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콤플렉스 환자
오늘 토요일, 태풍 소식에 발이 묶이고 오후가 심심증으로 이어진다. 집에서 영화를 보기로
한다. '빅브라더'라는 홍콩영화는 작품성보다 만화를 보듯 주인공이 펼치는 무술을 구경하고
우리네 교육현장과 흡사한 내용이므로 거부감 없이 그냥 멍때리듯 신경 안쓰고 보고 있기에는
불편하지 않다.
영화 빅브라더는 건강한 정신과 몸으로 무장된 한 교사에 얽힌 이야기다. 그는 모교가 문제
투성이로 성장하지 못하고 곧 폐교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큰 선배로 후배들을 위해
교육현장으로 뛰어든다. 교편을 그만 두고 나온 나로서는 그 영화가 깊이 보인다.
사람이 모인 곳이면 어디서나 우열이 가려지고 자연스럽게 그곳만의 분위기가 형성되며 이를
지켜보고 가르치는 사람들의 진정어린 안내가 없이는 변화를 꿈도 꾸지 못한다. 영화 속의
학교도 그 지경이 되었다. 언제나 선의의 열정을 가진 사람은 게으른 사람들의 눈에 가시다.
학생이 있는 곳에 문제는 잠재되어 있다가 어느 순간 터진다. 그 때를 기점으로 의로운 사람은
그 곳을 떠나게 된다. 그러다가 만화의 다음 컷처럼 학생들이 떠나지 못하게 막고 나서며 반전이
이루어진다. 영화 스토리보다는 주인공의 지난 이야기에 마음이 쏠렸다.
영화 주인공이 무술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고 같은 학우가 은메달을 차지하였다. 은메달을
딴 학생의 부모는 자녀에 대한 욕심이 커서 만사에 1등하기를 기대하는 사람이다. 아이는
그날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 둘은 시합 후 한판 붙게 되었는데 그만에 한 쪽 손을 다치고 말았다.
그 다친 학생은 피아노도 치는데 그날로부터 피아노에서 손을 뗐다. 자신이 잘 가는 길을
1등 학생이 막아버렸다고 미움을 키우며 인생을 망가뜨렸다.
그는 훗날 깡패가 되어 패거리를 몰고 와 복수극을 벌인다. 선한 생각으로 긍정적 변화를
불러들인 인물의 설정은 흔한 일이지만 최종적으로 어떤 장면으로 마무리 될 지 궁금하여
끝까지 보았다.
그들의 싸움이 극에 달하자 은메달 자가 위기에 칼을 빼들었고 금메달 자가 엎치락 뒤치락
하다가 칼을 뺏어 들었다. 주인공의 무술 실력은 압권이다. 영화가 아니라 주인공 무술
능력을 보여주기용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는 목을 누르고 칼을 쳐들었으나
은메달자를 찌르지 않았다. 내리치기는 했지만 자신의 허벅지를 찔렀다. 나의 상상이
빗나갔다. 나는 칼을 창 밖으로 던져버릴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예상을 되엎은 결과이나 순위를 내어주고 회복하려는 의지보다 복수하려고 드는 인생을
보아서 씁쓸했다. 누가 그렇게 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렇게 인생을 끌고 간
것인데 원망의 화살은 자신보다 실력이 나은 사람에게로 쏜 것이 어리석음이다.
자신보다 나은 실력자를 인정하려고 들지 않아 인생이 망가지는 사례를 나는 수도없이
보아왔다. 자신과 겨루어 이긴 사람에게 확실한 약점이 보일 때는 위로를 받고 살지만, 큰
흠이 보이지 않을 때는 늘 으르렁거리는 대상으로 삼으며 인생을 갉아먹는다. 항상
자신이 이기는 것이 당연한듯 살아가는 사람을 나는 특별 콤플렉스 환자로 분류한다.
그들은 늘 등위를 굶은 늑대처럼 으르렁거린다. 분노가 차 있고 지나치게 경쟁심리로
치닫다가 뜻하는 대로 되어지지 않으면 불평분자로 전락한다. 누구든 그 앞에서는 잘
되어서도 안되고 행복해 하여서도 안된다. 받아들이지를 못한다.
작게는 큰 형이나 언니가 우수하여 늘 부모의 칭송을 받고 자랐다면 상대적 빈곤감에
시달리던 동생들은 부지런히 잘 살아서 부모의 칭찬도 듣고싶고 서열1위로 등극하고싶어
한다. 그래서 자랑을 일삼거나 알아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윗선이 눈의 가시가 되어진다.
