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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딴산 원문보기 글쓴이: 한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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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정 이전의 혁명근거지이자 수도였던 루이진을 둘러보고 다음날인 10일차 아침에 출발하여 위두에서 대장정 출발 도강 지점을 거쳐 광시좡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의 싱안(興安)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곳이 바로 홍군 최악의 참패의 현장인데 위두에서 약 500킬로미터 거리다.
‘음모와 선전’으로 만들어진 나라가 아니다
위두하에서 싱안까지 홍군은 광둥 군벌과의 밀약에 따라 그들이 내준 길을 따라 서진했다. 뒤늦게 홍군의 탈주를 알아차린 장제스의 명령에 의해 그 지역의 국부군이 세 번의 봉쇄선을 치기는 했지만 수만에 달하는 홍군의 서진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답사여정에서도 이 구간은 별도의 유적지를 찾지 않고 통과해서 위두현 서쪽 200킬로미터 정도에 있는 루청(汝城)에서 하루를 묵었다.
이튿날 아침 루청 시내의 가파른 언덕 위에 있는 혁명열사 공원을 올랐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는데 대리석 표지석에 열사의 이름이 일일이 새겨져 있었다. 대혁명(1926~27년) 토지혁명 전쟁(1927~37년) 항일전쟁(1937~45년) 해방전쟁(1945~49년) 중화인민공화국(1949년 이후) 등 시기별로 구분돼 있다. 숫자를 세어보니 열사로 기록된 이름이 435명이다. 지금 인구가 36만이니 해방 이전에는 아마 10만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작은 현에 열사로 기록된 이름이 435명, 이름이 확인되지 않은 희생자들은 제외된 숫자다.
중국의 열사공원 또는 열사능원도 눈 여겨 볼만했다. 현지를 답사해보니 열사공원은 현(縣) 단위까지 있었고 예외 없이 시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엄숙주의가 무겁게 누르는 곳은 아니었다. 아침이면 시민들이 찾아와 태극권이나 체조를 하고, 오후에는 선남선녀가 데이트를 하는 친숙한 생활 공원이다. 열사공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엄마의 고생을 모르고 깔깔대던 철없는 아이들이 다시 엄마아빠가 되어 철없는 아이를 품어주듯, 죽은 이들의 공이 쌓이고 쌓였지만 지금 살아 있는 이들에게는 살아가는 공간으로 내어주었다는 느낌이다. 오늘 중국인들의 삶은, 밥과 땅 그리고 혁명을 위해 발버둥친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 위에 성립된 것이다. 중국이 아무리 우리와는 다른 체제로서 공산당 일당독재라지만 그것은 결코 사상누각이 아니라는 것을 루청의 열사공원에서 새삼 느낀다.
여분의 하루를 이용해서 세계자연유산으로도 등록돼 있는 광둥성의 단샤산(丹霞山)을 다녀오기로 했다. 루청에서 남쪽으로 두어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는데 후난성에서 광둥성으로 넘어가는 경계선에서 그만 자동차보험 증서를 부착하지 않은 것이 단속경찰에게 적발됐다. 공교롭게도 보험가입 서류까지도 없었다.
윈난성에서 가입한 자동차보험은 같은 회사였지만 후난성에서는 조회가 되지 않았다. 기사도 경찰도 난감한 상황이었다. 차량을 경찰서 널찍한 마당에 유치당한 채 반나절을 허비하게 됐다. 필자는 답사일행에게 사정을 설명하고는 해가 지기 전에 어떻게든 해결된 터이니 경찰서 마당에서 차라리 느긋하게 쉬자고 했다. 일행은 햇살을 쐬면서 책을 읽기도 하고, 좌석을 펼치고 낮잠을 즐기기도 했다.
필자가 기사와 함께 문제해결을 위해 루청 시내로 나가있는 동안 일면식도 없는 경찰들이 와서는 구내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자고 팔을 잡아 끌기도 했다고 한다. 해가 기울어 가는데도 명쾌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자 담당 경찰은 나름대로의 해결방법을 만들어 내부 보고서를 만들고는 약간의 벌금만 부과하고 차량 유치를 풀어주면서 마무리했다.
사실 중국에서 공안이라고 하면 중국인이든 외국인이든 꺼리게 된다. 그러나 외국인 여행객 입장에서 가장 안전하고 친절한 도우미는 바로 경찰이다. 길을 물을 때 노트를 내밀고 지도를 그려달라고 해도 성실하게 응해준다.
필자는 작은 도시에 밤늦게 도착했을 때 숙소를 찾는 게 수월치 않은 경우 종종 경찰서로 들어가 외국인이 묵을 수 있는 숙소를 물은 적이 꽤 있다. 이때 길을 못 찾겠다고 엄살을 좀 부리면 경찰차로 외국인 투숙이 허가된 숙소까지 데려다 주는 친절도 몇 번 경험한 적이 있었다.
보험증서 사건으로 아까운 하루를 깔끔하게 털어먹고는 다시 루청으로 돌아와서는 그 다음날 고속도로를 타고 샹강전투 유적지인 싱안으로 직행했다. 중국의 고속도로는 우리와는 사뭇 다르다. 루청에서 싱안으로 가는 고속도로는 개통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아침 9시에 상쾌한 날씨 속에 달리는데, 넓은 고속도로를 거의 혼자서 전세라도 낸 듯이 달렸다. 노면도 깨끗해서 승차감도 최고였다.
그렇게 가는 중간에 교통표지판 세 개가 한 묶음으로 눈에 들어왔다. 천자링 터널 1818미터, 황마오링 터널 2207미터, 링수 고가도로 270미터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한 마디로 하면 4.3킬로미터의 고속도로가 두 개의 터널과 하나의 고가도로로 이어져 있다는 뜻이다. 기존의 도로를 고속도로로 확충한 것이 아니라 도로가 전혀 없던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을 뚫어 일직선으로 새로 건설해버린 것이다.
