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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9월 11일 수요일
[(녹)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한다면서,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는 문제를 이야기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그대는 아내에게 매여 있습니까? 갈라서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아내와 갈라졌습니까? 아내를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7,25-31
형제 여러분,
25 미혼자들에 관해서는 내가 주님의 명령을 받은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자비를 입어 믿을 만한 사람이 된 자로서 의견을 내놓습니다.
26 현재의 재난 때문에 지금 그대로 있는 것이 사람에게 좋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27 그대는 아내에게 매여 있습니까? 갈라서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아내와 갈라졌습니까? 아내를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28 그러나 그대가 혼인하더라도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또 처녀가 혼인하더라도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혼인하는 이들은 현세의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것을 면하게 하고 싶습니다.
29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30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31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20-26
그때에 20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21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24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1코린 7,31). 지난해에 아버지의 임종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내세에 대한 희망 같은 것은 전혀 생각도 하지 않은 아버지였지만, 그렇다고 현세에 집착하거나 죽음을 아쉬워하지도 않았습니다. 마지막 말씀은 의사들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었고, 인사도 없이 그냥 가셨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에서 저는 혼란스러웠습니다.
신앙이 없는 삶에 대해서가 아니라, 신앙이 있다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많은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세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삶에 대하여 아무 미련 없이 떠나가는데,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현세에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하고, 자기 몸을 끔찍이 아끼며, 아주 사소한 예를 들면 선풍기는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두려 하는 우리의 모습을 설명할 수 없어 보였습니다.
이 세상의 형체는 사라지고 있음을 과연 믿는 것일까요? 영원한 생명을 믿는 것일까요?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에게,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현세의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고, 영원한 삶을 바라며 살라고 말합니다. 복음의 불행 선언도 같은 맥락입니다. 부유한 사람들, 배부른 사람들, 지금 웃는 사람들이 불행한 것은 그 삶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어떻게 살고 있는지, 삶 속 자신의 모습을 돌아봅시다. 마치 현세가 전부인 양, 이 세상에서 부유하고 배부르고 웃는 삶만을 선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안소근 실비아 수녀)
참된 행복은 결핍 가운데 숨어 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얼굴을 보아하니 ‘이 세상에서 나처럼 불행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는 표정으로 살아가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하시는 말씀을 가만히 들어보니 그 정도면 이 혹독한 세상에서 꽤 괜찮은 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기에 그리도 불행한 삶을 살아가며, 살아생전 연옥체험을 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대로 제가 보기에도 ‘정말이지 하느님께서도 너무하시지? 정말 하느님이 계시긴 한 건가?’ 할 정도로 힘겹고 참담한 삶을 살아가시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그 얼굴은 ‘이 세상에서 나처럼 행복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하는 얼굴도 있었습니다.
저는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참으로 상대적인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말입니다.
행복과 관련해서 지금에야 깨닫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네 삶 가운데 행복의 순간은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의 씨앗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행복은 결핍 가운데, 부족함 가운데, 시련이나 역경 가운데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 지역을 방문할 때였습니다. 감사하지만 부담스러운 극진한 환대가 매일 계속되었습니다. 매 끼니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였습니다. 매일 저녁 밤늦은 시간까지 성대한 파티가 계속되었습니다.
먹고 또 먹고, 마시고 또 마시고...그 대신 운동량은 지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한 일주일 정도 반복되니 세상에 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반대로 바쁜 일이 있어 본의 아니게 몇 끼니를 건너뛰었습니다. 이윽고 촉각을 다투는 일들을 대충 마무리 짓고 나니 너무나 배가 고팠습니다. 가까운 순대국밥 집에 가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7천원 짜리 순대국밥을 한 그릇 마주 대하니 너무나 행복해서 눈물이 다 나왔습니다.
우리가 매일 느끼는 결핍, 갈증, 배고픔, 부족함, 피곤함, 외로움, 슬픔...이런 요소들이 사실은 행복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지니고 있는 행복에 대한 개념, 곰곰이 한번 되새김질해보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박해받는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곁들여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행복과 불행에 대해 아주 쉽고도 명료하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천국에 이르는 길은 소유가 아니라 가난임을, 창이나 칼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임을 선포하십니다. 참된 행복은 축척을 통해서가 아니라 버림을 통해서 온다는 것, 참된 기쁨은 올라감이 아니라 내려섬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설파하십니다.
