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에 ‘Salen Reefer’라는 유명한 냉장화물선 운영회사가 있었다. 전 세계의 청과물(靑果物) · 야채(野菜) 등의 운송은 거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다는 말이 있었던 회사이다.
대개 이런 화물들은 계절과 자연환경의 영향이 크기 때문에 공산품(工産品)과는 달리 집하(集荷) 상황이 일정하지 않은데다, 생물(生物)이어서 보관상의 문제점 등으로 운항 스케쥴도 늘 들쑥날쑥이기 일쑤였다. 이 회사에 몇 차례 용선(傭船)되었는데 역시 세계적 명성에 걸맞게 축척된 고도의 노하우는 물론 운항 기법 등이 빈틈없을 만큼 치밀하여 배운 바도 많았다.
1983년 12월, 적하항이 미정이기 때문에 다음 지시가 있을 때까지 지브롤터(Gibraltal)항 외항에서 대기하라는 전문(電文)이 왔다. 입항이 아니기 때문에 외항에 닻을 내리고 항만국에 보고하고 떠날 때 다시 알리기만 하면 되었다.
지브롤터! 대서양과 지중해를 잇는 입구를 지키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민감하고 군사 요충지이기도 하다. 어떻게 하여 큰 바윗덩이의 작은 끝부분이 영국영토가 되었는지 볼수록 희한하게 여겨졌다. 역사적으로 보면 1704년에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참가한 영국이 이곳을 점령한 이래 계속 영국땅이 되었다고 한다. 인구는 2022년 기준으로 고작 약 3만 3천명 정도로 대부분 영국인이라고 한다. 거대한 바위산 아래를 깎아 바다를 메워 비행장까지 만들었다. 이 중요한 곳을 스페인이 다시 탈환하려고 한때는 무력행사 혹은 물 공급을 중단한 적도 있었다고 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여전히 300여 년 동안 영국영토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 거대한 바위산은 오가는 선박들에게는 다시 없는 바람막이가 되어주는 고맙기 짝이 없는 명물(名物)이기도 하지만, 바위산을 휘감아 도는 바람이 어떤 때는 초속 3~40m의 강풍이 되어 불어닥치는 수가 있다. 눈을 꽉 감아도 눈꺼풀이 들고 일어나는 경험을 했다.
통상 그렇지 않은데 의외로 대기 좀 기간이 길었다. 어느 날 새벽 2시쯤 당직 항해사가 깨운다. 작은 보트(Boat) 하나가 표류(漂流) 중에 구조요청을 하는데 어째야 할지 묻는다. 꼬마를 데리고 부자(父子)간에 타고 있다.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특히 기진맥진한 꼬마의 표정이 안쓰럽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선뜻 구조할 수도 없었다. 난감했다. 아마도 인근 연안에서 애들과 물놀이 하다가 조류나 해류, 바람에 떠밀려 나온 듯 했다. 부득이 항무국(Gibraltal Port Control)에 연락, 구조를 요청했으나 국적만 확인하고는 연락이 없다. 아마도 스페인과의 관계가 여전히 서먹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상악화의 징조도 있는데 무작정 둘 수도 없었다. 우선 사람만 승선시키고 날이 밝을 때까지 먹을 것을 주고 쉬게 했다. 상황을 얘기하자 물과 식량, 장갑, 담배 등을 주면 가까운 해안으로 노를 저어 가 보겠다고 했다. 넉넉하게 한몫 챙겨 보냈지만 자꾸만 바람과 조수(潮水)에 떠밀려 육지와 멀어져만 가는 듯한 모습이 안타깝기만 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망원경으로 보고 있는데 마침 부근을 지나던 작은 어선에 구조되는 것을 확인함으로 안도의 숨을 쉬긴 했지만, 너무 박절했다는 후회가 따르기도 했다. 그래도 우리가 재난 보트를 구했다는 자긍심은 남는다.
앞으로 한 항차만 마치면 1년 만기(滿期)를 다하고 귀국하게 되어 있었다. 어쩌면 년말과 겨울 방학은 가족들과 함께 보내며 정성껏 내 정을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기에 다음 항차의 스케쥴이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날벼락이 떨어졌다. 용선자의 요청에 따라 선장을 비롯하여 필요한 2명의 기관부 요원은 새로 승선하는 사람들에게 전승(傳承)을 위해 한 항차를 더 뛰라는 선주(船主)의 오더에 덧붙혀 다음은 모로코에서 유럽쪽까지 야채와 과일을 운송하다는 내용이 타전되어왔다. 제기랄이다. 기대에 부풀어 있을 wife와 실망하는 애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빈자소인(貧者小人)’인지라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했다.
