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공화(共和)와 겸성(兼聖)의 원리
「저항과 위대한 영혼(한얼): 전병훈, 나철, 이기, 서일」
이규성(李圭成, 1952-) in 한국현대철학사론: 세계 상실과 자유의 이념,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2, pp 181- (P.975)
* 전병훈이 대종교 개종자인 나철보다 먼저 다루어야 하는 이유는 전병훈이 천부경에대한 주해 「동한 신성 단군 천부경 주해(東韓 神聖 檀君 天符經 註解)」가 있기 때문이다. 대종교가 단군신화,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誥) 등을 앞선 경전으로 삼았기에, 그 종교가 이미 있었고 그것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대종교(大倧敎) 종(倧)를 썼다고 한다.
동학이 서학에 대결 의식이었는데, 나중에는 서학의 분석적 입장에 포획되어 가는 듯이 보인다면, 대종교는 민족의 얼을 탐색하다가, 고조선의 선가(仙家)의 내용을 수용하다가 보면 연원에서 중국의 도가(道家)와 연계될 수밖에 없으며, 게다가 유불도의 관계 속에 있을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대종교는 환(桓), 단(檀) 한(韓)의 맥을 이어 하늘과 밝음 사상을 잇는다고 한다. 우리는 인민의 자의식 면에서, 다른 하나의 길로는 한글을 통해 인민과 만나며 자연 발생적 방식을 탐구 해 볼 수 있을 것이라 본다.
1800년 후반기에 인민의 자의식이 발동하는 시기에 먼저 나온 동학은 민중/평민(심층)에서 나온 변혁이라면, 한얼 사상은 지식인(표면)에서 변화의 경향을 느낀 쪽이라 할 수 있다. 한얼 사상에서 민중의 힘을 끌어올리는 한계가 있어서, 기독교가 그 자리를 파고들었다고 할 수 있다. 대종교와 초기유입기독교 사이에 친연성이 있는 것은 단지 하늘, 하나 등 만이 아니라 민중의 자각이 일어나는 시기에 다른 통로를 마련해보고자 하는 길 위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인민은 “니나”이라고 백기완(白基玩, 1932-)이 버선발 이야기(오마이북, 2019)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용어는 황해도에 한정되어 있는지... 검토가 필요하다.
(52NME)
제1부 자유와 현실 39
1장│표현과 개벽: 최제우, 최시형, 이돈화. 김기전 41
2장│저항과 위대한 영혼(한얼): 전병훈, 나철, 이기, 서일 181
1. 공화(共和)와 겸성(兼聖)의 원리 181-197.
2. 연금술적 위생학(衛生學) 197-
3. 나철(羅喆)과 이기(李沂)의 벽파(劈破)
4. 민권의 보편적 원리[通義]
5. 성리(性理)와 의지[志氣]
6. 하나의 무[一無]와 위대한 영혼(한얼)
7. 본연의 성(性)과 씨알 인성론
8. 고요한 무와 움직이는 유[靜無動有]
9. 아(我)와 대동(大同)
*****
1. 공화(共和)와 겸성(兼聖)의 원리 181-197
‘약동불식’하는 생명을 역사 안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동학은 아래로부터 일어나는 화해의 삶을 실현하고자 했다. 초기 동학의 사회적 실천은 개개인의 실천이 전체에 영향을 주어 전체를 변화시키는 종교적 성격을 갖는다. 그것은 “성인이 나왔다”는 설레는 소식이 전파됨으로써 사람들의 심정을 흔들어 참여하게 하는 일종의 정보 소통적 유대를 만들어 냈다. 대표적인 사례로 황해도 머슴살이 하던 백범 김구(白凡 金九 1876-1949)는 그 소식을 듣고 인근의 동학 단체를 찾아가 평등사상에 감동하여 연비(連臂, 포교에 의해 교도가 된 사람)가 되었다. (181, 시작문단 앞부분)
그것은[동학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서민[민중]들의 자연발생적인 ‘공화(共和: 조화의 공유)’의 정신을 표출한 것이다. 공화정신은 20세기 문턱에서 평민 철학의 일반적 관심사였다. (182)
동학(東學)을 따랐던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 1871-1909)도 도래하는 후천 시대는 ‘공화시대(共和時代)’임을 선언했다. 공화는 생기에 의해 창조되는 ‘조화정부(造化政府)’를 통해 실현된다. ..“이전 선천(先天) 시대에는 서로 투쟁하는 상극의 법칙[相剋之理]이 인간과 사물을 맡았으므로 모든 인사가 도의에 어그러져 원한이 맺히고 쌓여 삼계(三界)에 넘치매 마침내 살기(殺氣)가 터져나와 세상에 모든 참혹한 재앙을 일으키나니, 그러므로 세계질서인 우주질서[天地度數]를 뜯어고치고 정신의 길(神道)을 바로잡아 만고의 원한[寃]을 풀고, 상생(相生)의 도로써 이상의 경지[仙境]를 열고 새로이 창조된 정부[造化政府]를 세우겠다.” (182)
한편 제국주의 압박이 더욱 조여오자 중앙정부의 요직에 있거나 과거 시험을 통해 진출했던 지식인들 중 대종교(大倧敎)의 창시자들은 주체적 역사의식을 가지고 민족의 위기를 돌파하고자 했다. .. 그리고 정치에 대해서는 필부필부(匹夫匹婦)도 논해야 한다는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1482-1520) 이래 유가적 전통은 제국주의 시대를 만나 민족해방과 개체의 자주성에 대한 자각으로 전환되어갔다. .. 이러한 판단에서 대종교인들은 ‘한국독립운동 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의 첫 장을 열게 된다. (182-183)
그러나 독립운동 사상사는 한국현대사에서 봉쇄되어 왜곡되고, 교육 기구에서 배제되어 대종교인들의 독립과 저항의 철학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반대로 미국독립정신과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정신은 매력적인 것으로 인식되어 그들의 철학과 함께 교육되었다. (183)
