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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THIS IS TOTAL WAR 원문보기 글쓴이: 메디치
인간이란 ‘회로’를 풀다.
-조지프 르두 <시냅스와 자아>에 대한 서평
●본 서평에서는 연결체계로서 시냅스가 가진 가능성을 제시하며, 이런 시각을 통해서 우리가 통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논한다. 더 나아가 시냅스를 통해 자아를 설명하려는 시도엔 어떤 한계점이 있는지에 대해 지적한다.
모자이크 인간
다들, 어릴 적에 한 번쯤은 미술시간에 모자이크를 만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색종이를 가위로 조각조각 자르거나, 손으로 찢어놓고 각 조각들을 형태에 맞춰서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시키지요. 처음 조각낸 색종이 조각들은 하나하나로는 그저 큰 의미가 없는 종이조각에 불과하지만, 그 조각들이 모이고, 서로 간에 ‘관계’를 형성하여, 하나의 ‘전체’를 이루게 되면 하나의 ‘그림’으로써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대개 자신의 얼굴이나 자기 주변 가족의 얼굴을 모자이크로 묘사하려 하는데, 그 모자이크는 개별 조각들이 전체를 이룰 때에야 ‘얼굴’이란 의미가 형성되는 것일 뿐, 각 개별조각에 ‘얼굴’을 이루도록 하는 속성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같은 색종이에서 나온 조각이라 할지라도, 각각의 조각에게 부여되는 의미는 달라지게 됩니다. 눈동자로 쓰일 검은색 종이조각과 머리카락으로 쓰일 종이조각은 같은 색깔을 지녔지만, 그 종이가 표현하는 것은 전혀 상반된 것입니다. 그 조각이 전체 배열과 비교하여 위치하는 장소, 그리고 다른 조각들과 맺는 관계 등에 의해서 같은 색종이에서 나온 조각이라도 성격은 전혀 달라지게 됩니다. 조각들이 배열되고, 관계 맺고, 전체를 형성함으로써 각 개별 조각들에겐 없었던 새로운 성격이 형성되는 것이지요.
인간이란 존재도 어찌보면 어릴 적에 만드는 ‘자기 어머니의 모자이크’와 닮았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을 이루는 각 개별 세포들은 좋게 말해서 ‘고깃 덩어리’에 불과하며, 그 자체에서 인간의 모습을 보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인간을 구성하는 모든 체세포는 모두 하나의 수정란에서 분화하여 형성되었으며, 거의 대부분 동일한 유전자를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모자이크를 이루는 ‘종이조각’들은 모두 같은 종이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분화순서, 그리고 다른 세포와 어떤 관계를 이루느냐에 따라 각각의 체세포로서 ‘성격’이 부여되게 되고, 각 기관이 다른 기관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개별 고깃덩어리가 하나의 인간을 만들게 됩니다. 이런 개별 기관들의 연결을 수렴하고, 통제하는데 매우 중요한 두뇌에 매우 복잡한 연결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시냅스의 문법
조지프 르두의 <시냅스와 자아>는 인간의 두뇌 내에서 이루어지는 인지과정을 ‘관계’, 그리고 ‘연결’에 초점을 맞추어서 쓴 책입니다. 인간의 뉴런도 다른 체세포와 마찬가지로 세포활동에 매우 중요한 DNA는 세포핵에 있습니다. 때때로 외부의 화학적 자극에 대하여 DNA를 꺼내 RNA로 전사를 하고, RNA가 아미노산을 모아 상황에 맞는 단백질 구조를 형성해 나갑니다. 이렇게 형성된 단백질은 특정 화학물질을 결합하거나, 다른 세포에 화학물질을 전달시키는 등등 다양한 활동을 함으로써 세포의 활동을 유지시킵니다. 하지만, 이러한 뉴런 내 DNA도 다른 뉴런과의 관계없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뉴런들이 모여 하나의 인격을 형성하는데에 있어서는 다른 뉴런과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고, 때문에 뉴런과 뉴런이 서로 관계를 맺는 창문인 ‘시냅스(Synapse)’가 중요한 것입니다(간략하게 시냅스에 대해 설명하면, 뉴런은 축삭을 통해 전기적 자극을 전달하고, 그 자극을 전달받는 뉴런은 수상돌기를 통해 전기적 자극을 전달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축삭과 수상돌기 간에는 조그만 틈이 있는데, 이 조그만 틈을 ‘시냅스’라고 부릅니다. 이 조그만 틈 사이로 화학물질이 분비됨으로써 수상돌기에 전기적 자극을 하도록 유도하게 됩니다.). 