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사람은 지혜로운 자, 어리석은 자, 어진 자, 불초한자, 가난한 자, 부유한 자, 귀한 자, 천한 자, 장수하는 자, 요절하는 자 등이 같지 않으며, 동물의 경우에는 어떤 것은 사람에게 길들여져 실컷 부림을 받고 드디어는 죽음을 감수하기도 하고, 크고 작고 강하고 약한 것들이 저희낄 서로 잡아 먹기도 하니, 하늘이 만물을 냄에 있어 하나 하나 부여해 줄 것이 어찌 이렇게도 치우쳐 고르지 못하단 말인가 ?
이렇게 보면 석씨의 이른바 '살아 있을 때 착한 일을 하였거나 악한 일을 한 것에 보응이 있다'는 것이 과연 그렇지 아니한가 ?
또 살아 있을 때 착한 일을 하거나 약한 일을 하는 것을 因이라 하고 다른 날에 보응을 받는 것을 果라고 하였으니 이 말 또한 근거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
말하기를 내가 위에서 사람과 만물이 생생하는 이치를 앞에서 자세히 論하였으니, 이를 이해한다면 윤회설은 저절로 변명될 것이요, 윤회설이 변명되면 인과설은 변명하지 않아도 자명해진다.
그러나 이미 질문이 나왔으니 내 어찌 근본적으로 다시 말하지 않으랴 ? 저 이른바 음양오행이라고 하는 것은 엇바뀌어 운행되며, 서로 드나들어 가지런하지 않다.
그러므로 그 기는 통함과 막힘, 치우침과 바름, 맑음과 흐림, 두꺼움과 얇음, 높고 낮음, 길고 짧음의 차이가 있으니, 안과 물이 생겨남에 그때를 마침 당하여 그 바르고 통한 것을 얻은 것은 사람이 되고, 그 치우치고 막힌 것을 얻은 것은 물이 되나니, 인물의 귀천이 여기에서 나누어진다.
또 사람에게 있어서도 그 기의 맑은 것을 얻은 자는 지혜롭고 어질며, 그 탁한 것을 얻은 자는 어리석고 불초하며, 두꺼운 것을 얻은 자는 부자가 되고 얇은 것을 얻은 자는 가난하며, 높은 것을 얻은 자는 귀하고 낮은 것을 얻은 자는 천하며, 긴 것을 얻은 자는 장수하며, 짧은 것을 얻은 자는 단명하니 이는 그 대략이다.
비록 물일지라도 또한 그러하니 麒麟, 龍, 鳳의 신령함, 虎狼 蛇훼의 독함, 椿, 桂, 芝, 蘭의 상서로움, 烏喙, 菫茶의 씀은 모두 치우치고 막힌 가운데에서 취하였고 또한 선악이 같지 않은 것이 있다. 그러나 모두 뜻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주역에 이르기를 '건의 도가 변화하여 각각 성명을 정한다.'고 하였으니 선유가 말한 '천도가 무심히 만물을 두루 덮는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오늘날의 의술이나 점술은 조그마한 술수지만, 점치는 사람은 복이나 화를 정하는데 반드시 행의 쇠퇴하고 왕성함을 근본으로 추구한다.
'이 사람은 木命이니 봄을 맞아서는 왕성하지만 가을을 맞으면 쇠퇴하며 그 용모는 푸르고 길며 그 마음씨는 자비롭고 어질다.'하고 '이 사람은 金命이므로 가을에는 길하나 여름에는 흉하며 그 용모는 희고 네모나며, 그 마음씨는 강하고 맑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때로는 水命을 때로는 火命을 말하며 해당시키지 않는 것이 없으니, 용모의 추함이나, 마음의 어리석고 사나움이 모두 오행의 품부가 치우침에 근거한다고 한다.
또 의사가 사람의 병을 진찰할 때에도 반드시 오행이 서로 감응함에 근본을 추구한다. '아무개 병은 한증이니 腎水의 증세'라 하고 '아무개의 병은 온증이니 心火의 증세'라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런 유의 것이다.
따라서 약을 쓸 때에도 그 약 성질의 溫,凉,寒,熱과 그 맛의 酸, 鹹, 甘, 苦를 음양오행에 나누어 붙여서 조제하면 부합되지 않는 것이 없다. 이는 우리 유가의 설에 '사람과 만물은 음양오행의 기를 받아서 태어낳다.'는 것이 명백히 증험되는 것이니 의심할 여지도 없는 것이다.
과연 불씨의 설과 같다면 사람의 화복과 질병이 음양오행과 관계없이 모두 인과보응에서 나오는 것이 되는데, 어찌하여 우리 유가의 음양오행을 버리고 불씨의 인과보응설을 가지고 사람의 화복을 정하고 사람의 질병을 진료하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느냐 ?
불씨의 설이 황당하고 오류에 가득차 족히 믿을 수 없음이 이와 같거늘, 그대는 아직도 그 설에 미혹되려는가 ?
이제 지극히 절실하고도 보기쉬운 예를들어 비유해보자. 술이라 하는 것은 국과 얼의 많고 적음과, 항아리의 덜 구워지고 잘 구워짐과, 날씨의 차고 더움과 기간의 오래된과 가까움이 서로 적당히 어울리면 그 맛이 매우 좋게 된다.
그러나 만약 얼이 많으면 맛이 달게 되고, 국이 많으면 맛이 쓰고, 물이 많으면 맛이 싱겁다. 물과 국과 얼이 모두 적당하게 들어갔다 할지라도 항아리의 덜 구워짐, 잘 구워짐에나, 또한 날씨의 차고 더움이나 기간의 오래됨과 가까움에 서로 어긋나 합해지지 않으면 술맛이 변하게 된다.
그리고 그 맛의 좋고 나쁨에 따라 그 용도도 상하로 다르게 되며, 지게미 같은 것은 더러운 땅에 버려져 발길에 채이고 밟히게도 된다.
그런즉, 술의 그 맛있게 되고 맛 없게 되는 것과, 상품도 되고 하품도 되는 것과, 쓰이기도 하고 버려지기도 하는 것이 모두가 다 일시적으로 마침 그렇게 되어서 그럴 뿐이니 술을 만드는 데에도 역시 인과의 보응이 있어서 그렇다고 하겠는가 ?
이 비유는 비록 비근한 것이기는 하지만 극히 명백하여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른바 음양오행의 기는 서로 밀고 엇바뀌어 운행되어서 서로 드나들어 가지런하지 않다.
그러므로 사람과 만물이 만번 변하여 태어나는 것이니, 그 이치가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성인은 가르침을 베풀어, 배우는 사람에게 기질을 변화하여 성현에 이르게 하는가 하면,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에게 쇠망을 바꾸어 치안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것은 성인이 음양의 기를 돌이켜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공에 참여하여 돕는 까닭이다. 어찌 불씨의 인과설이 그 가운데에 용납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