놀랍게도 절대 서열을 바꾸어줄 의향은 없는게 동기간이거나 가까운 사람이거나 오래된
인연들이다. 인생을 두고 누가 서열을 매겼다는 말인가. 놀랍기도 하지만 성적표나 드러난
기록들이 그들의 가슴에는 철인이 찍힌 듯 명료하여 지워내지 못한다.
현명한 사람은 반전 되었을 때 겸손할 자신이 없으면 거리를 두거나 어려운 처지의 사람
에게 에너지와 시간과 물질을 나누어주며 인연에 탈이 생기지 않게 이어간다. 천륜을 베어낼
수 없고 살아있는 동안 사람과 별리하고 살아갈 수가 없지 않은가.
정말 주관적으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객관적으로 인정할 만한 성과를 보이면 기꺼이
인정해주고 축하할 때 성숙도를 볼 수 있다. 자신의 특성을 살려 에너지를 부어주며 집중
노력을 하는 것이 정당한 겨루기의 정신이다.
세계는 넓고 대상은 많은데 하필 그 한 사람을 표적삼아 마음을 어지럽힌다는 것은 비극이다.
그러나 획득하지 못한 메달로 하여 상처입은 마음은 전환점을 인식해야 회복이 가능하다.
자존감이 떨어지고 자존심은 강해져서 대인 기피증에 이르는 사람도 있으며, 지식층에서는
이민을 떠나는 경우도 있다.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 나가고싶다는 거였다.
오래 보지 못해서 그리울 만큼 텀을 두어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가능하면 모르던
사람과 친교를 터도 좋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기어히 위치탈환이라도 하려는 듯 떠난 자리로 돌아와서 얼찐거리다가
명예를 잃고 목숨까지 바치는 사례가 생긴다. 현실적, 영적 현주소를 정확히 인식하고 사는
삶이라야 망신과 실수를 줄일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괜찮지 않다. 고백성사를 정밀하게 봐야할 인생인 것이다. 옳지 않은 일에
동조하고 무리짓기 위해 립서비스를 일삼고, 거짓 증언을 하고, 뒷담화 릴레이를 일삼으면서
누가 누구를 탓할 것인가.
태어나서부터 한 부모 밑에서 산 동기간은 조금 텀을 두고 만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성서에서도 첫 살인이 카인과 아벨 사이에서 일어났다. 카인은 부모에게 농산물을 바쳤지만
아우 아벨처럼 살진 송아지를 바치지 않아서 양심에 가책을 받고 부모에게 인정을 받는
아우에게 질투가 난다. 누가 고개를 떨구라고 하지 않았고 야단도 치지 않았는데 고개를
떨구었고 그 마음이 뿌리가 되어 살인에 이르게 된다. 성장 배경과 삶을 속속들이 알고 있어서
상처도 남보다 먼저 내고 깊이 아파 한다.
인간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렇게 아름답게 늙지 못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측은지심으로
반기고, 안고, 정 나누다가 헤어지는 것이 좋다.
큰 딸과 작은 딸, 큰 형과 둘째 형, 1인자와 2인자, 등등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마치는 사이
일수록 더디 만나고 정보를 깊이 나누어서는 낭패를 본다. 하느님께 고하고 애경사 챙겨가며
종종 안부 묻는 정도가 좋다.
그러니 노인은 탈이거나 외롭거나가 된다. 거룩한 사람, 친절한 사람, 온유한 사람을
만나기는 하늘의 별 따기이다. 바라지 말아야 그런 사람 구경이라도 할 수 있다.
도처에 다양한 종류의 특별 콤플랙스 환자 천지다. 특별해서 특별하게 산 사람은 특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열등감의 반전이 위험하다. 이를 조율하는 것이 종교의
역할이다.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다. 무엇이든 다 알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아무 것도
모르지는 말라는 이야기다. 생각할 줄 알고 속지 말라는 얘기를 해준다. 지식을 넓힐수록
정확한 판단을 하게 되며 아는 것이 힘이라고 강조한다. 판단력을 키우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하지만 담배를 피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안 피울
것이란 말의 우회이다.
그러나 개별적으로 종교의 힘을 빌려 지혜를 더 한다면 특별 콤플랙스도 고쳐나갈
것이기에 스쳐가는 바람이라도 만화 한편 본듯 뒷 맛이 개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