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는 많은 시간을 피서산장(避暑山庄)에서 보냈습니다. 현재 승덕(承德)에 위치하는 이 건축물은, 황제의 사냥터인 목란위장(木蘭圍場)으로 가는 길에 지어져 있습니다. 강희는 목란위장에서 사냥을 하며 심신을 단련함과 동시에, 이것을 군사훈련의 일환이자 소위 말하는 만주족의 상무정신을 유지하는, 좀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한족이라는 거대한 바다에, 만주족이 매몰되지 않게 하는 일종의 정치적 요소로 사용했습니다.
목란위장과 피서산장등의 특수한 역할만으로도 한편의 논문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실제로도 그러한 성격에 주목하는 논문들도 찾아보는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피서산장은 상당히 실용적인 목적으로 이루어졌고, - 황제의 건물임을 고려할때, 지나친 사치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강희는 피서산장에서 신하드르이 보고를 듣고, 국사를 처리했습니다. 본인 스스로도 시원한 기후를 좋아하는 편이라, 몸이 어쩐지 불편하다면 요양하는 차원의 성격도 될 터입니다.
몽골인들에게 재앙적인 요소 중에 하나가 천연두의 가공할 위협입니다. 몽골족은 초원을 떠돌아다니면서 살았는데, 이 말은 온갖 질병적 요소가 가득한 당시 도시인들에 비해 그들이 이러한 질병에 대해 면역적인 체계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고, 실제로 훗날 오이라트를 파멸로 이끌었던 요소 중에 청나라의 공격 이상으로 강렬한 역할을 차지했던것이 천연두입니다. 만주족 정권은 이런면에서 볼때, 일찍부터 중국과 접촉하면서 천연두의 위험성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고, 환자의 딱지나 귀를 조금 파서 약하게 병을 앓게 하여, 예방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순치제의 죽음은 천연두라는 설이 많고, 강희 역시 어린 시절 천연두를 앓아 사경을 헤먼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천연두를 견뎌낸 그를, 아담 샬은 강희가 제국의 황제에게 필요한 긴 수명을 확보할 수 있기에, 그를 순치제에게 새로운 제국의 황제로 추천했습니다. 몽골인들에게 닥친 천연두의 재앙은 나중에 다시 말하겠습니다.
사정이 이렇게 되니, 몽골 왕공들이 북경으로 가서 황제를 배알하려고 해도 천연두의 위험성떄문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대다수 몽골 왕공들은 일평생 천연두를 앓아본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끔 북경에 천연두를 앓지 않는 몽골인들이 온다고 하여도, 그들은 보호를 위해 철저히 격리 되어 정해진 음식만 먹는, 사실상의 감금이나 다름없는 상태를 견뎌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활동적인 유목민에게 있어 지옥처럼 어려운 일입니다. 그 옛날, 징기스칸은 부하라(Bukhara)를 제외한 어떤 도시에도 직접 들어서지 않았고, 성벽이 둘러진 도시에 발을 디디는것에 어려움을 느꼈습니다.
피서산장은 이러면에서 볼때, 천연두에 걸리지 않은 몽골 귀족들이 알현하러 올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나중에 이르면 강희는 1년의 절반 정도를 이곳에서 보내며 국사를 돌보고, 북방 경계를 강화하며 각 민족들과의 일을 해결하는 장으로 삼았습니다. 여담으로 피서산장은 열하행궁으로도 불리는데, 즉 조선의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여기서 이름을 딴 것입니다.
범상치 않은 풍채의 박지원
가르단에 대한 비정상적인 집착에서 보이듯, 강희는 스스로가 사냥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유학의 수호자이자 성리학적 질서의 신봉자라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였습니다. 그는 위대한 사상가 주희가 주석을 단 책들을 열심히 읽었으며, 산하와 백성들에게도 공부하기를 장려했습니다. 그리고 1684년 11월, 남부 지방에 대한 순행을 실시한 던중, 산동 곡부(曲阜)의 공자묘에 들렀습니다. 그는 공자의 묘에서 절을 했고, 제례음악을 들었으며, 대학과 주역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공자의 후손인 (衍聖公) 쿵위치와 쿵상런 등을 불러들였습니다.
공자 성상의 먼지를 털어내고, 강희는 쿵위치에게 물었습니다.
"성상은 언제 만들어졌는가?"