이러한 상황과 대종교인들의 독립저항의 철학을 대비해 볼 때, .. [미제로부터] 청부받은 철학은 반성적으로 음미되지 않은 선호하는 대상을 중심으로 맴도는 편집증을 갖는 것이었다. 현대화에 집착하는 서양 중심적 사고, 과거를 미화하는 전통 중심적 사고는 자기 상실에서 오는 무반성적 정신의 일면을 자기비하나 자기과시의 측면에서 보여줄 뿐이었다. .. 정신이 자기 독립성을 상실하는 것은 노예-병리적 심리로 이어지고, 사상의 자유를 상실하는 사유[사고]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183)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지식인들은 대종교(大倧敎)와 직간접으로 연관이 있다. .. 대종교인으로 실심실학(實心實學)을 주장했던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1859-1925),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1893-1950)는 왕양명[왕수인(王守仁, 1472년-1528년)의 심학(心學)을 시대적 현실과 역동적 관여를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재해석하고자 했다.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 1869-1940)은 민권 계몽운동을 하다 상해로 망명하여 3.1운동 정신을 민주 공화주의와 대종교의 민족정신을 계승하고, 1919년 임시정부 초대 의장이 되었다. 역시 대종교인이었고 제국주의를 흘겨본다는 뜻의 예관(睨觀)이라는 호를 가진 신규식(申圭植, 1880-1922)은 손문(孫文, 1866-1925)의 신해혁명(1911)에 참가했고, 대종교의 이념에서 민권(民權)에 기초한 급진 민주주의적 사상을 이끌어내었다. 이와 유사한 노선에 있었던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억압적 제도와 관념체계에 대한 자아의 독립성과 투쟁성을 근간으로 급진 무정부주의를 제안했다. (184)
주시경(周時經, 1876-1914)은 대종교의 정신에 따라 한글을 하늘이 명한 것으로 보고 문자[글 經]의 민족적 본유성을 강조했다. 그는 소리인 언어와 글인 문자를 동일한 의사소통의 도구로 보면서도, ‘문자를 언어를 담는 기관(機關)’으로 보아 문자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강조했다. .. 민족의 기관인 언어를 갈고 닦아 제국주의의 언어 농락에 저항했다. [/]대종교와 직접적 연관은 없지만 민족의 자주성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있었던 박종홍(朴鍾鴻 1903-1976)은 헤겔(Hegel, 1770-1831)의 창조적 부정을 생의 본질로 이해하고, 성실성[誠, 敬]을 부정의 주체적 조건으로 갖는 이학적(理學的) 주체성을 정치ㆍ경제적 근대화의 실천적 토대로 삼고자 했다. (184-185)
이러한 한국 현대철학의 흐름은 여러 편차가 있음에도 하나의 일관된 관심하에서 움직이고 있다. 그 흐름은 외세에 의한 나라의 강탈이나 강권정치가 주는 세계상실의 문제와 자아상실의 문제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185)
... 변형에 대한 관심은 진실하고 분열없는 통일적 생(生)에 대한 동경에 이끌려갔다. 역사에 저항하는 여러 방식(음주, 자결, 혁명, 자기수양 등)이 있었지만 전통적 교양을 가진 사람들은 인간 자신에 대한 심성론적 이해를 통해 역사에 접근하는 방법을 따랐다.
이러한 심성론적 자기 인식은 심층에서 우주적 생명 원리와 접속된다. .. 그 하나의 본질적 원리는 한울이나 기(氣, 동학), 심체(心體, 정인보), 한얼 혹은 신(神, 대종교), 생명 혹은 씨알(함석헌) 등 다양한 이름으로 지시[지칭]되었다. (185-186)
그러나 대종교의 문헌은 상징적 부호와 유사한 언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접근이 어렵다. 그것은 단군신화,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誥)와 같은 고대 비서(祕書)에 있는 종교적 사상과 연관되어 있다. (186)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 최초로 동서양 철학을 단군 사상을 기조로 하여 정신, 심리, 도덕, 정치분야에서 연결시키고자 노력한 서우(曙宇) 전병훈(全秉薰, 1857-1927)의 정신철학통편(精神哲學通編)(1919)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이 단군철학의 기본 경전으로 믿는 천부경을 주해해서 「동한 신성 단군 천부경 주해(東韓 神聖 檀君 天符經 註解)」라는 제목으로 정신철학통편(精神哲學通編) 1권에 실었다. 이에 대한 이해는 나철(羅喆, 1863-1916)과 서일(徐一, 1881-1921) 등의 대종교 철학을 해명하는데 예비적 과정이된다. (187)
천부경에 대한 전병훈의 주해는 최초의 주해이자 철학적 해석이다. 그는 박은식(朴殷植, 1859-1925)과 함께 이항로(華西 李恒老, 1792-1868) 계열인 박문일((雲菴 朴文一, 1822-1894)의 문하생이었다. .. 그의 사상은 대동론자 강유위(康有爲, 1858-1927), 천연론(天演論)의 저자 엄복 등과 교류하는 가운데 형성되었다. (187)
그에 의하면 천도(天道)와 인도(人道)를 포괄하는 ‘정신철학(精神哲學)’은 대종교에 의해 단군 시대부터 전승되었다고 인정되어온, 한국 도교[선도(仙道)] 경전 천부경에 비밀스런 의미가 담겨 있었다. 81자로 이루어진 그 글은 신라시대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857-908년 이후)이 옛 비석에서 신지가 기록한 문자[神誌篆 신지전]를 보고 해석한 후 백산(白山, 묘향산)에 삼가 새겨두었다고 전해진 이래, 한국 고유의 도학(道學) 경전의 하나로 간주되어왔다. (187-188)
독립운동가 이시영(李始榮, 1868-1953)을 포함해 오동진(吳東振, 1889-1944), 홍범도(洪範圖, 1868-1943), 여운형(呂運亨, 1886-1947) 등이 모두 「천부경찬(天符經贊)을 남겼을 정도였다. (188)
전병훈은 유학자 윤효정(尹孝定, 1858-1939)으로부터 천부경 해석을 부탁받고(1918) 이를 정신 수련과 사회변형을 종합하는 최상의 철학으로 해석하여 자신의 근본 종지로 삼고, 정신철학통편(精神哲學通編 1920) 제1권 첫머리에 싣는다.
