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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냐나틸로까 스님의 생애 (12)
2부 냐나틸로까 테라의 생애
번역 김재성
(능인대학원대학교 명상심리학과 조교수)
15 장 : 일본으로 돌아가다, 1921-1923
일본에 도착하자 부흐홀쯔 양과 와타나베 박사의 학생인 사토가 우리를 환영했습니다. 의료 검사소에서 나는 또 다른 떨림 발작을 겪었고 의사가 내가 하선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그가 나에게 질문했을 때 나는 온몸이 떨리고 있었지만 이것은 이전에 걸렸던 말라리아의 작은 재발일 뿐이라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때가 1921년 4월인가 5월이었습니다.
와타나베 박사는 정말로 이타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다시 후원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질병에서 완전히 회복하기 위해 라듐 물 치료법을 얻을 수 있게 사토와 함께 리사쿠lisaka에 가도록 비용을 지불했습니다. 왓뽀와 나는 진짜 해골처럼 보였습니다. <티베트에서의 3년>144이라는 흥미있는 책으로 유명해진 에카이 카와구치 교수의 도움도 받았습니다. 그는 스가모의 다이쇼 대학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제국 대학에서 우리에게 특별한 철분 강장제를 제공하도록 도왔습니다.
그 영양제는 철을 전자적으로 분해해서 만들었으며, 아직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긴 수염으로 매우 위엄 있어 보이는 카와구치 교수와 함께 왓뽀와 나는 일본에 처음 머무는 동안 그들의 작은 사원에 있는 유일한 일본인 테라와다 승려 두 명을 방문했습니다. 그 당시 나는 아무 문제 없이 두 사람과 빠알리어로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리랑카의 갈레Galle 근처 심빌리 아와사Simbili Avasa에서 지냈습니다. 그들의 주요 후원자인 일본 승려 중 한명이 그의 이름을 지었고 내 친구이기도 한 빠알리 학자 무다리야르 에드문드 구나라타나Mudaliyar Edmund Gunaratana였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개의 작은 테라와다 사원 중 하나에 머물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불가능했습니다.
1921년 4월부터 1926년 5월까지 도쿄에 두 번째로 머무는 동안, 나는 다시 다이쇼 대학에서 빠알리어와 독일어를 가르쳤습니다. 메이지대학과 치바의과 대학에서 독일어와 라틴어를 가르쳤고, 무엇보다 고마자와대학에서 빠알리어를 가르쳤습니다. 또한 육군사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정부 외국어대학에서 임시교수직을 맡았습니다. 육군사관학교에서 야마시나 황태자145는 제 학생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아카데미 공원에 별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내 수입은 처음에는 다소 적었지만 이러한 직업으로 인해 한 달에 천이백 마르크까지 올랐습니다. 하지만 수십만이라도 거기에 다 주고 다시 랑카146에서 살 수 있었더라면 하고 생각했습니다.
가르치는 일 외에 자유 시간이 나면 진정한 불교 작업에 사용했습니다. 이때 나는 사전과 함께 빠알리어 선집 작업을 했고, 밀린다빵하 2권과 앙굿따라니까야의 마지막 권도 완성했습니다.
나는 또한 만주 철도 회사에서 작은 일을 했습니다. 나는 슬레이트의 활용에 관한 독일의 기술 과학연구를 영어로 번역해서 약 800골드 마르크를 받았습니다.
