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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1권
1)
근본정려에는 18가지의 정려지(支)를 갖추고 있으며(제1ㆍ3정려의 각 5지와 제2ㆍ4정려의 각 4지, 본론 권77 ‘靜慮支’ 참조), 관지(觀智, 지혜)와 정심(定心, 선정)이 평등하기 때문에, 그것에 의해 생겨난 도는 마치 배를 타고 강을 내려가는 것처럼 인위적인 노력 없이 쉽게 성취되기 때문에 ‘낙통행’이라 한다. 그러나 그 밖의 선정에 의해 일어난 도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고통행’이라고 하는 것이다.(후술)
2)
정려중간(혹은 중간정, dhyānāntara)이란 초정려와 제2정려의 중간단계를 말하는 것으로, 초정려가 유심유사(有尋有伺)이고 제2정려 이상에는 심사(尋伺)가 존재하지 않는데 반해 이는 무심유사지(無尋唯伺地)이다. 본론 제78권에서 상론함.
3)
주10)의 본문 참조.
4)
지만(Aṅgulimāla, Aṅgulimālya)은 사위성 출신으로 불타를 살해하려다 교화되어 출가한 자이고, 사노(Sappadāsa, Sarpadāsa)는 정반왕의 시종의 아들로 불타가 성도 후 처음 귀향하였을 때 출가하였다. 출가 후 깨달음을 얻지 못해 뱀에게 물려 죽으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뱀은 4생 동안 그의 노예였기 때문에 ‘사노’이다), 밤에 칼로써 자살하려다 그동안 청정한 계(戒)를 지켜왔음을 알아 마침내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양인은 이근과 둔근의 대표자로 불린다.(『대비바사론』 제35권, 대정장27,p.181중 참조)
5)
수신행과 수법행, 신해와 견지, 시해탈과 불시해탈은 각기 둔근자와 이근자로서 현관 제16심, 불환과, 아라한과에 이른 성자이다.
6)
아야다교진나(Aññā Koṇḍañña, Ājñāta Kauṇḍinya)는 초전법륜 시의 다섯 비구 중의 한 명으로 최초로 아라한과를 얻은 제자이며, 선현(Subhadda, Subhadra)는 불타 입멸 직전 쿠시나라 교외에서 아난다에게 불타설법을 듣고자 청하여 불타가 이를 허락함으로써 최후로 입단한 제자이다.
7)
수법행은 전술한대로 이근으로서 현관 제16심에 이른 자를 말하지만, 대 성문도 독각도 대각(불타)도 수법행을 거쳤으므로 이를 다만 이근의 성과(聖果)라고만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수법행의 품류에도 둔(鈍)ㆍ중(中)ㆍ이근(利根)이 포섭될 수 있다는 것이다.
8)
계경에서 5근이 맹리하고 원만한 이근자를 구해탈이라고 하였으니, 아직 그렇지 못한 수법행은 둔근이라는 말인가? 혹은 수법행ㆍ견지ㆍ구해탈을 순서대로 둔ㆍ중ㆍ이근으로 설하였다는 뜻인가?
9)
앞서 이설자가 인용한 경에서는 지만(指鬘)이 온갖 이근자 중에 가장[最] 뛰어난[第一] 이근자이고, 사노(蛇奴)가 온갖 둔근자 중에 가장 뛰어난 둔근자라고 설하였는데, 사노에 비해 조금 덜 둔근인 자도 이근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지만에 비해 조금 덜 이근인 자도 둔근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을 중근이라고 할 수 있다는 뜻이다.
10)
주3) 참조.
11)
인각유(麟角喩) 독각이란 기린의 뿔이 오직 하나인 것처럼 홀로 머물며 깨달음을 증득한 독각을 말하며, 부행(部行) 독각은 성문으로서 제3과(불환과)까지를 얻은 후에 홀로 머물며 뛰어난 제4과의 과보를 증득한 독각을 말한다.(본론 제32권 ‘부처와 독각이 출현하는 시기’ 참조) 그래서 일정하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12)
사리불은 혜(慧)를 즐겼으며, 목련은 선정[定]을 즐겼다. 말하자면 사리불은 지혜 중심주의, 목련은 선정 중심주의라고 말할 수 있겠다.
13)
『잡아함경』 제26권 제694경(대정장2,p.188중). 이러한 37도지(道支, 혹은 助道品)의 명칭은 같은 경 제26~28권에 상설된다. (1) 4념주:신(身)ㆍ수(受)ㆍ심(心)ㆍ법(法)념주(본론 제60권에서 상론). (2) 4정단(또는 正勤):일어난 악법을 끊고 또 끊는 단단(斷斷), 또는 아직 생겨나지 않은 악을 생겨나지 않게 하는 것. 계율을 수지하여 악법을 일어나지 않게 하는 율의단(律儀斷), 또는 이미 생겨난 악을 영원히 끊는 것. 무루삼매 중에서 선법을 지켜 악법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수호단(隨護斷) 또는 아직 생겨나지 않은 선법을 생겨나게 하는 것. 바른 도를 닦아 악법을 끊는 수단(修斷), 또는 이미 생겨난 선법을 증장시키는 것. (3) 4신족(또는 如意足):신통(선정의 자재성)을 획득하는 근거[足]로서, 뛰어난 삼매를 획득하려고 원하고[欲], 노력ㆍ정진하고[勤], 마음을 다스리고[心], 지혜로써 사유ㆍ관찰하는 것[觀]. (4)(5) 5근ㆍ5력:신(信)ㆍ정진(精進)ㆍ염(念)ㆍ정(定)ㆍ혜근(慧). (6) 7각지:택법(擇法)ㆍ정진(精進)ㆍ희(喜)ㆍ경안(輕安)ㆍ염(念)ㆍ정(定)ㆍ사각지(捨覺支). (7) 8성도지:정견(正見)ㆍ정사유(正思惟)ㆍ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ㆍ정정진(正精進)ㆍ정념(正念)ㆍ정정(正定).
14)
『대비바사론』 제96권(대정장27,p.496상중; 한글대장경121,p.468-469)에 의하면, 37보리분법의 본질은 열한 가지 혹은 열두 가지이며, 앞서 설한 열 가지라는 주장은 유설(有說)로 언급되고 있다. 즉 정어ㆍ정업ㆍ정명을 각각의 별체로 보면 열두 가지, 정명이 바로 정어(語業) 정업(身業)이라고 주장하면 열한 가지, 본론에서처럼 세 가지는 계를 자성으로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 열 가지가 된다.
15)
4념주ㆍ4정단ㆍ4신족 중에는 특별히 열 가지 실제적 본질에 소속될 만한 것이 없는데, 어째서 염주를 ‘혜’에 배당하고, 정단을 ‘근’에, 신족을 ‘정’에 배당한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16)
다시 말해 “4념주는 보리분법이 아니라 다만 가행의 선법일 뿐인데, 어떠한 까닭에서 혜근을 본질로 한다고 설하게 된 것인가?”
17)
이에 반해 경주 세친은 “‘혜’가 ‘염’으로 하여금 경계대상(즉 신ㆍ수ㆍ심ㆍ법)에 머물게 하니, 여실히 관찰한 자가 능히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과 같다”고 하여 ‘혜’에 대해 염주라는 명칭을 설정한 것이라고 하였다.(『구사론』 제25권, 고려장27, p.640하; 대정장29,p.132중하;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p.1154) 염(念)의 혜(慧)의 관계에 대해서는 본론 제60권 ‘4념주의 본질’을 참조할 것.
18)
이생(已生)ㆍ미생(未生)의 악과 선을 힘써 끊고 닦을 때, 근(勤)의 심소가 ‘뛰어난 힘을 갖고서 끊고 닦는 것을 게을리 하는 해태’를 지금 바로 끊기 때문에 ‘정단’이라 이름하였다는 뜻이다.
19)
선정은 능히 변화하는 마음 등을 일으켜 온갖 신통 불가사의한 경계[神]를 조작하는 근거[足]가 되기 때문에 ‘신족’이라 이름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20)
선정은 신통변화의 부사의한 묘용(妙用)을 나타내기 때문에 ‘신(神)’이라 일컬은 것이며, 뛰어난 삼매를 획득하려고 원하고[欲], 노력ㆍ정진하고[勤], 마음을 다스리고[心], 지혜로써 사유ㆍ관찰하는 것[觀]은 그러한 선정(즉 ‘神’)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족(足)’이라 일컬었다는 뜻이다.
21)
신통의 경계 즉 신경(神境)에 대해서는 본론 제76권의 ‘6통(通)’ 중 신경지증통(神境智證通); ‘특히 신경통에 대하여’를 참조할 것.
22)
『구사론』 제25권(고려장27,p.640하-641상; 대정장29,p.132하; 권오민 역,p.1155).
23)
여기서 네 종류는 욕(欲)ㆍ근(勤)ㆍ심(心)ㆍ관(觀)의 가행이 되는 네 종류 선정.(후술)
24)
원문은 ‘說是所修起, 先欲定爲加行者本, 爲求得後勝定故’이다.
25)
즉 유여사는 앞서 “신(神)은 바로 선정을 말하며, 족(足)은 욕(欲) 등을 말한다”고 설하였는데, 이때 ‘신’은 수승한 선정을 의미하며, ‘신’의 근거인 ‘족’은 가행으로서의 욕정(欲定, 욕등지)과 이것에 의해 증득되는 ‘욕’ 등의 법을 말한다. 그럴 경우 ‘욕’이나 ‘심’은 등지(定)의 일종이기 때문에, 보리분법의 본질이 열세 가지가 된다는 과실이 없으며, 경주가 인용한 “‘족’이란 욕(欲) 등에 의해 일어난 네 가지 삼마지를 말한다”는 경설에도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후술)
26)
5근이나 5력은 다 같이 신(信)ㆍ근(勤)ㆍ염(念)ㆍ정(定)ㆍ혜(慧)이지만, 하품의 그것을 ‘근’이라 하고, 상품의 그것을 ‘역’이라 하였다. 혹은 굴복될 수 있을 정도로 저열한 그것을 ‘근’이라 하고, 굴복될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한 그것을 ‘역’이라 이름하였다. 즉 하품의 ‘신’ 등은 그 세력이 저열하기 때문에 대치되는 번뇌와 동류로서 굴복될 수 있으며, 상품의 그것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근(根)과 역(力)으로 구분하게 된 것이다.
27)
즉 8도지 중 정견(正見)은 바로 견도(見道)인 동시에 견도위에서 닦는 8성도지 한 갈래[支]이며, 7각지 중 택법(擇法)은 깨달음[覺, 즉 진지와 무생지]인 동시에 깨달음에 이르는 한 갈래이다. 참고로 8도지는 견도위에서 증가하며, 7각지는 수도위에서 증가한다.(次項 참조)
28)
처음으로 업을 닦는 단계[初業位]란 순결택분(즉 4선근)의 전 단계인 별상념주와 총상념주로서, 신(身)ㆍ수(受)ㆍ심(心)ㆍ법(法)의 자상(순서대로 不淨ㆍ苦ㆍ無常ㆍ無我)과 공상(네 소연 각각의 무상ㆍ고ㆍ무아ㆍ공)을 관찰하는 단계이다.
29)
근(根)과 력(力)의 차이에 대해서는 주26)을 참조할 것.
30)
『잡아함경』 제24권 제628경(대정장2,p.176하), 동 제26권 제648경(동p.186하) 등에서 37보리분법을 4념주ㆍ4정단ㆍ4신족ㆍ5근ㆍ7각지ㆍ8성도지의 순으로 설한 것은 법수(法數)의 증가에 따른 것으로, 만약 닦는 순서에 따라 설한 것이라면 견도에서 8성도지를 닦고 수도에서 7각지를 닦기 때문에 두 가지의 순서가 바뀌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유부 비바사사(毘婆沙師)의 해석. 그러나 다음의 유여사(有餘師)는 경에서 설한 순서는 닦는 순서에 따른 것이라고 해석한다.
31)
『대비바사론』 제95권(대정장27,p.493중; 한글대장경121,p.455) 참조.
32)
예컨대 처음으로 업을 닦는 단계에서 증가하는 4념주(念住)는 견도ㆍ수도ㆍ무학위에 이르도록 증가하지만, 견도위에서 증가하는 8도지는 처음으로 업을 닦는 단계나 난법위에서 증가하지 않는다. 그래서 4념주 등은 유루와 무루 모두와 통하지만, 7각지와 8정도는 오로지 무루라고 한 것이다.
33)
이는 『구사론』 제25권(고려장27,p.641하; 대정장29,p.133중; 권오민 역,p.1160) 상의 제1설이며, 앞서 논설한 ‘의심의 생각이 남아있기 때문에’는 제2설이다. 즉 미지정은 하지와 가깝기 때문에 하지의 번뇌에 의해 장애 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있으며, 따라서 갖은 힘을 다하여 도를 일으켜도 안심이 되지 않기 때문에 희각지가 없다는 것이다.
34)
‘계(戒)의 세 갈래[支]’란, 8도지(道支) 중 계를 본질로 하는 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으로, 아래 세 무색정에는 색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세 가지 업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35)
예컨대 ‘혜’를 본질로 하는 8도지의 정견(正見)에는 4념주와 혜근(慧根)ㆍ혜력(慧力)ㆍ택법각지 등이 포함된다.(前說한 ‘보리분법의 본질’ 참조) 그러나 4념주 등에는 정견이 포함되지 않는다. 정견은 무루이기 때문이다.
36)
예컨대 4념주와 혜근(慧根)ㆍ혜력(慧力)ㆍ택법각지ㆍ정견은 각기 ‘혜’를 본질로 한다.(前說한 ‘보리분법의 본질’ 참조)
37)
신(身)ㆍ수(受)ㆍ심념주(心念住)를 제외한 서른네 가지.(후술)
38)
대심소법이란 대지법(大地法)을 말하는 것으로, 수(受)ㆍ상(想)ㆍ사(思)ㆍ촉(觸)ㆍ욕(欲)ㆍ혜(慧)ㆍ염(念)ㆍ작의ㆍ승해ㆍ삼마지 등 마음이 일어나는 모든 순간에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열 가지 보편적인 심리작용.(본론 제10권에서 상론) 이 중에 ‘수’는 희각지(喜覺支) 즉 희수를 포섭하며, 혜ㆍ염ㆍ삼마지(즉 定)는 각기 4념주 등과 염근 등과 4신족 등의 본질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네 법만을 각분으로 설정하고, 그 밖의 법은 각분으로 설정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 본 단의 주제이다.
39)
승해가 각분 중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무학의 도과(道果)이기 때문이다. 즉 각분(覺分)이라 함은 진지와 무생지를 낳는 원인이 되는 유학의 도를 말하기 때문에 무학위에서 두드러지는 승해를 여기에 포함시키지 않았다는 뜻이다.
40)
원문은 ‘於諦觀察有策發能, 說此力能策正見故.’ 앞서 8도지 중의 정사유는 심(尋)을 본질로 한다고 설하였으며(‘보리분법의 본질’ 참조), “[성제(聖諦)를] 살펴 추구하는 것[尋求]의 근거가 되는 것을 일컬어 ‘도지’라 한다”고 하였다.(‘覺支와 道支’ 참조)
41)
다시 말해 “심(尋)이 각분이기 때문에 작의도 각분이 되어야 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
42)
전다라(candala)는 포악(暴惡)ㆍ살자(殺者)ㆍ도자(屠者)로 한역됨. 사성(四姓) 이외의 천민으로, 개 돼지와 동류로 간주됨. 혹은 수드라의 처녀와 바라문 사이에 태어난 종성. 곧 이러한 천한 족속도 호족 즉 바라문이나 크샤트리야에 이익 되는 일을 하는 것처럼, 수(受) 또한 비록 잡염법이지만 청정법(보리)에 대해 이익되는 일을 하기 때문에 7각지의 하나(喜覺支)로 설정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43)
일반적으로 이생희락(離生喜樂)과 정생희락(定生喜樂)으로 일컬어지는 초정려와 제2정려의 ‘낙’은 3수의 하나인 낙수가 아니라 마음이 경쾌 안적하게 되는 상태인 경안(輕安)의 즐거움(경안락)이다. 행사(行捨)는 제3정려에 나타나는 심리현상으로, 이는 3수의 하나인 사수가 아니라 행온에 포섭되는 사(捨) 심소이다. 즉 낙수와 사수는 이에 은폐되어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별도의 각지로 설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44)
대선의 심소법이란 대선지법(大善地法)을 말하는 것으로, 선심과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신(信)ㆍ근(勤)ㆍ사(捨)ㆍ참(慚)ㆍ괴(愧)ㆍ무탐(無貪)ㆍ무진(無瞋)ㆍ불해(不害)ㆍ경안ㆍ불방일.(본론 제11권에서 상론) 이 중에 ‘신’과 ‘근’은 각기 신근 등과 4정단 등의 본질이었으며, ‘사’와 ‘경안’은 7각지 중의 하나로 설정되었다.(‘보리분법의 본질’ 참조)
45)
행사는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가 아니라 행온에 포섭되는 사(捨)의 뜻으로, 혼침(惛沈, 무기력함)과 도거(掉擧, 들뜸)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은 심리작용을 말한다.(본론 제11권 ‘대선지법’ 참조)
46)
다시 말해 “4제의 이치를 관찰하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장애하지 않는다.” 여기서 산계(散戒)란 욕계 산심(散心)에서의 계인 별해탈율의(바라제목차). 이에 대해 정계(定戒, 혹은 定共戒)란 색계 정심(定心)에 의해 생겨나는 정려생율의(靜慮生律儀).
47)
다시 말해 “강성한 번뇌(일체의 염오심과 상응하는 대번뇌지법)를 대치하고.”
48)
“이치상 사(伺)도 역시 염주 등에 포섭되고 있으니, 이러한 법은 실로 온갖 가행선을 모두 포섭하기 때문이다.”
49)
주40)의 본문 참조.
50)
여기서 바퀴통이란, 8성도지(聖道支)를 세간의 수레바퀴에 비유할 때 바퀴통과 유사한 작용을 갖는 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을 말한다.(본론 제67권 ‘轉法輪에 대하여’ 참조)
51)
여기서 ‘그때’는 수도와 견도의 성자위. 앞서 7각지는 수도위에서 증가하고, 8도지는 견도위에서 증가한다고 하였다.(‘수행의 계위와 보리분법’ 참조)
52)
‘심’은 정사유(正思惟), 계의 갈래[支]는 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
53)
주50) 참조.
54)
성종(聖種)은 의복ㆍ음식ㆍ와구에 희족(喜足)하고, 즐거이 번뇌를 끊고 성도를 닦는 것[樂斷修]으로, 성자의 종자가 되기 때문에 ‘성종’임.(본론 제59권 ‘4성종’ 참조)
55)
앞의 세 성종은 희족(喜足)의 무탐(無貪)을 본질로 하며, 네 번째 요단수(樂斷修, ‘단’은 이계, ‘수’는 성도의 뜻)는 앞의 세 성종을 자량으로 하는 것이며, 이 역시 능히 탐을 대치하기 때문에 무탐을 본질로 한다.(본론 제59권 ‘4성종’ 참조)
56)
증정(證淨)이란 4제의 이치를 증득할 때 낳아지는 불ㆍ법ㆍ승 삼보(三寶)와 계(戒)에 대한 청정한 무루의 믿음[信]을 말한다.(본론 제72권에서 상론함)
제72권
1)
증정(證淨, avetyaprasāda, 혹은 不壞淨)이란 4제의 이치를 증득함으로써 낳게 되는 불ㆍ법ㆍ승 삼보와 계(戒)에 대한 청정한 무루의 믿음[信]이다.
2)
『잡아함경』 제30권 제833-836경(대정장2,p.214상중). 여기서는 불괴정(不壞淨)이라는 말로 설하고 있다. 구역어는 증해정신(證解淨信).
3)
견도위에서 고ㆍ집ㆍ멸제를 증득할 때는 무루심이 구기하여 그러한 3제의 이치를 믿게 되는데, 이러한 믿음을 법(法)증정이라고 하며, 그러한 무루도에는 반드시 수심전(隨心轉)의 도구계(道俱戒)가 구기(俱起)하는데, 이를 계(戒)증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도제를 관찰할 때 비로소 부처[佛]를 성취하는 온갖 무학법과, 성문의 승(僧)을 성취하는 유학ㆍ무학법에 대한 무루의 믿음이 생겨나기 때문에 앞의 두 증정에다 다시 불(佛)증정과 승(僧)증정을 획득한다고 한 것이다.(후술)
4)
참고로 성자에 의해 애호되는 계(戒)는 무루의 현관(現觀)과 구기하기 때문에 반드시 법증정과 함께 획득된다.
5)
법증정에 있어 법이란, 총체적으로 말하면 4제 전체이지만, 개별적으로 말하면 고ㆍ집ㆍ멸의 3제 전부와 네 번째 도제 중의 보살도(未知當知根과 已知根 등의 유학법)와 독각도(미지당지근과 이지근의 유학법과 具知根 등의 무학법)로서, 보살과 독각은 각기 독자적으로 출세하기 때문에 승증정(僧證淨)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다. 참고로 승가는 최소한 10인(변방은 5인) 이상임.
6)
앞(제71권)에서 37보리분법의 본질은 열 가지라고 하였지만, 『대비바사론』(제96권)에 의하면 이는 유설(有說)이고, 비바사사(毘婆沙師)의 설은 열한 가지, 혹은 열두 가지이다. 즉 계를 본질로 하는 각분인 정어ㆍ정업ㆍ정명을 각기 각분의 갈래로 삼으면 열두 가지이고, 신ㆍ어업을 각분의 갈래로 삼으면 열한 가지이다.(본론 제71권 주14 참조) 여기서 ‘계의 일곱 갈래’란 신업의 세 가지(殺生ㆍ不與取ㆍ欲邪行)와 어업의 네 가지(虛誑語ㆍ離間語ㆍ麤惡語ㆍ雜穢語). 즉 이러한 일곱 가지를 계(戒)와 대체할 경우, 각분의 본질은 열여섯 가지가 되거나, 혹은 열여덟 가지 혹은 열일곱 가지가 되어야 한다.
7)
계를 본질로 하는 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 중에서 정어는 어업이고, 정업ㆍ정명은 신업이다.
8)
그럴 경우 각분의 본질은 열두 가지가 된다.(주6 참조)
9)
본론 제71권 주14)의 본문 참조.
10)
즉 4념주의 신(身)ㆍ수(受)ㆍ심(心)ㆍ법(法)도 각기 다수의 종류가 존재하지만--이를테면 ‘신’에는 4대종과 소조색, ‘수’에는 3수, ‘심’에는 6식, 법은 그 밖의 모든 법--, 그것을 다만 각기 하나로 설정하였다는 뜻이다.
11)
예컨대 고제를 관찰할 때의 법증정 내지 도제를 관찰할 때의 법증정 등.
12)
그러나 『구사론』(제25권, 고려장27,p.642상중; 대정장29,p.133하; 권오민 역, p.1163)에 의하면, 4증정은 4제의 현관(現觀)으로부터 출관할 때 행자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믿음의 순서에 의한 것으로, 먼저 불세존이 정등각임을 믿고, 다음으로 정법(正法)과 비나야(毘奈耶)가 선설(善說)임을 믿으며, 성승(聖僧)이 미묘한 행자임을 믿을 때 마음이 청정해져 청정한 시라(즉 무루의 도공계)가 일어나기 때문에 불ㆍ법ㆍ승ㆍ계의 순서로 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불ㆍ법ㆍ승은 양의와 양약과 간병인에 비유하여, 3보에 대한 청정한 믿음을 갖출 때 시라가 현전하는 것은 마치 이러한 양의와 양약과 간병인을 만날 때 비로소 병이 제거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13)
『중아함경』 제49권 「성도경(聖道經)」(대정장1,p.736중); 동 제47권 「오지물주경(五枝物主經)」(대정장1,p.721하). 여기서 8지(支)란 8성도지를 말하며, 10지란 여기에 정해탈(正解脫)과 정지(正智)를 더한 것을 말한다.
14)
여기서 두 가지의 지(智)란 유위와 무위의 두 해탈을 아는 지로서, 진지와 무생지를 말한다. 이러한 두 가지 지가 바로 정지(正智)의 본질이다.
15)
무위해탈은 택멸을 본질로 하는 것으로, 불변부동이기 때문에 ‘무위’라고 한 것이며, 유위해탈은 그러한 무위해탈을 인가하여 결정짓는 승해를 본질로 하는 것으로, 부동이 아니기 때문에 ‘유위’라고 한 것이다.
16)
원문에는 ‘前復有曰說’로 되어 있으나 『현종론』 제34권(고려장28,p.252중)과 송(宋)ㆍ원(元)ㆍ명본(明本) 등에 따라 ‘前復有二’로 고쳐 번역하였다.
17)
원문에는 ‘십성신(十聖身)’으로 되어 있으나 문맥상 혹은 『현종론』 제34권(고려장28,p.252중)과 송(宋)ㆍ원(元)ㆍ명본(明本) 등에 따라 ‘칠(七)성신’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18)
이는 『구사론』 제25권(고려장27,p.642중하; 대정장29,p.133하; 권오민 역,p.1165) 상에서의 정설로서, 『잡아함경』 제8권 제211경(대정장2,p.53중), “--亦當不久得盡諸漏, 無漏心解脫慧解脫, 現法自知作證. ‘我生已盡 梵行而立 所作已作.’ 自知不受後有”에 근거한 것이다. 여기서 심해탈은 심왕과 상응하는 승해를, 혜해탈은 혜와 상응하는 승해를 본질로 하는 것으로, 이러한 두 가지 승해가 5분법신(分法身)중의 해탈온(즉 正解脫)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19)
즉 유부가 무학의 정견(正見)ㆍ정지(正智)와 상응하는 승해를 해탈온의 본질이라고 한 데 반해, 심소의 개별적 실재성을 부정하는 경주(혹은 경부)는 번뇌를 떠난 마음 자체를 해탈온(정해탈)의 본질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11권 ‘수ㆍ상ㆍ사ㆍ촉을 제외한 나머지 대지법에 대한 해명과 상좌 설 비판(續)’ 중 ‘승해’에 관한 상좌 설을 참조할 것.
20)
『잡아함경』 제21권 제565경(대정장2,p.148하-149상), “如來應等正覺說四種淸淨. 戒淸淨ㆍ心淸淨ㆍ見淸淨ㆍ解脫淸淨.--云何爲解脫淸淨斷? 謂聖弟子貪心無欲解脫, 瞋恚心無欲解脫. 如是解脫未滿者令滿, 已滿者隨順攝受, 欲精進乃至常攝受. 是名解脫淨斷苦種.” 즉 경에서 해탈의 청정 수승함은 마음이 탐 등으로부터 이염 해탈한 것이라고 하였을 뿐 승해라고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탈온의 본질은 승해가 아니라 이염 해탈한 마음이라는 것이다.
21)
『구사론』 제25권(고려장27,p.642하; 대정장29,p.133하; 권오민 역,p.1165).
22)
주20)의 경(대정장2,p.148하), “云何名爲心淸淨斷? 謂聖弟子欲惡不善法 乃至第四禪具足住, 定身未滿者令滿, 已滿者隨順執受, 欲精進乃至常執受. 是名心淨斷苦種.”
23)
본론 제11권 ‘수ㆍ상ㆍ사ㆍ촉 이외 나머지 대지법에 대한 해명과 상좌 설 비판(續)’ 중 ‘삼마지(三摩地)’에 관한 논설 참조. 즉 여기서는 “정(定, 즉 등지)에 들지 않으면 마음이 해탈한 것이 아니다”고 하여 등지로 인해 마음이 해탈하게 되는 것이라고 논설하였다. 다시 말해 마음이 번뇌의 더러움으로부터 떠나[離垢] 해탈한 것을 바로 등지라고 하지 않았다.
24)
다시 말해 경설(주20)에 따라 해탈온을 다만 마음이 번뇌의 더러움에서 떠난 것[心離垢]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설하기 앞서 설한 마음의 청정함[心淸淨]에 대한 법문(주22)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는 뜻이다.
25)
여기서 ‘승해와 동일한 취집의 법’이란 승해와 상응 구기하는 법이다.
26)
『발지론』 제1권(대정장26,p.922중), “何等心解脫? 過去耶? 未來耶? 現在耶? 答: 未來無學心生時, 解脫一切障.(어떠한 마음이 해탈하는가? 과거의 것인가, 미래의 것인가, 현재의 것인가? 미래에 무학의 마음이 생겨날 때 모든 장애로부터 해탈한다.)” 여기서 ‘최초의 무학의 마음’이란 무학의 첫 찰나의 진지(盡智)를 말한다. 그리고 ‘장애’란 이러한 무학의 마음이 생겨나는 것을 방해하는 번뇌의 ‘득’을 말하는 것으로, 그것이 금강유정(유정지 9품 斷道)에 의해 끊어지고 나면 더 이상 어떠한 장애도 없어 무학의 첫 찰나의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진지가 미래 생겨날 때, 다시 말해 정생위(正生位, 막 생겨나려고 하는 상태)에 이를 때 ‘바로[正] 해탈한다’고 말한 것이다. 참고로 진지가 이미 생겨났으면 이미 해탈한 상태로서, 이를 ‘이(已)해탈’이라 한다.
27)
견도위와 수도위의 유학 역시 일부의 번뇌를 끊었기 때문이다.
28)
자성해탈이면서 상속해탈이 아닌 것은 유학의 무루심이며, 상속해탈이면서 자성해탈이 아닌 것은 무학의 세속심이며, 자성해탈이면서 상속해탈인 것은 무학의 무루심이며, 둘 다 아닌 것은 그 밖의 세속심이다.
29)
원문은 ‘無間道現趣已滅, 及解脫道現趣已生, 爾時無學心名從障解脫.’ 『발지론』 제1권(대정장26,p.922중), “若無間道金剛喩定正滅, 解脫道盡智正生, 爾時名‘未來無學心生時, 解脫一切障.’” 참고로 『구사론』 제25권(고려장27,p.642하; 대정장29, p.134상; 권오민 역,p.1166)에서는 “금강유정(金剛喩定)이 막 소멸하려고 하는 상태[正滅位] 중에서 번뇌의 득(得, 즉 장애)이 바로 끊어지고, 첫 번째 무학의 마음이 막 생겨나려고 하는 상태[正生位]에서 바로[正] 해탈을 획득한다.(金剛喩定正滅位中, 彼得正斷, 初無學心正生位, 正得解脫)”고 논설하고 있다.
30)
즉 무학의 마음이 생겨나는 것을 장애하는 번뇌의 ‘득’을 끊는 것은 무간도(즉 금강유정)의 어떠한 상태인가 하는 물음. 이에 대해서는 앞 단(‘무학이 정해탈하는 때’)에서 이미 “무간도가 막 멸하려고 하는 상태[正滅位]에서 장애가 끊어진다”고 논설하였지만, 여기서는 이를 주제로 보다 광설(廣說)한다. 참고로 ‘장애를 끊는다’고 함은 현재 번뇌의 득(得, 즉 法俱得)을 쇠퇴하게 하여 그것이 더 이상 후 찰나의 ‘득’을 인기하여 생상위(生相位)에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한다.
31)
전항(前項) ‘무학이 정해탈하는 때’ 참조.
32)
본 단은 정해탈(正解脫)의 방론으로, “금강유정이 막 멸하려고 할 때[正滅時] 진지(盡智)의 장애가 끊어지고 바로 해탈한다”고 한다면, 정해탈할 때의 마음은 염오한 마음[有染心]인가, 염오함이 없는 마음[無染心]인가? 에 대해 논설한다. 이에 대해 유부에서는 정해탈할 때는 이미 진지의 장애가 끊어졌을 뿐더러 염오심이 해탈한다는 것은 이치상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무염(예컨대 無貪ㆍ無瞋ㆍ無癡 등)의 마음이 정해탈한다고 주장하지만, 분별논자(대중부)는 “마음이 탐으로부터 지금 [바로] 해탈을 획득한다”는 경설(經說)에 따라 유염의 마음이 정해탈한다고 주장한다. 즉 그들에 의하는 한 유염의 마음은 본질적으로 청정한 것[本淨]이기 때문이다.(後說)
33)
외도들은 비록 4제의 통찰을 통해 5부(部)의 결을 끊은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세간도로써 이염(離染)하여 탐 등의 박(縛)을 끊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정해탈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즉 외도도 이염의 마음으로 정해탈하거늘 하물며 성자가 어찌 유염(有染)의 마음으로 정해탈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후설)
34)
원문은 ‘心本性淨 有時客塵煩惱所染.’ 『대비바사론』 제27권(대정장27,p.140중), “彼(分別論者)說, ‘心本性淨. 客塵煩惱所染法, 故相不淸淨.’”(『사리불아비담론』 제27권,p.697중, ‘心性淸淨, 爲客塵染’ 참조) 이는 전통적으로 대중부의 설로 알려진다.(『이부종륜론』, 대정장49,p.15하. ‘心性本淨, 客隨煩惱之所雜染, 說爲不淨’)
35)
대중부에 의하는 한, 수면이 상응법(심소)이라면 도와 구유(俱有)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기 때문에 수면은 불상응법이다.(본론 제45권 ‘수면은 불상응법이라는 분별논사 설 비판’ 참조) 그러나 만약 대치도는 이러한 불상응의 수면을 끊는 것이기에 대치도와 번뇌는 구행(俱行)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지금 바로 해탈을 획득하였다”고 한 ‘유탐의 마음’은 무엇이라 해야 할 것인가? 현행의 번뇌(纏 즉 심소)라고 해야 할 것인가, 불상응의 수면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하는 힐난.
36)
본론 제45권 ‘수면은 불상응법이라는 분별논사 설 비판’ 참조.
37)
다시 말해 분별논자는 “유탐(有貪)의 마음이 지금 바로 해탈을 획득한다”고 하였지만, 그들의 논의에 따르는 한 도가 끊는 것은 전(纏, 즉 현행의 번뇌)이 아니라 수면(隨眠)이며, 그럴 경우 유탐의 마음 또한 불상응법의 수면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힐난.
38)
파지가 즉 수정에 나타나는 여러 현색은 파지가 자체의 현색의 차별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다른 색이 그렇게 비쳐진 것이라는 뜻이다.
39)
본래 청정한 마음이 객진(客塵)인 염오한 심소와 상응함으로써 염오한 마음이 되었다고 한다면, 반대로 염오한 심소(즉 번뇌) 또한 본래 청정한 마음과 상응하였기 때문에 청정한 마음으로 바뀔 수 있다고 해야 한다. 만약 객진의 염오한 심소는 청정한 것으로 바뀌지 않지만, 본래 청정한 마음은 염오한 것으로 바뀔 수 있다고 한다면, 양자가 차별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힐난.