박은식(朴殷植, 1859-1925)은 단군 고조선, 고구려, 발해로 이어지는 역사관에 따라 대종교의 단군사상은 선학(仙學)과 함께 발전했으며, 고구려 동명성왕(東明聖王)이 신봉했고 연개소문(淵蓋蘇文) 등으로 전승되었다고 믿었다. 전병훈은 자신이 이러한 사상의 계보를 계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188-189)
전병훈의 천부경 해석은 ... 그에 의하면 그것은 스스로의 자각적 경험에 의거한 것이다. 이 길은 정치적으로는 모든 차별적 경계가 무너진 평등한 대동을 지향하고, 심리적으로는 우주의 본원인 ‘허무(虛無)’로부터 나오는 ‘자유로운 창조적 기운[신기(神氣)]’을 ‘심적 본성[성(性), 일점영명(一點靈明)]으로 자각하는 것이다. (189) )
이러한 관념은 모택동(毛泽东, 1893-1976)이 주장한 궁극적 평등의 이상에도 나타나는 강유위(康有爲, 1858-1927), 양계초(梁啓超, 1873-1929)의 대동론에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강유위 등의 변법사상의 영향도 보이지만, 중요한 것은 전병훈이 체용합일의 정신을 그가 ‘정신철학(精神哲學)’이라고 부른 단군 이래의 선도(仙道)를 통해 보여주고 자 한 것이다. (189) [전병훈은 중국의 도가와 다른 고조선 이래로 (동방의) 선도(仙道)가 있었다고 보는 듯하다.]
“... 세상에서는 음부경(陰符經, 선도의 비경(祕經)으로, 주자는 비평 주석서인 음부경고이(陰符經考異)를 썼다)을 황제(黃帝, 문명 제도를 창시한 전설적 군주)가 지은 경전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것을 깊이 믿지 못하겠다(朱子도 그렇게 비평한 적이 있다). 오직 이 천부경만이 천도와 인도를 포괄하고 내외를 겸하는 성스러움[兼聖, 겸성]의 원리를 다했다. 확실히 우리 단군 성조의 신성을 보존[存神, 존신]하는 진전(眞傳)이라는 것에 의심이 없다...”(世以陰符爲黃帝經. 然(朱子有批評)余則不敢深信 惟此天符則包括天人 道盡兼聖確是我檀君聖祖存神之眞傳) (190)
겸성(兼聖)은 천부경의 가장 중요한 원리로 장자 「천하편」의 내성외왕(內聖外王)의 정신과 유사하다. .. 전병훈이 수련한 광동(廣東)의 나부산(羅浮山) 충허관(沖虛觀)은 전진교(全眞敎)의 계승자로 알려진 금나라 사람[장춘진인(長春眞人)] 구처기(丘處機, 1148-1227)의 도맥을 잇는 사원이다. 전병훈이 배웠다는 충허관의 도사 고공섬(古空蟾)은 전진교 용문파의 법맥을 이은 사람이었다. (190)
구처기는 생명 존중과 유가의 인의(仁義) 정신으로 칭기즈 칸(成吉思汗 성길사한: 1162-1227)을 설득하여 정복전쟁을 끝내고 귀향하게 했다. 선도(仙道)의 삼교합일 정신에는 유가적 윤리ㆍ정치적 참여 활동이 중요한 요소로 포함되어 있었다. 선도가 ‘성(聖)을 겸한다는 것’[겸성(兼聖)]은 내외를 전체적으로 실현한다는 유가적 경향을 선학(仙學) 안으로 수용한 것이다. (190-191)
그에 의하면 천부경은 ...‘생성하는 신묘한 우주적 본성[神性(신성)]’을 자각하여 “선인을 이루고 성인을 증득[成仙證聖성선증성]하며, 세상을 경륜하여 사물을 주재하는 최상의 교훈[成仙證聖 經世宰物之至敎(성선증성 경세재물지지교)]이다.” 그것은 ‘겸성으로 궁극의 지혜에 이르는 학문의 원리[兼聖極哲之學理(겸성극철지학리)]’이다. “지극한 창조적 자유정신[至神지신]은 내외를 완성하는 성스러움을 겸한다[至神兼聖(지신겸성)].” ‘동한(東韓)의 단군 천부경’은 ‘겸성철리의 극치[兼聖哲理之極致(겸성철리지극치)]’ ‘겸성의 최고원리[兼聖之至理(겸성지지리)]이다. “단조(壇祖)는 본래 하늘이 내린 겸성[天降之兼聖]” 단군은“통일된 민주세계[一統民主世界(일통민주세계)]의 기초를 연” 선성(仙聖)이자 신인(神人)이다. (191) [강조는 마실이 한 것이다]
... 천부경의 서두인 “하나[一]는 시작이 없는 상태에서 시작한다[一始無始]”에서 하나[一]는 영원히 본체로서 유지되는 ‘무’의 능동적 창조력을 의미한다. (
“천지는 허무 가운데에서 창조된 존재이다. 천지 이전에는 혼돈의 하나의 기(氣)일 뿐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비어있어 조짐이 없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시작이 없다고 한다. 시작이 없는 것은 무극(無極)이다. 무극이고서 태극(太極)이다. 태극이 생동하여 양(陽)의 기운을 낳고, 고요하여 음(陰)의 기운을 낳아 천지가 비로소 성립된다(子丑의 때이다). 그러므로 하나[一]는 시작이 없는 상태에서 시작한다[一始於無始]고 했다. 하나는 태그의 하나[太極之一]이며, 근원적 신[元神]의 생동하는 능력[元神之動能力]이 그것이다.
