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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캘러의 기도” 요약
기도는 내면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목적에 따르는 걸 지향한다는 말이다.
‘교제 중심’과 ‘하나님 나라 중심’
기도는 범사에 하나님의 때와 지혜를 구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지만 시편 기자는 그 가운데서도 이 땅에 정의를 실현해 주시기를 주님께 강력하게 요구한다. 하나님 나라 중심 기도라는 씨름 시합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예배 의식에 쓰이는 시편 찬송은 교제를 청하는 기도와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간구를 모두 채택하고 있다. 성경은 이처럼 양쪽(교제 중심과 하나님 나라 중심) 기도를 신학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기도란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인 동시에 만남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Part 1
바른 기도를 꿈꾸다
잘 살고 못 사는 건 사랑의 우선순위를 다시 설정하는 데 달렸다.
기도야말로 존재와 행위 전체를 아우르는 열쇠다.
01. 기도 말고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인생 후반부에 기도를 체험하다
어느 날 일기의 끄트머리에 오코너는 짤막한 외침을 적었다. “아무라도 좋으니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줄 수는 없나요?”7 똑같은 질문을 던지는 이들이 지금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기도가 필요하다는 걸 누가 모르 겠는가? 당연히 기도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할 것인가?
길을 제대로 찾으려면 내 영성 신학의 뿌리를 살펴야 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증해 준다. 감히 범접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높으신 하나님을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로 믿고 다가가 부르짖게 한다.
복음의 능력을 맛보는 경험은 기도를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크리스천은 주님과 실감나는 사랑의 관계를 맺으며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어 개인적으로 하나
을 알고 경험할 수 있다는 전제이다. 물론 이건 기도에 관한 이야기다.
2. 기도만큼 위대한 것은 없다
하나님 앞에선 어떤 문제도 하찮은 것이 된다
성경에서 마음은 인간의 자아 전체를 움직이는 중앙 관제소에 해당한다. 인간의 감정과 사고, 행동을 좌우하는 핵심적인 헌신과 깊고 깊은 사랑, 기본적인 소망을 한데 모인 저장 창고와도 같다. 특정한 진리로 마음의 눈을 밝힌다는 건 그 진리가 속속들이 파고들며 단단히 사로잡아서 전인격을 변화시킨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임을 안다 하더라도,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그 진리를 깨달아야 비로소 인지적 이해를 넘어 정서적으로도 주님의 거룩하심을 경이롭고 아름답게 받아들이고 그분을 노엽게 하거나 가벼이 여기는 짓을 하지 않게 된다
기도는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행위다(사 64:7)
은밀히 드리는 개인적인 기도와 공적인 기도는 나란히 깊이를 더해 가게 마련이다.
펠프스는 “하나님이 빠져 있다는 자각이야말로 신앙생활 전반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일”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기도 생활이 풍성해지기 시작하면 놀라운 결과들이 나타난다. 더러 자기 연민에 빠지거나 내면의 원한과 분노를 합리화 한다 쳐도, 하나님 앞에 앉는 순간 방향 전환이 일어나고 애써 붙들고 씨름하던 감정이 얼마나 하찮은지가 한눈에 드러난다. 자신을 옹호하는 변명 따위는 산산조각 쪼개져서 바닥에 나뒹군다. 근심걱정에 찌들었다가도 주께 간구하노라면 겨우 그 정도 일로 월 그렇게 노심초사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자신이 우스워지고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이 하신 일들에 감사하게 된다. 드라마틱한 일이다. 관점이 달라지고 상황이 상쾌하리만치 명확해진다.
기도가 위대한 것은 곧 인간의 삶 가운데 미치는 하나님의 손길과 영광이 크고 넓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 4:7).
기도하지 않는 건 단순히 종교적인 계율을 어기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는 행위다.
기도는 인간이 가진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기도는 크리스천들을 하나님과 연합하게 한다.
기도는 경이요, 친밀감이며, 고단한 씨름이지만 본질에 맞닿은 길이기도 하다.
Part 2
기도를 분별하다
03
기도라고 다 같은 것은 아니다
참된 기도는 본능을 넘어 하나님의 선물이다
.
참다운 기도란 무엇이고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 가?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은 간혹 믿지 않는 이들의 기도에도 흔쾌히 응답하신다’’고 했다.
기도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인격적으로 소통하는 반응’이라고 했다.
기도는 하나같이 하나님을 향한 반응을 가리킨다. 언제든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늘 무언가를 구하기보다 ‘듣기’가 먼저다. 하나님은 먼저 찾아오신다.
‘
가장 온전한 의미의 기도란 어떤 것일까? 기도란 하나님이 거룩한 말씀과 은혜로 시작하신 대화를 끊임없이 이어가서 마침내 주님과 온전히 만나는 단계에 이르는 일을 가리킨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가 존 녹스의 말처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도는 “하나님과 나누는 친숙하고 진심어린 대화’’가 된다. 장 칼뱅은 이를 가리켜 크리스천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주고받는 ‘친밀한 대화’, 또는 ‘하나님과의 교제’(쌍방향 상호 소통 활동;)라고 했다. 에베소서 기자는 말한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8).
04
소견대로 하는 기도는 비극이다
말씀에 깊이 들어가는 것이 기도의 출발이다
지금부터는 처음에 하나님이 어떻게 말을 걸어오시는지, 그리고 주께 대답하는 법을 어떻게 배울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반면에,크리스천의 기도는 대화를 나누며 친구가 되어 주시는 인격적인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는 쪽이다. 성경이 제시하는 기도 패턴에는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시 86: 11-12)라는 고백과 함께 온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께 반응하기까지 성경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과정이 어김없이 따라다닌다.