40)
다시 말해 과거와 미래의 번뇌는 작용을 갖지 않기 때문에 청정한 마음과 상응하지 못하며, 따라서 청정한 마음을 더렵혔다고 한다면, 그것은 필시 마음과 구행(俱行)하는 번뇌라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41)
예컨대 무탐(無貪) 등과 상응하는 마음이 선심이라면, 탐 등과 상응하는 마음은 불선심이다. 참고로 그 밖의 심소와 상응하는 것은 무기심이다.(본론 제4권 ‘[18계]의 선 등의 3성 분별’ 참조)
42)
즉 마음은 대체로 무기성이지만(前註 참조), 마음의 상속 중에 객진(客塵)의 번뇌(염오의 심소)가 획득되는 것에 대해 경에서는 “마음의 본래 성품은 청정하지만, 어느 때 객진의 번뇌에 의해 더럽혀졌다”고 설하였다는 것이다.
43)
이는 다만 탐과 상응하는 마음뿐만 아니라 탐과 상응 구기하는 그 밖의 법을 획득할 때도 ‘유탐심(有貪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물음이다.
44)
예컨대 탐과 구기하는 심ㆍ심소법에 대해서만 바야흐로 ‘유탐심(有貪心)’이라고 말할 수 있다.
45)
탐과 진(瞋)ㆍ치(癡)는 상응하기 때문에, 탐을 일으킨 마음에 대해서도 역시 ‘진에나 우치를 갖는 마음’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뜻이다.
46)
“누(āsrava, 즉 번뇌)와 상응하고, 누의 경계가 되며, 누가 따라 증장[隨增]하는 것을 유루(sāsrava)라고 한다.”(본론 제1권 ‘유루법과 유루의 의미’ 참조)
47)
본론 제53권 ‘유수면심(有隨眠心)’ 참조.
48)
『잡아함경』 제17권 제464경(대정장2,p.118중), ‘若斷界無欲界滅界, 是名諸解脫界.
49)
이(離)ㆍ단(斷)ㆍ멸(滅)의 3계(界)는 모두 택멸(무위해탈)을 세속[假說]에 근거하여 달리 표현한 것일 뿐, 승의의 관점[實事]에서 본다면 본질적으로 어떠한 차별도 없는 것으로, 각각의 택멸은 모두 ‘단’도 되고, ‘이’도 되며, ‘멸’도 된다는 뜻이다.
50)
『구사론』 제25권(고려장27,p.643상; 대정장29,p.134상; 권오민 역,p.1169)에서는, 탐 등의 수면에 의해 수증된 그 밖의 온갖 법[事]을 멸한 것을 멸계(滅界)라고 하였다.
51)
원문은 ‘彼師說, 愛有緣八結’로 되어 있지만, 앞의 유여사의 논설방식(彼說, 能繫有緣八結’)에 따라 ‘愛’를 ‘能染’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52)
여기서 ‘유위’란 해탈의 소연이 되는 끊어지고[所斷] 떠나게 되고[所離] 멸해지는[所滅] 법이다.
53)
무위해탈(즉 택멸) 자체는 단일하지만, 경에서는 떠나고 끊고 멸하는 대상(즉 유위법)에 근거하여 세 가지 형태로 가설한 것으로, 대개 애(탐결)에 대해서는 ‘떠났다[離]’고 설하였고, 그 밖의 결(結)에 대해서는 ‘끊었다[斷]’고 설하였으며, 이에 수반되는 제온에 대해서는 ‘멸하였다[滅]’고 설하였지만, ‘애’에 대해서도 역시 끊었다거나 멸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54)
“일체의 행을 떠난 것을 일컬어 이계(離界)고 하며, 일체의 행이 멸한 것을 일컬어 멸계(滅界)라 한다.”
55)
이석(異釋). 유부에서는 3계의 체성은 무위해탈로서 단일하지만 반연하는 바에 따라 세 가지로 가설한 것이라고 하였지만, 여기서 이설자는 3계의 체성은 각기 다르며, 그것의 총합을 무위해탈이라고 해석하였다.
56)
‘일체의 행’은 유루 무루의 일체의 모든 유위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유루법에 상위개념이다. 즉 다른 경에서 이미 단(斷)ㆍ이(離)ㆍ멸(滅)에 대해 차별하여 분별하였기 때문에 여기서 ‘일체의 행’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을지라도 그것은 ‘온갖 유루법’을 가리킨다는 해명.
57)
『중아함경』 제54권 「아리타경(阿梨吒經)」(대정장1,p.774하; 한글대장경 『중아함경』3, p.273).
58)
앞에서 다른 경에서 단(斷) 등에 대해 분별하면서 ‘온갖 유루법’이라고 분별하였기 때문에 3계(界)에 대해 설해진 ‘일체의 행’이라는 말도 유루법을 의미한다고 하였지만(주56 참조), 뗏목에 비유하여 유루법뿐만 아니라 무루법도 끊어야 할 것이라고 설하였기 때문에 ‘일체의 행’이라는 말이 반드시 유루법만을 의미한다고는 볼 수 없다는 힐난.
59)
원문은 ‘若從諸行貪愛永斷’이지만, 이어지는 대응구 ‘若於諸行煩惱不生--’에 따라 ‘종(從)’을 ‘어(於)’로 고쳐 번역하였다.
60)
원문은 ‘若假若實, 俱無亂故.’ 즉 앞에서 이(離)ㆍ단(斷)ㆍ멸(滅)의 3계(界)는 소연에 따른 언어적 차별[假說]일 뿐 그것의 실제적인 본질[實事]은 모두 무위해탈로서 단일한 것이라고 하였다.
61)
즉 세 가지 상(想)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지만, 탐결(貪結)을 떠나려고 생각하는 것을 ‘이상(離想)’이라 하였으며, 그 밖의 8결을 끊으려고 생각하는 것을 ‘단상(斷想)’이라 하였으며, 그밖에 탐 등의 온갖 결에 의한 일체의 계박을 멸하려고 생각하는 것을 ‘멸상(滅想)’이라고 하였다.
62)
여기서 ‘고요함[靜, śānta]’은 탐ㆍ진ㆍ치의 3재(災)가 종식된 것, ‘미묘함[妙, praṇīta]’은 어떠한 괴로움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 각기 멸성제의 네 행상 중의 하나였다.
제73권
1)
앞의 「현성품」이 수행의 과보로서 현자와 성자에 대해 밝힌 것이라면, 본 품과 다음의 「분별정품(定品)」은 그와 같은 성과(聖果)를 획득하게 되는 인연에 대해 밝힌 것인데, 본품 전반부(제73권과 제74권)에서는 온갖 유형의 지(智)에 대해, 후반부(제75권과 제76궈)에서는 그러한 ‘지’에 의해 성취되는 공덕에 대해 논설하고 있다.
2)
무학의 정견(正見)이란 퇴법 등의 아라한이 진지(盡智) 이후에 일으키는 무루혜를 말하며(본론 제66권 ‘진지 이후에 생겨나는 지’ 참조), 정지(正智)란 정견을 드러내는 진지와 무생지를 말한다. 본론 제72권 ‘무학의 정해탈과 정지(續)’ 참조.
3)
『구사론』 제26권(고려장27,p.643하; 대정장29,p.134중;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 p.1171)에서는 “인(忍)이면서 지(智)가 아닌 것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지’이면서 견(見)이 아닌 것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爲有忍非智耶? 爲有智非見耶?)”로 묻고 있다. 그러나 ‘인’은 ‘견’을 본성으로 하기 때문에, 그 뜻이 ‘견’과 동일하다. 인(忍, kṣānti)과 지(智, jñāna)와 견(見, dṛṣṭi)은 모두 혜(慧)의 다른 작용으로, ‘인’은 4제의 진리를 인가(忍可)하면서도 아직 결단에 이르지 않은 것을 말하며, ‘지’는 그것을 확정하고 결단(決斷)하는 심리작용을 말한다. 그리고 ‘견’은 추리 판단[推度]의 작용을 말한다. 이하 「변지품」의 총설로서, 이 세 가지 사이의 법상적 의의에 대해 밝힌다.
4)
8인(고법지인 내지 도류지인)은 그것에 의해 끊어지는 의(疑)와 구생하여 그것을 끊는 단계로서, 아직 ‘의(疑)’의 득(得)에 장애되기 때문에 능히 결단(決斷)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인’은 일찍이 관찰한 적이 없었던 4제의 이치를 지금 비로소 관찰하는 것으로, 아직 거듭하여 관찰하지 않았기 때문에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지(智)는 아니지만, 이 역시 추리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견(見)’의 성질이다.
5)
“이미 추구하려고 하는 마음이 지식(止息)되어 추리 판단하지 않기 때문이다.”(『구사론』, 고려장27,p.643하; 대정장29,p.134중; 권오민 역,p.1172)
6)
다섯 가지 염오견이란 유신견ㆍ변집견ㆍ사견ㆍ견취ㆍ계금취로서, 이것이 ‘견’을 본질로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본론 제46권 주1) 참조.
7)
원문에는 신명주(身命住)로 되어 있으나 『현종론』 제35권(고려장28,p.255중)과 송(宋)ㆍ원(元)ㆍ명본(明本)에 따라 ‘신념주’로 고쳐 번역하였다.
8)
즉 항아리는 흙 물 등의 화합물로서 깨어지면 본성을 상실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지식은 진실이 아니지만, 세속의 언어적 관념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지(智)’라고 하였다는 뜻이다. 본론 제58권 ‘2제설:총설’(주46) 참조.
9)
예컨대 유루의 6행상이나 4선근의 수소성혜처럼 승의의 경계대상이나 4제 16행상을 반연하여 일어나는 세속지(말하자면 4성제에 대한 개념적 이해)도 존재하지만, 그것은 다만 세속의 정견ㆍ정지로 일컬어진다.
10)
원문은 ‘복(復)’으로 되어 있지만, 『현종론』(제35권, 고려장28,p.255하)와 다른 판본에 따라 ‘부(覆)’로 고쳐 번역하였다.
11)
세속지의 경계대상에 대해서는 본론 제74권 ‘특히 세속지의 소연경(所緣境)’에서 상론한다.
12)
“최초로 제법의 참된 이치를 깨달아 알았기 때문에 ‘법지’라고 이름한 것이며, 이 다음의 경계(상 2계의 고제)에 대한 지(智)는 앞의 ‘지’와 서로 유사하기 때문에 ‘유지’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으로, 뒤의 ‘지’는 앞의 ‘지’에 따라 그러한 경계(상2계의 苦法)의 뜻을 깨달아 알았기 때문이다. 혹은 앞의 ‘지’에 따라 생겨났기 때문에 뒤의 ‘지’는 앞의 ‘지’의 종류[類]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으로, 세간에서 자식은 바로 아버지의 종류[父類]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본론 제62권 ‘16심 현관’ 중 ‘그 밖의 15심’ 참조)
13)
즉 경에서 “정혜(正慧)로써 일체법을 비아(非我)로 관찰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무루혜는 말 그대로 고제(苦諦)에 포섭되는 법뿐만 아니라 일체의 제법을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그 후 다시 “고제를 싫어한다”고 설한 것은 다만 구체적 대상(행상)을 나타낸 것일 뿐이라는 뜻이다.
14)
『발지론』 제8권(대정장16,p.957중; 한글대장경176,p.173), “云何法智? 答: 於欲界諸行, 諸行因, 諸行滅, 諸行能斷道所有無漏智. 又於法智及法智地所有無漏智. 是謂法智.”
15)
즉 욕계의 행을 대치하는 것에는 색계의 제행도 포함될 수 있지만(그럴 경우 이는 遠分對治이다. 次註 참조), 욕계의 행을 끊은 것은 오로지 욕계의 무간도뿐이다.
16)
원분대치란 앞서 끊어진 번뇌의 득(得)으로 하여금 더욱 멀어지게 하는 대치도.(본론 제55권 ‘4종의 대치’ 참조) 즉 이설자의 힐난대로 본론(本論)에서 “[도]법지는 욕계 제행의 대치를 반연하는 무루지”라고 설하였다면, 유지(類智)의 품류 역시 욕계제행의 원분대치가 되기 때문에 [도]법지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대치’라는 말은 다수의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끊는다[斷]’는 말에 비해 구체적이지 않다.
17)
원문은 ‘以緣苦集六種行相, 緣有頂蘊爲境界故’이지만, 『구사론』(제26권, 고려장27,p.644상; 대정장29,p.134하)에 따라 뒤의 문장의 ‘연(緣)’을 ‘관(觀)’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진지와 무생지는 4제에 대한 자각(自覺)의 지(智)이기 때문에 그 자체의 본질은 법지와 유지이다. 즉 이러한 진지와 무생지는 유정지(有頂地)의 4제를 관찰할 때 생겨나는 것으로, 처음에 고제 하의 비상(非常)과 고(苦)의 행상, 집제 하의 인(因)ㆍ집(集)ㆍ생(生)ㆍ연(緣)의 네 행상으로써 유정지의 4온을 관찰하고 나서 생겨나기 때문에, 최초로 생겨나는 것은 오로지 고ㆍ집류지라고 한 것이다. 참고로 고제의 공ㆍ비아의 행상을 짓지 않는 것은 출관(出觀) 후 “‘나’는 생이 이미 다하였다”는 등의 세속심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18)
이는 유정지 제9품의 혹(惑)을 끊는 금강유정(金剛喩定, 진지의 전 찰나)과 진ㆍ무생지의 경계의 동이(同異)에 대해 분별한 것. 금강유정에는 유정지의 고ㆍ집제(4온)를 반연하는 고ㆍ집류지도 있고, 9지의 멸ㆍ도제를 반연하는 멸ㆍ도법지와 멸ㆍ도류지도 있는데(도법지와 멸법지는 상계의 수혹도 대치한다. 본권 ‘법지와 유지의 대치력의 한계’ 참조), 전자의 경우는 진ㆍ무생지의 첫 찰나(즉 고ㆍ집류지)와 경계가 동일하지만, 후자는 경계가 다르다.
19)
“문:어떠한 까닭에서 진지라고 이름한 것인가? ‘다함’을 반연하였기 때문에 진지라고 이름하게 된 것인가, 번뇌가 다한 소의신 중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진지라고 이름하게 된 것인가?--만약 ‘다함’을 반연하였기 때문에 진지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라면, 진지는 오로지 멸성제만을 반연한 것이니, 이것이 4성제를 반연한 것이라고 설해서는 안될 것이며, 만약 번뇌가 다한 소의신 중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진지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라면, 무생지도 무학의 정견도 역시 진지라고 말해야 할 것이니, 그것 역시 번뇌가 다한 소의신 중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20)
여기서 ‘아홉 종류의 지(智)’란 10지 중 타심지를 제외한 아홉 종류. 이하 타심지에 대해 논설한다.
21)
무루의 심ㆍ심소법은 4제 중 오로지 도제에 포섭된다.
22)
다시 말해 “3념주도 역시 유루심을 반연하는 무루의 타심지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뜻이다. 여기서 3념주란 불타의 18불공법(不共法)의 하나로, 제자들이 한결같이 공경하고 능히 올바로 수지(受持)하여 행하더라도 이를 반연하여 기뻐하지 않고, 공경하지 않고 올바로 수지하여 행하지 않더라도 이를 반연하여 근심하지 않으며, 어떤 부류는 공경하고 어떤 부류는 공경하지 않더라도 이를 반연하여 기뻐하거나 근심하는 않고서 정념(正念)과 정지(正知)에 안주하는 것. 본론 제75권에서 상론함.
23)
즉 둔근(鈍根)의 불환(신해)과 아라한(시해탈)의 타심지는 이근(利根)의 불환(견지)과 아라한(불시해탈)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참고로 견도위에서는 타심지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수신행ㆍ수법행의 타심지라는 말은 없다.(후술)
24)
“[이러한 타심지는] 오로지 현재 다른 상속 중의 마음 따위만을 능히 소연의 경계로 삼기 때문이다.”(『구사론』 제26권, 고려장27,p.644중; 대정장29,p.135상; 권오민 역,p.1176)
25)
법지는 욕계의 견ㆍ수혹의 대치만을 소연의 경계로 삼기 때문에 그것에 포섭되는 타심지는 유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며, 유지는 색ㆍ무색계의 견ㆍ수혹의 대치만을 소연의 경계로 삼기 때문에 그것에 포섭되는 타심지는 법지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즉 그것들은 경계로 삼는 대상의 범위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26)
견도의 관찰은 공상(共相)의 이치를 전체적으로 관찰[總觀]하는 것이지만, 타심지는 한 유정의 일찰나의 마음을 개별적인 소연[別緣]으로 삼는 것이기 때문에, 또한 견도는 지극히 빠르게 일어나 다른 이의 마음을 알 겨를이 없기 때문에, 견도위에는 타심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27)
성문은 오로지 견도위의 처음 두 찰나(고법지인ㆍ고법지)의 마음만을 알 뿐 그 이상은 알지 못한다. 즉 제3ㆍ제4찰나는 유지의 부분(고류지인ㆍ고류지)이기 때문으로, 만약 유지의 마음을 알려면 13찰나의 가행이 필요하지만, 그럴 경우 상대방도 관지(觀智)를 승진시켜 13찰나를 거쳐 제16찰나의 수도위에 들기 때문에 처음 두 찰나 이상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대비바사론』 제100권, 대정장27, p.515하 참조)
28)
독각은 성문과 마찬가지로 법지 부분[法分]의 가행으로 앞의 두 찰나의 마음을 알며, 다시 유지 부분[類分]을 알기 위해 새로이 가행을 일으킬 때, 독각은 5찰나에 가행을 원만히 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제8심인 집류지와 구행(俱行)하는 마음을 안다. 왜냐하면 독각은 성문보다 이근이기 때문에 하등의 가행(적은 가행)에 의해서도 다른 이의 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대비바사론』 제100권, 상동)
29)
“12찰나를 거처야 가행이 원만해지기 때문이다.”(『대비바사론』 제100권, 상동)
30)
이하 방론으로, 타심지는 마음[心]뿐만 아니라 심소도 역시 아는 것인데, 어떠한 까닭에서 ‘타심소지(他心所智)’라고 하지 않고 ‘타심지(他心智)’라고 이름한 것인가에 대해 논설한다.
31)
어떤 법의 명칭은 자성ㆍ대치ㆍ가행ㆍ상응ㆍ소의ㆍ소연ㆍ행상 등에 근거하여 붙이게 된 것으로, 다른 이의 마음을 알고자하는 가행에 근거하여 ‘타심지’라고 이름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공무변처나 식무변처 등도 역시 가행에 근거한 명칭이다.(본론 제77권 ‘무색계 각 처의 명의’; 『대비바사론』 제99권, 대정장27,p.513상 참조)
32)
『대비바사론』 제99권(대정장27,p.513상), “마음을 먼저 [알게] 되면 심소도 역시 알게 되기 때문으로, 어떤 사람이 다만 왕을 보고자하여 왕을 보았으면 신하도 역시 보는 것과 같다.”
33)
여기서 ‘지’는 결단(決斷) 혹은 거듭하여 아는 것을 말하며, ‘견’은 추구(推求) 혹은 현조(現照)를, ‘명’은 조명(照明)을, ‘각’은 각오(覺悟)를, ‘해’는 달해(達解)를, ‘혜’는 간택(簡擇)을, ‘광’은 혜광(慧光)을, ‘관’은 관찰(觀察)을 말하는 것으로, 이 여덟 가지는 모두 ‘혜’의 이명(異名)이다.(『구사론기』 제26권, 대정장41,p.386상)
34)
『품류족론』 제1권(대정장26,p.694상; 한글대장경117,p.24).
35)
이는 무분별의 무루지가 어떻게 ‘나는 이미 알았고, 끊었고, 작증하였고, 닦았다’는 차별적 분별을 알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해명이다. 즉 그러한 앎의 자각은 무분별의 무루인 진ㆍ무생지로부터 직접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출관(出觀)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두 가지 유루의 세속지는 바로 진지와 무생지의 사용과(士用果)이다.(후술) “무루관 중에서는 이와 같은 행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요컨대 두 지 이후에 이러한 분별을 일으키게 된다.”(『대비바사론』 제102권, 대정장27,p.529중; 한글대장경122,p.46)
36)
여기서 ‘이러한 지’란 스스로를 자세하게 관찰하는 지로서, ‘나는 이미 고제를 알았다’는 등의 지와 ‘이미 알아 더 이상 알 것이 없다’는 등의 지. 이는 각기 진지와 무생지의 사용과로서 일어나는 후득지(後得智)이다.
37)
이는 『구사론』(제26권, 고려장27,p.644하; 대정장29,p.135중; 권오민 역,p.1179) 상의 정설이다. 즉 앞에서 진지와 무생지는 ‘견’의 성질이 아니라고 하였는데(주5의 본문 참조), 『품류족론』에서 그것을 어떻게 ‘견’으로 설명한 것인가 하면, 그것은 다만 진의가 아닌 편의상의 설명이라는 것이다.
38)
앞서 논설한대로 그때는 이미 추리하여 판단[推度]하려는 성질인 ‘견’이 아니라 결정적 판단[決斷]의 성질인 ‘지’가 현행한다.
39)
주33) 참조.
40)
『품류족론』 제1권(대정장26,p.694상; 한글대장경117,p.24). “諸所有見者, 且諸智亦名見. 有見非智, 諸八現觀邊忍.” 이는 주34)의 인용문 바로 다음에 설해지고 있다.
41)
8인(忍)이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42)
앞서 인용한 『품류족론』(주34)에서는 ‘나는 이미 고를 알았으니, 더 이상 알아야 할 것이 없다’는 등의 지(智)를 무생지라고 하였다.
43)
즉 경에서는 “열반의 획득을 마음속에 새겨두어야 한다”는 말을 “열반을 마음 중에 새겨두어야 한다”고 하여 ‘열반의 획득’을 ‘열반’이라고 설하였듯이, ‘비택멸(緣缺不生法)의 득’을 ‘무생’이라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44)
‘2지(법ㆍ유지)의 8지로의 전개’ 중 진지(盡智) 참조. 즉 “무생에 의탁한 것이기에 무생지라고 이름하였다”에서 ‘[무생에] 의탁하다’는 말은 무생지의 근거를 나타내는 것으로, 무생이 무생지의 소연(경계대상)은 아니라는 뜻이다.
45)
세속지는 세속지 전부와 타심지의 일부(즉 유루의 타심지)를 포섭한다.
46)
법지와 유지는 각기 동류의 지(智) 전부와 고ㆍ집ㆍ멸ㆍ도지와 진ㆍ무생지와 타심지의 일부를 포섭한다.
47)
고ㆍ집ㆍ멸지는 각기 동류의 지 전부와 법ㆍ유지와 진ㆍ무생지의 일부를 포섭하며, 도지는 도지 전부와 법ㆍ유지와 진ㆍ무생지와 타심지의 일부를 포섭한다.
48)
타심지는 타심지 전부와 법ㆍ유지와 도지와 세속지의 일부를 포섭한다.
49)
진지와 무생지는 각기 동류의 지 전부와 고ㆍ집ㆍ멸ㆍ도지와 법ㆍ유지의 일부를 포섭한다.
50)
고지와 집지(즉 5취온)는 경계가 동일하지만, 행상이 다르기 때문에 각기 별도로 설정하였다. 4제지(諦智)의 행상에 대해서는 본론 제74권 ‘16행상의 실체와 명의(名義)’에서 상론함.
51)
이는 타심지가 다른 이의 마음[心]뿐만 아니라 마음의 작용[心所]도 아는 지인데, 어째서 타심소지(他心所智)라고 하지 않고 타심지(他心智)라고 하게 되었던가에 대한 해명으로, 가행의 동기에 근거하여 그 같은 명칭으로 설정하게 되었다.(주30 참조)
52)
‘[해야 할] 일이 이루어진 소의신’이란 해야 할 일을 이미 다 성취한[所作已辦] 무학의 소의신을 말한다.
53)
대체로 법지는 욕계의 혹을, 유지는 상2계의 혹을 대치하지만, 수도에 포섭되는 일부의 법지 즉 멸ㆍ도법지의 경우 상계의 혹도 대치하는 공능이 있는데, 이하 이에 관해 논설한다.
54)
다시 말해 “법지는 욕계의 법을 전부 대치하고, 욕계의 법은 법지에 의해 전부 대치된다고 말할 수 있지만.”
55)
다시 말해 “일부의 법지(멸ㆍ도법지)는 일부 상계의 법(수소단)을 대치하고, 일부 상계의 법은 일부의 법지에 의해 대치된다고 말한 것이다.”
56)
다시 말해 “욕계를 싫어하여도 색ㆍ무색계의 탐을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57)
즉 상계의 혹을 끊은 상태에서는 하계의 혹이 이미 끊어졌기 때문에 어떠한 유지도 욕계의 혹을 끊을 수 없는 것이다.
58)
본론 제74권 ‘16행상의 실체와 명의(名義)’ 참조.
59)
본론 제61권 ‘난(煖)ㆍ정(頂)ㆍ인법(忍法)’ 참조.
60)
세제일법(世第一法)은 다만 1찰나로서 무상(無常)의 행상만을 지으며(본론 제61권 참조), 중삼마지(重三摩地)는 공공(空空)ㆍ무원무원(無願無願)ㆍ무상무상(無相無相) 삼마지로서, 순서대로 공(空)ㆍ비상(非常)ㆍ정(靜)의 행상을 짓는다.(본론 제79권에서 상론함) 그리고 현관변(現觀邊)의 세속지에서는 각기 상응하는 행상을 짓는다.(본론 제74권에서 상론함)
61)
세속지의 경우 16행상을 모두 짓기도 하고 일부만을 짓기도 하지만, 일체의 법을 반연하기 때문에 사실상 무한이다.
62)
고지(苦智)의 행상은 비상(非常)ㆍ고(苦)ㆍ공(空)ㆍ비아(非我). 집지(集智)의 행상은 인(因)ㆍ집(集)ㆍ생(生)ㆍ연(緣). 멸지(滅智)의 행상은 멸(滅)ㆍ정(靜)ㆍ묘(妙)ㆍ리(離). 도지(道智)의 행상은 도(道)ㆍ여(如)ㆍ행(行)ㆍ출(出). 구체적인 내용은 본론 제74권 ‘16행상의 실체와 명의’ 참조.
63)
다시 말해 세속지에 의한 타심지의 행상은 소연이 되는 다른 사람의 심ㆍ심소법의 자상이다.
64)
『중아함경』 제19권 「가치나경(迦絺那經)」(대정장1,p.553중), “以他心智知他心如眞, 有欲心知有欲心如眞, 無欲心知無欲心如眞. 有恚無恚, 有癡無癡, 有穢無穢--不解脫心知不解脫心如眞, 解脫心知解脫心如眞”; 동 제24권 「염처경(念處經)」(동,p.584상) 참조. 즉 일 찰나에 1법의 심ㆍ심소법만을 반연한다면, ‘탐’과 ‘심’을 동시에 반연해야 하는 ‘유탐심’을 어떻게 알았다고 설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뜻의 난문.
65)
본론 제72권 ‘정해탈할 때의 마음’ 참조. 여기서 ‘세 가지 대응하는 마음’이란 유탐심(有貪心)ㆍ이탐심(離貪心), 유진심(有瞋心)ㆍ이진심(離瞋心), 유치심(有癡心)ㆍ이치심(離癡心)으로, 이에 대해 본론 제72권에서는 “마음으로서 만약 탐과 상응하는 것이라면 ‘유탐의 마음’이라고 말하지만, 만약 상응하지도 않을 뿐더러 역시 또한 탐의 동류인도 되지 않는 것이라면 ‘이탐의 마음’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유치(有癡)의 마음과 이치(離癡)의 마음도 역시 그러하다”고 하였다.
66)
『대비바사론』 제151권(대정장27,p.770상); 동 제190권(대정장27,p.950하). 바사에서는 취심(聚心)을 약심(略心)이라 하였다. 참고로 열한 가지로 대응하는 22심에 대해서는 『대비바사론』 제151권(대정장27,p.769하~770하; 한글대장경124, p.13이하)과 동 제190권(대정장27,p.950상-951중; 한글대장경125,p.333이하)에서 상론되고 있다.
67)
『구사론』 제26권(고려장27,p.646상; 대정장29,p.136상; 권오민 역,p.1186~1187). 이하 논설의 전반부에 대해 법보(法寶)는 논주(즉 경주 세친), 또는 후술하는 서방사(西方師, 즉 간다라 논사)의 주장이라고 평석하였지만, 보광(普光)에 의하면 경부사(經部師)의 주장이다.
68)
『중아함경』 제42권 「분별관법경(分別灌法經)」(대정장1,p.994중), “比丘 如是如是觀. 比丘 心出外灑散, 心不住內, 不受恐怖.--比丘 心不出外不灑散, 心住內, 不受恐怖. 이하 참조.
69)
여기서 서방(西方)의 논사는 건타라국(健馱羅國)의 논사. “가습미라 이외의 논사는 말하기를, 약심(略心, 본론에서는 ‘취심’)이란 잠과 상응하는 것이니, 마음이 집약[略]된 것을 잠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즉 잠이란 꿈속에서 몸을 능히 유지하지 않으면서 마음의 어두운 집약[昧略]을 본질로 하는 것이다.”(『대비바사론』 제190권,대정장27,p.950하, 한글대장경125,p.333; 동 제151권,p.770상, ‘健陀羅國諸論師言, 眠相應心說名爲略.’ 참조)
70)
원문은 ‘而無染眠俱心通聚散失.’ 여기서 ‘염오성과 잠과 함께 하는 마음은 모이고 흩어지는 것과 통한다’고 함은 앞의 서방사의 주장에 대한 비바사사(毘婆沙師)의 비판.(『구사론』, 앞의 책) 즉 마음이 염오한 심소와 잠과 상응할 경우, 그때의 마음은 잠자기 때문에 ‘모이는 것[聚]’이라고 해야 하고, 염오성이기 때문에 ‘흩어지는 것[散]’이라고 해야 하므로 모순이라는 뜻이다.
71)
즉 그 경(주68에서 인용한 경)에서는 다만 선정의 장애가 되는 마음이 안팎으로 모아지고 흩어지는 것[聚散]에 대해서만 설하고 있지만, 이 경(주64에서 인용한 경)에서는 참답게 알아야 할 염오심과 청정심을 열한 가지 형식의 스물두 가지 마음, 이를테면 유욕심(有欲心)과 무욕심(無欲心), 유에심(有恚心)과 무에심(無恚心), 유치심(有癡心)과 무치심(無癡心), 예심(濊心)과 무예심(無濊心), 산심(散心)과 합심(合心), 하심(下心)과 고심(高心), 소심(小心)과 대심(大心), 불수심(不修心)과 수심(修心), 부정심(不定心)과 정심(定心), 불해탈심(不解脫心)과 해탈심(解脫心)을 설하고 있다.(참고로 앞서 인용한 『대비바사론』과 『구사론』에서는 有貪心과 離貪心, 有瞋心 離瞋心, 有癡心과 離癡心, 散心과 聚心, 沈心과 策心, 小心과 大心, 掉心과 不掉心, 不靜心과 靜心, 不定心과 定心, 不修心과 修心, 不解脫心과 解脫心으로 설하고 있다.)
72)
타심지가 다른 사람의 심ㆍ심소법을 아는 지라면, 타심지에는 그러한 다른 사람의 심ㆍ심소법의 행상과 소연도 존재한다고 해야 함에도 어째서 그 같은 소연과 행상을 관찰하지 않는다고 설한 것인가? 하는 뜻의 물음. “타심지는 다른 이의 마음의 소연도 역시 능히 취하며, 아울러 다른 이의 마음이 능히 반연한 행상도 역시 취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취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 모두를 능히 취하지 않으니,--”(『구사론』 제26권, 고려장27,p.646중하; 대정장29,p.136중; 권오민 역,p.1190)
73)
만약 타심지가 다른 이의 마음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의 소연이 된 경계대상도 안다고 한다면, 그러한 소연에는 색 등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타심지라고 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그의 마음이 능히 반연한 행상을 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마음을 반연하는 것으로, 그때 자신의 마음은 바로 ‘다른 이의 마음이 능히 반연한 행상’을 반연하여 일어났기 때문이다.
74)
다른 이의 욕ㆍ색계계(繫)를 아는 것은 유루의 타심지이며, 계박되지 않음[非所繫]을 아는 것은 무루의 타심지이다.
75)
이상 타심지의 한계를 언급한 것으로, ①계계(界繫)의 경우, 3계 중 욕ㆍ색계와 무루(非所繫)의 마음(심ㆍ심소법)만을 알 뿐 무색계의 마음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②다른 이의 마음(他相續)만을 반연할 뿐, 자신의 마음을 반연하지 않는다. ③현재의 마음만을 알 뿐, 과거ㆍ미래의 마음은 작용을 갖지 않기 때문에 알지 못한다. ④단지 동류의 마음만을 알 뿐이다. 즉 법지품의 타심지는 다른 이의 법지품의 마음만을 알며, 내지 유루의 타심지는 다른 이의 유루심만을 안다. ⑤심ㆍ심소법을 알 뿐 색 등은 알지 못한다. ⑥오로지 일법[一]만을 안다. 즉 다른 이의 마음을 반연할 때에는 심소를 반연하지 않으며, 수(受)를 반연할 때에는 상(想) 등을 반연하지 않는다. ⑦실유의 법만을 반연하고 가유의 법은 반연하지 않는다. ⑧자상만을 반연하고 공상은 반연하지 않는다. ⑨3해탈문의 경우, 무원삼매(無願三昧)와는 상응하지만 공(空)ㆍ무상삼매(無相三昧)와는 상응하지 않으니, 무루의 타심지는 도지(道智)에 의해 성취되기 때문이다. 즉 도지의 도(道)ㆍ여(如)ㆍ행(行)ㆍ출(出)의 네 행상은 무원삼매와 상응하지만, 고지의 공ㆍ비아의 공삼매, 멸지의 멸ㆍ정ㆍ묘ㆍ리의 무상삼매와는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본론 제79권 ‘공ㆍ무원ㆍ무상삼마지’ 참조) ⑩타심지는 견(見)의 성질이기 때문에 진ㆍ무생지에 포섭되지 않는다. ⑪견도위 중에는 타심지가 없으니, 그것은 빠르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⑫무간도는 번뇌를 끊기 때문에 그것에도 역시 타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76)
즉 진지와 무생지는 출관(出觀)하여 언어적 개념[世俗名想]을 통해 “‘나’는 생이 이미 다하였고, 범행이 이미 성취되었으며, 해야 할 일을 이미 다 하여 더 이상 후유(後有)를 받지 않는다”고 아는 것이기 때문에 공(空)과 비아(非我)의 행상과 서로 모순되며, 그래서 이러한 두 지에는 두 가지 행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35) 참조.
77)
『대비바사론』 제29권(대정장27,p.150상; 한글대장경119,p.90).
78)
원문은 ‘推功於本, 言彼了知.’ 이같이 ‘나는 이미 생을 다하였다’고 아는 분별의 세속지는 무루의 진ㆍ무생지의 사용과라고 논설하였다.(주35 참조)
79)
출관 후 ‘나는 생이 이미 다하였다’는 등의 앎은 본래 가행을 일으킬 때의 바램[意樂]이었으며 다짐[要期]이었다. 즉 이러한 바램과 다짐에 의해 실제 무학도를 성취한 뒤 출관하여 이와 같이 분별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전술한 ‘진지와 무생지’ 참조.
80)
수념주(受念住)는 ‘수’는 괴로운 것[苦]이라고 관찰하고, 심념주(心念住)는 마음은 무상한 것[非常]이라고 관찰하는 것이지만, 이때 괴로움과 무상은 일법(一法)의 자상일 뿐만 아니라 유위제법의 공상이다.