天地從虛無中生有. 天地之先 .只混沌一氣. 沖漠無朕. 故曰無始也. 無始則無極也. 無極而太極.
太極動而生陽. 靜而生陰. 天地始立(子丑之會). 故曰. 一始於無始也. 一者太極之一. 元神動能力. 是也.
이러한 천부경의 영겁회귀와 그에 대한 원융한 깨달음에 대해 배달 민족주의자이자 대종교인이었던 이시영(李始榮, 1868-1953)은 감시만어(感時漫語)(1934)에서 다음과 같이 다른 주석가의 언급을 인용했다.
“최근에 천부경(天符經)을 서문에 주석을 달고 이를 해석한 사람이 있는데 말하기를, 천부경은 처음에 “하나”라는 이치(理致)의 극치(極致)를 첫머리에 서술하고 중간에 가서는 만사만물(萬事萬物)의 설명으로 확산하였다가 말미에 가서는 다시 “하나”의 이치로 통합하였다. 우주의 전체를 빠짐없이 여기에 기재하였다. 즉 삼라만상과 우주의 은비(隱祕, 보이지 않는 비결)를 성주괴공(成住壞空, 삼계는 형성, 머뭄, 붕괴, 허공의 단계로 생멸ㆍ순환한다는 불교의 영겁회귀설)하고, 조겁변환(造劫變幻, 시간을 창조하고 유형의 사물로 전변함)과 인생 본연의 성명원리(性命原理)를, 그리고 도문(道門)의 비장(秘藏)과 원각(圓覺, 원융한 깨달음)의 묘체(妙諦, 훌륭한 진리)에 이르기까지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 할 것이라고 하였다. ” (193) [하나에서 하나로 돌아가는 사고는, 천체 운동의 원이라는 관찰의 결과로 나온 것이리라. 이런 사고가 인간사유의 근원이라고 보는 것은 데카르트에 이르기까지 운동량의 보존법칙 또는 만물총량불변의 사고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사고는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동시에하고 있다는 갈릴레이 이후에도 뉴톤에까지 이어진다. 다른 사유는 에너지 보존법칙에서 엔트로피라는 생각을 하는 경우에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게 될 것이다. (52NMD)]
이시영의 사대주의와 재화(災禍)로 인해 문화와 서적이 산일된 것을 ‘통한(痛恨)’으로 여기고, 천부경 전문을 게재했다. 그의 간접적 논평은 천부경이 천도(우주론)와 인도(인성론적 자각)를 담고 있음을 간명하에 보여준다. ... 이러한 영겁회귀의 주체를 대종교는 ‘위대한 영혼 대도[한얼(大道)]’, ‘신(神)’, ‘하느님’, ‘한님’으로 부르고, 그 속성을 무한성, 창조성, 주재성, 광명성, 소통성으로 보았다. ‘하나’는 광대하고 광명한 근원적 일자이므로, 위대한과 밝은(ᄇᆞᆰ)이라는 뜻을 가진 몽고어 칸을 음역한 한(韓)으로 변용되었다. ‘한’은 한글, 한국 등 무수한 용어들에 남아있다.
한의 정신은 만주 명동하교에서 윤동주(尹東柱, 1917-1945)와 문익환(文益煥, 1918-1994)이 접했던 한족적(韓族的) 기독교의 근본정신으로 전승되었다.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이동녕(李東寧, 1869-1940)은 당시 혁신 민족주의자들의 모임 장소이기도 했던 서울 상동교회의 청년회를 다니다가 대종교에 입교했다. 초창기 한국 개신교는 미국 자유주의 철학의 전도체이기도 했지만, 자립교회들은 대종교의 자주 교육 운동의 영향으로 민족 자주성과 평등한 연대성을 성서의 정신과 연결시킬 수 있었다. 이 경위를 함석헌(咸錫憲 1901-1989)은 잘 알고 있었다. (194)
“‘하나님’은 하늘과 관계있는 말이다. 하늘은 한울인지, 하날인지 그 분명한 것은 알 수 없느나, 아무튼 나라의 이름, 사람 이름의 ‘한’과 하나인 것이리라. ‘한’ 혹은 ‘칸’인데, 수의 하나를 표하는 동시에 또 크다는 뜻이다. ‘한’과 ‘큰’이 한 말일 것이다. 한은 한자로 한(韓), 간(干), 한(汗), 환(桓)으로 썼으나 음을 표현했을 뿐이다. 이 한 혹은 ᄒᆞᆫ이 우리 정신 생활의 등뼈다. 우리 사람은 한 사람이요, 우리나라는 한나라요, 우리 문화는 한문화다. 그리고 그것을 인격화하여 대표하는 것이 한님 곧 하느님, 환인이다. 태백, 불칸(불함)은 산으로 이것을 표시한 것이다. 옛날의 종교는 산과 깊은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단군이 백두산에 내렸다는 것은 이것이요, 우리나라 곳곳에 백산, 태백산이 있는 것은 다 이 신앙의 중심이 되었던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한’을 하늘에서 표시하면 해다. 그러므로 태양신 섬김과 하나다. ‘밝’ 혹은 ‘박’ 사상은 그리해서 나온 것일 것이다. 후대에 유교, 도교, 불교가 들어오면 이 하느님은 제(帝), 상제(上帝), 제석(帝釋)으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고, 기독교가 들어올 때에는 그 유일신을 번역하는데 이것을 그대로 써서 ‘하느님’으로 부르게 됐다.” (194)
주자학적 교양을 가진 전병훈이 단군의 ‘정신철학’을 형이상학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던 데에 비해, 당시 대종교인들은 태극이라는 창조적 생산력을 발휘하는 하느님을 초월적 인격신으로 숭앙하는 종교적 자세를 갖고 있었다. 19세기말 개신교 선교사들[1886년에 입국한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와 1885년에 입국한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은 ‘하나님(Hananim)’은 기독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한국인들의 신앙 대상이었으며, 그것이 기독교의 신과 의미가 같다고 보았다. 함석헌도 이 점을 의식했다. 그는 대종교의 나철(羅喆, 1863-1916)의 자결을 기독교의 영향으로 추측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대종교의 하나님 종교가 회개가 없다는 점에서 기독교와 차이가 있다고 보았다. (195) [나철이 서양 철학사를 읽었을까? 함석헌이야 읽었겠지만. 자살이 기독교에서 부정되는데, 자결이란 어디서 왔을까? - 동양의 명예로운 자살보다 신선이 되어 하늘로 갔다고들 한다.]
