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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 11
나의 살던 고향故鄕은 ???!!!
1989년 8월 27일 일요일
충남 당진군 당진읍 구룡리 도곡(됫골부락)
마을회관/노인정 신축 준공 하던 날
서울이라는 곳에서 출향인 김기억(K O KIM) 올림 R1
일요일 아침 7시, 서울 용산시외버스 터미널을 떠난 한양여객 버스는
경부선을 타다가 평택, 안중, 삽교천, 당진 읍내를 지나서
구룡리 대바위 검문소 정류장에 130 여 km을 10시 못되어 도착 시킨다
늦여름 더윗 속 가득한 햇살, 맑은 공기 속에
설레는 마음을 안고서 발길을 재촉 한다.
구룡리 삼거리(면천, 당진, 서산) 검문소 대바위 술집의 흑바위는 여전한 채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이정표로 남아 있겠다.
왜정시대 신작로 길이난 이후의 수많은 사연을 알고 있을 것이다.
주막에 앉아 계신 이장(기천형님)과 몇몇분을 만나 뵙고
건네주는 두꺼비 한잔 들이키며 동네 안부 여쭙는데
회관 건립 하느라고 물심양면 노동과 정성을 드린
동네 청.장년 부녀자들의 노고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니 울컥 한다.
조그만 들녘 [광슬티] 논에는 벼가 마지막 푸르름을 안고 있다.
추석이면 햅쌀도 먹을 수 있을 텐데, 콩밭도 푸르고, 들깨와 참깨 밭도 푸르르다.
옛날, 어려서 들밥, 메밥을 내다 먹으면서, 모내고 김매고 물꼬 싸움 하던 곳
어느 날 핵교를 빼먹고서 모를 심으라는 말씀을 거역 하고서
책이 좋아 공부가 좋아서 당진중핵교로 도망을 가던 일이 생각난다.
광술티는 우리 농가들의 젖줄,
우리의 목심이 걸려있던 귀중한 터전 이었고
긴 신작로新作路의 미루나무, 개가중나무는 그늘을 드리운 채 풍치가 좋았었는데
아스팔트 길 깐다고paving 모두 다 베어 제껴 내어 그대로 방치 하여서
동심들의 추억을 슬프게 하겠다.
이제는 아스팔트길에 묻혀서
영원히 다시 보지 못할 신작로였던 [자갈길]이기에 한 번 더 치어다 본다.
산 밑에는 어린 시절 우리에게 무서움을 더해주던
상여喪輿 초가집이 있었는데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는다.
논 입구에는 오(상목 부친 때부터) 씨네 방앗간이 있어서
왱겨 나오고, 쌀 나오고, 보리쌀 나오고, 하얀밀가루 나오고
떡국떡 긴 떡이 나오던 마술 공장이었는데...
동네에서 제일 크던 이층집 이었는데...
발동기가 팽팽 돌때 피대feed belt를 바퀴에 걸면 피대가 펄떡거리고
시동이 꺼지면 하얀코Magnet를 다시 잡아 쥐고서
하카start를 다시 시키느라고 애를 쓰시던 방앗간 아저씨들
저곳에서, 나나이 다섯 살 때부터 긴담뱃대 곰방대 무시고 뒷짐 지고 다니시던
아버님과 함께 네 바퀴 구루마 뒤를 졸졸 따라 다니던 곳이었는데
까만 똥지름oil 퍼 다가 냇가의 괴기 잡느라고 횃불 지름으로 썼는데
이제는 다시 할 수가 없겠구나.
물론 승전목勝戰目 초입의 할머니 물레방앗간도 있었는데...
큰 내 [복간내] 에는 큰비만 오면 둑이 깎여 신작로가 없어져서
서울 가는 버스가 서있었고
내 친구 [백종록]이네 밭까지 임시 질걸road로 만들어서 쓰고
[오필호]네 쌀가게에서 물 구경 하느라 동네 사람들 모이기도 했다.
그 후 5.16혁명 후 [1차 5개년 계획]에 의해서
철망에다 돌을 담아서 제방을 쌓아서 복구했다
깜시 얼굴이 되도록 여름철이면 멱을 감고 괴기도 잡고
겟말pants 까 부치고 검정을 바르며 장난을 치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모두가 메어지고 웬 모래더미만 산을 이루고 있다.