"동위(東魏) 흥화(興和) 3년(541년), 연주자사 리팅이 처음으로 흙을 빚어 상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럼, 이 예기들은 언제 처음 만들어진 것인가?"
"후한(後漢) 원화(元和) 2년(85년), 황제인 장제가 와서 제사지내고 남겨 둔 제기들입니다."
"돌에 새겨진 공자의 여러 화상 중에 어느 것이 가장 진짜에 가까운가?"
"제자인 자공이 그린 것을, 진(晉)의 구카이즈가 다시 그린 그림이라고 합니다."
"이 글씨는 누구 것인가?"
"송 휘종의 글씨입니다."
그리고 나서 쿵상런에게 물었습니다.
"몇 살인가?"
"서른일곱살입니다."
"성인의 몇대 손인가?"
"64대손입니다."
"쿵위치는 몇대손인가?"
"67대손입니다."
"그대는 서른일곱이라는데 자식은 몇이나 두었는가?"
"둘 입니다."
"시는 지을 줄 아는가?"
"조금 배웠습니다."
그리고 나서 공자가 손수 심었다는 나무를 보고 물어보았습니다.
"이 나무는 썩지 않았거늘, 왜 가지가 하나도 없는가?"
"명 홍치(弘治) 12년(1499년) 불이 나서 가지와 잎사귀는 다 타 버리고, 몸통줄기만 남았습니다. 그 후로 200여 년동안 썩지도 않고 잎이 나지도 않은 채 쇠처럼 단단해졌습니다. 그래서 쇠나무로 알려져 있습니다."
강희는 하도 이상해서 시종에게 만져보라고 하고는 다시 물어보았습니다.
"한나라 시절의 비(碑)는 어디에 있는가?"
"옛날에 서책을 모아 두는 규문각에 있습니다. 대문 오른쪽에는 후한 원가 연간(153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백호비가 있습니다."
"왜 백호비라고 하는가?"
"한대 이후에 성인의 후손으로서 공림과 공묘를 돌보는 임무를 맡았던 관직인 백호에 임명된 사람들의 비가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강희는 공자가 썻다는 우물 난간에 기대어 몸을 구부려 살펴보고는, 물을 떠서 마셔 보았습니다. 그리고 시황제가 분서갱유를 벌일때, 숨겨 놓았다가 나중에 다시 발견되었다는 경전을 살펴보고는, 공자의 묘를 보았습니다. 공자의 묘에 술을 석잔 따라 올리고는, 독특한 냄새가 나는 풀을 한 웅큼 뽑아서 향기를 맡아보고 다시 물었습니다.
"공림 주변의 토지는 얼마나 되는가?"
"모두 합해서 18경입니다. 지난 2천여 년 동안, 족인들이 날로 번성하여 이제는 묘지에 빈 자리가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장차 어찌 할 셈인가?"
"폐하께서 이렇게 하문해 주시니 천대 후손에까지 크나큰 축복입니다. 그러나 공민 바깥의 토지는 모두 민전으로, 저희들은 절대로 토지를 확장할 수 없습니다. 저희들은 단지 폐하께서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러자 강희는 씩 웃고는, 이렇게 농담을 했습니다.
"그러면, 상주문을 써서 올리게나."
그러자 수행원들도 모두 따라 웃었습니다. 강희는 국자감생인 쿵상런에게 장학금 명목으로 백근 5냥을 주었습니다.강희는 돌아가는 길에 조선소를 들러 배 만드는 과정을 살펴보고, 직접 설계를 감독했습니다. 그런데, 신하들이 부모의 목숨을 구하는 사람들이, 종종 자살함으로서 기원하는 절벽으로 가자고 하자 불쾌해하면서 거절했습니다.
"내가 그런 장소로 간다면, 그런 행위를 묵인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효도를 위해 자살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생명을 제물로 삼는 행위는, 부모를 도울 모든 기회를 방기하는 짓이다."
1694년, 강희는 과거 시험에서 일어나는 이상스러운 일에 주목했습니다. 관리를 뽑는 과거에 대부분의 합격자가 저장성과 장난성 출신이었는데, 허난과 산시 출신은 각각 한명 뿐이었습니다. 합격자들을 보니 단지 과거 답안을 모운 팔고문을 줄줄 외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무과의 경우를 보자면, 가장 강건한 사람들은 대게 서북에서 온 사람들인데 비하여, 대부분의 합격자는 저장과 장난 출신의 허약한 사내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복무하고, 또 퇴역하면서 자리를 허약한 친척들에게 넘겨 줍니다.