함석헌도 대종교적 기독교에 가까운 유영모(柳永模, 1890-1981)를 통해 자기수양의 일면을 계승하였다. 대종교는 신체적 생체 에너지 흐름을 조절하는 수련[련단(煉丹)]을 통해 신인합일의 선성(仙聖)에 이르는 무극대로를 체험하는 것을 중시했다. (195)
인체는 ‘일기(一氣)’의 세 가지 변양태로 구성된다. 전병훈에 의하면, “정, 기, 신이 응취하여 인간 신체를 형성한다[精氣神凝聚以成人軀(정기신응취이성인구)].” .. “인간의 자유는 신을 양육하여 진성을 성취하는 것이다[人之自由莫如養神成眞者(인지자유막여양신성진자)].” .
이 학문[전병훈의 정신철학]은 인간에 대한 위생학(衛生學)적 이해와 우주에 대한 허무론적 이해를 인간의 ‘기질변화(氣質變化)’로 연결시킨다. 신체의 생명활동과 마음을 포함한 것이 정신(精神)이라면, 정신은 자신의 의지[意]를 통해 자신의 구조를 변형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의지는 명(命)에 해당하는 생체 에너지[精]의 흐름을 변형하여 우주와의 소통 능력[性]인 신[神]을 회복하게 한다. 이러한 노력을 선도(仙道)에서 ‘성명쌍수(性命雙修)’라 한다. (197)
(9:11, 52NME)
****************시대 순
857 최치원(崔致遠, 857-908년 이후) 신라 말기의 문신, 유학자, 문장가. 육두품출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 해운(海雲), 해부(海夫)이며, 시호는 문창(文昌)이다. 868년 당나라로 건너가 과거에 급제한 후 당나라의 관료로 생활하였다.
1482 조광조(趙光祖, 1482-1520) 호는 정암(靜庵), 조선의 문신, 사상가, 교육자, 성리학자, 정치가.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1519년 반정공신들의 사주를 받은 궁인들에 의해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자가 나타나게 함으로써 역모로 몰려 전라남도 화순으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된다. / (연산군 때의 무오·갑자사화로 김종직(金宗直) 일파의 신진 학자들은 거의 몰살당하여 유학은 쇠퇴이후) 기묘사화(己卯士禍)는 1519년(중종 14) 음력 11월에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김전(金詮), 중종(中宗) 등이 조광조(趙光祖), 김식 등 신진사림의 핵심인물들을 몰아내어 죽이거나 혹은 귀양보낸 사건이다.
1792 이항로(李恒老, 1792-1868) 조선 고종 때의 유학자, 자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 주리론(主理論)과 이원론(二元論)을 주장함. 그의 문하에서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주장하는 창의호국(倡義護國)의 중심인물이 많이 나옴. 저서에 화서집(華西集) 등이 있음. 《화동역사 합편강목》 60권과 《벽계아언》 12권, 《주자대전 잡의집보》 등이 있다. 최익현에게 유교를 가르쳤다.
1822 박문일(朴文一, 1822-1894)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대수(大殊), 호는 운암(雲菴)·운재(雲齋)·징암(懲菴). 평안도 태천(泰川)출신 시호 문헌(文憲) 『운암집(雲菴集)』 12책
1848 이기(李沂, 1848-1909) 조선 말의 실학 사상가, 계몽운동가. 전북 김제 출생. 본관은 고성, 자는 백증(伯曾), 호는 해학(海鶴)·질재(質齋)·재곡(梓谷)이다. 1906년 대한자강회, 자신회를 조직하였고, 1909년에는 나철, 정훈모, 오기호 등과 함께 서울에서 단군교(檀君敎)를 세워 대종교의 기초가 되었다.
1857 전병훈(全秉薰, 1857-1927) 구한말의 사상가. 호는 성암(成庵), 본관은 정선. 평안남도 출생했다. 조선 철종 9년(1857)에 태어나, 고종 29년(1892)에 의금부 도사, 대한제국 광무 3년(1899)에 중추원 의관을 지냈으며, 순종이 즉위하던 해(1907)에 관직을 버리고 중국 광동으로 건너가 정신연구에 몰두하였다. 자는 서우(曙宇),호는 성암(成菴)외에도 취당(醉堂)이 있으며 도호는 현빈도인(玄牝道人)이다. 정신철학통편(精神哲學通編 1920)
1858 윤효정(尹孝定, 1858-1939) 구한말의 문신, 학자, 애국지사. 경기도 양주 출신,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아호는 운정(雲庭)이다. 《한말 비사》
1859 박은식(朴殷植, 1859-1925) 백암(白巖) 일제 강점기의 학자, 언론인, 독립운동가, 교육자, 애국계몽운동가, 정치가. 자(字)는 성칠(聖七), 호는 겸곡(謙谷), 백암(白岩·白巖·白菴), 태백광노(太白狂奴), 무치생(無恥生)이며 본관은 밀양(密陽).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 한국통사(韓國痛史)(1915),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1920), 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 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 명림답부전(明臨答夫傳), 천개소문전(泉蓋蘇文傳), 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
186k? 계연수(桂延壽, ? ~ 1920년)는 한국의 종교인이며 사학자로 알려져 있으나 실존 인물인지는 의심되고 있다. 자는 인경(仁卿), 호는 운초(雲樵), 세거선천(世居宣川), 일시당(一始堂)이라고 한다. 평안북도 선천군 출신으로 이기의 문인(門人)이었으며 태백교도였다고 한다
1863 홍암(弘巖) 나철(羅喆, 1863-1916) 조선 말기의 문신, 대종교의 창시자.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로, 본명은 나두영(羅斗永), 개명은 나인영(羅寅永)이며 아호는 홍암(弘巖)이다.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1909년 1월 15일 한성부에서 대종교를 창시했다. 오기호(吳基鎬)등 동지 10명과 함께 서울 재동(齋洞)에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셔 놓고 <단군교 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공포한 것이 단군교, 즉 대종교의 시작이다.
