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풀린 금융, 명동 한복판에 고속도로 |
[새사연-오마이뉴스 공동기획 ③] 구제금융법 통과 이후 미국 경제와 한국 |
2008-10-14 ㅣ 새사연 연구센터 |
망가진 미국 금융과 ‘금산분리 완화’ 발표한 정부 |
도표가 포함된 보고서 원문을 보시려면 PDF 아이콘을 눌러 파일을 다운로드 받으시기 바랍니다. | 금융위기 해법, 달러 무제한 공급이라는 초강수까지 등장
미국을 필두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어가는 금융위기를 수습하고자, 선진 각국들이 각자 자국에 필요한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미국에서 7,000억 달러 구제금융법안을 통과시키고 정부가 직접 기업어음(CP)을 매입하겠다고 발표하는 동안, 영국과 아일랜드는 부실은행 국유화 방침을 내놓는가 하면 독일을 중심으로 국가가 예금자 예금보호를 전액 보장한다는 발표가 이어졌다. 부도위기에 몰린 아이슬란드는 러시아에 구제금융을 요청했고 조용하기만 했던 국제통화기금(IMF)마저 나서고 있다.
그러나 내용이나 시점이 서로 어긋나면서 이들 대책의 효과는 반감되었고, 이미 금융위기는 개별 국가 정부가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금융위기는 기축통화인 달러를 찍어낼 수 있는 미국 연방정부의 통제를 넘어서, 개방된 금융 연쇄고리를 타고 전 세계로 급격히 전이되었고, 이제는 문자 그대로 지구적 범위의 해법을 요구하는 단계까지 왔다.
10월 8일, 오랜만에 주요 선진 7개국(G7) 중앙은행이 일제히 금리를 인하하는 ‘공조’를 취했지만 그 효과 역시 하루를 가지 못했다. 그러자 10월 10일 G7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 총재회담, 11일 우리나라와 BRICs 등을 포함한 G20 재무장관 회담, 12일 유로존 15개국 정상회의를 잇달아 개최하고 금융위기에 대한 공동 대응책을 논의했다.
부실 자산 인수를 넘어 금융회사에 직접 자금투입을 하는 방안, 은행 간 자금거래에 정부가 지급보증을 하는 방안 등의 강력한 국가 개입 대책이 쏟아져 나와,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가 사실상 국가자본주의로 바뀌는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그러더니 13일 미국, 일본, 유럽, 영국, 스위스 등 5개 중앙은행이 “상업은행들이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자금을 빌릴 수 있도록 하겠다”는 달러 무제한 공급 선언을 하기까지 이른다. 심장이 멎어버린 상태를 한시도 지연시킬 수 없어 일시적인 전기충격 요법을 사용해야 할 국면에 이른 것이다.
단지 교통경찰의 태만과 운전과실 때문에 금융대란이 발생했다?
그러나 전기충격 요법으로 이미 실물경제까지 전이된 세계 경제위기가 얼마나 회복될지는 여전히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이런 와중에 한국은 자본시장 통합법과 함께 금융규제완화 논쟁의 초점이었던 ‘금산분리 완화’ 방안을 미루고 미룬 끝에 13일 전격 발표하였다.
우리 금융정책의 수장인 금융위원회 전광우 위원장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로 시작되어 전 세계 금융공황국면까지 치달은 최근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진단한 바 있다.
“교통사고(금융위기)의 원인이 자동차의 구조적 결함(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 자체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운전과실(경영자의 모럴헤저드)이나 잘못된 교통신호체계(감독시스템), 또는 과속을 막지 못한 교통경찰(감독기관)의 책임일 수도 있다” (<아시아투데이> 10월 10일)
금융정책 수장다운 대단히 적절한 비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전광우 위원장 발언의 취지는 ‘금융자본주의 그 자체나 규제 시스템이 문제라기보다는 감독소홀이나 금융회사의 과욕이 문제’일 가능성이 높으니, 우리나라는 향후에 ‘금융산업 혁신을 그대로 강행하고 규제완화의 큰 틀을 유지’하면서 금융감독을 효율화하는 방향으로 가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단순한 접촉사고도 아니고, 전 세계가 무제한 달러 공급을 해야 하는 ‘전 국가적 교통마비 사고’라고 표현해야 할 지금의 금융위기가 과연 교통경찰의 근무태만과 운전자의 과실 때문에 발생했다고 간주할 수 있을까. 미국 금융시스템이 어떻게 30년 동안 부실 위험성을 누적시켜 왔는지를 추적해 보면서 전광우 위원장 발언의 타당성을 가려보자.
전통 제조업 투자를 선호했던 월가의 유명한 투자자 워렌 버핏은 이번 세계 금융위기를 이렇게 표현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품(Nobody knows who is doing what)’에 지나치게 ‘과도한 레버리지를 활용해서 투자’한 월가의 위험 통제기능 상실에 지금의 금융위기가 있다고.
