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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봄 집회
부제 <소통>
2. 바벨탑의 저주를 끝냄
토론토교회 김치현 목사. 2012. 2. 25.
[사도행전 2:1~13]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사도행전 2장은 교회의 탄생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오순절에 교회가 탄생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구약의 3대 절기가 유월절과 오순절과 장막절이다. 유월절은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잡히기 전날 밤 떡을 떼며 유월절 만찬을 하시면서 예수님의 죽음을 유월절과 의미를 같이 하고 있다. 어린양을 잡아서 그 양고기를 먹고 죽음을 넘어서 홍해 강을 건넜듯이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서 그 피로 인해서 우리가 한 세계를 넘어서 다른 세계로 가게 되었다고 의미를 겹치고 있다.
오순절은 유월절로부터 50일이 지나서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 사도행전에 보면 40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고 40일 후에 승천하신 다음에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기를 힘쓰고 있을 때, 예수님의 죽음으로부터 50일이 지났을 때 성령 체험을 하고 여기서부터 교회가 시작된다.
오순절을 의미는 유월절이 지나고 50일이 지나 추수의 절기이니까 유월절이 어떤 새로운 생명의 씨라면 오순절은 보리를 수확하는 절기였다. 밭으로 수확하는 절기다. 유월절의 성질은 밭데기로 추수하는 절기인데, 예수님의 생명을 단체적으로 수확하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에 이 오순절과 교회의 탄생을 겹쳐서 우리에게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단체적으로 수확하는 곳이다. 이 오순절의 경험이 흔히 성령의 체험을 통해서 제자들이 방언이 터져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성령이 충만해서 방언을 하게 되었는데 어제 말씀 드린 것처럼 이 성령, 그 영은 교회되게 하는 영, 교회를 시작케 하고 탄생케 하는 영이다. 과정을 거친 그 영 안에서 만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로 만나지는 경험이고, 깊은 본질 안에서 우리 생명이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케 하는 생명이다.
여기서 방언을 하기 시작했다고 했는데,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이 방언은 요즘 기독교에서 알고 있는 그 방언과 성질이 전혀 다르다. 오순절 명절이 되어 각처에서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어온 사람들은 아프리카에서도 오고 소아시아에서도 오고 로마에서도 왔기 때문에 서로 언어가 달랐다. 제자들이 성령이 충만하여 말씀을 전하는데 제자들이 하는 말을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다 자기 말로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지금 보통 방언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 사람들끼리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다. 우리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방언이라고 하는데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그런 방언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하는 말을 미국 사람도 와서 알아듣고 러시아 사람 일본 사람 중국 사람들도 다 자기 말로 알아듣는 경험이다. 그래서 교회가 시작되게 된 것이다.
언어를 넘고 민족을 넘고 어떤 장벽을 넘어서 다 하나로 만나지는 경험, 이것이 오순절의 경험이고 이것이 오순절에 한 방언이다. 지금 보통 오순절 운동하는 데서 하는 방언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방언이 아니고 고린도교회에 나오는 방언이다. 거기는 이상하게 다른 무엇이 있어 방언을 하는데 사람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여 어떤 신기함이나 독특한 무엇을 말하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이다. 고린도교회의 방언하는 사람들은 남 다른 방언을 하는 사람이고,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 했던 방언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방언, 누구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이었다.
고린도 교회 방언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서 적어도 사도행전 2장에서 제자들이 경험했던 방언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못 알아듣는 말이 아니라 누구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다. 우리가 집회에서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말씀을 했는데 언어를 초월하여 들었다면 이 얼마나 소망이 되는 일인가! 이런 일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옛날에 홍 두표 형님 딸과 권 도상 형님 딸이 엄마아빠가 교회를 너무너무 좋아하고 교회에 인생을 걸고 사시니까 엄마아빠가 좋아하는 교회를 정말 알고 싶어서 한국을 방문했다. 그냥 놀러온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언어가 다르니까 알아듣기도 힘들고 문화가 다르니까 노는 것도 달라 지겹고 힘든 시간이 가다가, 나중에는 정말 답답하여 그냥 한번 들어 보겠다 했다. 한국말은 서툴지만 목사님 말씀을 그냥 듣는데 이상하게도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것이 한국말인줄 알고 들으려고 했는데 진짜로 들어보니까 한국말도 아니고 영어도 아니고 ‘정말 말’이더라는 것이다. ‘참말, 진실한 말’이더라고 간증했다.
