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5장
하나님의 형상, 아담의 형상인 셋의 후손들
(찬송 1장)
2024-1-5, 금
맥락과 의미
창세기 5장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게 살아가는 뱀의 후손(가인의 후손, 4장 )과 대조되는의 여자 후손(셋의 후손)의 삶을 보여줍니다.
셋의 족보를 가인의 족보에 바로 이어 기록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비교해 보도록 하는 의도가 분명히 있습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 라멕은 성을 쌓고 오래 살기를 원하면서도 남을 죽이고, 동시에 죽음을 두려워했습니다.
반면 아담과 셋의 후손은 특별히 장수하고 많은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영적으로 사귀고 땅의 저주로부터 안식을 다시 회복합니다. 그들에게는 여자의 후손, 즉 메시아를 대망하는 신앙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자의 후손은 점점 수가 작아집니다. 이들의 신앙을 계승하는 사람이 노아 가족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1. 아담의 후손들 (1-20절)
2. 에녹 (21-24절)
3. 라멕과 노아 (28-32절)
1. 아담의 후손들(1-20절)
“아담의 계보”라는 제목으로 시작합니다. 1-2절은 창세기 1,2장을 요약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 복을 주시고 “사람”이라는 이름을 주셨다고 합니다. 타락하기 전의 사람의 상태를 말합니다.
3절은, 아담도 자기의 형상대로 자녀를 낳고 이름을 짓습니다. 아담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셋과 그 후손에게 계승됩니다. 하나님이 인류를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신 뜻대로 아담은 행합니다. 타락한 시조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어갑니다.
아담의 계보는 가인과 아벨 대신 셋으로 이어집니다(5:3). 아담-셋의 계보는 하나님이 은혜로 선택하신 가문입니다. 가인의 후예와 다릅니다.
셋의 후손인 에녹(5:21)과 라멕(5:28)은 가인의 후손인 에녹(4:18)과 라멕(4:19)과 대조됩니다. 가인측 에녹은 땅에 “성”을 쌓습니다(땅에 유리하라는 4:12절의 명령을 어김). 반면 셋측 에녹은 “하늘”로 삶의 자리를 옮깁니다(5:5:24). 가인측 라멕은 “타락”의 극치를 보입니다. 반면 셋측 라멕은 “회복”을 바라봅니다(5:29).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백성이 생육하고 번성합니다. 가인과 그 후예인 라멕의 계열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살아가는 반면, 셋의 후예는 하나님이 주신 형상과 복을 계승합니다. 셋의 후손은 기술과 문명의 발전보다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더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가인의 후손은 아담을 떠나서 살았지만, 셋과 그의 후손은 아담과 함께 살면서 하나님에 대해 잘 배웠을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말해 주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타락에 대해, 그리고 타락한 자신에게 복음을 계시하여 주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짐승들을 말로써 지으셨지만 우리는 손으로 하나하나 다듬어서 지어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지만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양자, 또 입양된 우리들 특별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가 우리 자녀가 얼마나 소중한지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또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사람을 원망하고 불평하지 맙시다. 자신을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봐선 안 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봐야 합니다.
다른 사람 밑에서 일하더라도 우리 마음속에서는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존엄하게 주셨는지에 대한 도도한 자존심을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이해할 수 없는 비참한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이 시각을 꼭 붙잡아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지만 아담을 통해 그 형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담이 물려준 죄악된 형상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항상 그리스도를 의지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2. 에녹(21-24절)
“낳고 죽고” 이렇게 단조로운 족보에 특별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365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21~24절).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하나님도 에녹과 얼굴을 처다보며 살아가고, 에녹도 하나님의 얼굴을 쳐다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범죄한 아담이 하나님을 피해 숨었고, 가인이 하나님을 피해 도망다니며 성에 숨어살았지만, 에녹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동행했습니다.
히브리서 11:5는 에녹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 라고 말합니다. 에녹에게 어떤 특별한 장점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셨고, 에녹은 그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취해서 하와에게 데려갔다는 말과 같습니다. 신랑되신 하나님께서 에녹을 너무 사랑하셔서 천국으로 먼저 데려가셨습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오래 사는 것만이 축복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는 언제든지 떠나므로, 편안한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살아갑시다.
하나님을 떠난 아담의 후손에게 계속되는 죽음은 하나님에 의해 생명으로 바꾸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아들을 에녹의 후손으로 보내셨습니다. 죽어야 할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보냈지만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생을 누립니다. 에녹처럼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삽시다.
3. 라멕과 노아 (28-32절)
가인의 5대손 라멕과 동일한 이름을 가졌던 셋의 후손 라멕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들의 이름을 “안식(안위)하다”는 뜻으로 노아라고 지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29절).
창세기 3:17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를 염두에 두고 아들의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라멕은 하나님이 선악과로 인해 일어난 땅의 저주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구해주기를 소망합니다. 에덴의 시절로 되돌려주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이 안위는 모든 수고와 노동으로부터 쉼을 얻는 창세기 2:2-3의 안식의 회복을 뜻합니다.
그는 단지 저주받은 땅에서의 노동의 고통에서의 벗어나는 것을 소망한 것이 아닙니다. 창3:15의 여자의 후손(메시아)을 기다리는 신앙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번성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노아의 가족들 셋과 에녹의 신앙을 지켜가는 사람들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라멕은 자기의 아들의 탄생에서 여인의 후손의 반열을 이을 그 아들이 우리를 위로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걸었습니다. 또한 그는 주위 사람들의 불순종으로 인한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시기를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라멕은 자기 선대 아버지 아담으로부터 쭉 내려왔던 말씀을 잘 배웠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땅에서 병과 흉년 등 재난을 당하면서 그것이 우연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선대 할아버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듯이, 라멕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죄를 심판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살아갔습니다.
이 라멕은 가인의 후손 라멕과 달랐습니다. 가인의 후손 라멕은 간음, 폭력이나 강포,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모독을 즐기는 노래했습니다. 셋의 후손 라멕은 그의 조상 에녹처럼 여호와와 동행하는 가운데에서 위로를 찾았습니다.
믿고 복종할 일
하나님은 셋의 후손을 경건한 백성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경건한 자손을 나으며 생육하고 번성했습니다. 하나님이 쓴 그들의 이력서는 아주 단순합니다. 몇 살 때 첫 아들을 낳았고 그 다음에 아들딸들을 낳았고 그 다음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자신을 즐기고 끝나는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어떤 직업을 가지는 것보다, 어떠한 성취보다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명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자녀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잘 가르쳐서 에녹과 라멕과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양육합시다.
아담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망가졌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것을 감사합시다. 이 땅에 얼마나 오래 살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을 누립시다. 이 땅의 수고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참 위로를 누립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는 그 날을 소망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