81)
즉 앞서 이설자는 “무루의 타심지는 한 가지 실체(다른 이의 심ㆍ심소)의 자상을 반연하지만, 도지(道智)의 행상인 도(道)ㆍ여(如)ㆍ행(行)ㆍ출(出)은 일체 모든 성도의 공상을 반연한 것이기 때문에 양자의 행상은 서로 다르며, 따라서 무루지의 행상은 열여섯 가지보다 많아야 한다”고 힐난하였지만, 이때 ‘도’ 등의 행상은 수념주(受念住)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 가지 실체의 자상만을 반연하기 때문에 열여섯 가지를 초과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82)
원문은 ‘由前加行勢力有殊, 至成滿時, 現總緣別.’ 염주의 경우, 신ㆍ수ㆍ심ㆍ법을 개별적으로 반연하여 순서대로 부정(不淨)ㆍ고(苦)ㆍ무상(無常)ㆍ무아(無我)라고 관찰하고(이를 別相念住라고 함), 이것이 원만하게 성취될 때 제법의 공상을 총체적으로 반연하는 법념주(즉 總相念住)를 닦지만, 타심지의 경우 원만하게 성취될 때라도 현재의 개별적인 마음 등의 자상만을 알 뿐이라는 뜻인가?
83)
즉 손해(즉 苦受)와 이익(즉 樂受)은 대상에 대한 지각(領納의 受)를 떠나 존재하지 않듯이 ‘수’ 역시 무상을 떠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84)
이 같은 경설로 볼 때 16행상 이외 신(身)과 노사(老死)도 무루지의 행상이 될 수 있다는 힐난.
85)
주80)의 본문 참조.
86)
현재의 낙수(樂受)가 스스로를 반연하여 낙수를 향수함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87)
『대비바사론』 제29권(대정장27,p.150중)에서는 유여사(有餘師)로 되어 있지만, 『구사론』 제26권(고려장27,p.646하; 대정장29,p.136하; 권오민 역,p.1192)에서는 외국사(外國師)로 되어 있다. 참고로 바사 등에서는 앞에서 설한 ‘무루의 행상은 열여섯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대법제사(對法諸師)의 설을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의 제논사(諸論師)의 설’로 전하고 있다.
88)
『식신족론』 제6권(대정장26,p.562상; 한글대장경116,p.156). 본론에서의 원문은 “謂非常故, 苦故, 空故, 非我故, 因故, 集故, 生故, 緣故, 有是處, 有是事, 如理所引了別.” 『식신족론』에서의 원문은 “謂若無常, 若苦, 若空, 若無我, 若有因, 謂因, 謂集, 謂生, 謂緣, 若有因, 若有起, 若有是處, 若有是事, 若如理所引了別.--如是了別, 如不了別.” 여기서 ‘처(sthāna)’란 상(相, lakṣaṇa)의 뜻이고, ‘사(vastu)’란 인(因, hetu)의 뜻이다. 그러나 보광(普光)에 의하면 ‘처’란 도리에 맞게 서로 수용한다는 뜻(稱合道理相容受義)이고, ‘사’란 사용(事用) 즉 작용의 뜻이다.(『구사론기』 제26권, 대정장41,p.392상) 즉 어떤 부류들(外國師)은 아비달마 본론 중에서 불계심 즉 3계의 계박을 떠난 무루의 마음은 욕계의 여덟 행상 이외에 ‘이러한 처’와 ‘이러한 사’라는 두 행상을 더 요별한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에 16행상 이외에도 무루의 행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89)
『식신족론』 제10권(대정장26,p.579상중; 한글대장경116,p.232). 여기서 아(我)와 아소(我所)는 유신견(有身見)에 의해 요별되며, 단(斷)ㆍ상(常)은 변집견(邊執見)에 의해 요별되며, 무인(無因)ㆍ무작(無作)ㆍ손감(損減)의 견해(즉 허무론)는 사견에 의해 요별되며, 존귀한 것ㆍ뛰어난 것ㆍ높은 것ㆍ제일이라고 여기는 것은 견취(見取)에 의해 요별되며, 청정ㆍ해탈ㆍ출리는 계금취(戒禁取)에 의한 요별이며, 혹(惑)ㆍ의(疑)ㆍ유예(猶豫)는 의(疑)에 의한 요별이다.
제74권
1)
즉 고제 하의 네 행상(무상ㆍ고ㆍ무아ㆍ공)은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의 네 전도(顚倒)를 대치하기 때문에 명칭상으로나 실체상으로 다 같이 네 가지이지만, 그 밖의 각기 집ㆍ멸ㆍ도제를 반연하는 네 행상은 명칭만 다를 뿐 그 본질이 집ㆍ멸ㆍ도로 단일하기 때문에 4제의 실제적인 행상은 모두 일곱 가지라는 뜻이다.
2)
무인론(無因論)이란 만물은 모두 원인 없이 우연적으로 생겨난다는 유물론의 학설이며, 일인론(一因論)은 유일의 자재천에 의해 비롯된다는 바라문교의 학설이며, 전변의 원인이 항상 상주한다는 논의[常因論]란 프라크리티(prakṛti)라는 제일원인이 전변하여 만물이 된다는 상캬학파의 주장이며, 선행하는 ‘지(知)’에 의해 만물이 낳아진다는 논의는 제일원인이 미리 지적으로 계획한 결과로서 만유가 생겨났다는 주장이다.
3)
“해탈은 자주 물러나 영원하지 않다는 견해를 대치하기 위해 리(離)의 행상을 닦는다.”(『구사론』 제26권, 고려장,p.648상; 대정장29,p.137중;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 p.1198) 즉 어떤 외도는 무상정(無想定)과 같은 것을 참된 해탈로 간주하고, 이로부터 자주 물러나는 일이 있는 것을 보고서 해탈은 영원히 생사를 출리(出離)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이를 대치하기 위해 ‘리’의 행상을 닦는다는 뜻이다.
4)
원문에는 ‘이염(離染)’으로 되어 있지만, 명본(明本)에 따라 ‘잡염’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참고로 『현종론』(제35권, 고려장28,p.261상)에도 ‘이염’으로 되어 있지만, 송ㆍ원ㆍ명본에는 ‘잡염’으로 되어 있다.
5)
이상은 『구사론』 제26권(고려장,p.648상; 대정장29,p.137중하; 권오민 역, p.1197~1198) 상에서 16행상에 관한 네 번째 해석으로 언급되고 있다.
6)
“[5취온은] 고과(苦果)에 대해 제1원인[初因]이 되기 때문에 ‘인’이라고 하였으니, 씨앗이 과실에 대해 제1원인이 되는 것과 같다. [5취온은] 고과를 동등하게 불러일으키는 것[招集]이기 때문에 ‘집’이라고 하였으니, 싹 등이 과실을 초래하는 것과 같다. [5취온은] 고과에 대해 개별적인 조건[別緣]이 되기 때문에 ‘연’이라고 하였으니, 마치 밭 등이 과실에 대해 개별적인 조건이 되는 것과 같다. 즉 밭이나 물ㆍ거름 등의 힘으로 말미암아 과실의 맛과 세력(싹을 발아하게 되는 힘)과 익는 것이 개별적으로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5취온은] 고과를 능히 직접적으로 낳기 때문에 ‘생’이라고 하였으니, 마치 꽃술이 과실을 직접적으로 생겨나게 하는 것과 같다.”(『구사론』 제26권, 고려장27,p.647하; 대정장29,p.137중; 권오민 역, p.1196)
7)
여기서 세 가지 유위상이란 생(生)ㆍ이(異)ㆍ멸상(滅相)을, 세 가지 불길이란 탐ㆍ진ㆍ치를 말한다.
8)
이러한 유여사설은 『구사론』 제26권(고려장27,p.647하-648상; 대정장29,p.137중; 권오민 역, p.1197) 상에서 제3설의 정설로 설해진다.
9)
이러한 유여사설은 『구사론』 제26권(앞의 책) 상에서 제3설의 정설로 설해진다.
10)
이상은 『구사론』 제26권(고려장,p.647중10행-648상4행; 대정장29,p.137상중; 권오민 역, p.1195~1198) 상에서 16행상에 관한 두 번째와 세 번째 해석을 부분적으로 취한 것이다. 참고로 『구사론』(고려장,p.647상중; 대정장29,p.137상; 권오민 역, p.1194~1195)상에서의 정설은 이러하다. “고성제의 네 행상:[5취온 등의 현행의 고과(苦果)는] 인연에 근거[待]한 것이기 때문에 ‘비상’이며, 핍박의 성질이기 때문에 ‘고’이며, 아소견(我所見)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공’이며, 아견(我見)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비아’이다. 집성제의 네 행상:[5취온 등의 현행의 원인은] 종자의 이치와 같기 때문에 ‘인’이며, 동등하게 현기하는 이치이기 때문에 ‘집’이며, 상속하는 이치이기 때문에 ‘생’이며, 성취하여 이루어[成辦]지는 이치이기 때문에 ‘연’이다. 비유하자면 진흙덩이와 물레와 밧줄과 물 등의 여러 인연이 화합하여 항아리를 성취하여 이루는 것과 같다. 멸성제의 네 행상:[5취온 등의 현행의 소멸은] 제온(諸蘊)이 다하였기 때문에 ‘멸’이며, 삼재(三災, 탐ㆍ진ㆍ치)가 종식되었기 때문에 ‘정’이며, 온갖 환란이 없기 때문에 ‘묘’이며, 모든 재앙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리’이다. 도성제의 네 행상:[5취온 등의 소멸을 획득하는 번뇌 대치의 성도는] 통행(通行)의 뜻이기 때문에 ‘도’이며, 정리(正理)와 계합하기 때문에 ‘여’이며, [열반으로] 바로 나아가는 것[趣向]이기 때문에 ‘행’이며, 능히 영원히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출’이다.”
11)
행상(行相, ākāra, 行解相貌의 준말)이란 마치 거울이 사물을 비출 때 거울 위에 여러 가지 차별상이 나타나는 것처럼 심ㆍ심소 상에 나타난 대상의 형상을 행해(行解)하는 것, 즉 지각[領納]ㆍ표상[取像]하여 마침내 판단[簡擇]하는 것으로(『대비바사론』 제79권, 대정장27,p.409상, 何故名行相? 行相是何義? 於諸境相簡擇而轉, 是行相義.), 그것의 본질은 혜(慧, 즉 簡擇)이다. 즉 유부 비바사사에 의하면, ‘혜’를 제외한 그 밖의 심ㆍ심소는 경계대상(여기서는 4제 16행상)을 판단할 수 없고, 다만 대상을 취하거나[能行] 혹은 타(他)의 대상이 될 뿐[所行]이기 때문에(후술) 행상의 본질이 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판단 즉 간택의 작용인 ‘혜’를 행상의 본질로 삼았던 것이다.
12)
일체의 심ㆍ심소법은 심대지법인 혜(慧)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13)
본론 제11권 주87)의 본문 참조.
14)
예컨대 마음 자체는 번뇌[漏]가 아니지만, 탐 등의 번뇌와 상응하는 마음은 탐 등과 대치가 동일하기 때문에 그것을 모두 ‘유루’라고 하듯이, ‘혜’를 제외한 그 밖의 심ㆍ심소법은 현행의 고과(苦果, 즉 고제) 등을 ‘무상’ 등으로 간택(簡擇)할 수 없지만, ‘혜’와 상응할 때 이와 평등하게 소연이 되는 그 같은 품류의 상(相)을 능히 취하기 때문에 ‘유행상’이라고 이름하였다는 뜻이다.
15)
수도위에서의 의근(意根)ㆍ낙근(樂根)ㆍ희근(喜根)ㆍ사근(捨根)과 신(信)ㆍ근(勤)ㆍ염(念)ㆍ정(定)ㆍ혜(慧)의 5근을 이지근이라고 한다.(본론 제9권 ‘제근 각각에 대한 해명’ 참조)
16)
이는 “혜를 제외한 그 밖의 심ㆍ심소법을 ‘유행상’이라고 하는 경우, 그것은 생겨나고서 행상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필시 두 찰나가 소요된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힐난에 대한 해명으로 여겨진다.
17)
‘무간멸의 의계’에 대해서는 본론 제3권 ‘특히 의계(意界)에 대하여’를 참조할 것.
18)
『구사론』 제26권(고려장,p.648상; 대정장29,p.137하; 권오민 역,p.1198). 앞서 유부 비바사사는 행상은 ‘혜’를 본질로 한다고 하였다.(주11 참조) 그러나 그럴 경우 전술한대로 ‘혜’를 유행상(有行相)이라 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종의인 심ㆍ심소의 5의평등(五義平等) 중 유행상평등에 위배된다. 이에 대해 경주 세친은, 다만 심ㆍ심소가 자신에 부과된 각각의 형상을 차별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총체적으로 ‘행상’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경부에 의하는 한 심소는 마음의 상속 상에 나타나는 특수한 변화(차별)이기 때문에 행상의 본질 역시 바로 그러한 심ㆍ심소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보광(普光)이나 법보(法寶)는 다 같이 이를 구사논주 세친의 평석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이 같은 점으로 본다면 그가 의거한 종(宗)은 경부(經部)이다. 참고로 바사에서는 이를 ‘어떤 이’의 설로 전하고 있다.(『대비바사론』 제79권, 대정장27,p.408하-409상, “有作是說. 言行相者, 總以一切心心所法爲其自性.”)
19)
원문은 ‘一切能像, 理必不成.’ 여기서 ‘능히 영상을 맺는다[能像]’고 함은, 예컨대 거울에 피사체의 영상이 비치는 것처럼 마음에 경계대상의 형상이 투사(부과)되는 것을 말함인가?
20)
능행이란 심ㆍ심소법이 경계대상을 취하여 능히 행해(行解)하는 것, 다시 말해 능히 인식작용을 행하는 것을 말하며, 소행이란 행해되는 것, 다시 말해 인식작용의 대상이 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능행은 ‘혜’를 비롯한 일체의 심ㆍ심소이고, 소행은 유위와 무위의 일체의 법이다.(후술)
21)
일체법이 소행(所行,인식작용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라도 그러한 대상을 취하는 능행(能行) 자체는 소행이 되지 않는다는 뜻인가? 예컨대 세속지가 ‘일체법의 무아’를 반연할지라도 그것은 자신의 품류(자신과 상응 구기하는 법)를 제외한 일체법이다.(후술하는 ‘세속지의 소연경’ 참조)
22)
『잡아함경』 제13권 제319경(대정장2,p.91상중) 등.
23)
여기서 다섯 신통은 6통 중 누진통(漏盡通)을 제외한 신경지증통(神境智證通)ㆍ천안지증통(天眼智證通)ㆍ천이지증통(天耳智證通)ㆍ타심지증통(他心智證通)ㆍ숙주수념지증통(宿住隨念智證通). 이러한 5통이 지관(止觀)이 평등한 4정려에서만 일어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본론 제76권 ‘6통의 소의지’를 참조할 것.
24)
멸지는 신(身)ㆍ수(受)ㆍ심(心)의 세 경계대상을 갖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법념주에만 포섭되며, 온갖 타심지는 색을 반연하지 않기 때문에, 그 밖의 8지의 경계대상은 색ㆍ심ㆍ심소 등과 통하기 때문에, 각기 수ㆍ심ㆍ법의 세 염주와 4념주에 포섭되는 것이다.
25)
3계에 계속되는 법이란 3계의 고ㆍ집제 각각에 포섭되는 법, 무루의 유위법이란 도제에 포섭되는 법으로서, 상응법은 심ㆍ심소법을, 불상응법은 색과 불상응행법을 말한다. 그리고 선의 무위는 택멸을, 무기의 무위는 비택멸과 허공을 말한다.
26)
지식이 지식 자체도 반연한다(안다)고 하는 경우, 인과를 부정하는 사견(邪見)도 그것이 사견임을 아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만, 사견을 사견이라고 알면 그것은 바로 정견이다. 또한 타심지가 타심지 자체를 반연하는 것이라면, 그때 타심지 자체(즉 혜)는 바로 자신의 심소이므로 그것을 타심지라고 말할 수 없다. 또한 ‘몸은 부정하다’고 관하는 것이 신념주(身念住)인데, 신념주가 신념주 자체도 반연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신념주 자체는 법(法)에 포섭되므로 신념주 내지 심념주를 바로 법념주라고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고(苦)를 ‘고’로 알고 내지 멸(滅)을 ‘멸’로 아는 것이 도(道)이므로 고지(苦智) 내지 멸지(滅智)를 바로 도지(道智)라고 해야 한다.(『대비바사론』 제9권, 대정장27,p.43중 참조)
27)
『대비바사론』(제9권, 대정장27,p.42하)에 의하면, 이는 대중부의 설이다.(주31 참조)
28)
원문은 ‘猶如鹽等唯彼自體如是轉故.’ 소금은 스스로를 절이는 일이 없이 그 자체로서 전전 상속하듯이, 등불도 스스로를 비추는 일이 없이 등불 자체로서 전전 상속한다는 뜻인가?
29)
앞서 지(智)의 자상은 자체의 상이기 때문에 능연(能緣)이 된다고 하였으므로 역시 자체의 상인 공상에 대해 소연이 된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30)
다시 말해 세속지는 상응하는 법(즉 혜 이외의 심ㆍ심소법)과 소연이 평등하기 때문에, 상응하는 법을 반연하지 않는 것이다.
31)
결론적으로 칼이 자신을 자를 수 없듯이, 세속지가 세속지 자체를 반연한다고 할 경우 주객의 차별이 없어지기 때문에 그 자체를 소연으로 삼는 일이 없으며, 상응법은 소연이 동일하기 때문에, 구유법은 마치 눈이 눈에 넣은 안약을 보지 못하듯이 지극히 근접해 있기 때문에 능히 소연으로 삼을 수 없다. 이에 반해 대중부(大衆部)에서는 지(智)는 등불이 스스로를 비추듯이 능히 자신과 다른 존재를 안다고 하였으며, 법밀부(法密部)에서는 혜(慧)는 자신과 상응하는 ‘수(受)’ 등을 안다고 하였다. 또한 화지부(化地部)에서는 ‘혜’에는 상응혜와 불상응혜가 있으며, 두 가지는 동시에 생겨나는데, 상응혜는 불상응법을 알고 불상응혜는 상응법을 안다고 하여 구유하는 법도 알 수 있다고 하였으며, 독자부(犢子部)에서는 보특가라는 제법(일체법)을 능히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유부의 종의에 의하면 “모든 심ㆍ심소법은 자성(심ㆍ심소법 자체)과 상응법과 구유법을 알지 못하며, 보특가라는 불가득(不可得)이다.”(『대비바사론』 제9권, 대정장27,p.42하)
32)
다시 말해 일체법 중 지(智) 자체와, 이와 상응하거나 구유하는 법은 그 밖의 일체법과 동시에 관찰되고 알려지지 않는다.
33)
무색계 중에도 비아(非我)의 행상은 존재하지만, 욕계와 색계보다 법이 적어 무색계 중의 세속지에 의해서는 ‘제법(일체법)무아’가 분명하게 알려지지 않는다는 뜻이다.(4무색정 각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대비바사론』 제10권, 대정장27,p.45하~46상을 참조할 것)
34)
『구사론』 제26권(고려장27,p.649상; 대정장29,p.138상; 권오민 역,p.1204). 경주 세친에 의하면, 세속의 수소성혜는 유루의 6행관(行觀, 하지는 麤ㆍ苦ㆍ障으로, 상지는 靜ㆍ妙ㆍ離로 관찰하는 것)처럼 3계 9지를 각기 개별적으로 반연하기 때문에, 그것으로는 ‘제법(일체법) 무아’의 지(智)를 성취할 수 없다. 만약 수소성혜가 제지(諸地)를 총체적으로 반연하는 것이라면, 수소성에는 이염(離染)의 힘이 있어 그러한 무아관을 닦을 때 바로 일체의 염오를 단박에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35)
『바사(婆沙)』(대정장27,p.46상)에 의하면, 수소성에 의한 제법무아의 세속지는 미지정과 중간정려와 근본 4정려에서 일어난다.
36)
이 같은 이유에서 중현은 『현종론』 제35권(고려장28,p.262하)에서 본단의 본송 제4구를 “이는 문ㆍ사ㆍ수소성의 혜이다(聞思修所成)”로 고쳐짓고 있다.
37)
견도 제4찰나인 고류지(苦類智)의 단계에서는 앞의 세 가지 지(세속지ㆍ法智ㆍ苦智)에 다시 유지(類智)가 더해지고, 제6찰나인 집법지(集法智)의 단계에서는 다시 집지(集智)가, 제10찰나인 멸법지(滅法智)의 단계에서는 다시 멸지(滅智)가, 제14찰나인 도법지(道法智)의 단계에서는 다시 도지(道智)가 더해져 일곱 가지 지를 성취하게 된다.
38)
즉 제3 찰나인 고류지인(苦類智忍)의 단계에서 성취되는 지(智)의 수는 제2 찰나의 고법지(苦法智)의 단계에서 성취되는 ‘지’의 수와 같으며, 제5 찰나(집법지인)와 제7(집류지인)ㆍ제8(집류지)ㆍ제9 찰나(멸법지인)에서 성취되는 ‘지’의 수는 제4 찰나(고류지)와 제6 찰나(집법지)에서 성취되는 ‘지’의 수와 같다. 그리고 제11(멸류지인)ㆍ제12(멸류지)ㆍ제13 찰나(도법지인)와 제15 찰나(도류지인)에 성취되는 ‘지’의 수는 제10 멸법지와 제14 도법지의 단계에서 성취되는 ‘지’의 수와 같다.
39)
이생으로서 유류 6행관에 의해 이욕한 자와, 일찍이 이생위에서 이욕하고서 견도에 든 자와, 수도위에 있으면서 불환과에 이른 자는 타심지도 성취하는데, 그것은 욕계의 혹을 끊음으로서 획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생의 타심지는 유루성으로(후술), 무색계에 태어날 때에는 그것을 버리기 때문에 성취되지 않는다. 그러나 무루의 타심지는 무색계에 태어나더라도 버리지 않는다.
40)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전술한 ‘[10지의] 소의지ㆍ신 분별’을 참조할 것.
41)
이하 7송에 걸쳐 견도ㆍ수도ㆍ무학위에서의 10지의 습수(習修, 또는 行修)와 득수(得修)에 대해 논설하고 있다. 여기서 ‘습수’란 현재 실제로 수습하는 것(現在修)을 말하며, ‘득수’란 그러한 현재 수행력에 의해 획득하게 되는 미래의 수습(未來修)을 말한다. 보다 자세한 뜻은 후술하는 ‘닦음의 네 종류’를 참조할 것.
42)
견도위에서는 먼저 욕계의 고제를 반연하고 다음으로 상계의 그것을 반연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대치와 소연이 이미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류(異類)를 능히 득수하는 일이 없다.
43)
『구사론』(제26권, 고려장27,p.649상; 대정장29,p.138중; 권오민 역,p.1207) 상에서는 이것이 정설이며, 앞의 설이 제2설이다. 여기서 ‘종성’이라 함은 견도의 동류인이라는 뜻이다. 즉 이러한 종성류의 선업은 무시이래 아직 획득되지 않다가 견도위에 이르러 비로소 획득되기 때문에 동류만을 득수(得修)하게 되는 것으로, 예컨대 현재 고법지를 일으켰을 때에는 미래 고류지나 집법지 등의 이류(異類)를 닦을 힘이 없다.
44)
이는, 견도의 득수(得修)는 원칙적으로 동류이지만, 이류(異類)도 있음을 밝힌 것이다. 즉 각 제(諦)에 대한 현관이 원만하게 성취되는 고ㆍ집ㆍ멸류지를 닦을 때에는 각 제를 현관하는 후변에서 세속지도 함께 득수하는데, 고(苦)를 알고 집(集)을 끊고 멸(滅)을 작증하는 것이 6관행의 세속지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현관 이후에 이같이 세속지를 닦는 것은 유루의 6관행에 의해 3제(諦)를 관찰함으로써 무루지의 관지(觀智)를 보다 강성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45)
즉 법지의 경우 욕계를 반연하는 것으로, 각각의 제(自諦)에 대한 3계(界)의 현관이 아직 원만하게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46)
이는 『구사론』(제26권, 고려장27,p.649중; 대정장29,p.138중; 권오민 역,p.1208)상에서 ‘어떤 이의 말(有言)’로 설해지고 있으며, 경주 세친은 이에 대해 “이는 이치상 상식적인 말이 아니기에 논증도 될 수 없다(理非極成, 不應爲證)”고 힐난하고 있다. “제 부파에서는 대체로 제16찰나의 도류지가 견도에 포섭된다고 설하는 경우가 있어 ‘[도류지는] 견도가 아니다’고 말하는 것은 이치상 상식적인 말이 아니기에 논증도 될 수 없다.”(『구사론기』 제26권,대정장41,p.396하) 도류지가 견도라고 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본론 제63권 ‘도류지가 견도라는 유설(有說) 비판’과 ‘도류지가 견도라는 유여사설 비판’을 참조할 것.
47)
이 같은 혹설(或說)은 『구사론』(앞의 책) 상에서 정설이다. 즉 3제에 대해서는 두루 알고 끊고 작증할 수 있기 때문에 미래 현관변의 세속지도 함께 닦을 수 있지만, 도제의 경우는 불타ㆍ독각ㆍ성문의 도가 각기 다르며, 성문의 도에도 상ㆍ중ㆍ하품의 근기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능히 두루 닦을 수 없다. 그래서 도류지의 후변에서는 세속지를 득수(得修)하지 않는 것이다.
48)
고ㆍ집ㆍ멸류지의 현관변에서는 세속지도 득수(得修, 현재 行修에 의한 未來修)한다고 하였지만, 그러한 세속지는 현기(現起)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불생법이다. 즉 세속지는 필시 유루의 몸에 근거하여 일어나지만, 견도위에서 유루의 몸은 생겨날 수 없다. 그래서 현관변의 세속지는 연결불생법(緣缺不生法)의 비택멸이라 한 것이다.
49)
무생지는 금강유정과 무간에 획득되지만, 반드시 진지 이후에 현전한다.
50)
『구사론』 제26권(고려장27,p.649중; 대정장29,p.138하; 권오민 역,p.1209). 옛 논사는 경부의 고사(古師). 여기서 “‘근거[依]’란 바로 종자(種子, bīja)를 말하는 것으로, 비바사사(毘婆沙師)는 그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종자와 서로 밀접하게 관계하는 ‘근거[依]’ 혹은 ‘세속지의 근거가 되는 [유루의] 몸[依身]’이라는 말로 설하였다.”(『구사론기』 제26권, 대정장41,p.397상) 즉 견도의 힘에 의해 유루 세속지의 종자를 획득하며, 출관 후 이에 근거하여 세속지를 닦게 된다는 뜻이다.
51)
원문은 ‘如何此智不現在前, 言得起依說名爲得.’ 견도위에서 세속지의 근거가 된 종자를 획득한 시점과 출관 후 세속지를 일으키는 시점이 다른데, 어떻게 종자를 획득한 것에 대해 ‘[미래] 세속지를 획득한다(닦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힐난. 이는 경주가 유부의 종의--“[견도위 중에서 세속지의] ‘득’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이에 근거하여 미래 ‘이것을] 획득한다(닦는다)’고 말하였다(由得故說名爲得, 『구사론』, 앞의 책)”--에 대해 힐난한 것과 동일한 형식의 힐난이다. 그래서 경부고사(經部古師)의 설에 대해 ‘[경주 자신이] 힐난한 바와 같다’고 말한 것이다. 이 같은 점으로 볼 때, 경부의 종자설(種子說)은 유부의 득론(得論)과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이론이라 할 수 있다.
52)
여섯 지(地)의 견도란 미지ㆍ중간ㆍ근본 4정려지를 말하며, 일곱 지의 세속지란 여기에 욕계를 더한 것이다.
53)
고ㆍ집제는 신(身)ㆍ수(受)ㆍ심(心)ㆍ법(法)을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에 고ㆍ집지의 후변 즉 고ㆍ집류지의 단계에서 득수하는 세속지는 4념주와 통한다. 그러나 멸제에는 신ㆍ수ㆍ심의 세 가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멸류지의 단계에서 득수하는 세속지는 법념주일 뿐이다.
54)
이는 세 가지 유지의 후변에서 득수하는 세속지의 행상에 관한 논설로서, 이를테면 고제 현관의 후변(즉 고류지)의 단계에서 득수하는 세속지는 고제 하의 4행상으로써 고제를 관찰한다.(후술)
55)
다시 말해 현관변(現觀邊)의 세속지는 태어나면서부터 획득되는 생득(生得)이나 이염에 의해 획득되는 이염득(離染得)이 아니다.
56)
욕계의 색온은 고ㆍ집ㆍ멸류지를 일으킬 때 득수하는 세속지의 권속(隨行)이 되지 않기 때문에, 색계의 경우 도구계(道俱戒, 무루율의)ㆍ정구계(定俱戒, 정려생율의)의 수전색(隨轉色)이 수반되기 때문에 현관변의 세속지는 욕계의 4온과 색계의 5온을 본질로 한다는 것이다.
57)
도류지는 유정지의 혹을 대치하는 것이지만, 세속지(즉 유루 6행관)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유정지를 대치할만한 힘이 없기 때문이다.
58)
즉 욕계 (내지 무소유처) 수혹을 떠난다고 할 때, 여기에는 세속도에 의하는 경우와 무루도에 의하는 경우가 있으며, 또한 그것에도 각기 무루도를 가행으로 삼는 자와 세속도를 가행으로 삼는 자가 있기 때문에 ‘상응하는 바에 따라’라고 말한 것이다.(각각의 경우에 대해서는 『대비바사론』 제107권, 대정장27,P.552중하 참조)
59)
여기서 ‘이상의 도’란 앞에서 언급한 욕계 수소단을 끊는 9무간과 앞의 8해탈도, 욕계를 끊는 가행과 유욕의 승진도를 말한다.
60)
주42) 참조.
61)
여기서 ‘가장 마지막 종성이 해탈도를 닦을 때’란 5종성의 아라한 중의 최후, 즉 감달법 아라한이 근기를 단련하여 제9 해탈도를 닦는 때를 말한다.
62)
여기서 다섯 신통이란 신경지증통(神境智證通)ㆍ천안지증통(天眼智證通)ㆍ천이지증통(天耳智證通)ㆍ타심지증통(他心智證通)ㆍ숙주수념지증통(宿住隨念智證通)ㆍ누진지증통(漏盡智證通)의 6통 중의 앞의 다섯 가지이다. 6통에 대해서는 본론 제76권 참조.
63)
10지 중 진지와 무생지와 타심지를 제외한 7지. 능히 장애를 끊었기 때문에 타심지를 닦지 않는 것이다.
64)
진ㆍ무생지를 제외한 8지. 유학위에서는 아직 이를 획득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65)
앞에서 논설한 것처럼 신통에서 닦는 해탈도의 경우 6통 중 숙주ㆍ신경ㆍ타심ㆍ누진통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 즉 천안통과 천이통은 통과심(通果心)의 무기이기 때문에 이를 획득하였을 때에는 해탈도로서 지(智)를 닦는 일이 없다. 참고로 여기서 6통 중 누진지증통에 대해 설하지 않은 것은 앞서 ‘무학위에서의 습수와 득수’에서 설하였기 때문이다.
66)
여기서 ‘유루의 공덕’이란 4무량을 비롯한 8해탈ㆍ8승처(勝處)ㆍ8변처(遍處)와 4무애해ㆍ무쟁(無諍)ㆍ원지(願智) 등과 같은 선정과 지혜에 의해 획득되는 공덕과, 부정관ㆍ지식념ㆍ3삼마지ㆍ멸진정 등의 선정을 말한다.
67)
‘미미심’이란 멸진정에 드는 마음을 말한다. 즉 멸진정에 들려고 할 때에는 마음이 미열(微劣)하여 현재에만 세속지를 닦을 뿐 아니라 미래에도 역시 그러하기 때문에 능히 무루지를 득수할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을 제외한다는 것이다.
68)
정려에 포섭되는 무루의 공덕이란 무루정려ㆍ3념주ㆍ4무애해(無礙解)와 같은 것을 말하고, 무색정에 포섭되는 무루의 공덕이란 3무색정과 아래의 3무색해탈과 같은 것을 말한다.
69)
유루와 무루의 온갖 도가 유루법을 닦기 위해 어떤 지(地)에 의지하여 일어났을 때와 그러한 지의 법을 획득하였을 때에는 미래에 오로지 그 지의 유루법만을 득수한다는 뜻이다.
70)
성자 즉 무루지를 득수하는 이는 어떠한 지에서 어떠한 도를 일으켰을지라도, 예컨대 제3정려의 염오를 떠나려고 할 때에는 미래에 제3정려의 무루법과 하지의 무루법을 득수하며, 초정려의 염오를 떠나 제2정려의 근본정을 획득할 때에는 제2정려의 무루법과 하지의 무루법을 득수하며, 제2정려에 포섭되는 견도를 일으킬 때에는 제2정려의 무루법과 미지ㆍ중간ㆍ초정려의 무루법을 득수한다.
71)
일체의 번뇌가 이미 끊어지고 지어야 할 일을 이미 다하였다는 대자각이 일어날 때에는 3계의 폐색(閉塞)이 일시에 열리는 것과 같기 때문에 그 힘은 능히 9지의 유루의 무량공덕을 닦을 수 있다.
72)
즉 진지가 일어나는 첫 찰나에 3계 9지의 일체의 선법을 득수한다고 함은, 소의신이 욕계에 있으면서 최초로 진지를 일으킬 때를 말하는 것으로, 소의신이 상계에 태어날 때에는 하지의 법을 득수하는 일이 없다. 예컨대 초정려에 태어나 아라한을 획득한 이는 욕계의 온갖 유루선을 닦지 않으니, 그것은 저열하기 때문이다.
73)
능수(能修)란 일찍이 획득하지 못한 것을 노력하여 현전시키는 것(일으키는 것)이라면, 소수(所修)는 일찍이 획득하지 못한 것을 처음으로 획득하는 것으로, 득수(得修) 즉 미래수(未來修)의 ‘수(修)’는 바로 이러한 두 가지 조건을 갖춘 것을 말한다.
74)
원문은 ‘--新起得故皆名得修.’ 대정장(大正藏29,p.745중)에는 ‘--新修得故皆名得修.’로 되어 있다. 참고로 『현종론』의 해당부분(고려장28,p.267상)에는 ‘--雜修得故皆名得修.’로 되어 있다.
75)
무루의 유위법에 의해 득수와 습수가, 염오와 무기의 유루법에 의해 대치수와 제견수가 설정되었다는 뜻이다.
76)
이에 대해서는 주48)에서 관설(關說)하였다.
제75권
1)
18불공법(不共法)은 보살이 유정(有頂)의 제9 해탈도를 닦아 처음으로 진지(盡智)를 획득하는 단계에서 닦는 공덕으로, 성문이나 독각은 갖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다른 성자와 공통되는 공덕이 아니기 때문에 ‘불공(不共)의 불법(佛法)’이라 일컬은 것이다.