몇 번이고 나는 스리랑카로 돌아갈 수 있는 허가를 받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솔프 박사 또한 그의 친구인 영국 대사 엘리엇147과 함께 최선을 다해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었는데, 엘리엇은 계속해서 스리랑카 주지사에게 전보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야 사랑하는 라이카를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세상 어느 곳에서라도 더 오랫동안 집에 있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일에 머무는 동안 나는 항상 스리랑카에 대한 향수병을 느꼈습니다. 한순간에 나는 일본을 떠나 즉시 스리랑카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일본에 속해 있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나는 종종 학생들에게 내가 여기서 선생 역할을 해야한다고 하지만,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전혀 다른 이상을 열망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동안 나와 친한 친구가 된 많은 일본인과 유럽인 중에서 와타나베 교수와 그의 제자인 사토를 언급하고 싶습니다. 고마자와 대학이사 타치바나 교수148왕립 고등하고의 펫졸드Petzold149와 일본의 유명한 가수이자 피아노 연주자인 그의 아내 피지의 슈나이더 서울에 있는 의과대학의 사이토 교수 엔타이 토모마토 교수와 마츠모토 박사150, 일본과 스리랑카의 이전 빠알리 학생 쿠코자와 대학의 오쿠보 코지 교수 귀족 대학의 헤이스Heiss 교수 마스다 지리요 교수 가와구치 에카이 교수 위에서 언급한 티베트 학자, 타카쿠스 교수151 나의 이전 외국어 대학학생이었던 도미타 교수 나의 전 학생이자 하숙인인 제국 대학의 수구하라 박사 등.
솔프의 집에서 나는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요아킴 교수의 제자이자 철학자인 드리쉬 교수152와 그의 아내이자 법철학자인 시미츠 부인을 만났습니다. 제국 대학의 스턴버그 교수. 나는 또한 벵골 총독의 생명을 노린 해방 투사이자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미얀마에서 정치적 역할을 하게 될 해방 투사인 라스비하르 보스(Rasbihar Bose)153를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나는 다소 선견지명이 있는 사랑과 평화의 사도인 라자 마헨드라 프라탑154을 만났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그는 케말 파샤와 독일 황제와 협상을 진행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나는 또한 일본 황후의 정원 파티에 초대를 받았지만 승려로서 초대를 수락하지 않았다고 언급할 수도 있습니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오키야마 켄키치였는데, 그는 번역가였고 내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녔습니다.
나는 그의 교육을 돌보았고 나중에 그는 나를 따라 스리랑카로갔습니다.
도쿄에서 살았던 곳은 코마자와 대학 근처의 작은 일본식 빌라, 스가모의 2층 석조 빌라, 오모리 근처 천산의 기사 저택, 채소밭과 꽃밭이 있는 2층 빌라였습니다.
1922년 왓뽀는 말라리아를 완전히 치료하기 위해 독일로 돌아갔습니다. 나는 그가 몸이 나아졌을 때 일본에서 다시 만나자고 그를 초대했습니다. 이때 나는 오모리 근처 천산에 차밭과 대나무 숲이 있는 저택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나는 거기에 무료로 머물도록 허락받았는데, 그 이유는 점성술사들이 도쿄에 또 다른 40개의 건물을 소유한 집주인에게 예언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 집에 살면 온 가족이 질병과 절망과 파멸에 시달릴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기사 저택에 머물겠다는 제안을 즉시 수락했습니다. 결국 사건은 예측과 상당히 다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바로 이 집이 (다가오는) 관동 대지진의 황폐화를 피한 집주인의 41채의 집 중 유일한 집이었기 때문입니다.
왓뽀는 1923년에 저와 합류하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폭설이 내릴 때 저는 그를 데리러 요코하마로 갔습니다. 그러나 저택에서의 좋은 삶은 6개월밖에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다음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역사상 가장 끔찍한 지진으로155 하루 만에 수천명의 사람들이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사망했습니다.
지진은 1923년 9월 1일에 시작되었습니다. 왓뽀와 함께 점심을 먹고 있을 때 가장 무서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강력한 굉음과 함께 우리 발밑의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폭풍우 치는 바다에서 작은 배를 타고 구르며 앞뒤로, 위아래로, 계속해서 내던져지는 것과 같았습니다. 왓뽀는 아직 접시에 두부를 놓은 채 신나게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바닥에 조용히 앉아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라고 소리쳤습니다. 나는 잘 알려진 구절을 빠알리어로 암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즉 몸, 감정, 지각, 형성, 의식, 과거, 현재, 미래, 내적 또는 외적, 거칠거나 미세한, 열등하거나 우월한 것, 멀거나 가까운 것이 모든 것을 올바른 이해를 가진 수행자는 안다: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모든 형성된 것은 영원하지 않고 모든 형성된 것은 고통을 겪는다. 모든 것은 비어 있고, 영혼이 없고, 자아가 없고, 본질이 없습니다.”