1868 이시영(李始榮, 1868-1953) 성재(省齋)조선, 대한제국의 관료,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인이다. 본관은 경주로, 자(字)는 성흡(城翕), 성옹(聖翁)[1], 호는 성재(省齋)·시림산인(始林山人), 본명은 성흡(聖翕)이다. 총리대신을 지낸 김홍집의 사위이다. 유교(성리학) → 대종교 → 개신교(감리교)
1868 홍범도(洪範圖, 1868-1943) 평북 자성 출생, 조선 말 의병장, 일제시 독립운동가, 군인이다. 사냥꾼으로 활동하여 사격술에 능하였으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에는 만주에서 독립군을 이끌었다. 1927년에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였으나, 1937년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강제 이주, 그곳에서 집단 농장을 운영
1869 이동녕(李東寧, 1869-1940) 석오(石吾) 대한제국의 계몽운동가, 언론인,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연안, 자는 봉소(鳳所), 호는 석오(石吾)·암산(巖山).
1871 강일순(姜一淳, 1871-1909) 증산(甑山)교의 교조이다. 본관은 진주(晉州), 호는 증산(甑山), 자는 사옥(士玉)이다. 증산계열 종단에서는 그를 상제(上帝, 증산상제, 옥황상제, 구천상제 등), (증산)천사(天師), 선생님 등으로 부른다.
1876 백범 김구(白凡 金九 1876-1949)
1876 주시경(周時經, 1876-1914) 황해도 봉산. 현대 개화기의 국어학자. 우리말과 한글의 전문적 이론 연구와 후진 양성으로 한글의 대중화와 근대화에 개척자 역할을 하였다.
1880 신채호(申采浩, 1880-1936) 단재(丹齋),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적 아나키스트, 사학자이다. 본관은 고령, 호는 단재(丹齋)·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이다
1880 예관(睨觀) 신규식(申圭植, 1880-1922) 대한제국의 군인이자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용우(龍雨)의 아들이며 본관은 고령(高靈). 별명은 신성(申誠)·신목성(申木聖), 호는 예관(睨觀)·여서(余胥)·일민(一民)·청구(靑丘)·한인(恨人). 충청북도 청원 출신
1881 서일(徐一, 1881-1921) 조선의 독립운동가. 본명은 서기학(徐夔學)이며, 아호는 백포(白圃)이다. 본관은 이천. 그는 1911년 경에 창시자 나철을 만나 감화를 받은 뒤 이듬해 대종교에 입교했다. / 존엄사: 1921년에는 독립군 조직을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가, 그해 6월 28일 자유시 참변(일명 흑하사변)이 일어나고 많은 동지들이 사망하자 이에 대해 책임을 지고 두 달후 스스로 호흡을 멈추는 방법으로 자결했다.
1886 여운형(呂運亨, 1886-1947)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겸 저술가. 아호를 몽양(夢陽). 1945년 8월에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9월부터 1946년 2월까지 조선인민공화국의 부주석을 지내기도 했다.
1889 오동진(吳東振, 1889-1944) 평북 의주 출생, 한국의 독립운동가.. 아호는 송암(松菴). 1926년에는 양기탁과 천도교 혁신파, 소련 지역의 독립 운동가들이 규합, 고려혁명당을 조직하였다. 일제 경찰의 통계에 따르면, 1927년까지 오동진은 연인원 1만명이 넘는 부하를 이끌었고 일제 관공서를 백여차례 습격하여 살상한 사람이 900여명에 달한다. 이런 전과로 인해 그는 김좌진, 김동삼과 3대 맹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1890 유영모(柳永模, 1890-1981) 다석(多夕) 대한제국기 양평학교 교사, 오산학교 교사, 오산학교 교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종교인. 1955년부터 『다석일지(多夕日誌)』를 쓰기 시작하여 종교적 묵상을 만년까지 기록
1892 양성 윤일순(暘星 尹溢淳 1892-1992)이 만든 선불가진수어록(仙佛家眞修語錄)
1893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1893-1950) 일제 강점기의 한학자·역사학자·작가. 자는 경업(經業), 호는 위당(爲堂), 담원(薝園), 미소산인(薇蘇山人)이다.
1901 씨알 함석헌(咸錫憲 1901-1989), 동경사범 출신, 박정희 유신에 저항한 재야 학자.
1903 박종홍(朴鍾鴻 1903-1976) 호(號)는 열암(冽巖) 서울대교수. 1903년 7월 1일 평안남도 평양. 서울대학교대학원, 박정희 유신에 협력.
[1903 무애(无涯) 양주동(梁柱東, 1903-1977) 대한민국의 시인, 문학평론가, 국문학·영문학자, 번역문학가, 수필가이다. 본관은 남해(南海)이며 호는 무애(无涯)로,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여요전주》, 1947. 《국학연구논고》, 1962.]
1917 윤동주(尹東柱, 1917-1945) 한국의 독립운동가, 시인, 작가이다. 본관은 파평(坡平). 중국 만저우 지방 지린 성 연변 용정에서 출생하여 명동학교에서 수학하였고, 숭실중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18 문익환(文益煥, 1918-1994)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 통일운동가, 사회운동가, 참여시인. 본관은 남평(南平)이고 호는 '늦봄'(晩春)이다. 문익환 목사는 통일이 되지 않으면 민주화가 되지 않는다는 진보적 기독교인들의 신념에 따라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에 기독교 사상에 근거한 사회운동을 한 정도로만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성서학자로도 활동하였다.
