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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장
강호무림에 새로운 시대가 태동했다. 무림공적이 머물고 있는 감숙성 토벌에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무인들이 제갈수연의 이름을 외치며 제천맹으로 모여들었다.
그곳에 참여하는 많은 무인들의 공통적인 생각은 우선 세력을 키워야 한다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들의 생각이 바뀌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 몇 개월 전 일어났던 사건 때문이었다. 무림공적을 치러 갔던 토벌대가 거의 전멸지경에 이르렀던 거였다.
제천맹이 바로 서지 못하면 감숙성 정벌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갈수연이 의도한 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이다.
봇물처럼 밀려드는 무림인들을 받아들인 제갈수연은 발 빠르게 제천맹의 조직을 확대해나갔고, 감숙성을 제외한 강호전역에 제천맹의 지부를 만들며 더욱더 세력 확대를 꾀했다.
제천맹의 위상이 높아감에 따라 강호인들에게 생긴 또 한 가지 변화는 천하제일인으로 제갈수연이라는 여장부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과거의 천하제일인이었던 철목승은 강호공적으로 낙인찍혔고, 태상맹주로 있던 담운천 또한 거의 활동이 없었기에 점점 잊혀가는 인물이 되었다.
오직 제천맹주 제갈수연의 이름만이 강호무림인들 사이에 오르내릴 뿐이었다.
천부(天府).
제천맹의 대소사가 결정되는 대 회의실로, 제갈수연의 지시사항이 전 중원으로 퍼져나가는 곳이다.
그 천부에 삼십여 명의 무인들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가장 안쪽에 보이는 내실 출입문을 주시하며 서 있다.
제천맹 열세 개 지부의 지부장 예정자들과 이곳에 있는 수뇌부들이었다.
천무맹과 천마맹이 제천맹으로 통합된 지 일주년, 그 창립 기념일이 바로 오늘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맹주님!"
내실의 문이 열리고 금색의 화려한 복장을 한 제갈수연이 나오자, 안에 있던 모든 무인들이 고개를 숙이며 우렁찬 고함을 질렀다.
오체투지(五體投地)는 아닐지라도 그들이 보낼 수 있는 최고의 공경을 보내고 있는 거였다.
"앉으세요."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대신한 제갈수연이 무인들을 쳐다보며 앉으라고 하였으나 누구 하나 자리하는 사람이 없었다. 단지 제갈수연의 다음 행동만 주시할 따름이었다.
이윽고 제갈수연이 그녀의 자리에 착석하자 그제야 각자의 자리를 찾아 앉는다.
그런 무인들의 모습을 쳐다보던 제갈수연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어렸다. 권력의 힘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앞에 있는 자들치고 자신보다 강자 아닌 사람이 없었다.
무공으로만 따진다면 자신이 가장 하수인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눈길 한 번 받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러한 것들 때문에 천하제일을 원하는 것이다. 이런 기분을 느끼기 위해.
이어 시비들에 의해 음식들이 차려지고 제천맹 탄생 일주년을 축하하는 축배가 시작되었을 즈음하여 제갈수연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여기 계시는 여러분들은 제천맹의 창업 공신입니다. 제천맹은 이 제갈수연의 개인 소유물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의 것입니다.
저는 이 제천맹을 명실 공히 강호무림의 영원한 금자탑(金子塔)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많이 도와주십시오. 여러분이 어떻게 해주느냐에 따라 제천맹의 역사는 곧 무림의 역사가 될 수 있습니다."
"염려놓으십시오, 맹주님.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저희들은 맹주님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맹주님!"
실내에 있던 모든 무인들이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들을 쳐다보는 제갈수연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어렸다.
자신의 세력, 아직은 시작에 불과하지만 이곳 천부를 채워나갈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이제는 선별의 시기가 도래했다.
수많은 인재들 중 필요한 사람을 골라서 제천맹에 충성하는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저들처럼.
'철목승, 그대는 조금 더 살아주어야 하오.'
굳이 철목승을 제거할 필요가 없다.
그가 건재함으로써 제천맹의 힘은 더욱 커지고 더욱 강해질 것이다. 더 이상 제천맹을 키울 필요가 없을 때까지 철목승은 살아 있어야 한다.
새해에 시작된 제천맹의 주연(酒宴)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고, 권력의 흥취에 흠뻑 젖어 있는 제갈수연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러나.
밀천에서 들어온 소식에 의해 천부 안은 한순간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또다시 들려온 황제의 붕어(崩御)소식, 당금 황제인 홍희제가 보위 일 년 만에 승하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었다. 북경의 피바람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잘 들으세요. 모든 관심을 관부 쪽에 두되, 어떠한 세력에도 가담해선 안 됩니다.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지켜보기만 하세요."
북경에서는 또다시 황권을 둘러싸고 권력다툼이 일어날 것임에 분명할 터이고, 제갈수연의 선택은 중립이었다.
서둘러 주연을 끝마친 제갈수연이 그녀의 거처로 돌아와 일비를 찾았다.