효율성으로 보면 이런 곳에 고속도로가 필요한 것인지 의아해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중국을 여행하면서 몇 년 전의 느낌은 '중국은 공사 중'이었는데, 이제는 공사를 마치고 '곳곳마다 개통 중'이었던 것이다. 이번 답사여행에서 중국 최대의 포털 바이두(百度)의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은 고속도로를 몇 번이나 통과했다. 새로 개통한 구간이 많다 보니 제때에 반영되지 않은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고속도로는 주행에는 그만이지만 자칫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 휴게소나 주유소 표지가 있지만 표지를 따라 현장에 가보면 멀끔하게 공터만 경우가 있었다. 휴게소라고 해도 화장실만 있을 뿐 광주리 아줌마들이 간식 부스러기 정도만 파는 곳도 있었다. 이런 고속도로로 장거리 이동하려면 연료를 가득 채우고 비상식량이나 간식을 준비해야 한다. 싱안 가는 고속도로에서의 점심 역시 미리 준비한 '전투식량' 비빔밥과 중국 컵라면으로 때워야 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싱안현을 향해 종일 달리고 또 달렸다.
참패로 기록하고 돌파라고 읽는다?
고속도로 460킬로미터를 여섯 시간 가까이 달려서 싱안현에 도착했다. 해가 기우는 시간이지만 샹강전투 기념탑을 먼저 찾아봤다. 싱안 시내에 ‘홍군장정 샹강 돌파 기념비원’이 있었다. 계림산수(桂林山水)에서 보던 봉긋한 봉우리 위에 높은 기념탑을 세운 것이었다. 국부군으로서는 5차 포위 토벌전에서 도주하는 적을 추격해 대승을 거둔 것이고 홍군에게는 전무후무한 참패였지만, 기념비는 샹강을 '돌파'한 것에 초점을 맞췄다. 역시 당장의 역사는 승자의 관점에서 기록한 것이다.
민간교류란 것이 큰 행사를 치러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웃으면서 먼저 인사하고 덕담 한 마디 해주고, 마음으로 환영해주고, 혹시 그들의 역사에 관심 한번 표시하면 더 없이 좋은 민간교류가 아니겠는가. 원래 돈을 지불해야 하는 상근 해설원 하나가 스스럼없이 따라 나와 안내를 자처해주는 것이 더욱 반가웠다.
기념비원 마당에서는 샹강전투 전황 지도를 새로 도색하고 있었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일하는 손을 멈추고는 편하게 보고 촬영하게 해주었다. 시선이 지도 속으로 서서히 들어가자 당시의 전투가 어땠을지 상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도에는 다른 색깔의 화살 두 개가 만나는 곳에 전투가 있었음을 조그만 불꽃 그림으로 표시해두었다. 하나마다 수백 수천 명이 죽었던 곳이다. 국부군이건 홍군이건 수많은 생명이 죽었건만 그림으로는 참으로 간단하다. 역사란 것이 그런 것 같다. 백성들이 하루하루 살아간 행복은 역사로 거의 남지 않고, 누군가가 많이 죽을수록 더욱 간명한 방식으로 선명하게 기록을 남기는 것 같다. 그래서 역사는 애당초 무거운 것인지도 모른다.
광장에서 기념탑으로 오르는 계단 입구에 커다란 석상이 좌우로 늘어서 있다. 모두들 눈을 감고 있었다. 아이도 있고 남자도 여자도 있다. 머리가 바람에 길게 날리는 묘한 두상들. 한동안 쳐다보고 있었으나 무엇을 묘사한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샹강 어딘가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흘러 필자의 상상력을 일깨워주자 석상의 슬픈 이야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것에 비하면 봉우리 위에 하늘을 찌를 듯이 큰 키를 자랑하는 기념탑은 몰살에 가까운 참패라는 사실에 견주자면 오히려 오만한 인상이었다.
봉우리 꼭대기에 높이 솟은 기념탑으로 올라갔다. 높은 곳에서 계림산수를 굽어보는 기념탑, 해는 서쪽으로 떨어져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기념탑을 올려보기보다는 그곳에 올라가서 샹강 유역에 지는 석양을 바라보니 샹강의 참패는 한층 처연한 느낌으로 젖어왔다.
(3-2) 허리가 잘려버린 참혹한 패배 80년 전의 그날 이곳 샹강은, 참담했다. 홍군은 1934년 11월 하순 샹강(湘江)을 건너면서 후미는 추격군에 잡히고 측면으로는 협공을 당했고 허리가 잘리다시피 했다. 홍군은 사투를 벌였으나 결과는 끔찍했다. 전멸이란 말을 겨우 면했을 뿐, 8만6천여 중앙홍군이 3만여 명으로 폭삭 주저앉았다. 샹강은 시체가 쌓이고 핏물이 범람했다. 언덕은 폭격으로 사라졌고 시체 언덕들이 새로 생겨났다.
군벌 틈새를 성공적으로 통과했으나 ........
위두하를 건넌 지 한 달여 만에 국부군의 봉쇄선 세 곳을 무사히 돌파했던 중앙홍군은 네 번째 봉쇄선에서 장제스의 추격 포위망에 제대로 걸려들었다. 그 전까지의 5백여 킬로미터는 순조로웠다. 광둥성 군벌과 서로 길을 내주기로 했던 밀약과 장정에 대해 내부적으로도 상당한 수준으로 비밀주의를 유지한 덕분이었다. 홍군에서도 하급 전사들은 어디로 왜 가는지 제대로 알지는 못했다.