“비와눈이 하늘에서 내려 땅을 적셔 싹이 돋아 열매를 맺게 하고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사람에게 먹거리를 주고 나서 그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나의 입에서 나가는 말도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고 나서 내가 하라고 보낸 일을 성취하고 나서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다”(새번역)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세상에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격적이며 살아 움직이는 주님의 임재를 가리킨다면,그 말씀을 믿는 마음가짐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꺼내신 말씀에 인간이 믿음으로 내놓는 대답이 만날 때,비로소 교제가 시작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인가? 성경을 통해서다.
하나님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는’’(히 4:12) 말씀을 통해 일하시므로 크리스천의 삶 가운데 그분이 활발히 역사하게 만드는 길 또한 성경뿐이다. 성경 말씀을 깨달아 안다는 말은 그저 하나님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는 뜻이 아니다. 믿고 의지하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관심을 쏟는다면,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로 들으며 주님을 만나는 창구가 된다.
기도는 성경에 깊이 침잠하는데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성경에 풍덩 뛰어들어야 한다. 마음과 영혼이 자연스럽게 반응할 때까지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연구하고,생각하고, 묵상하고,숙고해야 한다. 부끄러움, 기쁨,혼란, 하소연 등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은 하나같이 참된 기도이며 마땅히 주께 드려져야 할 간구다.
“먼저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러고 나면 성령님이 마음에 역사하신다. 미리 뜻하신 이들의 마음에 이미 뜻하신 방식으로 역사하시지만 말씀 없이는 결코 일하지 않으신다.”
성경에 나타난 크리스천들의 기도 운동은 자기성찰과 회개가 뚜렷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내향적으로 기울기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갖게 된 참다운 신분을 확인하고 거기에 마음을 맞추는 상향적 성향이 짙었음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1-2)
그러므로 사고하고 말하기를 멈춰선 안 되지만 그 말과 생각은 하늘나라를 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05
기도는 결코 주문이 아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간다
크리스천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그분 자신을 알기를 원하며 주님의 얼굴과 임재를 구한다.
하나님이 독자적으로 사랑과 행복을 알 수 있었다면 굳이 다른 존재들을 지으신 까닭은 무엇인가?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 이 세상을 지으신 목적에 대한 고찰(A Dissertation Concerning the End for Which God Created the World)이란 논문에서 창조주께서 인간을 지으신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관계에서 오는 우주적인 기쁨과 사랑을 얻는 게 아니라(그건 이미 만끽하고 계시므로) 나누시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에드워즈는 그러한 사실이 인간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완전함과 아름다움을 통해 서로에게 행복과 기쁨을 전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본질적으로 ‘타자 중심’이신,오로지 상대를 영화롭게 하고자 하시는)의 속성과 얼마나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지 설명한다.
기도는 이처럼 친밀한 관계와 아버지의 사랑을 마음껏 느끼고 누리는 방법인 동시에 보살핌을 받고 있는 확신을 토대로 평안하고 기운 찬 삶을 살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애정 어린 관심을 받는 거룩한 자녀들에게 성령님은 두려움이 아니라 자신감을 채워 주신다고 힘주어 말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건... 그분만이 하나님께 다가가는 유일한 방법이며... 창조주와 소통하는 외길임을 인정하고 간구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다는 바울의 주장은 그야말로 놀라운 얘기다. 크리스천에게는 늘 귀 기울여 들어주는 분이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고 그분을 아버지로 모시게 하셨다. 주님이 하늘 아버지와의 관계를 포기한 덕분에 누구나 하나님과 부자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예수님이 잊힌 덕에 우리가 영원토록 기억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마땅히 우리가 받아야 할 영원한 형벌을 대신 짊어지셨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값이다. 주님이 값을 치르셨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실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엄연히 살아 계시다는 걸 알지만 무언가를 얻어 내거나 행복해지는 수단으로 여기는 탓이다. 대부분은 그분을 행복 그 자체로 삼지 않는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더 잘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얻고 구하려고 기도하는 것이다.
마음에 복음이 뿌리를 내리면 그 증거로 “하나님 안에서 한 점 이지러짐 없는 행복을 한껏 누리는’’ 법이다.
Part 3
기도를 배우다
06
어거스틴과 루터,기도를 말하다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구하라
기도란 하나님이 시작하신 대화를 계속 이어 가는 일이다. 주님이 친히 모든 인간 내면에 그분을 아는 지식을 심어 주셨을 때, 선지자들과 기록된 말씀을 통해 메시지를 전하셨을 때, 그리고 특히 심령마다 성령님을 보내 그분께로 초대하셨을 때 하나님의 이야기는 이미 시작되었다.
“성령님이 그러한 생각들을 통해 심중에 깨우침을 주는 풍성한 메시지를 주기 시작하면 여기 적힌 다른 원칙들은 다 집어던지고 그분을 예배하라. 성령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거기에 주목하면 주님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볼 것이다”(시119:18) 성령님이 ‘설교하기’ 시작하시는지 예민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이때다 싶으면 통상적인 패턴에서 벗어나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
루터는 하나님 앞에서 성경 말씀을 깊이 새김질할 때(설령 이미 골백번 돌아보고 곱씹었던 본문이나 진리라 할지라도) 성령님이 가슴에 사무칠 뿐만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느낌이 드는 풍성한 깨달음과 아이디어로 채워 주실 때가 있는 법이라고 말한다. 루터는 ‘마음의 눈이 환히 밝아져서’ 우리가 머리로만 아는 일들이 우리 중심에 더 확실히 뿌리를 내리게 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엡 1:18).