"그들은 지금 어디 있느냐."
"북경 서쪽 소오태산에 주둔 중입니다."
혈맹의 병력에 관한 말이었다. 이미 지금의 일은 예상하고 있었고, 단지 시간이 문제라 여기고 있었는데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주고후는?"
"그 또한 측근과 함께 북경을 빠져나왔습니다."
"한순간도 놓치지 말고 그들을 주시하라."
"네! 맹주님."
"백랑! 서둘러 북경으로 가셔야겠어요."
"그럼 이번 건으로 석숭의 입지가 약화되겠군."
"그래야지요."
제갈수연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석숭의 반대파인 동창제독 유량에게 주고후의 모반사실만 알려주면 되는 것이다. 아울러 무림의 세력이 관련되었다는 사실까지.
그동안 백무천이 북경에서 만들었던 연줄이 동창제독인 유량이었다. 그 유량의 성장과 같이하여 제천맹도 안정되어갈 것이다.
"백랑! 한 시진 정도만 쉬었다 가세요."
드디어 담운천의 손발을 묶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인지 제갈수연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며 호흡이 가빠졌다.
완전한 천하제일인의 자리가 보이고 있음이다. 최고의 자리가.
* * *
"어서 오너라."
"심려가 크시겠사옵니다, 제독합하!"
제천맹을 떠난 백무천이 도착한 곳은 금의위 영반인 석숭과 더불어 황실의 최고 권력자인 제독동창(提督東廠) 유량(劉粱)의 저택이었다.
동창(東廠).
반정에 의해 황권을 잡았던 영락제가 창설한 단체로, 그들의 임무 또한 금의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석숭이 영반으로 있는 금의위가 주로 외부의 일을 담당해오고 있다면, 동창은 북경에서 정적(政敵)을 제거하는 활동을 해왔다. 그 동창의 수좌가 환관인 유량이었다.
제갈수연의 선택이었다. 현 황실에서 석숭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그인 것이다. 사실 동창의 지위는 금의위보다 위라 할 수 있었다.
직급 자체가 더 위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영락제와 사적인 친분관계에 있던 석숭의 존재로 인하여 권력에 있어서는 언제나 금의위보다 뒷전이었다.
그랬던 동창이 영락제의 죽음과 함께 서서히 기지개를 펴고 있는 것이다.
"지금 어디에 있나."
마치 여인의 음성인 양 가냘픈 목소리가 유량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앞에서 가까이 듣지 않았더라면 탁한 여자의 목소리라 착각을 해도 하등 이상해 보일 것 같지 않은 그런 목소리였다. 그러나 외부로 표현되는 목소리만 그럴 뿐이었다.
백무천을 쳐다보고 있는 유량의 눈은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심연이었다.
일말의 감정도, 느낌도 나타나지 않는 무심한 눈. 초극의 고수인 백무천을 제압하는 눈빛이었다. 아울러 권력의 핵심에 있는 자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타인을 압도하는 눈인 게다.
'빌어먹을, 저놈의 눈빛은…….'
싸늘하게 자신을 노려보는 유량의 눈빛에 등골이 서늘해진 백무천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육 개월 전, 유량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저 높은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일 뿐 환관이 얼마나 대단하랴 싶어 무시하는 마음이 더 컸었다.
그러나 유량과의 첫 대면에서, 별 볼일 없는 인간으로만 여겼던 인식이 완전하게 바뀌어버렸다.
초극의 고수가 풍겨내는 기운에 비할 바 아니었다. 아니, 더 강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추상같은 위엄만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생경스러움이었다.
"소오태산으로 갔습니다."
제천맹에서만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었는지, 주고후의 위치를 알리는 백무천의 말에도 유량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바로 치시겠습니까?"
"아니야, 적을 치는 것도 시기가 필요한 게야. 동조자들이 전부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그것도 새로운 황제가 등극한 다음에 해야 하는 게야."
'그리고 당신의 시대도.'
주고후의 반란은 유랑에게 있어서 최고의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금의위를 뒤로하고 동창이 앞서 나갈 수 있는 기회. 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석숭을 밀어내고 금의위마저도 휘하에 두고자 하는 유량의 야심. 그런 유량의 욕심과 같은 배를 탄 세력이 제천맹이었다.
"그들과 같이 움직이며 계속해서 연락을 보내거라."
"네! 합하."
* * *
유량이 넘어뜨리려는 석숭이 머물고 있는 곳, 그곳의 지하에서는 세상의 군상들이 꿈꾸는 야심과 상관없이 오직 한 가지 목표를 위해 모든 힘을 쏟아 붓고 있는 인간이 있었다.
강구두였다. 운공을 하고 있는지 가부좌를 하고 있는 그의 몸에서 전율적인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온몸에 있는 각 혈도로부터 사방에 깔려 있는 어둠보다도 더 검은 운무가 뭉클거리며 새어나왔다.
지극히 차갑고 묘하게 짜증스러운 기운,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강한 패력(覇力)마저 느껴지는 저 기운의 정체는 무엇인지.
