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 세도정치의 한 축을 형성한 김병학과 김병국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김조순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김조순을 비롯한 세도정치 세력의 계보를 추적해 보면 모두 한 사람으로 연결되고 있다. 바로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이다. 김창집은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의 아들로 여섯명의 형제(김창집, 김창협, 김창흡, 김창업, 김창즙, 김창립)가 모두가 뛰어나 6창이라 불렸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김창집의 후손들이 뛰어났는데, 고손자가 바로 김조순이다. 김조순을 중심으로 사촌, 6촌 형제들이 세도정치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중에 특이하게도 김창집의 후손이 아닌 김창협의 후손에서 현달한 가문이 보이는데, 바로 김수근(이조판서)과 그의 아들 김병학(영의정), 김병국(영의정) 형제이다. 그중에 김병학은 다시 김준근의 양자로 가고 있어 별개처럼 보인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김상헌(좌의정)-김광찬-김수항(영의정)-김창협(대제학)-김숭겸-김원행-김이직-김인순-김수근(이조판서)-김병학(영의정)과 김병국(영의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김조순과 김수근, 김병학, 김병국등은 촌수가 멀어도 너무 먼 사이로 벌어져 있는데, 어떻게 세도정치의 한복판에 자리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김창집의 손자인 김원행이 김숭겸의 양자로 입적하게 되고, 김창집의 고손자이자 김조순과는 6촌인 김인순이 다시 김이직의 양자로 오게 된 이유가 크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김원행과 김인순이 모두 김창집의 직계 후손으로, 안동김씨 세도정치 세력의 핵심이 될 수 있는 이유가 충분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김수근이 이조판서를 역임할 수 있었고, 그의 두 아들이 영의정에 올라 세도정치의 마지막을 불태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이후에 영의정에 올랐으니, 세도정치의 영향만으로 영의정에 오른 것은 아니다. 흥선대원군이 어려운 시기에 그를 알아보고 물심양면으로 도운 이력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한다.
그런 차원에서 김병학과 김병국의 묘를 찾아보고 답사하고자 하였으나, 이미 1979년에 발굴되어 사라진지 오래였다. 안산의 반월공단 개발로 인해 그들의 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당시 발굴상황을 정리한 『경기도 반월지역 안동김씨 분묘발굴조사보고서-김병국, 김수근 일가묘』가 출간되어 그 일단을 확인할 수 있다. 보고서에는 묘소 전체를 촬영한 사진은 없고, 부분적인 모습만이 있어 아쉬울 따름이다. 묘소를 발굴했던 온양민속박물관에 김병학과 김병국 그리고 김수근 묘의 석물을 가져다 가묘로 조성해 놓아 아쉬움을 달래 주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무덤에서 수많은 옷가지가 그대로 출토된 것으로 보아 시신의 부패가 이루어지지 않은 미라의 상태로 있었던 것이 아닌지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들의 시신은 후손들에 의해 화장되어 뿌려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