홍군은 성과 성의 경계지역을 이용하여 서진했다. 출발하자마자 장시-광둥의 경계선을 탔고 그 다음은 후난-광둥의 경계지대를 지났다. 다시 후난-광시의 경계선을 흐르는 샹강을 건너 후난 서북부로 가자는 것이었다. 성의 경계는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틈새였다. 각 지방의 군벌은 장제스의 중앙군과도 이해관계가 엇갈렸고, 군벌끼리도 반목과 연합이 뒤섞이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홍군이 비집고 다닐 정치적 틈새가 있었던 것이다.
뒤늦게 주력 홍군의 탈출을 파악한 장제스는 길길이 날뛰면서 추격을 시작했다. 세 번째 봉쇄선까지는 사실상 말만 앞선 봉쇄선이었다. 홍군의 주력부대를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장제스는 자신의 직할 중앙군으로 후미를 추격하면서 바이충시(白崇禧)의 광시군을 북으로 이동시키고, 허젠(何?)의 후난군을 남으로 이동시켰다. 광시에서 후난으로 북상하는 샹강을 건너기 전에, 직할 중앙군이 동쪽에서, 광시군과 후난군이 남북에서 협공하려는 것이었다.
장제스의 명령대로만 했으면 공산당의 주력이었던 중앙홍군은 샹강에서 끝장났을지도 몰랐다. 마오쩌둥은 공산당 내부에서도 왕따인 채로 재기하기 이전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을 수도 있었다.
광시 군벌 바이충시는 장제스의 명령에 따라 본거지를 비운 채 광시성 북부 샹강 지역으로 군대를 파견했었다. 그러나 그는 장제스의 음흉한 계략에 걸려들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장제스의 중앙군이 홍군을 광시 방향으로 몰아붙이고 홍군을 추격한다는 이유로 광시성 깊숙이 들어와서 눌러앉으면 광시성을 통째로 빼앗길 수 있다고 걱정했던 것이다. 장제스로서는 지방 군벌이 이기면 홍군을 제압하는 게 되고, 홍군이 승리하면 지방 군벌 하나를 없애는 이익을 취하는 것이었다. 홍군 토벌전은 장제스에게는 꽃놀이패였다.
바이충시는 결국 홍군이 도착하기 7일 전에 이미 구축했던 샹강 포위망을 포기하고 자신의 군대를 남쪽으로 후퇴시켰다. 장제스가 무전을 쳐서 당장 그 자리에 복귀하라고 명령했으나 교활한 바이충시는 일부 병력만 다시 보내고는 시치미를 뗐다. 그 결과 취안저우(全州)부터 싱안(興安)까지 30킬로미터의 샹강이 국부군의 포위망에서 이빨 빠진 빈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북쪽의 후난군은 광시군이 빠져나간 곳으로 급히 군대를 진격시켰다. 그러나 광시군이 빠져나간 공간은 중앙홍군이 한발 먼저 선점했다. 1934년 11월 25일 홍군 선두가 싱안 부근에 도착해서 도강 지점을 확보한 것이었다. 강을 건넌 홍군의 선두는 강을 따라 북쪽으로 4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취안저우를 점령하려고 했다. 홍군 본대가 도강을 하는 동안 취안저우의 성에 기대어 남하하는 후난군을 저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취안저우는 간발의 차이로 후난군이 먼저 장악했다. 홍군으로서는 불리한 곳에 자리를 잡고 남하하는 후난군의 공격을 막아야 할 처지가 됐다.
취안저우까지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홍군은 남쪽으로 싱안의 광화푸(光華鋪)에서부터 취안저우 남쪽의 빙산(屛山)이라는 나루터까지 점령하여 샹강 30여 킬로미터를 도강 구간으로 확보했다. 이게 11월 27일 새벽이었다.
문제는 중앙종대의 행군속도가 너무 늦다는 것이었다. 중앙종대는 중앙정부와 군사위원회의 인원과 상당한 물자가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도강 지점을 점령한지 이틀이나 흐른 뒤인 11월 30일 중앙종대가 샹강에 도착했고 그날 황혼 무렵에 도강을 끝냈다.
그러나 중앙종대의 동쪽 후미와 남북 측면의 전세는 이미 심각한 상황이 됐다. 홍군은 중앙종대의 도강을 엄호하기 위해 한 발도 후퇴할 수 없는 결사항전으로 국부군의 압도적인 화력을 온몸으로 감당해야 했다. 홍군이 중앙종대를 동과 남북에서 호위하고 서쪽으로 강을 건너는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데, 국부군은 더 큰 삼각형으로 포위하고 삼면에서 공격해온 것이었다.
국부군 입장에서도 수월한 공격은 아니었다. 자신들의 우세한 병력과 화력으로 홍군을 밀어붙였지만 홍군 전사들은 죽는 순간까지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마치 죽이고 또 죽여도 죽지 않는 귀신과 싸우는 꼴이었다.
중앙종대의 북쪽 측면을 엄호한 1군단의 피해는 처절했다. 닷새 밤낮으로 전투가 계속됐고, 병력의 과반수가 전사할 즈음에야 중앙종대가 도강을 완료했다는 무전이 들어왔다. 그때부터는 1군단도 전투를 하면서 천천히 철수하기 시작했다. 천하의 명장이라는 린뱌오(林彪)와 쭤취안(左權)은 지휘소까지 탈취당하면서 하마터면 포로가 될 뻔했었다. 이 전투는 그야말로 중앙종대가 무사히 도강하도록 엄호하기 위해 홍군 전사들은 그 자리에서 죽어가는 작전이었다.
그 자리에서 처절한 죽음으로 버틴 홍군들
남쪽 측면을 엄호한 3군단도 이틀 밤낮을 탁 트인 개활지에서 광시군의 공격을 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화력이 열세인 데다가 몸을 숨길 곳도 없었기에 광시군의 공격을 온몸으로 저지하고 있었다.