딱히 마기(魔氣)라 부르기에는 그 내재된 힘이 너무 강했고, 패기(覇氣)라 말하기에는 뭔가 부족했다.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강구두의 몸에서 흘러나온 검은 기운은 더욱 농밀해졌다.
그 검은 기운이 그의 몸을 완전하게 가려버리는 순간, 새로운 변화가 생겨났다.
마치 서편 하늘로 넘어가던 태양이 마지막 힘을 소진시키며 쏟아내는 황혼 노을처럼, 검은 구름 속으로부터 붉은 기운을 간직한 빛무리가 조금씩 스며나오기 시작했다.
강호상에 수많은 무공이 있지만 운공 중에 저런 현상을 보이는 무공은 단 한 가지밖에 없다.
천마심공, 천장지옥마공, 패천마공, 그 다음으로 강한 무공이라 알려진, 바로 낙일혈마공(落日血魔功)이었다.
낙일혈마공이란 마공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이백 년 전이다. 처음 강여충이란 자가 한 자루의 검을 들고 등장했을 때는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되어지는 그의 행보에 중원무림인들이 경악 속으로 빠져들었다.
혈보(血步).
그가 가는 곳마다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루었다. 보다 못한 강호무림인들이 그를 막아보기 위해 나섰으나 차디찬 주검이 되어 쓰러졌을 뿐 누구도 그의 발길을 저지하지 못했다.
낙일마제(落日魔帝)와 낙일혈마공(落日血魔功). 그가 무공을 펼칠 때, 마치 일몰직전의 상황과 같다고 하여 유래된 말이었다.
그렇게 이십여 년 동안, 중원 각처를 헤매고 다니며 살겁을 저지르던 낙일마제는 나타났을 때와 같이 홀연히 사라졌다.
"그분은 나의 선조이셨다. 송나라 마지막 무장(武將)이셨고."
더 이상 운공을 할 수 없었던지 자세를 푼 강구두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젊은 나이에 천무맹의 전사대 대주가 될 수 있었던 건, 그의 가문에 내려오던 낙일혈마공이란 무공 때문이었다.
그것도 완전하게 익힌 것이 아니었다. 팔 성 이상을 익히게 되면 낙일혈마공의 특징인 붉은 노을이 생겨나기에 그 이상 익힐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딱 한 번 능력 이상의 무공을 펼치게 되었는데 영운진인과의 비무 때였다.
자신도 모르게 투지가 일어 전력으로 낙일마검법을 펼치게 되었고, 그의 몸에서 황혼의 빛무리가 터져나온 거였다.
그가 천무맹에서 파문(破門)된 주된 이유가 그때 드러난 낙일혈마공 때문이었다.
"하지만 낙일혈마공은 마공이 아니다. 처음 시작은 패도를 추구하는 무공이었단 말이다."
오직 강함만을 추구하는 무공이었던 가문의 비공이 점차 바뀌기 시작한 건 그의 선조인 낙일마제 강여충 때부터였다.
그가 천하를 헤매며 혈겁을 저질렀던 주된 이유는 배신자 처단을 위해서였다.
나라를 팔아버린 자들, 무장으로서 적에게 동조하여 송나라의 멸망을 가져오게 했던 자들을 단죄하기 위한 행보였다.
그런 강여충의 행보를 알지 못했던 강호무림인들은 낙일마제의 혈겁을 종식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공격해왔고, 그 와중에 무공의 성향이 바뀌었다.
패기 속에 마기마저도 포함되면서 점점 강해졌던 거였다. 강호인들의 공격에 견디며 배신자들을 처단하기 위해선 더 강해져야 했고, 결국 어둠의 기운에 의존하게 되었다.
더 강해지기 위한 수단으로 마(魔)를 이용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정도의 무공을 최고라 생각하는 정파인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무공만을 인정할 뿐 마공은 무조건 죄악이라 하였다.
그래서 팔 성까지만 익히고 말았었는데……. 결국 자신의 젊은 혈기로 인하여 무공을 제거당하고 천무맹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무당의 영운진인을 탓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허나 이제는 완전하게 익힐 것이다. 몸속에 끓고 있는 그분들의 염원과 돌아올 그 아이들을 위해."
지금껏 자신의 내공으로 만들지 못하고 있는 미증유의 거력, 팽가 가신 두 사람의 내공이 자신의 몸속에서 살아 있다.
그 사람들의 힘을 다시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야 할 사람이 자신인 것이다. 수십 년 동안 그들이 갈았던 칼을 휘둘러야 할 사람이 자신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마지막 눈빛을 보내며 떠났던 광풍대원들. 그들이 쳐다보고 있기에, 그들을 기다려야 하기에 익힐 수밖에 없다.
"해낸다. 반드시 해내고 만다."
다시 자세를 잡은 강구두가 운공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있어 가장 시급한 일은 몸속에서 따로 놀고 있는 두 내공을 합치는 것이었다.
내공을 물려주었던 팽가의 두 가신은 동일한 내공심법을 익혔다 하였지만 같은 내공이 아닌 것이다.