2)
『잡아함경』 제26권 제684경(대정장2,p.186하), ‘如來處非處如實知. 是名如來初力.’:『증일아함경』 제42권(대정장2,p.776중), ‘於是如來是處如實知之, 非處如實知之.’
3)
구역에서는 처비처중지력(處非處中智力). 이치에 맞다[是處]고 아는 것을 처지(處智)라 하고, 이치에 맞지 않다[非處]고 아는 것을 비처지(非處智)라고 한다. 즉 일체법에는 이치에 부합하는 뜻도 있고, 이치에 부합하지 않는 뜻도 있기 때문에 이러한 지는 유위와 무위, 유루와 무루의 일체법과 통하는 것으로, 바로 일체지(一切智, 즉 10지)를 말하지만, 무엇이 옳고[是處] 무엇이 그른 것[非處]인지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기 때문에 다시 다른 아홉 가지 지력을 제시하게 되었다.(후술)
4)
원문은 ‘身等惡行感非愛果, 定有是處. 感可愛果, 必無是處.’ 『중아함경』 제48권 「다계경(多界經)」(대정장1,p.724상중)에는 ‘若身惡行口意惡行, 因此緣此身壞命終, 趣至善處生於天中者, 終無是處. 若身惡行口意惡行, 因此緣此身壞命終, 趣至惡處生於地獄中者, 必有是處.’로 되어 있다. 이 경에서는 이 밖의 다수의 이치에 맞는 말[處]과 맞지 않는 말[非處]에 대해 설하고 있다.
5)
분별기(分別記)와 일향기(一向記)는 불타의 4종의 문답방식[問記] 중의 하나로,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49권에서 상론하였다.
6)
여기서 ‘사성’이란, 다섯 가지 부정견(不正見)을 관찰하고(見의 사성), 5무간업을 지으며(業의 사성), 악취에 떨어지는 자(趣의 사성). 본론 제30권 ‘유정의 세 부류: 3취(聚)’를 참조할 것.
7)
여기서 ‘두 종류’는 식의 연(緣)이 되는 소의(6근)와 소연(6경)을 말함인가?
8)
이에 반해 불교의 정설은 여래의 사자(使者)와 자정이나 멸진정에 든 자, 수신행과 수법행(즉 견도위의 행자), 북구로주와 지옥(나락가)의 유정 등은 자타가 모두 해코지할 수 없다.(본론 제13권 ‘목숨은 상속신에 따라 머무는 것인가, 일단 생기하면 머무는 것인가?’ 참조) 즉 그들은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치지 않았기 때문에 중간에 요절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본론 제31권 ‘중간의 요절’ 참조)
9)
5식신은 유심유사(有尋有伺)로서(본론 제4권 ‘유심유사 등의 분별’ 참조), 색(色) 내지 촉(觸)을 소연의 경계로 삼는다.
10)
다시 말해 “올바른 이치를 안다고 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이치를 안다는 말이며, 올바르지 못한 이치를 안다고 하는 것 역시 올바른 이치를 안다는 말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11)
즉 앞서 인용한 『다계경』(주4)에서 “‘신(身) 등의 악행은 좋지 못한 과보를 초래한다’고 하면 여기에는 결정코 바른 이치[是處]가 존재한다”고 설한 것은 무인론에 대한 것이고, “‘신 등의 악행은 좋은 과보를 초래한다’고 하면 여기에는 필시 바른 이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한 것은 악인론에 대한 것이라는 뜻이다.
12)
이상은 다른 아홉 가지 지력도 처비처지력의 일종으로,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예증이다. 아홉 가지 지력에 대해서는 이하에서 다시 상론한다.
13)
구역은 어업급과보중지력(於業及果報中智力).
14)
『잡아함경』 제26권 제684경(대정장2,p.186하), ‘如來於過去未來現在業法受因事報如實知. 是名第二如來力.’
15)
‘업의 세 가지’는 선ㆍ악ㆍ무기업(본론 제40권 ‘선ㆍ악ㆍ무기의 3업’ 참조), ‘법수의 네 가지’는 순현법수업ㆍ순차생수업ㆍ순후차생수업ㆍ순부정수업(본론 제40권 ‘정ㆍ부정업과 이에 따른 4업ㆍ5업ㆍ8업’ 참조).
16)
원문은 ‘業及法受故名爲業法受.’
17)
원문은 ‘業之法故名業法.’
18)
정려ㆍ해탈ㆍ등지ㆍ등지지력(구역은 淨解脫三摩提三摩拔提智力)은 4정려ㆍ8해탈ㆍ3삼마지ㆍ8등지 등을 여실히 아는 힘이다.
19)
『잡아함경』 제26권 제684경(대정장2,p.186하), ‘如來應等正覺, 禪解脫三昧正受, 染惡淸淨處淨如實知. 是名如來第三力’ 참조.
20)
4정려는 본론 제77권에서, 8해탈은 제80권에서, 3삼마지(等持)는 제79권 ‘경에서 설한 여러 등지’에서, 8등지(等至)와 미(味)ㆍ정(淨)ㆍ무루(無漏)등지의 관계에 대해서는 제77권에서, 정등지의 4분(分, 順退分ㆍ順住分ㆍ順勝進分ㆍ順決擇分)에 대해서는 제78권에서 상론한다.
21)
구역은 전전근지력(轉轉根智力). 여기서 ‘근(根)의 품류의 차별’이란 신(信)ㆍ근(勤)ㆍ염(念)ㆍ정(定)ㆍ혜(慧)의 5근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5근에 상ㆍ중ㆍ하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근기를 지닌 자의 지(智)의 우열을 판별하는 지혜를 근상하지력이라고 한다.
22)
『잡아함경』 제26권 제684경(대정장2,p.186하), ‘如來知衆生種種諸根差別如實知. 是名如來第四力’ 참조.
23)
중근기는 상근기에 비해 하근기이며, 하근기에 비해 상근기이기 때문에 지력의 명칭을 다만 ‘근상하지력’이라고 하였다는 뜻이다.
24)
구역은 종종욕지력(種種欲智力). 종종승해지력은 일체 유정류의 의요(意樂) 즉 그들이 향수하고자 하는 희(喜)ㆍ낙(樂)의 차별을 여실히 아는 힘이다. 즉 승해는 좋아하는 것을 선택(인가ㆍ결정)하려는 의식작용이기 때문이다.
25)
『잡아함경』 제26권 제684경(대정장2,p.187상), ‘如來悉知, 衆生種種意解如實知. 是名如來第五力’.
26)
구역은 종종성지력(種種性智力). 즉 현상의 토대가 되는 온갖 법성[界]의 차별을 여실히 아는 힘이다.
27)
『잡아함경』 제26권 제684경(대정장2,p.187상), ‘如來悉知, 世間衆生種種諸界如實知. 是名第六如來力’.
28)
멸지는 다만 소취(所趣)의 과(果)로서 능취(能趣)의 도(道)가 아니기 때문이다.
29)
구역은 변행도지력(遍行道智力). 변취행지력이란 일체의 제행은 반드시 결과로 능히 나아가는 것[能趣]임을 여실히 아는 힘이다.
30)
『잡아함경』 제26권 제684경(대정장2,p.187상), ‘如來於一切至處道如實知. 是名第七如來力’.
31)
예컨대 천처에는 욕계 6천, 색계 17천, 무색계 4천이 있어 천취로 나아가는 행에도 역시 다수가 있는 것이다.
32)
『잡아함경』 제26권 제684경(대정장2,p.187상), ‘如來於過去宿命種種事憶念. 從一生至百千生, 從一劫至百千劫, 我爾時於彼生如是族ㆍ如是姓ㆍ如是名ㆍ如是食ㆍ如是苦樂覺ㆍ如是長壽ㆍ如是久住ㆍ如是壽分齊. 我於彼處死, 此處生. 彼處生, 此處死. 如是行ㆍ如是因ㆍ如是方, 宿命所更悉如實知. 是名第八如來力.--如來以天眼淨過於人眼, 見衆生死時ㆍ生時, 妙色ㆍ惡色ㆍ下色ㆍ上色, 向於惡趣ㆍ向於善趣ㆍ隨業法受悉如實知. 此衆生身惡業成就, 口ㆍ意惡業成就, 謗毁賢聖, 受邪見業, 以是因緣身壞命終, 墮惡趣 生地獄中. 此衆生身善行, 口ㆍ意善行, 不謗賢聖, 正見業法受, 彼因彼緣, 身壞命終生善趣天上悉如實知. 是名第九如來力.
33)
이러한 두 가지 힘과 다음에 설할 누진지력(漏盡智力)은 6통(通) 중 숙주지증통(宿住智證通)과 천안지증통(天眼智證通, 즉 사생지)과 누진지증통(漏盡智證通)으로서, 다른 신통에 비해 특히 뛰어나기 때문에 아라한의 그것을 3명(宿主智證明ㆍ死生智證明ㆍ漏盡智證明)이라 하고, 부처의 그것을 다만 ‘힘[力]’이라고 이름하였다. 후술.(‘6통’에 대해서는 본론 제76권에서 상론함)
34)
‘누진’은 바로 택멸을 의미하기 때문에 누진지력은 도지와 고ㆍ집지와 타심지와는 관계하지 않으며, 다만 세속지와 법ㆍ유지와 멸지와 진ㆍ무생지에 의해서만 성취된다.
35)
『잡아함경』 제26권 제684경(대정장2,p.187상), “如來諸漏已盡, 無漏心解脫慧解脫, 現法自知身作證, ‘我生已盡 梵行已立 所作已作 自知不受後有.’ 是名第十如來力.”
36)
이에 대해 여실하게 아는 힘이 바로 순서대로 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ㆍ업이숙지력(業異熟智力)ㆍ정려 등의 지력이었다.
37)
이에 대해 여실하게 아는 힘이 바로 근상하지력(根上下智力)과 종종승해지력(種種勝解智力)과 종종계지력(種種界智力)이었다.
38)
이에 대해 여실하게 아는 힘이 바로 숙주수념지력(宿住隨念智力)과 사생지력(死生智力)이었다.
39)
이에 대해 여실하게 아는 힘이 바로 누진지력(漏盡智力)이었다.
40)
이와 같은 10지(智)는 성문과 독각에게도 역시 존재하는데, 어째서 부처의 그것만을 ‘힘[力]’이라고 하는가? 하면, 부처의 지혜는 일체의 앎의 대상에 대해 어떠한 장애도 없이 일어나지만, 그 밖의 다른 성자의 경우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힘’이라 하지 않은 것이다. 즉 10지가 자타(自他)의 차별이나 거리낌[罣礙] 없이 일어날 때, 혹은 유정의 구제와 관계하여 차별 없이 일어날 때만을 ‘힘’이라고 하기 때문에, 유정을 능히 구제할 수 없는 성문과 독각은 비록 10지를 갖추었을지라도 그것을 ‘10력’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후술)
41)
『현우경』 제4권(대정장4,p.376)에 의하면, 시리필제(尸利必提)라고 이름하는 어떤 한 장자가 사리불에게 와서 출가하기를 희망하였지만, 사리자는 그가 너무 늙어 학문과 선정 등의 일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받아주지 않았다. 그 후 그는 부처님에게로 가 출가하였는데, 그때 지혜제일의 사리자가 자신을 받아주지 않은 이유를 묻자 부처님께서는 사리불과 여래는 과거 수행의 공덕이 다를 뿐더러 사리자는 법에 자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42)
『대비바사론』 제83권(대정장27,p.430하; 한글대장경121,p.184); 『대지도론』 제11권(대정장25,p.138하; 한글대장경101,p.333-334)에 의하면, 일찍이 부처님과 사리자가 함께 거닐고 있을 때, 매에게 쫓긴 비둘기가 사리자의 그림자 속으로 숨었지만 여전히 두려워하다 다시 부처님의 그늘 속으로 숨어들었다. 사리자가 그 이유를 묻자 “그대는 60겁 동안 불해의(不害意)를 닦았지만 나는 3무수겁 동안 닦았으며, 그대는 해의(害意, 해코지하려는 마음)의 습기(習氣)가 남아 있지만 나는 이미 영원히 끊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대는 비둘기의 전생과 후생을 관찰할 수 있을지라도 8만 대겁 이상은 능히 관찰할 수 없다”고 하였다.
43)
『찬집백연경(撰集百緣經)』 제5권(대정장4,p.224중). 목건련이 아귀들을 위해 대회(大會)를 열려하였지만, 그들을 관찰할 수 없었다. 그 이유를 부처님께 묻자 이같이 말하였다. “그 아귀들은 모두 업풍(業風)에 날아가 버렸기 때문으로, 그대들 성문으로서는 능히 지견(知見)할 수 없다.”
44)
유정들에게 존재하는 색ㆍ수ㆍ상 등의 온은 그 자체로서는 동일하지만, 종류나 질적인 내용(상ㆍ중ㆍ하품)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차별이 있다.
45)
나라연(Nārayāṇa)이란 비쉬누(Viṣṇu)의 다른 이름으로, 세계관적으로는 우주의 창조주로 일컬어지지만 여기서는 큰 힘을 소유한 절대신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46)
『구사론』 제27권(고려장27,p.652상중; 대정장29,p.141상;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 p.1228)에 의하면 이는 대덕 법구(法救)의 설로서,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무변(無邊)의 심력(心力, 무상정등보리)을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47)
일반 코끼리 힘의 열 배가 되는 것이 향상(또는 好象, 말하자면 전투용 코끼리)이며, 마하낙건나(Mahānagna)의 힘은 향상의 열 배이며, 발라색건제(Praskandi)의 힘은 마하낙건나의 열 배이며, 벌랑가(Varāṇga)의 힘은 발라색건제의 열 배이며, 차노라(Cāṇūra)의 힘은 벌랑가의 열 배이며, 나라연의 힘은 바로 차노라의 열 배이다. 이상은 모두 신의 이름이다.
48)
원문에서는 ‘한 배(一倍)가 되어야 나라연의 힘을 성취한다’고 되어 있지만, 『현종론』(제36권, 고려장28,p.269하)에 따라 천 배로 정정하여 번역하였다.
49)
애라벌나(Airāvaṇa)란 용왕 또는 코끼리 왕의 이름. 『구사론기』 제19권에 의하면 제석천이 타는 용상왕이다.
50)
육체적인 힘은 촉처를 본질로 하는 것으로, 온갖 촉 이를테면 지ㆍ수ㆍ화ㆍ풍의 능조(能造)의 대종(大種)과 미끄러움[滑性]ㆍ껄끄러움[澁性]ㆍ무거움[重性]ㆍ가벼움[輕性]ㆍ차가움[冷]ㆍ허기짐[飢]ㆍ목마름[渴] 등의 소조촉(所造觸)의 차별로서 드러난다는 것이 유부의 정설이다.(『대비바사론』 제30권, 대정장27,p.55상, “4대종과 소조색 모두가 육체적 힘의 강약의 자성으로, 그것이 조화된 것이 강함이고 조화되지 않은 것이 약함이다.”) 그리고 첫 번째 유설은 신력은 강승(强勝)한 대종 혹은 지대(地大)의 차별이라는 주장이며, 두 번째 유설은 일곱 가지 소조촉 이외에 별도의 ‘힘’이라는 촉[力觸]이 존재한다는 주장이며, 세 번째 유설은 수승한 힘은 무거움의 소조촉을, 저열한 힘은 가벼움의 소조촉을 본질로 한다는 분별설이다. 참고로 『구사론』(제27권, 고려장27,p.652중; 대정장29,p.140하; 권오민 역,p.1229)에서는 “소조촉 중의 대종의 차별”로 설하고 있다.
51)
『증일아함경』 제42권 제4경(대정장1,p.776하).
52)
정등각무외(正等覺無畏)란 ‘나는 정등각자이다’는 대자각이 있어 다른 이의 어떠한 비난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무외는 처비처지력과 같으며, 10지를 본질로 하는 것이다.
53)
누영진무외(漏永盡無畏)란 ‘나는 번뇌를 영원히 끊었다’는 대자각이 있어서 다른 이가 ‘그대는 정등각자가 아니다’고 비난하여도 이치대로 해명하여 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54)
설장법무외(說障法無畏)란 모든 제자들을 위해 염오법은 필시 능히 장애가 되는 법임을 설하여, 외도가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하여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55)
설출도무외(說出道無畏)란 도를 닦으면 반드시 고(苦)에서 출리함을 설하여, 외도가 ‘도는 출고(出苦)의 법이 아니다’고 하여도 이치에 맞게 해명하여 이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56)
원덕은 모든 부처가 공통적으로 지닌 원만한 공덕으로,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는 ‘세 가지 원덕’에서 상론한다. 이하 논설되는 지원덕(智圓德)과 단원덕(斷圓德)은 세 가지 원덕 중 과원덕(果圓德)의 하나이다.
57)
무지(無智) 자체는 의심이나 두려움이 아니지만, 지(智)는 의심이나 두려움을 능히 직접적으로 대치하기 때문에 무의(無疑)나 무외(無畏)라고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58)
위대한 성문들도 역시 세 가지 염주를 닦을 수 있지만, 기쁨과 근심의 습기(習氣)마저 끊을 수는 없으며, 그것은 오로지 부처님만이 끊을 수 있기 때문에 ‘불공법’이다.
59)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공유(共有)의 법인 비(悲)와 마찬가지로 능히 일체의 유정을 반연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역시 세 가지 괴로움의 행상(즉 苦苦ㆍ行苦ㆍ壞苦)도 능히 지을 수 없을 것이다.”(『구사론』 제27권, 고려장27,p.652하; 대정장29,p.141상; 권오민 역,p.1232) 즉 부처님의 대비가 무루지라고 한다면 부처와 성문 등이 공통으로 갖는 공유(共有)의 ‘비’와 마찬가지로 무진(無瞋)을 본질로 하고, 오로지 욕계의 유정만을 대상으로 하며, 고고(苦苦)의 행상만을 짓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후술)
60)
‘비’는 무진을 자성으로 하지만(본론 제79권 ‘4무량의 자성’ 참조), 대비는 무치를 자성으로 한다.
61)
‘비’는 성문ㆍ연각의 몸에 의지하여 일어나지만, 대비는 오로지 부처의 몸에 의지하여 일어난다.
62)
‘비’는 욕계의 유정을 대상으로 하여 고고(苦苦)의 행상만을 짓는 것이지만, 대비는 고고(苦苦)ㆍ행고(行苦)ㆍ괴고(壞苦)의 세 가지 행상을 짓는 것이다.
63)
‘비’는 오로지 욕계의 유정만을 반연하지만, 대비는 3계의 유정을 반연한다.
64)
‘비’는 4정려 모두에 의해, 대비는 오로지 제4정려지에 의지하여 일어난다.
65)
‘비’는 욕계를 떠날 때 증득하지만, 대비는 유정지를 떠날 때 증득한다.
66)
‘비’는 오로지 구제에 대한 희망이 위주라면, 대비는 실제로 구제를 실현하는 것이다.
67)
‘비’는 불평등하여 다만 욕계 중생의 괴로움만을 구제하지만, 대비는 평등하게 3계의 일체의 괴로움을 구제한다.
68)
여기서 ‘자량’이란 대비(大悲)를 인기하는 자량으로, 3아승기겁 동안 쌓은 광대한 복덕과 지혜를 말한다.
69)
여기서 법신이란 계(戒)ㆍ정(定)ㆍ혜(慧)ㆍ해탈ㆍ해탈지견(知見)의 오분법신(五分法身)을 말한다.
70)
『장아함경』 제1권 「대본경」에 의하면, 과거7불 중 비바시불(毘婆尸佛)은 인간의 수명이 8만 세 때, 시기불(尸棄佛)은 7만 세, 비사바불(毘舍婆佛)은 6만 세 때, 구루손불(拘屢孫佛)은 4만 세 때, 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은 3만 세 때, 가섭불(迦葉佛)은 2만 세 때 출현하였고, 당래 석가불은 백 세 이하일 때 출현하였다.
71)
‘무사지’란 34심의 단계(보리수하에서 견도 16심과 유정지의 수혹을 끊는 9무간도와 9해탈도)에서 유루ㆍ무루지를 스승 없이 증득한 것을 말하며, ‘일체지’란 일체제법의 체(體) 또는 자상을 아는 지, ‘일체종지’란 일체제법의 용(用) 또는 공상을 아는 지, ‘무공용지’란 애써 노력하지 않고도 저절로 아는 지를 말한다.
72)
‘일체번뇌단’이란 일체의 번뇌를 끊고 택멸을 획득하는 것, ‘일체정장단’이란 선정의 장애인 불염오무지를 끊고 비택멸을 획득하는 것, ‘필경단’이란 번뇌장과 정장(定障)을 끊고 물러나지 않는 것, ‘병습단’이란 단지 번뇌만을 끊는 것이 아니라 습기(習氣)도 끊어 2승과는 차별되는 것을 말한다.
73)
여기서 ‘온갖 상’이란 서른두 가지 대인상(大人相)을, 수호는 여든 가지의 종호(種好)를 말하며(이에 대해서는 『대비바사론』 제177권, 대정장27,p.888-889; 한글대장경125,p.33-37에서 상론함), 큰 힘은 나라연(那羅延)과 같은 힘을 말한다.
74)
『증일아함경』 제24권(대정장2,p.678상).
75)
4정려는 일반적으로 지(止)ㆍ관(觀)이 평등하여 온갖 공덕을 낳는데 큰 힘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낙통행’이라고 한다. 제4정려는 이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능히 ‘무쟁’의 소의지가 된다.(본론 제71권 ‘4통행’ 참조)
76)
유사혹이란 실체[事]로서 존재하는 대상을 반연하는 수소단의 번뇌를 말하는 것으로, 무쟁은 다른 유정이 일으키는 탐 등의 실체적인 번뇌[自相惑]를 반연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77)
무사혹이란 자아 등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반연하는 견소단의 번뇌를 말하는 것으로, 이치에 미혹한 혹이면서 내면적 혹으로서 개별적인 경계대상을 반연하여 일어나기보다는 모든 경계대상을 총체적으로 반연하는 번뇌이기 때문에 무쟁행의 소연이 되지 않는 것이다.
78)
원지는 세속지를 자성으로 하며, 제4정려에 의지하여 세 주에 머무는 부동종성의 아라한만이 능히 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무쟁과 동일하다. 다만 무쟁은 다른 이가 자신(아라한)에 대해 번뇌를 일으키지 않게 하는 것임에 반해, 원지는 어떠한 대상에 대해서든 그것을 알고자 원하기만 하면 참답게 아는 것이라는 점에서 양자에 차이가 있다.
79)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원지는 바로 비량지(比量智)로서 현량지(現量智)가 아니라고 해야 한다.”(『대비바사론』 제179권,대정장27,p.897중)
80)
라후라(Rāhula, 혹은 覆障, 執日). 네 아수라 왕의 하나로, 제석천왕과 싸울 때 손으로 해와 달을 붙잡아 광명을 가리웠다고 해서 그같이 이름하였다.
81)
본론 제76권 ‘무쟁 등의 공덕과 변제정’ 참조.
82)
타심지는 하나의 법[一物], 자상의 경계대상, 타상속, 심ㆍ심소법을 반연하지만, 현재법을 반연하는 원지는 하나의 법이나 다수의 법, 자상과 공상의 경계대상, 자상속과 타상속, 5온을 반연하며, 타심지는 4정려에 근거하여 일어나지만, 원지는 오로지 제4정려에 근거하여 일어나며, 타심지는 외법을 지닌 자나 이생 성자 모두에게 존재하지만, 원지는 오로지 무학의 성자(그 중에서도 불시해탈)와 부처에게만 존재한다. 타심지는 유루와 무루 모두와 통하지만, 원지는 오로지 유루이며, 타심지는 욕ㆍ색계계와 불계(不繫)의 법을 반연하지만, 원지는 3계계와 불계의 법을 반연한다.(『대비바사론』 제179권, 대정장27,p.897중 참조)
제76권
1)
‘퇴전하는 것이 불가능한 지(智)’란 한 번 획득하면 물러나는 일이 없는 부동법(不動法) 아라한에게 성취된 지를 말한다.
2)
명(nāma)은 물질ㆍ소리 등과 같은 명사적 개념, 구(pada)는 ‘제행은 무상하다’와 같은 문장, 문(vyañjana)은 aㆍiㆍkaㆍkha와 같은 음소(글자).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14권 ‘명ㆍ구ㆍ문 3신(身)’에서 상론하였다.
3)
법이란 능히 자상을 지녀[能持自相] 사물에 대한 이해를 낳게 하는 표준[軌生物解]이 되는 것으로, 명(名)ㆍ구(句)ㆍ문(文) 역시 이해를 낳는 표준이 되기 때문에 ‘법’이며, 이를 반연하는 부동법 종성의 지를 ‘법무애해’라고 하였다는 뜻이다.
4)
예컨대 명신(名身)이라 함은 온갖 개념[想]을 총체적으로 설한 것[總說] 즉 집합을 말한다.(본론 제14권 주34 참조)
5)
『구사론』 제27권(고려장27,p.654중; 대정장29,p.142상;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 p.1242)에서는 “물러남이 없는 지로서 소전(所詮)의 뜻을 반연하는 것을 두 번째 [의무애해]라고 한다”고 하였다.
6)
예컨대 ‘배’라고 하였을 때, 그것은 물에 떠 있는 배일 수도 있고, 먹는 과일로서의 배일 수도 있으며, 신체부위로서의 배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7)
이상 ‘명(名) 등’의 네 가지는 순서대로 법(法)ㆍ의(義)ㆍ사(詞)ㆍ변무애해(辯無礙解)의 소연이었다.
8)
원문은 ‘又由四分別他事成’이지만, 원(元)ㆍ명본(明本)과 『현종론』(제37권, 고려장28,p.274중; 대정장29,p.959하)에 따라 ‘별(別)’을 ‘이(利)’로 고쳐 번역하였다.
9)
여기서 대법(對法)은, 『구사론』(제27권, 고려장27,p.654하; 대정장29,p.142중; 권오민 역,p.1243)에 의하면 『시설족론』(구역에서는 『分別假名論』)으로, 이같이 설하고 있다. “명(名)ㆍ구(句)ㆍ문(文)과, 이것에 의해 드러나는 소전(所詮)의 ‘뜻’과, 이러한 뜻의 단수[一]ㆍ양수[二]ㆍ복수[多]와 남성ㆍ여성[형] 등의 언사의 차별과, 이러한 언사를 막힘 없이 설하는 것과 그것의 소의가 되는 도를 반연하는 물러남이 없는 지(智)를 순서대로 법(法)ㆍ의(義)ㆍ사(詞)ㆍ변(辯)의 무애해라는 명칭으로 설정하였다.”
10)
색의 이 같은 어원적 해석에 대해서는 본론 제2권 주52)를 참고할 것.
11)
사무애해가 일체 훈석(訓釋)의 언사(言詞, 어원 문법 등의 말의 이치)를 요달(통달)한 것이라면, 변무애해는 이치에 맞게 막힘이 없이 설하는 교묘한 웅변에 대해 요달한 것을 말한다. 이는 『구사론』(제27권, 고려장27,p.654하; 대정장29,p.142중; 권오민 역,p.1243)에서 유여사(有餘師)의 설로 논설되고 있다.
12)
진지와 무생지는 추리 판단[推度]의 의요(意樂)가 지식(止息)되었기 때문에 ‘견’이 아니다. 본론 제73권 ‘인(忍)과 견(見)과 지(智)의 관계’ 참조.
13)
즉 앞에서 의무애해는 제법을 반연하는 경우 10지를, 열반을 반연하는 경우 6지를 자성으로 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진지와 무생지를 제외할 경우 8지와 4지를 자성으로 하는 것이 된다.
14)
4성종에 대해서는 본론 제59권에서 상론하였다.
15)
법무애해의 가행은 산어(算語, gaṇita, 즉 수학)나 명ㆍ구ㆍ문신을 익히는 것이며, 의무애해는 부처님 말씀[佛語, buddha vacana]을 익혀 온갖 법의(法義)를 이해하는 것을, 사무애해는 성명(śabdavidyā) 즉 문법학을 익히는 것을, 변무애해는 인명(hetuvidyā) 즉 논리학을 익히는 것을 가행으로 삼았다는 뜻이다. 참고로 『구사론』(제27권, 고려장27,p.654하; 대정장29,p.142중; 권오민 역,p.1243)에서는 이를 전설(傳說)로 설하고 있다.
16)
여기서 ‘명(名) 등의 네 종류’란, 앞서 4무애해의 소연으로 논설된 능전(能詮)의 ‘명’ 등과 소전(所詮)의 뜻과 모든 지방의 언사(言詞), 그리고 정리(正理)에 부합하게 막힘이 없이 설(說)하는 것과 도(道)이다.
17)
이는 무애해의 원어 pratisaṃvid를 어원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18)
사무애해(詞無礙解)를 제외한 그 밖의 다섯 가지는 변제정 이외 그 밖의 지(地)와도 통하기 때문에 ‘일부’라고 하였다.(『구사론소』 제27권)
19)
변제정(prāntakoṭika dhyāna)이란 색계 제4정려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하(下) 3지에서와 같은 심(尋)ㆍ사(伺)ㆍ고(苦)ㆍ낙(樂)ㆍ우(憂)ㆍ희(喜)ㆍ입식(入息)ㆍ출식(出息)의 8재환(災患)이 없고, 지(止)ㆍ관(觀)이 평등한 가장 수승한 정려이기 때문에 ‘변제정’이라고 한다. ‘변제’는 무월극(無越極)의 뜻. 따라서 사무애해는 욕계와 초정려에 국한되는 것이기 때문에 제외하고, 대신 제4정려의 최상품(상상품)을 더하여 여섯 가지가 된 것이다.(후술)
20)
제4정려를 닦을 때, 처음에는 하하품의 제4정려를 일으키고, 다음으로 하중품ㆍ하상품을, 나아가 마침내 상상품에 이르게 되는데, 이러한 상상품의 제4정려를 ‘구경’이라 이름하였다는 뜻이다.
21)
‘4제(catuskoṭika)’란 ‘네 구의 단락으로 이루어진 한 게송’, 또는 ‘사해(四海)로 구분되는 한 세계’의 경우처럼 종류가 서로 유사한 네 가지 단락이나 구분[分齊]을 말하며, ‘실제(bhūtakoṭi)’란 구극 또는 궁극의 이치, 즉 제법 실상을 말하는 것으로, 열반을 금강실제(金剛實際)ㆍ제법실제(諸法實際)라고 하기도 한다. 따라서 ‘제’라는 말에는 종류의 구분이나 긍극의 뜻이 있다. 곧 4정려를 ‘변제’라고 하는 말로 일컬은 것은 이것이 정려 중에 가장 뛰어난 종류(樂通行 중에 가장 뛰어난 것임)이며, 가장 궁극적인 것으로서, 수승한 공덕은 대개 이것에 의해 생겨나기 때문이다.
22)
이상 무쟁의 체성과, 무쟁과 원지의 개별성에 대한 논설은 변제정과는 무관한 것으로, 아마도 착간(錯簡)이 아닌지 모르겠다. 본송(本頌)은 물론이거니와 『구사론』이나 『현종론』 등의 본 단락(‘변제정’)에는 이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다. 참고로 바사에 의하면, 무쟁과 원지의 자성은 ‘혜’이다.(『대비바사론』 제178권, 대정장27,p.896상; 동 제179권, 동p.899상)
23)
이염득은 누구라도 염오를 떠날 때 자연적으로 자재를 획득하는 것이며, 가행득은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여 획득하는 것을 말한다. 곧 이같은 여섯 공덕의 경우에는 이염하더라고 바로 그것의 자재를 획득하지 못한다.
24)
신경지증통(혹은 神境通)은 공중을 자유로이 날아가기도 하고 마음대로 변화할 수 있는 신통력(후술). 천안지증통(혹은 天眼通)은 미래세의 일을 아는 신통력. 천이지증통(혹은 天耳通)은 지극히 먼 소리나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신통력. 타심지증통(혹은 他心通)은 다른 이의 마음을 능히 잘 아는 신통력. 숙주수념지증통(혹은 宿命通)은 과거세의 일을 아는 신통력. 누진지증통(혹은 漏盡通)은 번뇌를 다할 때 얻는 신통력이다. 참고로 ‘통(通)’이라 함은 자신의 소연에 대해 전도됨이 없이 요달(了達)하는 묘용(妙用)으로서, 어떠한 장애도 갖지 않은 것.(『대비바사론』 제141권, 대정장27,p.727중)
25)
무간도(無間道)까지는 신통을 장애 하는 불염오무지의 장애가 있지만, 그러한 장애를 끊은 상태가 해탈도이기 때문이다.
26)
『품류족론』 제6권(대정장26,p.713하), ‘所通達法云何? 通達者, 謂善慧--.’
27)
『대비바사론』 제141권(대정장27,p.728중)에서의 온전한 형태의 힐난은 이와 같다. “만약 [온갖 통이] 해탈도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품류족론』의 설은 어떻게 회통시킬 것인가? 예컨대 [그 논에서는] ‘통이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선한 혜[善慧]와 천안ㆍ천이통이다’고 설하고 있다. 즉 해탈도는 무기의 혜이거늘 어떻게 통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참고로 바사에서의 답은 이러하다. “거기(『품류족론』)서 설한 ‘통’과 여기서 설하는 ‘통’은 다르다. 즉 거기서는 선한 혜를 다 ‘통’이라고 말하였으니, 일체법이 다 통달되는 법[所通達]이라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설한 바는 수승한 혜[勝慧]를 ‘통’이라고 말하였기에 ‘통’은 선이나 혹은 무기이다.”
28)
앞서 인용한 『품류족론』(주26)에서는 “‘알려지는 법[所知法]’이란 일체법으로서 바로 지(智)에 의해 알려지는 것이며,--통달되는 법[所通達法]이란, 여기서 통달이란 이를테면 선혜(善慧)이니, 일체법으로서 이것에 의해 통달되는 것을 말한다”고 하여 지(智)와 통달(通達, 견도 즉 忍ㆍ智)에 대해 논설한 것으로, 여기서 설하고 있는 [신]통과는 뜻이 다르다.
29)
‘알려지는 것’도, ‘통달되는 것’도 다 같이 일체법이다.(前註 참조)
30)
참고로 『품류족론』에서는 ‘요별되는 법[所識法]’에 대해서도 설하고 있다.
31)
원문은 ‘有彼非此.’
32)
『잡아함경』 제26권 제684경(대정장2,p.187상; 본론 제75권 주32); 『증일아함경』 제23권 「증상품(增上品)」제1경(대정장2,p.666중); 동 제26권 「등견품(等見品)」제5경(대정장2,p.696하).
33)
10력 중 누진지력이 다만 누진을 반연할 경우 도지ㆍ고지ㆍ집지ㆍ타심지를 제외한 6지를, 누진과 그것의 방편을 반연할 경우 10지를 본질로 한다.(본론 제75권 ‘그 밖의 지력과 그 자성’ 참조)
34)
이하 앞의 누진통을 제외한 다섯 신통이 무색정에 근거하여서는 일어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밝힌다.