시험관 중에서도 온갖 부패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베낄 책을 들고 시험장으로 들어왔다거나, 답안지를 돈주고 사거나, 백지 답안을 보내면 협조하기로 한 시험관이 답안을 줄줄 써주는 형태도 있었습니다. 또, 고향을 고쳐서 올리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강희는 그들과 대화를 해보면서 정체를 파악했습니다 ─ 강희는 중국 13개성의 악센트를 구별할수 있었습니다. ─ 또, 개별적으로 불러 면담도 해보았습니다.
광시성 순무인 천위안룽은 강희에게 보내는 상소에서 신비한 영지버섯이 향기로운 구름 아래서 발견되었으니, 이것이야말로 폐하의 성덕을 나타내는 것이라며 한껏 아첨을 부렸습니다. 강희는 이에 대해 이러헤 대답했습니다.
"역사는 이와 같은 이상한 징조들로 가득 차 있지만, 그런 징조들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장 좋은 징조는 풍년이 드는 것, 그리고 만족해하는 백성이다."
그 후로 천위안룽의 상소문은 짦아졌고, 신비스런 버섯등의 언급도 사라졌습니다.
강희는 정호와 정이, 주희의 성리학을 가장 뛰어난 가르침으로 받들며, 주희와 공맹을 최대한 연결시켜 공자와 주희를 함께 숭배했고, 경서에 주석을 달고 보급한 주희의 공적을 치하하고, 성리학을 경세치용의 수단으로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웅사이, 이광지 등 제국 최고의 학자들에게 관련된 책을 편찬하도록 하고, 평생도록 유가 경전을 탐독했습니다. 그러나, 강희는 스스로 성리학자면서 동시에 성리학자가 되기를 바라진 않았습니다. 강희는 스스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리학 경서들은 입신의 근본이니, 읽지 않으면 아니 되고, 행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러나, 성리학은 스스로의 사상만 옳다고 생각하니, 이것은 폐단이다. 고서에서는 무턱대고 믿고 따를 수 없는 점들이 있다. 경서를 읽으면서도, 스스로의 주관을 뚜렷하게 세워야 한다."
황하는 예전부터 다루기 힘든 강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강희도 치수 사업이 내치에 큰 영향이 있다는것을 알고 있었기에, 매우 주의깊게 행동했습니다. 그는 안휘 순무 근보에게 일들 맡겼습니다. 근보는 확실하게 계획을 세워 일을 진행했고, 성과를 보였습니다. 강희는 사람을 파견해 상황이 어떤지 살펴보기로 했는데, 보고에 따르면 "근보의 얼굴은 초췌하기 그지 없고, 물길이 잘 정돈되어 막힘없이 흐르고 있다." 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강희는 보고만 듣지 않고 직접 현장에 나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성과를 보고 근보를 크게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안휘 안찰사 우성룡(于成龍)을 불러 근보와 협력하도록 했는데, 문제는 우성룡과 근보가 견해가 달랐다는 것입니다.
우성룡은 강바닥을 파내어 수심을 깊게 하자고 주장했는데, 근보는 높은 제방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가운데 근보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근보를 조정의 대신 명주와 연관시켜 비난하였고, 근보는 결국 다툼에 희생되어 북경으로 압송되다가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나중에 조사 한 결과, 근보의 치수 사업은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강희는 우성룡을 믿어보았으나 일처리가 영 마딱찮았습니다. 우성룡은 근보가 살아있을때는 그의 주장에 반대했는데, 정작 죽고 나자 일이 안되겠다 싶어 근보의 주장대로 일을 처리했습니다. 강희는 마침 가르단과의 전쟁이 모두 끝나 이 문제에 전념했는데, 우성룡까지 사망하자 난감해했습니다.
그러던 중, 강희는 청렴한 관리로 이름이 있던 장붕핵(张鹏翮)에게 일을 맡겼고, 장붕핵은 구체적인 공사 방법을 제시해 강희에게 받아들여졌고, 이대로 시행해서 효과를 보았습니다. 이를테면 황하의 제방에 돌로 수문을 설치하고, 풀로 둑을 쌓아 황하가 역류하는것을 막자고 건의하고, 강희가 받아들인 것입니다.