칼뱅이 내놓는 첫 번째 기도 원칙은 ‘경외’ 또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다. 기도란 우주를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독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하면서 ‘경외의 실종’보다 더 끔찍한 사태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은 하나님과 관해 무얼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인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상대에게 어리석은 짓을 하거나 그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얘기를 불쑥 내뱉을까 봐 진심으로 염려하고 겁을 내는 것이다. 기꺼운 존경에는 이처럼 두려운 측면이 내재되어 있다. 경외하는 마음이 깊은 까닭에 엉망진창이 되지 않으려 조심하고 또 조심한다.
하나님 안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과 행복을 느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거룩한 임재 가운데 머무는 특권에 가슴이 떨리며 그분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갈망이 나날이 짙어진다. 주님 마음을 슬프게 하지 않을까 몹시 걱정스러워한다. 지극히 영광스럽고 우리를 위해 어마어마한 일들을 이뤄 주신 분을 슬프게 하거나 그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을까 크게 염려하고 삼가는 것이다.
칼뱅이 제시하는 두 번째 기도 원칙은 “모자라고 부족하다는 의식은 허구를 몰아낸다”내는 것이다.
스스로의 허물과 연약함에 무자비하리만치 정직해야 한다. 얼굴에 가면을 뒤집어쓰는 ‘허구’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만이 유일한 희망임을 알고 회의와 두려움, 허무 따위를 솔직히 인정하며 그분 앞에 나와야 한다. ‘거지와 같은 성향’을 가지고 주님 앞에 서야 한다.
고백과 회개는 진실한 기도에 꼭 필요한 결정적인 성분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겸손은 기도하게 만드는 요인인 동시에 열매다.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데려간다. 인간의 결점이 여실히 드러나는 현장이다. 결함과 결핍에 대한 새로운 자각은 크리스천을 이끌어 하나님을 갈망하게 하며 주님의 용서와 도우심을 한층 더 간절히 사모하게 만든다.
세 번째 원칙은 겸손이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네 번째 원칙도 세 번째만큼이나 중요하며 둘 다 마음에 나란히 간직할 필요가 있다. 크리스천은 확신과 소망을 품고 기도해야 한다. 칼뱅은 “참다운 겸손함에 사로잡히고 압도되었다 할지라도 반드시 응답을 받으리라는 확고한 소망을 품고 기운을 내서 기도해야 한다.
다섯 번째 원칙은 은혜의 원칙이다.
전등 스위치를 올리면 전구에 불이 들어온다. 그렇다면 스위치가 전구에 에너지를 공급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빛은 전기에서 나왔다. 스위치는 에너지 자체가 아니라 전구를 동력과 연결시켜 주는 장치일 뿐이다. 기도 역시 마찬가지다. 하늘 아버지께 나갈 자격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신 것이다. 하지만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뜻을 좇는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시켜 준다.
08
기도 중의 기도, 주기도문을 말하다
주기도문,익숙한 데서 벗어나라
예수 그리스도는 풍요로운 기도의 곳간을 여는 열쇠로 이 주기도문을 주셨다. 그런데 그 엄청난 자원이 방치되다시피 하는 데 지극히 익숙하다는 사실도 한몫하는 듯하다.
온 세상은 신령한 체험을 갈구한다.
다. “온 우주를 다스리는 하늘 아버지와 날마다 마주앉아 그분 앞에 마음을 다 쏟아 놓고 그분이 귀 기울여 듣고 사랑해 주시는 경험을 하고 싶은가?” 우리는 두말할 것도 없이 환영이다. “예!” 예수님은 대답하신다. “주기도문 속에 모두 들어 있단다”.
“하나님은 엄중한 심판을 받아 마땅한 우리에게... 그분을 아버지로 여기고 또 그렇게 부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구한다는 건 도대체 무얼 기도한다는 얘긴가? 주님의 이름이야 이미 거룩하지 않은가?”
존귀한 이름을 품은 존재로써 선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표하므로,부름을 받은 그 호칭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우리 스스로 선하고 거룩해질 힘을 주시도록 꾸준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그저 착하게 사는 차원을 넘어 늘 기꺼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며, 더 나아가 그 아름다움에 경외감을 품는다는 뜻이다. “주님을 바라보며 탄복하는 마음에 사로잡히지 않는 한,그분의 이름을 드높여 경배할 리가 없다”.
칼뱅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데는 두 가지 경로가 있다고 보았다. 하나는 “정욕을 바로잡아 주시는 성령님’’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생각들을 빚어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온전히 다스려 주셔서 온 마음을 다해 기쁨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생각이 가득하길 구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부분적으로 드러날 뿐이지만, 장차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서는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완전하게 실현될 것이다. 온 고통과 상처,가난과 죽음은 사라진다. 그러므로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기도는 “정의와 평화가 흘러넘치는 미래의 삶을 갈망하는” 간구다. “앞으로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이 우리 가운데서 시작하신 나라의 완결과 완성”을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심을 가슴 깊이 확신하지 않는다면,감히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할 수 없다. 예수님 자신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상 누구도 마주한 적이 없는 지독히 참담한 처지에 몰렸을 때 주기도문의 이 부분을 고백하셨다는 사실이 답이 될 수 있겠다. 주님은 스스로의 욕구를 좇는 대신 아버지의 뜻에 따랐고 결국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것이 그분을 신뢰할 수 있는 이유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서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하지 못한다면 한줌의 평화조차도 느낄 수 없다.