35)
숙주통의 가행을 일으킬 때에는 자신의 태내(胎內) 5위와 태외(胎外) 5위(嬰孩ㆍ동자ㆍ소년ㆍ성년ㆍ노년)를 역(逆)으로 기억하여 숙주통을 일으키고, 그것이 성취되는 단계에서 이러 저러한 장소나 종성 등을 반연하는데, 무색정에는 이러한 색경(色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근거하여 숙주통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누진통을 제외한 5통의 가행에 대해서는 후술함.
36)
다섯 신통은 반드시 지ㆍ관이 평등한 경지에서만 일어나는 낙통행(樂通行)으로, 무색정은 ‘관’이 감소하고 ‘지’가 증가하며, 중간정 등은 ‘관’이 증가하고 ‘지’가 감소하는 고통행(苦通行)이기 때문에 다섯 신통의 소의지가 될 수 없다. 4정려는 18지(支)를 갖추고 있으며, 지ㆍ관이 평등하기 때문에 그것에 근거하여 생겨난 도는 마치 배를 타고 강을 내려가는 것처럼 쉽게 성취되기 때문에 낙통행이다.(본론 제71권 ‘4통행’ 참조)
37)
‘고ㆍ낙의 느리고 빠른 경지’란 성도가 어렵게 일어나는 무색ㆍ미지ㆍ중간정과 쉽게 일어나는 4정려를 말하는 것으로, 각각에 근거하여 둔근자가 일으키는 성도를 ‘느린 것(遲通)’이라 하고, 이근자가 일으키는 성도를 ‘빠른 것(速通)’이라 한다. 본론 제71권 ‘4통행’ 참조.
38)
가벼움[輕]을 생각하는 것은 마음대로 날 수 있는 신통인 신경통의 가행이며, 빛[光]과 소리[聲]를 생각하는 것은 각기 천안통과 천이통의 가행이다. 이 세 신통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론한다.
39)
타심통의 가행에 대해서는 본론 제73권 ‘특히 타심지에 대하여’에서 상론하였다.
40)
숙주통은 일찍이 영납(지각)하였던 대상만을 기억한다. 그런데 정거천은 성자가 태어나는 하늘로서 범부가 태어나는 일이 없다. 따라서 일찍이 영납한 적이 없었던 것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정거천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41)
무색계에서 몰하여 욕계나 색계에 태어난 자가 4정려에 들어 숙주통을 일으켰을 경우, 그것은 직접적으로 색경(色境)이 존재하지 않는 무색계를 반연한 것이 아니라 먼저 전 찰나에 멸한 다른 이의 마음을 자세히 관찰하고, 나아가 그의 숙주를 기억하여 익숙하게 된 다음 그것을 통해 자신의 숙주를 기억하게 된다는 뜻이다.
42)
‘가는 것[行]’과 ‘변화하는 것[化]’은 신경통의 두 사업으로,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는 ‘특히 신경통에 대하여’에서 상론함.
43)
『증일아함경』 제42권(대정장2,p.776하)와 『잡아함경』 제26권 제684경(동p.187상)에서는 부처의 10력 중 제9 사생지력(死生智力)을 ‘유정이 신ㆍ어ㆍ의의 악행과 선행을 성취하여 당래 악취와 선취에 태어나는 것을 천안으로써 보는 것’이라고 설하고 있다. 이같이 계경에서 사생지 즉 천안통이 신ㆍ어ㆍ의의 3업을 아는 것이라고 설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다만 색처만을 반연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힐난이다.
44)
『구사론』 제27권(고려장27,p.656상; 대정장29,p.143중; 권오민 역,p.1251).
45)
누진지력의 경우, 다만 누진(漏盡, 번뇌멸진)만을 반연하는 것이라면 6지(智)를, 이와 더불어 누진의 방편도 반연하는 것이라면 10지를 자성으로 삼듯이(본론 제75권 주34의 본문 참조), 누진지통 역시 누진만을 반연하는 신통이라면 법주념에 포섭되고 이와 더불어 누진의 방편도 반연하는 신통이라면 4념주에 포섭된다는 뜻이다.
46)
이 같은 이유에서 중현은 『현종론』(제37권, 고려장28,p.275하)에서 본단의 본송(念住初三身 他心三餘四)을 “세 신통(신경ㆍ천안ㆍ천이통)은 신념주이고, 하나(타심통)는 나머지 세 염주이며, 하나(숙주통)는 법념주이고, 뒤의 신통(누진통)은 법념주 혹은 4념주이다(三身一餘三 一法後法四)”로 고쳐짓고 있다.
47)
『구사론』(고려장27,p.656중; 대정장29,p.143중; 권오민 역,p.1252)에 의하면, 이는 앞서 인용한 『품류족론』의 설(주26)에 따른 주장이다.
48)
즉 천안과 천이통의 본질이 안식과 이식 상응의 혜라고 한다면, 제2정려 이상에는 안식도 이식도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4정려에 의지하여 일어난다고 설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뜻의 난문이다.
49)
『구사론』 제27권(고려장2,p.656상; 대정장29,p143중; 권오민 역,p.1252).
50)
여기서 ‘유정법에 존재하는 세 종류의 어리석음’은 분명하지 않다. 『대비바사론』 제102권(대정장27,p.530상)에 의하면, 3명은 순서대로 전제의 무지와 후제의 무지와 열반의 무지를 제거하는 것, 또는 온(蘊)의 어리석음과 유정(有情)의 어리석음과 법(法)의 어리석음을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명’이라고 이름하였다. 참고로 3명은 순서대로 전제(前際)의 법을 통달 요해하는 것ㆍ후제(後際)의 법을 통달 요해하는 것ㆍ열반성(涅槃性)을 통달 요해하는 것, 또는 전제의 유전법(流轉法)을 아는 것ㆍ후제의 유전법을 아는 것ㆍ환멸법(還滅法)을 아는 것이라는 이설도 언급되고 있다.
51)
원문은 ‘厭離爲門 饋無上法’으로 되어 있으나, 『현종론』(고려장28,p.277상)에 따라 ‘궤’를 ‘귀(歸)’로 고쳐 번역하였다.
52)
신변시도는 신경통(神境通)을 본질로 하는 것으로, 신이한 변화[神變]를 나타내는 것. 기심시도는 타심통을 본질로 하는 것으로, 다른 이의 마음을 능히 잘 아는 것. 교계시도는 누진통을 본질로 하는 것으로, 출리(出離)의 교법을 세워 가르치고 훈계하는 것이다.
53)
이를테면 교화할 유정을 이끌어 발심하게 하기 위해 첫째 신통한 변화[神變]를 나타내어 그들로 하여금 경탄하게 하며, 둘째 상대방의 마음을 통찰하여 깊은 믿음을 일으키게 하며, 셋째 누진이라고 하는 출리의 도를 세워 처중(處中)의 유정으로 하여금 발심하게 한다.
54)
원문은 ‘자신과 다른 이의 몸의 유사함[似]이다’지만, 장행의 해석에 따라 ‘사(似)’를 ‘화(化)’로 고쳐 번역한다.
55)
본론 제71권 주19)와 ‘신족(神足)에 대한 경주의 이해 비판’ 참조. 즉 선정은 능히 변화하는 마음 등을 일으켜 신통한 경계[神]를 조작하는 근거[足]가 되기 때문에 ‘신족(神足)’이라 이름하게 되었다.
56)
욕계신(身)의 경우, 욕계에서의 두 가지 변화(자기 몸의 변화와 다른 이의 몸의 변화)와 색계에서의 두 가지 변화(자기 몸의 변화와 다른 이의 몸의 변화). 색계신(身)의 경우, 색계에서의 두 가지 변화(자기 몸의 변화와 다른 이의 몸의 변화)와 욕계에서의 두 가지 변화(자기 몸의 변화와 다른 이의 몸의 변화).
57)
색계에 태어나 색계에 존재하면서 욕계에서의 변화를 조작할 때에는 향(香)ㆍ미(味)와 더불어 외적인 네 처를 변화시켜야 하지만, 색계에는 향처와 미처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여기서 유설(有說)은 『구사론』(고려장27,p.657상; 대정장29,p.144상; 권오민 역,p.1257)의 정설이며, 반대로 다만 색ㆍ촉의 2처만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유부의 정설은 『구사론』상에서 유설로 언급되고 있다.
58)
즉 제2정려에 의해 생겨나는 능화심(能化心)에는 욕계에 포섭되는 것과 초정려와 제2정려에 포섭되는 것의 세 가지가 있으며, 나아가 제4정려에 의해 생겨나는 능화심에는 여기에 제3정려와 제4정려에 포섭되는 것을 더한 다섯 가지가 있는 것이다.
59)
원문은 ‘無上依下, 下地劣故.’ “[신경통의] 온갖 과보로서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은 자지(自地)와 상지(上地)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필시 하지에 의지하는 일이 없으니, 하지의 선정심은 그 세력이 저열하여 상지의 과보를 낳지 않기 때문이다.”(『구사론』 제27권, 고려장27,p.657중; 대정장29,p.144상중; 권오민 역,p.1259)
60)
원문은 ‘上下地繫, 一靜慮果, 所依行等, 地有勝劣.’ 예컨대 다 같이 초정려에 의해 생겨난, 욕계에 포섭되는 능화심(能化心, 즉 능히 변화시키는 마음)과 초정려에 포섭되는 능화심은 비록 소의와 변화의 작용이 동일할지라도 후자가 전자에 비해 상지의 능화심이라는 뜻이다.
61)
원문은 ‘一地繫, 上下靜慮果, 地雖等, 所依行勝劣.’ 예컨대 다 같이 욕계에 포섭되는 능화심이라 하더라도 제2정려에 의해 생겨난 것은 초정려에 의해 생겨난 것보다 소의지와 작용[行]이 수승하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제2정려의 과보인 능화심은 제2정려까지 이를 수 있지만, 초정려의 과보인 능화심은 오로지 초정려에서 그치고 제2정려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62)
원문은 ‘下繫上果下果上繫, 如次地劣勝, 所依行勝劣.’ 예컨대 제3정려에 의해 생겨난 욕계에 포섭되는 능화심과 초정려에 의해 생겨난 초정려에 포섭되는 능화심의 경우, 현행하는 경지(地)는 비록 후자가 수승하지만, 소의와 작용은 전자가 수승하다는 뜻이다.
63)
즉 정려로부터 능화심(能化心)이 낳아지면 이로부터 제2ㆍ제3찰나의 동류의 마음(能化心)이 낳아져 상속하며, 나아가 마침내 최후의 능화심으로부터 다시 청정한 정려의 마음이 낳아지고 이로부터 출관한다. 따라서 능화심은 정려와 전 찰나의 능화심으로부터 생겨나며, 무간에 다시 후 찰나의 능화심과 정려심을 낳고 비로소 출관하게 되는 것으로, 『구사론』(제27권, 고려장27,p.657중; 대정장29,p.144중; 권오민 역,p.1260)에서는 “마치 문을 통해 들어간 자는 다시 문을 통해 나오는 것처럼 정려의 과보로서 생겨난 능화심에서 출관하는 경우 반드시 다시 선정에 들어야 한다”고 설하고 있다.
64)
예컨대 욕계에서의 경계대상(색ㆍ향ㆍ미ㆍ촉)의 변화는 욕계의 능화심에 의해 일어난다.
65)
원문은 ‘謂欲初定化唯自地心語’이지만, 『구사론』(제27권, 고려장27,p.657중; 대정장29,p.144중)의 논설 ‘謂欲初定化所發言, 此言必由自地心起’에 따라 이같이 번역하였다.
66)
예컨대 욕계나 초정려의 능화심이 욕계나 초정려의 유정을 화작할 때, 그러한 화작된 이가 일으키는 말은 욕계나 초정려의 발어심(發語心)에 의해 일어나며(자지), 제2정려 이상의 능화심이 화작한 이가 발하는 말은 초정려 등의 발어심에 의해 일어난다(하지). 왜냐하면 제2정려 이상에는 심(尋)ㆍ사(伺)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발어심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67)
『장아함경』 제5권 「사니사경(闍尼沙經)」(대정장1,p.36상). 참고로 이 경에서는 ‘一化身語 餘化亦語. 一化身黙 餘化亦黙’으로 되어 있다. 즉 범동자가 33신으로 나투어 33천에게 자신도 4신족을 닦았기에 이같이 무수한 형태로 변화한다고 말하였다. 이에 33천은 “범동자의 하나의 변화신이 말하면 다른 변화신도 역시 말하고, 하나의 변화신이 침묵하면 다른 변화신도 역시 침묵한다”고 생각하였다.
68)
“말을 발하려는 마음[發語心]을 일으킬 때에는 [능]화심(能化心)은 이미 존재하지 않으며, 그럴 경우 변화된 몸도 마땅히 존재하지 않을 것인데, 어떻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구사론』 제27권, 고려장27,p.657하; 대정장29,p.144중; 권오민 역, p.1261). 유부에 의하면 두 마음은 동시에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4정려에 의해 일어난 ‘능화심(能化心)’은 ‘말을 발하려는 마음’이 일어날 때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그럴 경우 더 이상 변화된 이의 몸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난문이다.
69)
『증일아함경』 제44권(대정장2,p.789상)에 의하면, 가섭은 계두산(鷄頭山)에서 골쇄의 몸을 변화시켜 죽은 후에도 반열반에 들지 않고 미륵불의 세상이 출현하기를 기다렸다. 『불본행집경』 제47권 「대가섭인연품」(대정장3,p.870상중) 참조.
70)
수소성의 변화는 색계에서의 변화이기 때문에 향처와 미처를 제외한 색처와 촉처에 포섭된다.(전술한 ‘신경통에 대하여’ 참조)
71)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5근과 4경의 9처를 화작하였을지라도 실제로 근을 화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변화된 색ㆍ향ㆍ미ㆍ촉의 4처는 근과 불가분[不離]의 관계이기 때문에 ‘근을 화작한다’고 말하여도 과실이 없다는 뜻이다.
72)
원문은 ‘修果無心餘化容有.’ 수소성의 능화심(能化心)에 의해 변화된 유정에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지만, 그 밖의 생득의 능화심에 의해 변화된 유정에게는 마음이 있을 수 있다는 뜻인가?
73)
수소성의 능화심에 의해 변화된 유정의 표업(말이나 행동)은 화작의 주체(즉 그러한 변화를 낳은 이)의 마음에 의해 일어나지만, 생득의 능화심에 의해 변화된 유정의 표업은 바로 변화된 이의 마음에 의한 것이라는 뜻이다. 이 경우 화작의 주체가 그러한 변화된 유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에 의해 해코지를 당할 수 있다.
74)
생득의 능화심에 의해 변화된 유정이 먹고 마신 음식은 그러한 변화를 초래한 이(즉 화작의 주체)를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변화된 유정의 몸에서 소화된다는 뜻이다.
75)
본권 ‘6통의 제문분별’ 말미에서 경주(經主)의 설을 비판하면서 언급하였다. “4정려 중에는 선정과 상응하는 뛰어난 무기성의 ‘혜’가 존재하여 능히 자지의 뛰어난 대종을 결과로서 인기한다. 즉 이러한 ‘혜’가 현전하면, 바로 자지의 천안(天眼)과 천이(天耳)를 인기하여 지금 바로 존재하게 하니, 이를 소의(所依)의 근(根)으로 삼아 안식과 이식을 낳게 되는 것이다.”
76)
선정에 의해 후천적으로 획득된 천안과 천이는 근본 4정려를 닦아 그 힘에 의해 획득된 것을 말하며(前項에서 논설한 ‘수소성의 능화심’ 참조), 태어나면서 획득된 천안과 천이는 부동업(不動業)을 닦아 색계천에 태어나 획득된 것을 말한다.
77)
장신보 즉 ‘주장신(主藏臣, grihapati)이라는 보배’는 전륜왕이 갖는 칠보(七寶) 중의 하나로, 인취에 있으면서 뛰어난 업력으로 인해 먼 곳의 색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칭우(稱友)에 의하면, 곳간을 지키는 자이다.(본론 제32권 주49 참조)
78)
천안은 색을 보기 위한 목적에서 화작된 것이므로 언제든 반드시 식(識)과 함께 하여 동분으로서 작용한다. 여기서 ‘동분’이란 유정을 유정이게끔 하는 일반성 내지 보편성으로서의 동분(불상응행법의 하나)이 아니라, 근(根)ㆍ경(境)ㆍ식(識)이 다 같이[同] 자신의 작용[分]을 갖고 동시에 존재하는 관계를 말한다.(본론 제6권 ‘同分ㆍ彼同分 분별’ 참조)
79)
‘가는 것의 세 가지’에 대해서는 전술한 ‘특히 신경통에 대하여’에서 논설하였다.
80)
『대비바사론』 제101권(대정장27,p.521중)에 의하면, 인취는 생처득지(生處得智)를 지닐 만한 바탕[田]이나 그릇[器]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며, 인취가 갖는 뛰어난 도상지(覩相智, 즉 視覺智)와 문어지(聞語智, 즉 聽覺智) 등에 의해 그것이 은폐 손상[覆損]되었기 때문이며, 타심지와 원지(願智) 등에 의해 가려지고 덮여[映蔽] 버렸기 때문이다. 동 제12권(동,p.60하)에도 동일한 기사가 인용되고 있다.
81)
『대비바사론』 제101권(대정장27,p.521하-522상)에 의하면, “옛날 도제나(刀提那)라는 이름의 범지였던 나음(那音)이라는 개가 과거생의 일을 기억하였는데, 그의 아들이 그로 하여금 평상에 올라 밥을 먹고 [감추어둔] 보물을 보여달라고 하자 그의 말대로 하였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는 『중아함경』 제44권 「앵무경(鸚鵡經)」(대정장1,p.703하 이하)에 나온다. 부처님께서 밥을 빌기 위해 도제(都提)의 아들(Todeyya putta) 앵무마납(鸚鵡摩納)의 집에 들리자 평상 위에서 밥을 먹던 개(白拘)가 짖었다. 이에 부처님께서 “너는 그렇게 해서 안 된다. 너는 이전(전생)에는 잘 따르더니 이제는 짖는구나”라고 꾸짖자 그 개는 평상에서 내려와 시름에 잠겨 누워있었다. 그 후 앵무마납이 이를 따지기 위해 부처님을 찾아가자 그 개는 전생에 마납의 아비로서, 이를 확인하고자 한다면 그 개에게 다시 평상에 올라 밥을 먹고 전생에 그가 감추어둔 보물창고를 보여달라고 하면 그렇게 할 것이라고 하였다.
82)
이 게송은 『대비바사론』 제12권(대정장27,p.60상); 동 제101권(동,p.522상)에도 인용되고 있다.
83)
이 게송은 『대비바사론』 제12권(대정장27,p.60하); 동 제101권(동,p.522상)에도 인용되고 있다. 서다림(Jetavana)은 기원정사(祇園精舍)의 음역어이다.
84)
송(宋)ㆍ원(元)ㆍ명본(明本)에는 ‘두 종류의 기억[二種念]’으로 되어 있다.
제77권
1)
선정[定, samāpatti]이란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여 산란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편의상 정(定)을 ‘선정’이라 번역하였지만, ‘선’과 ‘정’의 용례는 다르다. 즉 ‘선(禪, dhyāna, 靜慮의 구역)’이라는 말은 반드시 지관(止觀, 寂靜과 審慮)이 균등한 색계의 선정에만 해당하고(주9 참조), ‘정(samāpatti, 또는 等至)’은 도거와 혼침에서 떠나 마음이 평등한 상태에 이른 명상 일반을 뜻한다. 이에 반해 삼마지(三摩地, 혹은 三昧, samādhi, 또는 等持)는 대지법의 하나로서 심일경성(心一境性)을 의미한다. 『대비바사론』(제162권, 대정장27,p.821하)에 의하면, 후자(삼마지 즉 等持)가 일법(一法)을 본질로 하는 것이라면, 전자(定 즉 等至)는 5온을 본질로 한다. 혹은 후자가 일 찰나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전자는 상속을 의미한다. 혹은 모든 삼마지는 정(定,等至)이지만, 무상정이나 멸진정과 같은 정은 삼마지가 아니다. 이처럼 선정에는 다양한 이명이 있어 고래로 등인(等引, samāhitā)ㆍ등지(等持, 또는 三摩地, samādhi)ㆍ등지(等至, 또는 定, samāpatti)ㆍ정려(靜慮, 구역은 禪, dhyāna)ㆍ심일경성(心一境性, cittaikāgratā)ㆍ지(止,奢摩多, śamatha)ㆍ현법락주(現法樂住, dṛṣṭa dharma sukha vihāra)를 ‘칠종정명(七種定名)’이라고 하였다.
2)
다른 성자나 이생과도 공통되는 공덕에는 무쟁(無諍)ㆍ원지(願智)ㆍ4무애해(無礙解)ㆍ6통(通)ㆍ4정려ㆍ4무색정ㆍ8등지(等至)ㆍ3등지(等持)ㆍ4무량(無量)ㆍ8해탈(解脫)ㆍ8승처(勝處)ㆍ10변처(遍處) 등이 있는데(본론 제75권 ‘부처와 성자에 공통되는 공덕: 총론’ 참조), 선정은 지(智)의 소의지(所依止)가 될 뿐더러 역시 선정의 일종인 4무량ㆍ8해탈ㆍ8승처ㆍ10변처와 같은 뛰어난 공덕(본론 제79~80권에서 상론)을 낳는 근거가 된다.
3)
선정에 의해 성취되는 공덕 중의 하나인 4무량(無量)은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라고 하는 각기 다른 명칭으로 불리는데(본론 제79권에서 상론함), 4정려는 어찌하여 제1(初)ㆍ제2 등으로 불려지는가? 하는 물음이다.
4)
생정려란 과보로서의 선정[果定, kāraya dhyāna]으로 색계 유정의 이숙신(異熟身)을 말하는데, 초정려에 범중천 등의 3천이, 제2정려에 소광천 등의 3천이, 제3정려에 소정천 등의 3천이, 제4정려에 무운천 등의 8천이 있다.(본론 제21권 ‘색계’ 참조) 그러나 바사(婆沙)의 정설은 16천으로, 이에 따라 『현종론』 제38권(고려장28,p.280중)에서는 “이를테면 제4정려에는 여덟 가지가 있으며, 초정려에는 두 가지가, 그 밖의 정려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로 교정하고 있다.
5)
정정려란 원인으로서의 선정[因定, kāraṇa dhyāna]으로, 각각의 정려에 각기 한 가지가 있어 도합 네 가지가 되지만, 그것을 전체적으로 말하면 선성에 포섭되는 등지(等持, 마음을 평등하게 유지하여 하나의 대상에 전념하게 하는 심소법. 즉 10대지법 중의 하나인 三摩地, 본론 제10권 주24 참조) 즉 심일경성을 본질로 한다.
6)
『구사론』 제28권(고려장27,p.658하; 대정장29,p.145중;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 p.1267). 『구사론』에서는 이 같은 정의에 근거한 경주 세친의 힐난이 이어지고 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마음이 하나의 경계대상에 전념하는 상태에서 그것에 근거하여 ‘삼마지’라고 하는 명칭을 설정하였다고 한다면, 마땅히 [마음 이외에] 다른 심소법이 별도로 존재한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즉 인용한 경주의 논설에는,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전념하는 것을 심일경성(즉 삼마지)라고 한다면, ‘삼마지’라고 이름하는 심소를 개별적인 실체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힐난이 전제되어 있다.(후설)
7)
등지(즉 三摩地)의 개별적 실재성에 대한 상좌(上座)의 비판과 이에 대한 재비판에 대해서는 본론 제11권 ‘수ㆍ상ㆍ사ㆍ촉 이외 나머지 대지법에 대한 해명과 상좌설의 비판(續)’을 참조할 것.
8)
본론 제11권 ‘비유자의 심소 무별체설 비판’ 참조.
9)
‘정(靜)’은 등인(等引, 혼침과 도거를 떠나 평등하게 된 상태)을 말하고, ‘려(慮)’는 변관(遍觀)을 말하기 때문에 ‘정려’라고 한 것으로, 무색정에는 유정무려(有靜無慮), 욕계 삼마지는 유려무정(有慮無靜)이기 때문에 ‘정려’가 아니다. 오로지 색계 선정만이 유정유려(有靜有慮)이다.(『대비바사론』 제80권, 대정장27,p.412상)
10)
정려(dhyāna)는 ‘사유하다’, ‘의도하다’는 뜻의 어근 √dhī에서 파생된 말로서, ‘심려(upanidhyāna)’라는 말도 √dhī라고 하는 어근에서 비롯되었다는 뜻이다.
11)
그러나 다른 부파(예컨대 경부)에서는 ‘심려’를 사(思)의 일종으로 간주한다. 본론 제34권 ‘경량부의 신표업설 비판’ 참조.(본론에서는 審慮思를 思惟思로 번역하였다)
12)
욕계는 관(觀, 비파사나)이 두드러지고, 무색계는 지(止, 사마타)가 두루 존재하기 때문에, 여기서 어떤 이의 설은 욕계의 수승한 ‘관’과 무색계의 두루 존재하는 ‘지’를 임지한 선정이 바로 ‘정려’라는 뜻이다.
13)
부패한 종자도 역시 싹을 틔울 수 있는 종자와 유사하기 때문에 ‘종자’라고 이름하듯이, 염오의 선정(즉 味等至) 역시 심려(審慮)함에 있어 지관이 균등하여 정려와 유사하기 때문에 ‘정려’라고 이름할 수 있다는 뜻이다.
14)
순서대로 제2ㆍ제3ㆍ제4정려. 이상 4정려의 정려지(支)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상론한다.
15)
본론 제21권 ‘무색계’ 참조. “무색계에는 색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방소(方所,물리적 공간)도 존재하지 않지만, 이숙생의 승열(勝劣)의 차별에 따라 공무변처(空無邊處)ㆍ식무변처(識無邊處)ㆍ무소유처(無所有處)ㆍ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네 가지가 있다.”
16)
즉 무색정과 정려는 수(數)와 자성이 동일하지만, 심일경성과 더불어 그에 수반되는 상응 구기법에 근거하는 경우 정려는 5온을 본질로 하지만, 무색정은 색온을 제외한 4온을 본질로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는 뜻이다.
17)
근분정(近分定)이란 근본정(根本定)에 근접한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하지의 수혹을 조복시켜 근본정에 들어가려고 준비하는 선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근본정에 4정려와 4무색정의 여덟 등지가 있으므로 여기에도 여덟 종류가 있다.(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78권에서 상론함)
18)
여기서 「대종온」은 『발지론』 제5편. 이를 해석한 『대비바사론』 제137권(대정장27,p.705하)에 의하면, 제색상(除色想)의 계(界)는 색계이며, 지(地)는 제4정려이며, 소의신은 욕계신이며, 소연은 욕계색이다.
19)
승해작의로써 색상을 제거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발지론』 제13권(대정장26,p.987; 한글대장경176.p.307)에서 상론.
20)
본론 제2권(‘색의 의미’)에 의하면, 변괴(變壞, rūpyate)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고수(苦受)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유대촉(有對觸)이기 때문에, 바뀔 수 있기[可轉易] 때문에 색(rūpa)이라 이름하였다. 혹은 “색은 바로 변애(變礙) 시현(示現)의 뜻이다.”(본론 제21권 ‘3계의 名義’ 참조)
21)
원문은 ‘無在此在彼所依諸色故.’ 즉 무색계에는 ‘여기’나 ‘저기’라는 방소(方所, 공간적 장소)를 지시하는데 근거가 되는 색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변이하여 나타날 수 없는 법(무색법)’ 중에서도 지극한 것이라는 뜻이다.
22)
원문은 ‘謂世亦有唯是遮言, 亦見有能遮而兼表.’
23)
이는 무색계에도 색이 존재하지만 아주 미세하기 때문에 ‘무색’이라 말하게 되었다는 이설로서, 보광(『구사론기』 제28권, 대정장41,p.418하)에 의하면 대중부와 화지부의 주장이다. 『이부종륜론』에서도 대중부 등에서는“색ㆍ무색계에도 6식신이 갖추어져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럴 경우 그것의 소의ㆍ연이 되는 미세한 색법이 존재한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대비바사론』 제83권(대정장27,p.431중; 한글대장경121,p.187)에서는 무색계의 유색론(有色論)을 분별론자의 주장으로 전하고 있다. 즉 그들에 의하면, 계경에서 “명색은 식을 반연하고, 식은 명색을 반연한다”고 설하고 있으며, 또한 “목숨[壽]과 체온[煖]과 의식[識]은 항상 화합하여 떠나지 않는다”고 하였으므로, 식이 존재하는 무색계에는 명색도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후설) 『구사론』 제28권(고려장27,p.659중~660중; 대정장29,p.145하~146중; 권오민 역,p.1272~1277)에서도 무색계 유색론과 무색론 사이에 대론이 광설(廣說)되고 있는데, 본론의 내용도 대개 여기에 따르고 있다.
24)
4무색정은 전체적으로는 차별도 없을지라도 이숙생에 따른 상하 승열(勝劣)의 차별이 있듯이 태어나는 몸도 그러하기 때문에 제4 비상비비상처의 생신(生身)이 가장 청묘(淸妙)하다고 해야 하며, 그럴 경우 그것만을 ‘무색’이라 해야 한다는 힐난이다.
25)
만약 하지의 안근에 의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미세한 것’이라 하고, 그래서 ‘무색’이라고 한다면, 욕계의 안근에 의해 생정려 즉 색계에 태어난 이의 색신도 능히 보이지 않는데, 그것은 왜 ‘무색’이라고 이름하지 않는가? 하는 뜻의 힐난이다.
26)
명칭과 뜻이 반드시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무색계라고 이름하였을지라도 반드시 색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는 뜻이다. 『구사론』(위의 책)에는 “만약 욕계와 색계는 그 뜻에 따라 명칭을 설정하였지만 무색계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으로 되어 있다.
27)
다시 말해 “무색계에는 ‘무색’이라는 명칭[名]상으로 볼 때 색이 존재하지 않지만, 의미[義]상으로는 색이 존재하는 말이니,”
28)
이하 앞서 ‘무색계 유색론’을 주장한 대중부 등의 경증과 이증이다.
29)
『잡아함경』 제21권 제568경(대정장2,p.150중), 壽暖及與識 捨身時俱捨 彼身棄塚間 無心如木石.: 『중아함경』 제58권 「법락비구니경」(대정장1,p.789상), 有三法, 生身死已, 身棄塚間, 如木無情. 云何爲三? 一者壽, 二者煖, 三者識. 목숨[壽, 즉 命]은 체온(색법)과 의식에 의해 유지 상속되므로 무색계에도 색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는 경증. 이 세 가지의 화합관계에 대해서는 본론 제13권 ‘명근’을 참조할 것.
30)
『잡아함경』 제12권 제288경(대정장2,p.81중), 彼名色緣識生, 而今復言名色緣識, 此義云何?--臂如三蘆立於空地展轉相依, 而得堅立.
31)
4식주는 식(識)이 머무는 색ㆍ수ㆍ상ㆍ행. 본론 제22권에서 상론하였음.
32)
『잡아함경』 제2권 제39경(대정장2,p.9상), 若離色受想行, 識有若來若去若住若生者, 彼但有言數, 問而不知.
33)
안처(안촉) 내지 신처(신촉)은 무색계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 경설은 오로지 욕계와 색계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듯이, 처음의 두 경설도 역시 그러하다는 뜻이다.
34)
원문은 ‘言總意別.’ 즉 『식주경』에서는 색 등의 네 종류 모두에 대해 설하고 있지만, 그 뜻은 색ㆍ수ㆍ상ㆍ행이 각기 개별적으로 식주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설한 것이라는 뜻이다.
35)
『장아함경』 제2권 「유행경(遊行經)」에 의하면, 큰바람에 의해, 도를 얻은 비구 비구니나 큰 위신력을 지닌 천(天)에 의해, 보살이 입태(入胎)할 때, 보살이 정각을 성취할 때, 법륜을 굴릴 때, 할 일을 다하여 목숨을 버리고자 할 때, 반열반에 들 때 대지가 진동하는데(‘四’는 ‘八’의 誤植인가?), 이 모든 원인이 갖추어질 때 진동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원인에 의해 진동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식은 4온 모두를 떠날 때 오고 가는 일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온을 떠날 때 오고 가는 일이 없다. 즉 무색계에도 행 등의 온은 존재하기 때문에 식이 오고 가는 일이 있을 수 있으며, 따라서 『식주경』은 무색계의 유색론의 경증이 될 수 없다.
36)
예컨대 『잡아함경』 제15권 제371경(대정장2,p.101하). ‘4식’에 대해서는 본론 제30권에서 상론하였다.
37)
『중아함경』 제5권 「성취계경(成就戒經)」(대정장1,p.449하), “만약 비구가 계ㆍ정ㆍ혜를 성취하면 현법에 상지멸정(想知滅定)에 들고 날 것이지만, 현법에 구경지를 획득하지 못할 경우 신괴(身壞) 명종(命終)하여 박식천(博食天)을 초월하여 다른 의생천(意生天)에 태어나 상지멸정에 들고나게 된다.”
38)
『장아함경』 제20권 『세기경(世記經)』「도리천품」(대정장1,p.133중), 自上(즉 욕계이상)諸天以禪定喜樂爲食.
39)
『중아함경』 제24권 「대인경(大因經)」(대정장1,p.581중), 有無色衆生度一切色想, 滅有對想, 不念若干想--是謂第五識住.
40)
상동.
41)
‘하계의 색은 오로지 마음으로부터 일어난다’는 설은 경부의 설이다. 무색계에서 몰하여 하계에 태어날 때의 색은 무엇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무심정(無心定, 무상정과 멸진정)에서 출정할 때 일찍이 끊어진 마음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와 동일한 형식으로, 출정심(出定心)에 대해서는 세 가지 답이 고려되었다. 첫째는 입정전의 마음[前定心]을 등무간연으로 삼아 생겨난다는 유부 설, 무심정에도 마음이 존재한다는 비유자의 멸정유심설(滅定有心說), 그리고 소의신(有色根)에 훈습된 마음의 종자로부터 생겨난다는 경주 세친(혹은 상좌) 등의 색심호훈설(色心互熏設)이 바로 그것이다.(본론 제13권 ‘비유논자의 멸정유심설 비판’ ‘경주의 색심호순설 비판’ 참조) 이 경우에도 역시 대중부 등에서는 전술한 대로 무색계에도 미세한 색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생겨난다고 주장하였으며, 경주 세친은 선대 궤범사(상좌)의 설을 인용하여 마음 상에 훈습된 색의 이숙인(종자)으로부터 생겨난다고 하면서(『구사론』 제5권, 고려장27,p.488하; 대정장29,p.25하; 권오민 역,p.288), 다시 이같이 상론하고 있다. “그러한 [하계의] 색은 마음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으로 색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옛날에 일어났던 색의 이숙인이 훈습(熏習)하여 마음 상에 머물다가 그 공능이 지금 성숙한 것으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색(욕ㆍ색계의 색)은 그 같은 [무색계의] 마음[에 존재하는 색의 종자]로부터 생겨났다고 하였다.”(동론 제28권, 고려장27,p.660상중; 대정장29,p.146중) 이에 대해 보광(普光)은 논주 세친이 경부의 뜻을 빌려 답한 것이라고 평석하고 있는 것이다(『구사론기』, 대정장41,p.420상). 본항에서는 이러한 경부의 종자설에 대해 침묵하고 있지만, 앞서의 색심호훈설(본론 제13권)에서는 그것의 난점을 세세히 비판하면서 “이는 예컨대 보리 등의 싹이 자신과 동류의 종자를 원인으로 삼지 않고 다만 땅 등에 근거하여 생겨날 뿐이라고 주장한다면, 어찌 지혜 있는 자가 이를 듣고 비웃지 않을 것인가?”라고 조소하였다.