강희 40년인 1701년. 공사는 끝이 났습니다. 강희는 장붕핵의 노고를 치하하면서도, 내년 우기가 닥치는것을 봐야 안심할 수 있다며 냉정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홍택호의 수심이 황하보다 높아, 홍택호의 물이 황하로 흘러들어갈 것을 우려했기 떄문입니다.
마침내 1702년 여름, 강희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홍택호의 일을 걱정하면서 지냈고, 9월, 장붕핵이 아무런 문제도 없으며, 황하의 물이 순조롭게 흐른다는 보고를 하자 매우 기뻐했습니다. 강희는 다음 해 1월 황하 남쪽의 제방들을 모두 둘러보고 대사업이 성공했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1705년, 강희는 다섯 번째 순행에 나섰고, 직접 제방 위에 걸터앉고는 대신들에게 말했습니다.
"짐은 이곳에 올 때마다 황하를 바라보았소.38년(1699년) 이전에는 황하가 범람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이 온통 누런 황톳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배를 타고 둘러보았는데, 강물과 강둑의 눞이가 같았고, 사방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모두 물뿐이었소. 하지만 이제 강둑이 강물보다 몇 길이나 높으니, 짐의 치수 사업이 크게 성공한 것이 아니겠소?"
강희는 치수 사업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러시아, 가르단과 전쟁을 하면서도 남쪽을 시찰하여 치수 사업의 진척을 살펴보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또, 스스로 치수에 대한 이론을 알기 위해 공부를 하면서 연구를 하여 이해를 높였습니다.
"짐은 치수 사업을 중요하게 생각해 치수 사업에 관한 책은 모두 찾아서 읽었다. 경험에 비추어 보면, 치수 사업은 이론적으로는 쉽지만 실제로 실천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따른다."
그는 수리에 관해 풍부한 지식을 가졌고, 관련 기술을 익혀 기구를 사용해 수심을 측량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습니다. 세번째 순행에서 그는 수평의를 직접 사용해 수심을 측량하기도 했습니다.
강희는 종교 문제에 대해서도 기본적으로는 평등을 유지했습니다. 중간중간에 보이지 않게 불교 등에 대해 약간의 견제 행위를 벌이기는 했으나, 드러내놓고 탄압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이는 기독교에도 마찬가지입니다. 1688년 강희제가 서양인 선교사 페르비스트에게 물어본 바에 의하면, 당시 베이징에 기독교 신자는 1만 5천 758명이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내에서 영향력을 보이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명말 마테오 리치와 마찬가지로, 중국 고유의 전통에 대해 관습으로 인정하며 별반 문제를 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종교의 현지화 작업까지 시작했습니다.
이를 테면 이렇습니다.
중국 고대의 삼황 오제 ─ 예수회 선교사들의 해석 :
노아의 홍수 이전에 나오는 10명의 족장들의 다른 이름이거나 구약 성경에서 구세주 예수를 위한 인물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요(堯) 임금 = 성경 노아의 방주에 나오는 노아
한자 중에 배 선(船), 그러니까 선함할때 그 선자가 있습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이를 분리해서 船 자는 배 주(舟) + 여덞 팔(八) + 입구 구(口)
= 이는 노아의 방주에 여덞 명의 식구들이 타고 있었음을 의미
이런 식으로 풀이를 합니다. 배 선자에 그런 의미가 있으니 전설과도 맞지 않냐는 식입니다.
또
"어! 요(堯) 임금의 堯는 그 발음이 히브리어의 "신"과 유사 하네!"
"堯자에 세 개의 열 십(十)가 들어있는데 이건 삼위일체를 말하는거구나!"
또 팔괘를 보는데
팔괘 = 전설상으로는 BC 2953년 경 삼황 오제의 복희가 만든것
그러자 예수회 선교사들의 논리는
"복희는 아담의 7대손!"
"복희가 바로 구약 성서에 등장하는 족장 에녹이다!"
"에녹은 아담에서부터 전해진 계시를 전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으로부터 스스로 그런 계시를 받아 책에다가 썼잖아? 노아(저 위에 이론대로라면 요임금)가 이를 대홍수때 배에 실어서 구했고, 그렇다면 이게 부분적으로 중국에 전해졌구나, 알았다. 그게 주역 이다!"