미국 금융 고속도로에는 신호등도, 보안관도 없었다
1980년 이후 미국 경제 성장의 핵심 동력이었던 금융시스템 엔진에는 워런 버핏의 말처럼 ‘대량 살상무기’ 수준의 위험성이 있는 파생상품, ‘시한폭탄 결함’이 자라고 있었다. 또한 투자자와 기업의 자금 중개 수수료를 넘어서 자기자본의 몇 십 배의 차입(leverage)까지 동원해서라도 고수익을 좇으려는 ‘급가속 결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정책 결정자들은 금융시스템에 내재한 근본 결함을 고치려 하거나 문제발생을 방지하려는 최소한의 어떤 사전적인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 반대로 “파생상품은 위험을 회피하려는 사람들이 그 위험을 기꺼이 부담하려는 사람들에게 넘길 수 있는 놀라운 수단”, “파생상품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려는 것은 잘못된 것”(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2003년)이라며 시장이 위험성을 자율적으로 정화시킬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또한 미국 정부는 금융회사들이 ‘위험을 기꺼이 부담’하면서까지 고수익을 추구하도록 금융에 가해졌던 각종 규제를 오히려 풀어버렸고, 금융회사들은 그나마 남아있던 규제도 피해나갔다. 1929년 대공황의 교훈을 근간으로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엄격한 분리를 규정했던 은행법(Glass-Steagall Act)은 1999년 은행현대화법(Gramm-Leach-Bliley Act)으로 대체되면서, 금융지주회사라는 이름아래 사실상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장벽이 사라졌다.
이들 금융지주회사와 투자은행들은 연방정부의 규제를 받지 않는 투자전문 자회사와 모기지 전문회사를 세워, 이제는 악명 높아진 서브프라임 대출을 남발했다. 특히 투자은행들은 상업은행이 아니라는 이유로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로부터 과다 차입 등에 대해 전혀 규제를 받지 않았고, 미국 증권선물거래소(SEC)로부터도 그 어떤 강제적이고 명시적인 규정도 받지 않아, ‘자발적 합의’에 기초한 느슨하기 그지없는 규제 틀에서 마음껏 대규모 차입과 자기자본 투자를 강행했다.
더욱이 90년대에 접어들면서 파생상품을 주업으로 하는 헤지펀드와 인수합병을 전문으로 하는 사모펀드라고 하는 초고속 경주용차를 허용하여 이들이 금융고속도로를 폭주하도록 했다. 이들에게는 기본적인 규제마저 없었고 최소한의 정보공개의무조차 없었다. 얼마나 위험한 상품에 투자를 하든, 얼마나 과도한 차입을 동원하든 규제는 없었다.
말하자면 헤지펀드와 사모펀드라고 하는 초고속 경주용차가 과속주행을 하고 신호위반을 일삼고 중앙선을 침범하는 극히 ‘위험한 주행’을 해도 그들만 다치고 만다면 보안관은 전혀 단속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가드레일만 들이박고 끝난 것이 아니라 대규모 인명 살상을 했으며 전체 교통을 마비시키고야 말았다.
위험성을 알면서도 시장이 자율적으로 통제하리라 믿었던 파생상품, 그리고 점점 더 풀려나가는 규제 속에서 위험도 높은 파생상품과 모기지 대출을 자유롭게 일삼았던 금융기관들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미국 금융 감독의 최종 보안관이라고 할 재무부 관계자들은 대부분 월가 출신들이었고 시장주의 추종자들이다. 자신이 교통법규를 위반한 전력을 가진데다가, 위반을 저지른 운전자와 친분이 두터운 이들 보안관에게 감독을 더 잘하라고 한들 감독이 제대로 되겠는가.
신자유주의 금융 엔진의 과열과 폭발
그뿐이 아니다. 미국 금융상품의 불량 여부를 판단해왔던 기관이 바로 무디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피치(Fitch)인 3대 신용기관이다. 그런데 이들은 공적기관이 아니라 철저히 수익을 추구하는 사기업이었다. 이들의 수익원은 바로 불량여부를 판단해야할 그 금융상품을 제조, 유통하는 투자은행들이다. 애당초 객관적 평가는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금융회사의 책임자들도 문제를 비켜가지 않는다. 이제 94년 역사의 메릴린치를 파산시켰다는 오명을 안게 된 전 CEO 스탠리 오네일의 경우, 부채담보부증권(CDO) 자산의 위험성을 경고한 임원들을 해고하면서까지 오로지 고수익을 추구했다.
도대체 서브프라임 대출을 받은 미국 서민 가구들이 대출금을 갚지 못해 발생한 문제가, 어떻게 태평양 건너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고통을 주고 세계 경제를 흔들면서 첨단 금융시스템을 마비시킬 수 있었던 것일까.
규제 풀린 월가의 전통적 금융회사들과 규제 없는 신종 금융조직들이 주택 담보대출 채권을 모기지담보부증권(MBS)나 부채담보부증권(CDO)와 같은 파생상품과 접목시켜, 고위험을 안은 채 고수익을 무제한 추구하면서 위험을 내부에 축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적되는 위험성은 ‘시장이 스스로 치유’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월가의 신념 때문이었다.
그러나 월가의 신념은 현실에서 여지없이 무너졌고 자유시장 금융시스템이라는 자동차 엔진은 과열로 폭발되었다. 이번 금융위기가 시장주의의 파산임을 고백한 파이낸셜 타임즈 마틴 울프는 결국 지난 3월 이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08년 3월 14일 금요일을 기억하라. 자유시장 자본주의(global free-market capitalism)의 꿈이 사망한 날이다. 30년 동안 우리는 시장 주도의 금융 시스템(market-driven financial system)을 추구해왔다. 베어스턴스를 구제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미국 통화정책 책임 기관이자 시장자율의 선전가인 FRB(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이 시대의 종결을 선언했다.”
