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작구청과 동작자원봉사은행이 공동으로 주관하는 <동작문화유적(유산) 해설사교육과정>이 지난 8월18일 부터 9월24일까지 매주 목, 금요일 2시간씩 10일간 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교육기간중 동작구 관내 문화유적 5군데를 직접 답사하면서, 문화유적 해설사로서의 자질과 역량을 기르고, 조상의 숨결을 느끼며 민족의 얼을 되찾아 보고, 올바른 역사를 인식하는 방법등을 교육하였습니다. 주임강사로는 양영환 (전 국사편찬위원회 편사관,ㅡ 현 ,국사교육 연구원장 ) 박사가 주관하였습니다.
수료식에는 김우중 동작구청장과 양영환 박사등이 참석한 가운데 동작구민 40여명이 수료하였습니다.
답사 유적으로는,
1) 龍양鳳저亭.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호
소재지 : 동작구 초롱길 8-1(본동 10-30)
본동사무소 뒤에 있는 용양봉저정은 정조15년(1791)에 지어진 행궁이다 정조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顯隆園)에 참배길에 한강을 건넌후 잠시 휴식하던 곳이다.
효성이 지극한 정조는 1789년 부친인 사도세자의 영우원(永園)을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을 조성하고 자주 참배했다. 이때 왕의 어가행렬이 주교(배다리)를 놓은 한강을 건너 용양봉저정에서 점심을 들고 장승배기를 거쳐 수원으로 행행하였다.
건조연대는 1789년(정조 13) 이후로 추정되며 처음에는 정문과 누정 등 두세 채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정면 4칸, 측면 1칸인 온돌방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툇간을 붙였으며 사방에는 띠살 분합(分閤)을 단 기와집 한 채만이 있다. 이 곳은 잠시 휴식하며 점심식사를 하던 곳이라 하여 일명 주정소(晝停所)라고도 하였다고 한다.
「용이 뛰놀고 봉황이 높이 난다」는 이름의 이 정자는 당시 한강을 건널때 놓았던 주교의 화려함을 잘 나타내주고 있으며 오늘도 말없이 흐르는 한강변에서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어버이를 섬기는 역사의 교훈이 되고 있다.
지하철 : 1호선 노량진역 하차
일반버스 : 버스 노량진로 및 현충로 방면 가는 모든 시내버스 500번, 605번, 640번, 150번, 360번, 361번, 363번, 5531번, 5533번, 6211번, 6411번,506번, 4511번, 9408번, 5529번, 504번, 5535번, 5536번,152번, 9412번, 5011번, 751번, 본동 가칠목에서 하차.
노량진로에서는 본동 국민은행 앞에서하차후 본동동사무소까지 도보. 본동동사무소 뒷편에 위치. 현충로에서는 중앙대학교입구역에서 하차후 본동동사무소가지 도보. 본동동사무소 뒷편에 위치.
2) 死六臣墓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호
소재지 : 동작구 노량진로 62 (노량진1동 155-1)
조선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희생된 70여명중 젊은 육신의 묘역이다. 사육신의 충절과 의기를 추모하여, 1691년(숙종 17) 이곳에 민절서원을 세우고, 1782년(정조 6)에는 신도비를 세웠다.
서울시는 1955년 그 자리에 육각의 사육신묘비를 세우고 1978년 정화해 사육신공원을 조성하였다.
원래 이곳에는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유응부(兪應孚)만 묻혔으나, 77∼78년 사육신묘역 정화사업 때 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김문기(金文起)의 가묘도 추봉(追封)하였다.
사육신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악형에도 굴하지않고 순사(殉死)한 조선 전기의 6충신, 곧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 등을 말한다. 이들은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의 신임을 받고, 문종으로부터는 나이 어린 세자(단종)를 잘 보필하여 달라는 고명(顧命)을 받은 사람들로서, 단종의 숙부 수
양대군이 1453년의 계유정난(癸酉靖難)을 통하여 안평대군과 황보 인·김종서 등을 숙청하여 권력을 독차지한 끝에 55년에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동조자를 규합하여 단종을 다시 왕위에 앉힐 것을 결의하고 그 기회를 살피고 있었다. 이들은 56년 6월 본국으로 떠나는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에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유응부가 국왕 양쪽으로 칼을 들고 지켜서는 운검(雲劍)이 된 것을 기화로 세조(수양대군) 일파를 처치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이 사실이 사전에 누설되어 계획은 좌절되었다.
