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위 K콘텐츠만 9개, 33개 언어로 번역… 말맛 살린 ‘자막의 힘’
‘우영우’ 속 “바람이 분당” 대사를
빵 ‘bun’ , 대박 ‘dang’으로 바꿔
남정미 기자 입력 2023.07.07. 03:00 조선일보
'더 글로리' 그리스어 포스터./넷플릭스
올 상반기 한국 콘텐츠는 9번 세계 정상에 올랐다. 넷플릭스는 매주 전 세계 비영어권 콘텐츠 중 시청시간이 가장 많은 콘텐츠 10개를 뽑는데, 여기서 한국 작품 9편이 1위를 차지했다. TV 부문에선 K콘텐츠가 한 주도 TOP10에 안 뽑힌 날이 없다. 전 세계 넷플릭스 시청자들이 많이 보는 10개 작품 중에 한국 작품이 매주 꼬박꼬박 1개 이상씩 있었단 얘기다. K콘텐츠는 2021년 6월 첫 집계를 시작한 글로벌 TOP10에서 첫해 3작품(’오징어 게임’ 등), 2022년 7작품(‘수리남’ 등)이 1위를 차지했다. 올해는 상반기에만 9작품이다.
치밀한 시나리오와 탄탄한 연기력으로 무장한 K콘텐츠가 세계화란 산을 넘을 때, 등산화와 지팡이가 돼 준 게 ‘자막’과 ‘더빙’이다. 2015년 넷플릭스와 파트너십을 맺을 당시만 해도 약 10개 언어를 지원했던 국내 자막·더빙업체는, 약 60개 언어 자막과 더빙 지원이 가능한 회사로 성장했다. 이제 넷플릭스 한국 오리지널 콘텐츠는 33개 언어로 자막 제작, 평균 15~16개 언어로 더빙돼 190여 국가 시청자를 만난다. 2021년 공개된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도 자막과 더빙 덕분에 한 달 만에 전 세계 1억1100만 가구가 시청할 수 있었다.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영문 포스터. /넷플릭스
그래픽=김의균
◇단순한 번역 아닌, 현지화의 최전선
지난달 27일 방문한 서울 마포구 상암동 ‘아이유노 SDI 그룹’ 한국 지사엔 10여 명의 직원이 아직 공개되지 않은 콘텐츠 자막 작업에 한창이었다. 넷플릭스, 디즈니+ 등 글로벌 OTT 파트너사인 아이유노 SDI는 한국인 이현무(47) 대표가 2002년 차린 자막·더빙 회사다. 2019년 유럽 1위 사업자였던 BTI 스튜디오를, 2021년 미국 1위 사업자 SDI 미디어를 인수하면서 글로벌 1위 업체가 됐다. 2017년 3500만달러(약 462억원) 규모였던 매출도 지난해 5억900만달러(약 6714억원)로 14배 늘었다.
자막 작업은 크게 4가지 공정을 거친다. 시청자가 자막이 너무 느리거나 빠르게 지나간다고 느껴선 안 되기 때문에, 들어가고 나갈 타이밍을 초 단위로 먼저 정해 놓는다. 이어 한국어 대사를 받아 적는 ‘받아쓰기’ 작업을 한다. 이를 영어로 옮기고, 다시 세부 언어로 번역한다. 마지막으로 감수와 에디팅을 거친다. 오혜석 아이유노 글로벌 고객 디렉터는 “최근의 자막 작업은 의미만 통하는 번역이 아닌, 최대한 작품의 의미를 살리고 이로 인해 재미를 높이는 현지화의 중요한 도구로 여겨진다”고 했다.
지난해 아이유노가 자막 작업을 맡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현지에서 번역이 잘된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우영우’엔 “바람이 굉장히 귀엽게 부는 데서 사시네요? 분당~”처럼 한국어 특유의 말 맛을 살린 대사가 많다. 대개 이럴 땐 미국식 농담으로 바꾸는 경우가 많았다. 우영우에선 “There must be some really great bread where you live. Bun, dang”이라고 자막이 달렸다. “빵이 정말 맛있는 곳”으로 바꿔, “bun(빵)” “dang(대박)”과 비슷한 감탄사로 ‘분당’이란 말장난을 살린 것이다.
브라질에서 방영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자막. "내 이름은 똑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우영우. 기러기, 토마토, 스위스, 인도인, 별똥별, 우영우"란 대사를 'caneca(머그잔'), 'casaca(외투)' 처럼 앞뒤가 같은 단어를 사용해서 번역했다. /넷플릭스 브라질 인스타그램
한국 드라마 최초 ‘국제 에미상’ 텔레노벨라 부문 수상작인 드라마 ‘연모’는 사극 번역의 정석으로 꼽힌다. 사극 대사 톤을 위해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구나”를 “I do not know what you are talking about”으로 옮겼다. 현대 미국인이 즐겨 쓰는 축약형 대신, ‘don’t’를 ‘do not’으로, ‘you’re’를 ‘you are’로 풀어썼다.
오 디렉터는 “최근엔 한국어에서 영어를 거치지 않고, 세부 언어로 바로 번역을 요청하는 경우도 많아졌다”고 했다. 중국어, 태국어, 인도네시아어, 말레이시아어, 베트남어, 일본어 등이 그렇다. 오 디렉터는 “영어에서 다른 언어로 한 번 더 번역하면 아무래도 놓치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며 “원어의 모든 대사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대로 살렸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런 요청을 주신다”고 했다.
넷플릭스 '택배기사' 베트남어 포스터. /넷플릭스 베트남 인스타그램
◇자막보단 더 까다로운 더빙 작업
“처음부터 태국어로 만든 작품인 줄 알았다.” 지난 3월 공개 이후 태국에서 3주 연속 시청 1위를 차지한, ‘더 글로리’ 더빙판에 대한 현지 반응이다. 극 중 동은이를 괴롭히는 가해자들의 욕설까지 제대로 현지화해, “공공장소에서 볼 땐 주변에 누가 있는지 살피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지금 우리 학교는’ 아랍어 포스터. /넷플릭스
한국만 해도 더빙보다 자막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언어의 복잡성이나 문맹률 등에 따라 더빙을 선호하는 나라도 많다. 자국어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프랑스에서도 더빙이 더 우세하다.
더빙 작업은 자막보다 비용과 시간이 배 이상으로 든다. 성우 캐스팅은 물론이고, 배우들과 이른바 ‘입이 맞아야’ 하며, 구어체도 살려야 하기에 더빙용 대본을 따로 준비해야 한다. 더빙을 제외하고 가장 비싼 언어는 ‘일본어’다. 오 디렉터는 “일본은 전문 교육기관을 다닌 사람에게만 자막을 달 자격이 주어지기에, 번역 작가 수가 한정돼 작업 비용이 비싸다”고 했다.
넷플릭스 '사냥개들' 일본어 포스터./넷플릭스 일본 인스타그램
자막·더빙 산업은 더욱 성장할 전망이다. 넷플릭스가 앞으로 4년간 한국에 투자하겠다고 밝힌 25억달러(약 3조3000억원)의 수혜 업종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지난달 22일 방한한 테드 서랜도스 넷플릭스 CEO는 “한국 콘텐츠의 세계적 인기 비결엔 더빙과 자막으로 대표되는 현지화를 향한 투자가 있다”며 “이 부문에 투자를 아끼지 않겠다”고 했다.
남정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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