‘일용할 양식’은 사치품이 아니라 생필품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루터에게는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가 번영과 공정한 사회 질서를 갈구하는 간구였던 것이다.
누구든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고 남들을 멸시하는 이가 있으면 이 간구와 마주서서 자신을 살피게 하라.......자신이 남보다 나을 게 없으며, 누구라도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고 겸손이라는 높고 낮은 문을 지나 용서의 기쁨 가운데로 들어가야 함을 깨달을 것이다.
“이는 시험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시험에 끌려들어가선 안 된다는 기도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시험에 들지 않게’’(마 26:41)는 죄에 굴복할 가능성이란 개념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악한 나라에서 뿜어 나오는 구체적인 폐단인 가난,수치, 죽음, 한마디로 우리를 위협하는 모든 것들에 맞서는 기도다.
세상의 그 무엇도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사랑이 많으신 하늘 아버지의 손에서 낚아첼 수 없음을 기억하고 ‘평온한 안식’으로 수렴하게 되는 것이다.
개인을 알기 위해서는 다수가 모여 이룬 공동체를 통하는 게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주님을 아는 게 집단적이고 누적 가중되는 일이라면, 기도와 찬양 역시 공동 작업이 되어야 한다. “하늘의 양식은 나누면 나눌수록 더 온전하게 되기 때문이다.”
09
기도의 시금석을 따르라
기도는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행위다
어떤 기도에든 얼마간 불순물이 들어 있게 마련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순수한 동기를 마음에 품기도 어렵고 합당한 말만 정확하게 골라 아뢰기도 힘들다. 그런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건 철저히 은혜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성경 말씀은 구절구절, 올바르게 기도하려고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예수님(요 16:24)과 믿음(약 1:6)에 기대어 구하지 않고, 이기적인 동기(약 4:3)를 가지고 간구한다면 삶의 어느 영역에서든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가운데 부르짖는다면(시 66:18) 기도는 ‘큰 효력을’ 내지 못할 것이다(약 5:16).
기도는 좋든 싫든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규칙적으로, 꾸준히, 작심하고,끈덕지게 드려야 한다.
“지금은 성령 충만하지 않아서 기도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까지 기도하라.”
기도는 언제나 고된 노동이며 종종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더러 기도하기 위해 한바탕 씨름을 벌여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날그날 하나님과 더불어 기도 시간을 가져야 할 순간이 오면, 마치 작당이라도 한 듯, 온갖 것들이 길을 막아서기 일쑤다.
성경에서 누군가와 ‘거닌다’는 건 우정을 나눈다는 뜻이다. 함께 걷노라면 서로 이야기를 나누게 마련인 까닭이다. 예수님의 이름과 성령님의 능력으로 드리는 기도는 태초에 하나님과 나누었던 더없이 소중한 경험,즉 거리낌 없는 대화를 되살리는 일이다. 기도를 대화로 이해하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우선, 마음속에 주관적으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하는 것을 기도로 보는 방식이다. 이런 관점을 따르면 단순히 심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내면에 들려
는 하나님의 음성이란 판단이 드는 직감이나 인상,느낌 따위가 찾아오길 가만히 앉아서 기다려야 한다. 반면에 하나님이 주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고 보는 또 다른 방식도 있다. 마르틴 루터의 경우에서 보듯, 성경을 읽을 때마다 확신과 깨달음이 드는데 거기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크리스천이 따라야 할 바른 방향은 후자 쪽이라는 얘기는 이 책 초반부에서 이미 나누었다.
J. I. 패커는 기도를 대화로 여긴다면 반드시 규칙적으로 깊이 있게 성경을 묵상하는 작업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묵상은 성경 해석과 연구와 자유로운 기도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패커는 습관적으로 “기도에 들어가기 전에 성경을 읽고, 본문이 하나님에 대해 무얼 알려 주는지 깊이 생각하며 거기서 얻은 깨달음을 찬양으로 이어 간다’’면서 ‘하나님을 아는 일에 이만큼 중요한 도구도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나님의 위대함에 눈을 뜨면 자신의 죄스러움을 새로이 실감하게 되는 법이다. 죄를 더 깊이 인식하고 회개하면 하나님의 은혜에 놀라고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솟는다. “더 많이 용서받은 이가 더 많이 사랑하게 되어 있다”(눅 7:47과 비교)
예수님의 이름은 주님의 거룩한 인격과 구원사역을 압축해 놓은 일종의 속기록이다.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늘 아버지 앞에 나아가는 행위는 더없이 고귀한 은혜를 입은 신분이 되었고 부르짖음에 주님이 귀 기울여 주심을 온전히 의식함을 상징한다.
“애정 어린 경외감”
노르웨이의 저술가 오 할레스비(〇le Hallesby)는〈기도(Prayer)》라는 짤막한 책을 쓰면서 기도를 ‘무력함 이 도드라지게 나타나는 마음과 정신의 상태’로 정의한다. “개인적으로는 기도란 무력한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 기도와 무력함은 떼어놓을 수 없다. 오로지 무력한 이만이 진심으로 기도할 수 있다.