"중국 역사로 봐도 충분히 구원, 삼위일체, 대홍수등이 설명 가능하구나! 오 신이시여!"
그러면서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인들에게 하는 말
"주역도 기독교 서적입니다!"
"에녹(그러니까 복희)가 이를 주역 64괘에 이를 다 전해주었는데 후세 의 중국인들이 진정한 의미를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니 우리들과 함께 고대 중국의 경전(예수회 주장대로라면 기독교 서적)을 연구하고 해석해서 복희(에녹)의 참된 철학을 회복합시다!"
즉 고대의 경전을 공부하는 행위는 하느님의 뜻을 파헤치기 위한 연구라는 결론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 연구라는게 어떠한 방식이냐?
주역이 64괘의 효들이 6개로 구성된 것은 세상이 6일간 창조되었기 때문이고, 7효가 없는건 안식일이고, 양효와 음효가 제일 먼저 생겨난것은 하늘과 땅이 가장 먼저 생긴것이랍니다. 그리고 고대 중국의 역사서를 잘 살펴보면 태초의 사람, 죄로 인한 인간본성의 타락, 홍수, 예수님의 인간 구원 같은 부분을 충분히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급기야 나중에는 중국문자를 만든 사람이 중국인이 아니고 세계의 조상들이고, 이걸 증명한다고 고대 중국문자와 이집트어 사이에 유사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태극 비슷한 말에 태일(太一)이라고 있는데, 큰 대(大)자와 하나를 의미하는 一이 있으니 이건 하나님, 이라고 하고 하늘 천(天) 자도 大와 一로 이루어져 있으니 크다라는 의미와 하나라는 의미가 합쳐지면 정신적인 하늘, 즉 기독교의 신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한편 유명한 수학자인 고트프리트 폰 라이프니츠는 이런 주역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당시 라이프니츠는 이진법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자기가 보기에 주역 64괘는 이진법의 숫자 라고 생각합니다. 라이프니츠는 이진법을 단순한 기수법이 아닌 하나님의 창조를 상징하는 기수법이라고 스스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듣고, 중국인들이 4,000여년 전부터 하느님의 존재를 알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바티칸 교황청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예수회가 중국에서 보여주는 독단적인 세력에 반감을 가졌고, 이때문에 대립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교황 클레멘스 11세
1705년, 교황청은 투르논이라는 인물을 강희에게 보냈습니다. 강희는 그를 정중하게 대접했는데, 투르논은 교황이 '관리자'를 파견하여 모든 선교사들을 관리하는 감독자로 삼고자 했습니다. 강희는 투르논에게 말했습니다.
"교왕(강희는 교황을 교왕이라고 부름)은 건강한가?"
"건강하십니다. 폐하꼐서 저희들에게 베풀어 주신 크나큰 환대에 대해 들으신다면, 그분의 건강은 더욱 좋아지실 것입니다."
"짐이 서양인들에게 관대함을 베풀어 왔다는 그대의 말은 옳다. 군주는 관대하면서도 정의로워야만 그 관대함이 비로소 의미가 있다. 정의는 스스로 설 수 있고, 자신의 존재이유를 충족시키는 경향이 있지만, 관대함은 정의로부터 나와야만 한다. 짐은 서양인들이 처신을 잘하고 처벌받을 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 한 관대함으로 대하여 왔다. 그러나, 우리의 법에 저촉되는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면 우리의 법에서 정한 최고의 형벌을 받아야만 할 것이다. 그때는 짐이 개인적으로 용서하고 싶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강희는 말을 마치고 통역자인 제르비용에게, 자신이 얼마나 심각하게 이런 말을 하는지 강조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말했습니다.
"교왕과 그대는,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이 낯선 땅에서 참고 견뎌 온 유럽인들(예수회 선교사)을 동정해야 할 것이다."
투르논이 대답했습니다.
"저보다 더 그들을 동정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여행기간에 겪었던 고통을 저도 경험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비공식적인 시간에 비공식적인 장소에서 만나고 있으니, 그대는 보다 자유롭게 말 할 수 있고, 마음껏 웃어도 좋다."
"폐하께서는 심각한 문제를 유쾌하게 다루고 계십니다. 폐하께서는 이 광대한 제국을 유쾌하게 다스리십니다."