이들의 계획이 일단 좌절되자 같은 동지이며 집현전 출신인 김질 등은 뒷일이 두려워 세조에게 단종복위음모의전모를 밀고하였고 세조는 연루자를 모두 잡아들여 스스로 이들을 문초하였다.
태종의 장남이며 세종대왕의 맏형인 양녕대군(讓寧大君/1394~1462)의 묘와 사당인 지덕사가 있는 곳이다.
지덕이란 「인격이 덕의 극치를 이루었다」는 뜻으로 『논어』태백편에 주나라 왕자 태백이 셋째 계력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고 은둔한 사실을 ‘태백은 지덕이라’한 공자의 평가에 연유하여 세조임금이 친히 지은 이름이라 한다.
지덕사 건립 후 숙종 때 중수했으나 후손이 쇠퇴하여 유지하기 어려웠는데 영조가 그 근처에 있는 남관왕묘에 행차하였다가 황폐한 사당을 보고 즉시 사당을 보수케하고 제문을 내려 제사를 지내게 했으며 자손들에게 벼슬을 주었다. 그 후 지덕사는 순조, 철종, 고종이 보수를 거듭하다가 일제의 정략에 의해 1912년 묘소가 있는 현 위치로 이전하게 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사당, 제사당, 제기고 등 3동의 건물과 3개의 솟을문이 있고, 사당내에 정조임금이 쓴 <금자현액>과 외후손인 좌의정 허목이 쓴 <지덕사기>, 정조 때 채재공이 쓴 <지덕사기>가 있고 양녕대군 친필인 숭례문의 탁본과 후적벽부 팔폭병풍목각판 등이 보관되어 있다.
지하철 : 7호선 장승배기역 하차.
일반버스 : 전,725(종점하차 후 우측 400m도보)
전 ,8(약수아파트 앞)
전,3-2번(약수맨션앞 하차 후 300m 도보)
4)孝思亭.
소재지 : 흑석1동 141-2
효사정은 노량진 나루터 남쪽 언덕에 있던 조선초 공숙공 노한(盧)의 정자이다.
지금의 건물은 일본 신사 자리에 1993년 신축한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세종때 우의정을 지낸 노한이 모친상을 당하여 선영인 이곳에 모시고 무덤 옆에 초막을 치고 3년간 거상하고도 서러워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묘지 북쪽 깎아지는 듯한 언덕 위에 별장을 짓고 일생을 살면서 등을 밝혀 추모하고 자신도 이곳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노한은 좌의정 민제의 사위로 태종과는 동서간이다. 16세에 음서로 등용되어 경기관찰사 한성부윤에 올랐고 1433년 대사헌을 거쳐 우의정이 되었다. 노한의 아들 돈녕공의 친구인 대민공 강석덕이 <효사정>이란 정자이름을 지었고, 그 아들 강희맹이 정자의 내력인 기문을 지어 효사정의 참뜻을 밝혔다. 그 후에도 선비
출신 재상인 기순, 정인지, 신숙주, 김수온, 서거정 등이 효사정의 정취와 효사의 참 뜻을 시로 읊어 기렸다.
이 별장은 효도의 상징으로 유명했으며 한강을 끼고 있는 정자 중 경관이 제일 좋은 곳으로 칭송되었다.
동작구 동작동에 위치한 국립현충원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순국한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민족의 성역이다. 이 곳은 관악산 기슭의 공작봉(孔雀峰)을 주봉(主峰)으로 하여 정기어린 능선이 병풍치듯 3면을 감싸고 앞으로는 한강수가 굽이쳐 도는 풍수상 명당으로 손꼽히는 43만여평의 포근한 땅이다.
국군창설 이래 전사자들을 서울 장충단공원 내에 있는 장충사에서 모셔왔는데, 6.25동란이 발발하여 전사자 수가 증가하자 군묘지 설치 문제가 논의되어 1955년 7월 15일 현재 위치하고 있는 동작동에 군묘지 업무를 관장할 '국군묘지관리소'를 창설하였다.