중앙종대 동쪽 후미의 5군단 8군단 9군단에서는 더욱 심각했다. 이들은 중앙종대가 먼저 건너간 샹강의 부교를 건너야 했다. 그러나 국부군이 근접해오자 부교는 생존의 출구가 아니라 사지의 입구가 돼버렸다. 부교를 건너는 홍군 전사들은 완전히 드러난 표적이 됐던 것이다. 강 양쪽에서 또는 공중에서 보호막 하나 없이 공격을 받았다.
피격된 전사들은 부교 위에 쌓이거나 강물로 떨어졌다. 부교 위에는 시체가 쌓이고 쌓여 부교를 건너는 게 아니라 시체더미를 건너는 형편이 되었다. 강물에는 시체가 떠다닐 수도 없이 쌓여갔다. 강물이 아니라 핏물이 넘쳤다.
5군단에서도 34사단이 가장 비참했다. 사단장 천수샹(陳樹湘)은 1920년 마오쩌둥이 조직한 창사의 공산주의 소조에 가입했고 공산주의 청년단을 거쳐 추수봉기에 참여했던 전투경험이 풍부한 인물이었다.
5군단의 본대는 이미 샹강을 건넜으나 군단의 후미를 맡았던 34사단은 11월 29일부터 12월 2일까지 4일간 밥도 한 끼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4일째 되는 날 사면으로 완전히 포위됐다. 무수한 포탄이 떨어지면서 두 시간의 전투 끝에 5천 병력 가운데 1천여 명만 남았다.
5군단 본부에서는 34사단이 본대에 합류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오던 길로 되돌아가 장시성에서 유격전을 벌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천수샹은 문서를 태우고 무전기를 폭파한 뒤 자신도 보병무장을 한 채 병사들을 이끌고 본대와는 반대방향으로 포위를 돌파해나갔다.
그러나 그마저 총상을 입었고 2백여 병사들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얼마 후 홍군 포로들은 산 채로 도살을 당했다. 그러나 홍군 장교들은 포로로 끌고 가기 위해 살려두고 있었다. 천수샹은 자신이 포로로 끌려가봐야 반공 선전에 이용되기만 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터라 총상 자국을 자기 손으로 찢어 자살을 하고 말았다. 비참한 최후였다.
9군단의 경우 군단장이 부교를 포기하고 얼음같이 차가워진 강물에 몸을 던져 건너라고 명령한 덕에 사상자가 오히려 적었다.
가장 심각한 피해는 8군단이었다. 8군단은 대장정을 결정한 다음에 서둘러 모병한 신참들이 많았던 부대였다. 군사훈련도 사상교육도 부족했다. 호된 폭격을 당하자 우왕좌왕했다. 지휘관의 명령과 통제가 먹혀들지 않고 뿔뿔이 흩어졌다. 군대는 조직이 와해되고 흩어지면 적군의 사냥놀이에서 살아 움직이는 표적이 될 뿐이었다. 8군단의 1만여 병력이 샹강전투를 거치자 1천 명의 소부대로 찌그러졌다.
샹강을 건너 살아남은 중앙홍군은 통틀어봐야 겨우 3만여 명이었다. 그 가운데 반가량은 홍군 전사가 아닌 중앙종대였다. 참혹했다. 공산당 최고 책임자였던 보구는 너무나도 지독한 참패에 권총으로 자살을 하려고 했으나 저우언라이가 말렸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였다.
1927년 난창봉기와 추수봉기의 실패 이후 차근차근 성장해온 홍군에게 이런 참패는 한 번도 없었다. 이후에도 이렇게 심각하게 참패를 당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중앙소비에트를 포기하고 후난 서북부로 전략전이를 하는 것 자체도 커다란 패배인데, 그 위에 날개를 꺾인 채 산기슭에 내동댕이쳐진 꼴이었다.
장제스 입장에서는 대가리가 빠져나가기는 했지만 허리를 동강내어 반 토막 이상을 박살냈으니 다 잡은 것이라고 만족할 만했다. 이것이 대장정에 나선 홍군이 겪은 최악의 참패인 샹강전투였던 것이다.
싱안에 도착한 다음날 샹강 전투의 현장인 광화푸 전적지와 제서우진(界首鎭)의 홍군 도강 지휘소를 찾아가기로 했다. 샹강의 북쪽에서 강물과 나란히 달리는 322번 국도 가장자리에 광화푸 열사능원과 광화푸 조격전(阻擊戰) 구지가 있었다. 국도변에서 노점상을 하는 사람들에게 몇 번이나 물어물어 찾아갔다.
남쪽에서 밀고 올라오는 광시군을 저지하던 3군단이 시체로 참호를 만들다시피 하면서 지켰던 전장이다. 조격전 구지는 도로를 내면서 생긴 낮은 언덕의 절단면을 이용해 만든 것이었다. 열사능원은 구지 건너편 구릉이지만 관리상태가 썩 좋지는 않았다. 시내도 아니고 경작지에 둘러싸인 야산이라서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6킬로미터 거리에 제서우진(界首鎭)이 있다. 제서우대교가 있는 지역이 예전에 홍군이 도강한 지점이었다. 폭이 백 미터는 됨직한 샹강이 흐르고 있다. 제서우대교 근처는 길가에 노점상들이 바글바글 늘어선 시골장터였다. 제서우대교 서쪽 교각에서 계단을 통해 다리 아래로 내려서니 제서우 고진이 있었다. 허름한 옛 집들이 늘어선 이곳에 ‘샹강전투 구지’라는 표지석이, 표지석의 북쪽에는 당시 홍군의 도강 지휘소가 있었다. 장정 당시에는 삼관당(三官堂)이라고 하는 서당이었는데, 지금은 홍군당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관리인은 보이지 않고 문은 잠겨 있어 들어갈 수는 없었다.