쥴리는 그렇게 간증을 했고, 메리도 돌아가서 한국에 다녀온 뒤로 학교를 가서 친구를 만나니까 자신이 뭔가 다른 곳에 있다고 온 사람처럼 관심이 다른 사람이 되어있더라고 간증했다. 뭔가 말씀을 알아들었다는 말이다. 말은 아니지만 뭔가를 본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말 백 마디 말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나은데, 어떤 것이 사진 찍히듯이 자기에게 보여 지니까 꼭 말을 알아들은 것은 아닌데, 왜 이것을 그토록 좋아하는지를 알아듣고 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런 경험이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경험과 꼭 같은 것이다. 말을 알아들은 것은 아닌데 뭘 말하는지를 알아버린 사람이 된 것이다. 언어를 넘어서서 교통이 되는 이 경험을 사도행전에서 하게 된 것이다.
나도 옛날에 이것을 모를 때는 방언을 하고 싶어서 애쓴 시절이 있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좋아하고 있을 때인데도 한편으로 다른 것을 나에게 더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인천에서 전도사를 하고 있던 교회는 장로교이지만 순복음교회 같은 교회였다. 대부분 40일 새벽기도 하면서 별별 체험을 다하고 방언은 웬만한 사람은 다 하는데 그 교회 전도사로 있으면서 방언을 못하니까 창피했다. 한얼산 기도원에 가면 개도 방언을 한다고 하여 현경 자매와 그 교회 교인들과 함께 한얼산 기도원을 갔다.
그때 기도원 원장님으로 있던 이천석 목사님은 중풍으로 쓰러져 계시고 며느리 되는 분이 집회를 할 때다. 말씀을 마치고 오늘은 특별한 은혜가 임하니 방언을 하는 사람은 이쪽으로 앉고 방언을 못하는 사람은 저쪽으로 앉으라고 하였다. 방언을 못하는 사람은 방언부터 하고 방언을 하는 사람은 더 큰 은사를 체험하게 될 것이라며 둘로 나누어 앉으라는 것이다. 그때 얼마나 갈등이 되었는지 모른다. 방언을 못하지만 교인들이 보는데 못하는 곳에 앉자니 정말 창피하여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방언하는 쪽으로 가서 앉았다. 방언 못하는 쪽에서는 방언을 한다고 솰라솰라 하더니 이쪽으로 와서 여기는 방언을 하니까 다 같이 방언 찬송을 하겠다는 것이다. 방언도 못하는데 방언 찬송을 어떻게 하겠는가? 완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있다가 정말 부끄러운 뒤통수를 가지고 돌아온 경험이 있다. 그것이 그때만 해도 부끄러운 것이 되어 그렇게 했던 것이다. 우리 자매는 솔직히 방언 못하는 곳으로 가서 하니까 되더라고 했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방언은 그런 방언이 아니다. 못 알아듣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알아듣는 방언이었다. 왜 이 방언의 경험을 교회 탄생과 함께 여기에 기록하고 있는가? 그것은 바벨탑의 저주 때문이다. 바벨탑의 저주로 인해서 온 인류가 흩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흩어짐을 면하자고 해서 시날 평지에 모여서 바벨탑을 쌓아 올라갔는데 이상하게 거기서 언어가 혼잡하게 되어 뿔뿔이 흩어져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버리게 되었다. 영어와 한국말이 다른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한국말 쓰는 사람들끼리도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요즘 말로 사오정 같이 듣기는 들어도 엉뚱하게 알아듣는다.
