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양제의 등장
 수나라 문제(581〜604)는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뛰어난 군주로, 수나라 국력을 크게 향상시킨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들의 부하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다. 아버지와 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양제(양광)는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폭군이었다. 하지만 양제는 개인적인 자질은 매우 뛰어난 인물로, 589년 진나라를 멸망시킬 때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문제의 업적 탓에, 당시 수나라의 국력은 최고조에 올라있었다. 609년 조사된 수나라 인구는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인 4,600만에 달했다. 수나라에게 늘 골칫거리였던 돌궐은 세력이 극히 약해져, 607년에는 동돌궐의 계민가한이 수나라에 와서 직접 양제에게 머리를 숙이기도 했다. 이때 수나라는 서돌궐과 토욕혼을 정벌하는 등,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있었다. 양제는 만리장성 수축, 대운하 공사, 낙양에 동경(東京) 건설 등 거대한 토목공사들을 일으켜 백성의 원성을 산 임금이었다. 하지만 대운하 공사는 오랜 세월 남북으로 갈라진 중원세계를 경제적으로 통일하고, 국력을 결집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또한 군량과 군수품의 이동 통로로 활용되기도 했다.
양제는 천하의 최고 지배자가 되기를 원하는 야심 찬 인물이었다. 그에게 고구려는 언젠가는 굴복시켜야 할 대상이었다. 605년 당시 요서지역에 수나라의 거점은 불과 751호(3,000명) 만이 거주하는 1개 군 1개현 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수나라는 돌궐군을 이용해 유성 인근의 거란족을 격파하여, 다시금 요서 지역에서 세력 확대를 시도했다. 고구려와 충돌이 불가피해 진 셈이다.
고구려 영양태왕은 수나라를 견제할 목적으로 607년 8월 돌궐에 사신을 보냈다. 그런데 돌궐 계민가한의 막사에서 고구려 사신과 양제가 만나고 말았다. 양제는 돌궐을 굴복시키고 한층 위세를 과시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는 고구려 사신을 향해 실질적인 선전 포고를 하였다. 내년에 자신이 탁군(북경)에 갈 때에 고구려 임금이 직접 조공하러 오되, 그렇지 않으면 직접 자신이 고구려를 정벌하겠다고 했다.
거대한 원정군, 거대한 부담
 수나라의 전쟁 위협에 당연히 고구려는 굴하지 않았다. 양제는 자신의 아버지 문제 때 실패했던 고구려 정벌을 성공하여, 천하를 지배하는 최고의 통치자가 되려는 야심을 드러냈다. 611년 2월 그는 고구려 정벌을 위해 대대적인 전쟁 준비에 나설 것을 명했다. 산동반도 등주에서는 3백 척의 전함이 새로 건조되었고, 전국에서 군사들이 징발되었으며, 대운하를 통해 막대한 군량이 탁군으로 집결하게 되었다.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운반하기 위해 군용 수레 5만 승(承)이 새로 만들어졌다. 각지에서 모은 식량이 탁군으로 집결하기 위해 배가 서로 이어진 것이 1천리에 이를 정도였다. 병기와 갑옷, 공성용 무기, 장막, 갑옷 등을 싣고 길을 오가는 사람이 항상 수십만 명이나 되었다.
전쟁 준비만으로도 수나라 전체가 들썩거렸다. 물자를 운반하다가 죽은 자가 병사들 가운데 절반이나 되었고, 백성들이 농사를 못 지어 물가가 오르고 백성들의 생활이 힘들어졌다. 이때 수나라에서는 고구려 정벌에 참여해 괜히 죽지 말라는 ‘무향요동랑사가(無向遼東浪死歌)’란 노래가 널리 퍼졌다. 강제로 동원된 사람들 가운데 도망가는 이들이 속출했다. 당시 세계 최고의 국력을 자랑한 수나라였지만, 고구려 원정은 그들의 국력을 뿌리부터 흔들어 놓고 있었다.
강력한 방어력을 갖춘 성에 의지한 고구려
 전쟁 직전 수나라의 상황에 대해서는 많은 기록이 남아있지만, 고구려는 그렇지 못하다. 하지만 고구려도 전쟁에 대비해 충분한 준비를 했음은 분명하다. 고구려는 550년대와 580년대에 2차례 걸친 돌궐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한 바 있었다. 거대한 유목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던 고구려의 자신감은 598년 1차 전쟁에서 승리를 한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금 고조되어 있었다. 당시 고구려 인구 전체와 맞먹는 마치 핵폭탄과도 같은 거대한 수나라 원정군의 침공에도 고구려가 주눅 들지 않았던 것은 오랜 전쟁 끝에 얻어진 자신감이었다. 고구려는 군사의 숫자는 적어도 방어하는 입장이었다. 성을 중심으로 방어하고, 적의 약점인 군수물자 보급에 타격을 주면 충분히 승산이 있는 전쟁이었다.
고구려는 수나라에 첩자를 보내 각종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요서지역에서 수나라 대군과의 충돌을 피하고, 요하에서 1차 방어선을 구축했다. 탁군에서 요하까지 긴 행군 끝에 3월 중순 요하 서쪽 회원진에 도착한 수나라 선봉대는 먼저 요하를 건너 교두보를 마련하고자 했다. 고구려 군은 요하를 건너려는 수나라 선봉대의 진격을 막았다. 첫 요하 전투에서 고구려는 수나라 좌둔위대장군 맥철장을 죽이는 등 승리를 거두며, 수나라 군대의 진격을 약 20여 일간 지연시켰다. 수나라 선봉대는 4월 중순 후속부대가 도착하면서 비로소 압도적 병력의 우위가 확보된 연후에야 요하를 건널 수가 있었다. 고구려는 시간을 지연시키는 작전을 성공한 후, 병력을 요동성으로 퇴각시켰다.
요동성은 고구려 요동방어의 중심 성으로, 성벽의 높이가 약 30미터에 달할 정도로 거대한 성이었다. 4월 하순부터 시작된 수나라 대군의 요동성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다. 수양제는 직접 요동성 주변에 도착해 공격을 지휘했지만, 도리어 수나라 장군들의 자율적인 지휘 역량을 감쇄시켜 버렸다. 고구려는 장기적인 농성(籠城) 작전에 돌입하면서, 야음을 틈타 기습적인 공격을 하는 소극적인 전술로 구사하며 적의 지쳐 물러가기를 기다렸다. 수나라 대군은 요동성 한 곳을 점령하지 못한 채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지나친 긴 보급선 탓에 군량 보급도 원활하지 못하고, 곧 닥칠 우기(雨期) 이전에 작전을 종료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진 수나라는 속전속결을 노렸으나, 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