암튼 예정대로 잘 마치고, 84년 1월, 3명은 독일의 함부르그(Hamburg)항에서 하선하여 스위스의 취리히 공항에서 1박을 하고, 다음 날 또 어딘가 한 군데를 더 거쳐 중동의 사우디아라비아를 경유하여 서울에 도착하는 대한항공편이 수배 되어 있었다. 기차여행으로 치면 완전 완행열차와 같은 것이다.
함브르그에서 서울까지 직항편이 있었지만 당시 취업선원들이나 해외근로자들은 달러($) 절약의 정부 방침에 따라 자국(自國) 항공기를 이용해야만 했고, 또 저가(低價)인 경유지가 많은 항공편을 이용했다. 불편하지만 도리가 없었다.
이런 경우 환승지(換乘地)인 취리히 공항에는 해당 항공사 직원들이 다음날 자국 항공으로 환승할 고객들을 호텔까지 안내해 주고, 다음날 다시 공항까지 데려다 주는 등 일체의 서비스를 해 주게 되어 있었기에, 마땅히 KAL(대한항공) 직원이 직접 마중을 나와 호텔을 안내할 걸로 믿었는데, 직원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공항 안내 Desk 여직원도 KAL 직원은 연락이 안 된다고까지 했다. 부득이 자비(自費)로 일인당 5달러($)를 지불하고 공항 안내소의 안내를 받아 지정호텔로 갔다. 당시 우리나라는 대한항공(KAL) 밖에 없었기에 KAL의 갑질이 엄청 성했던 시절이었다.
문을 나서려는데 안내 Desk 아가씨가 부탁이 있다면서 가리키는 쪽을 보니, 분명 한국 사람인 듯한 대여섯 명이 바닥에 마치 노숙자처럼 죽치고 앉아 있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내일 KAL로 귀국해야 할 한국 사람들인데 아무리 설명해도 일인당 5달러($)라는 말을 듣고는 못 내겠다고 5시간을 공항 대합실에서 나가지도 않고 버티고 있으니 설명을 좀 해서 호텔로 이동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런 절차를 해 주는 것이 KAL 직원의 일이다. 같은 한국인임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한국의 어느 수산회사의 선원들로 그들도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이었다.
같은 선원이라도 상선(商船)과 어선의 겨우 다소 수준의 차이가 있었다. 한번은 한 그룹의 교대 선원이 김해공항에서 출국수속을 하는 중 한 사람이 출국서류에 결함이 있어 부득이 다음날 혼자 가야만 했다. 그는 공항에서 엉엉 울었다. 이튿날 할 수 없이 공항직원이 커다란 마분지에 ‘이 사람은 스페인 라스팔마스공항까지 가야 하니 도움을 바란다’고 하고 중간의 환승공항 이름까지 큰 영어 글씨로 써서 목에 걸어 주었다. 그래도 용케 목적지까지 도착한 예가 있었다. 지금으로선 턱도 없을 일이 다반사처럼 있었다.
그들 가운데 대표자 되는 사람에게 얘기했다. “환승을 위해 일시적으로 묵어가는 경우에도 공항 밖을 나서게 되면, 그 나라에 체류하는 것이 되며 그 절차에 따라 경비가 일인당 $5씩인데 이는 누구나 개인 각자가 부담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해 주었다.
“아이구! 그걸 모르고…, 감사합니다.” 하면서 모두 얼른 5달러씩을 내고 지정된 호텔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그 사람들보다 공항 여직원이 더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물론 이튿날 KAL 직원에게 엄중히 항의하며 수속비로 낸 $5를 내라고 고함을 치기는 했지만 그 넘들이야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해외 여행객들 중에 가장 만만하고 취급이 용이(?)한 사람들이 선원이나 해외근로자들이었다. 혹시라도 해외 공관에서 급히 필요한데 좌석이 없을 경우 예약되어 있던 우리들의 자리를 취소시키고 빼앗아 가는 경우가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면서도 귀한 ‘외화’를 벌어드리는 ‘산업역군’이라는 말로 포장을 하기도 했다.
한때 냉전시기에 일본의 「조총련계 재일동포들의 모국방문」 행사기간이 있었다. 정부에서 의도적으로 실시한 획기적인 국가적 행사였다. 막판에는 영사관 직원들이 공항에다 현장 사무소를 마련하고 사전 예약도 없이 바로 찾아오는 조총련계 재일교포가 있을 경우 그 자리에서 임시 비자를 발급하고는 좌석이 없으면 이미 기내 좌석에 앉아 있는 선원들이 좌석을 빼앗기고 쫓겨나온 적도 있었다. 이로써 당시 꽉 막혔던 조총련계 재일동포들의 모국에 대한 인식 변화에 크게 기여를 했었다.
