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노르웨이령 그린란드의 종말
종말의 서곡
앞 장에서는 노르웨이인들이 그린란드에서 처음에 어떻게 번영할 수 있었는지 살펴보았다.
그들이 정착할 때쯤 모든 여건이 순조로운 덕분이었다.
그들은 목장으로 활용하기에 적합한 처녀지를 발견햇다.
사람들이 나무를 베거나 짐승이 풀을 뜯은 흔적이 없는 깨긋한 미답의 땅이었다.
게다가 기후까지 상대적으로 온화해서 건초도 충분히 생산할 수 있었고,
유럽과 연결되는 해로에도 얼음이 없었다.
또한 유럽의 수요가 있어 해마의 상아를 수출할 수 있었고,
노르웨이인들의 정착지나 사냥터 부근에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없었다.
이 모든 이점이 점점 불리하게변해갔다.
이런 악화에는 노르웨이인들의 책임도 적지 않았다.
기후가 변하고, 해마으 상아에 대한 유럽의 수요가 변했을 때,
더구나 이누이트족이 그들의 영역을 침범하기 시작했을 때,
이런 변화에 어떻게 대처하느냐는 그들의 몫이었다.
그들이 환경에 및친 영향도 변화의 한 요인이었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이런 이점들이 어떻게 악회되어갔고,
노르웨이인들이 변화에 어떻게 대응했으며,
궁극적으로 그린란드의 노르웨이인의 정착지가 붕괴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살표보기로 하자.
삼림파괴
그린란드에 정착한 노르웨이 사람들은 적어도 세 가지 방향에서 환경을 훼손했다.
10 초목의 파괴, 20 토양 침식으 유발 30 떼(草 )의 남용이었다.
그들은 정착하자마자 초지를 조성할 땅을 개간하기 위해서 숲을 불태웠고,
남은 나무들을 베어내 목재와 땔나무로 사용했다.
특히 나무들이 생장할 수 없어 가장 취약한 겨울에
가축들이 풀을 뜯고 짓밟아 뭉개면서 나무들은 되살아나지 못했다.
이처럼 자연의 초목에 안긴 충격의 여파는
화분학자들이 호수와 습지의 바닥에서 채취한 퇴적물을 방사성 탄소법으로 조사해 비교적 정확히 측정해냈다.
이런 퇴적물에서 적어도 다섯 가지의 환경지표가 있다.
잎과 같은 식물의 부분들과 화분 ㅡ 이 둘은 당시 호숫가에 자란 나무의 종을 알아내는 증거로 쓰인다. ㅡ
근처에서 불을 지폈거나 화재가 있었다는 증거인 숯, 표토가 물에 쓸려들어오거나
바람에 날려와 호수 바닥에 가라앉아 생긴 퇴적물에서 자성을 띤 철 무기물의 양을 나타내는 자기화율,
그리고 물에 쓸려들어오거나 바람에 날아와 호수 바닥에 가라앉은 모래이다.
호수의 퇴적물을 연구하면 노르웨이인의 목장 부근의 초목에 대해서 대략 다음과 같은 그림이 그려진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면서 기온이 상승했고, 풀과 사초가 나무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 후 8,000년 동안 초목에서 큰 변화는 없었다.
바이킹이 도래하기 전까지 삼림 파괴나 침식의 흔적도 거의 없었다.
바치킹이 가축을 위한 초지를 조성하려고 불을 질렀다는 증거는 숯으로 확인된다.
그 후로 버드나무와 자작나무의 화분은 감소한 반면에 풀, 사초, 잡초,
그리고 바이킹이 가축을 먹이려고 도입한 목초(牧草)의 화분을 증가했다.
자기화율값의 상승은 표토가 호수로 침식되었다는 뜻이다.
즉 표토를 덮고 있던 초목들이 사라지면서 바람과 물에 표토가 침식되었다.
끝으로, 골짜기 전체에서 초목이 사라지고 표토가 침식되면서
표토 아래에 있던 모래까지 호수로 밀려들어 갔다.
그러나 1400년대 바이킹이 정착지가 사라지면서 이 모든 변화가 뒤집어졌다.
그린란드의 풍경이 예 모습으 히복해갔다는 뜻ㅇ었다.
그러나 바이킹이 사라지고 5세기가 지난 후, 즉 1924년에 덴마크 정부가 이 땅에 다시 양을 방목하면서
바이킹의 도래와 함께 시작되었던 변화가 그대로 되풀이되었다.
환경회의론자라면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
버드나무에게는 슬픈 일이지만 사람에게 어쩌란 말인가?
삼림 파괴, 토양 침식, 떼의 절단은 노르웨이인에게 큰 타격을 안겨주었다.
아이슬란드와 망가레바에서 그랬듯이 , 삼림 파괴로 노르웨이인들도 목재의 부족에 허덕였다.
버드나무, 자작나무, 노간주나무의 가는 줄기로는 집에서 쓸 목가구나 만들 수 있었다.
노르웨이인들은 집의 들보, 배, 썰매, 통, 벽판, 침대 등을 만들 수있는 커다란 나무를 다른 곳에서 찾아야 했다.
그린란드 해안까지 떠나려온 시베리아의 뮤목(乳木)을 줍거나 노르웨이에서 원목을 수입했다.
그리고 빈랜드를 탐사하던 과정에서 발견한 래브라도 해안('마크란드')까지 직접 가서 나무를 베어왔다.
목재는 너무 귀했다. 가구도 버렺지 안호 재할용되었다.
서쪽 정착지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버티었던 집들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집에서 커다란 벽판과 가구를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에서 이런 추론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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