어느덧 고개를 들어보니 만국기가 날리고 안내 간판이 서있는
아담한 새로 지은 옥상있는 마을회관. 노인정이 보인다.
동네어른들 아침 일찍 들러서 한 잔술 걸치시며 즐거우시다.
채알遮日 쳐진 뒷 켠에는 동네 할머니 아주머니 그리고 새로 시집온 낯모르는 아낙들
모여서 전 부치고 상차림 하기에 바쁘심에 모두들 홍조 띈 얼굴들이시다.
한분 두 분 옛날 옛날에 고향 떠난 출향인 어른들 아주머니들 그자식들이 달려와서
고향 지키는 선배 후배들 부둥켜 안으면서 눈시울 붉히운다.
해외 근무 하다가 마침 본사 근무 중 좋은 소식에 오게 된 K O의 행운인데
준공식 중에 젊은 K O 에게 마이크를 건네 주셔서 한 말씀 올렸다.
유학, 객지 생활, 해외근무 생활 하면서도 늘 내 고향 생각도 한몫이었다고....
옛날 이름의 공회당, 4H회관, 마을회관은 흙벽돌로 몇 번 지어졌었지만
농민계몽 야학으로 [가갸거겨 아야어여]를 가르치다 서울 이화여대 학생들이 울며 떠나던일
이곳에 [노인정]을 품은 [마을회관 건립]은 처음이라
품앗이하고 산나물 뜯어 팔아서 돈 만들어 찬조 하며 지은
고향의 선후배 젊은이들 주부들께 찬사와 격려를 올렸다.
모두들 함박웃음 속에 꽹과리소리, 징소리, 북소리, 장고소리, 농악소리 즐거운데
시대가 변했나?
동네 아주머니도 농악놀이 상쇠잡이를 하는구나! 잘하신다! 얼씨구야.!
각박하다고 표현되는 시대에 모두들 TV 수상기 앞에 모여서 이기심만 키우는 줄 알았는데
향토심, 애향심, 상경하애 높은 마음은 고향 떠난 젊은이들의 심금을 울리었다.
옛날에는 이 회관 자리 [지미티] 에 밤마다 모여서 객쩍은 이야기 하면서
밤하늘 우주를 논하면서 밀짚 방석위에서 밤이슬을 맞곤 했었다.
아주 컴컴한 어두운 밤에도 싸돌아 다니면서
흑두건놀이, 김돌이놀이, 일지매놀이 하기도 하고
[남진]의 가슴 아프게, [이미자]의 새벽길, [진송남]의 덕수궁 돌담길을 배워 부르고
더러는 형들이 부르는 유정천리. 오동동타령, 김삿갓 노래 등을 따라서 부르기도 했었는데
때로는 어느 집의 라디오 앞에 모여 앉아서
[청실홍실 연속극]을 가슴 조이면서 듣기도 했었는데
때로는 어느 집에 모인 선배들의 새내끼rope 꼬면서 들려주던
옛날이야기를 듣느라고 개근 하곤 했었는데
아주 까만 밤길 귀가길이 무서웠었지만
이제는 그런 이야기 시간이 다시 오지 않으리.
굴미쪽, 칼배산 밑 우리 할아버님의 3차원 물레방앗간이 있던
냇가 평지에 천막을 치고서 이동 가설극장 인 영화상영장을 만들어서
첫날은 [당진군]에서 계몽영화를 보여주었다.
처음으로 본 [신영균], [신성일] 배우들이 등장하던 [쌀] 이라는 [활동사진], 영화는 어린이들에게는 완전히 지구가 뒤집히는 신세계 이었다,
다음날부터는 돈 내고 보는 상업 영화를 틀어 주었다, 어린이 5원인가 어른은 10원??
홀죽이 [양석천] 배우와 뚱뚱이 [양훈] 배우가 나오던 [서울로 가는 길]
[김지미], [최무룡], [조미령], [이예춘]이 나왔다던 백제와 고구려 이야기 [가야의집]
그리고 5학년이 되어서 학교 단체로 5원 내고 본 삼천만 국민들을 울리던 실존 인물의 영화 [저 하늘에도 슬픔이?] 는 지금도 생각나는 그 당시 또래 4학년 아이 가족의 이야기 이었다.