시냅스의 중요성에 대해서 르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람들은 뇌에 대해 잘못된 믿음을 한두 가지 더 가지고 있다. 첫째는 지각, 기억, 감정 등과 같은 뇌기능들이 뇌의 특정영역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뇌에서 돌아다니는 화학물질들이 우리 정신상태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중략)... 뇌조직의 부분들이나 고립된 화학물질들이 독립적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특정한 영역들이 중요하지만, 그 자체로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른 영역들과 더불어 시냅스 연결을 통해 기능에 참여함으로써 그 중요성이 발휘된다.(p.69~70)
이런 시냅스를 통해서 인간의 뉴런은 무수히 많은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되고, 이는 종종 개별 뉴런만 봐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체계를 만들어냅니다. 우리는 빵의 형태를 보고 인간의 얼굴을 유추해내고, 각 개별 인물들의 얼굴을 구별해낼 수 있으며,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를 상상해낼 수 있습니다. 개별 뉴런들이 하는 것들은 그저 수상돌기에 전달된 화학물질에 의해서 전위가 발생하고, 이 걸 축삭으로 전달하며, 때때로 세포핵의 DNA로 단백질을 합성하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개별 뉴런들로는 낙엽에서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를 유추해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각 뉴런들이 서로 연결하여 ‘조합체계’를 이룰 때엔 생각보다 놀라운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조합체계’의 대표적 사례로는 ‘언어’를 들 수 있습니다. 인간의 언어는 타동물의 ‘언어’와 상당히 달라서 문법에 의한 조합체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동물들도 나름대로 서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체계는 지니고 있습니다. 강아지의 경우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분노할 경우엔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 거립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상대에게 자신의 상태나 생각을 표현하는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저 기분이 좋은 것만 표현할 수 있을 뿐, 왜 기분이 좋은지에 대해선 표현할 수 없으며, 그저 분노했다는 것만 표현할 수 있을 뿐, 무엇에 대해 분노했는지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특정 규칙을 통해 각 ‘개념’을 다른 개념과 연결시키고 조합시킴으로써 더 구체적인 표현이 가능합니다. 더 나아가, 이런 조합은 각 개념만으로는 유추할 수 없는 새로운 표현을 창조해낼 수 있는데, 촘스키가 예로 들었던 ‘색 없는 녹색 개념이 격렬히 자고 있다.(Colorless green ideas sleep furiously)’란 표현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인간의 언어는 각 형태소를 규칙에 맞게 조합하고, 그렇게 형성된 단어를 문법이란 규칙에 맞게 배열함으로써 하나의 문장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렇게 형성된 문장은 그 자체로 개별 단어와는 동떨어진 새로운 개념이 되며, 인간은 이런 새로운 개념을 무한대에 가깝게 창조해낼 수 있습니다. 만약 ‘낙엽’이란 개념이 언어를 통해 조합을 이루지 못했다면,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란 표현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조합체계는 그 체계를 이루는 개별 개체들로서는 전혀 상상도 못했던 새로운 것을 창조해낼 수 있습니다. 시냅스의 문법은 유전자이며, 시냅스의 단어는 뉴런입니다. 그리고 시냅스 자체는 이런 조합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함으로써 뉴런이란 단어를 뛰어넘는 인간이란 ‘아름답고 경이로운 시’를 창조해내는데 큰 기여를 하며, 한 인간에게 우주보다 무한한 ‘가능성’을 안겨줍니다.