이제 월가의 금융시스템 자체에 구조적인 결함이 있었고, 그 결함을 미연에 방지하는 규제체계에도 결함이 있었으며 감독조차도 제대로 안 된 상황에서 월가의 금융가들과 펀드매니저들은 수익에 대한 극단적인 과욕을 멈추지 않았음이 증명된 것이다.
‘규제’가 없다면 ‘구제’도 없어야 하지 않나
지금 섣불리 신자유주의 종언을 주장함으로써 신자유주의적 금융시스템이라는 엔진 자체의 폐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규제를 복원해야 한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규제할 필요가 있는 곳에 규제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것”, “규제라는 것이 비용이 들지만 미리미리 규제했다면 이처럼 더 큰 국민의 혈세를 퍼붓는 상황까진 오지 않았을 것”(장하준 교수, <이코노믹리뷰> 10월 9일)이라는 주장은 그런 점에서 매우 당연한 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장 자율규제의 신화를 철석같이 신봉했던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조차도 “지금 세계의 금융시스템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시 정비해야 한다. 금융시장이, 금융산업이 자율규제를 한다고 믿는 것은 환상이다. 지금의 위기는 정부가 손을 놓고 아무 규제도 없이 방임한 결과이기도 하다. 지금은 자본주의가 빚은 위기가 아니라 ‘금융 자본주의’가 빚은 위기이다. ‘규제 자본주의(regulated capitalism)’만이 해법”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리고 규제를 받지 않거나 규제를 피해 그동안 승승장구하면서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대신에, 저소득층에게 그만큼의 부채를 안겨주고 이들을 거리로 내몬 월가의 금융회사들은 규제를 받지 않았던 만큼 구제도 스스로 하는 것이 사실 논리적으로 맞다.
브레이크 없는 미국 금융자본주의 앞길에 미국 정부가 알아서 고속도로를 깔아주고 신호등마저 없애주고 보안관도 철수시킨 상황에서 교통대란과 대규모 인명 살상이 났는데, 오히려 인명 피해를 당해 병원에 실려 간 미국 시민들에게 돈을 걷어서 금융회사라는 자동차 수리비에 쓰겠다니 누가 찬성을 할 것인가.
어쩔 수 없이 거액의 세금을 쏟아 부어 상황을 수습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면, 최소한 수습 후 교통사고 책임 추궁과 재발방지를 위한 규제책이 요구되는 것은 당연하다. 11월 4일 미국 대선이 치러지고 새 정부가 들어서도 당분간 금융혼란을 쉽게 잠재우지는 못할 것이지만, 당분간 계속될 금융회사 파산이 한계점에 이르고 실물경기 침체가 장기 국면으로 돌입하면 각종 의회 청문회를 통해 제도적인 수습방안들이 모색될 것이다. 사실 우리 정부가 굳이 미국 모델을 따라 하려거든 이후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정부가 뚫어준 고속도로, 무슨 차로 달리지 고민하는 행복한 삼성
그러나 우리 정부는 그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지난 10월 13일 미국발 금융위기로 몇 차례 미루어 왔던 금산분리 완화(은행법, 금융지주회사법) 방안을, 전 세계가 금융파국을 막고자 비상한 대책을 세우고 있는 와중에 용감하게(?) 발표했다.
예고되었던 대로 금산분리 완화는 1) 의결권 있는 은행지분을 산업자본이 종전 4퍼센트에서 10퍼센트까지 소유하도록 확대하고, 2) 종전 10퍼센트에서 30퍼센트까지 산업자본이 출자한 사모펀드(PEF)도 은행소유를 가능하게 하며, 3) 해외에서 산업자본을 보유한 외국은행에게도 국내은행의 인수를 허용하고, 4) 금융투자(증권)지주회사는 증권자회사가 제조업체를 산하에 둘 수 있게 하며, 5) 보험지주회사도 자회사로 제조업체를 지배할 수 있게 길을 터주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여기에 보너스로 재벌들의 금융지주회사 전환을 돕기 위해 각종 제한 규정마저 최장 7년을 유예하기로 했으며, 공정거래위원회는 6) 일반지주회사도 금융자회사를 소유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거들고 있다.
월가의 금융인들보다 더욱 확고한 규제완화, 시장 자율규제에 대한 신념을 갖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삼성생명이나 삼성증권 등 금융회사를 안고 있는 삼성그룹은 이제 명동 한복판에 정부가 만들어 놓은 아우토반을 달릴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은 셈이다. 그것도 어떤 차를 타고 갈지 골라야 할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제공한 제조업 금융 자회사 허용을 선택하여 그룹사를 재편할지, 금융위원회가 제공한 금융투자(증권)지주회사로 갈지, 아니면 삼성생명을 주축으로 하는 보험지주회사를 세울지 고민하면서 삼성이 가장 편한 것을 고르기만 하면 된다.
초보 운전자가, 신호등도 없는 곳에서 엔진 결함이 있는 자동차를 몰면?
결국 우리 정부는 여전히 끝을 모르고 확산되고 있는 미국발 금융위기를 보면서도, 신자유주의 금융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구조적 결함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판단된다. 규제 체계 역시 금융산업의 고속성장을 가로막는 불필요한 신호등 정도로 여겨서 가급적 없애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세계 금융위기를 통해 우리 정부가 얻은 교훈은 경찰관을 잘 세워서 감독 잘하고 운전자 교육을 잘 시켜야 한다는 것 정도인 듯하다.