42)
『잡아함경』 제17권 제462경(대정장2,p.118상), “[유]색계와 무색계와 멸계의 3계가 있으니, [유]색계의 중생과, 무색계의 중생으로서 멸계를 알지 못하는 자는 다시금 온갖 유(有)를 받게 된다. 그러나 만약 [유]색계를 끊고 무색계에 머물지 않으면서 멸계에서 심해탈하면 생사에서 영원히 떠나게 된다.” 곧 본론 상에서 인용한 ‘유는 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함은 ‘유를 통해 유를 떠날 수 없으며, 오로지 멸을 통해 떠날 수 있을 뿐이다’는 뜻으로, 무색유가 이미 색유를 초월한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무색]유는 능히 [색]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설하였을 것인가? 하는 뜻의 해명이다.
43)
“그 경 중에서는, 능히 자지(自地)의 ‘유’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두루 벗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원히 벗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같이 설한 것이다.”(『구사론』 제28권 고려장27,p.660상; 대정장29,p.146상; 권오민 역,p.1276) 즉 “‘유’는 능히 ‘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경설은 자지의 ‘유’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의미로서, 타지의 ‘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에, 하(下) 8지는 벗어날 수 있어도 유정지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욕유에서 벗어난다고 하여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재생하기 때문에 그같이 말한 것으로, 무색유에 의해 색유를 벗어날 수 없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44)
여기서 5계란 6계 중 식계(識界)를 제외한 지ㆍ수ㆍ화ㆍ풍ㆍ공 계. 6계에 대해서는 본론 제3권 ‘6계 중의 공계와 식계에 대하여’에서 상론하였다.
45)
다시 말해 무색계의 무루율의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색계 대종에 근거한 것이다. 참고로 무루율의는 미지ㆍ중간ㆍ4근본정려에 근거하여 일어난다.(본론 제37권 ‘세 종류 율의의 획득조건’ 참조)
46)
유루의 법은 계지(界地)가 뒤섞이는 일이 없기 때문에 유루의 소조색은 반드시 대종과 동일한 계계(界繫)이다. 예컨대 욕계 소조색은 욕계 대종에 근거한 것이며, 욕계 율의(즉 바라제목차)는 욕계 대종과 소조색에 근거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본론 제36권 ‘표ㆍ무표업의 계지 분별’에서는 “무색계에는 대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표색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설에 대해, 이는 다만 유루의 무표에만 해당되는 말일 뿐 무루의 무표(무루율의)에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라고 논설하고 있다.
47)
즉 계경에서는 “정려 중에는 색(色)의 종류 내지 식(識)의 종류가 존재한다”고 설하고 있다. 『본사경(本事經)』 제6권(대정장17,p.689하~690상), 最初靜慮能以正慧如實隨觀, 其中諸色受想行識, 如是法性皆是無常.--空無邊處 能以正慧如實隨觀, 其中所有受想行識, 如是法性皆是無常.
48)
주39) 참조.
49)
다시 말해 유정지(有頂地)에서의 ‘상(想)’은 4정려나 공무변처 등 아래 3무색정처럼 밝고 수승하지 않기 때문에 ‘비상’이라 이름하였으며, 무상과(無想果)ㆍ무상정(無想定)ㆍ멸진정(滅盡定)처럼 완전한 무상(無想)이 아니라 어둡고 저열한 ‘상’이 존재하기 때문에 ‘비비상’이라고 이름하였다.
50)
‘온갖 [선정의] 상(想)’이란 4정려와 아래 3무색정의 ‘상’을 말하는 것으로, 초ㆍ제2정려의 희상(喜想)은 병과 같고, 제3정려의 낙상(樂想)은 화살과 같으며, 제4정려와 3무색정의 사상(捨想)은 부스럼과 같다. 또한 완전한 무심의 상태인 무상천 등의 경우 완전히 백지 상태인 치암(癡暗)과 같다는 뜻이다.
51)
미등지(혹은 味定, āsvādana samāpatti)란 애탐과 상응하는 등지로서, 전 찰나의 청정한 선정(즉 다음의 淨등지)을 애탐하는 등지를 말한다.
52)
정등지(혹은 淨定, śuddhaka samāpatti)이란 바로 선의 등지를 말하는 것으로, 미착(味著)의 대상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미등지와는 다르며, 유루이기 때문에 무루등지와도 다르다.
53)
원문은 ‘如勸長者作意記別.’ 작의를 권유하는 것과 기별하는 것은 불가분의 관계로서 동시적이듯이, 미착과 등지도 역시 그러하다는 뜻인가?
54)
“무루등지(anāsrava samāpatti)야말로 승의의 청정함[勝義淨]이거늘 어찌 ‘정등지’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인가? 어떤 이는 설하기를, ‘마땅히 [정등지라고] 설해야 함에도 설하지 않는 것은 그 밖의 다른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어떤 이는 설하기를, ‘무루의 선정이 청정하다고 함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유루의 선정이 청정하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이에 치우쳐 [정등지라고] 설한 것이다’고 하였다. 어떤 이는 설하기를, ‘차별되는 뜻에 근거하여 명칭을 설정하는 것으로, 선한 유루의 선정은 처음부터 염법에 어긋하는 것으로 청정의 뜻이 수승하기 때문에 정등지라고 이름하였으며, 성도는 번뇌를 끊는 것으로 무루의 뜻이 수승하기 때문에 무루등지라고 이름하였다.”(『대비바사론』 제162권, 대정장27,p.821하)
55)
정려지(靜慮支)에서 ‘지(aṅga)’는 지분(支分)ㆍ부분(部分)ㆍ성분(成分)의 뜻이다. 즉 적정(寂靜,止) 사려(思慮,觀)의 정려에 수순(隨順)하는 법이기 때문에[隨順義], 어떤 지(地)의 정려(무거운 짐)를 능히 인기하는 법이기 때문에[負重擔義], 능히 정려를 성취하는 법이기 때문에[成大事義], 어떤 지의 정려를 도와 견고하고 뛰어나게 하는 법이기 때문에[堅勝義], 온갖 정려의 차이를 분별하게 하는 법이기 때문에[分別義] ‘정려지’라고 이름하였다.(『대비바사론』 제80권, 대정장27,p.412중하) 이에 대해서는 본권 ‘정려지의 명의’에서 후설함.
56)
원문에는 ‘雖總漸滅’로 되어 있지만, 송(宋)ㆍ원(元)ㆍ명본(明本)과 『현종론』(제38권, 고려장28,p.283상)에 따라 ‘점멸’을 ‘점감(漸減)’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57)
내등정이란 뛰어난 믿음[信]을 말하는 것으로, 청정[澄淨]을 본질로 하며, 외적 대상에 조건 받지 않고 그 자체로서 전후 동등하게 상속하기 때문에 ‘내등정’이다.(후술)
58)
여기서 ‘행사’는 사수(捨受, 즉 非苦非樂受)의 ‘사’가 아니라 행온(상응행)에 포섭되는 사(捨)의 심소를 말한다.
59)
초정려와 제2정려의 ‘낙’이 경안락(輕安樂)으로 행온에 포섭되는 것이라면, 제3정려의 낙은 수락(受樂)으로, 수온에 포섭된다.(후술)
60)
원문은 ‘第二靜慮有重地喜’이지만, 『현종론』(제38권, 고려장28,p.283중; 대정장29,p.965하)에 따라 ‘중지(重地)’를 ‘동지(動地)’로 고쳐 번역하였다. 여기서 ‘동지’라 함은 심(尋)ㆍ사(伺) 등의 8재환(災患)에 의해 동요되는 아래 세 정려를 말함. 이에 반해 제4정려는 부동지(不動地)이다. 본론 제78권 ‘정려의 동(動)과 부동(不動)’ 참조.
61)
선정(等至)을 수습할 때, 상지로 나아가기도 하고 하지로 나아가기도 하며, 동류나 이류로, 혹은 인접한 단계나 한 단계 초월하여 나아가기도 하는데, 순서대로 순(順)ㆍ역(逆)ㆍ균(均)ㆍ간(間)ㆍ차(次)ㆍ초(超) 등지라고 한다.(본론 제78권 ‘초등지의 수습’ 참조)
62)
18정려지(靜慮支)는 실제적으로 열한 가지이다. 정리하면 초정려의 심ㆍ사ㆍ희ㆍ낙ㆍ심일경성(등지)과, 제2정려의 내등정(그 밖의 희ㆍ낙ㆍ심일경성은 초정려의 그것과 동일함)과, 제3정려의 행사(行捨)ㆍ정념(正念)ㆍ정혜(正慧)ㆍ수락(受樂)(그 밖의 심일경성은 초정려나 제2정려의 그것과 동일함)과, 제4정려의 비고락수(그 밖의 행사청정ㆍ염청정ㆍ심일경성은 제3정려의 행사 등과 동일함)가 그것이다. 참고로 초정려와 제2정려의 낙(樂)은 욕탐을 떠남으로써 획득되는 경안락(輕安樂)이기 때문에 제3정려의 수락(受樂, 즉 낙수)과는 다르다.(후술)
63)
본론 제71권 ‘보리분법 여설-의근을 각분으로 설정하지 않은 이유’ 참조. 즉 “마음은 잡염분(雜染分)과 청정분(淸淨分)에 대한 세력 작용[勢用]이 균등하여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무리를 짓는 일[偏黨]이 없지만, 각분은 오로지 청정분 중에 있을 때만 그것의 세력 작용이 더욱 강성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심왕을 각분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즉 마음은 염오와 청정 모두에 대해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정(淨)과 무루(無漏)의 등지에만 존재하는 정려의 지분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마음은 유전(流轉)에도 수순하지만, 정(定)은 환멸(還滅)에 수순하기 때문에 정려의 지분으로 설정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마음의 수승함은 왕과 같고 온갖 심소는 왕을 보좌하는 신하와 같은데, 선정[定]은 바로 심소이기 때문에 마음을 정려의 지분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니, 마치 국왕이 신하를 섬기지 않는 것과 같다.”(『대비바사론』 제80권, 대정장27,p.414중) 본론에서는 생략하였지만, 바사(婆沙)에서는 이하 상(想)ㆍ사(思) 등의 심소법을 정려지로 설정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논설하고 있다.
64)
예컨대 초정려의 정근(‘勤’의 심소)은 자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제2정려에 대한 것이며, 무소유처의 정근은 비상비비상처에 대한 것이다.
65)
보리분법의 경우 심(尋, 정사유)은 마음으로 하여금 4제를 관찰(정견)하도록 책려하는 작용이 강성하지만, 사(伺)는 미약하여 ‘심’에 은폐 감손[覆損]되기 때문에 다만 ‘심’만을 보리분법으로 설정하였지만(본론 제71권 주49의 본문 참조), 지금 정려지(支)의 경우 양자 모두 하지의 불선법을 막는데 서로를 은폐 감손시키지 않기 때문에 양자 모두를 정려지로 설정하였다.(『대비바사론』 제80권, 대정장27,p.414상)
66)
초정려와 제2정려의 희(喜)와, 제3정려의 수락(受樂), 제4정려의 비고락수(非苦樂受)는 다 같이 ‘수’를 본질로 하지만, 각기 희수(喜受)ㆍ낙수(樂受)ㆍ사수(捨受)로서 드러난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열여덟 가지 정려지의 실체는 열한 가지라는 뜻이다. 초정려와 제2정려의 ‘낙’은 경안(輕安)의 즐거움이기니 ‘수’가 아니다. 주62) 참조.
67)
제1구는 초정려의 지분이면서 제2정려의 지분이 아닌 것, 제2구는 제2정려의 지분이면서 초정려의 지분이 아닌 것, 제3구는 초정려의 지분이면서 역시 제2정려의 지분인 것, 제4구는 초정려의 지분도 아니고 제2정려의 지분도 아닌 것이다.
68)
예컨대 초정려지(支)와 제3ㆍ제4정려지의 관계, 내지 제2정려지 등과 제3ㆍ제4 정려지 등의 관계에 대해서는 『대비바사론』 제80권(대정장27,p.412하~413중)에서 상론하고 있다.
69)
즉 정려의 지분으로 말미암아 온갖 정려의 차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뜻으로, 이는 주55)에서 언급한 정려지에 관한 바사(婆沙)의 5의(義) 중 ‘분별의(分別義)’이다.
70)
예컨대 심ㆍ사 등은 초정려에 수순하고, 내지는 행사청정 등은 제4정려에 수순하듯이 각각의 정려에 수순하는 것이 [정려]지의 뜻이라는 말로서, 이는 주55)에서 언급한 정려지에 관한 바사(婆沙)의 5의(義) 중 ‘수순의(隨順義)’이다.
71)
어떤 정려지(地)의 각각의 지분은 서로의 자구가 되어 자지의 정려를 성취한다는 뜻으로, 이는 바사의 5의 중 ‘성대사의(成大事義)’이다.
72)
『대비바사론』 제80권(대정장2,p.412중), ‘問:此中何者是靜慮? 答:心一境性是靜慮, 以三摩地爲自性故. 此及所餘是靜慮支.’
73)
유부에서는 초정려를 비롯한 4정려 모두에 그것의 본질인 등지(等持, samādhi, 즉 심일경성)를 정려지(支)로서 설정하였다. 마치 왕과 백성이 비록 서로의 바탕이 될지라도 왕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왕의 백성’이라고 하듯이 정려지 중에 등지가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그것은 정려의 지분[支]이자 그 자체의 본질[體]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경부(經部)에서는, 상(象)ㆍ마(馬)ㆍ거(車)ㆍ보(步)의 4군(軍)이 모여 ‘사지군(四支軍)’이라는 개념이 설정되는 것처럼(이때 ‘상’ 등은 모두 사지군의 본질이 되며, ‘사지군’은 다만 ‘상’ 등에 따른 가법이다) 다섯 가지 개별적인 요소(別, 즉 支)가 모여 전체(總, 즉 정려)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5지(支) 자체는 정려의 본질인 동시에 정려의 지분이라고 주장하였는데, 본 논설은 이 같은 경부설에 대한 해명이다. 『구사론』(제28권, 고려장27,p.660하; 대정장29,p.146하; 권오민 역,p.1282)에서는 앞서 인용한 비바사사(毘婆沙師)의 설을 ‘전설(傳說)’이라 하여 논주의 불신을 나타내고 있다. 즉 “전(傳)하여 설(說)하기를, ‘이 가운데 오로지 정(定)만이 정려이면서 역시 또한 정려지(支)이며, 그 밖의 네 지분은 모두 정려지일 뿐 정려가 아니다’고 하였다. 그러나 참다운 뜻은 마치 사지군(四支軍)처럼 그 밖의 정려지도 역시 그러한 것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보광에 의하면 이는 논주 세친이 경부의 뜻에 근거하여 논설한 것이다. 경부가 설정한 정려지에 대해서는 본론 제78권 주12)를 참조할 것.
74)
이는, 앞서 4정려의 정려지에 대해 분별하면서 앞의 두 정려에서는 낙(樂)을 성취하고, 제3정려에서는 다시 수락(受樂)을 성취한다고 하였는데, 각각의 ‘낙’이 낙수(樂受)로서 동일하다면 정려지의 실제적 본질은 열한 가지가 아니라 열 가지가 되어야 한다는 경부의 난문이다. 유부에 의하면, 앞의 두 정려의 ‘낙’은 경안(輕安, 몸과 마음을 경쾌 안적하게 하는 의식작용으로, 대선지법의 하나)의 ‘낙’이며, 제3정려의 ‘낙’이 수(受)를 본질로 한다. 참고로 경부에 의하는 한 세 정려의 ‘낙’은 모두 신수락(身受樂)이기 때문에 제3정려에서의 ‘낙’은 새로이 성취된 것이 아니다.(후설)
75)
다시 말해 “그래서 초정려와 제2정려에 행사를 설정하지 않은 것이며, 제3정려와 제4정려에 경안을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76)
만약 “초정려와 제2정려의 ‘낙’을 낙수라고 할지라도 희수와 낙수는 서로를 현기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일심(一心) 구행(俱行)의 허물이 없다”고 한다면, 초정려는 4지(支)를, 제2정려는 3지를 갖추었다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77)
예컨대 『중아함경』 제17권 「장수왕본기경(長壽王本記經)」(대정장1,p.538하), 我當修學三定, 修學有觀有覺(즉 有尋有伺)定, 修學無觀少覺定, 修學無覺無觀定--. 즉 초정려와 제2정려의 5지(支)와 4지는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容有]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라면, 등지(等持) 또한 심(尋)ㆍ사(伺)의 유무와 관련하여 유심유사(有尋有伺)ㆍ무심무사(無尋無伺)ㆍ무심유사(無尋有伺)ㆍ유심무사(有尋無伺)에 네 종류가 존재한다고 해야 하지만, 경에서는 앞의 세 가지만을 설하고 있을 뿐이라는 뜻이다. ‘유심유사 등의 세 등지’에 대해서는 본론 제79권에서 상론한다. 참고로 여기서 정려지(支)의 불구기(不俱起)를 주장한 것은 경부이다.(주79 참조)
78)
유심유사 삼마지는 심ㆍ사와 상응하는 등지로서, 초정려와 미지정에 포섭된다. 무심유사 삼마지는 오로지 사(伺)와 상응하는 등지로서, 중간정에 포섭된다. 무심무사 삼마지는 심ㆍ사와 상응하지 않는 등지로서, 제2정려의 근분정으로부터 비상비비상처정에 포섭된다.(본론 제79권 ‘유심유사 등의 세 가지 삼마지’ 참조)
79)
『구사론』 제28권(고려장27,p.661상; 대정장29,p.147상; 권오민 역,p.1284~ 1285). 『구사론』상에서 이는 유설(有說)로 언급되는데, 보광에 의하면 경부사(經部師), 칭우에 의하면 비유자(譬喩者, Darṣṭāntika). 즉 경부에서는 앞의 두 정려의 ‘낙’ 역시 낙수이며, 이는 제3정려의 수락(受樂)과 함께 심수가 아닌 신수의 ‘낙’이기 때문에 ‘한 찰나의 마음 중에 두 가지 수가 함께 작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80)
『중아함경』 제58권 「법락비구니경」(대정장1p.789중), ‘云何樂覺(낙수의 구역)? 若樂更樂所觸生身心樂善覺, 是覺謂樂覺也.
81)
『구사론』 제28권(고려장27,p.661중; 대정장29,p.147상; 권오민 역,p.1285).
82)
본론 제78권 ‘앞의 두 정려의 낙지(樂支)가 낙수라는 경부 설 비판’ 참조.
83)
『중아함경』 제42권 「분별관법경」(대정장1p.695상중); 동 제43권 「의행경(意行經)」(p.700하), 復次比丘! 離於喜欲捨, 無求遊, 正念正智而身覺樂. 謂聖所說, 聖所捨念樂, 住室得第三禪成就遊.
84)
원문은 ‘若謂無色說名爲身, 無有身前不標名者.’ 6촉신(觸身)이라는 예(例)에서 보듯이, 무색법을 ‘신’이라는 말로 나타낼 때에는 ‘신’이라는 말 앞에 반드시 그것이 무색의 법(즉 ‘명’)임을 나타내는 말(6촉신의 경우 ‘촉’)을 표시한다는 해명.
85)
신견(身見) 즉 유신견은 실재[有, sat]하는 집적[身, kāya]의 온을 대상으로 하여 이를 ‘나’ 혹은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염오혜로서(본론 제47권 ‘5견’ 참조), 여기서의 ‘신’은 색법이 아니지만, ‘신’이라는 말 앞에 이것이 무색법(즉 名)임을 나타내는 말을 설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86)
무색계에는 색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 ‘몸[身]’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마음 등을 나타낸다는 뜻이다.
87)
원문은 ‘故身前名有無不定.’
88)
『구사론』 제28권(고려장27,p.661중; 대정장29,p.147상; 권오민 역,p.1285). 다시 말해 “무슨 이익이 있어 마음[意]을 ‘몸’이라는 말로 설하였을 것인가?”
89)
주79) 참조.
90)
『구사론』 제28권(고려장27,p.661중; 대정장29,p.147상; 권오민 역,p.1285). 초정려와 제2정려의 ‘낙’이 경안락이라고 한다면, 제4정려에는 훨씬 뛰어난 경안락이 존재해야 할 것임에도 계경에서는 거기에 낙지(樂支)가 존재한다고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정려와 제2정려의 ‘낙’은 경안이 아니어야 한다는 뜻의 해명.
91)
이에 대해서는 전항(前項) ‘초ㆍ제2정려의 낙(樂)과 제3정려의 수락’의 첫머리에서 논설하였다.
92)
상동. 즉 제3정려와 제4정려에 비록 앞의 두 정려보다 수승한 경안이 존재할지라도 행사(行捨)에 의해 은폐되어 그 상이 저열하다.
93)
『잡아함경』 제17권 제482경(대정장2,p.123상), 世尊, 若使聖弟子學遠離喜樂, 具足身作證, 得遠離五法, 修滿五法?--云何修滿五法? 謂隨喜ㆍ歡喜ㆍ猗息(경안의 구역)ㆍ樂ㆍ一心.
94)
『구사론』 제28권(고려장27,p.661중; 대정장29,p.147상; 권오민 역,p.1285~ 1286). 『구사론』상에서의 5법의 첫 번째는 ‘환(歡)’으로 되어 있다.
제78권
1)
본론 제77권 주79) 참조.
2)
원문은 ‘以我宗許 正在定位, 由勝定力起順樂受, 妙輕安風遍觸於身, 發身識故.’ 『구사론』 제28권(고려장27,p.661중; 대정장29,p.147상)에는 ‘許在定中, 有輕安風, 勝定所起, 順生樂受, 遍觸身故’라고 약설(略說)되어 있다.
3)
즉 앞의 두 정려의 낙지(樂支)가 신식과 상응하는 낙수라면, 신식(전5식)은 외계를 반연하여 산란되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경안풍(輕安風)의 촉(觸)을 영납(감수)하는 상태에서 선정은 괴실(壞失)되어야 한다.
4)
『구사론』 제28권(고려장27,p.661중; 대정장29,p.147상;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 p.1286).
5)
『구사론』 제28권(고려장27,p.661중하; 대정장29,p.147상; 권오민 역,p.1286)에서는 “경안을 반연하여 식이 생겨난다고 인정하므로 [‘욕계의 신근에 의지하여서는 색계의 촉과 식을 획득한다’는 과실은 없다(緣輕安識許生無過)”고 논설하고 있다. 즉 산심(散心)의 상태에서는 욕계의 신근에 의해 색계의 촉을 반연하여 신식을 일으킬 수 없지만, 선정의 상태 중에 나타나는 경쾌 안적한 바람[輕安風]의 감촉을 반연하는 신식은 욕계의 신근에 의해 낳아질 수 있다는 뜻이다.
6)
계경에서는 대개 초정려를 ‘이생희락(離生喜樂)’이라 하는데, ‘낙’이 경안을 본질로 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이생 희(喜) 경안(輕安)’으로 바꾸어 설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7)
앞서 상좌가 인용한 경에서 ‘마음으로 기뻐하기 때문에 몸이 경쾌 안적하며, 경쾌 안적하기 때문에 몸으로 즐거움을 향수한다’고 설한 것으로 볼 때, 경안(경쾌 안적)은 기쁨(희수)의 결과이자 즐거움(제3정려의 낙수)의 원인이 된다는 뜻이다.
8)
경안(praśrabdhi)은 몸과 마음을 경쾌[輕利]하게 하고 안온하고 적당[安適]하게 하여 능히 선법을 감당할 수 있게 하는 의식작용[心堪任性]이며(본론 제11권 ‘대선지법’ 참조), 혼침(styāna)은 몸과 마음의 무거운 성질[重性], 혹은 어둡고 답답한 성질[瞢憒性]로서, 이것으로 인해 능히 선법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본론 제11권 ‘대번뇌지법’ 참조)
9)
여기서 행사(行捨)는 사수(捨受)가 아니라 행온 즉 대선지법으로서, 혼침과 도거를 떠난 마음의 평등성 무경각성(無警覺性)인 ‘사(upekṣā)’를 말한다.
10)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제3ㆍ제4정려에 행사(行捨)의 지분을 설정하였다.(전술)
11)
원문은 ‘第四定中二捨所蔽, 順無明故--.’
12)
이같이 제2정려에 내등정(內等淨)을 배제하고 3지(支)를 설정한 것은 경부(經部)이다. 『구사론』 제28권(고려장27,p.662상; 대정장29,p.147중; 권오민 역,p.1289)에서는 내등정에 대해 “이러한 선정(즉 제2정려)은 심(尋)ㆍ사(伺)의 고동(鼓動)을 원리(遠離)하여 그 상속이 청정하게 일어나니, 그것을 일컬어 ‘내등정’이라고 한다. 만약 심ㆍ사의 고동이 존재한다면 상속은 청정하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마치 강물에 파랑이 이는 것과 같다”고 논설하고 있는데, 이는 경부설에 따른 것이다. 즉 경부에 있어 내등정이란 후설하는 바와 같이 ‘신(信)’이라는 개별적 실체에 근거한 법이 아니라 다만 수승한 선정에 근거한 마음의 청정한 상태를 가설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따라 제2정려에는 3지를 설정하였다. 참고로 경부에서는 초정려에 심ㆍ사ㆍ희ㆍ낙ㆍ등지의 5지를 설정하고, 제2정려에는 ‘심’과 ‘사’을 배제한 희ㆍ낙ㆍ등지의 3지를, 제3정려에는 다시 ‘희’를 배제한 낙ㆍ등지의 2지를, 그리고 제4정려에는 다시 ‘낙’을 배제한 등지 1지만을 설정하였다.(‘依初五支, 減二三四, 立第二等’, 『구사론』 제28권, 고려장27,p.661하; 대정장29,p.147중; 권오민 역,p.1288)
13)
즉 유부에 의하는 한 내등정(adhyātma saṃprasāda)이란 제2정려의 실제적 특징[支]의 하나로서, 정지(定地)의 염오함(즉 초정려의 심ㆍ사에 의한 동요)을 처음으로 떠날 때 획득되는 신(信, śraddha)의 심소. 물론 초정려를 증득할 때에도 ‘신’이 생겨나지만, 이때는 아직 정지의 염오를 떠난 적이 없기 때문에 신지(信支)를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14)
‘신’ 즉 믿음은 주의ㆍ경각의 작용인 작의(作意, 대지법의 하나)에 의해 증대되는 것으로, 마음의 평등성(平等性, 혹은 무경각성)인 사(捨) 즉 ‘행사(行捨, 대선지법의 하나)에 의해 상실된다.
15)
여기서 ‘평등함’이란 도거와 혼침을 떠난 평등성 즉 사(捨)가 아니라 마치 뱀이 죽통(竹桶)에 들어가면 곧게 펴지듯이 마음으로 하여금 심사(尋伺)에 의해 동요하지 않고 평등하게 상속하게 하는 삼마지(三摩地)를 말한다.
16)
이에 대해 『구사론』 제28권(고려장27,p.662상; 대정장29,p.147중; 권오민 역,p.1289)에서는 “[이때] 믿음은 청정한 것[淨相]이기 때문에 ‘정’이라는 명칭을 설정한 것이며, 외적 동요[外]를 떠나 균등하게 유전[均流]하기 때문에 ‘내등’이라 이름하였으니, 청정하게 내적으로 등류(等流)하기 때문에 ‘내등정’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하였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즉 제2정려에서 생겨난 청정한 믿음은 외적 대상에 조건 받지 않고 그 자체로서 전후 동등하게 상속하기 때문에 ‘내등정’이라고 이름하였다는 것이다.
17)
이는 『구사론』 제28권(고려장27,p.662상; 대정장29,p.147중; 권오민 역,p.1289)의 “이러한 내등정과 등지와 ‘심’과 ‘사’는 모두 다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는 유여사(有餘師, 보광에 의하면 경부사) 설에 대한 반론이다.
18)
이는 본송(본론 제77권 ‘정려지의 실제적인 본질: 총설’ 참조) 제4구에 대한 해석으로, 초정려와 제2정려의 희(喜)와 낙(樂)이 각기 희수와 낙수라면, 한 찰나의 마음[一心] 중에 두 가지 ‘수(受)’가 구행(俱行)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유부에서는 ‘낙’을 낙수가 아닌 경안락(輕安樂)으로 이해하였고 경부에서는 신수락(身受樂)으로 이해하였지만, 어떤 다른 부파에서는 ‘희’를 행온에 포섭되는 심소법으로, ‘낙’을 희수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19)
이는 초정려에서 우근을, 제2정려에서 고근을, 제3정려에서 희근을, 제4정려에서 낙근을 남김없이 멸하여 점차로 5근을 멸한다는 뜻으로, 경에서 이미 제2정려에만 희근이 있고, 제3정려에만 낙근이 있다고 설하여 이 두 가지를 별도로 설하였기 때문에 앞의 세 정려의 ‘낙’을 희수라고 할 수 없다는 뜻이다.
20)
『중아함경』 제1권 「성유경(城喩經)」(대정장1,p.424상); 동경 제42권 「분별관법경(分別觀法經)」(동p.695하), “성제자(비구)가 낙(樂)을 멸하고, 고(苦)를 멸하면 희(喜)와 우(憂)는 이미 멸해져 불고불락과 사(捨)와 염(念)청정의 제4선을 성취하여 거기에 노닐게 된다.” 이는 제3정려의 염오를 떠날 때 ‘낙’을 끊고, 제2정려의 염오를 떠날 때 ‘희’가, 욕계를 떠날 때 ‘우’가 몰하게 된다는 뜻으로, “‘낙’을 끊을 때 ‘희’는 이미 몰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제3정려의 ‘낙’은 ‘희’가 아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21)
다시 말해 “초정려와 제2정려의 ‘희’가 바로 희수로서, 앞의 세 정려의 ‘낙’은 희수가 아니다.”
22)
본론 제77권 ‘8등지와 미ㆍ정ㆍ무루등지’ 참조.
23)
본론 제77권 ‘4정려’ 참조.
24)
염오정려, 즉 미(味)정려에는 진실의 정려지(支)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컨대 염오한 초정려의 경우 희ㆍ낙은 존재하지 않지만 염오함을 특징[相]으로 하는 심ㆍ사ㆍ등지의 세 지분은 존재하기 때문에 ‘상(相)에 따라’라고 한 것이다.
25)
첫 번째 염오정려는 초정려에 대해 미착(味著)하는 등지이기 때문에(나아가 제4 염오정려는 제4정려에 대해 미착하는 등지) 이생(離生)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며, 따라서 희(喜) 낙(樂)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이러한 염오정려는 욕계는 떠났을지라도 자지에 대해서는 미착하기 때문이다.
26)
다시 말해 초정려의 ‘희’는 이생(離生)에 의한 것이지만, 제2정려의 ‘희’는 이생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같은 까닭으로 인해 정정려와 무루정려의 경우, 초정려를 이생희락(離生喜樂)이라 하고, 제2정려를 정생희락(定生喜樂)이라고 하는 것이다.
27)
다시 말해 행사(行捨) 역시 대선지법에 포섭되기 때문에 제3 염오정려 지(支) 중에 존재하지 않지만, 제4 염오정려의 경우와 동일하기 때문에 본송에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28)
즉 제4 염오정려는 제4정려를 미착하는 정려로서 자지의 번뇌로 인해 더럽혀진 선정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행사청정과 염청정이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비고락수와 등지만이 존재할 뿐이다.
29)
따라서 유여사에 의하는 한, 첫 번째 염오정려에는 4지(支), 제2 염오정려에는 3지, 제3 염오정려에는 4지, 제4 염오정려에는 3지가 존재한다.
30)
『중아함경』 제50권 「가루오타이경(加樓烏陀夷經)」(대정장1,p.743중). “욕계를 떠나고 악과 불선을 떠났으나 심(尋, 혹은 覺)ㆍ사(伺, 혹은 觀)가 있어 이생(離生)의 희ㆍ낙을 즐기는 초선을 ‘이동(移動)’이라 하니, 그것은 심ㆍ사 때문이다. 심ㆍ사가 종식되어 내적으로 청정한 한 마음이 되어 정생(定生)의 희ㆍ낙을 즐기는 제2선을 ‘이동’이라 하니, 그것은 ‘희’를 획득하였기 때문이다. 기뻐하고자 하는 것[喜欲]을 떠나 사(捨)에 노닐며 정념(正念)ㆍ정지(正智)의 신수락(身受樂)의 제3선을 ‘이동’이라 하니, 마음으로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낙(樂)과 고(苦)가 멸하고, 희(喜)ㆍ우(憂)가 이미 멸하여 불고불락과 사(捨)와 념(念)이 청정하여 획득하는 제4선을 ‘이동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역자초역)
31)
초정려는 심ㆍ사에 의해 동요되고, 제2정려는 ‘희’에 의해, 제3정려는 ‘낙’에 의해 동요되지만, 제4정려는 이것들에 의해 동요되는 일이 없다는 이 같은 설은 밀의(密意)일 뿐이며, 아비달마 논(論)에서는 동요의 원인을 모두 언급하였기 때문에 제4정려는 8재환을 떠났다고 논설하였다는 뜻이다.
32)
주20) 참조.
33)
유심유사(有尋有伺)의 선정은 초정려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론 제79권에서 상론함.
34)
즉 심일경성의 정(定) 자체는 동요함이 없지만, 심ㆍ사에 의해 동요하게 된다. 그럼에도 초정려의 마음은 심ㆍ사와 상응할 때, 마치 등불이 거친 어둠만을 멸하는 것처럼 거친 욕계의 염오를 떠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결코 무용한 법이 아니라는 뜻이다. 여기서 등불과 햇빛은 각기 심ㆍ사와 상응하는 선정과 상응하지 않는 선정의 비유이다.
35)
초정려의 심ㆍ사의 지분뿐만 아니라 나머지 희ㆍ락과 등지까지도 모두 버리려고 한다는 뜻이다.
36)
앞에서 언급한대로 정(定)정려의 경우, 초ㆍ제2정려에는 희수(‘낙’은 경안낙이므로 수가 아님)가, 제3정려에는 낙수가, 제4정려에는 사수가 존재한다.
37)
낙수는 전5식과 상응하는 신수(身受)의 낙근으로(본론 제9권 ‘제근 각각에 대한 해명’ 참조), 색계에는 비ㆍ설식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세 가지 식과 상응하는 낙수’이다.
38)
즉 안 등의 5식은 항상 심ㆍ사와 상응하여 일어나는데, 제2정려 이상에는 5식이 존재하지 않아 신수(身受)의 ‘낙’이 없으며, 마음의 기쁨은 거칠어 심수(心受)의 ‘낙’이 없기 때문으로, 그것은 다만 ‘희’라고 이름할 수 있을 뿐이다.