땡감 주어서 우려도 먹고, 홍시 주어서 먹기도 하고
동무들 모여서 제기차기, 동전치기, 딱지치기, 다마치기,
뎅구자치기 에 바쁜 하루였었는데
상구머리 조차 이발비 돈 든다고 머리 빡빡 깍이운채
달그락 거리던 장아찌 종잭이 벤또를 등에 메고서 달리던 복간내 국민학교 하굣길
종잭이에 들은 장아찌와 새우젓 국물이 흘러서 책과 책보를 적시우고
때로는 미국의 USOM 원조물자 인
딱딱 한 각분유를 타서 먹고서 모두 설사 하던 일
때로는 유엔의 UNCTAD 원조물자 인
옥수수 가루 강냉이죽을 먹으며 행복 해 했던 일
그래도 보릿고개는, 부자이든 안 부자든, 있든 없던, 넘어야 했던 목넘이고개
보리밭의 보리를 잿불에 그을려서 손으로 까부셔서 입으로 털어 넣어서 넘던
보리 고개의 어린이들의 애환...
가끔 바람에 날려 온 북괴의 삐라를 줏던 날이면
학교도 순경(경찰)도 경직되어 복잡 하던 시절
당진군 석문면 고산에 주둔한 미군 [호크 미사일 기지]의 미군들이
평택을 오가면서 던져 주던 C시레이션을 만나면
일 년 복을 땡긴 것처럼 호들갑스럽던 시절이었다.
철모르는 어린이들은 답례로 주먹으로 감자바위를 만들어 보내거나
돌멩이를 차에 던지는 것이 답례 이었던 무지의 날들이었다.
오가는 [험프리 38BDE 미사일 기지] 병사들 중 까만 흑인들도 처음 보던 시절이었다...
일 년에 한 번 내지 두 번 새 옷을 대목장을 본 후 사 오신
설빔 추석빔 아주 넉넉한 옷을 입던 날.
새로 사온 질겡이 고무신이 산에 갔다가 나무 등걸에 걸려서 찢어지면
실로 꿰매서 신고 또 꿰매신고 다니며
다음 명절 때까지 마음 졸이면서 기다려야 했던 시절
애사. 경사 이력집이 생기면 온 동네 사람들의 음식경사 날 이었다
떡사발, 과방음식 들고 다니면서 국수 네 번 포식 하던 일.
점잖은 어머님은 체면 때문에 지새끼 거둬 멕이질 못했다.
그런 성정을 아는 옆집 아주머니들은 못 먹은 놈 잘 봐두었다가
따로 챙겨주던 이웃집 어멈의 인심도 있었다.
음력 정월 대보름 때면 밤마다 밭과 들가에 지불 지펴 놓고서
오곡밥 얻어다가 화투 뽕 치면서 밤을 새던 일
논배미의 얼음위에서 얼음배 타다가 물에 빠진 후
옷과 양말 말리려다가 나일론 양말 불에 빵구 내고서 혼날까 불안 해 하던 일
신작로 옆에 세워진 통신전봇대에 걸린 철선 끊어다가 썰매 만들어서
대한민국 행정 전화통신을 모두 마비시키던 젊은이들의 이야기
추운 겨울철 옆집에 마실 가서 먹을 것이 없으면
앞뜰 밭에 묻어 논 동치미와 배추김치 독을 털어서
날로 썰어서 고구마와 맛있게 먹게 해주던 아주머님들..
섹유petro 달른다 고 일찍 자라 하셔도
등잔불, 남폿불 밝히우고서 책을 읽으며
솜이불 밑에서 모두 누워,
삐죽이 나온 발 시린 채 웅크리며 즐거워하던 일
추운 날에도 찬물로 세수 하고서
삼베로 만든 수건조차 얼어서 맨손으로 쇠 문고리를 잡으면
쇠와 살쩜이 붙어 대던 추운 겨울 이야기
북풍에 문풍지는 울어 대는데
몸속 돌아다니며 피 빨아 먹던 이虱子lice 때문에
화롯가에 둘러앉아서 웃통 벗어 주면 화롯불에 태우던 이 이야기.
이 죽으라고 DDT 살충제를 옷과 몸에 바르고 잠을 자던 시절
그 밤에 어머님들은 여름과 가을내 준비한 삼베와 모시로 실을 만드는 길쌈을 하던 일.