이런 시각이 우리에게 주는 것
이렇게 시냅스 연결을 통해서 인간의 마음을 바라보는 시각은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는데에 있어서 큰 통찰을 줍니다. 바로, ‘의식적 과정’ 뒤에 있는 ‘무의식적 과정’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그 과정들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여기서의 ‘무의식’은 프로이트나 정신분석학에서 주장하는 ‘무의식’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저, 의식적 과정이 아닌, 마음의 과정을 표현하는 용어로 ‘무의식’을 쓴 것입니다.).
의식적 과정 외에 무의식적 과정이 있다는 사례로써, 인간의 기억 시스템은 크게 의식적인 ‘명시기억’과, 의식적이지 않은 ‘암묵기억’으로 나뉩니다. 암묵기억은 역행성 기억상실증 환자를 대상으로 연구하면서 밝혀졌는데, 기억상실증 환자들에게 반복적으로 손기술을 필요하는 과제를 할 때에, 그 과제를 했다는 명시적 기억이 없음에도, 과제를 반복할수록 과제 수행능력이 향상되었습니다. 또한, 기억상실증 환자에게 압정이 붙어있는 손으로 악수를 하게 될 경우, 그 다음날에 그 일화를 기억하지 못함에도, 다시 악수하기를 꺼려하게 되었다는 실험사례도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여러 모듈들의 통합으로 이루어졌다는 사례도 있는데 그 중 하나로, 특정 유형의 전전두피질이 손상되어 정서표현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감정에 휘둘려 매사 완벽하게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됩니다(Damasio). 이런 환자들은 무엇을 선택함으로써 어떤 결과가 생겨날지에 대해서 일반인과 비슷하게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었는데 은행원이 너무 많은 돈을 주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 것을 돌려주었을 때와 그 것을 받아가지고 나갔을 때 일어날만한 결과들을 모두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예측하였음에도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에 대해 행동을 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조지프 르두는 인간의 마음에 있어서 무의식적 과정이 있고, 각 과정들이 통합되어야 하나의 온전한 ‘인간’이 된다는 점에서 인간의 정신을 ‘인지’, ‘감정’, ‘동기’로 나누고 각 과정들의 상호작용으로 인간의 마음을 설명하였습니다. 인지과정을 통해 외부 자극을 인식하고, 때때로 나머지 과정을 억제하고, 감정의 과정에서는 선천적, 후천적으로 각인된 암묵기억을 통해 주의를 집중시키도록 하며, 동기화과정에서는 그 상황에 맞게 행동을 하도록 유도합니다. 이 과정에서 특정과정이 다른 과정을 일방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각 과정 간에 상호통제를 함으로써 한 인간의 마음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다시 정서가 손상된 환자 사례로 돌아가면, 이 환자는 정서시스템 연결이 손상됨으로써 정서를 느끼지 못하고, 더 나아가 동기화 시스템으로의 출력마저 이루어지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동시에 인지시스템은 어느 정도 손상을 면해서 행위의 결과를 예측할 수는 있었지만, 나머지 시스템의 붕괴로 인간으로서 ‘적절한’ 행위를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림에서 반쪽을 찢어버릴 경우, 대략 그림이 불충분하긴 하지만, 나머지 반쪽에서는 ‘의미’가 남아있게 됩니다. 하지만, 두뇌에서 특정 영역이 손상될 경우, 그 인격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퍼스낼러티를 지니게 됩니다. 두뇌의 절반이 제거되는 것은 물리적으로 보면 그림 절반을 찢어버리는 것과 동등할지 모르지만, 두뇌의 각 영역은 서로 간에 상호작용을 하여 정신을 이루는 체계이기 때문에 단순히 물리적 손상이 어느 정도였는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받게 됩니다. 마치, 자동차 부품의 절반을 무작위로 제거할 경우, 그 자동차의 속력이 손상된 비율만큼 속력이나 연비 등의 성능이 50%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작동을 못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인간의 마음을 설명하는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여러 두뇌 기관 간의 연결이나 관계이고, 이런 연결에 의한 상호작용은 각 개별 기관들이 지닌 속성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속성을 탄생시키는 것입니다.