이미 초극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동일한 내공심법으로 익혔다 하더라도 자신만의 독특한 색채를 지니게 된다.
결국 하나이면서도 별개의 내공이었다. 그것을 하나로 합쳐 자신의 내공으로 만들어야 하건만 그 첫 번째 과정도 쉽지가 않았다.
두 사람의 내공 중 친화성이 있는 부분은 서로 합치는 데 성공했고, 낙일혈마공을 구 성까지 성취하는 데 반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러나 절반이었다.
남아 있는 내공이 각각의 무공을 특징짓는 핵이었기에 하나로 합치는 작업은 물과 기름을 섞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것을 해내야 하는 것이다.
'구두야. 절대적인 강함이란 모든 것을 포함한다. 너무 강하기에 부러진다 함은 강함이 아닌 게다. 그냥 곧은 것이라 말할 뿐이다.'
폐관에 들기 전 팽무도가 해준 말이었다. 그도 강구두가 닥친 상황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타인의 내공을,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두 가지를 섞어야 하는 어려움을 알고 있었기에 강함을 이야기했다.
그 두 가지 별개의 기운을 눌러버릴 수 있는 절대적인 강함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결국 낙일혈마공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군."
결론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시도하지를 못했다. 우선은 낙일혈마공에 의한 내공이 없었고 몸 또한 만들어지지 않았었다.
그래서 육 개월이란 준비 기간이 필요했다. 이제는 할 수 있을 터였다. 세 가지의 내공이 몸속에서 충돌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몸이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을 굳힌 강구두가 낙일혈마공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구 성의 성취로 두 가지의 이질적인 기운을 누를 수 있을는지 장담하지는 못하지만 시작해야 한다.
운기를 시작함과 동시에, 단전에 머물러 있던 세 가지 기운이 한꺼번에 솟구쳐 오르며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가부좌를 하고 있던 강구두의 몸이 급격한 떨림을 보였다. 온몸의 혈맥들이 연약한 피부를 뚫어버릴 듯 불쑥불쑥 튀어나와 이곳저곳으로 휘젓고 다녔다.
견디기 힘들었는지 잔뜩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강구두의 얼굴에 땀방울이 맺혔다.
'한다! 한다!'
두 주먹을 불끈 쥔 강구두가 낙일혈마공의 운기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다른 두 내공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아예 신경을 끊어버린 채 오직 자신의 내공에만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심장이 터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으나 그마저도 개의치 않았다. 먼저 간 아이들을 생각하고, 내공을 물려준 두 노인들을 생각했다.
한 시진. 두 시진.
온몸이 땀에 젖어들었다 마르기를 수차례.
슈아악!
검은 운무 속으로부터 해질녘의 붉은 노을 같은 빛무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검은색의 운무가 소용돌이치고 그 사이를 헤집으며 터져나온 황혼 빛은 승자의 미소처럼 아름다웠다.
막혀 있던 생사현관(生死玄關)이 뚫리게 되고 온몸의 세맥들이 교통되었다. 입고 있던 옷이 가루가 되어 떨어지고 강구두의 알몸이 허공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반 장 높이에 머물러 있던 그의 몸에서 비늘 같은 가루가 끊임없이 떨어지며 뼈마디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환골탈태(換骨奪胎), 무공을 익힌 무인들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꿈의 경지인 환골탈태를 겪고 있었다. 드디어 초극의 경지로 들어서고 있음이다.
무림인이 되어 두 번의 무공을 잃었다. 그러나 무공을 잃은 것에 대해선 아쉬울 게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짐이 되었다는 사실이 그를 못 견디게 했다.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낙일혈마공만 완전하게 익혔더라면, 녀석을 살릴 수 있었을 거라는 죄책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쉴 수가 없다. 모든 것을 완성하기 전까지는 웃을 수도 없는 것이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아직 멀었다."
무인으로서 최고의 경지라는 환골탈태까지 겪었지만 강구두의 얼굴엔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더욱 투지를 불태웠다.
낙일혈마공을 바탕으로 펼치는 낙일마검법, 일 초만 익혔기에 일검무적(一劒無敵)이란 별호를 얻었던 그 무공을 완벽하게 익혀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에게 당당해질 수가 있기에.
* * *
북경에 있는 석숭의 저택 지하에서 강구두가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진통을 겪고 있는 사이, 황도(皇都) 서쪽에 있는 소오태산에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준비하는 자들이 있었다.
북야평(北野坪). 수십만 평의 평원 위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군막들이 세워져 있는 곳, 이황자(二皇子)인 주고후의 진지였다.
전장에 나가 있던 일황자 주첨기가 돌아오면서 작금의 반란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북경에 있던 기득권층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또한 황제가 되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 주고후였다.