웃긴 얘기 하나 하겠다. 요한복음 7장에 유대인들이 예수에게 “네가 나이 50이 못 되어..” 라는 af을 했다. 그때 서른 살 갓 된 예수님에게 50도 못 되어 라는 말이 얼마나 기분 나쁜 말인지 모르실 것이다. 나는 그런 비슷한 경험을 했다. 5년 전 쯤 아틀란타에서 나이 드신 새로운 한 부부가 오셨다. 이현래 목사님 이야기를 하다가 목사님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고 물으시는 것이다. 그때 70되셨다고 하니까 갑자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70은 안 되어 보인다는 것이다. 가만히 보니까 나에게 하는 소리였다. 나는 그때 50도 안 된 나이인데 70은 안 되어 보인다고 하니까 기분이 영 그랬다. 그래서 나는 59년생이라고 하니까 옆에 있는 자매님이 또 잘못 알아들으시고 그래도 젊어 보인다는 것이다. 가만히 보니까 나를 59세로 보신 것이다. 이런 것이 사오정이다.
어린왕자에 보면 “말은 모든 오해의 근원”이라고 했다. 말을 해서 의사를 전달하려고 하는데 말을 할수록 오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벨탑의 저주이다. 바벨탑을 쌓는 가운데 있기 때문에 나를 설명하면 할수록 더 오해가 되고 더 왜곡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 흩어짐을 면하자고 한 일인데 결과는 말이 통하지 않아서 다 흩어지게 되었다. 이런 일이 기독교 안에도 있다. 한국 교회사에 보면 에큐메니컬 운동이라는 일치운동 때문에 교회가 분열되었다. 교단이 많아지고 분열되어 선교지에 가보면 서로 다른 교단에서 선교를 하느라고 싸움이 생기니까 안 되겠다하여 새로운 선교 개념을 가지고 하나로 모이는 일치 운동을 하자 한 것이다. 일치 운동을 했는데 한국 교회는 이 일치하자는 운동 때문에 장로교가 둘로 갈라졌다. 합동과 통합이 그래서 갈라졌던 것이다. 1961년도에 장로교의 통합과 합동 교단이 에큐메니컬 운동에 가입 여부를 놓고 둘로 나누어지게 된 것이다. 공교롭게도 갈라져서 이름 붙인 것이 또 합동이고 통합이다. 미국 사람들에게 이 둘이 어떻게 다른가를 정말 설명하기 어렵다. 그것도 일치 운동 때문에 갈라졌다고 설명하면 더 이해가 안 되는 문제인 것이다.
분열은 다 말이 안 통해서 생기는 것이고, 말이 안 통하는 것은 바벨탑에서부터 비롯된다. 우리가 우리 이름을 내고 나를 보존하고 높이 올라서 우리를 지키고 흩어짐을 면하자는 이런 동기들은 결국은 모든 사람들을 분열시켜서 하나로 만날 수 없게 만들었다. 원래는 한 인류였는데 원래는 한 사람이었는데 백인백색이 돼버린 것이다. 만나면 만나는 쪽쪽 다 갈라지게 된 것이다.
한국 사람들도 단일민족 혹은 백의민족 하는 습성이 강해 사고가 단세포적이라서 조금만 달라도 용납이 안 된다. 장인어른 이야기를 들으니까 6.25때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반공포로와 친공포로로 나누어져 매일 밤 서로를 죽였다고 한다. 하루는 이쪽에서 죽어나가고 하루는 저쪽에서 죽어나가는 이 싸움을 하면서 생명을 걸고 반공, 친공 하면서 싸우다가 반공포로가 석방되어 나왔다. 서울에서 반공포로들이 모였는데 모이자마자 동서로 갈라졌다고 한다. 목숨을 걸고 같이 했던 전우였는데 그 문제가 없이 하나로 모이니까 동쪽 사람 서쪽 사람으로 나누어져 단체가 두 개로 되어버리게 됐다고 한다.
