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계천의 지천[백운동천 (白雲洞川)]을 따라서
◇ 운강대(雲江臺) : 종로구 운강2길 11번지(경복고등학교 내)
- 조선 선조 때 명신 운강 조원(曺瑗)이 살던 터
청운동의 경복고등학교 교문을 들어서면 ‘운강대(雲江臺)’라고 새긴 작은 바위 하나가 있다. 이곳은 조선 선조 때의 명신인 운강 조원(趙瑗, 1544~1595)이 살던 터이다. 조원은 17살 때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제자가 되었다. 21살 때 식년 진사에 수석으로 합격했고, 29세 때에는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조원은 31살에 사간원 정언(正言 : 정6품)이 되어 선조에게 당쟁 타파를 위한 탕평의 계책을 상소하였다. 이 젊은 ‘언론’이 당시 쟁쟁한 당파의 수뇌를 파직시키라고 주장한 것이다.
조원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효성이 지극했다. 그중에서 위의 두 형제인 희정과 희철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어머니를 해치려 덤비자 몸으로 막다가 죽었다. 나라에서는 이 일을 기려, 조원의 집 옆에 쌍홍문(雙紅門)을 세웠다. 이 인근 동네의 이름이 효자동이 된 것은 조희정과 조희철의 효성을 기리기 위함이었다.
조원의 나머지 두 아들 희일과 희진은 문장과 글씨로 이름을 날렸다. 조원, 조희일, 조희진, 희진의 아들인 조석형 등 3대가 모두 장원급제(3대 장진, 三代壯進)하는 ‘수재 집안’의 명성을 누리기도 했다.
조원은 소실로 여류 시인 기생 옥봉(玉峰)을 두었다. 그녀는 시를 쓰지 않겠다고 했던 맹세를 하고 조원의 소실이 되었다. 그러나 10년이 지나 이를 어겼으므로 옥봉은 조원에게서 쫓겨나서 뚝섬 근처에 방을 얻고, 조원에게 빌고 빌었으나 용서받지 못했다. 그녀의 시(詩)는 사후에 중국에서 간행되었다.
◇ 청송당 유지(聽松堂遺址) : 종로구 청운동 89번지(경기상업고등학교 내)
- 율곡 이이의 스승인 청송당 성수침(成守琛)의 집터
경기상업고등학교 후원에는 청송당 유지가 있다.
이 터는 청송당(聽松堂)이란 당호를 가진 성수침(成守琛)의 집 자리이다. 이 학교 뒷산에는 ‘청송당(聽松堂)’과 ‘유란동(幽蘭洞)’이라는 글씨가 바위에 새겨져 있었는데 ‘유란동’ 글씨는 사라졌다.
조선말에 간행된 『동국여지비고』에는 성수침의 집이 백악산 아래 유란동에 있는데 송림 가운데 서당 몇 칸을 짓고, 청송당(聽松堂)이란 편액을 걸었다고 하였다.
성수침은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우계 성혼(成渾)의 아버지이고, 율곡 이이의 스승이었다. 그는 명문가에 태어났지만,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스승 조광조가 처형되자 모든 것을 버리고 이곳으로 들어와 초막에서 두문불출하였다. 그는 스승의 가르침을 새기며 산림(山林)의 처사(處士)를 지향하여 이곳 유란동에 몇 칸 서실(書室)을 짓고, 독서에 열중하였다.
한 친구가 세상사에 뜻이 없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성수침에게 작별인사차 왔다가 부재중이므로 「은근한 정다움은 두 그루 소나무 사이에 있고, 세월을 풍상(風霜)으로 보냈어도 모습은 변함없네.」라는 시구를 적어놓고 돌아갔다는 일화도 전해 온다.
조선말 순조 때까지 이 부근은 꽃구경으로 유명했고, 18세기에 겸재(謙齋) 정선(鄭敾)이 그린 「청송당(聽松堂)」 그림이 남아있다.
◇ 백운동천(白雲洞天) : 인왕산 자락의 자하문터널 남쪽 입구(백운장 터)
- 조선말 외무대신을 지낸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이 쓴 각자.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인 종로구 백운동(白雲洞)계곡에는 청계천의 상류인 '백운동천(白雲洞川)'이 흘렀다.
옛 그림을 보면 이곳은 서촌(西村)의 절경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자하문터널 바로 위쪽 바위에 '백운동천(白雲洞天)'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지금도 선명하다.
각자(刻字) 옆에는 작은 글씨로 '광무 7년(光武七年)' '동농(東農)'이라는 글자도 있다. 즉 1903년에 동농 김가진(金嘉鎭 : 1846~1922)이 쓴 것이다.
그의 저택인 '백운장'이 이 근처에 있었는데 당시 건물 규모와 경관에서 '장안의 으뜸'이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전한다.
김가진은 구한말 외무대신·법무대신·중추원 부의장 등을 역임했다. 일본에서 그에게 '남작(男爵)' 작위를 주려고 했지만 이를 거부하고, 백운장에 칩거하다가 1919년 3·1운동 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서 임시정부 고문 등으로 활약했다.
일제는 3.1운동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어중이떠중이 상것들'의 모임이라고 선전했는데 김가진의 상하이 임시정부 참여는 조선총독부와 조선의 전 고관대작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고 전한다. 김가진은 조선말의 장관급 이상 고위관리 중에서 해외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참여한 유일한 사람이다.
※자료 : 「서울경제」 2015년 1월 7일자 <역사의 향기>
◇ 선희궁(宣禧宮) : 종로구 신교동 산 1-1번지(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2호)
- 영조의 후궁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신주를 봉안했던 사당
선희궁은 종로구 궁정동 7궁[육상궁(毓祥宮)] 내에 있는 왕실의 사당이다. 영조 40년(1764)에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인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신주를 봉안했던 사당이다.