1956년 4월 13일 군묘지령이 제정되어 전국 곳곳에 이름없는 넋으로 산재하고 있는 국군장병들의 묘지를 안장하였다. 초기 국군묘지에는 군인과 군무원만을 안장하였으나, 1965년 3월 30일 '국립묘지'로 승격되어, 애국지사, 경찰관 및 향토예비군까지 대상을 확대하여 안장함으로써 겨레의 성역으로서 국립묘지의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1996년 6월 1일에는 '국립묘지관리소'의 관리기관 명칭이 '국립현충원'으로 개명되었다. 2003년 5월 31일 현재 국립현충원에는 국가원수 2위, 임정요인 17위, 애국지사 1,693위, 국가유공자 120위, 장군 513위, 장·사병 73,919위, 경찰 2,886위의 묘소와 108,793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지하철 : 4호선 동작역 ②④번 출구
일반버스 : 현충로 방면 모든 시내 버스 360번, 361번, 362번, 363번, 640번, 642번, 4511번, 6411번, 9408번, 9412번, 5524번. 국립현충원 하차.
이 철불에는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해진다. 지금부터 100여년 전쯤, 당시 이 지역에 살던 한 어부가 꿈에 한강가에서 어떤 부처가 빛을 보게 해달라는 호소를 하는 꿈을 세번 꾸었다. 그가 꿈에 본 지점으로 가보니 쇠로 만든 녹슨 부처가 있어 어부가 가까운 화장사(지장사)에 모셨다 한다. 이 불상이 위치한 지장사는 동작동 국립현충원 내에 있는 절로 공민왕
(660년)때 보인대사가 중건했다. 당시의 명칭은 <화장암>으로 불리우다가 조선조 명종 4년(1549)에 선조대왕의 할머니인 창빈안씨의 묘소를 이곳(국립현충원 내)에 모시게 되면서 절의 이름도 ‘화장사’라 바꾸어 승격시켰다. 이후 국립묘지가 들어서면서 국립묘지에 안장된 호국영령의 명복을 기원하는 뜻으로 호국지장사(護國地藏寺)로 개칭하였다.
일반버스 : 현충로 방 면 모든 시내 버스 360번, 361번, 362번, 363번, 640번, 642번, 4511번, 6411번, 9408번, 9412번, 5524번, 국립현충원 하차 , 국립현충원 안에 있슴.
ㅡ 3. 창빈안씨 신도비 부 묘소.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4호
소재지: 동작동 산 44-7
동작동 국립현충원 내에 있는 중종의 후궁이자 선조의 조모인 창빈 안씨의 묘로 1549년 양주 장흥에서 이장됐다. 후궁의 원묘이나 선조 이후 이분의 현손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어 예외적으로 신도비를 세우고 봉분 뒤에 담을 둘렀으며 묘갈(墓碣:묘표), 혼유석(魂遊石:묘 앞 장방형 석상), 석등, 호석 등 왕능과 비슷한 석물이 갖추어져 동작능이라 불리워 왔다.
창빈 안씨는 시흥에서 안원대의 딸로 태어나 중종 2년(1507) 아홉살에 궁녀로 입궁해 22세에 상궁이 되었다. 2남 1녀 중 둘째 아들 덕흥대원군의 세째 아들 하성군이 14대 임금(선조)으로 등극함에 따라 창빈으로 추존되었다.
신도비는 숙종9년(1683) 세워진 것으로 높고 중후한 대석 위에 정사각형의 비신과 유난히 큰 옥개석을 얹고 연꽃봉우리를 조각했다. 비신 위쪽에 오위 도총관 항(杭)의 전서로 ‘창빈 안씨 신도비명’이라 전액을 두르고 예조판서 신정이 지은 비문을 지돈녕부사 이정영의 글씨로 새겼다
지하철 : 4호선 동작역 ②④번 출구
일반버스 : 현충로 방면 모든 시내 버스 360번, 361번, 362번, 363번, 640번, 642번, 4511번, 6411번, 9408번, 9412번, 5524번. 국립현충원 하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