자연스럽게 정권교체가 일어났더라면 오늘의 반란은 없었을 터인데 두 황제의 갑작스런 죽음이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특히 홍희제의 죽음은 주고후를 지지하고 있던 기득권층을 다급하게 만들었고 결국 반란이라는 초강수를 두고 말았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주첨기의 등극은 새로운 질서를 의미하고, 자신들의 기반이 사라짐을 의미하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오군도독부의 최고 수장인 제석공 여홍진을 필두로, 황성수비군에 소속되어 있는 병력 팔 할이 주고후의 편에 섰다. 도합 십팔만의 병력이었다.
"제석공은 이길 수 있으리라 보시오."
북야평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에서 초탈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천자(天子)의 자리를 노리고 형님인 주첨기를 향해 검을 뽑아든 주고후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야망을 이루고자 하는 투지가 보이지 않았다. 단지, 어쩔 수 없는 운명에 끌려가는 착잡함만이 있을 뿐이었다.
자신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북경을 쥐고 있던 실세들과 새롭게 등장하는 신진들과의 권력다툼에 형인 주첨기와 자신이 연루되어 있을 뿐인 게다.
누가 황제가 되든, 한쪽은 제거당해야 하는 비극적인 운명을 가진 형제가 바로 자신들이었다.
"물론입니다, 폐하! 하늘의 뜻입니다."
번쩍거리는 은색 갑옷을 입고 있는 여홍진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외쳤다. 주고후와 달리 여홍진의 얼굴에는 투지가 넘쳐났다.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황도에 남아 있는 병력은 이곳에 비하면 거의 절반 정도의 수준밖에 안 된다.
금의위나 동창의 무사들이 있지만 그들에 대한 대책도 이미 세워두었다. 이쪽을 돕고자 나선 무림인들, 거의 이천에 달하는 그들이 있기에 더더욱 승리를 장담하고 있는 것이었다.
"들어가 보시오. 기다리고 있을 텐데."
"네, 폐하."
주고후에게 고개를 숙인 여홍진이 몸을 돌렸다. 마지막 작전회의가 남아 있다. 이번의 전략회의를 끝내고 북경을 향해 진군해나가면 모든 일이 마무리될 터였다.
'무슨 명분으로 전쟁을 한단 말이오.'
여홍진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주고후가 내심 중얼거렸다. 명분, 나라를 침략한 오랑캐와 싸우는 전쟁이 아닌 내란이다.
내란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병력의 우위가 아니라 나라 안의 모든 이들이 인정하는 명분에 있다.
명분을 얻지 못하면 승리한다 하더라도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자신에게는 그런 명분이 없다. 오히려 황제가 되고 싶어 형에게 칼을 겨누었다는 패륜만 있을 뿐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대장군님."
고뇌하는 주고후를 뒤로하고 군막에 들어선 여홍진을 병부상서인 양광지가 맞이하였다. 그 또한 여홍진이나 나머지 두 장군들과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일황자인 주첨기가 황제가 되면 제거당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번 거사에 남은 일생을 걸어버렸다.
그리고 이곳과는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는 세 명. 담운천, 각인대사, 백무천이었다. 이번 일은 직접 해결하겠다는 말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적들은?"
"황도에 남아 있는 모든 병력을 서문 쪽으로 집결시켰다고 합니다."
"일황자도 왔겠지?"
"그렇습니다, 대장군."
이미 황제에 등극하였음에도 여홍진의 호칭은 여전히 일황자 주첨기였다. 황제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혹시 신기영(神機營)에 관한 소식은 없는가?"
"아직 그런 기미는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알기로도 신기영의 이동은 없었소이다."
양광지가 여홍진을 향해 걱정하지 말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신기영이 무엇이오."
신기영이란 부대에 꽤나 신경을 쓰고 있는 듯한 두 사람의 대화에 궁금증을 참지 못한 각인대사가 물었다.
"그곳이 참여하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대단한 곳이오?"
"그렇습니다. 신(神)의 무기로 무장한 부대를 말합니다."
신기영(神機營). 창과 도가 아닌 오직 화기(火器)만으로 무장한 포병대를 말한다.
영락제 때 창설된 부대로서, 거의 팔만에 달하는 병사로 구성되어 있다.
보유한 무기에 대해서는 대부분 비밀에 붙여져 있고 가장 흔하게 알려진 무기가 철포(鐵砲)와 진천뢰(震天雷)라는 화탄이었다.
제조창마저 황제 직속으로 되어 있어, 어떠한 무기가 얼마만큼 개발되었는지 군부의 가장 핵심인물이라 할 수 있는 병부상서조차 완전하게 파악하지 못한 곳이 신기영이란 부대였다.
"걱정하지 마시오. 혹여 그들이 나와 있으면 우리가 맡도록 하지요."
쓸데없는 곳에 심력을 낭비하고 있다는 듯, 각인대사가 미소를 띠었다. 신기니 화기니 해봤자 일반 장병들일 뿐, 무인의 눈으로 보면 어린아이 수준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자신하지 마시오, 각인대사.'
각인대사의 뒤편에 있던 백무천이 내심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호기에 대한 비웃음이었다. 전부를 다 보지 못했지만 그도 철포라는 무기를 보았다.