중앙홍군은 샹강을 건넌 다음에 광시에서 제일 높은 해발 2,141미터의 마오얼산(猫兒山)을 넘었다. 마오얼산 역시 샹강과 322번 국도와 마찬가지로 동북에서 남서 방향으로 병풍처럼 이어진 산맥으로 1,800미터의 산봉우리들이 60킬로미터 정도 길게 이어진 산이었다.
중앙홍군은 이 산을 넘으면서도 꽤나 고생을 해야만 했다. 산길이 좁고 가팔라서 절벽에서 추락한 전사들도 있었고 밤에 넘다가 더 이상 가지 못하고 길이 너무 좁은 탓에 서거나 앉은 채로 잠을 자기도 했다.
답사일행은 마오얼산을 오르기로 했다. 차를 몰아 마오얼산 공원에 도착했는데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반 차량은 올라갈 수 없고 공원에서 유료로 운행하는 전용차량만 올라갈 수 있었다. 중국의 산수가 좋은 관광지는 대개 입장권 이외에 전용차량 탑승권을 사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대량의 관광객 입장을 허용하면서도 실제 차량통행을 제한하는 효과는 있으나, 여행객으로서는 불편한 점도 있다. 그나마 비수기인 탓에 함께 올라갈 다른 관광객들이 오는지를 확인한 다음에야 출발한단다.
마오얼산 공원으로 오는 시외버스가 도착했으나 다른 관광객은 아무도 없었고 그저 우리 일행 세 사람에 공원의 관리인원 둘이 전부였다. 공원의 전용 승합차에 탑승하려는데 막상 산 위에 올라가면 빙설 때문에 끝까지 가지 못할 수도 있다고 뒷북 안내를 해주었다.
공원 입구는 해발 800미터이지만 마오얼산의 능선은 1,800미터에서 2,100미터를 넘나들기 때문이다. 산 위에는 기념탑도 있지만 홍군이 걸어 넘어간 당시의 산길 일부가 ‘장정고도’라는 이름으로 보존돼 있다고 했다. 기념탑도 기념탑이지만 이 옛 산길 소로를 걸어보고 싶었다.
마오얼산 험한 산길을 넘다
차가 출발하자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가파른 산길이 꼬불꼬불했다. 전용차 기사는 익숙한 길이라 잘도 올라갔다. 한참 올라 능선에 서자 멀리 공원 입구가 내려다보이고 깎아지른 절벽들도 눈에 들어왔다. 아래서 볼 때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지만 위에 올라와서 보니 병풍 같은 산이란 말이 실감났다.
해가 들지 않는 북사면의 아스팔트길은 두꺼운 얼음과 쌓인 눈이 그대로였다. 다행히 장정고도까지는 차가 올라갔다. 우리는 장정 고도를 걷기로 하고 친절한 기사는 아래쪽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삼십여 분을 아스팔트길을 따라 내려왔다. 두견회랑이란 팻말이 보였다. 양옆으로 두견화가 넘쳐났다. 대나무도 무성했다.
곧이어 ‘장정고도(長征古道) 홍군정(紅軍亭)’이란 팻말이 보였다. 이곳 백성들이 오래도록 마오얼산을 오르내린 산길이니 고도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80년 전의 장정에 고도라는 말을 붙이니 좀 어색하긴 했다. 홍군은 국부군의 추격을 뿌리치느라고 목숨 걸고 강행군을 한 길이지만 답사일행이 걷기에는 숲이 우거진 상쾌한 길이었다. 중간의 조그만 정자가 홍군정이란 작은 편액을 붙이고 있었다. 잠시 쉬면서 마오얼산의 능선을 감상하다가 산길을 걸어 내려와 전용차량을 만나 하산했다.
마오얼산 입구에서 싱안으로 돌아오는 길은 대나무 숲이 상당히 아름다웠다. 중간에 계곡 물을 건너가는 이공교(二拱橋 교각의 아치가 두 개로 만들어진 다리)가 홍군교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었다. 장정이 지나갔던 지역에서는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는 다리 이름이다. 홍군교라는 콘크리트 표지가 다리 한쪽 구석에 거의 썩은 채로 남아 있었다. 1971년에 세운 다리인데 다리는 허름했지만 이름은 그들의 자랑스러운 현대사에서 따온 것이다.
보구와 오토 브라운은 장정을 떠나면서 중앙국 서기 딩잉(頂英)을 잔류 홍군의 총책임자로 남겼다. 홍군에서는 24사단과 일부 독립연대가 잔류했고, 지방의 병력까지 합해야 고작 3만여 명이었다.
딩잉은 보구의 왕밍노선에 충성스러운 인물이었다. “그동안 쌓아온 토지혁명의 성과와 소비에트를 보호하고 중앙홍군이 되돌아올 것을 기다리라”는 보구의 훈령 한 글자 한 글자에 충실했다. 심지어 중앙홍군이 전략전이를 명분으로 떠난 것조차 지방간부나 지역민들에게 제대로 공표하지 않았다.
천이(陳毅) 등 딩잉과 함께 잔류하게 된 다른 간부들이 신속하게 부대를 분산시켜 유격전으로 맞서자고 했지만 딩잉은 왕밍노선의 전면전을 고집했다. 오히려 모든 중앙정부 업무를 정상적으로 돌리고 ‘홍색중화(紅色中華)’라는 관보도 계속 발행하게 했다.
잔류하고 있던 홍군 24사단은 11월 22일 루이진 북부에서 국부군 1개 여단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그게 유일한 승전보였다. 이 전투를 통해 홍군 전투력이 크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국부군은 물밀듯이 밀려들어왔다. 이 유일한 승전 이후 두 달 만에 잔류 3만 병력은 5~6천 명으로 폭삭 주저앉았다. 전투에서 사망하고 패전으로 흩어졌다. 홍군에게 근거지로 남은 지역은 장정 출발지인 위두 부근의 일부뿐이었다.