심지어 미국 금융위기를 면밀히 검토한 결과라는 표식을 내기 위해서, “금산분리의 모국인 미국의 경우에도 최근 금융위기에 따른 은행자본 확충을 위해 은행주식 보유규제를 종전 10퍼센트에서 15퍼센트로 완화”했다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금융위원회 10월 13일 보도자료) 놀라운 해석이다. 지금 미국은 은행 부실로 인해 연방정부가 엄청난 공적자금을 투입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라 어디서라도 자금을 동원하여 은행에 자금을 공급해야 하는 극단적인 처지에 몰려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데도 말이다. 마치 자동차 사고로 망가진 차를 어쩔 수 없이 도색하고 있는 미국을 흉내 낸다면서, 우리는 방금 나온 신차인데도 자랑스럽게 새로 도색하는 것이 최신 유행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할까.
우리 정부는 미국에서 이미 엔진 구조에 결함이 있다고 검증된 자동차를 수입하면서도, 인파로 뒤덮여 있는 명동 대로에 고속도로를 내려고 하고 있다. 신호등도 모두 없애고 오직 교통경찰만 세워놓겠다는 것이다. 신호등도 없이 초고속으로 질주할 미국산 금융시스템이 앞으로 우리 경제의 가장 큰 성장 동력임을 믿어달라고 국민들에게 설득하고 있다. 정부는 미국산 금융시스템이 폭발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극히 조심해서 엔진을 과열시키지 않고 기술적으로 운전을 하면 엔진이 폭발하지 않을 수 있다고 굳세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최고의 금융시스템 전문가들로 구성된 월가도 엔진 과열과 폭발을 막을 수 없었다. 하다못해 이제 막 면허시험에 통과한 한국에게 이런 자동차를 주고 조심해서 운전하면 사고가 안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정당하겠는가, 아니면 아예 문제가 있는 엔진 결함을 근본적으로 고친 후에 운전을 하는 것이 정당하겠는가.
신현송 프린스턴대 교수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의 은행들이 그나마 세계 금융위기의 충격을 덜 받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한국이) 월가의 선진 금융기법을 도입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던 셈이다. 일본의 경우도 90년대에 잃어버린 10년을 경험한 후 금융기법을 체득하지 않고 후퇴적인 경영을 하면서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피할 수 있었다. 규제 때문에 ‘촌놈’ 행세를 한 것이 맞았다” (<이데일리> 10월 9일) |
파국으로 치닫는 세계 금융위기, 이제 공황이다 |
“이러다가 주가와 환율이 역전되는 것 아닌가”
10월초 까지도 가벼운 이야기로 이런 우려를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농담 섞인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10월 8일 환율은 1,350원을 넘어섰고 주가는 1,350포인트 밑으로 떨어졌다. 정부가 매일 10억 달러 이상을 외환시장에 풀고 있지만 치솟는 환율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다. 정부통제를 완전히 벗어났다는 얘기다. 우리 주식시장에서 외국인 비중이 이미 30퍼센트 밑으로 떨어졌건만 외국인들의 주식매도는 여전히 멈추지 않고 있다. 그나마 주가를 방어해왔던 기관투자가들도 더 이상 주식을 사려하지 않는다. 펀드 환매에 대비해 현금을 보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루짜리 달러 리보 금리는 3.94퍼센트까지 올랐고 유로 리보도 4.27퍼센트를 기록했다.
최후의 대책인 구제금융법으로도 진정이 안된다면
금융위기의 진원지인 미국은 우여곡절 끝에 법안 발의 2주 만에 겨우 구제금융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통과되던 10월 3일부터 주가가 폭락하기 시작하더니 1만선 밑으로 내려앉았다. 극도의 신용경색으로 기업들이 유상증자는 물론이고 회사채 발행도 어려운 상황이다. 금융권에서 자금을 조달하려 해도 유동성 확보에 급급한 은행들은 대출을 해주지 않는다. 해준다고 해도 높은 금리를 물어야 한다.
미국 금융위기 전개를 거의 정확히 예측했던 뉴욕대 루비니 교수는 “기업들의 자금조달 창구가 막힌 것은 두려운 일”이라며 “부채 만기 연장을 하지 못하는 기업들의 많은 수가 유동성 공급로가 막히면서 디폴트(채무불이행)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는 “만약 기업 부문의 자금 조달이 지금처럼 계속 막힌다면 대공황과 유사한 경제적 붕괴 위험으로 치달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기업들만 자금 조달길이 막힌 것이 아니다. 캘리포니아 주는 채권발행이 안되자 “경찰, 소방서 공무원들의 급여를 2주째 주지 못하고 있다”면서 연방정부에 70억 달러 지원을 긴급히 요청한 바 있다.
문제는 미국이 이 같은 위기확산을 막을 뚜렷한 방법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JP 모건 체이스 보고서는 금융기관 손실이 이미 1조 7,000억 달러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런 마당에 7,000억 달러 구제금융은 턱없이 모자라 보인다. 예금자 보호한도를 10만 달러에서 25만 달러로 늘리고, 자금조달이 어려운 기업들의 기업어음(CP)을 직접 매입하며, 10월말 추가로 기준 금리 인하를 할 수 있다는 등의 대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전혀 상황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다.