* 연구자
1930 유병덕(柳炳德, 1930-??) (퇴직) 원광대학교교수, 동양철학.
1937 신용하((愼鏞廈, 1937-) 제주 서울대 사회학과 신용하 대학교수 독도학회 회장 수상2007 제3회 독립기념관 학술상 외 4건..
1937 이현희(李炫熙, 1937-2010) 서울 출생, 호 죽당(竹堂) 성신여대 교수, 고려대학교 사학과, 1982년 동국대에서 박사. 성신여대사학과명예교수, 성신여대인문과학대학장, 국사편찬위원,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1949 김낙필(金洛必, 1949) 원광대 학부, 서울대박사, 원광대학 명예교수. 한국도가철학 「권극중의 내단사상(1990, 이남영)」
1961 김도형(金度亨, 1961) 국민대학 박사, 독립기념관의 수석연구원, 일제의 농업기술기구와 식민지 농업지배(1995, 조동걸)
1961 이근철(李根喆 1961-) 대전대학교, 한국철학, 경기대교수, 박사: “천부경에 대한 철학적 연구(2010 송인창)”
1961 임채우(林采佑, 1961-) 연세대, 「왕필 易 철학 연구 -以簡御繁 사상을 중심으로-」(1996, 이강수)
1963 조남호(趙南浩, 1963-) 서울대, 한국철학,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대학별) “나흠순의 철학과 조선학자들의 논변”(1999, 이남영)
1966 윤창대(尹彰大, 1966-) 원광대학교 석사. 한국 유교 및 도교 철학 전공. 한국도교문화학회. 전병훈의 정신철학통편 번역연구(석사, 2002, 김낙필)
* 중국인
주희(朱熹, 1130-1200) 중국 남송의 유학자로, 주자(朱子), 주부자(朱夫子). 자(字)는 원회(元晦), 중회(仲晦)이다. 호는 회암(晦庵), 회옹(晦翁), 운곡노인(雲谷老人), 창주병수(滄洲病叟), 둔옹(遯翁)등 여러가지가 있다. 주돈이, 정호, 정이 등의 유학 사상을 이어받았다. 그는 유학을 집대성하였으며 오경의 참뜻을 밝히고 성리학(주자학)을 창시하여 완성시켰다.
구처기(丘處機, 1148-1227) 산둥성 서하(棲霞) 출신, 도교 종파인 전진교의 도사. 본명은 구처기(丘處機)이며, 자는 통밀(通密). 장춘자(長春子)는 도호는 장춘진인(長春眞人).
칭기즈 칸(成吉思汗 성길사한: 1162-1227) 몽골 제국의 건국자, 초대 카안. 원래 이름은 보르지긴 테무진(孛兒只斤 鐵木眞 패아지근 철목진)이다. 중국사에는 원(元) 태조(太祖)다.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합한 군사·정치 지도자로, 초원의 부족들을 통일하고 몽골 제국을 성립시켜 몽골과 중국 지역을 비롯해 한반도에서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정복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왕수인(王守仁, 1472년-1528) 호(號) 양명(陽明), 중국 명나라의 정치인·교육자·사상가이다. 양명학의 창시자, 심학(心學)의 대성자로 꼽힌다. , 자(字)는 백안(伯安)이다.
엄복/옌푸(嚴復, 1853-1921년)는 중국 청말 민국 초기의 사상가이다. 푸젠 성(福建省) 민허우 현의 사람이다. 자는 기도(幾道). 1912년 국립 베이징 대학의 초대 교장을 역임. <원부(原富)>(스미스의 <富國論>), <군학이언(群學肄言)>(스펜서의 <사회학연구>), <법의(法意)>(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등을 계속 번역함
강유위/캉유웨이(康有爲, 강유위, 1858-1927) 중국 사상가이자 정치가. 1898년의 ‘변법자강책(變法自彊策)’.《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 《대동서(大同書)》 ,《일본변정고》, 《아대피득변정기(俄大彼得變政記)》
쑨원(孫文, 1866-1925) 중국의 외과 의사, 정치가. 신해혁명을 이끈 혁명가,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의 창립자이다. 호(號)는 이셴(逸仙, 일선). 본자(本字)는 더밍(德明, 덕명)별명은 중산(中山, 중산).
양계초/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 중국의 근대 사상가이자, 개혁가, 문학가, 사학가, 언론인, 교육가이다. 당시 뛰어난 대학자였던 캉유웨이의 제자.
모택동/마오쩌둥(毛泽东, 1893-1976) 후난성 샹탄 출신,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 혁명가. 초대 중앙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자(字)는 룬즈(潤之, 윤지), 융즈(咏芝, 영지)이며, 호(號)는 쯔런(子任, 자임).
**
게오르크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관념철학을 대표하는 독일의 철학자이다. 칸트의 이념과 현실의 이원론을 극복하여 일원화하고, 정신이 변증법적 과정을 경유해서 자연·역사·사회·국가 등의 현실이 되어 자기 발전을 해가는 체계를 종합 정리하였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 미국의 장로교 선교사. 한국어 이름은 원두우(元杜尤)이다. 부활주일인 1885년 4월 5일에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와 함께 인천에 입국한 그는 아직 조선 정부에서 선교활동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다. 그는 조선어 문법책을 영어로 집필하였다. 한편 예수교학당, 서울 구세학당, 연희전문학교(현재 연세대학교)를 설립. 1887년에 조선인 교우들의 참여로 조선 장로교 교회사에서 첫 장로교 교회인 정동교회(현재 새문안교회)를 설립하였고, 1900년도 초 개신교 양평동교회를 설립하였다.