이백 관이나 나가는 엄청난 무게답게 그 위력 또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공했다. 강호에서 가장 위력이 강한 화기로 통하는 광천뢰 정도는 애들 장난감 수준에 불과했던 거였다.
그 엄청난 포탄이 날아가는 사정거리가 천 장 이상이라 하였고 살상력은 광천뢰에 비할 바가 아니라 하였다.
"저는 이만 떠나겠습니다, 천주님!"
백무천이 담운천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제는 떠날 때였다. 어차피 제천맹을 끌어들이지 않기로 하였기에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음이다.
"그동안 수고했다, 백무천! 다음에 보자꾸나."
그 또한 제갈수연의 말을 따르기로 하였기에 별다른 말없이 백무천을 보내주었다.
"아마 내일이 지나면 당신들은 도망자가 될 것이오. 반역도당으로 말이오."
밖으로 나온 백무천이 담운천 일행이 머물고 있는 군막을 쳐다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미 몇 개월 전부터 동창에서는 이들의 반란을 눈치 채고 있었을 터이고 대비도 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백무천에게 더욱 그런 확신을 심어주었던 건 주고후의 반란을 알렸을 때, 동창제독 유량이 보여준 행동 때문이었다.
병력 상으로 보면 황제파가 불리한 위치에 있는 게 분명할진대 유량의 표정은 태연했다. 오히려 기다리고 있다 하지 않았던가.
* * *
"서둘러라, 오늘 밤 안으로 전부 매설해야 한다."
저 멀리 북경 외성이 보이는 장소에서 수천 명의 병사들이 땅속에다 무엇인가를 묻고 있었다. 작포라는 화탄이었다.
일명 무적지뢰포라 불리는 이 작포는 마디를 뚫은 대나무에 열 개 이상의 화탄을 매달아 만든다.
대나무 속으로 도화선을 연결하고, 양끝에는 자동으로 점화되는 발화장치를 부착해두었다.
적이 지나가다 이 발화장치를 밟으면 대나무에 연결된 화탄이 폭발하여 많은 수의 적을 죽이게 되는 살상무기인 것이다.
이 작포가 최초 사용된 시기는 연왕과 건문제가 싸웠던 백구하 전쟁 때였다고 한다. 그때 연왕의 군대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던 무기가 지금 묻고 있는 작포였다.
훗날 반정에 성공한 연왕이 그 사건을 기억해내고는 화약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신기영이란 부대를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바로 이대 황제인 영락제였다.
멀리 서문(西門)이 보이는 수만 평의 대지 위에 수천 기의 작포가 매설되고 있었다. 신기영의 참여가 없다 하였던 반란군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다.
팔만 명에 달하는 신기영 병력이 전부 이곳에 진을 치고 있었던 거였다. 동창과 금의위 무인들의 힘이었다. 그들이 나서서 이백 관 이상이나 되는 철포를 전부 옮겨왔다.
이천 문, 이번 작전에 동원된 철포의 수였다. 그러나 실제 보이는 건 성벽 위에 있는, 원래부터 설치되어 있던 백 문의 철포가 다였다.
그럼 나머지는…….
또한 최대 육십 장 정도의 사정거리를 가진 화승총 부대가 만 명, 신쟁을 다루는 병사가 이만 명 등 명나라의 모든 화력이 전부 이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어서들 오시오."
작업하고 있는 병사들을 쳐다보던 금색 갑옷의 인물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일단의 무리를 반겼다.
선덕제(宣德帝) 주첨기(朱瞻基).
영락제를 따라 전장을 누볐던 군인 출신답게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적이 오고 있음에도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배치는 다 했소?"
네, 폐하!"
동창의 유량과 석숭, 그리고 반란에 참여하지 않았던 오군도독부의 두 장군이었다.
황제 진영의 배치는 대부분 신기영 화기를 주축으로 편제되었다. 가장 먼저 무적지뢰포를 설치하였고 그 다음에 신쟁 부대가, 그들 뒤에는 진천뢰를 매설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승총 부대를 배치하였다. 물론 성벽 아래에는 이천 문의 철포가 북야평을 향해 있었다.
지금 이곳에 있는 화력만 가지고도 변방의 웬만한 소국 정도는 순식간에 날려버릴 수 있는 엄청난 양이었다.
"푹 쉬도록 하시오. 내일부터는 바빠질 테니……."
"폐하!"
"왜 그러시오, 석영반."
"이번 전쟁이 끝날 때까지만 이들을 호위로 두시길 청하옵니다."
석숭이 그의 옆에 있던 세 사람을 가리켰다. 팽무도와 철목승, 그리고 사진악이었다.
"무슨 소리요, 영반. 신원도 분명하지 않은 천민들을 호위로 쓰다니."
유량이 펄쩍 뛰며 소리를 질렀다. 또한 신원도 분명하지 않은 천민이라 하였다. 석숭이 데리고 온 무인들을 믿지 못한다는 말인 게다. 아울러 석숭도…….
"반역도들에 동조하고 있는 자들은 보통 무인이 아니오이다."
