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경륜적 사역
(창27:1-46)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가로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이삭이 가로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노니 그런즉 네 기구 곧 전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이삭이 그 아들 에서에게 말할 때에 리브가가 들었더니 에서가 사냥하여 오려고 들로 나가매 리브가가 그 아들 야곱에게 일러 가로되 네 부친이 네 형 에서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으니 이르시기를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가져다가 별미를 만들어 나로 먹게 하여 죽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 네게 축복하게 하라 하셨으니 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쫓아 내가 네게 명하는 대로 염소 떼에 가서 거기서 염소의 좋은 새끼를 내게로 가져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부친을 위하여 그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리니 네가 그것을 가져 네 부친께 드려서 그로 죽으시기 전에 네게 축복하기 위하여 잡수시게 하라. 야곱이 그 모친 리브가에게 이르되 내 형 에서는 털 사람이요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인즉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께 속이는 자로 뵈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어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쫓고 가서 가져 오라. 그가 가서 취하여 어미에게로 가져왔더니 그 어미가 그 아비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었더라. 리브가가 집안 자기 처소에 있는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취하여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또 염소 새끼의 가죽으로 그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꾸미고 그 만든 별미와 떡을 자기 아들 야곱의 손에 주매 야곱이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내 아버지여 하고 부른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노라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 야곱이 아비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청컨대 일어나 앉아서 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의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이삭이 그 아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 그가 가로되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삭이 야곱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지려 하노라. 야곱이 그 아비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가로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그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능히 분별치 모하고 축복하였더라. 이삭이 가로되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 그가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이삭이 가로되 내게로 가져 오라 내 아들의 사냥한 고기를 먹고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리라 야곱이 그에게로 가져가매 그가 먹고 또 포도주를 가져가매 그가 마시고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 맞추라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비가 그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마치매 야곱이 그 아비 이삭 앞에서 나가자 곧 그 형 에서가 사냥하여 돌아온지라. 그가 별미를 만들어 아비에게로 가지고 가서 가로되 아버지여 일어나서 아들의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아들 곧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가로되 그런즉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너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 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 에서가 그 아비의 말을 듣고 방성대곡하며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이삭이 가로되 네 아우가 간교하게 와서 네 복을 빼앗았도다. 에서가 가로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치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가로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공급하였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에서가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그 아비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을 인하여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보내에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하나니 내 아들아 내 말을 쫓아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 피하여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하라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을 인하여 나의 생명을 싫어하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면 나의 생명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
오늘 말씀은 이삭이 야곱을 축복함에 있어서 야곱에게 속아서 축복했다는 내용이다.
이삭의 생각으로는 에서에게 축복을 하려고 생각했는데 속아서 결국 야곱을 축복하게 되었다.
이 사건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이삭이 너무 누림만 있고 연단이 없었기 때문에 분별력이 없어졌다고 해석을 한다. 물론 평안 가운데만 거하고 연단을 받아서 영광스럽게 되지 못하면 우리 스스로가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갖지 못할 수가 있다.
여기서는 아무리 그렇게 했을지라도 이삭이 축복한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고 그것이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데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봐야 한다. 이삭이 미숙해서 축복을 잘못했다고 하면 이 문제가 틀려질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에 위배가 될 것인데 잘못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삭의 일생을 연결하는 문제가 된다.
이삭은 자기가 무엇을 잘 해서, 또 자기 능력으로 누리는 사람이 아니고 아버지 아브라함 때문에 아버지 안에서 축복을 누리는 사람이다. 이것이 아들의 위치였다. 마지막까지 그는 자기의 뜻에 따라서 축복한 것이 아니고 자기의 뜻과는 다른 뜻에서 축복을 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것이 되었다.
26장에서 이삭이 그랄에 거할 때 블렛셋 사람들이 몹시 괴롭게 했던 것을 봤다. 우물을 파 놓으면 빼앗아가고 했는데 그 우물들은 모두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 때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들이다. 그 우물들을 다시 수리해서 쓴 셈인데 그것을 블렛셋 사람들이 계속 뺏는 것이다. 그런데 뺏으러 오면 주고 다른 곳에 가서 파고 이렇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점점 창대하고 왕성해져서 거부가 되었다. 그러니까 아비멜렉과 군대 장관이 와서 화친을 청하고 강화조약을 맺는 이런 일이 있었다.