기도를 드린다는 건 자신의 참담한 실상이 앞으로도 변할 여지가 없어서 무얼 하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무력함은 담대함의 원천이기도 하다. 극도의 무력감을 느낄수록 주님이 함께하시며 기도에 귀 기울여 주신다는 사실을 더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크리스천들을 친밀한 교제를 나누자고 부르신다. 곧 기도의 자리에 초청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이 보장하시는 사랑,성령님이 약속하신 내주하심, 용서를 받았다는 인식,주님의 임재 앞에 나가는 특권,죄스러운 습관을 이겨 내는 능력 등은 마음으로 받아서 실생활에 활용하지 않는다면, 이들은 하나같이 추상적인 개념에 그치고 만다. 이러한 요소들이 마음을 사로잡을 뿐만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에 힘입어 삶을 빚어 가게 해야 한다.
기도는 의무다. 형편이 어떠하든지 따라야 한다. 하지만 ‘제대로’ 기도하자면 ‘애정’(두려움과 놀라움, 사랑이 뒤엉킨 마음)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그렇다고 이에 관해 소극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성찬에 임하는 크리스천의 자세를 이야기하면서 “주님의 죽음과 고난을 애정 어린 마음으로 묵상하며, 그로 말미암아 스스로 분발하여 그 은혜가 뜨겁게 나타나게”18 하라고 말한다. 마음에 애정이 생겨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들 때까지 그 진리를 묵상해야 한다는 뜻이다.
크리스천은 기도를 통해 그런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간다.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신을 아는 지식으로 구성된다.
기도에는 인간들 사이에선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투명한 정직성이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찰스 호지는 조직신학 책을 집필하면서 ‘기도의 필수 요건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순종’과 ‘끈기’를 동전의 양면처럼 떼려야 멜 수 없는 관계라고 지적한다.
주님께 온전히 충성하는 삶을 살지 않고 있는 상태라면, 그저 기도를 이미 삶을 망가뜨리고 있는 요소들을 더 얻어 내기 위해 동원하는 이기적인 방편으로 사용할 공산이 크다. 패퍼는 덧붙였다. “하나님 곁에 딱 붙어 있기 위해서라면 내주지 못할 게 없다는 마음가짐이다. 핵심은 세상에서 갖고 싶어 하고 소중히 여기는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더욱 소망하고 애지중지하는 자세에 있다.
장 칼뱅이 들려주는 기도에 관한 가르침 가운데 가장 놀랍고 감동적인 대목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들을 위해 예비해 두신 모든 것들을 공급받는 주요한 통로가 기도라는 사실이다. “기도하면서 주님 안에 있음을 알게 된 것들을 구하는 건 우리들에게 남겨진 몫이다.”
Part 4
기도의 깊이를 더하다
10
말씀을 묵상하라
곱씹으라, 마음을 쏟으라, 반응하라 그리고 기도하라
기도가 참으로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가 되려면 규칙적으로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그분의 거룩한 음성을 듣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을 깊이 체험하는 길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지만, 영적으로 더 깊이 기도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상적인 경로는 바로 말씀 묵상이다.
묵상의 세 가지 유익을 약속
첫째로,안정이다.
둘째로, 묵상은 속사람 또는 성품의 변화를 약속한다.
셋째로 묵상은 복을 부른다.
특정한 본문을 이해한다는 건 곧 두 가지 기본적인 질문에 답할 수 있음을 가리킨다.
첫째는 “저자가 본문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둘째는 “성경 전체를 놓고 볼 때,본문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복음의 메시지와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크게 돌아가는 성경의 내러티브에 어떻게 이바지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성경적인 묵상은 성경을 깊이 있게 해석하고 공부한 결과를 토대로 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크리스천의 묵상은 분석과 성찰을 부추기고 그 초점을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에 맞춘다.
묵상은 영적으로 성경을 ‘맛보는’ 일이다. 말씀 가운데서 기쁨을 누리고,달디 단 가르침을 맛보고, 인간 의 됨됨이를 깨닫고 믿으며, 펼쳐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역사에 감사하며 찬양하게 한다.
묵상은 또한 영적으로 성경을 ‘소하,하는 작업이다. 삶에 적용하고,한 구절 한 구절이 어떤 영향을 미쳤 으며,현재 상태와 앞길을 구체적으로 진단하고 어떻게 이끄는지 숙고하게 한다. 성경을 통해 힘을 얻고,소 망을 품게 하며,스스로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 기억하게 한다.
달리 비유하자면, 묵상이란 진리를 마음속 깊은 데까지 끌어들여 불을 댕기고 하나님과 자신, 세상을 향 한 태도를 녹였다가 다시 빚는 활동이다.
성경 본문을 묵상하는 갖가지 구체적인 방법들이 있지만, 영국의 신학자 존 오웬은 세 가지 기본적인 단계가 있다고 보았다. 일단 성경 공부와 기도,그리고 묵상을 구별하는 데서 출발한다.
첫 번째 단계는 성경의 진리를 바라보는 명료한 시각을 선택하고 확보하는 이른바 ‘생각의 초점’을 잡는 과정이다.
성경을 묵상하는 또 다른 길은 핵심적인 구절을 찾아내서 한 마디 한 마디 곱씹으며 깊이 생각하는 방법인데,특히 짤막한 말씀을 다루는 데 적합하다.
오웬은 생각을 가다듬었으면 이제 묵상의 두 번째 단계인 ‘마음 쏟기’로 넘어가라고 말한다.