39)
즉 초정려의 마음을 빌려서 안식 등을 일으키는 것으로, 이를 차기식(借起識)이라고 한다.
40)
근분정은 하지의 염오를 떠나지 않고도 획득되는데, 근분정이란 말하자면 하지의 수혹을 조복시켜 근본정에 들어가려고 준비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도 역시 4정려와 4무색정의 8근분이 있다.(후술)
41)
정(淨)등지에는 순퇴분정(順退分定, 번뇌에 수순하는 선정)ㆍ순주분정(順住分定, 定住에 수순하는 선정)ㆍ순승진분정(順勝進分定, 상지에 수순하는 선정)ㆍ순결택분정(順決擇分定, 무루정에 수순하는 선정)의 네 종류가 있는데(후설), 이 중에 순주분을 제외한 세 가지의 일부만을 획득하는 경우에는 ‘획득한다’고 말하지 않는다.(次註 참조)
42)
즉 일찍이 욕계 9품의 혹을 떠나 초정려 근본등지의 순주분과 순퇴분을 획득한 이가 그 후 가행을 일으켜 초정려 근본등지의 순승진분과 순결택분을 획득하는 경우, 다시 말해 일찍이 초정려의 근본등지를 성취하고서 다시 그 일부를 획득하게 되는 경우 이러한 네 가지 분(分)은 동일한 하나의 정(淨)등지이기 때문에 ‘획득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아가 자지의 이염(離染)에서 물러남으로써 순퇴분을 획득하는 경우에도 일찍이 순주분ㆍ승진분 혹은 결택분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획득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 본송에서 ‘전부를 성취하지 않고서 획득하는 경우’에 한정시켜 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43)
‘전부를 성취하지 않은 경우’란 일찍이 이미 성취한 자가 그 후 다시 일부를 획득하는 경우를 말한다.(전술)
44)
예컨대 일찍이 무루의 제4정려를 성취한 자가 그 후 가행을 일으켜 제4정려의 무루의 잡수정려를 획득하는 경우나 사법(思法)의 종성이 물러나 퇴법(退法)의 무루도를 획득하는 경우 역시 일찍이 성취하고 나서 다시 그 일부를 획득하는 경우이다.
45)
본 송은 무루ㆍ정ㆍ염등지의 상생(相生)관계를 설한 것으로, 앞의 2구는 무루등지로부터 정(유루선)ㆍ무루등지(무루선)가 생겨날 가능성에 대해, 뒤의 2구는 정등지로부터 무루와 정ㆍ염등지가 생겨날 가능성에 대해 밝힌 것이다.
46)
앞의 2구는 염등지로부터 정ㆍ염등지가 생겨날 가능성에 대해, 뒤의 2구는 생(生)정려의 정ㆍ염등지로부터 다시 그러한 등지가 생겨날 가능성에 대해 밝힌 것이다.
47)
예컨대 무루의 제4정려는 무간에 자지와 위로는 식무변처정까지의 선(善) 등지만을 낳고 무소유처정의 그것을 낳지 못하며, 아래로는 제2정려까지의 선등지만을 낳을 뿐 초정려의 그것을 낳지 못한다.
48)
자지의 정(淨)과 무루(無漏)의 두 등지와 아래 두 지(공무변처와 식무변처)의 정과 무루의 네 등지.
49)
자지의 무루와 정의 두 등지와 상2지(제3ㆍ제4정려)의 무루와 정의 네 등지.
50)
자지와 하지의 여섯 가지란 자지의 정ㆍ무루의 두 가지와 하2지(공무변처와 제4정려)의 정ㆍ무루의 네 가지를 말하며, 상지의 세 가지란 무소유처의 정ㆍ무루의 두 가지와 유정처(비상비비상처)의 정(淨)등지를 말한다.
51)
제3ㆍ제4정려와 공무변처는 각기 상2지의 네 가지와 하2지의 네 가지, 그리고 자지의 두 가지(정ㆍ무루) 등지를 무간에 낳을 가능성이 있다.
52)
등지는 상ㆍ하지를 반연하며, 등지에 의해 생겨나기 때문에, 등지에 의해 생겨난 법지와 유지도 정ㆍ무루의 무색정을 낳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욕계 무루지인 법지(法智)는 욕계신과 욕계 고(苦) 등을 소의ㆍ소연으로 삼을 뿐더러 중간에 색계 4정려의 간격이 있기 때문에 무색정을 낳을 수 없고, 오로지 상계의 무루지인 유지(類智)만이 낳을 수 있다.
53)
정등지 중의 순결택분은 무루등지와 접해있고, 순퇴분은 염(染)등지와 접해있기 때문에, 정등지는 무간에 무루등지와 염등지를 모두 일으킬 수 있다. 즉 정등지 중의 순퇴분이 일어나면, 이와 무간에 탐번뇌가 일어나 전 찰나의 정등지를 애미(愛味)하게 되는 것이다.
54)
이상은 앞의 무루등지의 그것에 자지의 염등지를 더한 것이다. 이를테면 초정려의 경우 무간에 자지의 정ㆍ무루ㆍ염등지와 상2지(제2ㆍ제3정려)의 정ㆍ무루등지를 낳을 가능성이 있다.
55)
원문은 ‘若生淨染生染, 不然.’ 색계에 태어남으로써 획득하는 정려가 생(生)정려인데, 그곳에 태어나 획득한 정등지(淨等至, 즉 生淨)는 생득선(生得善)이지만, 염등지(染等至, 즉 生染)는 그러한 경지의 산란한 마음의 번뇌이다.
56)
이러한 순퇴분정과 무간에 자지의 염오한 미등지가 일어나 전 찰나의 순퇴분정을 반연하여 미착(味著)한다.
57)
예를 들면 미지정으로서 욕계 9품의 혹을 끊고나면, 상지(즉 초정려 근본정)의 순주분정에 따르게 된다.
58)
그러나 유부에 의하면, 추(麤)ㆍ고(苦)ㆍ장(障)은 하지를 반연하는 유루 무간도의 행상이며, 정(靜)ㆍ묘(妙)ㆍ이(離)는 상지를 반연하는 유루 해탈도의 행상이다. 본론 제66권 ‘유루 세간도의 소연과 행상’ 참조.
59)
여기서 ‘초등지’란 예컨대 초정려와 무간에 제2정려를 뛰어넘어 제3정려를 일으키는 것이다.(次項 참조)
60)
다시 말해 “혹 어떤 순승진분의 등지는 [자지를] 싫어하여 수승한 공덕을 견인하며, 혹 어떤 순승진분의 등지는 [상지를] 좋아하여 수승한 공덕을 견인한다.”
61)
주56)의 본문 참조.
62)
‘물러남’에는 이미 획득한 수승한 공덕에서 물러나는 이득퇴(已得退), 마땅히 획득해야 할 공덕을 아직 획득하지 못한 미득퇴(未得退), 이미 획득한 온갖 수승한 공덕이 현재전하지 않는 수용퇴(受用退) 세 가지가 있기 때문에 설혹 부동법의 아라한이라 할지라도 물러나는 일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본론 제70권 ‘물러남의 세 종류’ 참조)
63)
주47) 참조.
64)
이를테면 먼저 초정려를 일으키고, 이와 무간에 제2정려 내지 유정처를 일으키는 것을 ‘순’이라 하고, 먼저 유정처정을 일으키고, 이와 무간에 무소유처 내지 초정려를 일으키는 것을 ‘역’이라 한다. 또한 예컨대 유루의 초정려와 무간에 유루의 제2정려 내지 제4정려를 일으킬 경우, 다 같이 유루로서 동등하기 때문에 ‘균’이라고 하며, 유루의 초정려와 무간에 무루의 제2정려를 일으키고, 이와 무간에 유루의 제3정려를 일으킬 때를 ‘간’이라고 한다. 그리고 제2정려와 무간에 초정려를 일으키고 또한 제3정려를 일으키는 경우, 초정려와 제3정려는 서로 인접하여 차례로 일어나기 때문에 ‘차’라고 하였으며, 초정려와 무간에 제2정려를 초월하여 제3정려를 일으키는 것을 ‘초’라고 한다.
65)
초등지(超等至)의 가행(加行)과 성만(成滿)에 관한 이러한 각각의 단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대비바사론』 제165권(대정장27,p.835중-836상; 한글대장경124, p.348~351)를 참조할 것.
66)
원문은 ‘唯能超一故至第三.’ 예컨대 초정려에서 상지의 등지를 일으킬 때(즉 順)에는 제2정려를 뛰어넘어 제3정려를 일으키며, 혹은 유정처에서 하지의 등지를 일으킬 때(즉 逆)에는 무소유처를 뛰어넘어 식무변처를 일으킨다는 뜻이다.
67)
이는 유루정에 국한된 논설로서, 하지의 유루정은 지(地)를 초월할 때 이미 버렸기 때문이다.
68)
아래 8지의 번뇌는 무루도와 유루 세간도에 의해 끊어질 수 있지만, 유정지의 번뇌는 유루도로써 끊어지지 않을 뿐더러 유정지에는 무루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본론 제77권 ‘8등지와 미ㆍ정ㆍ무루등지’ 참조) 유정지의 나머지 번뇌(수혹)를 끊기 위해서는 가장 인접한 하지(무소유처)의 무루도를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다. 상지의 몸으로 하지의 도를 일으키는 이는 이러한 유정지의 성자뿐이다.
69)
미등지는 애미(愛味)의 행상을 일으키는 등지로서, 만약 무루법을 반연하였다면 그것은 선(善)의 등지로서 더 이상 미등지라고 할 수 없다.
70)
‘무기의 무위’는 비택멸과 허공으로, 이는 4제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에 무루등지의 소연이 되지 않는다.
71)
원문은 ‘但緣類不緣法品’이다.
72)
여기서 ‘모든 대치’란 단(斷)ㆍ지(持)ㆍ원분(遠分)ㆍ염환(厭患)의 4종 대치를 말함인가?
73)
“이미 하지의 유루법을 능히 반연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역시 능히 하지의 유루법 상에 [설정되는] 택멸과 비택멸도 반연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구사론기』 제28권, 대정장41,p.429하) 『구사론기』에서는 이를 『순정리론』의 설로 인용하고 있다.
74)
“자지의 번뇌에 의해 계박되어 있기 때문이다.”(『구사론』 제28권, 고려장27,p.664하; 대정장29,p.149중; 권오민 역,p.1307)
75)
이를테면 초정려의 근분정은 욕계의 번뇌를 끊을 수 있으며, 내지 유정처의 근분정은 무소유처의 번뇌를 끊을 수 있다. 근분정에 대해서는 차항(次項) 참조.
76)
주81) 참조.
77)
제1구는 앞의 세 가지 물음에 대한 대답이며, 제2구의 앞부분은 첫 번째 근분정에 대해 언급한 것이고, 뒷부분은 이설이다.
78)
근분정은 지(止)ㆍ관(觀)이 균등하지 않으며, ‘관’만이 수승하여 애써 노력하여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희ㆍ낙수와는 상응하지 않는다.
79)
첫 번째 근분정은 미지정(未至定)으로, 아직 욕계를 떠나지 않은 자는 근분정에 근거하여 성도를 일으키기 때문에 무루등지와 통하는 것이다.
80)
미지정(未至定, 즉 첫 번째 근분정)에 대해서는 차항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논설한다.
81)
초정려(有尋有伺地)보다는 뛰어나지만 제2정려(無尋無伺地)에는 미치지 못하는 단계인 중간정려(無尋唯伺地)는 초정려의 결과(初果)이기 때문에 하지의 염오를 떠나는 것도 아니며, 근본정려에 들어가는 원인(근분정)도 아니다. 즉 중간정려는 초정려에 포섭되는 것이면서도 심(尋)이 감소되어 초정려보다 상지로 설정된 것이기 때문에 ‘중간’이다. 따라서 근분정과는 다른 것이다.
82)
유심유사(有尋有伺) 등의 세 가지 삼마지에 대해서는 본론 제79권에서 상론한다.
83)
중간정(초정려와 제2정려의 중간)은 대범천의 뛰어난 과보를 획득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후술) 이러한 뛰어난 공덕을 대상으로 하여 애미의 마음을 낳게 된다.
84)
주78) 참조.
85)
본론 제71권 ‘4통행’ 참조.
제79권
1)
등지(等持, samādhi, 三摩地)란 마음을 평등[等]하게 유지[持]하여 한 대상에 전념하게 하는 것으로, 이 역시 등지(等至, samāpatti, 즉 定)와 마찬가지로 명상일반을 뜻한다. 그러나 양자 사이에는 광협의 차별이 있다. 즉 등지(等至)는 오로지 정심(定心)에 한정될 뿐 욕계 산심(散心)과는 통하지 않지만, 등지(等持)의 경우 욕계 선정심과 산심 모두와 통하기 때문에 전자보다 그 범주가 넓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등지(等持)의 경우 오로지 유심정(有心定)에 한정되지만, 등지(等至)는 유심정과 무심정(無心定) 모두와 통하기 때문에, 이 점에서 본다면 후자의 범주가 넓다고 할 수 있다.
2)
『중아함경』 제17권 「장수왕본기경(長壽王本記經)」(대정장1,p.538하), 我當修學三定, 修學有觀有覺(즉 有尋有伺)定, 修學無觀少覺定, 修學無覺無觀定--.
3)
『증일아함경』 제16권 제10경(대정장2,p.630중), “공(空)ㆍ무상(無想)ㆍ무원(無願)의 세 가지 삼매가 있으니, 공삼매는 일체 제법을 모두 공허(空虛)한 것으로 관하는 것이며, 무상삼매는 일체 제법에 대해 어떠한 상념(想念)도 갖지 않으며, 또한 역시 [상이 없어] 볼 수도 없다고 관하는 것이며, 무원삼매는 일체 제법에 대해 원하지도 희구하지도 않고서 관하는 것이다.”(역자 초역)
4)
즉 공의 등지(삼마지)는 유신견(有身見)의 두 가지 행상(아와 아소)을 직접적으로 대치하는 것으로, 아소견은 ‘공’의 행상에 의해, 아견은 ‘비아’의 행상에 의해 대치된다.(『대비바사론』 제104권, 대정장27,p.538하; 한글대장경122,p.86참조)
5)
『대비바사론』 제104권(대정장27,p.538중), “對治故者, 謂空三摩地是有身見近對治故.” 즉 바사에 의하면, 공ㆍ무원ㆍ무상삼마지는 순서대로 대치(對治)ㆍ기심(期心)ㆍ소연(所緣)에 근거하여 설정되었다.(후술)
6)
원문은 ‘知此非我此中無我.’
7)
예컨대 ‘5온(蘊) 무아(無我)’ 즉 ‘5온에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경우, 이는 마치 “물에 불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불에 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처럼 실체로서 존재하는 자아가 5온에 존재하지 않는다(다시 말해 온 이외 다른 곳에 존재한다)는 말로서, 자아 자체의 비존재[無體]를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5온은 자아가 아니다’는 비아(非我)의 행상을 별도로 설정하였다는 뜻이다.
8)
‘이러한 법’만이 자아가 아닌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일체의 모든 법이 자아가 아니라는 뜻이다. 일체의 모든 법이 자아가 아니라면, 자아는 어디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비아의 행상’을 설할 때만 ‘자아는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어 아견(我見)을 직접적으로 대치할 수 있다는 것이다.
9)
색 등의 다섯 가지란 색ㆍ성ㆍ향ㆍ미ㆍ촉, 세 가지 유위상이란 유위4상 중 주상(住相)을 제외한 생(生)ㆍ이(異)ㆍ멸(滅)의 세 가지로, 열반은 바로 이러한 열 가지 상을 여윈 것. 다시 말해 열 가지 상으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무상(無相)이다.
10)
유위제법은 인연(因緣)에 의해 조작된 제약적 존재이지만, 열반 즉 택멸무위는 인과에서 벗어난 무제약자이다. 물론 그것은 무루 간택력에 의한 이계과(離繫果)이지만, 이때 결과는 생겨난 결과가 아니라 증득된 결과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17권 ‘택멸무위의 인과관계’를 참조할 것.
11)
앞의 두 행상은 공ㆍ비아를 제외한 고제(苦諦)의 행상이며, 뒤의 여덟 가지는 집제(集諦)와 도제(道諦)의 행상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74권 ‘16행상의 실체와 명의(名義)’를 참조할 것.
12)
이에 따른다면, 세 삼마지의 순서는 공ㆍ무원ㆍ무상이 되어야 한다. 『바사』에서는 의요(意樂)를 기심(期心, 기약한 마음)이라 하였다. 주5) 참조.
13)
성도는 열반을 획득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피안에 이를 때 뗏목을 버리듯이 열반에 이르게 되면 반드시 버려야 하기 때문에(『중아함경』 제54권 「아리타경」참조) 성도 역시 무원삼마지의 행상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이는 곧 ‘원하지 않는다’는 ‘의요’에 따라 설정된 것이라는 뜻이다.
14)
세간에 포섭되는 등지는 정등지이고, 출세간에 포섭되는 등지는 무루등지이다.
15)
열한 가지 지(地)란 욕계ㆍ미지정ㆍ4근본정려ㆍ중간정ㆍ4무색정 등의 일체 유루지를 말하고, 아홉 지란 앞의 열한 가지 지에서 욕계와 무색정 중 유정처를 제외한 그것의 무루지를 말한다.
16)
중(重)삼마지는 불시해탈의 아라한이 무학(즉 무루)의 3해탈문을 반연하여 일으키는 등지로서, ‘공공’은 앞에서 닦은 공삼마지를 다시 공이라고 사유하는 등지이다.(후술)
17)
공삼마지는 ‘공’과 ‘비아’의 행상과 상응하는 등지이지만, ‘그러한 공삼마지는 비아이다’고 관찰하는 것보다 ‘공(무아)이다’고 관찰하는 쪽이 싫어하는 힘이 수승하기 때문에 중(重)삼마지에서는 다만 ‘공’의 행상만을 취할 뿐이라는 뜻이다.(자세한 내용은 후술함)
18)
원문은 ‘見無我者, 於諸有爲法, 起厭背心’이지만, 『현종론』(제39권, 고려장28,p.292상; 대정장29,p.971하)에는 ‘무아’가 ‘비아(非我)’로 되어 있다.(후술의 경우도 동일함) 전술한 공삼마지의 경우(주7 참조)로 볼 때 공과 무아는 동일한 말이기 때문에 ‘비아’가 옳다. 참고로 『순정리론』 전편에 걸쳐 언급된 ‘무아(無我)’라는 말은 『현종론』에서 거의 대개 ‘비아(非我)’로 교정되고 있다.
19)
『현종론』(같은 책)에는 ‘諸有已見諸法非我’로 되어 있다.(前註 참조)
20)
여기서 ‘성도’는 무학(무루)의 무원삼마지이다.
21)
참고로 『구사론』 제28권(고려장27,p.665중; 대정장29,p.150상;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 p.1314)에서는 “고(苦)와, 인(因) 등의 [집제의] 행상을 취하지 않는 것은 무루의 행상이 아니기 때문이며, ‘도’ 등의 [도제의] 행상을 취하지 않는 것은 [피안에 이른 후에] 싫어하여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고 약설하고 있다.
22)
예컨대 『잡아함경』 제1권 제9경(대정장2,p.2상), “色無常. 無常卽苦. 苦卽非我--.” 성도 역시 유위로서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라는 이러한 이설에 대해서는 본론 제57권(‘성도도 괴로움이라는 이설 비판’)에서도 널리 비판하였다.
23)
즉 제법의 상(相)은 유위와 무위, 유루와 무루 등으로 차별되는 것으로, 무위의 택멸과 유위의 5온이 다르듯이 유루의 5취온(苦ㆍ集諦)과 무루의 5온(道諦)이 다르기 때문에 성도가 비상(非常)이라 하여 유루의 5취온처럼 ‘고’라고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24)
예컨대 『잡아함경』 제14권 제344경(대정장2,p.95상), “謂生苦ㆍ老苦ㆍ病苦ㆍ死苦ㆍ恩愛別苦ㆍ怨憎會苦ㆍ所欲不得苦, 如是略說五受陰苦.”
25)
본론 제57권 ‘4제의 체상’ 참조.
26)
유부에서는, 고지와 집지의 소연이 동일하기 때문에 욕계 견고소단과 견집소단의 번뇌를 끊을 때 첫 번째 변지(번뇌의 永斷)를 설정을 하는데(본론 제56권 ‘9변지의 설정’ 참조), 만약 고지와 도지의 경우도 소연이 동일하다면 견도소단의 번뇌를 끊을 때 첫 번째 변지를 설정해야 하며, 그럴 경우 9변지가 아니라 7변지가 되어야 한다는 힐난이다.
27)
여기서 ‘저들’이란 앞서 “만약 성도가 비상(非常)이기 때문에 싫어해야 하는 것이라면, 마땅히 성도에 대해 고(苦)의 행상도 지어야 한다”고 힐난한 이를 말한다.
28)
‘사(事)’에는 자성ㆍ소연ㆍ번뇌에 의해 계박되는 법ㆍ원인ㆍ어떤 법에 포섭되는 것의 다섯 가지 뜻이 있는데(본론 제17권 ‘無事法에서의 사의 의미’ 참조), 여기서는 능히 자기만의 상(相, 혹은 공능)을 갖는 ‘자성(실체)’의 뜻으로 생각된다. 즉 무루의 성도는 능히 끊는 것이고, 괴로움의 유루법은 끊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각기 실체가 다르다.
29)
『중아함경』 제54권 「아리타경」(대정장1,p.764하). ‘若汝等知, 我長夜說筏喩法者, 當以捨是法, 況非法耶?’ 그러나 이 경에서는 ‘뗏목처럼 버려야 한다’고만 설하였지 ‘끊어야 한다’고는 설하지 않았다.
30)
즉 앞서 인용한 경(前註 참조)에서 뗏목에 비유되는 법이란 계경(현존 『중아함경』에서는 正經) 등의 12분교를 말한다.(12분교에 대해서는 본론 제44권에서 상론하였다) 곧 뜻[義]과 말[文]에 대해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한 이에 대해 이 같은 비유를 설하였다.(『중아함경』 제54권, 대정장1,p.764상)
31)
순주분이란 자지의 정등지(淨等持)에 수순하는 선정인데(본론 제78권 ‘등지의 네 가지와 그 상생관계’ 참조), 전 찰나의 선정을 버리는 것을 ‘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뜻인가?
32)
주22) 참조.
33)
왜냐하면 열반은 괴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34)
즉 경에서는, 열반에 대해서는 비상(非常)-고(苦)-비아(非我)의 계열을 적용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비상 등의 계열은 유루에 근거하여 설한 것임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무루의 성도에 대해서는 적용시킬 수 있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에 대해서는 후술.
35)
다시 말해 성도 역시 즐거운 것이라고 한다면, 논(論)에서는 마땅히 즐거운 것을 괴로운 것이라고 계탁하는 견해를 견멸(見滅)ㆍ견도소단(見道所斷)이라고 했어야 한다는 뜻의 힐난이다.
36)
이는 무상삼마지에는 멸제를 반연하는 네 행상(滅ㆍ靜ㆍ妙ㆍ離)이 존재하는데, 어째서 무상무상 삼마지에서는 ‘정(靜)’의 행상만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논설이다.
37)
무상삼마지의 소연이 되는 택멸은 이계과(離繫果)이지만, 그러한 무상삼마지의 비택멸을 반연하는 무상무상 삼마지는 유루이기 때문에(후설) ‘리(離)’의 행상과 상응하지 않는 것이다.
38)
공삼마지를 공(空)으로, 무원삼마지를 비상(非常)으로, 무상삼마지의 비택멸을 정(靜)으로 관하는 이러한 세 등지는 결국 무루의 성도를 싫어하는 것이므로 유루이다. 만약 그것이 무루라면 무루법을 싫어하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39)
다시 말해 무상등지를 일어나지 않게 하는 원인인 비택멸에 대해 기뻐하는 것은 바로 무학의 무상등지를 싫어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시 성도를 싫어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40)
여기서 ‘앞의 해석’이란 앞서 무상(無相) 삼마지에 대해 논설하면서, “무상삼마지란 멸제(滅諦)를 반연하는 네 종류의 행상(滅ㆍ靜ㆍ妙ㆍ離)과 상응하는 등지를 말한다. 즉 열반(滅)은 온갖 상(相)을 떠난 것이기 때문에 ‘무상(無相)’이라 이름한 것으로, 바로 그러한 열반을 반연하는 삼마지에 대해서도 ‘무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 것을 말한다.
41)
북구로주를 제외한 세 주(洲). 북구로주에는 성도가 없기 때문이다.
42)
수명을 늘이고 줄이는 것[延促]을 유다수행(留多壽行) 사다수행(捨多壽行)이라고 하는데, 이는 오로지 등지의 자재를 획득한 부처님과 불시해탈의 아라한만이 일으킬 수 있다.(본론 권80 주46 참조) 유다수행의 일곱 가지 조건에 대해서는 본론 제9권 주59)를 참조할 것.
43)
즉 욕계와 미지정과 8근본정과 중간정이다.
44)
다시 말해 욕계에 포섭되는 삼마지는 법지 이후에 생겨나며, 상계에 포섭되는 삼마지는 유지 이후에 생겨나며, 공공ㆍ무원무원삼마지는 고지 이후에 일어나며, 무상무상 삼마지는 멸지 내지 도지 이후에 일어난다.
45)
여기서 ‘성도’는 3해탈문으로 일컬어지는 공 등의 세 가지 무루 삼마지, ‘유’는 공공 등의 세 가지 유루 삼마지이다.
46)
『대집법문경(大集法門經)』 상권(대정장1,p.229), “다시 부처가 설한 네 가지 삼마지의 상(想)이 있으니, 견법(見法)에 의해 낙행(樂行)을 획득함이 있어 일어나는 삼마지의 상과, 지견(知見)이 있어 일어나는 삼마지의 상과, 혜(慧)의 분별이 있어 일어나는 삼마지의 상과, 몸으로 누진(漏盡)을 획득함이 있어 일어나는 삼마지의 상이 바로 그것이다.”
47)
여기서 초정려만을 설하고 있는 경이란 뒤에 인용하는 “이와 같이 필추들이여, 여기에 머물면서 먼저 이생(離生)의 희락(喜樂)을 받고, 그 후 범중천(梵衆天)에 태어나 즐거움을 받으니--”라는 경을 말함인가? 참고로 『구사론』(제28권, 고려장27,p.665하; 대정장29,p.150상; 권오민 역,p.1317)에서는 이에 대해 “초정려를 언급하여 뒤의 정려를 나타내려는 것으로, 이치상 실로 그 밖의 다른 것까지 통한다”고 논설하고 있으며, 구역인 『구사석론』 제21권(대정장29,p.301,하,13~14행)에서의 본송 전반의 제1구와 제2구는 ‘有別修四定 淨初爲現樂’으로 되어 있고, 장행의 해석에서도 “초정(初定)의 선한 성질의 종류는 청정(淸淨, 淨의 구역어)과 무류(無流, 無漏의 구역어)로서, 이러한 삼마제(三摩提)는 반드시 현세의 안락주(安樂住)를 능히 획득한다. 초정이 이미 그러하였으니, 그 밖의 선정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논설하고 있다.
48)
후법(saṃparāya dharma)이란 현법(現法, dṛṣṭi dharma)에 반대되는 말로서, 미래세를 말한다.
49)
근본정려(즉 현법락주)는 사실상 근분정에 의해 획득되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현법의 즐거움에 대해서만 설하였다는 뜻이다.
50)
원문은 ‘或卽依現樂說爲得言, 如言石子體’이지만 『현종론』 제39권(고려장28,p.293중; 대정장29,p.972중)에 따라 ‘석자’를 신자(身子)로 고쳐 번역하였다. ‘신자’는 사리불(舍利佛, śāriputra)의 의역어. 신자의 몸은 신자 자체이지만, 신자에 근거하여 획득되었다고 하듯이, 경에서는 다만 현재 즐거움에 근거하여 그것(현법의 낙주)이 획득되었다고 말하였다는 뜻인가?
51)
여기서 ‘수승한 지견’이란 청정한 안식과 상응하는 혜(慧)를 말한다. 즉 『법온족론』 제8권(대정장26,p.490하; 한글대장경115,p.580)에서 4수(修)를 설하면서 “청정한 안식과 상응하는 혜를 설하여 ‘지(智)’라고 하고, ‘견(見)’이라고 하는데, 이를테면 천안(天眼)의 안식과 상응하는 뛰어난 혜로서 이러저러한 온갖 색을 영납ㆍ관찰하는 것을 일컬어 이것의 ‘수승한 지견’이라고 한다”고 말하고 있다.
52)
여기서 ‘분별의 혜’란 제법의 성상(性相)을 분별하는 유루ㆍ무루의 ‘혜’를 말한다.
53)
금강유정이란 유정지(有頂地) 제9품의 혹을 끊는 무간도를 말하는 것으로, 일체의 번뇌를 끊는 작용이 금강과 유사하기 때문에 ‘금강유정’이라 이름하였다.(본론 제65권 ‘아라한향과 금강유정’ 참조)
54)
금강유정은 미지ㆍ중간ㆍ4정려ㆍ아래 세 무색정에 근거하여 일어나지만, 부처님의 경우는 제4정려에서 획득하였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만 ‘제4정려를 수습하면--’이라고 설하였다는 뜻이다. 『구사론』(제28권, 고려장27,p.665하; 대정장29,p.150중; 권오민 역,p.1318)에서는 이 같은 사실을 다만 비바사사(毘婆沙師)가 전하는 설[傳說]이라고 하여 불신을 나타내고 있다.
55)
『법온족론』 제8권(대정장26,p.490하; 한글대장경115,p.580)에서는 이러한 ‘若習若修若多所作’이라는 말의 뜻은 천안통의 선정에 대해 자재를 획득하였음을 나타낸 것이라고 하였다.
56)
제1구와 제2구는 무량심(無量心)의 수(數)와 공덕에 대해(本譯의 ‘총설’), 제3구와 제4구는 자성, 제5구~제8구는 행상과 소연, 제9구과 제10구는 소의지, 제11구는 공능, 제12구는 4무량을 일으키는 처소와 소의신에 대해 밝힌 것이다.
57)
‘자(慈, maitrī)’는 일체의 유정에게 즐거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이며, ‘비(悲, karuṇā)’는 일체의 유정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며, ‘희(喜, muditā)’는 일체의 유정이 즐거움을 획득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이며, ‘사(捨)’는 일체의 유정을 평등하게 여겨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마음이다. 곧 이렇게 사유함으로써 ‘자’ 등의 각각의 등지(等至)에 들게 되는 것이다.
58)
본론 제57권 ‘특히 고제에 대하여’ 참조.
59)
『대비바사론』 제141권(대정장27,p.726하; 한글대장경123,p.363)에 의하면, ‘자(慈)’는 즐거움을 주려는[與樂] 작의와 상응하는 무진선근을, ‘비(悲)’는 괴로움을 없애주려는[除苦] 작의와 상응하는 무진선근을 자성으로 한다.
60)
이는 『구사론』(제29권, 고려장29,p.666상; 대정장29,p.150중; 권오민 역,p.1320) 상에서 경주 세친의 평석(‘理實應言悲是不害’)으로 언급되고 있다. 『바사』(상동)에서는 이설이다.
61)
이상 옛 논사의 설은, 희무량은 다른 이가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즐거움을 획득하는 것을 반연하여 기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본질을 희수라고 한 것으로, 이는 『구사론』(상동)과 『대비바사론』(제81권, 대정장27,p.420중; 제141권, 동,p.726하)의 정설이다. 즉 『바사』에서는 “희무량은 경하하고 위로하는 작의[慶慰作意]와 상응하는 희근을 본질로 한다”고 말하면서, 선의 심소 중의 ‘흔(欣)’을 본질로 한다는 이설을 전하고 있는데, 이하 중현은 이설을 취하여 희무량은 흔(欣) 혹은 무탐을 본질로 한다고 주장한다.
62)
『품류족론』 제7권(대정장26,p.718중하), ‘喜無量云何? 謂喜及喜相應受想行識, 若彼等起身語業, 若彼等起心不相應行, 是名喜無量.’
63)
본론(本論) 즉 『품류족론』에서 희무량은 ‘희’와 구유하는 수ㆍ상 등이라고 말하였는데, 만약 희무량이 바로 희수라면, 희수와 구유하는 ‘수’가 되어 이치에 맞지 않게 된다. 따라서 본론 상에서의 ‘희’ 즉 기쁨은 희수가 아니라 ‘흔(欣)’이라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64)
원문은 ‘若言對法以理爲量, 應如無過誦本論文.’ 아비달마(즉 對法)는 경(經)을 지식의 근거[量]로 삼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 이치를 지식의 근거로 삼는 것이므로 진리에 부합하는 과실이 없는 것만을 외워 전승해야 한다는 뜻이다.(次註 참조)
65)
다시 말해 아비달마는 비록 논리적 이치를 지식의 근거로 삼을지라도 경설과 어긋나지 않기에 경증(經證)과 어긋난다고 하여 마음대로 근본 아비달마의 글을 고쳐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즉 『바사』(대정장27,p.420중)에서, 희무량의 자성이 희수라고 주장하는 이는 상기 본론(즉 『품류족론』)의 글에 대해 “그 글에서는 마땅히 ‘[희무량이란] 희(喜)와, 희와 상응하는 상ㆍ행ㆍ식 등이다’고 설하여 ‘수(受)’를 설하지 않았어야 함에도 ‘수’를 말한 것은 그것을 외워 전승한 이[誦者]의 잘못이다”고 해명하고 있는 것이다.
66)
즉 사(捨)란, 숲에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등의 많은 나무가 있지만, 처음 들어갈 때는 그것들을 모두 나무로서 평등한 것으로 여기듯이, 애증(愛憎)을 떠나 일체의 유정을 평등하게 여기게 하는 심소를 말한다.
67)
원문은 ‘네 가지 무량(四無量)’이지만, 질문의 성질상, 또한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즉 진에)도 이익 되게 하는 것(즉 애탐)도 아닌 것은 사(捨)이기 때문에 ‘사(捨)무량’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68)
아세야(āśaya, 意樂로 한역됨)란 무언가를 추구하고자 하는 사념(思念, 즉 목적의식)으로서, 여기서는 유정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괴로움을 없애려고 원하는 것 등을 말한다.
69)
“이러한 4무량은 다른 이로 하여금 실제로는 즐거움 등을 능히 획득하게 할 수 없으니, 어찌 전도(顚倒)된 것이라 하지 않겠는가?”(『구사론』 제29권, 고려장27,p.666중; 대정장29,p.150하; 권오민 역,p.1322)
70)
원문은 ‘六何令等具如前說’이지만, 송(宋)ㆍ원(元)ㆍ명본(明本)과 『현종론』(제40권, 고려장28,p.295중; 대정장29,p.973하)에 따라 ‘六何’을 ‘云何’로 고쳐 번역하였다. 즉 『발지론』 제7「정온(定蘊)」(대정장26,p.1010하; 한글대장경176,p.416) 중에서도 ‘유정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 ‘유정의 괴로움을 제거해 주는 것’ ‘유정에 대해 경하[慶] 하는 것’ ‘유정을 평등[捨]하게 대하는 것’ 등의 네 행상을 사유함으로써 각각의 등지에 들게 된다고 하였는데, 네 등지에 어떻게 들게 된다는 말인가? 하는 뜻이다.