지진이 일어나고 있는 매 순간 나는 바로 지구가 열리고 우리를 삼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지방의 많은 지역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내가 착각하지 않는다면, 지진 첫째 날 오후에 길고 짧은 지진이 약150번 있었습니다. “왓뽀, 이제 도쿄는 끝났네!”라고 나는 말했고, 몇 시간 안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마치 세계 대전의 한가운데 있는 것 같았고, 도쿄 한복판에 거대한 화산이 터진 것 같았습니다.
주변 마을과 도시의 다른 모든 집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언제든지 우리 집이 무너질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우리 집은 모든 지진의 공격을 견뎌냈습니다. 그것은 단단한 바위 바닥 위에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는 집이 계속 부서지면서 지구 전체가 천둥치고 쿵쾅거렸습니다. 그것은 석유 탱크, 화약 공장, 탄약고 등의 폭발과 함께 크게 흔들렸다. 이것은 그날 밤 늦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지진 사이에 우리는 의자, 테이블, 매트리스, 담요 및 책을 가지고 나오기 위해 매우 빨리 집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두 그루의 나무 사이에 안전하게 두려고 야외로 가져왔습니다. 한 나무 아래에 Vappo의 물건과 다른 나무 아래에 나와 내 친구의 물건을 두었습니다. 갑자기 입구 문에서 큰 천둥 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너비가 3미터가 넘고 동판으로 완전히 덮인 문은 1피트 높이의 경첩에도 불구하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우리는 “바늘귀”라고 불리는 더 작은 입구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년내내 그 문을을 열지 않았었습니다.
저녁 9시쯤 우리는 정원에서 나왔습니다. 하늘에서 우리가 본 광경은 압도적이었습니다. 밤은 밝게 빛나고 하늘은 피처럼 붉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궁전과 현대식 건물이 있는 인구 600만 명의 도시인 도쿄를 포함하여 지방 전체에 끔찍한 화재로 재가 퍼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화재의 빛은 일본 전역, 심지어 북쪽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지구 진동은 밤새도록 계속되었고 그 후 며칠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다음날 자경단이 모든 곳에서 조직되었습니다. 그 들은 밤에 세 번 모든 정원과 거주지를 순찰했습니다. 그들은 랜턴과 칼 또는 그들이 찾을 수 있는 무기로 무장했습니다.
자경단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받았지만 거절했습니다. 우리는 또한 어떤 음식도 팔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정부는 음식과 양초, 옷을 무료로 제공했습니다. 천왕와 왕자는 다른 사람과 똑같이 구호품을 받을 것입니다.
지진 둘째 날인 9월 2일에 우리는 갑자기 나팔 소리와 징 소리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계곡을 내려다 보았고 그들의 소지품과 손에 칼과 죽창과 다른 무기를 가진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도쿄 방향으로 매우 빠르게 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곧 모든 사람이 지진대에서 구출될 줄로 생각하고 급히 산을 내려와 이 사람들과 합류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폭발과 함께 천둥이 쳐서 온 땅이 흔들렸습니다.
그제서야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케가미의 모든 집을 약탈하고 불태우고 일본 여성을 강간한 것으로 추정되는 수천 명의 한국인으로부터 탈출하기를 원했습니다. 나는 이것을 집단 히스테리라고 생각했고 즉시 되돌리고 싶었습니다. 그 순간 한 독일인이 견고하게 지어진 작은 집에서 서둘러 나에게 다가오더니 나를 보호하기 위해 총을 내밀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우리 정원의 입구 앞에는 이케가미 출신의 일본인 30명 정도가 있었는데, 그들의 간청에 따라 나는 대나무 숲에서 하룻밤을 묵게 해주었습니다.