조선왕실의 사당인 7궁은 후궁에게서 태어난 왕자가 임금이 되어 그의 어머니의 신위(神位)를 모신 곳이다. 영조는 영빈 이씨가 돌아가자 시호를 의열(義烈)이라 추증하고, 사당의 이름을 의열묘(義烈廟)라고 하였다가 정조 12년(1788)에 선희궁으로 고쳐 격을 높였다.
이 사당은 원래는 한성의 북부 순화방(順化坊 : 현재 종로구 신교동, 국립서울 농학교)에 있었는데, 고종 7년(1870)에 신주(神主)를 육상궁으로 옮겨 모셨다가 1897년에 선희궁으로 되돌려 모셨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영친왕이 태중(胎中)에 있을 때 순헌 엄귀비(純獻嚴貴妃)의 꿈에 영빈이씨가 나타나 폐쇄한 사당을 다시 지어주기를 간곡히 부탁하였다고 한다. 이에 엄귀비가 영친왕을 낳고 나서 꿈을 꾸었던 일을 고종에게 말하자 1897년에 현재 자리에 사당을 새로 지어서 신주를 받들었다고 전한다. 일제의 통감부 통치 때인 1908년에 신주를 다시 7궁(육상궁)으로 옮겼다.
영빈 이씨의 신주를 다시 육상궁에 이전함으로써 이 터에는 선희궁 사당 건물만 남아 있다.
영빈 이씨는 어려서 궁중에 들어가 영빈(暎嬪에 봉해졌다. 영조의 많은 총애를 받았으며, 4명의 옹주를 낳은 뒤 1735년에 사도세자를 낳아 후사를 기다리던 영조를 기쁘게 하였다. 1762년에 사도세자가 폐위당하고 죽음을 맞는 슬픔을 겪었지만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영조 40년(1764), 영빈 이씨가 69세로 돌아가자 영조는 매우 애통해하면서 후궁 제일의 의식으로 장례를 지내게 했다. 처음에는 지금의 현재 연세대학교 안의 수경원(綏慶園)에 안장되었는데 1970년에 영빈 이씨의 원묘와 홍살문 등을 원형 그대로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서오릉으로 이장하였다.
◇ 백세청풍(百世淸風) : 종로구 청운동 52번지 58호
- 병자호란 때 강화성에서 장렬하게 순절한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옛 집터
청각장애 학생들을 위한 국립서울 농학교에서 북쪽으로 조금 가면 청운초등학교가 있다. 이 학교 후문의 언덕에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바위의 각자(刻字)가 있는데 이곳은 병자호란 때 강화성에서 장렬하게 순절한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의 옛집 터이다. 이곳을 ‘청풍계(淸風溪)’라고 하였다.
김상용은 47세 되던 선조 40년(1607)에 이곳에 거주하면서 청풍각 · 와유암 · 태고정 등을 짓고, 친우들과 함께 자연 풍경을 관람하며 우의를 두텁게 하였다. 김상용이 이곳을 ‘청풍계’라고 이름을 붙인 것을 보아 이 계곡이 얼마나 맑고 깨끗한 수석과 주위 경치가 수려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곳은 고려 때 개성 자하동(紫霞洞)에 비길 만한 곳이어서 서울에서는 풍치 좋은 백운동 청풍계로 유명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창의동(彰義洞) 또는 장동(壯洞)이라고 하였다.
김상용은 태고정(太古亭)을 짓고, 근방에 있는 큰 바위에 주자(朱子)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대명일월(大明日月)’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고 크게 새겨 놓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대명일월’ 글자는 없어지고 지금은 ‘백세청풍’의 각자(刻字)만 개인 주택 담장 안에 남아있다.
본관이 안동인 김상용은 김극효(金克孝)의 아들이며, 임당 정유길(鄭惟吉)의 외손으로 남산 기슭 회동(檜洞)에서 태어났다. 선조 23년(1590)에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을 지내다가 임진왜란을 만나 정철, 권율의 종사관을 지낸 후 승지가 되어 국왕을 보필하였다.
김상용은 인조반정 후에 서인으로 기용되어 이조판서를 역임하였고, 정묘호란 때에는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서울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우의정에 임용되었으나 사퇴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종묘의 신주를 받들고 강화로 피난하였는데 강화성이 청군에 의해 함락되자 남문 누각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르고 순절하였다.
김상용이 강화도에서 순절한 지 70여 년이 지난 숙종 34년(1708)에 그의 충성심을 추모하기 위해 청풍계에 신위(神位)를 모신 사당을 늠연사(凜燃祠)라 하였다. 조선 후기에 안동 김씨가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자 순조와 익종이 봄에 이곳에 거둥한 일이 있었고, 이곳에 태고정, 청풍지각 등의 정자와 연못을 만들며, 탄금석 등의 바위 이름을 붙이자 청풍계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김상용이 살던 집인 청풍지각 대들보 위에는 그의 친필인 ‘청풍계’ 세 글자를 걸어놓았다.
김상용 후손이 대대로 이곳에 살았으므로 이들을 창의동 김씨, 또는 장동 김씨라고 불렀다. 김상용은 인왕산 기슭 무속헌(無俗軒)에서 아우 청음 김상헌(金尙憲)과 더불어 두 칸 사랑에서 살았다. 이 당시 한 사람은 병조판서, 한 사람은 이조판서였지만 찾아온 손님을 단칸방에서 접견할 정도로 검소하였다 한다.
일본 강점기에 미쓰이(三井) 회사가 이곳을 차지한 뒤 계간(溪磵)을 메우고, 일부 암석을 떼어내며 터를 넓혀 새로 집을 지었다. 이에 이 정자는 한 칸만 남아서 인부의 숙소로 쓰였다가 모두 훼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