비록 부족한 우리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 인생을 동반해주시니 감사하면서 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내 인생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매 순간을 감사하면서 충만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면 어느새 행복은 우리 손 안에 들어와 있을 것입니다.
행복의 관건은 ‘누구를 위해 가난해질 것이냐?’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루카의 행복 선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그리스도 때문에 박해받아 우는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굶주리고 멸시받는 사람들이 다 행복할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 고통이 ‘봉헌’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봉헌될 때 내가 비워지고 그 자리에 주님의 ‘뜻’이 채워지며 그래서 나로부터 자유로워져 많은 이들을 자신 안으로 초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해지려면 행복과 쾌락을 구분해야 합니다. 쾌락은 가지는 것, 먹는 것, 세지는 것으로 얻는 기쁨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쁨은 적응됩니다. 이를 쾌락 적응이라 합니다.
UC 리버사이드 심리학과 교수 소냐 브로머스키는 복권에 당첨되든, 직장에서 승진하든, 결혼을 하든 몇 개월만 지나면 이전의 행복 수준으로 돌아온다고 많은 사례를 통해 주장합니다. 우리도 사실 살면서 그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더 큰 쾌락, 혹은 중독으로 성공했다는 사람들까지 빠져버리는 예가 많습니다.
어떤 물고기가 물에 대해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 물고기는 묻습니다.
“물이 뭐예요?”
물은 행복입니다. 행복은 행복 자체에 있으면 적응됩니다. 전혀 행복한 줄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물 밖으로 잠시 나가서 숨을 못 쉴 정도가 되어야 자신이 물속에 살고 있음을 감사할 줄 알게 됩니다. 따라서 건강의 행복을 아는 사람은 운동의 고통을 즐길 수 있고 라면을 맛있게 먹으려는 사람은 배고픔을 참을 줄도 압니다. 행복을 아는 사람은 고통도 즐길 줄 알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을 즐길 줄 모른다면 사실 참으로 행복하기를 원치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가난과 배고픔, 멸시받음이 무조건 행복으로 이끌어 주지는 못합니다. 일본의 카미카제 자살 특공대는 황제가 하사했다는 사케를 한 잔씩 하고 죽음으로 갑니다. 그런데 그 죽음은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죽음입니다. 자기를 봉헌하지만, 결과는 자기의 죽음과 타인의 죽음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마치 성전이나 병원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처럼 사회 약자들, 가난한 이들을 받아들이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위해 가난해지고 약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뜻은 인간이 줄 수 없습니다.
인간은 그 본성상 모든 타인을 다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오직 부모와 같은 창조자를 위한 가난과 자기 봉헌만이 두려움 없이 나를 내어줄 수 있게 합니다.
‘노숙인들의 슈바이처’로 불렸던 요셉 병원 선우경식 원장이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분은 자신이 암에 걸린 줄도 모르고 결혼도 안 하고 홀어머니를 모시며 노숙인들의 무료 병원을 운영하였습니다. 73년 미국에서 의학 공부를 하고 저명한 대학병원들로부터 자리를 제안받았으나 한국에 돌아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료 병원을 세웠습니다.
신발이 다 떨어져도 꿰매 신고, 차가 다 낡아서 사람들이 선물해 준다고 해도 의료품으로 달라고 하였습니다. 선우 원당은 봉사를 희생이 아니라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평소 “환자들은 내게 선물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귀한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기에 나는 항상 감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의 장례식 때 요셉 의원 현관접수를 맡고 있던 안수근 씨가 조사(弔辭)를 읽었습니다. 고아원 출신으로 신림동 다리 밑에서 살면서 술과 싸움을 일삼던 그였습니다. 그러나 선우 원장은 포기하지 않고 그를 재활시키고 일거리도 주었습니다.