미국 국민들이 느끼는 경제위기 체감도는 훨씬 더 크다. 지난 10월 6일 CNN이 발표한 여론 조사에 의하면 “대공황이 다시 찾아올 수 있다”고 응답한 미국 국민은 59퍼센트나 되었다. 주택담보 대출 연체자가 500만을 넘고 실업자가 940만을 넘었다. 공식 실업률은 6.1퍼센트이지만 구직단념자 등을 포함한 실질 실업률은 이미 10퍼센트를 넘어가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달러 거래가 중단된 한국
환율 폭등, 금리 상승, 주가 폭락, 펀드가치 폭락이 이어지고 있는 한국의 금융시장과 외환시장도 자금 경색이 극심한 미국 못지않다. 특히 환율폭등은 이미 우려할 수준을 훨씬 넘어서 1,300원 이상이 되었다. 올해 내내 환율은 달러가 강세이든 약세이든 상관없이 올라가고 있고 다른 통화에 비해 원화가치 하락이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이다. 지난 3개월(7월 15일~10월 6일) 동안 원화는 21퍼센트 하락했다. 이는 말레시아와 같은 신흥국 8퍼센트 절하는 물론이고, 가치가 많이 떨어진 파운드화 13퍼센트나 유로화 15퍼센트보다 훨씬 큰 것이다.
외환보유고 2,390억 달러가 충분한지 아닌 지는 의미가 없게 되었다. 사실상 달러 유통자체가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외국인이 주식투자 자금으로 달러로 바꾸어 회수해가고 있고 경상수지가 적자행진을 하고 있는 상황만이 문제가 아니다. 금융위기가 심화되면서 달러를 확보해 두려는 경향에 가속이 붙고 있는 것이다.
수출업체들은 수출해서 번 달러를 시장에 내놓지 않고 보유하고 있다. 은행 역시 외화 차입금 상환 등에 대비해서 달러를 확보해 두려고 분주하다. 해외로부터 외화차입이 극히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개인들도 마찬가지다. 유일하게 정부 혼자 매일 10억 달러 이상을 풀고 있지만 풀자마자 매입해 버리는 ‘달러 사재기’가 한창이다. 외환보유고만 까먹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극도로 경색되어 버린 외환시장 국면에서 외화채무와 외환보유고를 비교하면서 충분한 보유고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달러뿐 아니라 원화도 비슷한 상황이다. 기업들은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현금 보유고를 계속 늘리고 있다. 은행들도 뱅크런 사태에 대비해서 대출을 꺼리고 있다. 투신사와 같은 기관 투자가들은 펀드 환매 사태에 대비해서 자금을 투자하지 않고 묶어두고 있다. 이럴수록 금리는 올라가고 은행채와 CD금리를 비롯한 모든 금리가 뛰어 오르고 있는 실정이다. 달러화와 원화를 포함하여 기업들의 자금조달 통로가 모조리 차단될 수 있다는 우려가 기우에 그치지 않는 이유다.
더 이상의 진통제는 없다. 각자 살길 찾자?
그동안 경제의 금융화, 금융의 세계화로 특징지어진 신자유주의는 신용팽창을 동력으로 경제성장을 구가해왔다. 금융과 자본시장이 전 세계에 걸쳐 개방되고 자유화되면서 세계는 신용의 사슬로 복잡하게 얽혀 자금 순환구조를 형성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미국 금융위기와 신용경색이 전 세계로 파급되면서 신용으로 얽힌 경제의 모든 연결선들이 끊어지고 있다.
경제의 핏줄인 금융이 막혀가는 데도 불구하고 아직 ‘파국’이 오지 않고 있는 것은 왜일까. 1929년 대공황을 경험하고, 1980년 이후 반복되는 금융위기를 경험하면서 개발해낸 갖가지 위기 지연 장치들과 기법들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위기를 치유하지는 못했다. 그저 잠시 통증을 잊게 해줄 각종 진통제를 개발한 것일 뿐이다.
미국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초기에는 금리 인하와 유동성 공급이라는 진통제를 처방했다. 그러나 9개월간 5.25퍼센트에서 2퍼센트까지 금리를 연이어 내렸는데도 불구하고 금융위기는 확산되어갔다. 베어스턴스가 파산하자 미국 정부는 사후적인 선별구제라는 좀 더 강도 높은 진통제를 투입했다. 그러나 9월에 접어들면서 이마저도 약발이 먹히지 않게 된다. 미국 국민들의 저항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강도 높은 진통제인 7,000억 달러 구제금융을 밀어부쳤지만 법안이 통과되던 그 날 다우지수가 폭락했다. 진통제를 맞기도 전에 효력이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제 어찌할 것인가. 미국은 물론 한국 정부 정책의 신뢰성은 땅에 떨어졌고 기업, 은행, 가계는 각자 제 살길을 찾아가고 있다. 신용의 연결선들이 끊어진 상황에서 각자 위기에 대비해 현금을 쌓아두면서 생존의 길을 찾아나가고 있는 형국이다. 각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WTO, IMF, G8 등 한때 화려한 역할을 했던 국제기구들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다. 국가 간의 공조체제는 보이지 않으며, 서로 앞다투어 자국 은행의 예금자 보호와 자국 기업의 구제에 몰두하고 있는 형편이다.