이것은 이삭이 무엇을 잘 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아버지 아브라함을 인해서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복이 이삭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랬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약 안에서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속에 이미 복이 들어있다 하는 말씀이 되게 된다.
예를 들어서 고래가 물에서 헤엄을 잘 친다 하는 것은 고래가 노력을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고래라고 하는 생명이 지어질 때 그 안에 물에서 헤엄칠 수 있는 조건이 주어졌기 때문에 고래가 헤엄을 잘 치는 것이다.
우리가 사람으로서의 복을 누린다면 무엇을 더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람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누려지는 것이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줬기 때문에, 모든 복을 모두 누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야곱을 축복하는 자리에서도 자기 생각으로는 에서를 축복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만일에 이삭이라는 사람이 자기 생각대로 끝까지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하나님의 경륜을 그르쳐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 생각대로 살지 못한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에서를 불러서 하는 말이 내가 별미를 먹고 싶으니까 네가 사냥을 해 와서 나에게 별미를 만들어 오너라 그러면 내가 먹고 마음껏 축복하겠다 이렇게 했다. 사실은 사냥한 고기는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고기가 아니다.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제물로서의 고기는 가축이다. 집에서 키우는 것이어야지 산에서, 들에서 잡은 것은 하나님께 드릴 수가 없다.
이삭은 지금 축복하는 자의 입장이니까 하나님의 입장이다.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면 그것이 인생에게 복이 된다 그런 뜻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축복을 하려고 하는데 별미를 먹고 축복을 해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런데 왜 별미를 가져오라고 하는가 하면 축복하는 자가 충만할 때 그 충만이 축복을 받는 자에게 간다는 것이다.
내가 먹고 배부르고 만족해야 다른 사람을 축복할 수 있지 내가 배고프고 가난하면
내가 하고 싶어도 축복을 못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만족이 인생의 복이라는 것이다.
창세기 2장에서도 하나님이 지으시던 모든 일을 마치고 안식하실 때 사람에게 복을 줬다 그렇게 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삭은 에서에게 별미를 가져오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엿듣고 있던 리브가가 야곱과 계략을 세워서 양을 잡아서 별미를 만들어 이삭에게 주고 이삭은 그것을 먹고 야곱을 축복하게 되었다.
결국 희생의 제물을 먹은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자기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야곱을 축복하게 되었다. 이런 속에서 생명의 미숙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생명의 미숙이라고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경륜에 사용되었다 그렇게 볼 수 있고 우리도 만일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다면 내 생각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 눈을 멀게 해서 결국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이삭이 만일 눈이 멀지 않았더라면 야곱을 분별해서 야곱을 축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눈이 멀었기 때문에 야곱을 축복한 것이다. 차라리 우리 눈이 멀어서 하나님의 경륜에 사용된다면 우리가 눈이 밝아서, 내가 내 뜻대로 해서 하나님의 경륜을 망치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이삭을 볼 때 모든 일이, 전부 자기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이끄심으로 말미암았다 하는 것이 마지막까지 드러난다.
축복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에 좌우되지 않는다. 내가 누구를 축복하고 싶다 그래서 축복이 되거나 내가 저주하고 싶다 해서 저주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축복과 저주는 오로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아무나 자기 생각대로 할 수 없다. 내가 눈이 밝다고 해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지혜가 있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오히려 우리 지혜와 우리 눈을 가리고 축복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삭이 별미를 가져오는 문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만족과 인간의 축복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나만 편하면 된다 이것도 아니고 내가 복을 가져 올 수 있다 이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복이 넘치시면, 안식이 넘치시면 사람에게 복이 흘러 넘친다는 것이다.