저녁 무렵, 우리는 두 그루의 나무 아래의 간이침대에 누웠습니다. 왓뽀와 내 친구는 곧 잠이 들었지만 나는 깨어 있었습니다. 나는 다른 두 사람에게 신호를 보내면 한밤중에 망고 숲을 빠져나와 언덕 아래로 숨을 준비를 하라고 부탁했습니다. 이미 밤이 시작될 무렵 정원 뒤와 앞에서 몇 발의 총성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날카로운 징과 나팔 소리에 이어 날카로운 고함과 반쯤 미친 사람들이 서로 창으로 등을 돌리는 고통의 거친 비명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것은 밤새도록 그리고 이른 아침까지 계속 되었으며, 울부짖음, 나팔 소리, 빠른 총성이 번갈아 가며 나타났습니다. 죽은 사람의 수를 더 이상 기억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왓뽀와 함께 부분적으로는 도보로 부분적으로는 매우 원시적인 택시를 타고 도쿄 중심부로 갔을 때가 지진 발생 3일째였을 것입니다.
이전과 비교했을 때 얼마나 달라졌는가! 증기기관차와 전기열차, 트램을 이용한 교통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도쿄와 요코하마 사이의 모든 것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심지어 전등과 수도 시스템까지 말입니다. 많은 철도역 중 온전한 것은 도쿄의 거대한 중앙역뿐이었습니다. 모든 철로, 대기실, 복도, 승강장은 지진의 희생자들로 가득 찼습니다. 사방, 위, 건너편의 모든 곳에는 빨랫줄이 걸려 있었고, 빨래가 가득 차 있었고, 철로 위에서는 사람들이 음식을 요리하고 있었습니다. 날씨가 더워서 돗자리가 있든 없든 여기저기서 자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더운 여름이었습니다. 요코하마로 가면서 수천 개의 불탄 철도 차량의 뼈대를 볼 수 습니다. 그들 중 몇몇은 여전히 서 있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레일에서 굴러 떨어졌습니다. 볼 수 있는 한모든 아름다운 건물, 궁전, 은행, 왕립 극장 등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도쿄는 어디에 있습니까? 도쿄는 사라지고 재와 파편의 황무지만 남았습니다.
요코하마까지 많은 방해물에도 일부 도보로 갈 수 있었던 것은 지진 발생 8일 째 쯤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도시는 여전히 불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석탄 화덕에서 음식을 요리하던 시간에 지진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모든 것이 그렇게 빨리 불이 붙었다는 것은 분명해집니다. 도쿄의 대부분의 가옥은 주로 화재로 소실되었지만, 요코하마의 가옥은 첫 번째 지진으로 소실된 후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지진의 중심이 요코하마에서 가까운 오지마 화산섬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코하마에 있는 두 채의 집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지진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은행에서 도망치려던 수백 명의 사람들이 거대한 계단이 무너지면서 비참하게 사망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발 앞에 열린 땅의 갈라진 틈에 빠졌습니다.
여기서 부분적으로 잘못된 애국심이라는 이름으로 경찰관들에 의해, 그리고 부분적으로 소위 자경단에 합류한 많은 강도, 살인자, 새디스트들에 의해 자행된 광기 어린 흉악하고 섬뜩한 중죄의 모든 세부 사항을 여기에서 모두 언급하는 것은 너무 지나칠 것입니다.