이 바벨탑의 저주 아래에 있는 사람은 무엇을 해도 갈라질 수밖에 없다. 세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 모여도 갈라질 수밖에 없다. 정말 없으면 죽고 못 살아서 만난 부부도 살다 보면 말이 안 통해 갈라서는 이유는 함축하면 바벨탑의 저주 아래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에서 처음으로 하나 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하나로 만나지게 되었다는 것은 바벨탑의 저주가 우리에게 끝났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는 것이다. 바벨탑의 저주가 끝났다. 우리는 이제 언어가 다를 필요가 없다. 무슨 말을 해도 서로 알아듣는 사람들이 되었다. 이것이 교회다. 교회가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세상에 나가면 자기의 취향이나 이해관계 속에서 만나진다. 그것 떠나면 남남이다. 그런데 교회의 경험에서는 어떤 이해관계나 취향이 없이 내 선호나 내 기호가 아닌데 만나져서 전혀 말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무슨 말을 해도 저 사람의 마음을 알겠다는 경험이 바로 교회를 시작케 하는 경험이다.
교회가 되자면 같은 말을 써야 되고 같은 말이 되어야 된다. 우리 교회에 처음 오신 분들이 간증하는 것을 참 알아듣기가 힘들다. 말씀은 좋은데 간증 시간이 되면 듣기 힘들다는 분도 있다. 또 조금 지나면 간증이 없으면 재미가 없다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어떻게 이 한 말씀을 각자 다르게 받아들여서 다양하게 표현해낼까? 마치 우리 몸의 효소처럼 몸에 음식이 들어왔을 때 효소가 분해해서 흡수될 수 있는 것으로 내놓듯이, 간증이 없이 말씀만 듣고 그냥 돌아가면 효소 없이 음식만 먹은 것과 같이 맛이 없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 간증의 묘미를 알게 된다. 이 간증이라는 것이 주관적인 언어다. 내 경험 안에서의 주관적인 언어이니까 이런 표현은 낮에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로’ 단계이다. 나에게는 정말 감격적이라서 표현하면 어떤 사람은 성숙하여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듣지만 처음 온 사람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대부분 외부 사람들이 형제들의 간증 속에서 걸린다. 간증이라는 것을 교리의 잣대를 들이대면 걸리지 않을 말이 별로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객관적인 말만 하고 있을 수가 없지만 내가 주관적으로 표현하면서도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 이것이 ‘자기로’ 단계를 넘어서 ‘하나로’ 단계인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쓰는 단계로 가는 것이다.
우리에게서 나는 이 좋은 양식과 이 좋은 경험이 모든 사람에게 분배될 수 있는, 어떤 사람이 먹어도 아니라 할 수 없는 이런 언어를 가지고 분배하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고 궁극적인 목표이다. 나 좋으라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서 나는 소산이 모든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식이 되게 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말이 각처에서 온 사람들 누구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되어서 “참 신기하다. 기이하다. 어떻게 나와 살아온 배경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데 어떻게 꼭 내 이야기를 하듯이 이야기를 하는가?” 이렇게 알아듣게 되는 것이 우리 안에서도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의 경험이다. 그런 것이 교회를 탄생케 하는 경험이다.