루터는 성경의 진리를 추상화하지 않았다. 삶과 동떨어진 개념으로 여기기는커녕, 그 가르침이 자신을 어떻게 바꾸어 가는지 살피면서 말씀에 깊이 침잠하고 적극적으로 심령을 조명했다.
존 오웬은 일단 말씀을 깊이 묵상했다면(진리를 깨닫고 삶에 적용했다면) 그 결과는 다채로울 수 있다고 덧붙인다.
그렇다면 묵상의 세 번째 단계는 무엇인가? 양쪽 끄트머리 사이의 스펙트럼(다양한 정도) 가운데 어느 자리를 지나고 있느냐에 따라 얘기가 달라진다.
오웬은 하나님의 임재와 주님이 베푸신 구원의 실상을 알고 감격하고 있다면 그 자리에 머물며 마음을 누리라고 권한다.
결국 묵상은 진리를 깊이 숙고해 찾아냈고, 그 개념이 ‘크고 감미로워지며,감동과 영향력을 갖게 되기까지,그리고 하나님의 실상을 마음으로 감당해 낼 수 있기까지 마음에 끌어안고 곱씹는 작업이다.
육신을 입은 말씀이 우리를 위해 세상에 오고 돌아가셔서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죄와 허물을 용서의 길을 여셨음을 감안하면, 기록된 말씀과 그 법은 온 인류에게 기쁨이 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을 묵상하라. 그분은 스스로 하나님에 대한 묵상이 되신다.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라. 우리를 보며 노래하시는 주님을 주목하라(습 3:17).
거기서 눈길을 떼지 않으면 하나님은 친히 기쁨이 되어 주시며 그분의 법 또한 기쁨이 된다. 우리는 물가에 심은 나무처럼 청청해진다.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고 삶의 가뭄을 만나더라도 잎이 마르지 않을 것이다.
11.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
하나님과 연합하고 영광을 즐거워하라
바울은 이론적으로 무언가를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과 전폭적으로 수용하고, 활용하며, ‘속사람’(앱 3:16), 또는 ‘마음속’(17절)으로 살아내는 것 사이의 차이를 짚고 있다.
드와이트 무디도 마찬가지다.
“뉴욕에 머물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얼마나 멋지고 놀라운 날인지! 뭐라고 해야 할까, 도무지
형언할 수가 없다. 너무도 거룩한 사건이어서 똑 부러지게 옮길 도리가 없다. 기껏해야 하나님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셨다고 고백할 수 있을 따름이다. 주님의 사랑을 얼마나 절절하게 경험했던지 그분의 수중에 머물게 해 주시길 간청할 수밖에 없었다.”
속사람의 영적인 경험이란 무얼 가리키는가?
성령님은 인간의 내면에 복음의 진리에 반응하는 영적인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바울의 기도는 크리스천들에게 성령님의 ‘화학처리’,다시 말해서 ‘영적인 감도’를 확보하는 작업이 필요하며, 그렇지 않으면 머리로 진리에 동의하고 입으로 고백한다 할지라도 생활방식에는 이렇다 할 실질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없다는 점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성령님이 마음을 민감하게 하신 상태에서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라는 진리의 빛에 노출되면,정서적인 반응이 일어날 뿐만 아니라(눈물을 흘리고,두려움과 감격에 떨고, 기쁨에 겨워하는 식으I) 세상에서 생활하고 행동하는 방식도 완전히 달라지게 마련이다. 감정과 행동이 영향을 받았다면,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하나님에 관한 몇몇 특정한 진리에 사로잡혔다고 봐도 좋다. 빛이 들어와서 확실한 흔적을 남겼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며 은혜로우시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 거룩함과 은혜로움이 얼마나 근사하고 멋진지 마음으로 경험하는 것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존재한다”.
성령님이 임하셔서 내 마음이 충만해지면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묵상할 때 성령님이 부어 주시는 은총에 힘입어야 한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건 그분이 계시는 우주의 한 지점을 찾는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성령님의 도우심에 기대어 하나님의 실재적인 임재를 감지할 수 있는 마음을 갖는 걸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 한,사실상 이 땅에서 진실로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 내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마찬가지로,오웬은 시시때때로 하나님 안에서 희열을 맛보며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주님의 손길을 체감하는 경험만이 세상의 가짜 하나님이 주는 질 낮고 부분적인 위안에 넋을 빼앗기며 격정과 욕망의 노예가 되는 비극을 피할 유일한 길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묵상과 관상의 주재료로 성경 말씀을 충분히 강조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가톨릭교회의 전통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오웬은 참다운 하나님 체험이 없는 기독교는 결국 기독교 아닌 기독교가 되고 말 것이라고 경고 한다. 오웬은 적잖은 분량을 할애해 로만가톨릭교회의 관상기도를 다루면서 비판적 의견을 내놓는다. 분노, 갈망 등의 감정에 한 점 흔들림이 없는 완벽한 평정심을 갖는다는 개념은 플로티누스(Plotinus) 같은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로부터 비롯되었다고 꼬집는다. 오웬은 금욕적인 기도 방식을 낮은 기도 형태(간구나 고백처럼)에서 더 높은 형태로 올라가는 사다리의 가로 막대쯤으로 여기고 이를 강조하는 태도는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진리를 가릴 수 있으므로 문제가 있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오웬은 신비적인 기도를 살펴보면 그리스도를 우리와 하늘 아버지 사이의 구심점으로 삼고 묵상하는 지성이 결여된 경우가 허다하다고 주장한다.