천이는 유격전으로 전환하자고 계속 건의했지만, 딩잉은 무전기만 바라보고 있었다. 계속 묵묵부답이던 당 중앙으로부터 무려 석 달 만에 무선이 날아왔다. 1935년 2월 중앙소비에트의 잔류 홍군들은 유격전으로 전환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보구와 오토 브라운에서 마오쩌둥으로 홍군의 지휘권이 바뀐 다음이었다. 그러나 이미 중앙소비에트는 국부군에 의해 뭉개진 상태였다.
보복의 광기에 내버려진 잔류자들의 비극
중앙소비에트에서는 1935년 2월 5일 잔류자들이 중앙국 확대회의를 열고 유격전으로 전환하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곧이어 천이가 중앙정부 명의로 군중대회를 소집하여 혁명이 위기에 처했음을 고하고 이천여 부상병을 한 사람씩 데리고 가서 치료해주기를 호소했다. 지역 인민들을 홍군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위험을 무릅쓰고 부상병들을 하나씩 데려갔다.
이들은 건강이 회복되자 홍군 유격대를 찾아 산으로 들어갔고, 유격대는 훗날 신4군을 창설할 때 근간이 되었다. 당시의 홍군이 지역민들과 얼마나 밀착되어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잔류 홍군은 몇 갈래로 나눠 국부군의 포위를 돌파하기로 했다. 딩잉과 천이 역시 중요 서류를 불태워 없애고 무전기를 파괴한 다음 4백여 명을 인솔하고 국부군의 포위를 돌파해나갔다. 수차례 국부군과 교전하고 탈주하면서 급기야는 4~5명만 남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내몰렸다.
그러나 우연히 뤄밍노선으로 비판 받아 노동개조 징계를 받은 한 간부와 야산에서 조우하는 행운이 찾아왔다. 이들의 도움으로 밤을 틈타 다른 곳으로 몸을 숨길 수 있었다. 그러나 행운은 이들뿐이었다. 그 외의 고위 간부들은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는 등 비참한 결말로 빠져 들어갔다.
양창지 문하에서 마오쩌둥과 동문수학했던 허수헝(何叔衡), 학자로 더 유명했던 취추바이(瞿秋白), 마오쩌둥의 작은 동생 마오쩌탄 등은 모두 포위를 뚫지 못하고 희생됐다. 그러나 공산당 간부나 홍군 전사보다 더 비참한 것은 남아 있던 백성들이었다.
국부군과 함께 지주와 향신들이 눈에 핏발을 세우고 돌아온 것이다. 이들이 환향단(還鄕團)이란 조직 명칭을 사용한 것은 차라리 나은 편이었다. 빨갱이를 대패로 깎아내고 삽으로 찍어버린다는 뜻의 산공단(?共團)이 곳곳에서 만들어졌다. 이들은 홍군이나 지방유격대 전사의 가족들에 대해 조직의 이름만큼 무참하게 보복을 가했다.
이들은 이미 토지와 재산을 빼앗긴 원한이 있었던 터라 국부군보다 훨씬 잔인했다. 닥치는 대로 죽이고 걸리는 대로 보복을 했다. 장제스는 소비에트 지역의 모든 백성들은 이미 적화분자가 되었다는 이유로 이들의 보복을 방치하고 두둔했다. 때려죽이고 찔러 죽이고, 돌을 달아 물에 빠뜨리고, 그야말로 산하는 보복의 광기와 증오의 피로 물들어갔다.
탈주한 중앙홍군은 홍군대로 참패했고, 중앙 소비에트는 소비에트대로 잔인한 보복에 죽어나갔다. 장제스 입장에서는 이 정도였으면 공산당은 거의 박멸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1927년 징강산으로 들어간 이후 농촌에서 도시를 포위하던 중국 공산당은 1932년부터는 자신감이 넘쳐 대도시로 나가려다가 국부군의 봉쇄선에 걸려서 아스팔트 바닥에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졌다가 척박한 산골로 쫓겨난 것이다.
잔류자였으나 구사일생으로 사지를 빠져나간 천이(陳懿)가 시로써 이 당시의 비극을 노래했으니……. 半壁山河?血海, 幾多知友化沙蟲 나라의 반이 피바다에 빠져들고, 얼마나 많은 동지들이 모래벌레처럼 흩어졌는가.
(3-3) 소수민족의 향기 - 좡족과 야오족
답사일행은 참패의 현장 싱안을 둘러보고는 구이린(桂林) 시내로 이동했다. 구이린에서는 동반자가 교대하기로 했다. 답사 14일차에 인천에서 구이린으로 오는 비행기에는 미식가 최치영 님과 정일섭 교수가 타고 있었고, 그 비행기가 돌아갈 때 황인성 교수는 귀국하게 돼 있었다. 황인성 교수는 상하이에서 답사를 시작해 대장정의 내륙 코스로 이어지는 이주간의 동반여행이 인상적이었으나, 시간적인 제약으로 더 이어가지 못하는 아쉬움을 송별만찬으로 남기고 귀국했다. 이제 답사일행은 기사까지 다섯 명으로 늘어났다.
동반자 교대를 완료한 답사 15일차에는 홍군의 대장정 코스와는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룽성(龍勝)으로 갔다. 광시 구이저우 윈난으로 이어지는 중국 서남부는 소수민족의 세계라고 할 정도로 다양한 소수민족을 만나게 된다. 게다가 샹강에서의 참패라는 참혹한 현장을 이틀이나 둘러봤으니 잠시 마음도 쉬어갈 겸 소수민족 마을에서 이국적인 정취에 젖어보기로 했다.