여름철에는 밭에 구덩이를 파고서 삼가마니를 만들어 놓고서
불을 지펴서 키가 2미터나 되는 큰 삼(대마초)을 삶아서 껍질 벗기던 일
단오날 칠석날은 모두의 명절같은 휴일 이었다
가까이로는 시오리길 면천 영탑사. 운산 식물원 가던 길, 덕산 수덕사 가던길도
멀리로는 온양 현충사 초가집에 모셔진 이순신장군의 칼을
한손으로 들었네? 두손으로 들었네?
사나이 대장부로 무용담을 들려주던 선배들의 이야기
더 멀리로는 부여 부소산에 가서 낙화암 바로위에 있는 군량미 터에서
1300년 된 군량미가 불에 탄 새카만 왕겨 한 움큼씩 가져와서
백제의 한을 보여 주던 일
우리 집 서당에서 아버님의 훈독에 따라서 천자문 공부 하며 외우시던 동네 형님들
지금은 유명을 달리한 반농아(벙어리) 이신 옥천 형님도 [하늩턴! 따디!] 하면서
신이 나서 팔짝 팔짝 뛰면서 집으로 향하던 논배미길
[양산도] 와 [태평가]를 즐겨 부르시던 길동 아버님
3보전진 2보후퇴의 흔들리던 귀가길 은 가난과 무지 형편의 한 서린 길이었나 보다.
[짜증은 내어서 무엇 하나~?, 강짜는 부려서 무엇하나~! 니나 노~~ 닐늬리야~]
K O 의 아버님의 궁상각치우 5음계가 그려져 있던 한줄로 된 시조 악보가 생각이 난다.
동튀굿, 비박굿. 대동굿, 수중혼굿 등등 굿거리 구경도 있었지만
신장대 앞세우고 신내림 굿을 하던 선배 박신내 부친(윤갑)의 이야기 등등의 시절,
한밤중 신들려서 굿하던 중에 200여미터 [이배산]을 단숨에 올라서
뒤따르던 동네 청년들 유격훈련 하듯 하던 것을 보기도 했는데
마침 쾌유 하셔서 윤갑(신내선배 부친) 어른께서 동참하셔서 북을 치신다.
이제는 다시 못 올 길을 가신 어른들, 뵙고 싶은 마음만 더 하는구나.
한겨울의 꽃상여의 요령 소리와 망한가望恨歌 가 생각이 난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이, 어여...! 북망산천 저길이여 어이, 어이]
지금은 저수지가 되어 버린 우리 큰골 논과 밭 과 백성들의 언덕길
지게 발통 땅에 끌리며 풀 베러 나무 하러 다니던 큰골, 수청골길,
불당골에 지게 바치고서 앉아서 콩천대, 자치기, 개구리도 구어 먹던 청년들
지게의 바지게에 깔草 하나 가득 얹어 비실대며 내려오다가
불당골 이름 모를 양지의 묘소에 누워서 청년들 낮잠을 자던 곳
겨울철 대비 땔 나무 준비 하느라고 푸장plant 낫으로 깎느라고
보리밥에 무짠지 벤또ベンドlunch box 먹어 가면서 지내던 형님들
지금은 연탄과 가스에 밀려서 나무를 베어 내지 않으니
수풀이 우거져 길이 없어졌으니...
[동학군]이 [일본군]과 100여년전 1894년 11월에 마지막 싸움에서 이겼다는
당진읍과 면천면 경계의 승전목 싸움 시 망보던 등성이가 우리 동네 뒷산이다.
승전목에 모진 바람이 불어와도 새벽길 면천장터에 먼저 도착 하려고
솔방울 머리에 이고 장작을 지게에 지고 넘던 삼웅리 수미 고갯길
장맛비에 다리까지 잠기던 나무다리 검암교 밑의 수난은
동네 사람들의 애환이었다.
아침녘에 닭 둥지를 쳐다보고서 계란 한 개 꺼내서
학교길 하꼬방ハガバンshop에 갖다 주면 노트 작기장 한권 주던 시절
없는 쌀 한 되박 박박 긁어서 , 콩 한 되박 팔아서 사친회비 로 냈었는데
여름철 빈병주고 바꿔 먹던 아이스께끼 또한 별천지 맛이었는데.