당시로선 KAL이 국적항공사로서는 유일한 존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외국에서도 마치 정부기관처럼 목에 힘이 들어 있었던 그들이었다. 요즘에 그랬다가는 박살 날 일이 벌어질 일이지만 그런 시절이 있었다.
항공기가 사우디를 경유함으로 많은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사우디에서 탑승한, 이고 진 짐투성이의 중동 근로자들의 모습들도 가관이었다. 기내에 소지하는 수화물 자체가 엄청 많아 정리하는데 북새통이었다. 아마도 해외근로자들에게는 규정 이상의 개인 수화물 양이 허락된 듯 했다. 당시 중동 근로자들은 국가적으로는 귀중한 주역들이면서도 공항 현장에서는 골치 아픈 존재들이 아니었나 싶다.
좌석이 정리되어 비행기가 이륙하여 안전벨트 해제 등이 켜지자 음류수가 나왔다. 아직 땀도 마르지 않은 체 선뜻 ‘위스키 한 잔’을 시킨, 옆 자리의 열사(熱砂)의 햇볕으로 검게 탄 얼굴에 덩치 좋은 젊은 친구가 묻지도 않았는데 얘길 한다.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인데, 영어를 못해 굴러떨어진 과장 자리도 못 하고 돌아가는 게 후회막급하다며, 가끔은 무심코 ‘씨팔’ 소리가 튀어나오는 걸 보면 엔간히 심기가 뒤틀리고 억울한 듯 했다.
내 좌석 앞에 앉은 독일인이 서울의 기온이 얼마나 되냐고 묻기에 대답해 준 것뿐인데 어찌 그리 영어를 잘 하느냐고 묻던 김해 출신의 트럭 운전사가 진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심술이 가득한 시기의 눈빛이었다.
이번에 가면 영어는 꼭 배울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을 여러 번 했지만, 과연 쉽게 이루어질 것인지… . 내가 겪은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란 짐작만 했을 뿐 그 얘기를 해 주지는 못했다. 우리 속담에 ‘똥 누기 전과 후의 일’은 전혀 다른 별개 현상이기 때문이다. 더욱 그로벌화 되어가는 시대. 역시 언어가 핵심이 되어가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마치 소설에서나 읽을 수 있는 일 같이 생각될지 모르지만, 분명 우리에게는 물려받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신 박 대통령의 뜻에 따라 해외근로자들이 함께 활약했던 때가 있었으며 그것이 ‘한강의 기적’ 이룩하는 데 큰 기틀이 되었음을 깊이 이해해야 할 것이다. 불과 반세기 전의 일이다.
첫댓글 <눈을 꽉 감아도 눈꺼풀이 들고 일어나는>곳에서의 가슴 아픈 이야기들.
<불과 반세기 전>인데 한국민들의 처참한 모습.
젊은 세대들이 이 글을 꼭 읽어 주기를 기원하게 되네요.
늑점이님의 용기에 박수를.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만큼 부강한 대한민국을 이루어 낸 우리 웃 세대와 우리 세대 남편들에게 감사 또 감사를 드립니다.
부언.
우리 카페 회원이 아니신데 자주 방문한다고 하데요.
서완수님의 글을 읽으러......^^
대단한 뱃장. 용기. 그리고 그때 상황을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감이 잡히듯 잘 표현해 주신다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본문 중에 '물려받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신 박 대통령의 뜻에 따라 해외 근로자들이 함께 활약했던 때가
있었으며 그것이 ‘한강의 기적’ 이룩하는 데 큰 기틀이 되었음을 깊이 이해해야 할 것이다.'라는 문구에 눈시울이 젖어 옵니다.
지금같이 잘 사는 것이 저절로 된 것이 아니고 수많은 사람들의 외화 벌이로 이루어진 것을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마도로스 당신은 가장 멋쟁이 사나이 보람있게 멋지게 살았네. 노후에 건강챙기시고 부산에만 콕 하지말고 세상만사 바라보며 즐기며 살아보세나 ♡대-구 놈♡
허수비 성 고맙소. 당신이 마도로스였다면 나보다 더 멋진 삶을 보냈을 거요.
지금 생각하면 겁도 없이 촐삭대기만 했던 시절이었다는 생각이오. 건강하소. 부산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