안 씨는 “제 소원은 아버지, 어머니를 불러보는 것인데 살아 계실 때 원장님을 아버지라 불러보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이젠 저 속 안 썩이며 열심히 살게요. 아버지~”
이태석 신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도 하느님의 뜻에 자기를 봉헌한 이들이었고 정말 가난하고 배고프고 멸시받았지만,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나로 하여금 소중한 많은 것들을 뒤로한 채 이곳까지 오게 한 것도 후회 없이 기쁘게 살 수 있는 것도 주님의 존재를 체험하게 만드는 나환자(한센인)들의 신비로운 힘 때문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그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하게 된다.”
참 행복은 사랑에서 옵니다.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더 주기 위해 가난해져야 하고 더 먹이기 위해 배고파져야 하며 높이기 위해 낮아져야 합니다. 이것이 루카의 행복 선언입니다. 이렇게 사랑할 줄 알게 된 사람은 자신을 마치 자기 것을 빼앗길 오두막처럼 여기다가 이제는 하느님이 사시는 성전처럼 여기게 됩니다. 이 자존감이 행복의 수준입니다.
이 행복을 아는 이들이라면 자발적으로 자선하고 단식하고 기도를 할 것입니다. 마치 마시멜로 실험처럼 그 뒤에 올 행복 때문에 지금의 기쁨을 봉헌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회에서 찬양 때 부르는 성가를 ‘복음성가’라고 합니다. 복음성가 중에 종교를 초월해서,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던 노래가 있습니다. 복음성가이면서도 방송에서 많이 소개되었던 노래입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도 가사나 멜로디를 기억하는 분이 있을 겁니다. 혹시 제목이 기억나시는 분 있으신가요? 1997년에 발표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교회에서 찬양 성가로 불렀는데, 많은 가수가 이 노래를 부르면서 일반 대중에게도 사랑받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이 노래가 사랑받았던 이유는 당시 우리 사회가 ‘IMF' 국가 부도 위기 상황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회사가 쓰러졌고, 많은 직장인이 실직했습니다. 경제위기는 가정의 위기, 개인의 위기가 되었습니다. 서울역과 을지로에는 노숙자들이 많았습니다. 당시 저는 교구청에 있었습니다. 강의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을지로 지하상가에 있는 노숙자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박세리 선수가 물가에서 힘차게 끌어올린 공이 US 여자오픈에서 우승의 견인차가 되었듯이, 박세리 선수의 우승은 국가 부도의 위기에 몰린 대한민국 국민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도 'IMF'의 거센 파도에 침몰할 것 같았던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받고 있지요./ 태초부터 시작된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참으로 아름다운 가사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사랑받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 사랑은 하느님께서 태초부터 준비하셨다고 합니다. 그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 맺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그것만으로도 기쁨이 된다고 합니다. 불가에서는 옷깃을 스치는 인연을 얻기 위해서 수많은 시간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천년에 한번 하늘에서 내려오는 선녀의 옷자락이 바위를 스치고, 그 스치는 옷자락으로 바위가 사라지는 시간이 흘러야 비로소 옷깃을 스치는 인연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 시간은 억만년도 더 될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만나서 가족을 이루고,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시간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신앙인들은 그런 인연은 모두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셨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 오늘 내가 만나는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을 이야기 하십니다. 그것은 진흙 속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연꽃’과 같습니다. 시련 속에서도, 절망 중에서도, 고통의 한 가운데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행복은 어떤 조건이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물론 행복은 소유에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가난할지라도, 병중에 있을지라도, 시련과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하느님을 믿고 따르면 행복하다고 하였습니다. 많은 재물을 가졌을지라도, 높은 자리에 있을지라도, 많은 능력을 가졌을지라도 하느님을 떠나 있으면 행복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감사하십시오. 항상 기도하십시오. 늘 기뻐하십시오." 라고 권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불행은 불평의 문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매사에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사람은 건강해도 재물이 많아도 능력이 있어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분은 노래도 잘 하였고, 말도 잘 하였고, 외모도 잘 생겼습니다. 제게 없는 것을 많이 가졌습니다. 그런데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이 많으면 많아서 힘들다고 했습니다. 일이 적으면 무시당한다고 원망 했습니다 상사에게는 대화가 안 된다고 불만이 있었습니다. 젊은 직원에게는 예의가 없다고 불만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감사하는 사람에게 행복은 늘 곁에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원망과 불평이 가득한 사람 곁에는 행복이 머물 수 없습니다. 행복하고 싶다면 감사의 문을 활짝 열면 됩니다. 계속 행복하고 싶다면 불평의 문은 꼭 잠가 놓으면 됩니다.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오늘의 성인
성 요한 가브리엘 퍼보일러(John Gabriel Perboyre)
신분 : 선교사,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 중국(China)
활동연도 : 1802-1840년
같은이름 : 가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페르보이르, 한스, 후안
1802년 1월 6일 프랑스 남부 카오르(Cahors) 교구에서 태어난 성 요한 가브리엘 퍼보일러(Joannes Gabriel Perboyre)는 15세 때에 강론을 듣고 외국으로 나가는 선교사가 되려는 꿈을 키웠다. 1818년 12월, 형과 함께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선교회에 입회하여 서원을 하고 1826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소망과는 달리 첫 부임지는 생 플뢰르(Saint-Fleur) 신학교의 교수였고, 1832년에는 파리(Paris)에 수련자들을 위해 세워진 수련원의 부원장이 되었다. 늘 중국 선교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던 그는 형이 중국에서 선교하다 죽은 후 더욱더 중국 선교 대한 원의를 다졌다.