71)
자(慈) 등의 네 등지가 구생(俱生)하는 것이라면, “4무량의 행상을 각기 개별적으로 사유함으로써 자ㆍ비ㆍ희ㆍ사의 네 등지에 들게 된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72)
즉 처음으로 자무량을 닦는 자는 먼저 자신이 향수하는 즐거움을 사유하고서, 혹은 부처와 보살과 성문 그리고 독각 등이 향수하는 쾌락에 대해 설한 것을 듣고서 ‘일체의 모든 유정이 이와 같은 쾌락을 향수하기를 원한다’고 생각해야 하지만(『구사론』 제29권, 고려장27,p.666하; 대정장29,p.150하~151상; 권오민 역,p.1324), 번뇌가 증성하여 이와 같이 평등하게 마음을 운용할 수 없는 자라면 자기가 아는 범위 안에서의 즐거움을 반연하여 다른 유정들도 그와 같은 즐거움을 향수하기를 원한다고 사유해야 한다는 뜻이다. 초입자가 자무량 등을 닦는 과정에 대해서는 후술하는 ‘4무량의 가행과 성만’에서 상론함.
73)
본론 제75권 ‘대비’ 참조.
74)
『잡아함경』 제21권 제567경(대정장2,149하);『중아함경』 제21권 「설처경(說處經)」(대정장1,p.563중), “비구는 마음이 자(慈)무량과 함께 할 때 1방(方)에 두루 차 성취하여 노닐고(사유하고), 2방ㆍ3방ㆍ4방의 4유(維)ㆍ상하ㆍ일체에 두루 하니, 마음이 자무량과 함께 하기 때문에 무결(無結)ㆍ무원(無怨)ㆍ무에(無恚)ㆍ무쟁(無諍)하여 지극히 광대한 무량의 선을 닦아 일체세간에 두루 차 성취하여 노닐게 된다.--비ㆍ희ㆍ사무량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75)
이는 주61)에서 인용한 제(諸) 고사(古師)의 설이었다.
76)
그러나 『대비바사론』 제81권(대정장27,p.421상)에는 욕계ㆍ4정려ㆍ미지정ㆍ정려중간의 7지(地)로 되어 있다.
77)
이러한 4무량정은 욕계 9품의 혹을 끊어버린 이욕자(離欲者)가 일으키는 선정으로, 용예 즉 여유가 있을 때 일으키는 공덕이기 때문에 미지정에서는 일으키는 않는다는 것이다.
78)
여기서 “이러한 4무량은”이라는 말은 『구사론』 제29권(고려장27,p.666중; 대정장29,p.150하; 권오민 역,p.1323)에 따라 더한 것으로, 『구사론』에서는 이하 계속하여 “이같이 주장한 의도는 정지(定地, 즉 색계)와 부정지(不定地, 욕계)의 근본정과 가행(즉 근분정)을 모두 무량에 포섭시키고자 하였다”고 설하고 있다. 그러나 『대비바사론』(대정장27,p.421상)에서는 “자ㆍ비ㆍ사의 세 무량은 상응하는 바에 따라 10지 모두와 통한다”고 하였다.
79)
즉 초정려와 제2정려에는 뛰어난 희수가, 제3정려에는 뛰어난 낙수가 존재하므로 기쁨[歡]의 행상이 일어난 것인데, 여기에 근심[憂]의 행상으로 일어나는 비(悲)무량이 존재한다면, 한 찰나의 마음에 기쁨과 근심이 공존하는 것이 되어 정리(正理)에 어긋나게 된다.(『대비바사론』, 앞의 책)
80)
만약 비무량이 근심의 행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초정려와 제2정려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무루의 염(厭, 싫어함)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무루의 ‘염’은 진실의 작의와 상응하는 것으로, ‘희(기쁨)’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니, 보물을 구하기 위해 땅을 파는 것과 같다.(『대비바사론』, 앞의 책)
81)
승해작의는 예컨대 부정관(不淨觀)처럼 가상관(假想觀)과 상응하여 일어나는 작의이다. 따라서 이는 자상작의나 공상작의처럼 진실의 작의가 아니다.
82)
여기서 ‘의심’이라 함은 “어떻게 하여야 모든 유정류로 하여금 응당 이와 같은 괴로움을 떠나게 할 것인가?” 하는 비무량의 행상을 말한다.
83)
본항(本項) ‘총론’ 참조.
84)
번뇌는 오로지 제법의 공상(共相)을 소연으로 하는 진실의 작의에 의해서만 끊어진다. 즉 4무량의 승해작의는 일체의 유정을 소연으로 하여 일시 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같은 가상관(觀)으로써는 번뇌를 끊을 수 없는 것이다.
85)
이는 『구사론』(제29권, 고려장27,p.666하; 대정장29,p.150하; 권오민 역,p.1324)상에서 언급된 4무량이 능히 번뇌를 끊을 수 없는 첫 번째 이유이다.(“이것은 유루의 근본정려에 포섭되기 때문이며, 승해작의와 상응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며, 일체의 유정을 두루 소연의 경계로 삼기 때문이다.”)
86)
앞(‘4무량의 소의지’)서 자(慈)ㆍ비(悲)ㆍ사(捨)의 세 무량은 4근본정려와 미지ㆍ중간정에 의해 일어난다고 하였는데, 미지정과 중간정은 4근본정려에 포섭되지 않을 뿐더러 만약 유루의 4근본정려에 포섭되기 때문에 번뇌를 끊을 수 없는 것이라면 미지정과 중간정에 근거하여 일어나는 무량은 번뇌를 끊을 수 있다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87)
단(斷)에는 잠시단(暫時斷, 잠시 동안 끊는 것)과 필경단(畢竟斷, 완전하게 끊는 것)의 두 가지가 있어, 경에서는 잠시단에 근거하여 “진 등을 끊는다”고 설하였다는 뜻이다. 『대비바사론』(제83권, 대정장27,p.427중)에는 이 밖에도 유편단(有片斷)과 무편단(無片斷), 유영단(有影斷)과 무영단(無影斷), 유수전단(有隨轉斷)과 무수전단(無隨轉斷), 유분단(有分斷)과 무분단(無分斷), 제복단(制伏斷)과 발근단(拔根斷), 복제전단(伏諸纏斷)과 해수면단(害隨眠斷)의 두 가지 ‘단’을 언급하여 동일하게 적용시키고 있다.
88)
『구사론』(앞의 책)에서는 이에 대해 좀더 자세하게 논설하고 있다. “이것의 가행위(욕계와 미지정)에서는 진(瞋) 등을 억제하거나 숨기며, 혹은 이것(4무량)은 이미 끊어진 번뇌를 더욱 멀어지게 하기 때문에 앞에서 이러한 4무량은 능히 네 가지 장애를 대치한다고 설한 것이다. 이를테면 욕계와 미지정에서도 역시 수소성(修所成)의 근본 무량과 유사한 자(慈) 등이 존재하니, 이것에 의해 ‘진’ 등의 장애를 억제하거나 숨기며, 그런 다음 번뇌를 끊는 도[斷道, 즉 무간도]를 인기하여 능히 온갖 번뇌를 끊으며, 온갖 번뇌를 끊고 나서 이염위(離染位) 중에서 비로소 근본 4무량을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의 상태에서는 비록 [번뇌를 일으킬 만한] 강력한 인연을 만나게 될지라도 ‘진’ 등에 의해 은폐되거나 굴복되지 않는다.”
89)
즉 희무량은 초정려와 제2정려에서만 일어나며, 그 밖의 자ㆍ비ㆍ사무량은 4정려와 미지정과 중간정의 6지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90)
다시 말해 사정(捨定)으로부터 일어난 버리려는[棄捨] 행상의 등류과는 무소유처에 수순하며, 무소유처로부터 일어난 욕(欲)의 등류과 역시 사정에 수순한다.
91)
이하 번뇌가 증성하여 “일체의 모든 유정이 자신이 향수하는 즐거움이나, 일찍이 들었던 부처와 보살과 성문 그리고 독각 등이 향수하는 쾌락을 향수하기를 원한다”고 평등하게 사유할 수 없는 이의 가행과 성만에 대해 논설한다. 참고로 『구사론』 제29권(고려장27,p.666하; 대정장29,p.151상; 권오민 역,p.1324)에서는 일곱 가지 품류(친우와 원수에 각기 상ㆍ중ㆍ하의 세 품류와 처중 한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92)
『구사론』 제29권(고려장27,p.666하~667상; 대정장29,p.151상; 권오민 역,p.1325)에서는 이하 계속하여 “이 같은 승해를 닦아 더 이상 물러남이 없게 되면, 다음으로 소연을 점차 넓혀나가면서 닦게 된다. 즉 그 같은 생각[想]을 점차 한 동네, 한 나라, 한 방위, 일체의 세계로 옮겨 즐거움을 주려는 행상을 사유하여 두루 하지 않음이 없게 될 때”라는 논설을 더하고 있다.
93)
예컨대 단선근자의 용모가 단정하고 독각의 용모가 추한 것은 과거 복업과 죄업의 과보로서, 단선근자에게도 좋은 점이 있을 수 있고, 성자에게도 과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자무량을 닦고자 하는 이는 한결같이 좋은 점만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제80권
1)
제1구는 8해탈의 총론이며, 제2구~제8구는 자성과 소의지, 제9구~제12구는 소연의 경계에 대해 분별한 것이다.
2)
내유색상관외색해탈(內有色想觀外色解脫). 내적으로 색신을 탐하는 색상(色想)이 있어 이러한 탐심을 없애기 위하여 부정(不淨)한 푸르죽죽한 어혈 등의 외적인 색을 관찰하여 그것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3)
내무색상관외색해탈(內無色想觀外色解脫). 내적으로 색신을 탐하는 색상은 없지만, 이를 보다 견고하게 하기 위해 부정한 외적인 색을 관찰하여 그것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4)
정해탈신작증구족주(淨解脫身作證具足住). 청정한 색을 관찰하여 탐심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을 ‘정해탈’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해탈이 관행자의 몸에 증득되어[身作證] 구족ㆍ원만하게 되는 것이다.
5)
공무변처ㆍ식무변처ㆍ무소유처ㆍ비상비비상처의 무색정은 각기 하지의 탐에서 해탈한 것으로, 이는 제4에서 제7의 해탈이다.
6)
온전한 명칭은 멸수상정해탈신작증구족주(滅受想定解脫身作證具足住). 이는 멸진정을 말하는 것으로, 생사의 원인이 되는 수ㆍ상 등의 마음을 싫어하여 무심의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기 때문에 해탈이라고 한 것이다. 8해탈에서 ‘해탈’이란 버리거나 등진다[棄背]는 뜻으로, 앞의 두 해탈은 색탐의 마음을, 세 번째 해탈은 부정관의 마음을, 4무색처해탈은 각각 하지의 마음을, 멸수상해탈은 일체의 유소연의 마음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해탈’이다.(『대비바사론』 제84권, 대정장27,p.434하; 한글대장경121,p.202)
7)
즉 탐의 취집(聚集) 중에서 생각[想]이 증대한 것을 ‘상’이라 하고, 무탐의 취집 중에서 관찰이 증대한 것을 ‘관’이라고 하기 때문에 ‘상관’이라고 말한 것이다.(『구사론기』 제29권, 대정장41,p.435하)
8)
‘푸르죽죽한 어혈[靑瘀]’이란 피고름이 엉켜 푸르죽죽하게 변한 시체의 모양으로, 청어상(靑瘀想)ㆍ이적상(異赤想) 등의 부정관에 대해서는 본론 제59권 주32)를 참조할 것.
9)
초정려와 제2정려에서는 욕계 안식과 초정려의 안식에 의해 일어난 현색탐(청ㆍ황ㆍ적ㆍ백 등의 색상에 대한 탐)을 능히 대치하기 때문이다.(후술)
10)
세 번째 해탈은 오로지 청정한 색[淨色]을 관찰하여 탐이 일어나지 않게 된 것으로, 이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수승한 선정에 의지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심(尋)ㆍ사(伺)ㆍ희수(喜受)ㆍ낙수(樂受)ㆍ우수(優秀)ㆍ고수(苦受)ㆍ출식(出息)ㆍ입식(入息)의 8재환(본론 제78권 ‘동정려와 부동정려’ 참조)을 떠나 마음이 징정(澄淨)하게 된 제4정려에 의해서만 청정한 색을 관찰할 수 있다.
11)
여기서 ‘그 밖의 다른 때’란 명종(命終)할 때가 아닌 때로서, 이숙생의 심ㆍ심소를 말한다.
12)
이는 『구사론』 제29권(고려장27,p.667중; 대정장29,p.151중;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 p.1329) 상의 소설(所說)이다. 즉 무색정 근분지 중의 해탈도만이 ‘해탈’이며, 무간도는 하지를 반연하는 것이어서 ‘해탈’이 아니기 때문에 각각의 근분정을 제4 내지 제7의 해탈로 설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본론에서는 제9 해탈도만이 ‘해탈’이라고 하였다.
13)
이러한 상좌설은 여기서는 간략하게 설해지고 있지만, 본론 제13권(주15의 본문)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인용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멸진정이란 다만 마음이 전생(轉生)하지 않는 상태를 일시 설정한 것이다.
14)
본론 제13권 ‘경주의 멸정무체설(滅定無體說)과 색심호훈설 비판’ 참조.
15)
원문은 ‘如何計度有一類心, 無有所緣, 離行相轉.’ “계경에서는 일찍이 [소연과 소의를 갖지 않는] 제7의 식이 존재한다고 말한 적도 없었거니와, 식이 수ㆍ상을 떠나 생겨난다고 주장한 일도 없었다. 또한 이러한 [멸진]정 중에서는 소의(所依, 즉 마음)가 멸하였기 때문에 능의(能依, 즉 심소) 역시 멸한 것으로, 온갖 심소법은 소의 없이 능히 홀로 생겨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멸진]정 중에서는 온갖 심ㆍ심소법이 모두 다 멸하게 된다.”(본론 제13권 ‘譬喩論者의 滅定有心說 비판’ 참조)
16)
『대비바사론』(제152~153권, 대정장27,p177중하)에서는 멸진정과 상심(想心)ㆍ미세심(微細心)ㆍ미미심(微微心)의 관계에 대해 논설하면서 다양한 이설을 등장시키는데, 입정 전의 상심과 미세심을 인연으로 삼고, 미미심을 등무간연으로 삼는 법은 멸진정에서 나오는 마음으로, 이때의 세 마음은 각기 비상비비상처의 상ㆍ중ㆍ하품의 차별이다. 참고로 어떤 이는 앞의 두 가지 무색정의 마음을 상심, 무소유처의 마음을 미세심, 비상비비상처의 마음을 미미심이라 하였으며, 어떤 이는 세 무색정의 마음을 상심, 비상비비상처의 마음을 미세심, 멸진정의 등무간연(전 찰나 마음)을 미미심이라 하였다.
17)
멸진정에 들어가는 마음[入心] 즉 미미심(微微心)은 ‘멸진정의 적정’을 반연하여 비로소 능히 들어가기 때문에 유루이지만, 그것에서 나오는 마음[出心]은 반드시 멸진정을 반연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유루와 무루 모두와 통하는 것이다.
18)
본송 중에서 ‘욕계에서 볼 수 있는 것[可見]’이란 바로 욕계 색처를 말한다. 이에 따라 『구사론』(제29권, 고려장27,p.667중하; 대정장29,p.151중; 권오민 역, p.1330)에서는 “두 가지(제1ㆍ제2해탈)의 경계는 미워할 만한 것[可憎]이고, 한 가지(제3해탈)의 경계는 애호할 만한 것[可愛]이다”로 논설하고 있다.
19)
즉 온갖 괴로운 것을 즐거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4전도 중의 하나인 낙도(樂倒)이다.(본론 제47권 ‘4전도’ 참조)
20)
다시 말해 “이미 온갖 색 중에는 부정한 요소도 역시 존재한다고 하였으니, 제3해탈에서 온갖 색을 총체적으로 관찰하여 청정한 것이라고 하는 경우, 어찌 전도된 관찰에 포섭된다고 하지 않겠는가?”라고 힐난할 수 있다는 뜻이다.
21)
다시 말해 전도되지 않은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선성은 아니며, 마찬가지로 전도된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불선성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뜻이다.
22)
굳이 가상관(승해작의)에 의하지 않더라도 청정한 것과 부정한 것이 섞여 있는 현실의 소연에 대해서도 부정한 것[不淨相]이라고 여실히 사유할 수 있다는 뜻인가?
23)
승해(adhimukti)는 adhi(above, upwards, highly)+√muc(to releases)의 복합어로, 경계대상에 대한 인가 결정의 심리작용(본론 제10권 ‘대지법’ 참조), 해탈(vimokṣa)은 vi(asunder, apart)+√muc의 복합어로, 속박된 마음에서 벗어나는 것[棄背, 본권 ‘해탈 등의 세 공덕의 획득과 소의신’ 참조]. 곧 두 말은 동일한 어근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따라 대덕(大德)은 “승해의 힘에 의해 해탈을 획득하기 때문에 ‘해탈’이라 이름하였다(由勝解力而得解脫故名解脫)”고 하였다.(『대비바사론』 제84권, 대정장27,p.434하)
24)
하지의 고ㆍ집제를 소연으로 삼지 않는 것은, 하지는 저열하기 때문이며, 하지를 이미 등졌기 때문이지만, 유지품의 도와 그것의 비택멸, 그리고 허공은 소의지에 따른 승열(勝劣)이 없기 때문에 일체 지의 그것을 모두 소연으로 삼는 것이다.
25)
원문은 ‘或非.’ 『대비바사론』 제84권(대정장27,p.435상)에는 “그 밖의 다른 행상(유루6행상)을 짓는 경우도 있으며, 상수멸해탈(想受滅解脫, 즉 제8 해탈)은 행상을 짓지 않는다.(或餘行相. 想受滅解脫不作行相)”로 되어 있다. 본론에서의 ‘非’는 무루행상을 짓지 않는 것도 있다는 뜻인가?
26)
참고로 멸수상정해탈은 자성(自性)ㆍ상잡(相雜) 념주에 근거하는 경우라면 염주와 함께 하지 않지만, 소연념주에 근거하는 경우라면 법념주와 함께 한다.(『대비바사론』, 같은 책,p.435중) 자성 등 세 염주에 대해서는 본론 제60권 ‘4념주의 본질’ 참조.
27)
그러나 『대비바사론』(앞의 책)에 의하면, 처음 세 무색정 해탈은 여섯 지(智) 즉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지(道智)와 유지(類智)와 세속지와 상응한다. 아마도 본론의 팔지(八智)는 육지(六智)의 오사(誤寫)일 것이다.
28)
다시 말해 “처음 세 가지 해탈로서 과거의 것은 과거[의 법]을 반연하고, 현재의 것은 현재[의 법]을 반연하며, 미래의 것은 미래[의 법]을 반연한다.”(『대비바사론』, 앞의 책)
29)
즉 성자와 내법(內法)의 이생은 일찍이 획득하였던 것과 획득한 적이 없었던 것 모두를 획득한다. 이에 반해 외법(外法)의 이생은 오로지 일찍이 획득하였던 법만을 획득할 수 있을 뿐이다.
30)
경설의 원문은 ‘有色觀諸色’으로, 이하 첫 번째 해탈(內有色想觀外色解脫)에 대해 논설한다.
31)
서른여섯 가지의 부정물(不淨物)이란, 머리카락ㆍ터럭ㆍ손톱이나 발톱[爪]ㆍ이[齒]ㆍ눈곱[塵]ㆍ때[垢]ㆍ피부ㆍ살ㆍ뼈ㆍ골수ㆍ힘줄[筋]ㆍ혈맥ㆍ간ㆍ폐ㆍ지라(비장)ㆍ콩팥(신장)ㆍ대장ㆍ소장ㆍ위장ㆍ쓸개ㆍ생장(生藏)ㆍ숙장(熟藏)ㆍ가래[痰]ㆍ열(熱)ㆍ심장ㆍ밥통[肚]ㆍ똥ㆍ오줌ㆍ눈물ㆍ침ㆍ땀ㆍ고름ㆍ피ㆍ기름덩이ㆍ뇌(腦)ㆍ막(膜). 『대비바사론』 제40권(대정장27,p.208상); 본론 제59권 주30) 참조.
32)
이하 두 번째 해탈(內無色想觀外色解脫)에 대해 논설한다.
33)
이 같은 이유에서 ‘[8해탈의] 자성과 소의지’에서 “처음 두 가지 해탈은 각기 모두 초정려와 제2정려에 의지하여 일어난다”고 하였다.
34)
이하 세 번째 해탈(淨解脫身作證具足住)에 대해 논설한다. 『구사론』(제29권, 고려장27,p.667하; 대정장29,p.151중; 권오민 역,p.1330)에 의하면, 제3정려 중에는 색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지의 미묘한 낙(즉 受樂)에 의해 동란(動亂)되기 때문에 해탈이 존재하지 않는다.
35)
즉 제3정려와 제4정려에서도 탐을 능히 대치할 수 있지만, 제3정려의 경우 수락(受樂)에 미란되기 때문에, 제4정려의 경우 더 이상 부정상(不淨想)이 두드러지지 않기 때문에 해탈의 ‘자성과 소의지’에 대해 논설하면서 “[처음 두 가지 해탈과 유사한 선근이] 존재할지라도 그러한 해탈의 명칭으로는 설정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36)
여기서 ‘저 유가사’라고 함은 첫 번째와 두 번째 해탈을 닦은 관행자(觀行者)이다.
37)
제2해탈은 초ㆍ제2정려에 의지하여 일어나지만, 제3해탈은 제4정려의 근분과 근본정에 의지하여 일어나며, 제2해탈은 부정의 행상으로 색탐(색계 현색탐)을 대치하지만, 제3해탈은 청정의 행상으로 욕ㆍ색탐을 대치한다.(전술)
38)
원문은 ‘內外道, 身共不共故.’ 후설하는 바에 따르면, 제3 정해탈(淨解脫)과 제8 멸진정해탈에 대해 ‘몸으로 작증하는 것[身證]’이라고 말한 소이는 오로지 내도(內道) 즉 불법(佛法)에 의해서만 획득되며, 일찍이 획득한 적이 없었던 것이며, 많은 노력에 의해 획득되기 때문이다.(‘8해탈의 소의신과 닦는 이유’ 참조)
39)
다시 말해 “단지 색상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이와는 별도로 그 밖의 다른 상(想)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40)
『중아함경』 제24권 「대인경(大因經)」(대정장1,p.582상), “--다시 정해탈(淨解脫)을 몸으로 작증하고서 성취하여 노니나니, 이를 제3해탈이라고 한다.--다시 일체의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의 상(想)을 건너 멸해탈(滅解脫)을 알아 몸으로 작증하고서 성취하여 노닐며, 아울러 모든 번뇌가 다하였음을 혜관하여 아니, 이를 제8해탈이라고 한다.”
41)
여기서 ‘변제(prāntakoṭika, 無越極)’란 가장 수승한 것이라는 정도의 의미이다. 8근본정 중에서는 색계 제4정려가 가장 수승하기 때문에 변제정이라 한다.(본론 제76권 ‘무쟁 등의 공덕과 변제정’ 참조) 여기서는 색계에서 가장 수승한 제4정려와 무색계에서 가장 수승한 비상비비상처를 말한다.
42)
“8해탈 중에서 이 두 가지가 뛰어난 것이기 때문이며, 두 세계 중에서 각기 가장자리[邊]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구사론』 제29권, 고려장27,p.667하; 대정장29,p.151하; 권오민 역,p.1331) 참고로 『대비바사론』(제152권, 대정장27,p.776상중; 한글대장경124,p.49)의 정설은 “8해탈 중 이 두 가지의 명의(名義)가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다.”
43)
이 두 설은 『바사』(앞의 책)의 7설 중에 포함되지 않은 설이다.
44)
원문은 ‘盡大種造色心心所法故.’ 『대비바사론』(앞의 책,p.776중)에는 “정해탈은 대종소조의 색취(色聚)의 변제(邊際)로서 설정된 것이고, 상수멸해탈은 심ㆍ심소의 법취(法聚)의 변제로 설정된 것이기 때문이다”로 되어 있다.
45)
원문은 ‘爲令煩惱轉更遠故.’ 참고로 『구사론』 제29권(고려장27,p.667하; 대정장29,p.151하; 권오민 역,p.1331)에는 “온갖 번뇌가 끊어지고 나서 더욱 멀어지게 하기 위해서이며(爲諸惑已斷更遠)”로 되어 있다.
46)
부처님과 불시해탈의 아라한은 자신의 수명을 늘일 수도 있고 줄일 수도 있는데, 이를 유다수행ㆍ사다수행이라 한다. 예컨대 세존은 100세 혹은 120세의 수명을 80세로 단축하였으며, 열반 직전 3개월 간 목숨을 연장하였다.(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9권 ‘유다수행의 문제’를 참조할 것)
47)
승처란, 8해탈을 닦아 관찰하는 마음이 성숙하여 이제 바야흐로 정(淨)ㆍ부정(不淨)을 자재하게 관찰하는 것이다. 이것은 수승한 앎[勝知]과 수승한 견해[勝見]를 일으키는 근거[依處]가 되기 때문에 ‘승처’라고 하였다.(후술)
48)
내유색상관외색소(內有色想觀外色少). 내적으로 색신을 탐하는 상(想)이 있어 이를 대치하기 위해 외적인 색의 일부를 관찰하여 죽은 시체의 푸르죽죽한 어혈 등으로 사유하는 것을 말한다. 본론 상에서 첫 번째 승처를 해명하는 각각 술어개념에 대해서는 뒤에 상설(詳說)한다.
49)
내유색상관외색다(內有色想觀外色多). 전주(前註)에 준하여 알 것.
50)
내무색상관외색소(內無色想觀外色少). 내적으로 색신을 탐하는 상은 없지만, 이를 보다 견고하게 하기 위해 외적인 색의 일부를 관찰하여 죽은 시체의 푸르죽죽한 어혈 등으로 사유하는 것을 말한다.
51)
내무색상관외색다(內無色想觀外色多). 전주(前註)에 준하여 알 것.
52)
이상 제5승처~제8승처로서, 내무색상관외청ㆍ황ㆍ적ㆍ백색(內無色想觀外靑ㆍ黃ㆍ赤ㆍ白色). 내적으로 색신을 탐하는 상이 없지만, 마음을 다잡기 위해, 혹은 번뇌를 경계하기 위해 외부의 청ㆍ황ㆍ적ㆍ백색을 관찰하여 청정상으로 사유하는 것을 말한다.
53)
이러한 승처는 8해탈을 닦은 마음으로 관찰 사유하는 것이니 승지(勝知)이다. 차주(次註) 참조.
54)
즉 제1ㆍ제2 승처는 첫 번째 해탈, 제3ㆍ제4 승처는 두 번째 해탈의 결과로서 각각의 본질과 소의지, 소연은 대응하는 해탈의 그것과 같다. 나머지 네 승처는 제3 정해탈의 결과이다.(후술)
55)
말하자면 파란 꽃의 행상(이미지)을 ‘파랗게 나타난 것[靑現]’이라 하였고, 염색한 파란 옷의 행상을 ‘파란 빛[靑光]’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우리 역시 염색한 옷에 대해서만 ‘파란빛이 감돈다’고 말한다.
56)
주18)의 본문 참조.
57)
10변처 역시 부정관(不淨觀)과 마찬가지로 실제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승해작의에 의한 가상(假想)의 관찰이다.
58)
제3의 정해탈과 뒤의 네 승처와 앞의 여덟 변처는 다 같이 온갖 색을 청정상으로 취하는 동일한 선정으로, 전자는 후자의 가행의 방편이 된다.(次項 참조)
59)
유부 법상관에 의하는 한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의 대종은 견(堅)ㆍ습(濕)ㆍ난(煖)ㆍ동(動)을 자상으로 하는 것으로, 촉처(觸處)에 포섭된다.
60)
본론 제2권 ‘가(假)의 4대와 실(實)의 4대’ 참조. 지계(地界)가 견고성[堅]과 사물의 유지[持]를 본질과 작용으로 하는 대종이라면, 현실의 땅[地]은 색ㆍ향ㆍ미ㆍ촉의 4처가 화합하여 이루어진 현색과 형색의 색처를 의미한다.
61)
본론 제2권 ‘가(假)의 4대와 실(實)의 4대’ 참조. 풍계는 운동성[動]과 사물의 동요[長]를 본질과 작용으로 하지만, 현실의 바람 역시 그러하기 때문에 양자 사이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다.
62)
본론 제12권 ‘멸진정’ 참조. 즉 멸진정은 부처님의 경우 이염득이지만, 그 밖의 성자는 가행득이며, 욕ㆍ색계신에 의지하여 일어나며, 성자만이 일으킬 뿐 이생은 일으킬 수 없다.
63)
일찍이 수습하여 그것을 일으켰던 자는 이염에 의해 획득하지만, 일찍이 수습하지 않아 일으킨 적이 없었던 자는 가행에 의해 획득한다.
64)
공계(空界)가 색인 까닭에 대해서는 본론 제3권 ‘6계 중의 공계와 식계에 대하여’를 참조할 것.
65)
주34)의 본문 참조.
66)
즉 ‘능히 소연을 버리는 것’이라는 등의 세 관점에서 볼 때 해탈은 하품이고, 승처는 중품이며, 변처는 상품이라는 뜻이다.
67)
앞에서 무색정의 해탈과 변처를 제외한 그 밖의 선정은 오로지 성교가 존재하는 욕계 인취의 세 주(洲)에서만 일어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성교가 존재하지 않는 색ㆍ무색계에서는 어떻게 그 같은 선정을 일으킬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대비바사론』 제153권, 대정장27,p.779상중; 한글대장경124,p.64-5 참조)
68)
예컨대 어떤 사람이 무색정(혹은 색계 정려)을 일으켰다가 물러나 바로 색계(혹은 무색계)에 태어나거나 혹은 자주 닦다가 물러나 색계에 태어나는 경우, 무색정의 동류인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색계에서 그는 능히 무색정을 일으킬 수 있는데, 전자를 ‘가까이서 닦았던 것[近修]에 의한 것’이라 하고, 후자를 ‘자주 닦았던 것[數修]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참고로 『바사』(앞의 책)에서는 “다른 생 중에서 일찍이 [혹은] 가까이서 이러한 무색정을 일으키고 멸하였기 때문이다(餘生中曾近起滅此無色故)”고 하였다.
69)
본론 제32권 ‘괴겁(壞劫)’ 참조.
70)
제4정려는 8재환을 떠난 부동(不動)이기 때문에(본론 제78권 ‘動정려와 不動정려’ 참조), 그것의 하늘(즉 生정려)에도 화ㆍ수ㆍ풍의 삼재가 없다.(본론 제32권 ‘大三災’ 참조)
71)
계경ㆍ조복ㆍ대법은 경(sūtra)ㆍ율(vinaya)ㆍ논(abhidharma) 3장(藏)을 말한다. 여기서는 ‘논’ 즉 아비달마를 『구사론』에 따라 다만 ‘대법’이라고 언급하였지만, 『현종론』 제40권(고려장28,p.300중; 대정장29,p.977상)에서는 승법(勝法) 즉 ‘뛰어난 승의의 법’으로 교정하고 있다. 참고로 『분별공덕론』 제1(대정장25,p.32상)에서는 아비달마를 ‘대법(大法)’ 혹은 ‘무비법(無比法)’으로 번역하고 있다.
72)
여기서 동방(東方)은 상좌 슈리라타의 본거지로서, 정통 유부의 근거지인 서북인도 카슈미르 지방(북방)에서 본 동방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본론 제25권 주49)를 참조할 것.
73)
참고로 중현은 『현종론』 제40권(고려장27,p.300하; 대정장29,p.977중)에서 ‘설하는 자’와 ‘행하는 자’를 ‘지니는 자’에 포섭시켜, 교법은 ‘설하는 자’와 ‘행하는 자’에 의해, 증법은 ‘행하는 자’에 의해 세간에 머문다고 교정하고 있다.
74)
그래서 본론을 대법(對法) 즉 ‘아비달마’라고 하지 않고 대법장(對法藏) 즉 아비달마코샤(abhidharmakośa)라고 한 것이다.(본론 제1권 ‘대법장의 의미’ 참조) 여기서 ‘아비달마’라고 함은 『집이문족론』 등의 6족론과 『발지론』을 말한다.(본론 제1권 주14 참조)
75)
이는 물론 『구사론』(고려장27,p.668하; 대정장29,p.152중; 권오민 역,p.1339)의 본송을 그대로 전재(轉載)한 것이다. 여기서 “대부분 가습미라(迦濕彌羅)에서 성립된 『대비바사론』에 근거하여 해석하였다”는 말은, 경주 세친이 『구사론』에서 아비달마 본론(本論)의 요의(要義)를 포섭하면서 전적으로 가습미라 비바사사의 설에 의존하였던 것은 아니며, 경부의 설로써 폄훼한 부분도 있음을 고백한 것이다. 그래서 중현은 『현종론』 제40권(고려장28,p.300하; 대정장29,p.977중)에서 제2구 제3구를 “나는 오로지 그것(가습미라에서의 논의)에 근거하여 대법(對法)을 해석하였지만, 혹 어긋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의 과실이다(我唯依彼釋對法 或有差違是我失)”로 교정하고 있다.
76)
가습미라(Kāśmīra, 혹은 罽賓, 오늘날 카슈미르)는 북인도 간다라(犍馱羅) 동북쪽의 히말라야 산록에 위치한 나라로서, 바로 여기서 5백 명의 아라한이 모여 『아비달마대비바사론』을 결집하였다. 그리고 비바사사(Vaibhāṣika)란 비바사론(Vibhāṣā śāstra)을 존중하는 이를 말하는데, 경(經)이나 율(律)을 존중하는 이와 대비된다. 여기서 ‘나’는 구사론주인 경주 세친(世親)을 가리킨다.
77)
여기서 ‘다른 방도’란 경부(經部)의 종의에 근거하여 해석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경부의 ‘형색의 가유론’은 본론 제34권에서, ‘상색(像色, 거울에 맺힌 영상) 무체설’은 본론 제23권에서, ‘과거ㆍ미래 가유설’은 본론 제50~52권에 걸쳐 상론하였다.
78)
『현종론』(고려장28,p.301상; 대정장29,p.977중)에서는 “각혜가 지극히 미열하고 또한 게을러 [대법의 이치를] 참답게 설하는 자를 두루 구하기도 하였다”로 교정하였다.
79)
즉 경주 세친이 『구사론』에서 이같이 말한 것은 의도적으로 경부의 종의에 따름으로써 대법의 종의(즉 『대비바사론』)를 폄훼하였기 때문이지만, 본론 상에서는 저자 자신의 각혜가 저열하기 때문이라는 겸사(謙辭)로서 이같이 말하였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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