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읽기모임에서 진행한 1박2일 MT에 다녀왔다. 일영계곡에 있는 가족형펜션에서 진행됐는데, 나는 학교행사로 저녁 먹을 때 들어갔다. (다른 가족들은 점심 때부터 와서 아이들과 꽝꽝 언 계곡물 위에서 썰매를 타며 놀았다고 한다. 추억의 꼬챙이 썰매타기다. 그만큼 난 나이를 먹었고, 다른 참가팀은 비교적 젊은 부부들이다)
민들레읽기모임에 참석한지 꼭 3년이 됐다. 2009년 초에 합류했으니까. 그땐 다들 나를 경계했었다고 한다.
"이 아저씨 왜 여기 나오는 거지? 뭔 목적이지? 이 아저씨의 정체는 뭐람?"
이런 생각들이 대부분이었다. 충분히 이해한다. 남자(아빠)의 참석이 거의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 고민을 풀어놓는 것이 기존 멤버들에게는 "잘난 척"으로 보였을게다. 하지만 그후 내 진정성을 인정받고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됐다. 특히 단재학교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온전히 공유한 동지적 관계의 모임이 됐다.
이 모임에 열심히 참석하는 것은 고민 해결의 많은 영감과 힌트를 얻기 때문이다. (그동안 쌓인 정도 물론 작용한다. 어떤 만남이든 내게 이득을 준다는 이유만으론 이어지지 않는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많은 배움이 있었다. 박동섭 교수가 참석한 것도 필참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다.
여기서 얻은 깨달음이 아래 글에 반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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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한 청소년에 대처하는 어른들의 태도에 등급이 있다. A/B/C로 나눌 수 있다.(2007년부터 교육상담소를 운영했다. 그 때 만난 청소년과 그 부모들을 통해서 경험하고 정리된 "나만의" 통계치다)
A는 고민 없이 관성대로 움직이는 즉자(卽自)적 부모다.
"너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봐라, 최고은(얼마전 아사한 것으로 알려진 시나리오 작가)에게 누가 쌀 한톨 주더냐. 니 그처럼 살면 거지된다. 지금은 부모가 밥 주고 재워주니까 그렇지. 야~ 이 새끼야. 너 거지새끼라구. 아이구 답답해"
A도 당연히 자식을 사랑하기에 분통을 터트린다. A의 사랑 충분히 이해한다.
B는 작전을 고민하는 분이다. 생각은 A와 다르지 않다.
"엄마, 아빠는 널 사랑한단다. 우리도 너만 때 그랬지. 질풍노도가 때론 질풍로또로 착각되기도 하지. 무기력해보이지만 네 안의 욕망이 느껴진다. 넌 지금 번데기 상태로 있단다. 겉보기엔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번데기가 때가 되면 날개를 펴며 아름다운 나비가 되듯 너도 그렇게 변할 거다. 엄마, 아빠는 그걸 믿고 있다. 네가 화려한 제비호랑나비든 소박한 배추흰나비든 상관 없단다. 그런데 말이다. 이것만은 꼭 알아두길 바란다. 번데기가 성충이 되는 타이밍이 있단다. 그 시기를 넘기면 번데기는 썩어버린다. 그러면 백약이 무효하지. 뒤늦게 후회한들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된다. 알았지?!"
대개 A보다 B를 아이들은 더 무서워한다. 그것은 말 그대로 공포다.
C의 경우는 드물다. 웬만한 내공이 아니면 C가(C처럼) 될 수 없다. C는 즉자적대자(卽自的對自)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C만이 가치 있는 부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이 철학자나 도인만으로 구성된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C가 즉자적대자로서 자신을 자리매김한다면, 또한 부모로서 자식을 즉자적대자(또는 앞으로 그렇게 발전할 존재로)로 대접한다. 사랑은 지켜보는 것이며 나아가 어느 시기가 되면 서로 다른 사회적 존재임을 인정하고 남남으로 헤어지는 것이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혹 자식이 법률적, 도덕적으로 잘못을 저질러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에너지가 있다.(그렇다 그것은 진정 충분한 에너지가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더더더 나아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자유롭다. 내 자식이 어느 별에서 왔다가 결국 그 별로 돌아갈 존재라고 생각하기에 가능하다고 본다. C의 자식은 자신의 보호자와 헤어짐이 예정돼 있음을 알지만 두려워하지 않는다.
C는 과거에 많이 존재했다. 농경사회 부모님들 대부분이 C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상당한 공부를 통해서만 C에 이를 수 있다. C에게는 수많은 방법이 보이고, 그 방법들의 위계가 없다. 모두 같은 가치를 가진다. 그야말로 매끄러운 면에 존재한다. 전후좌우 방향이 따로 없다. 어떤 행보든 진보이다. 또한 어떤 나아감도 후퇴가 된다. 아니 진보와 후퇴의 개념을 넘어선다. 그래서 진정 자유롭다.
(내 아내는 A와 B를 왔다갔다 한다. 나는 A,B,C를 왔다갔다 한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아내가 냉소를, 딸이 파안대소를, 아들이 썩소를 날린다. 그래도 나는 C를 지향한다고 말하고 싶은 존재라고 우긴다)
어제 밤샘 공부모임에서 '근대의 개념'에 대해 이야기가 나왔다. 박동섭 교수가 정리된 페이퍼도 준비하고 설명도 해줬다.
이런 얘기가 오가기도 했다.
"우리가 언제 모던을 겪었던가? 그러니 포스트모던을 말할 수도 없잖은가"
탈근대가 당연하다는 것은 알겠는데, 포스트모던에 대한 경험이 없다보니 눈이 자꾸만 전(前)근대로 간다. 내 존재의 확인을 타자와 관계에서 읽어내려는 시도들이 농업중심 봉건적 사회를 되살린다. "옛날에는 말이야~" 따위들.(그래서 서당식 교육이 대안교육의 이름으로 되살아난다. 난 철저히 반대하는 사람이다)
아니다. 원래 인사이트는 만드는 것이다. 누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포스트모던은 판타지다. 형식은 스토리다. 근대는 학습자가 모르는 개념을 습득하는 것이 교육이라면 탈근대는 이야기 생산이 교육이다. 생산의 주체는 철저히 아이들이다. 그러니 가르침은 사라지고 배움만 존재한다. 정확한 개념을 알아야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객관적 진실이 폐기된 세상에서 유아독존식 지식이란 조롱의 대상일 뿐이다. 서당식 교육과정이나 고전을 중심으로 한 부지런한 학습이 얼마나 시대착오인지 알 수 있다. 어쩌면 시대착오도 하나의 스토리이다. 재밌게 짤 수 있다. 문제는 시대착오이기에 지금의 아이들이 절대로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내 얘기를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다. 내 얘기 자체가 판타지로 이해되고, 바로 허상이라는 것이다. 판타지에 대한 오해다. 판타지를 해리포터의 마법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주 자체가 판타지다. 근대의 상식으로 양자(量子)를 이해할 수 없다. 아인슈타인도 죽을 때까지 양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양자론은 스토리일 뿐이지만, 이 이야기가 60년 전에 반도체의 탄생을 만들었다. TV, 컴퓨터, 핸드폰 등으로 이미 우리의 현실이 됐다.
(이어서 풀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