오웬은 글의 말미에서 결론짓는다. “빛이 감정을 변질시키고 사랑보다 앞서는 쪽보다 사랑이 지성을 누르고 빛을 앞지르는 편이 낫다.’’ 청교도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발언이다. 어차피 균형이 깨지게 되어 있다면, 교리에는 다소 취약해질지라도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느껴가며 생동감 넘치는 기도 생활을 하는 쪽이 교리적으로는 한 점 흐트러짐이 없지만 냉랭하고 완고한 신앙생 활을 하는 것보다 훨씬 윗길이라는 뜻이다.
<성령에 속한 생각(Spiritual-Minded)〉이란 논문에 그 개념을 소상히 설명하는 부분이 있는데,한 대목 소개하고 싶다.
그리스도를 숙고할 때, 심중에 상상하는 바에 미혹되어 허상에 몰입하지 않도록 그 생각이 말씀의 원리에 따 라 생성되고 또 발전되어 가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라.... (그러나) 남들이 오류를 범하거나 미신에 휘둘 린다 해서 의무(그리스도를 묵상하는 일)를 저버린다든지 실질적이고 기본적인 신앙 원리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나로서는 스스로 크리스천이라 고백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생각이나 사랑을 부 정하다시피 하는 이들 틈에 끼기보다는, 다소 들쭉날쭉하거나 표현 방식에 있어서 지나치다 싶은 면이 있다 하더라도 사랑과 애정을 그리스도께 쏟는 이들과 함께하는 편을 택하겠노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Part 5
이렇게 기도하라
12
감사와 찬양이 먼저다
기도하려면 먼저 하나님을 충분히 생각하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부류가 있다. 우선 ‘위를 향한 기도’다. 주님께 초점을 맞춘 찬양과 감사가 여기에 속한다. 이를 ‘경외하는 기도’라고 불러도 좋겠다. 다음은 자기 성찰과 고백으로 죄 를 더 깊이 인식하고 이어서 한층 절절하게 은혜를 체험하며 사랑을 확신하는 ‘안을 향한 기도’다. ‘친밀한 기도,라고도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자신과 세상에 사는 다른 이들의 필요에 집중하며 간구하고 중보하는 ‘밖을 향한 기도’가 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다시 말해 주기도문에는 찬양이 가장 먼저 등장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찬 양은 다른 종류의 기도를 자극한다.
찬양과 경배는 하나님과 올바르게 교통하는 데 꼭 필요한 전제 조건이며 다른 종류의 기도를 이끌어 내는 자극제다. 곧장 간구나 고백에 들어가면 절대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기도 생활 전반에 걸쳐 찬양과 경 배가 으뜸가는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얘기일 따름이다. 찬양을 으뜸으로 삼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해로운 부분들을 바로잡고 영적으로 건강한 내면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찬양과 경배가 그토록 큰 영향을 끼치는 연유는 무엇일까? 세 종류의 기도(찬양, 고백,간구) 가운데서도 유난히 하나님을 향한 직접적인 사랑을 키워 주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어거스틴의 말마따나, 무얼 사랑하 느냐가 한 인간의 됨됨이를 말해 준다는 뜻이다.
찬양과 감사에 들어가려면 먼저 자신이 어떤 문제와 마주했는지 알아야 한다. 환경이 고백과 회개를 이 끌어 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 넘어지거나 쓰러지고 죄와 부끄러움의 짐을 짊어질 때 기도는 간절해진다. 눈 앞의 여건이 간구와 중보로 몰아가기도 한다. 친구나 가족이 새로 암 진단을 받거나 지병이 악화될 조짐을 보일 때 역시 기도의 열기는 뜨거워진다. 외적인 조건이나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는 절박감이 기도를 자극하 는 경우다.
C. S. 루이스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결핍은 곧 현실감각의 상실을 의미하며 찬송이야말로 현실 세계에 뛰어들어 더 온전히 주님을 누리게 한다고 말한다.
13
고백과 회개는 필수다
용서받은 마음에서 바른 기도가 세워진다
하나님 중심으로 죄를 고백하고 돌이키는 이런 방식은 변화를 일으키는 강력한 수단이 된다. 죄의 결과 를 두려워하는 마음은 외적인 압력으로 행동을 변화시키지만 내면의 충동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 만 구원을 베푸시고 찬양 받기에 합당한 분을 높이고자 하는 소망은 인간을 안팎으로 속속들이 바꿔 놓는다 . 청교도 저술가였던 리처드 시브스(Richard Sibbest《상한 갈대(The Bruised Reed)》라는 탁월한 저서에서 회개는 “고개를 조금 떨구는 정도가 아니라 ... 죄를 짓고 나서 느끼는 괴로움이 징벌보다 더 혐오스러워지 도록 마음을 움직여 가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기도는 그저 내면의 평안을 추구하는 방법이 아니며, 외부로 눈길을 돌려 하나님이 세상 에서 벌이시는 역사에 동참하는 길이기도 하다.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읍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첫 번째로, 밖을 향한 기도가 있다. 하나님은 자녀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적인 정황에 영향력을 행사 하A|며(약 5:16-18) 세상에 정의를 세우신다(눅 18:7-8;).