마침내 그는 1835년에 중국으로 가는 선교사로 허락을 받고, 마카오를 거쳐 이듬해 6월 중국 땅에 도착해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에는 양쯔 강 근처 허베이 성[河北省]의 선교사제로 임명되었다.
그러던 중 1839년 제1차 아편전쟁이 발발하면서 중국 전역에서 유럽인들과 그리스도교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되었다. 당국의 감시를 피해 다니던 그는 어느 신입교우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1년여 동안 잔인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킨 그는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고 '붉은 산'이라 불리는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묶인 채 밧줄로 목이 졸려 교살당했다.
성 요한 가브리엘 퍼보일러 신부의 선교 활동과 순교는 중국 선교의 마중물이 되어 그리스도교가 중국 전체에 급속도로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1889년 11월 9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됨으로써, 중국 지역에서 순교한 이들 중에서 첫 번째로 시복된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1996년 6월 2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 프로토 (Protus)
활동년도 : +257년?
신분 : 하인, 순교자
지역: 로마(Roma)
같은 이름 : 쁘로또, 쁘로뚜스, 프로또, 프로뚜스, 프로투스
성 히야친토 (Hyacinth)
활동년도 : +257년?
신분 : 하인, 순교자
지역 : 로마(Roma)
같은 이름 : 히야친또, 히야친뚜스, 히야친투스, 히야친트, 히야킨또, 히야킨뚜스, 히야킨토, 히야킨투스
4세기 중엽에 쓰여진 "로마 순교자 증언록"(Depositio Martyrum)에 등장하는 성 프로투스(또는 프로토)와 성 히야킨투스(Hyacinthus)는 순교한 후에 살라리아(Salaria) 가도의 대성전에 묻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들의 무덤은 4세기에 산사태로 매몰되었는데 교황 성 다마수스 1세(Damasus I, 12월 11일)가 이를 다시 보수한 후 성인들의 묘비명(墓碑銘)을 기록했는데 그중 일부가 현재까지 남아있다.
그리고 "성녀 에우게니아의 수난기"(Passio S. Eugeniae)에 따르면 형제 사이인 성 프로투스와 성 히야킨투스는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백작 성 필리푸스(Philippus, 9월 13일)의 딸인 성녀 에우게니아(Eugenia, 12월 25일)의 환관이자 시종으로 그녀를 따라 알렉산드리아로 갔다. 그들은 성녀 에우게니아와 함께 헬리오폴리스(Heliopolis)의 주교인 헬레누스(Helenus)에게 세례를 받고 열성적으로 성경을 공부했다. 그들은 또한 이집트의 은수자들과 함께 살다가 성녀를 동행하여 로마로 갔다. 그들은 257년에 시작된 로마 황제 갈리에누스의 박해 때 체포되어 로마 신전에 희생 제물을 바치도록 보내졌다. 하지만 그들은 배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기도로 신전의 신상이 먼지로 변하자 심한 매를 맞고 참수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후대에 발굴된 유해의 상태로 보아 화형을 당해 순교했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