"아마도 그대의 체력으로는 더 이상의 대화가 무리인것 같은데, 괜찮겠는가?"
"저의 체력과 영혼은 폐하의 친절하시고 관대하신 말씀에 완전히 회복되고 있습니다."
강희는 투르논과 통역자들에게 다과회를 베풀고 다시 말했습니다.
"그대는 왜 이곳에 왔는가? 짐은 중개자를 통해 이 점을 누차 그대에게 물었다. 그리고 그대가 한 대답도 아직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대가 짐 앞에 있으니, 지금까지 밝히지 않고 가슴속에 남겨 둔 것을 허심탄회하게 말해 보거라. 그대의 말이 유창하게 나오지 않더라도 염려하지 말라. 자유롭게 행동하라."
투르논은 황제와 교황 사이에 상호 접촉을 제도화 하기 위하여 왔다고 하면서, 적임자가 있냐는 강희의 말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상호관계를 적절하게 다룰 책임있는 당사자는 교황에게 신임받는 사람인 동시에, 교황청의 관행에 정통한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이는 그 관리자로 교황청의 사람을 파견해서, 에수회 등을 배제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하겠다는 의도였습니다. 그러자 강희는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자신의 견해를 길게 말했습니다.
"중국과 서양은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종교를 위한 것이라면, 그대들의 입장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 대신, 그대들의 사고와, 교리를 넘어서는 부분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말라. 비록 중국에 온 선교사집단이 서로 다른 나라 출신들이지만, 모두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 바로 그런 이유 떄문에 여기 있는 서양인은 누구라도 그대가 이야기했던 교왕과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다. 짐은, 도대체 네가 말하는 '교왕에게 신임받는 사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우리 중국에서는, 적임자를 고르는데 결코 그런 차별을 두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내가 앉아 있는 용상과 아주 가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중간에 있고, 어떤 사람은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충성심이 없다면, 내가 어떤 일을 맡기겠는가? 그대들 중에 누가 감히 교왕을 속일 수 있단 말인가. 그리스도교에서는 거짓말하는 자는 신을 노엽게 한다면서 거짓말을 금하고 있지 않은가?
"이곳의 선교사들은 물론 정직합니만……그러나 그들은 교황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내막을 모릅니다. 유럽의 여러 나라 많은 사절들이 로마로 모여옵니다. 그들은 협상경험이 많기 때문에 여기 있는 선교사들보다 더 적임자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만일 교왕이, 흠잡을 데 없이 행동하고 여기 있는 서양 선교사들처럼 고상한 재능이 있는 사람을 보낸다면, 그리고 그가 결코 다른 사람에 대해 간섭하거나 위세를 부리지 않는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처럼 따뜻하게 대접받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대가 요구하는 것처럼 '감독자' 에게 다른 선교사를 통제하는 권한을 준다면 많은 문제들이 발생할 것이다. 그대는 여기서 우리와 함께 40여년을 지낸 서양 선교사들을 보아 왔다. 그런 사람조차 우리 궁정의 일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갖추지 못하였는데, 어떻게 금방 서양에서 온 사람이 더 잘 할 수 있겠는가? 짐은 그런 사람과 사이좋게 일을 잘 처리할 수가 없다. 우리가 일하려면 통역자가 있어야 할텐데, 그러면 불신과 어색함이 생길 것이다. 그런 사람은 실수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가 모든 선교사들의 '감독자' 로 임명된다면, 다른 사람이 받아야 할 비난도 대신 감당해야 하고, 또 우리의 관례에 따라서 처벌도 받아야 할 것이다."
강희는 이렇게 말하고 그를 배웅하며 말했습니다.
"그대의 뜻은 알았다. 그대의 임무는 끝났다. 교왕에게 잘 설명하라."
그러나 중국의 전통적인 전례문제에 대해서 계속 다툼이 벌어졌고, 강희는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공자는 중국인들의 위대한 스승이다. 그래서 존경받지만, 행복이나 벼슬, 재물을 얻으려고 공자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기도하지는 않는다. 조상숭배는 사랑과 추모의 정을 기리기 위한 것이지 조상의 은덕을 받기 위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조상의 위패를 모시지만, 그 안에 조상의 영혼이 거한다고 믿진 않는다."