간구의 두 번째 목표는 안을 향한다. 기도를 통해 평안과 안식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육신의 잠이 “단단 히 그러쥐고 있던 것들을 풀어놓는행위’’ 이듯,기도 또한 스스로 통제하려는 의지를 버리고 온갖 필요를 하 나님의 보살펌에 맡기며 안식하는 걸 의미한다. 뻔뻔스럽게 졸라 댈 줄 알아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하나님 이 비할 데 없이 지혜로우시며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선물을 주고 싶어 하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기꺼 이 순종하는 기도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받아야 할 ‘고난의 잔’을 옮겨 주시길 기도했지만 간곡한 요 청은 기각되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주님은 “나의 하나님!”을 찾았지만 끝내 버림을 받으셨다(마 27:46) .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예수님은 완벽한 인간이었다.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 고,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셨으며(막 12:28-31) 하나님의 법을 온전하게 완성하셨다.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치시는 예수님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셨기에,하늘 아버지는 우리가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때 응답하신다. 예수님께 “하늘은 놋이 되어서” 한마디 말이 없었지만,그 공로 에 힘입어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심을 분명히 믿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크리스천은 하나님께 담대하고 구체적이며 열심히, 정직하게,그리고 부지런히 소원을 아 뢰어야 한다. 하지만 그와 아울러 하나님의 뜻과 지혜로운 사랑을 인정하고 끈질기게 순종해야 한다. 처음 부터 끝까지 예수님 덕분이며, 그러기에 무엇이든 그분의 이름으로 구해야 한다.
14.
매일 기도하라
날마다 기도하는 것은 성경적 전통이다
《경건의 시간》은 한정된 지면의 상당 부분을 투자해서 날마다 예배를 드리는 데는 마음을 정하고 행동하 는 의지적인 훈련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조용한 자리를 찾고, 하나님이 친히 만나 주고 싶어 하신다는 점에 집중하며 심령을 가다듬으라고 주문한다. 성경 말씀을 공부하고 그 결과를 일지에 적은 뒤에 그와 비슷한 정도의 기도 시간을 가지라고 가르친다. 적어도 20분 이상 예배하는 걸 추천한다.《경건의 시 간》의 핵심부에는 일생의 대부분을 영국에서 보내며 수많은 고아원을 세웠던 독일의 유명한 침례교회 목회 자, 조지 뮬러(1805-98)의 기도 방법이 압축되어 들어 있다. 그의 기도 생활은 자전적인 글에 잘 드러나 있 는데,주목해 살펴볼 가치가 있다. 특히 성경 묵상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마음을 녹여 기도로 이끄는 통로 로 평가했다. 뮬러는 마르틴 루터의 지침을 따랐으며 루터의 묵상 방식 또한 고전에 속한다. 뮬러는 이 종교 개혁가의 전례를 따라 본문을 대할 때마다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경건의 시간》의 물음들을 소개한다.
• 따를 만한 본보기가 있는가?
• 순종해야할 명령이 있는가?
• 피해야 할 잘못이 있는가?
• 용서받아야 할 죄가 있는가?
• 당당히 내세워야 할 약속이 있는가?
• 하나님 자신에 관해 새로이 알려 주는 점이 있는가?11
성경 연구와 묵상을 마치면,먼저 하나님께 나아가 죄를 고백한 다음 십자가에서 베풀어 주신 구원에 감 사하고 찬양하는 흐름으로 기도를 이끌어 간다. 찬양이 끝나면 다른 이들을 위해 중보하고 마지 막으로 스스 로의 필요를 아뢰는 간구로 마무리한다
통상적으로 하루에 한 번 갖는 경건의 시간에 만족할 게 아니라 더 자주 기도할 필요가 있다. 루터는 하 루에 두 번 기도하길 권했고 칼뱅은 간단하게 자주 드려야 한다는 쪽이다. 하루의 틀을 잡을 때,24시간을 보내는 동안 한 번 이상 시간을 정해서 온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교단과 교파 를 초월해 모든 크리스천들이 공감하는 것처럼 보인다. 특정한 시간표를 너무 고집해선 안 되겠지만, 나로서는 하루에 두 번 기도하길 권장하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입장에 전반적으로 동의하는 편이다. 아침과 저 녁에 기도하는 게 익숙하고 좋지만 가끔은 아침에 간구하며 얻은 깨달음을 계속 이어 가기 위해 한낮에도 잠깐 짬을 내서 간단한 기도를 드린다. 아울러 매일기도는 더 성경적이 되어야 한다. 체계적인 성경 읽기와 연구, 절제된 본문 묵상 등에 더 깊 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믿는 까닭에 관해서는 이미 길게 이야기한 바 있다. 요즘 세계 곳 곳에서 두루 쓰이는 최신판《공동기도서》에는 크랜머의 성경 읽기 달력이실려 있지 않지만 1549년과 1552년 복각판에서는 아직도 볼 수 있다. 인터넷을 비롯해 여러 매체에 다양한 형태로 소개되어 있는 맥체인의 성경 읽기 달력은 저마다의 시간 형편에 맞춰 적절한 속도로 성경을 통독하도록 이끌어 준다. 어쨌든 체계 적이고 지속적인 성경 읽기가 기도에 앞서거나 동반되어야 한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매일기도에는 성경 연구뿐만 아니라 묵상도 들어 있어야 하며, 광범위하고 온전한 경험을 기대하는 마음이 전반적으로 한층 더 깊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신령한 실재를 경험하고 더 깊은 경외감과 친밀감을 느낄 뿐만 아니라 ‘어둡고 캄캄한 심령,으로 씨름하고 불평하는 과정도 더 깊이 체험해야 한다. 존 오웬은 마음에 담은 애정이 기도로 표출되지 않으면 성품이 변해서 그리스도처럼 자라 가는 역사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버금에 안주하지 말고 으뜸을 추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