샘이 솟아 물이 계속 넘치면 우리가 마시게 된다. 그런데 샘이 매말라 버리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안 된다. 논에 물을 대 보면 원천이 풍부하면 저절로 흘러 넘치지만 물이 없을 때는 매일 가서 둠벙에서 물을 퍼도 다음 날 가면 또 마르고 그렇게 된다. 요즘에는 저수 시설이 있어서 물을 끌어당기고 있기 때문에 물 푸는 사람이 없는데 옛날에는 논 귀퉁이에 웅덩이를 파 놓고 그 물을 퍼 올렸다. 가물 때는 매일 가서 푸는 것이다. 그래도 매일 논바닥은 말라 있다. 그러다가 비가 한 번 와 버리면 삽시간에 온 들이 물에 잠기게 된다.
하나님이 만족하시면 우리가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려고
생각하면 지혜로운 일이지만 하나님을 만족케 하지 않고 내가 복을 받으려면 어리석은 일이 된다.
배가 고픈데 어떻게 하겠는가? 개가 새끼를 낳았는데 자기 젖이 불어야지 새끼에게 젖을 주지 그렇지 않으면 안 준다. 죽어도 안 준다. 밖에 나와 있지 새끼에게 가지를 않는다. 어미를 잘 먹여야 한다. 어미를 잘 먹이면 새끼에게 저절로 젖을 주게 되어 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면 저절로 복이 인생에게로 흘러 들어오게 되어 있다. 내가 행복하고 내가 만족하려고 하면 원천이 말라버리고 만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거꾸로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를 만족하게 하려고 한다. 원천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항상 배고프고 항상 목마른 것이다. 무엇을 가진 것 같은데 진짜가 없기 때문에, 가짜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족이 없는 것이다.
복은 이제 바꿀 수 없다는 문제가 나온다. 에서가 다음에 와서 내가 에서입니다 그랬다. 그랬더니 이삭이 몸을 떨었다고 한다. 놀랬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에서인 줄 알고 축복을 했는데 에서가 따로 왔다는 것이다. 에서는 대성 통곡을 하면서 애원을 했다. 어디 복이 그것 밖에 없습니까? 또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삭의 하는 말이 다 줘 버려서 없다는 것이다. 야곱에게 다 줘 버렸기 때문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말로 하는 축복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실재적인 축복이었다.
한 번 말이 발해지면 이것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다시 바꿀 수가 없는 것이다.
축복은 바꿀 수가 없다. 여기서 볼 때 축복은 부모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다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삭의 마음 같으면 당장이라도 바꾸어서 야곱에게 내린 것을 취소하고 에서에게 다시 줄 수 있다. 부모 같으면 그렇게 할 수 있다. 이번에 보니까 정주영씨가 그렇게 했다. 이 아들에게 준다 했다가 저 아들에게 준다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참된 축복은 부모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니까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그 명분을 경홀히 여긴 사람이 합당한 권리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야곱은 인간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장자의 명분을 얻기 위해서 분투하는 사람이었고 에서는 인간적으로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기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장자권에 대한 싸움은 우주적인 전쟁이다. 어느 개인의, 가정의 문제가 아니고 인간과 사탄과의 주권의 전쟁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우주를 지배하느냐 아니면 천사가, 사탄이 이 우주를 지배하느냐 이런 싸움이다. 이 싸움은 이 문제를 경홀히 여긴 사람으로서는 할 수가 없다. 전쟁을 중요하게 여긴 사람이 전쟁을 하는 것이지 전쟁을 경홀히 생각하는 사람은 전쟁을 할 수 없다.
보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보물을 찾는 것이지 보물을 경홀히 여긴 사람은 보물을 찾지 않는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런 입장에서 야곱을 택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장자권을 잃으면 인간의 지위가 없어진다. 사람으로서의 지위가 영원히 없어진다.
사람은 우주 안에서 장자권을 위한 위치로 지어져 있으니까 그 위치를 떠나면 다른 것을 못 하는 것이다.
비행기는 날아가려고 만들어져 있으니까 나는 위치를 떠나버리면 다른 곳에 쓸모가 없어진다.
배는 바다를 항해하려고 지어놓았기 때문에 바다에 놓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어진다.