이 지진과 관련하여 더 끔찍하고 감동적인 에피소드를 더 많이 말할 수 있습니다. 가장 소름 끼치는 사건 중 하나는 화재로 인한 3만 5천 명의 죽음일 것입니다. 내가 비밀리에 찍은 사진을 불교 저널 데에 파드Der Pfad에 “ecce vita”(“생명을 보라”)라는 제목과 함께 보냈습니다. 화재를 피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곳으로 보이는 탁 트인 들판에서 스미다 강(Sumida River) 왼쪽 뚝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지역 경찰서장의 조언에 따라 약 3만 5천 명의 사람들이 소지품을 가지고 그곳에 갔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을 둘러싼 불바다의 복사열은 점점 더 참을 수 없게 되어 빠져나갈 길이 없게 되었고, 이 가련한 사람들은 서로 마주보고 누워서 참혹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며칠 후 나는 35,000명의 사람들이 이제 12개의 뼈로 된 산처럼 쌓여 있는 광장을 방문했습니다. ‘나’도, ‘너’도, ‘사람’도, ‘존재’도 없고 뼈만 드러났습니다. 이 뼈로 거대한 불상을 만들려는 계획이 실현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거의 모든 극장, 영화관 등이 위치한 아사쿠사의 공공 유원지에서 비극적인 또 다른 대량 사망이 발생했습니다. 이 공원의 중앙에는 아름다운 큰 연못이 만들어졌습니다.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유흥업소의 열기가 계속해서 높아지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불길에서 목숨을 구하고 더위를 식히기 위해 급히 연못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사열이 점점 더 강해지면서 결국 사람들은 모두 끓는 물에서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스미다 강은 도쿄를 가로질러 흐릅니다. 다른 때에는 배와 보트로 분주하고 많은 다리가 걸쳐 있는 거대한 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휘발유와 휘발유 탱크의 잦은 폭발로 인해 강은 모든 배와 함께 불타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실된 다리를 이용하여 손으로 이 다리의 철골을 따라 강을 건너려고 했지만, 모두 더위에 지치고 지쳐서 불타는 강속으로 연이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어떤 항구 마을은 쓰나미를 맞았습니다.159 마을 안팎의 땅 전체가 물에 잠겼고 작은 배들이 파도에 밀려 물에 잠긴 마을 한가운데 로 들어왔습니다.
해안을 따라 어떤 곳에서는 해안이 해수면 아래로 가라앉았고, 다른 곳에서는 바다 아래의 지구가 해수면 위로 올라갔습니다. 모든 공원, 심지어 황제의 궁전 앞의 공원까지 많은 사람들이 소유한 모든 것, 심지어 배우자와 자녀를 잃고 극도의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불운한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작은 오두막에서 살고 있었는데, 대부분은 개 사육장만큼의 크기였는데, 여기저기 널려 있는 낡은 주름진 철판으로 지었고, 부서진 송수관 덩어리를 추로 사용하여 주름진 철 조각으로 지탱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야외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정신으로 힘들어 하던 아버지를 대신해 정부를 장악한 왕자도 야외에서 장관들과 회담을 가졌습니다. 또한 한 페이지로 구성된 호외 신문은 어느 정도 야외에서 인쇄되었습니다. 더 이상 건물이 없었습니다.
지진으로 인한 모든 끔찍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눈에 띄는 비참함에 매우 이타적인 방식으로 선을 행하고 서로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일본의 가장 큰 원수였던 한국인들은 길에서 발견한 일본의 작은 아기나 아이들을 친자식처럼 사랑과 연민으로 돌봐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재해 직전에 일본에 거의 동정심을 나타내지 않았던 미국 조차도 끔찍한 상황에 놀라서 일본 정부가 궁핍한 사람들에게 분배할 식량과 의복을 실은 많은 배를 보냈습니다.
현재 연재되고 있는 냐나띨로카 스님 자서전은 지난 3월에 한국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원래는 다번역을 마친 후에 단행본으로 출판되어야 하는데 번역자 사정으로 초반에 번역 양이 짧게 오는 바람에 계획이 차질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 책이 미국에 아직 많이 배포되지 않았기 때문에 2024년까지는 연재를 할 예정으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