"그만 하시오."
두 사람의 언쟁을 중지시킨 선덕제가 철목승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이곳에 있느냐?"
많은 세월을 전장에서 보냈던 인물답게 세 사람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만으로 절대고수임을 알아보았다. 아울러 너희 같은 무림고수들이 왜 황실을 돕고 있느냐는 물음이기도 했다.
"저들도 폐하의 위대함을 알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묵묵히 선덕제를 쳐다보고 있는 세 사람을 대신하여 유량이 재빨리 대답을 했다. 사실 명의 신민(臣民)된 입장에서 그 말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비록 입에 발린 소리라 하지만 듣는 사람도 알고 지나가기 때문인 게다.
그러나.
"아니외다."
철목승의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과거의 철목승 같았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나 상대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의 말을 건넸던 사람이 그였다.
그랬던 그가 변했다. 아니, 변하지 않고는 견디기 힘들었던 탓이었다.
유량을 비롯하여 황제 곁에 있던 인물들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그러한 무리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철목승의 입에서 폭탄 같은 발언이 쏟아졌다.
"당신네들 전쟁놀이에는 관심이 없소."
"무엄하다, 이놈! 어느 안전이라고."
얼굴이 해쓱하게 변한 유량의 호통소리와 함께 선덕제 주변에 있던 모든 동창무인들에게서 자욱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감히 대명의 천자를 향해 반공대를 하는 것도 모자라 당신이라 하였다. 여벌의 목숨을 몇 개 더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따위로 날 죽일 수 있다고 보는가."
유량을 직시하는 철목승의 나직한 목소리에 진득한 기운이 묻어났다. 이곳에도 천하를 가지고자 전쟁을 일삼는 자들이 있었다.
자신들의 야욕을 위해 죄 없는 부하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천의(天意)니 하는 말로 포장을 해댄다.
무림을 정복하고자 하는 자들이 정의(正義)를 외치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다. 더구나 저들이 아직까지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이유가 누구 때문이던가.
하찮은 천민들이라며 인간 취급도 안 하는 광풍대원들 때문이었다. 그들이 시간을 벌어주었기에 황권이 유지되고 있는 게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자들 중 어느 누가 광풍대원들을 알고 있을 것인가. 오직 자신들이 잘나서 하늘이 허락했기에 황제가 되었고, 이 세상의 주인이 되었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 때문에 더욱 화가 났다.
"이런 죽일 놈이……."
챙! 차앙!
유량을 비롯한 동창무인들이 동시에 무기를 뽑아들었다.
대명 천자를 모욕한 대역죄인인 것이다. 황제가 고개만 끄덕이면 곧바로 목을 쳐버릴 심산인 듯 유량의 시선이 줄곧 선덕제를 향했다.
철목승의 그런 행동을 지켜보던 석숭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황제의 한마디면 적과 싸워보기도 전에 이곳에서 자멸하고 만다.
그 또한 철목승이 저러는 이유를 알고 있다. 가진 자들의 권력다툼 속에서 이유도 없이 사라져간 그들 때문인 게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광풍대원들 때문에 화를 내고 있다.
"철대협!"
철목승을 말리기 위해 다가서던 석숭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아니, 더 이상 움직이지를 못했다. 철목승에게서 뿜어져나온 기세(氣勢) 때문이었다.
과거의 철목승이 아니었다.
구룡천가의 후예인 석숭을 단지 기세만으로 묶어버렸다. 마신가의 무공인 천마심공을 완벽하게 익히고 있다는 말이다. 오신가의 무공 중 가장 강하다는 무공을…….
"무슨 짓인가, 유량!"
선덕제에게서 추상같은 고함소리와 함께 엄청난 기운이 흘러나왔다.
위엄(威嚴). 무공에 의해 형성되는 기운이 아닌 제왕지재에게서만 볼 수 있는 그런 기세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만인을 압도하는 무형의 기운이 결코 철목승에 의해 형성된 기운에 비해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압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직 대답을 안 했다."
'놀랍군. 제왕기세라는 것인가!'
변해가는 선덕제의 모습을 쳐다보던 철목승의 얼굴에 감탄의 빛이 어렸다. 선덕제 또한 무공을 익히고 있는 사람이긴 하지만 고수 수준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에 스스로 위축되는 기분이 들었던 터였다. 무공이 강하다 해서 보일 수 있는 그런 기운이 아닌,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기운인 것이다.
"적이 저쪽에 있기 때문이오."
"그럼 그대의 적이 이곳에 있었다면?"
"저쪽이 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겠지요."
광오한 말이다. 자신의 선택 여하에 따라 대명 황제가 바뀔 수 있다는 발언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엄청난 말을 하고 있는 철목승이나, 듣고 있는 선덕제 또한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다.
"남의 도움을 빌어 차지하는 건 자기 것이 아니다, 이 말인가."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다행으로 생각해야겠군. 그대들의 적이 저곳에 있다는 것을 말이네. 내일 좋은 활약 기대하겠네."