시냅스=자아?
르두는 책 말미에 ‘당신은 당신의 시냅스들이다. 그들이 당신의 정체성이다.’라고 선언합니다. 하지만, 이 선언은 2장에서 ‘지금부터 나는 자아라는 용어를 살아 있는 생명체 전체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할 것이다.’란 선언과는 다소 모순되기도 합니다. 이전엔 시냅스를 포함한 개별 생명체 전체를 자아라고 표현하였지만, 뒤에선 이전 선언에서 정의한 것 중 일부가 자아라고 말바꾸기를 한 것입니다. 물론, 생명체 전체 중에서 시냅스가 자아에 미치는 영향력은 매우 강해서, 그걸 곧 자아로 치환해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란 주장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시각에 있어서도 문제점이 있습니다.
먼저 두뇌 외의 신체와의 상호작용도 인간의 마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쉬운 사례로는 사람의 위장이 비게 될 경우, 그 신호를 두뇌에 전달하고, 두뇌에선 밥을 찾아먹도록 유도합니다. 신체로부터 정보를 수합하고 행위를 하도록 하는 것은 두뇌이지만, 그런 반응을 하도록 만든 것은 위장인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알바 노에의 <뇌과학의 함정>에서 일부분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만일 새로운 신경 과학계가 옳다면, 최소한 원론적으로는 페트리접시에 의식을 담는 일이 가능해야 한다. 페트리 접시 안의 의식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는 적절한 물질 속에서 서로 이어진 상태로 자극을 받는 세포들뿐일 것이다....(중략)...
그 통이나 페트리접시가 단순히 접시나 양동이일 수는 없는 것임을 생각해보라. 그것은 에너지를 공급해서 세포들이 대사 활동을 하는 데 필요한 양분을 주어야 할 것이고, 노폐물을 배출할 능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환경 속에 놓인 몸이 일상적으로 하는 만큼 뇌로 보내는 자극을 통제할 수 있으려면, 그 통은 매우 복잡하고 전문화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중략)... 당신이 실제로 이 사고 실험의 세부 사항들을 충분히 생각해보면, 그 통은 사실상 살아있는 몸과 같은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알바노에, 김미선 역. <뇌과학의 함정>. p.39~40)
사고실험을 넘어서, 실제로 신체는 인간의 마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극단적인 의학적 증상으로, ‘잠김 증후군’이란 사례가 있는데, 이 환자들은 감각을 계속해서 받아들이지만, 뇌에서 근육으로 나가는 출력은 거의 모두 상실하게 됩니다. 때문에 정신적으로는 깨어있지만, 전신마비가 된 상태가 됩니다. 다행히 안구운동만큼은 유지할 수 있어서 눈을 깜빡임으로써 의사소통은 부분적으로 가능합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이 극도의 좌절감이나 공포감을 느낄 것이라 예상하지만, 예상 외로 이 환자들은 다소 가라앉은 느낌이라고 응답할 뿐, 공포감이나 자살충동을 나타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평상시 외부자극을 받을 경우, 이 자극을 두뇌에서 처리를 하고, 신체에 출력을 보낸 이후 신체로부터 피드백을 받음으로써 감정을 완성시키게 됩니다. 하지만, 이 환자들의 경우는 신체로 보내는 출력이 사라짐으로써, ‘근육을 안절부절 못하게 만들거나, 가슴의 울렁거림을 야기하거나, 또는 다른 신체 변화를 유발하는 메시지를 내보내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뇌는 차분함의 메시지를 받게 된다고 합니다.(James W. Kalat. <생물심리학 제8판>. p.439)
더 나아가 환경적 요인과의 상호작용도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우리는 우울증에 걸릴 때에 정신과에서 약을 먹음으로써 안정을 취합니다. 더 나아가, 종종 몇몇 사람은 마약을 통해 인지적 변화를 겪기도 하지요. 이런 화학적 자극은 환경이 시냅스와 미치는 상호작용 중 가장 극단적인 사례입니다. 사회적 환경도 두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데, 지나치게 고양된 집단의식에 의해서 두뇌에 기능부전을 일어나 가혹한 집단적 폭력이 일어난다는 가설도 있습니다. (I.Fried. (1997). <Syndrome-E>. The lancet. 350: 1845-1847. )