말이라는 것이 서로 같은 단어를 쓰는 데도 다른 의미일 때가 있다. 어린아이가 사랑이라는 말을 할 때와 사춘기 청년이 말할 때와 인생의 산전수전을 겪은 사람들이 사랑을 말할 때는 의미가 다르다. 트위터에 보니까 사랑에 대한 정의만 끝없이 글을 올리는 사람이 있다. 매일 같이 하는 데도 어떻게 그렇게 정의가 수없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사랑 전문가가 되려고 하는지 그런 사람이 있다. 또 좋은 말만 뽑아서 올리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그 경험에 따라서 사랑의 정의가 다 다르다. 말은 같은 말을 쓰지만 내용은 다르다.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방언과 고린도교회가 말하는 방언은 같이 방언이라고 말하지만 의미는 전혀 다르다. 열두 사도(제자)들이 말하는 성령과 바울이 말하는 성령은 같은 성령이라고 해도 의미가 다르다. 제자들은 예수의 사심과 죽으심과 부활의 과정을 보고 그 안에서 나온 인생의 엑기스를 성령, 그 영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철저히 예수의 영이고 예수를 알게 하는 영이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를 보지 못했고 계시 안에서 예수를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자기에게 예수를 알게 한 그 영, 이것을 성령이라고 했다. 결과는 같지만 말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날도 천주교에서 말하는 영성운동과 개신교에서 말하는 영성운동은 교회마다 그 의미가 다르다. 이럴 때 우리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언어를 쓰고 싶어진다. 어떤 경우는 다른 언어를 쓰다 보면 사실은 같은 단어를 써도 되는데 달리 써야 시원할 때가 있어 달리 쓴다. 이런 데서 말의 혼란이 오게 되는 것이다.
옛날에 우리 교회에 관해서 공개 토론을 할 때, 우리 교회에서 쓰는 말들이 무슨 의미로 쓰느냐가 주된 관심이었다. 성육신이라는 말을 쓰는데 보통 교회에서 쓰는 의미와 우리가 쉽게 쓰는 성육신의 의미가 다르다. 보통 교회에서는 예수에게서 일어난 유일회적인 사건으로서 역사상 한번밖에 없었던 사건으로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말하는데, 우리는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심어져서 우리 안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열매로 드러나고 나타나지는 것을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니까 지금까지 그 의미는 성화라는 의미로 기독교에서 써왔는데 왜 굳이 성육신이라는 단어를 쓰느냐? 성화라고 하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그런데 실제는 같지만 그 의미를 쓰는 것은 성화라는 말을 2000동안 써오면서 그 안에 의미들이 첨가 되어 뭔가 거룩하게 되고 변화되어 정말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가 다분히 내포되어 쓰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성육신이라고 할 때는 내가 아무것도 아닌 인생,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지고, 연약함과 궁핍함과 곤고함과 내가 꺾어지고 허물어진 자리에서 나타나지는 하나님 체험들이라는 의미에서 성화라는 용어를 쓰기는 뭔가 많은 설명이 들어가야 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사심과 죽으심과 다시 사심 안에서 내 인생이 포함되고 내 인생이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서 그분에게 썼던 용어를 우리에게도 쓰고 있다. 부활했다는 말도 많이 쓰는데, 사실은 거듭남이라는 말이 있는데 왜 부활이라는 말을 굳이 쓰느냐고 물어왔다. 거기에 대해서도 사실은 다시 태어난다(거듭남) 해도 되고 죽었다 다시 산다 해도 내용은 같은 것이다. 그런데 부활은 예수님에게만 쓰는 말이고 거듭남은 모든 사람에게 쓰는 말로 아는데, 실재는 같은 것이다.
성경에서는 우리처럼 그렇게 구분하여 쓰지 않고, “내가 어찌하든지 부활에 이르려 한다. 그리고 나는 예수의 죽으심을 본받아 나도 죽고 예수의 사심을 본받아 나도 부활에 이르려 한다. 그와 합하여 죽었고 그와 합하여 내가 다시 살았다.”고 했으니까 바울은 자기 인생이 예수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그는 예수에게 썼던 말을 그대로 썼던 것이다. 그가 죽으신 것처럼 나도 죽고 그가 사신 것처럼 나도 산다고 했던 것이다.
