만든 천재다.
사마천이 만든 중국문명의 역사문화와, 헤로도토스가 만든 지중해문명의 역사문화는, 어느 쪽이든 역사이긴 하지만, 각각 독자적인 규범을 가진다. 이 이외에 역사가 있는 문명은, 모두 중국문명이나 지중해문명의 어느 쪽에서, 역사라는 문화를 카피했다.
이 장의 모두에서 인용한 역사의 정의는,
「역사란, 인간이 사는 세계를, 시간과 공간의 양쪽 축에 따라서, 그것도 일개인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체험을 초월한 척도로 파악하고, 해석하며, 애해하고, 설명하며, 서술하는 작업이다.」라고 되어있다. 이와 같이, 인간이 사는 세계에 대한 이해의 시도이며, 설명이고, 서술이다. 게다가 시간에 있어서도 공간에 있어서도, 일개인의 체험을 초월하는 범위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중국문명의 역사도, 지중해문명의 역사도, 공통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마천이 이룩한 중국문명의 역사문화와, 헤로도토스가 이룩한 지중해문명의 역사문화와는 성질이 매우 다르다. (‘20.1.14譯)
⑩
사마천이 쓴 중국문명역사의 본질은 「정통(正統)」관념
말하고자 한 것은 「무제(武帝)야말로 정통의 천자(天子)」
중국문명과 지중해문명에서는, 먼저 역사를 말하는 이야기 내용의 줄거리가 다르다. 인간의 머리에는 줄거리 없는 이야기는 들어가지 않는다. 명사나 숫자를 어수선하게 열거한 것으로는 역사가 되지 않는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채택한 줄거리는, 세계는 태초부터, 사마천이 살았던 시대와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의 최초에 놓여있는 것은, 「오제본기(五帝本紀)」편이다. 「오제(五帝)」라는 것은 황제(黃帝)로 시작되는 5인의 신화 상의 군주이지만, 이편의 내용은, 이 5인이 「천자(天子)」(황제의 별명)가 되어, 연달아 「천하(天下)」(세계)를 통치했다고 되어있다.
사마천이 여기에서 天下(천하)라고 한 지역은, 그가 섬긴 전한(前漢) 무제(武帝)의 지배가 미친 범위를 말하고, 현대인이 본다면, 「천하」는 중국의 동의어가 된다. 게다가 황제의 사적(事蹟)으로 사마천이 서술하는 것은 모두 현실적인 무제의 사적과 겹친다.
황제는, 천하가 미치는 곳에 행차하여, 동방에서는 태산(泰山)에 올라 천지를 제사 지내고, 북방에서는 유목민을 내 쫓았다는 등으로 쓰여 있다. 다시 말하면, 사마천은, 자기시대인 전한의 무제에게 통치된 찬하를, 그대로 시간의 시작으로 가지고 가, 거기에 투영된 무제의 상을 황제로 부른 것이다.
신화인 황제와 현실의 무제와를 연결시키는 것은 「정통(正統)」이란 관념이다. 이것을 사마천이 채택하고부터, 「정통」은 중국문명 역사관의 근본이 되었다. 중국문명의 역사관은, 「정통」의 역사관이다. 「정통」의 역사관에서는, 어떤 시대의 「천하」(지금으로 말하면 중국)에도, 天命(천명)을 받은 「천자」(황제)가 반드시 한사람이며, 그 천자만이 천하를 통치하는 권리를 가진다. 그 「정통」은, 5제(五帝)시대에는 선양(禪讓/양위)에 의해서, 어진 천자로부터 어진 천자로 물려주어 전해졌다.
「사기」에서 「하본기(夏本記)」∙ 「은본기(銀本記)」∙「주본기(周本記)」 ∙「진본기(秦本記)」가 다루는 시대가 되면, 천자의 위(位/직위)는 「방벌(放伐)」, 다시 말하면 추방이나 정벌에 의해서 빼앗기고, 이긴 쪽에 천명(天命)이 주어지며, 진 쪽에서는 천명이 사라진다. 이것이 본래 의미의 「革命(혁명)」이며, 「革(혁)」은 제거한다는 의미다. 하늘이 한번 준, 천하통치의 명령을 철회하는 것을 「혁명」이라고 한다. 현대 일본어에서는 「레볼루션」(revolution)의 역어로 「革命(혁명)」을 쓰지만 이것은 오역이다.
「革命(혁명)」의 주체는 「天(하늘)」이지만, 「레볼루션」의 본래의 의미는 「쓸어져 본디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으로, 인간계에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까지의 「天子(천자)」가 하늘에 의해서 「革命(혁명)」되고, 새로이 천명을 받은 군주가 정통의 「天子(천자)」가 된다. 이러한 과정이 夏(하)나라에서 殷(은)나라로, 은나라에서 周(주)나라로, 주나라에서 秦(진)나라로, 대대로 되풀이되어, 최후에 사마천이 섬기는 前漢(전한)의 武帝(무제)가, 천명을 이은 정통의 천자로서, 천하를 통치했다. 사마천이 『史記(사기)』에서 하고자한 것은, 요컨대 무제만이 정통의 천자라는 것이다.
사마천이 『史記(사기)』에서 쓴 것은, 황제의 정통성역사다. 세계사에도 없고, 중국사에도 없다. 무엇보다도, 「중국」이라는 국가의 관념도 사마천이 산 시대에는 아직 없었다. 이런 관념은, 19~20세기 국민국가시대의 산물이다. 『』에서는, 「天下」(지금의 중국)를 「中國」과 「蠻夷(만이/오랑캐)」의 2개 지역으로 나누고 있으나, 그 「중국」은, 「前漢(전한)」의 帝道(제도/황제가 있는 나라의 서울)⦁長安(장안/西安)이 있는 挾西省(협서성)의 渭河(위하)계곡에서, 河南省(하남성)⦁山東省(산동성)의 황하의 중⦁하류에 걸친, 동서로 좁고 긴 지대뿐이다.
天命(천명)은, 어떤 시대에도 천명이기 때문에, 그 天命(천명)을 받은, 정통의 천자가 다스리는 천하에는, 시대마다 변화가 있어서는 안 된다. 만일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천명에 변동이 있을 전조가 된다. 이 같은 논리 때문에, 중국 역사에서는, 天變地異(천변지이/자연재해⦁이상현상)의 기록이 매우 중요하게 되어있다.
천변지이가 일어나는 것은 황제의 「德」에 달린 것이며, 하늘이 황제에게 불만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석되었다. 「德」이라는 것은, 도덕도 아니고, 윤리도 아니다. 「德」은 능력이며, 「에너지」다. 천변지이는, 황제의 몸에 갖춰지고 있는 에너지가 쇠퇴해진 증거이며, 천하를 통치하라는 천명을 황제가 다하지 못할 것을 암시한다. (‘20.1.15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