진통제 투입으로 위기의 폭발이 지연되고, 그 동안 겪었던 위기에 대한 학습효과로 각자 위기관리를 하고 있기 때문에 1929년 대공황 같은 폭발이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을 ‘공황’이라는 말 이외에 뭐라고 불러야 할까. 적어도 경기침체(recession)을 너머 불황(depression)으로 넘어간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이런 와중에 이명박 대통령은 “현재의 상황은 1997년 IMF 외환위기 때와 많이 다르다”며 “이런 때일수록 국민들도 정부를 믿고 내외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는 데 힘과 지혜를 모아주었으면 한다”는 식의 발언으로 일관하고 있다. 처해있는 현실 인식이 제대로 되어 있는지 우려가 앞선다. 이명박 대통령과 강만수 재정부 장관은 말을 꺼내기만 하면 ‘선제적 대응’을 수없이 반복했다. 그러나 진정으로 ‘선제적 대응’을 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더 한심한 것은 이 와중에 외환위기 시절의 금모으기 운동을 흉내 내며 ‘달러 모으기 운동’을 벌이자는 주장도 들린다. 국민들이 달러를 모아야 할 정도라면 이미 외환위기는 온 것이 아닐까?
산소호흡기 단 미국 경제, 7천억 응급치료로 살아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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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사연-오마이뉴스 공동기획] 구제금융법 통과 이후 미국 경제와 한국 ① |
2008-10-06 ㅣ 새사연 연구센터 |
우여곡절 끝에 지난 10월 3일, 이라크 전쟁비용 6,500억 달러를 뛰어넘는 7,000억 달러 구제금융 법안이 미국 하원을 통과하고 대통령 서명까지 마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대미문의 금융위기와 가속이 붙은 경기침체는 좀처럼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는 사이 금융위기의 여파는 환율 급등과 외환시장 불안, 외국인 주식 매도와 주가 폭락, 수출둔화와 경상수지 적자행진 등 다양한 경로로 우리경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시장만능주의 파산’과 ’규제 풀린 신자유주의 종언’이라는 주장이 거침없이 나오고 있는 지금, 미국 정부 최후의 대책이라고 할 구제금융법안 발효를 분기점으로 미국발 금융위기와 세계경제 침체는 새로운 국면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과연 7,000억 달러 투입으로 1년 넘게 지속된 금융위기를 잠재우고 실물경제를 회복시킬 수 있을까? 또한 미국식 자본주의라는 거인이 쓰러져가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정부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는 미국식 모델을 여전히 밀어붙일 수 있을까? 새사연과 오마이뉴스는 공동기획으로 <구제금융법 통과 이후 미국 경제와 한국>을 연재해 이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풀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7천억 달러 구제금융, 산소 호흡기를 달다
“경제의 동맥이 막혔다. 이제 심장마비가 올 것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인 벤 버냉키가 구제금융(Bailout) 법안 통과를 호소하며 의회에서 한 발언이다. 의회 통과를 압박하기 위해 과장된 표현기법을 동원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1929년 대공황 전문가였던 버냉키의 절박한 심정이 반영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지난 9월은 일백년 전통의 투자은행들이 연이어 간판을 내리고 금융위기가 전방위적으로 확산되었던, 미국 경제사에 유례가 없었던 한 달이었다.
| 미국 신자유주의의 심장인 월가의 금융시스템을 회생시키기 위해서, 미국 정부는 최후의 대책으로 7,000억 달러의 세금을 월가의 부실자산에 투입한다는 카드를 꺼냈다. 그러나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인 월가의 금융회사들에 대한 징벌은 없고 구제만 있었던 재무부의 법안에 미국 국민들은 분노했고, 심장마비 직전의 금융시스템에 산소호흡기를 대는 응급치료를 거부하기도 했다. 폭스 비즈니스 닷컴이 공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 국민의 64퍼센트가 구제금융을 찬성한 의원들에게 표를 주지 않겠다고 응답했고, 표를 주겠다고 답한 국민은 10퍼센트에 불과했다. 자신의 지역구 의원들에게 반대표를 행사하라고 이메일을 보내고 전화를 거는 미국 국민들이 쇄도했다. 11월 4일 대선과 의회 중간 선거를 앞두고, 유권자들의 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미국 정치인들은 결국 9월 29일 투표에서 구제금융법안을 찬성 205표, 반대 228표, 기권 1표로 부결시켰다. 부랴부랴 성난 미국 국민을 위한 민심 수습책을 몇 가지 끼워 넣고 이례적으로 상원투표를 먼저 거치는 등 우여곡절 끝에, 법안 발의 13일 만에 ‘2008 긴급경제 안정화 법령(Emergency Economic Stabilization Act of 2008, EESA)’이라고 명명된 451쪽 분량의 구제금융법안은 10월 3일 하원을 통과했고 그날로 부시대통령이 법안에 서명함으로써 일단락이 되었다. 심장마비 직전의 상태로 응급실에 실려온 미국 금융시스템이 간신히 산소호흡기를 달게 된 순간이다. 일찍이 없었던 초대형 외과수술 집도를 맡은 폴슨 장관 그러나 법안 통과는 시작에 불과하다. 일단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과 실러 베어 연방예금보험공사(FDIC) 의장이 거들어서 월가의 금융시스템을 중환자실로 이송시킨 것 뿐이다. 이제 7,000억 달러라는 엄청난 수술비 사용을 허락받고 거의 ‘백지수표’나 다름없는 광범위한 권한을 위임받은 헨리 폴슨의 집도 아래 진행될 대수술이 남아 있다.