인생은 우주 안에서 장자권을 얻도록 지어졌기 때문에 이 장자권을 잃어버리면 인생은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인생에게 주어진 특정한 지위라고 할 수 있다. 이 특별한 지위 이외 다른 것이 있느냐? 다른 것은 없다. 이 지위 외에는 없다. 이 지위를 잃으면 인생은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이다.
히브리서에 보면 장자들의 총회 이런 말이 나온다. 하늘의 세계를 말할 때 장자들의 총회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결국 이기는 자들의 총회고 야곱과 같은 사람들의 총회다. 이 우주 안에 장자권을 가진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장자권은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 목숨을 걸고 회복해야 하는 그런 문제다.
예수님께서 왜 자기 목숨을 내어놓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지켜야 하는가? 장자권 때문에 그렇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물었을 때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렇게 대답했다. 모든 말에 대해서 다 묵비권을 행사했지만 마지막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물었을 때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더 이상 이 사람에게서 증거를 찾을 것이 없다, 이는 하나님을 참람하게 했고 모독하는 자다 그래서 처형하게 되었던 것이다.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고 했을 때 나는 아니다 이랬으면 죽일 명분이 없어진다. 그런데 그렇다고 했기 때문에 죽게 되었다. 말 한 마디에 죽느냐 사느냐가 걸렸는데 왜 그렇게 대답했는가? 이것은 사탄과의 전쟁이니까, 이 우주 안의 장자권의 전쟁이기 때문에 그는 자기 목숨을 내어놓고 장자권을 회복한 것이다.
인생의 전쟁은 민생고의 전쟁이 아니다. 장자권의 전쟁이다. 지금 세상 안에서의 인간의 전쟁은 생존 전쟁이다.
살기 위한 전쟁이다. 그런데 이것은 육신이 살기 위한 전쟁에 불과하다. 참 전쟁은 장자권을 위한 전쟁이다.
이 우주 안에서 우리의 위치가 어디냐 그 문제다. 만일 장자권이라는 문제가 없으면 우리는 동물이 되어 버린다. 만일 동물의 세계로 들어가 버리면 인간은 동물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존재다. 다른 동물에 비해서 우리가 나을 것이 없는 그런 존재다. 장자권에 있어서만 우리는 구별된 존재고 유일한 존재니까 이것을 만일 잃어버리면 우리 인생을 모두 잃어버리는 것이다.
에서와 야곱의 치열한 싸움은 불가피한 싸움이다. 두 국민이 복중에서부터 나뉜다, 싸운다 이런 말이 나오는데 왜 그랬느냐 하면 이삭 이후에 야곱의 족속이냐 에서의 족속이냐에 따라서 민족이 갈라지게 되었다. 아브라함에서 이삭까지 올 때는 민족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야곱 시대에 와서 민족이 갈라지게 되니까 두 민족이 갈라지는데 장자권을 얻기 위한 민족이냐 아니면 장자권을 포기한 민족이냐 두 가지로 갈라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에서와 야곱의 싸움은 치열한 싸움이고 불가피한 그런 싸움이다. 또 절대적인 싸움이다.
이 전쟁은 절대적인 관심이 없으면 이길 수 없다. 만사를 제치고 인권을 찾아야지 인권을 다음에 두고 만사를 먼저 생각하면 사람은 자기 지위를 잃어버리게 된다. 사람은 모든 것을 버릴지라도 이 권리를 찾아야 그것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도덕이니 윤리니 지식이니 이런 것을 가지고 인간의 인간 됨을 말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인간 됨이 아니고 장자권이 인간 됨이다. 만유를 지배하는, 천사라도 지배하는 이 권리가 바로 인권이고 인간의 권리니까 이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시고 그가 이 권리를 회복해서 우리에게 넘겨주신 것이니까 우리는 그것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이런 권리를 찾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지키지 않고 누리지 않으면 우리 것이 될 수 없다. 조상들이 물려준 땅이라도 내가 잘못해서 팔아먹으면 없어지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미 사탄의 머리를 밟고 인권을 완전히 회복하셨으니까 우리는 그것을 지켜야 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제 이것이 귀중한 줄 알았고 사탄에게서 이것을 뺏는 방법을 확실히 알았다.