이국적인 정취에 잠시 쉬어가다
룽성은 좡족(壯族)과 야오족(瑤族)이 사는 산골이다. 특히 계단식 논이 일대장관인 곳이었다. 좡족은 중국내 인구가 1700만여 명으로 광시가 바로 좡족의 자치구이다. 옛날에는 남월(南越)이라 불렀고 송대 이후 1949년까지는 좡족(?族)이라 표기했었다.
그러나 이 좡 자는 족칭에서는 좡(zhuang)으로 읽지만 일반적으로는 퉁(tong)으로 읽을 수도 있다. 퉁으로 발음하면 어린 아이 또는 종이란 뜻이 되기 때문에 어감이 좋지 않았다. 이를 감안하여 1965년 저우언라이가 제의하여 훌륭하다, 장하다는 뜻의 좡(壯)으로 바꾼 것이라고 한다.
중국의 소수민족 족칭은 음역하여 한자로 표기하는데, 전통시대 중국에서는 벌레(남만의 蠻)나 짐승(서융의 狄), 더럽다(예맥의 濊), 비천하다(선비의 卑), 노예(흉노의 奴)와 같은 비칭을 사용한 것이 적지 않아 소수민족의 족칭은 그 이면을 한 번씩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좡족은 중국 남부에서 도작문화(稻作文化)의 주인공이다. 중국의 동북에서는 우리 동포들이 추운 지방 끝까지 벼농사를 가져갔고, 좡족은 남부 산간지역에서 산꼭대기까지 벼농사를 끌고 올라갔다. 경사가 심한 산기슭에 촘촘하게 계단식 논을 일구고 산 위의 물을 끌어 벼농사를 지어온 것이다.
이와 함께 중국 서남부의 전통적인 간란식(干?式) 주택도 눈길을 당긴다. 간란식 주택은 집을 지면에 직접 짓지 않고 집의 몸체를 지면 위로 반층 정도 올려서 짓는다. 강우가 많고 습도가 높은 지방에 자주 보는 건축방식인데, 지면으로부터의 습기와 외부로부터의 동물이나 벌레 등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룽성과 같은 지방에서는 가파른 경사면에 기대어 다리를 내리 뻗어 지탱하는 모양이라 해서 조각루(弔脚樓)라고도 부른다. 허술한 1층은 축사나 창고로 쓰고, 2층 일상의 생활공간이다. 3층은 주로 저장 공간으로 사용한다. 출입문은 골목과 지형에 맞춰 1층이나 2층으로 연결하는데, 대부분 문짝이 없다. 닭이나 오리가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무릎 높이의 가림 문을 설치하는 정도다. 몇 년 전 중국 민가기행에 연재했던 내용을 설명해주니 황교수 님과 산신령 님은 건축 이야기에 꽤나 흥미로워했다.
재미있는 것은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2층의 당옥(堂屋)이다. 간란주택은 하나의 구조물로서 그 안의 공간을 나눠서 사용하기 때문에 당옥 역시 2층 중앙의 한 공간을 차지한다. 당옥에는 조상의 위패를 모시기도 하지만, 큼지막한 마오쩌둥 초상화가 자리를 잡고 있는 집도 많다. 우리로서는 관공서도 아닌 일반 가정집에 웬 마오쩌둥인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중국인들에게 마오쩌둥은 잘잘못을 따지는 대상이 아닌, 그냥 신중국을 세운 국부(國父)라고 인식하는 게 보통이다.
룽성에서는 계단식 논이 장관이다. 계단식 논은 산 위로 올라가야 눈에 제대로 들어온다. 마을의 허름한 식당에서 가볍게 식사를 하고는 마을 뒷산을 오르기로 했다. 어느 방향이든 산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높은 곳의 전망대로 올라가게 돼 있다. 산길을 따라 오르자 점차 그 자태를 드러내는 계단식 논, 경사가 50도가 되는 곳에도 논을 만들었다. 폭 1미터의 논 뒤로 높이 1~2미터의 흙벽이 있고 그 위에 다시 폭 좁은 논이 이어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논이 산의 비탈면 전부를 덮고 있었다.
계단식 논 사이로 난 좁은 산길을 오르다 보면, 한 뼘의 논을 얻기 위해 대를 이어 수백 년간 쏟아온 그들의 노고에 찬탄을 금할 수 없다. 이 마을의 계단식 논은 원(元)대에 개착하기 시작해 오늘에 이른 것으로 70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대지의 예술, 노동의 예술이란 말로 묘사하기도 하는데, 예술이라 말하기엔 수백 년간의 노고가 너무 수고스럽다. 예술 그 이상의 무엇이라고 해야 할지…….
계단식 논은 봄에 모내기 전 물을 담았을 때, 모내기를 할 때, 가을에 황금빛이 되었을 때, 추수할 때마다 각기 다른 멋진 풍경을 보여준다. 이 산골마을에 하루 유숙하면서, 새벽 햇살이 부서지는 계단식 논을, 그 위에 빠른 걸음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안개를, 능선으로 넘어가는 석양을 느껴보고, 오늘날에도 전통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들의 일상을 맛보는 것도 꽤나 아름다운 여행이다.
답사일행은 핑안(平安)이라고 하는 좡족 마을로 올라가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객잔에 숙소를 정했다. 이십대 후반의 아들이 어머니와 함께 하는 좡족의 객잔이었다. 창문을 열면 계단식 논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수백 년에 걸쳐 만들어진 계단식 논이 이제는 관광 상품이 된 탓에 농사보다 수익이 좋은 객잔으로 돌아섰다.