폴슨 장관이 첫 번째로 해야 할 대수술은 바로 부실 자산을 잘라내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부실자산인가. 도려낼 환부를 얼마나 신속하게 판단할 수 있는가. 얼마나 걸릴지 모를 수술기간 동안 다른 부위가 썩어가는 것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수술비는 7,000억 달러면 충분한가. 결정적으로는 이번 종양을 만들어냈던 장본인인 투자은행, 그 중에서도 으뜸인 골드만삭스 최고 경영자 출신인 헨리 폴슨 장관이 과연 집도를 책임질 자격과 능력이 있는가. 수백 년 자본주의 역사에서 일찍이 없었던 초대형 외과수술이 얼마나 걸릴지, 얼마나 성공적으로 진행될지를 예측할 수 있는 명의는 불행하게도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중환자실로 들어갔다는 것만으로는 월가 자신들도 안심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법안이 하원에 통과된 지난 3일에도 뉴욕 다우지수는 종가기준 1.5퍼센트(157포인트) 하락한 10,325포인트로 마감했다. 불안한 그림자는 여전히 월가를 떠나지 않고 있다. 우선, 수술해야 할 환부를 판단하는 것조차 상당한 시간과 복잡한 절차를 필요로 한다. 재무부가 국채를 동원하여 인수할 부실자산을 평가하고 인수방법과 절차를 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부실자산이 뭔가. 설계한 사람들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하는 악명 높은 파생상품들이 아닌가. 우량 모기지부터 불량 모기지까지 다양하게 존재하는 모기지 채권을 기초자산으로 설계된 약 6조 달러 가량의 MBS증권들과, 이걸 다시 섞어서 만든 2조 달러 이상의 1차 CDO증권과 2차 CDO증권들, 그리고 이들 파생상품에 최고의 신용등급을 부여하기 위해 들었던 보험상품인 62조 달러 규모의 각종 CDS 상품들 가운데 부실자산 여부를 가려내고 적정한 매입 가격을 산정해야 한다. 그뿐이랴. 이들 파생상품을 한 두 개의 금융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수백 개의 금융회사들이 자기 자금의 수십 배를 서로 차입(leverage)하여 나눠서 보유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단지 몇 개의 대형 금융회사들의 자산평가만 해도 수개월이 걸릴 판이다. 자칫 잘못된 자산평가를 하게 되면 순식간에 유사한 유형의 자산들이 시장에서 턱없이 높게 가치가 매겨지거나 반대로 되면서 전체 부실자산 크기가 요동을 치며 변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재무부가 자산평가를 하고 있는 시간에도 월가의 시계는 멈추지 않는다. 신용 경색은 계속되고, 파산하는 기업들이 생겨나며 그 때마다 부실자산 규모 자체가 달라질 것이다. 지금까지 사적 기업이면서 공적 기관행세를 했던 신용평가기관들인 무디스, S&P, 피치 등은 이번 금융위기의 공범들이니 이들에게 평가를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알려진 바로는 재무부가 5~10개 정도의 자산평가회사와 계약을 하고 여기에 법률과 금융, 회계 전문가들을 동원하여 부실자산 매입을 위한 세부절차에 들어갈 예정이며 곧 자세한 방안이 나올 것이라고 한다. 토니 프래토 백악관 대변인은 “재무부가 가능한 빨리 부실자산을 사들이기를 원하고 있지만 그것은 복잡한 작업인 만큼 최소 몇 주가 걸릴 것”이라며 그 때까지 참고 기다리라고 호소하고 있다. 정말 몇 주만 지나면 해결이 되기는 할 것인가. 월가를 위한 대수술비 7천억 달러, 그것이면 족한가
그렇다 보니 두 번째 문제, 즉 7,000억 달러면 수술비로 충분한가 하는 의구심이 다시 커질 수밖에 없다. 이미 베어스턴스 구제에 300억 달러, 패니매이와 프레디맥에 2,000억 달러, AIG에 850억 달러 투입이 결정되었고 추가로 7,000억 달러 지불을 의회로부터 약속받았지만 누구도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애초에 부실자산 규모를 제대로 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국제통화기금(IMF)이 워킹페이퍼 “Systemic Banking Crises: A New Database(2008년 9월)"를 통해 지난 30여 년 동안의 세계 금융위기를 분석한 결과 은행위기를 해결하는 데 평균 53개월, 즉 4년 이상이 걸리며 비용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13.3퍼센트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이 기간 동안 실질 GDP도 약 20퍼센트 이상 추락한다고 한다. 지금까지 들어간 자금에 앞으로 투입될 7,000억 달러를 합해도 미국 GDP 14조 달러의 10퍼센트인 1조 4,000억 달러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IMF의 분석마저도 과거의 사례를 통해 유추한 것일 뿐이다. 백년 만에 올까 말까한 위기라고 하지 않는가. 이보다 훨씬 강도가 낮았던 과거의 경험에서도 GDP의 10퍼센트를 훨씬 넘는 자금이 들어갔던 것이다. 