예수님께서 먼저 이기신 것을 봤으니까 우리는 그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봤다. 그러니까 이것을 지켜야 한다.
사탄은 모든 것으로 인간을 유혹하고 느슨하게 하려는 것이다. 장자권에 대해서는 느슨하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다음에 해도 되는 것처럼 이렇게 자꾸 유혹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필요를 중요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뭔가 필요를 찾아서 분주하게 움직인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더 현대화될수록 더 복잡해지고 더 바빠진다. 무엇 때문에 바쁜지 모르면서도 어차피 안 바쁘면 못 살도록 만들어 놓았다. 거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는 못 살게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너나 없이 돌아가는 바퀴에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같이 돌아야 한다.
뒤로 가 보면 거기 유혹되어서 참으로 중요하게 생각할 것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잠시 있다가 없어질 것은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렇게 결론이 나 버리고 만다.
인생이 모두 그렇다. 내가 평생을 관심을 가졌던 문제는 어느 순간에 가면 아무 소용없는 문제에 관심을 가졌고 정말로 관심을 가져야 하는 문제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고 살았다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것을 보고 유혹이라고 한다.
사탄은 여러 가지 좋은 것들을 모두 만들어서 유혹을 한다.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하면 할수록 좋은 것이 많아진다.
그리고 그 좋은 것을 취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투쟁을 해야 한다. 그래서 거기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이다. 좋은 물건을 계속 만들고 새로운 물건을 계속 만들어서 또 사고 또 사게 만든다. 그래야 자본주의가 발전한다. 더 좋으니까 또 사야 한다.
옛날에는 10년을 쓸 물건을 지금은 5년 쓰고 버린다든지 이렇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꾸 자꾸 새로운 것이 나오니까 그렇다. 그러면 그만큼 또 내가 돈을 더 벌어야되고 그만큼 또 노력을 해야 한다. 이렇게 만들어 놓았다. 이런 모든 것이 결국은 우리에게서 인권에 대한 관심을 빼앗아 가려고, 장자권에 대한 관심을 빼앗아 가려고 만들어 놓은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이 시점에서 야곱의 관심, 장자권을 얻고자 하는 관심이 소중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비록 그 방법이 아주 졸렬하고 비열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야곱을 택했다는 것을 본다면 이 문제는 졸렬하냐 비열하냐 이런 문제에 속한 것이 아니다.
전쟁할 때는 그렇다. 전쟁에는 방법이 없다. 정도로 싸웠다 해서 전쟁에 졌는데 상급이 오는 것이 아니다. 전쟁은 지면 죽는 것이니까 어떤 방법으로든지 이겨야 한다. 전쟁에서는 지면 죽는 것이다. 장자권에 관한 문제는 그런 문제다. 여기는 어떤 룰이 따로 없다. 법칙도 없다. 이기는 자만 살아남을 수 있는 그런 자리다.
사탄과 우리의 전쟁, 이 전쟁에서는 사람의 생각이나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절대적인 문제고 영원한 문제고 우주적인 문제고 또 이것은 사람이 만일 이 장자권을 잃게 되면 우주 전체가 혼란에 빠지는 그런 문제다. 사람이 주인이 되어야 할텐데 주인인 사람이 져 버렸으니까 혼란에 빠져서 모든 인생이, 모든 만물이 어디로 갈 줄을 모르고 달려가는 그렇게 되고 만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이삭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오로지 은혜 안에서 자기의 어떠함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린 사람이었다. 이것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부르실 때 그 안에서 한 생명을 탄생시켜서 그로 하여금 이 일을 이루도록 작정해 놓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사람을 만들어서 우주를 통치하려는 것처럼 이삭을 통해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려고 했기 때문에 이런 역사가 발생하게 되었다. 주님께서 우리 앞에 주신 것은 우리가 우리 생각으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할 수 없고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에 사용될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보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