오늘날 이런 말들이 혼란이 되고 오해가 되어 시비꺼리가 되니까 이 대목에서 사도행전 2장의 그 경험을 가지고 정말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해야 된다. 굳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할 필요가 없고, 할 수만 있으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쓰고 나누어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남다른 무엇을 갖자면 심오한 말을 해야 되고 어려운 말을 해야 된다. 내가 무엇이 되어서 다른 사람과 차별화되어야 내 존재 가치가 있는 세계에서는 남이 못하는 것을 해야 된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는 그것이 아니고 할 수만 있으면 같은 자리에서 발견되는 것이 장땡이다. 할 수만 있으면 같은 것을 발견해내는 것이 교회생활이다.
교수들도 외국에서 갓 학위를 받아 온 분들은 숙제도 많이 내고 어려운 말도 많이 써서 내가 얼마나 고생하면서 공부를 했는데 너희가 이런 것을 알기나 하느냐는 투로 말하여 갓 온 분들이 좀 어렵다. 그런데 연륜이 지나고 오래될수록 숙제도 적어지고 어려운 말을 전혀 안 쓰고 자기 안에 있는 깊은 경험을 쉬운 말에 녹아내어 쓰는 분들이 계신다. 이런 분들이 경지에 이른 분들이다.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거치기 전에는 서로 못 알아듣는 말을 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6장 7장 넘어가면서 사람들이 너무 어렵다고 했다. 예수님도 그랬을지 모른다. 한 번도 안 썼던 말을 쓰면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하니까 “선생님 말씀이 너무 어렵습니다. 어떻게 선생님의 살과 피를 먹습니까?”하고 사람들이 다 떠나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 앞에 오니까 정말 어려운데 과정을 거쳐서 제자들 안에 다시 소화되어 나타난 그 예수는 누구라도 먹을 수 있는 양식이 되고 누구라도 소화할 수 있는 양식이 된 것이다.
교계에서 이상하다는 소리를 듣는 단체들은 대부분 교주가 이상하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교인들이 좀 이상한 말을 한다. 목사님 말씀에는 하나도 이상한 것이 없는데 교회 신도들이 어려운 말을 하여 사람들이 거기서 걸리기도 한다. 성숙으로 나아가는 이 길 안에서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제자들의 경험처럼 진짜 언어가 달라도 다 알아듣는 이 말을 갖기를 소망하고 그런 연습도 필요하다. 내가 말했을 때 다른 사람이 알아듣는지 봐야 된다. 말하는 것은 나 좋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간증하러 나와서 말하는 것은 알아들으라고 하는 말이지 내 속 시원하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남이 들을 때 알아듣는 말로 간증해야 된다.
궁극적으로는 정말 어떤 사람들이 와도 들을 수 있는 말인 이 언어가 나와서 사도행전 2장이 우리 안에서도 시작되기를 원한다.
모든 사람이 알아듣는 말이 무엇인가? 누구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무엇인가? 사도행전 2장에서는 어째서 이런 말이 가능했는가? 무슨 말을 했기에 히브리말을 쓰는 사람이나 헬라 말을 쓰는 사람이나 라틴 말을 쓰는 사람들이 다 알아들었는가? 이 말이 무슨 말이었는가? 언어학자가 이것을 연구해보았으면 좋겠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방언을 연구 잘하면 세계어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언어학적으로 잘 모르지만 한 가지 경험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 그것은 죽음에서 나온 말이다. 십자가에서 나온 말이다. 그 영에서 나온 말이다.
가장 깊은 죽음에서 나온 말은 누구도 아니라 할 수 없다. 누구도 소화 안 될 것이 없는 말이 나오게 된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셔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가 빌 바를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는 말이 나온다. 어떨 때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인 이 언어가 나오는가? 바울은 어떻게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는 이 소리를 들었는가? 이 말씀을 거꾸로 생각하면 연약한 자리에 있을 때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오는 언어가 가능한 것이다.