이처럼, 우리의 자아를 이루는 요인들은 생각보다 더 복잡합니다. 시냅스는 우리의 자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부일 뿐, 전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시냅스를 넘어
조지프 르두의 <시냅스와 자아>는 시냅스 메커니즘과 여러 인지과정의 연결에 대해 깊이있는 설명을 함으로써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 한층 더 높은 시각을 제공해주는 책입니다. 두뇌나 마음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며, 종종 ‘대충 알기만 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무엇을 잘못 알고 있었는지를 깨우치게 합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서 인간의 마음을 단순히 시냅스에 한정시키려 한다면, 그 것은 적절하지 못한 시각이 됩니다. 물론, 인간의 신체나 외부 환경에 대한 자극은 거의 두뇌에서 처리되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시냅스 자체로는 논리적으로 자아와 동일시될 수 없습니다. 르두가 인간의 마음을 인지, 감정, 동기 세 체계 간 상호작용으로 설명했던 것처럼, 인간의 자아도 신체, 두뇌, 그리고 환경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앞서 두뇌의 특정 영역이 손상되는 것은, 그 영역의 물리적 비율 이상으로 인간의 인지과정이 손상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자아를 영위하는데에 있어서 신체, 두뇌, 환경 중 하나라도 심각한 손상을 입을 경우, 그로 인한 ‘자아’의 손상은 그 물리적 비율 이상이 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그리고 자아는 여러 개별 요인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것을 이루는 개개 요인들은 지극히 사소해서, 각각만 봐서는 결코 자아를 떠올릴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것이 서로 연결되고 체계를 이루고, 상호작용을 함으로써 어엿한 하나의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자아는 ‘우리의 시냅스들’은 물론, 그 밖에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첫댓글 자아라는건 신체 두뇌 환경의 상호작용으로 일어나는 거라...
물론 저희가 토의했던 논점은 '기억'이 단백질 '구조'인 신경망(대뇌피질)에 저장되어 있다라는 것이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자아는 거기서 한층 더 나아가서 신체와 두뇌, 그리고 신체와 환경의 상호작용으로 항시 영향을 받고 형성(변형?) 중이라고 볼수 있겠네요.
생명의 정의 중에서도 외부자극과의 반응이 조건중에 하나이니.... (모바일로 수정해버리니까 뒤에 다 짤려서 컴터로 다시 썼습니다 ㅠㅠ 대충 이런 글이였나)
시냅스는 '단백질'로 구성된게 아닙니다...(...) 시냅스는 축삭과 수상돌기 사이에 벌어져있는 틈을 말하는 것이죠.
아, 신경망이라고 쓴다는걸 시냅스라 썼습니다 수정하죠. 기껏 따옴표를 써가며 구조를 강조한 이유가 신경망이라는걸 강조하기 위해 쓴건데 엉뚱한 단어를 써서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은 꼴이 되버렸네여 -_-;;
어떻게 생각해보면 시간에서 연속성을 빼면 시간일수 없듯이 자아라는 것도 연속성(즉, 끊임없는 외부자극과의 반응과 과거의 기억간의 연계)을 빼면 자아라고 볼수 없겠죠? 문득 이런 생각이 드네요. 식물인간에게 자아가 있는가? 아니, 있더라도 반응 혹은 표현하지 못한다면 자아를 가진 개체로 볼수 있는가? 과거에는 자아를 가졌지만 현재는 아니라고 표현해야하나? 전문적으로 배운게 아니라 표현을 잘 못하겠고 뜬금없는 생각이긴 합니다만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