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詩는 >
나의 시는 두려움이었어
산의 10번지에 살던 유년기의 얘기야
이슥한 밤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지
폐허의 정류장을 지나다 우두커니 선 유령을 보았어
오줌을 지릴 만큼 무서웠지
그 앞을 내달리며 난 큰소리로 노래했어
아마 '황금박쥐'를 백 번도 넘게 불렀을 거야
바람에 흔들리는 변소 가마니 문은
어린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이었지
가난한 겨울 취하신 아버지 막걸리 심부름도
'황금박쥐'가 없인 못 했을 거야
아, 얼마나 많이 불렀을까
캄캄한 골목 달리며 두려움에 질려 그 노래만 불렀거든
나의 시는 외로움이었어
제 날에 기성회비를 내지 못하면
토끼 후리듯 제자들을 내몰았던 교실에서 쫓겨나
하릴없이 걸어간 곳이 용당이었지
동명목재 앞 바다를 메운 뗏목을 타고 놀며
외로움이 뭔지 몰랐지만 그냥 쓸쓸했어
누군가 버리고 간 통줄과 미끼를 주워
해 저물녘까지 꼬시래기와 노래미를 잡았지
집에 갈 때엔 다 버릴 고기였는데 한 마리 한 마리
왜 그리 챙겼는지 모르겠어
뗏목 어딘가에 숨겨둔 책가방 찾아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많이도 울었지
또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게 슬펐어
일곱 형제 학교 보내느라 등골이 휘는 어머니께
기성회비 얘긴 차마 할 수 없었거든
어린 가슴에 쳐들어온 불가항력의 외로움은
여태 살면서 가장 지독한 게 아니었을까 싶어
나의 시는 거리에서 시작되었어
꽃잎처럼 흩날리던 광주의 눈물을 만나며
난 서서히 거리의 전사가 되었지
투표로 만들어진 권력은 가짜라고 믿었어
위대한 혁명가의 삶이 날 뒤흔들었고
가투가 잦아지며 무시로 유치장을 들락거렸지
그땐 정말 배를 가르고 싶은 충동으로 살았어
비밀결사의 동지들과 한 잔 마시곤 퀭한 눈으로
발도 씻지 않고 쪽방에서 뒤섞여 자던 불면의 밤들
남포동에서 오버브릿지에서
대청동에서 서면에서 온천장에서
아가리 쩍 벌리고 언제 우릴 집어삼킬지 모르는
시대를 끝내는 게 그땐 왜 그리 힘들었는지
그래, 젊음만으로 맞서는 게 무리였을지도 몰라
나의 시는 스산한 병원의 그림자였어
아픈 아내랑 내 집 드나들 듯했지
온천극장 문을 나서다가도 응급실로 달렸으며
떡볶이를 먹다가도 응급실로 달렸지
병원은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곳이었어
몸과 마음이 찢어지고 썩어 들어가도 누구 하나
슬퍼하지 않는 도둑놈의 성이고 부품들의 성이지
고립된 인간이 절규하며 몸부림치는
비열하고 차디찬 체제의 본부 같은 곳이야
인간의 길이 아닌 짐승의 길을 가기로 작정한
체제가 만든 최고의 걸작이 병원일 거야
목숨 건 싸움을 버티는 패배와 절망의 두려움을 향해
무한의 겸손과 인내, 눈물과 돈을 요구했어
아내를 반드시 치료해야 했던 난
이미 두 아이의 아버지고 가장이었거든
나의 시는 아이들의 영혼이었어
생사의 경계를 무시로 넘나들던 아내의 몸에서
가을 하늘처럼 맑은 눈을 가진 아기가 태어났지
그 아기는 생애 최고의 기적이고 신비였어
뒤집고 엎드리고 기고 일어나 걷는 걸 보며
모든 아기가 꽃처럼 아름답고 신비했지
우연히 발견한 그 감동은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어
사상공단 입구 허름한 철공소 이 층에서 기적을 보았지
로마 뒷골목 산 로렌쪼의 기적과 비슷한 것이었어
가난한 노동자의 아이를 돌보는 일은
일당 만 원짜리 실낱의 삶을 붙드는 일이었거든
기쁨이고 축복이었던 서른 명의 아이들, 그 작고 여린
꽃의 궤적을 발견하는데 오래 매달렸지
꽃을 사랑하는 일은 별을 발견하는 것이었고
꽃을 배우는 일은 태양에 몸을 데는 일이었거든
세월이 흐르고 나니 아이들이 날 다 가르쳤더군
이십 년이 훌쩍 지나 비로소 깨달았어
찢어지게 가난했던 노동자의 아이들에게서 배운 건
언제든지 돌려줄 거라 생각하며 살았어
언제쯤일까, 아이들이 내 품에 안겨 잠들고 꿈꾸는
동네 어귀 버드나무 같은 할아버지가 되고 싶어
나의 시는 섬과 바다였어
형이상의 고독을 증폭시키는 곳이 바다였지
반짝이는 별이 어깨에 내려앉아 소곤대는 곳이었어
직벽을 기어오르던 너울이 깨어져 대양을 향할 때
유랑하는 뭇 생명의 아우성을 들을 수 있었어
생명의 양식이 되기 위한 바다의 몸짓이 파도임을 배웠지
하나둘 반역의 거리를 떠나던 날 난 미칠 것 같았고
공의가 넘실대던 거리는 폐허의 전장이 되고 말았지
패배의 찌꺼기 들이켜는 물신의 거리를 바라보며
난 아무 말 없이 바다로 떠났고
바다에도 아득한 그늘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
갯내음 우내리 물질하는 해녀도 선장도
늙은 다방 레지도 그 그늘로 날 초대해주었어
거기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거든
꿈꾸며 돌아올 수 있었던 바다가 좋았어
사는 게 너무 재미없어 가끔 펑펑 울고 싶을 때
바다는 내 투정 다 받아주고 위로해 주었거든
나의 시는 기도였어
모두가 잠든 어느 겨울밤
도둑고양이처럼 찾아 들어간 동네 예배당에서
가장 낮게 엎드리라는 묵언을 들었어
사랑 말고는 내 품에서 모든 게 다 날아갔을 때
그 허기에 남김없이 무너진 후 외려 영혼이 명징할 때
신은 비로소 손을 내민다는 걸 알게 되었지
어느 것도 허투루 된 것이 없음을 배웠어
사랑하며 살지 않으면 단 하루도
제대로 사는 게 아니란 걸 깨닫게 된 거지
피 흘리며 성문을 나와 죽음의 언덕 뚜벅뚜벅 걸었던
외침에 무릎 꿇고 속죄와 평화를 기도했어
권력이 아닌 것과는 싸우지 말라는 위대한 훈육이었지
나의 시는 노래였어
각성의 밤, 바람처럼 창으로 스며들어
고독한 날 위로한 건 오직 노래뿐이었거든
무수한 상처와 기억을 견디기 위해
숙명처럼 불러야 하는 자기 치유의 노래 말이야
시는 결핍을 사랑한다지만 난 행복하지 않아
아니 결코 행복하지 않으려고 해
그냥 절망의 끝에서 눈물로 깨우치는 노래면 좋겠어
볕 따스한 겨울 어느 날
담벼락에 기대어 졸던 유년기의 꿈처럼
잠시 스치는
따스한 안식의 노래라면 좋겠어
김일석시집. 조까라마이싱 . 산지니.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