주인 아들은 시골밥상 요리사였다. 그러나 그가 만들어온 토종닭 훠궈(火鍋 샤브샤브)는 일품이었다. 독한 백주를 한잔 곁들이니 현세의 번잡함이나 과거 역사의 무게는 물론이요 여행길의 긴장과 피로까지도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창밖에 하현달이 눈에 들어오자 은근한 취기를 타고 동화 속에 들어온 듯 전설 속에 노니는 듯했다.
퉁다오(通道)에서 활로를 찾기 시작하다
다음날인 답사 17일차 다시 대장정 답사코스로 복귀했다. 중앙홍군은 광시 북단의 마오얼산을 넘은 다음 서북 방향으로 행군해서 후난성 서남단의 퉁다오(通道)를 거쳐 구이저우성 동쪽 끝자락인 리핑(黎平)으로 이어갔다.
이 지역은 광시 후난 구이저우 세 개의 성이 한데 만나는 지역이다. 퉁다오라는 지명 그대로 교통의 요지였다. 룽성에서 퉁다오까지는 100킬로미터가 조금 안 되는 거리, 그곳에서 다시 40킬로미터를 더 가면 퉁다오 전병회의(轉兵會議)가 열렸던 공성서원(恭城書院)이 있었다. 이날은 퉁다오까지 이동하고 답사 18일차에 공성서원을 거쳐 리핑까지 가기로 했다.
답사차량이 퉁다오현 시내로 들어서는데 시내 한복판에 홀로 불쑥 솟아난 거대한 암봉이 외지인들을 맞아주었다. 너무도 기이하게 생긴 암봉이었다. 다음날 아침 암봉을 올랐다. 이름은 독암(獨岩).몸통은 깎아지른 절벽이고 봉우리 부분은 둥근 밥주발을 엎어놓은 모양새다. 주변에 호수를 두르고 있고 수면 위로 아침 안개가 피어올라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가파른 길이 있어 올라보니 또 다른 장관이었다.
마오얼산을 넘어 국부군의 추격권을 벗어난 중앙홍군은 거친 숨을 돌리면서 퉁다오에 도착했다. 이때 중앙홍군에는 중앙소비에트를 버리고 떠나온 데 이어 샹강에서 참패로 인한 암울한 자괴감이 원혼처럼 흘러 다니고 있었다.
보구와 오토 브라운, 저우언라이 3인단을 정점으로 해서 밤낮으로 두 배의 속도로 강행군을 해왔으나, 샹강전투에서 65퍼센트의 동지들을 잃어버리는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되돌아보면 국부군의 1~4차 토벌전에 대항해서는 상당한 전리품을 거둬들이면서 승리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5차 토벌전부터는 계속 밀리고 밀린 것에 대해서도 심각한 회의가 들었던 것이다.
이것은 당 중앙 3인단의 리더쉽에 대한 회의였다. 뤄밍노선이란 명목으로 백여 명의 간부를 징계하면서 왕밍노선을 밀어붙였고, 유격전을 소심한 우경 기회주의로 비하하면서 국부군과 진지전으로 전면전을 벌인 결과가 탈주와 참패로 귀결됐으니…….
당에서는 중앙국 회의에 상당 기간 참석하지 못했고, 행정부 주석이지만 실권이 없었고, 홍군에 지휘권 일부도 없었던 재야의 마오쩌둥 주위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장원톈과 왕자샹(王稼祥)이 바로 그들이었다.
왕자샹은 모스크바 중산대학 출신으로 보구와 친분이 있었다. 제4차 반토벌전에서 복부에 총상을 입었으나 중앙 소비에트의 치료 여건이 좋지 않아 장정 초기에 마오쩌둥과 마찬가지로 들것 신세였다.
장원톈은 1933년까지 상하이에서 보구 등과 함께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중앙소비에트로 들어온 인물이었다. 일본 미국 유학을 한 뒤 귀국해서는 다시 모스크바 중산대학으로 가서 공부를 했다. 제2차 소비에트 대회에서는 인민위원회 주석에 선출되는 등 장정 당시 공산당 최고 책임자였던 보구와 함께 소위 모스크바 그룹의 핵심인물이었다.
장원톈과 왕자샹은 마오쩌둥과 자연스레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인맥이나 출신 배경에서도 그랬고 최근에는 마오쩌둥과는 다른 왕밍노선이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특정인이나 특정 파벌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자들은 아니었다. 이들은 대장정 행군 속에서 마오쩌둥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마오쩌둥의 유격전이나 전략전이에 대한 공감대를 넓혀갔다. 훗날 이들을 보구, 오토 브라운, 저우언라이 등 당 중앙 3인단에 견주어 재야 3인단 또는 들것 3인단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또 하나의 기묘한 우연이 마오쩌둥에게 윙크를 보냈다. 장정 출발 한 달 전에 중국 공산당이 모스크바의 코민테른과 비밀통신을 주고받던 상하이의 무선통신 조직이 국민당 경찰에게 체포되면서 와해됐던 것이다. 이로써 중국 공산당은 코민테른과의 연락이 대장정 대부분의 기간 동안 두절되어 버렸다. 당시 코민테른과의 국제공조에 의존하고 있던 보구와 오토 브라운에게는 나쁜 조건이었다.
수만 명의 동지를 한꺼번에 잃어버린 참패, 보구와 오토 브라운의 공황에 가까운 심리적 좌절, 코민테른과의 통신 두절, 공산당 중앙의 리더쉽에 대한 광범위한 회의, 재야 3인단 사이에 형성된 공감대 속에서 중앙홍군은 퉁다오에 도착했다. 퉁다오(通道), 과연 지명 그대로 중앙홍군도 이곳에서 새로운 출구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4 부활 왕따 마오쩌둥의 반격
(4-1) 저우언라이의 한 수
(4-2) 소수민족의 향기 - 동족과 먀오족
(4-3) 쭌이에서 재탄생한 마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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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딴산 원문보기 글쓴이: 한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