호머 베절릴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 목사. 한국어 이름은 헐벗 또는 흘법(訖法), 허흘법(許訖法), 할보(轄甫), 허할보(許轄甫)였다. 1886년(조선 고종 23년)에 길모어, 벙커등과 함께 조선에서 육영공원에 교사를 파견해달라는 요청으로 조선에 들어와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교사직으로 영어를 가르쳤다.
#******
《규원사화(揆園史話)》는 1675년에 북애자(北崖子)가 저술하였다는 역사서 형식의 사화(史話)로, 상고시대와 단군조선의 임금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 《규원사화》가 일반에 공개된 것은 1925년 간행된 《단전요의(檀典要義)》에 일부가 인용된 것이 최초로 여겨진다. 그 내용은 1929년 간행된 《대동사강》에서도 인용되었고 전체 내용은 1932년 5월 이전에 등사되었다. 1934년에도 그 내용이 직접 인용되었으며 1940년에는 양주동이 필사본을 소장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후에 국립중앙도서관 측에서 해방 직후(1945~1946년)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필사본을 구입하여 귀중본으로 등록하였다. 이후 위서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1972년에 고서심의위원 이가원, 손보기, 임창순의 3인이 심의하여 조선 왕조 숙종 1년인 1675년에 작성된 진본이라 판정하였다. 그러나 2003년 3월 서지 전문가들이 비공식적이기는 하나 재감정을 실시한 바 있는데 대체적으로 그것이 진본이 아니며 일제 때 필사되어 제본된 것으로 판단한 바 있다.
아뢰야식(阿賴耶識 산스크리트어 알라야 비즈냐나(आलयविज्ञान ālaya vijñāna)를 음을 따라 표기한 것으로 아리야식(阿梨耶識)이라고도 하며,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 또는 간단히 제8식(第八識, eighth consciousness)이라고도 한다. /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 등에 따르면 마음[心]은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 · 의식의 6식(六識)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에 대해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 등에서는 마음에는 6식외에 이보다 더 심층의 의식인 제7식인 말나식과 제8식인 아뢰야식이 있으며, 따라서 마음은 8식(八識)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음부경 [陰符經,] 또는 황제음부경(黃帝陰符經)은 본래 황제가 지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위작임이 분명하다. 또는 도교의 확립자인 북위(北魏) 때의 도사(道士) 구겸지(寇謙之, 365-448)가 지어서 명산(名山)에 숨겨놓고 후세에 전했던 것을 당대(唐代)의 이전(李筌)이 쑹산 산[崇山]의 석실(石室)에서 발견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다. 음부경은 당대초의 저수량(褚遂良, 597-658)과 구양순(歐陽詢, 557-641)이 쓴 사본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수대(隋代) 이전에 지어졌을 것이다. / 황제 음부경은 560자이다. / 상편은 수련성선(修煉成仙)의 도를, 중편은 부국안민(富國安民)의 법을, 하편은 강병전승(强兵戰勝)의 기술을 논하고 있다. / 음부경은 그 내용이 천기(天機)를 담은 것이어서 강태공(姜尙 전1128-1072), 귀곡자(鬼谷子 전4세기), 제갈량(諸葛亮, 181-234)등을 거쳐 위나라의 구겸지에 이르러 전할 사람을 찾지 못하여 숭산(崇山)에 감추어 놓았다고 한다.
전진교(全眞敎) 왕중양(王重陽, 1113~1170)을 시조로 하여 후세까지 커다란 세력을 떨쳤던 서민 도교(道敎)로서 신도교(新道敎)라고도 불린다. 구(舊)도교의 귀족적인 주술과 의례주의(儀禮主義)를 탈피하고, 개인 생활에 있어서 성명(性命)의 내관(內觀)과 계율을 근간으로 하고 사회적으로 자선 행위와 세속 도덕의 실천을 추진하였다. 중국 민족의 도덕적인 요구를 유교의 오륜오상(五倫五常)의 도덕과 불교, 특히 선(仙)을 결합한 종교로 여기에서 중국사상사의 오랜 문제였던 삼교일치가 서민들 사이에서 실현되었다.
천부경(天符經): 저자: 최치원(계연수의 주장) 81자, 「묘향산 석벽본ㆍ태백일사본」과 「농은 유집본」 두 판본이 있다. / 대종교의 기본 성전(聖典). 한배검〔檀君〕이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천하 만민을 교화하는 데 있어 `조화의 원리', 즉 우주 창조의 이치를 81자로 풀이한 진경(眞經)임.
- 계연수(桂延壽, ? ~ 1920) 한국의 종교인이며 사학자로 알려져 있으나 실존 인물인지는 의심되고 있다. 자는 인경(仁卿), 호는 운초(雲樵), 세거선천(世居宣川), 일시당(一始堂)이라고 한다. 평안북도 선천군 출신으로 이기의 문인(門人)이었으며 태백교도였다고 한다.
-: 一始無始一, 析三極無盡本, 天一一地一二人一三, 一積十鉅無匱化三, 天二三地二三人二三, 大三合六生七八九, 運三四成環五七, 一妙衍萬往萬來, 用變不動本, 本心本太陽昻明, 人中天地一, 一終無終一. [「묘향산 석벽본ㆍ태백일사본」 81자]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이유립이 1979년에 출간한 책이다. 고대부터 전해지던 역사서 4권을 계연수(桂延壽, ? ~1920)가 묶은 것이라 주장하였으나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학계에서는 검증 결과 위서(僞書)로 판단하여 고중세사의 사료로 취급하지 않는다.《환단고기》는 1979년 이유립에 의해 처음 출간되었다. 저자는 계연수로 1911년에 《삼성기 상(上)》, 《삼성기 하(下)》,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의 5가지 책을 엮고 해제를 달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제자인 이유립에게 주고 60년 뒤에 공개하라고 하였다. 이유립은 이 책을 간직하고 있다가 1979년에 출간하였다고 한다.
(14:35, 52N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