사람이 능력이 있으면 능력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버리면 끝나버린다. 그런데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사실은 진한 마음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 나도 돈이 좀 있다면 주고 싶은 사람이 많다. 생기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돈이 있다면 이 사람도 주고 싶고 저 사람도 주고 싶다. 그럴 때 줘버리면 내 마음의 표시가 된다. 그러나 받으면 내 마음이 보이는 것보다 돈이 보이기 쉬워 마음은 돈 때문에 가려질 수 있다. 능력이 있어서 능력으로 무엇을 하고 나면 오히려 마음이 가려질 수 있다. 말이 너무 현란하면 오히려 마음을 보기가 힘들어진다.
나는 이과 출신이라 언어 능력이 떨어져 말을 더듬기도 하고 말이 느리다. 빨리 하면 10분이면 할 말을 길게 1시간을 끌어서 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말을 잘했으면 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한 번 정말 말 잘하는 사람을 봤는데 말이 그림이다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듣고 나서 보니 마음이 만져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 말이 마음보다 못한 이것이 더 낫구나. 말이 좀 모자라는 것이 낫지 말이 마음보다 커버리면 마음이 보이지 않는구나. 그리고 내가 남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도 마음만 못한 것이 당연하다. 정말 어찌할 수 없을 때 깊은 탄식에서 나오는 그 마음이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이 그렇게 알았지 않았을까? 그냥 쓰는 말도 아니고 계시 안에서 자기 경험이 없이 받아쓰기 한 말이 아니다. 바울이 어떻게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을 알았겠는가? 연약함 안에서, 자기 육신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그때 깊은 속에 있는 그 마음이 흘러나간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어찌할 수 없는 자리에서 가장 깊은 속을 우리에게 열어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펼쳐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언어만이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가 아니겠는가!
쉽게 생각하여 제자들이 성령이 감동하여 혀가 꼬여서 나도 모르게 말이 나가서 러시아 말이 나가고 중국말이 나갔다고 생각하면 간단한 것이지만 우리는 그렇게 안 된다. 순복음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도 그렇게 잘 안 된다. 점점 못 알아듣는 말을 한다. 그런데 우리 경험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더 깊은 죽음의 자리로 가서 더 알아듣기 쉬운 말이 가능하다. 내 깊은 속이 보여 지는 것이 점점 쉬워지고 가능해지는구나. 이렇게 알 수가 있다. 이 언어만이 참 언어다.
나의 캐나다 생활 초기 97년에 홍 두표 형님을 만났다. 토론토에서 한 시간 반 떨어진 거리에 사셨는데 숙자누님에게 어떻게 테이프가 전해져서 목사님 말씀을 듣고 너무 좋다고 하는데 그 시원한 목소리가 너무 좋아 한 시간 반을 달려갔다. 두표 형님이 주유소에서 나오셨다. 그때 서로 간증을 하고 다시 토론토에 돌아가서 한 말이 캐나다에서 내가 본 한국사람 중에 제일 잘 생긴 사람을 봤다고 얘기를 했다. 첫 번째는 별 말씀을 하지 않으셨고, 두 번째 찾아갔을 때 얘기를 하는데 전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부터 시작하여 사차원, 외계인, 추리소설과 같은 얘기들을 잔뜩 하셨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흙의 자리니 인생이 생기가 들어와서 어떻게 됐다는 것은 씨가 먹히지 않았다.
두 번째는 거대한 벽을 만난 것처럼 답답한 심정을 가지고 돌아왔다. 저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을까? 이 말씀이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까? 말씀이 들어가면 복이 될 텐데 하는 답답한 심정으로 오면서 문득 고린도후서 10장에 있는 말씀이 생각났다. “하나님 말씀은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견고한 진이라도 파하는 강력함인데 모든 이론을 파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높아지려는 것을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한다.” 이 말씀대로라면, 이것이 참 하나님 말씀이라면 견고한 성이라도 무너질 것이고 어떤 이론이라도 무너질 것인데 형님 속의 지식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다.