여미장, 면천장, 당진장, 천의장, 틀모시장 가시던 어른들
거간 싸전꾼들의 상인 대장이 오필호 아버님 이셨는데 황해도 출신 피난민이셨다.
버스차비는 2원이요 극장요금은 학생 5원? 이었던 시대
둘 다 엄두도 못 내던 시절이었다.
작은키에 끌리는 가방 들고 신작로를 따라서 노트 펴들고 다니던
이십리8km길 당진중핵교 왕복길3hour은 K O의 도서관 이었었는데...
옛날 옛날 60년대 서울 한양 길에 오르려면
새벽부터 일어나 들뜬 기분에 잠 못 이루고서
괘종시계 소리 몇 번 땡땡 때리는지를 자다 깨다 선잠자다
컴컴한 곳에서 열다섯 번은 헤아리다가 일어나서
삶은 계란 과 떡 한줌 손에 들고서
컴컴한 새벽 6시 반에 필호네 집 앞에서 충남여객 버스에 올라서
면천, 고덕, 덕산, 예산, 온양, 천안, 평택, 수원, 안양, 신길동을 들러서
140km 길 8시간여 걸리던 완행 버스길
서울 남산 밑 남대문 언덕 양동 시외버스 정류장에 2~3시 에 내려놓는다.
더러는 삽교 나 신례원에서 장항선 기차를 이용 서울역으로 가곤 했었다.
더러의 서산, 태안, 보령, 홍성, 전라도 서해안 사람들은
서해뱃길로 인천까지 4시간(서산-인천) 가서 머물거나 서울로 가던 시절이다.
20인승 합승나 버스에 오르면 앞뒤에 남자 차장은 소리소리 지르며
호객 하면서 떠날 줄 몰랐던 서울의 옛날
마포종점으로 가는 서대문 네거리 전차소리도 냉냉냉냉 울었다.
밀짚방석에 앉아 있다 들어 누워서 별을 헤이던 여름밤
귀뚜라미 소리에 잠을 청하던 가을 밤 정취의 나의 옛고향!
K O는 경주김씨 [김알지 시조] 의 62세손으로
제철 기술로 쇠를 다루어서 돈을 많이 번 60세손 태봉 할아버지의 손자로서
어찌 어찌 한 아무 사연도 없이 할아버지의 부의 혜택을 받지는 못했지만
창의력과 세상을 두루 보는 의지를 물려받은바 있나보다.
그리고 아쉬운 점이지만 K O 가 참외서리 복숭아서리를 동무들과 못해본 것은
일찍 작고하신 부친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준공식에서 한 잔술 걸치고서
동갑내기 [의호] 친조카가 운전 하며 서울로 올라오던 길에
풀 깎다가 뱀에 물려서 입원한 [송진원[ 선배님 뵈러 천안 병원 들러서
서울에 올라와서 연필을 들었다.
내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 ~
복숭아 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 ~
부르리라 고향 노래를.....
안으리라... 훈훈한 고향 얘기를...
얘기하리라... 언제이고 정이든 내 고향의 추억을.
기억 하리라...[오봉산]. [호지봉골]의 정기를
고향 떠나, 나라 떠나 외국 어느 곳에서도 잊지 못하던 내가 살던 고향에...
천신이여, 지신이여 복을 주소서! 안정된 영원한 복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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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그냥 어릴 때 부르던 들리던 옛날 말 단어로 그냥 내리 썼다.
표준말과 문법이 아니어도 내 고향 시절 이야기는 진실이니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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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file이 사라져서 Retyping 했다.
2021 09 18 토요일 밤 봉사행사 후에.
그리고 실제는 이글 포함 1989년 행사사진 많이 찍어서 만든 책 앨범이 회관에 30년간 비치 되어있었는데 이번 2019년에 다시 마을회관을 새로 신축해 이사 하면서 앨범을 버렸나 보다.
그리고 다시 2019년 행사에 다시 초대되어 당진시장 국회의원 등과 행사시 한번 더 인사 말씀 드리며 구룡동九龍과 도곡道谷 이라는 고향 마을 이름 유래도 말씀 드렸고, 다시 사진 500여장을 찍어서 A4 책 200여 페이지 짜리 4권을 만들어 기천형님 구룡2통 통장께 전해서 회관에 보관 중인 인연이 있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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