철목승을 향해 빙긋 웃어 보인 선덕제가 몸을 돌렸다. 민심이 무엇인지를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반역자를 몰아내는 전쟁같이 보이지만 골육상잔(骨肉相殘)의 비극인 게다.
형과 동생이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는 패악일 뿐, 그 무엇도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질서라는 건 반드시 지켜져야 하네. 동생이 형을 죽이려는 행위가 인정되는 세상이면 그곳은 이미 인간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네."
처소로 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던 선덕제가 중얼거림 같은 혼잣말을 남겼다.
이때 나눈 대화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선덕제는 더 이상 정복사업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사항이 민생안정이었고 내치에 치중하는 정치를 행했던 것이다.
"철대협!"
석숭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철목승에게 다가왔다. 저승에 발을 담갔다가 빠져나온 듯한 표정이었다. 겉보기에는 온화한 모습의 선덕제이지만 그의 성정마저 그런 건 아니었다.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군왕이었던 거였다. 가장 단순한 예로 이번 친정(親征)만 보아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전장까지 직접 나와서 군의 배치까지 지시할 정도로 적극적인 성정을 가진 사람이 그였다. 그런 사람에 대고 당신 운운하면서 자극을 했으니.
"산이 녀석 흉내를 한 번 내본 것뿐이오. 그나저나 석대인도 이 짓 그만두어야 하겠소이다."
조금 전 선덕제가 보여준 행동 때문이었다. 석숭에 대한 신뢰감이 보이지 않았다.
그를 믿고 있었다면 가장 먼저 자신들에 대해 의문을 표시했어야 했는데 소개를 시켜줄 때까지 모른 체하고 있었다. 조부의 친구였던 석숭의 존재가 부담이 된다는 의미인 게다.
"그래야 하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떠난 사람들이 돌아와야지요. 그 다음입니다."
물러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조금만 더 버텨볼 참이다. 목숨을 구해주었고 대명을 위기에서 건져낸 사람들인데 아무런 보답도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들의 복수를 해줄 수도 없다. 오히려 제천맹이 유량과 접촉하고 있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하기에 더욱 힘들었다.
"얻을 게 있습니다. 제 자리를 놓고……."
"들어가세, 가서 술이나 한잔 하지."
"쿡! 유량이 또 난리를 치겠군요."
"그 불알도 없는 놈이? 그런 놈에게 신경 쓸 일이 뭐 있나."
팽무도가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다음 날.
새벽 일출과 함께 적의 대군이 진격해오고 있다는 전갈이 왔다.
"해진하라!"
성벽 위에 있던 석숭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금색 복장의 금의위들이 사방을 휩쓸고 다녔다.
휘리링!
금의위들의 움직임에 따라 아래쪽 공간이 이상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 같더니 엄청난 광경이 드러났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철포들이 떠오르는 태양빛을 받아 번쩍거리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환상미로진. 석두로부터 배웠던 환상미로진을 이용하여 이천여 문의 철포를 숨겨두었던 것이다. 전부 다섯 줄로 설치되어 있는 철포는 가히 공포 그 자체였다.
"준비하라!"
다시 한 번 석숭의 고함소리가 터져나오고 모든 철포에 포탄이 장착되었다. 사정거리가 무려 일천 장이나 되는 가공할 무기인 것이다.
포탄 또한 갖가지 종류가 있었다. 공심작열탄(空心作裂彈)처럼 사방으로 터져나가는 포탄이 있는가 하면, 독가스가 들어 있는 탄환을 발사하는 철포도 있었다.
"무시무시하군."
검은 광채를 발하며 평원에 서 있는 수천 문의 철포를 쳐다보던 팽무도가 중얼거렸다. 무림인이 황실을 넘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저 때문인 게다.
지금 배치되어 있는 철포만 있어도 무림 최고 세력이라 할 수 있는 제천맹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터였다. 저런 어마어마한 무기들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수준이라 하니…….
"왔습니다, 폐하!"
망루에서 적을 감시하던 자의 외침소리와 때를 같이하여 저 멀리서 빛이 번쩍거리는 신호가 나타났다.
적의 선발대가 천 장의 사정거리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보내기로 하였던 동경(銅鏡) 신호였다.
"발사하라!"
황제검을 뽑아든 선덕제의 외침이 떨어지고, 가장 선두에 있던 사백 문에 달하는 철포의 도화선에 일제히 불이 붙었다.
찌이익! 치이익!
과앙! 콰앙! 과과광!
희뿌연 연기가 솟구쳐 오르고 천지를 관통할 듯한 거대한 폭음소리가 진동했다. 순간 새벽하늘을 가득 채우며 날아가는 수백의 검은 덩어리들,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죽음의 구체였다.
"발사!"
다시 한 번 울려 퍼진 선덕제의 목소리에, 대기하고 있던 철포들이 불을 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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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즐독 허고 갑니다
고맙게 잘보고 있어요~~~
즐감
쵝오,항상 감사드리면서 즐,독,하고 있읍니다
감사ㅎ
즐감 감사합니다
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