그러자 가톨릭 주교 메그로(Maigrot)가 이에 대해 반발하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은 중국과 동아시아의 전통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는 말인 "폐하" 라는 말을 사용하자, 메그로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떤 장인이 만든 돌계단에 존경을 표하는 말입니까?"
강희는 이런식으로 대답했습니다.
"이 자들은 가장 간단한 한자도 한 마디도 모르면서, 중국의 도덕체계가 잘못되없다고 주저없이 비판을 하는구나. 한낱 미물조차도 죽은 어미를 위해 여러 날을 슬퍼하는데, 죽은 어머니에 무관심한 서양인들은 금수만도 못한 자들이다. 그런 자들이 어찌 중국인에 견줄 만 하겠는가? 우리가 공자를 존경하는 이우는 덕을 숭항한 그의 원칙과 교육체게,윗사람과 조상을 공경하라는 가르침 때문이다. 너희들이 너희의 성인들을 존경하는 것도 그들의 고귀한 행위 때문 아니던가?"
하면서 급기야 나중에는 이런 소리까지 합니다.
"서양인들은 날개 달린 사람(천사)를 그려놓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들은 마치 날개 달린 것처럼 민첩한 하늘의 영적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다. 실제로 날개 달린 사람은 없지만.'"
그리고 강희의 황태자는 선교사들에게 이렇게 말을 하기도 합니다.
"부처나 다른 우상이나, 그들도 숭배받는 사원을 가지고 있고, 그대들도 그대들의 신을 숭배하려고 사원을 짓는다. 그대들이 그대들의 종교에 몰두하는 것은 누구도 비난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을 트집잡는 다면 이는 마땅히 비난받아야 한다."
즉, 교황청의 사람들은 가장 간단한 한자도 모르고, 중국의 역사도 모르며, 동아시아의 전통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것은 전혀 망설이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잘못이 아니겠냐는 이야기입니다. 강희는 나중에 선교사들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전한 애제 시기에 태어났고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하는데, 신이 왜 자기 아들을 죽이지 않고서는 아들을 용서할수가 없는가?"
페르비스트는 안간힘을 써서 설명했지만, 강희는 그다지 인상깊게 듣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강희는 남순하면서 서양인들이 중국을 위협하는것을 보았습니다. 중국의 선박들이 해외로 팔려 나가고, 배의 용골대를 만드는데 쓰는 단단한 목재가 분리되어 광둥 바깥으로 선적되어 나갔습니다. 루손과 바타비아로 중국인 범법자들은 도망쳤고, 가짜 선교사들은 마음대로 중국을 활보했습니다. 강희는 이 상황을 보면서, 미래에 벌어질 일에 대해 직감적인 예언을 하게 됩니다. 연해지방의 총독들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서양의 여러 나라들 때문에 중국이 곤경에 처할까 염려된다. 이는, 짐의 예측이다."
그러나 아직은 미래의 일입니다.
아직은 평화로운 시대였습니다. 강희는 밖에서 일을 보고 있었고, 식사할 시간이되어 밥을 먹으려 하였으나, 담당자의 착오로 밥은 없고 고기만 달랑 와버리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주위에서 담당자를 처벌하려고 했으나, 강희는 이를 만류했습니다. 남순에 나선 강희는 이제 머리와 수염이 희끗해졌고, 누군가 수염이 검어진다는 약을 가져다 바쳤습니다.
그러나, 강희는 웃으면서 거절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역대 제왕들 중에 수염이 흰 사람이 없었지. 그러나 짐은 오래 살아 이제 반백이 되었으니,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첫댓글 강희제는 정말 알면 알수록 더 위대한 군주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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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 세종대왕께서는 문자를 창제하셨는데 그건 세종대왕이 먼치킨 아닐런지
타고난 무인 군주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무예를 지닌것도 함정.. 유럽인들의 횡포를 예감한건 정말 대단한 통찰력인 것 같습니다. 청나라의 전성기에 그런걸 예상하긴 도무지 쉽지 않았을텐데요. 게다가 가진 성품은.. 정말 인간이 아닌듯.
대단하네요... 특히 종교에 대한 관점, 문화적 상대주의적 관점은 정말 마음에 듭니다.
그래도 한글창제하신 세종대왕님이 더... ㅎㄷㄷ 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거 안만드셨으면 지금도 한자 쓰고 있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