하나님 말씀이 어떻게 성취된단 말인가 고민하다가 문득 그 뒤의 말씀이 생각났다. “너희 복종이 온전케 될 때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기 위하여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는 말씀이 내 머리를 탁 때리면서 “너희 복종이 온전케 될 때, 너희 순종이 온전케 될 때, 모든 순종치 않는 것이 견고한 진이 무너지듯이 무너지고 모든 이론이 파해지듯이 파해지는 것이구나.” 문제는 내 순종이 온전케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이지 형님의 진이 얼마나 견고하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때 나는 그것이 알아지면서 내 안에 있던 답답한 벽이 무너지면서 너무 시원했다. 하나님이 내 순종이 온전케 되기를 기다리시는구나. 거꾸로 생각하면 내가 말씀을 얼마나 들었는데 내게 말씀한 그분이 보면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내가 그렇게 벽처럼 느끼는 것처럼 거꾸로 생각하면 나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십 몇 년을 들어도 그렇게 말씀을 들어도 여전히 깨지지 않는 무엇을 가지고 살고 있는 것이 주님 안에서 나를 보면 내가 그 벽을 답답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답답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때 그것이 알아지고 그 뒤로 두표 형님이 토론토로도 내려오시고 참석하셨다. 나만 해도 이야기를 하다보면 좀 아는 것이 있다고 논쟁이 될 소지가 항상 있다. 말하다 보면 논쟁이 되어 얼굴이 벌개져서 돌아가시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다가 두표 형님이 잭슨빌에 가셨다가 아틀란타에 가셔서 이봉균이라는 형제가 산다고 하니까 교회형제를 찾아서 가셨다. 봉균 형님은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토론토에서 형제가 온다고 하니까 너무나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신 것이다. 두표 형님이 오니까 형님이 오시는 것이 하나님이 오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렇게 말했는데 이 말에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서 토론토에서 성경이 어떻고 재림이 어떻고 종말이 어떻고 논쟁했던 것이 다 무효가 돼버리고 그 뒤로 일체 그런 논쟁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진짜 말이구나. 진짜 언어구나. 얼마나 가난했으면 얼마나 자기가 깊이 낮아졌으면 형제가 오는데 하나님을 기다리는 마음이 되며 하나님 얼굴을 보는 것처럼 기쁘게 맞을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 마음 안에 모든 것이 다 녹아져버린 것이다. 내가 뭘 좀 해보려고 성육신이란 이런 것이고 기도란 이런 것이라고 했던 것들은 전부 헛수고였고 죽음에서 나온 언어, 그 안에서 다 알아져버린 것이다. 그 전에는 두표 형님이 사람을 왜 높이고 그러느냐고 얘기를 했는데 나는 또 설명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열심히 설명을 했는데 더 화를 나게 만든 것이다. 그런데 아틀란타에 가서 자기를 보고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목사님에게 뭐라고 한들 뭐가 문제가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 마음이 팍 알아져버리니까 아무 문제가 안 되는 것이다. 나에게도 하나님이라고 한다. 이렇게 돼버린 것이다. 거기서 4차원이고 외계인이고 전생이 다 없어지게 되고 참 하나가 되는 것이다. 바벨탑이 무너지고 참 말을 쓰는 사람이 되게 된 것이다.
우리 복종이 온전케 될 때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심판하기 위해서 예비한 중에 있다. 우리 복종이 온전케 되면 무너지지 않을 것이 없는 그 경험을 나는 그렇게 하게 되었다. 나도 언젠가는 형제의 얼굴을 보는데 하나님 얼굴을 보는 것 같다고 하여 와르르 태산이 무너지게 하는 일이 앞으로 생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진짜 방언이 터져야 교회가 된다. 고린도교회 방언이 터지면 분열이 나타난다. 사도행전 2장에서 제자들이 했던 이 방언은 누구라도 알아듣는 말이다. 모든 사람이 알아듣는 말이다. 연약한 자리에서 속의 깊은 탄식을 전하는 말이다. 그 영의 탄식! 이 하나 되게 하는 말이 우리 안에서 퍼져 나가기를 원한다. 주님을 찬양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