고려대 박영철 교수도 지난 10월 1일 “미국의 금융위기와 한국의 대응”이라는 토론회 발표 자료에서, 부실자산을 보수적으로 계산해도 최저 2조 달러이고 7조 달러까지도 올라가는데 문제는 매일매일 부실자산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라며 7,000억 달러 규모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인 바 있다. 그러나 정작 더 큰 이슈는 세 번째 문제인데, 이들 금융회사들을 미국 국민 세금으로 살려주기만 하면 이들이 과거의 오류를 바로잡아 다시는 이 같은 금융사기 행각을 벌이지 않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미국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고 의심하고 있는 대목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 미국 재무부가 예정하고 있는 외과적 대수술이란 금융이라는 순환기 계통의 악성질병을 근원적으로 치료하려는 것이 아니라 당장 살려놓고 보자는 일종의 심장 소생술이라고 할만하다. 미국 정부당국자들도 인정하듯이 당장 살려놓는 것이 우선이지 재발방지를 위한 구조적인 금융재편은 손도 쓰고 있지 못한 형편이라는 것이다. 미국 정가와 학계에서 차제에 규제 풀린 금융시스템에 대한 새로운 규제와 감독체제, 투명한 경영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아직은 이들 주장이 어떻게 구체적인 제도로 월가를 통제할지는 전혀 결정된 바가 없다. 2009년 말까지 한시적으로 집행되는 이번 구제금융 법안에도 이들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단지 현재의 추세로 보자면 일차적 충격대상에서 비켜나 있는 대형 상업은행들에게 부실 투자은행이나 모기지 업체들을 몰아주는 방식으로 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박영철 교수의 지적처럼 부실이 상업은행으로 확장되는 것이며, “미국의 지역은행 300개 중 100개의 파산이 시간문제라고 하는 등 금융부실이 투자은행에서 상업은행으로 넘어가는” 것을 조장할 가능성마저 배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진정한 금융위기 수습책이라고 봐야 할 금융규제를 위한 포괄적인 제도적 대책은 어느 세월에 나올 수 있을까. 11월 4일 대선이 끝난 후에 수술팀이 교체되면 근본적인 치유책이 준비될 수 있을까. 당장 금지했던 공매도 규제를 3일 법안통과와 함께 해제하겠다고 발표하고 있는 걸 보면 그리 낙관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심장수술만으로 미국 신자유주의 거인을 살릴 수 있을까
2007년 초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로 시작된 이후 1년이 훨씬 넘게 금융전반의 부실과 파국이 오고 있는 동안 다른 부위들은 멀쩡했을까. 유감스럽게도 전혀 그렇지 않다. 실핏줄이 터지고 동맥이 경화되고 심장까지 증세가 전이되는 동안 미국 신자유주의라는 몸통 자체가 병들고 있었고 현재 순환기 못지않은 중병 초입에 들어서고 있다. 사실 진짜 구제금융이 필요한 부분은 바로 미국 경제의 몸통인 실물경제다. 미국 경제의 뼈대라고 해야 할 제조업들은 이미 실질적인 경기하락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미국 공급관리자협회(ISM)에서 10월 1일 발표한 9월 제조업지수가 7년만에 최저치를 기록했고 공장 주문도 2년 만에 최대 감소폭을 나타냈다. 제조업의 상징인 자동차 기업들도 9월 미국내 매출이 26퍼센트 급감했다고 발표했다. 이런 상황에서 월가의 신용경색은 미국 기업들의 정상적인 자금 조달 경로마저 원천봉쇄를 하고 있는 셈이 되었다. 자본시장에서 기업공개나 유상증자 등이 거의 불가능해진 것은 물론 회사채 발행시장과 기업어음시장(CP)도 얼어붙었고, 은행을 통한 기업 대출은 고사하고 은행에 예치해 두었던 자금마저 빼내야 하는 실정이다. 그러다 보니 투자등급이 양호한 비금융 회사채 발행건수도 지난 9월 105억 달러에 불과했다고 톰슨로이터는 밝혔다. 지난해 같은 기간의 410억 달러에 비해 25퍼센트로 쪼그라든 것인데, 초우량 기업인 GE조차 신용경색 여파로 지난 1일 120억달러 신규 보통주 발행에 나서기도 했다 현재 미국의 기준 금리는 지난 5월부터 2퍼센트를 유지하고 있지만, 유동성 경색으로 인해 은행들 사이에서 단기 거래에 적용되는 리보(Libor)금리는 9월 30일자로 6.87퍼센트를 기록하고 있는 실정이다. 10월 말에 기준금리를 다시 인하한다고 해도 호전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지난 30년 동안 금융이라는 순환기 계통만 기형적으로 비대하게 발달해왔던 신자유주의가 지금 뼈대와 몸통까지 짓누르며 경제전체를 마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번 금융위기의 시작 지점이라고 할 수 있는 주택경기의 경우 진정되기는 커녕 최근 더욱 빠르게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미국 20개 대도시의 주택가격을 반영하는 ‘케이스 쉴러 20지수’는 지난 7월 전년 동월 대비 16.3퍼센트가 하락했다. 이어지는 기획에서 상세히 다루겠지만 보다 본원적인 문제는 미국경제의 근본이라고 할 미국 국민들의 고용과 소득이 좀처럼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구제금융법이 통과되던 10월 3일 미국 노동부가 발표한 9월 비농업 부문 고용은 15만 9,000개가 줄어들어 올해 9개월 동안 총 76만 개가 감소했다. 공식 실업자만 천만 실업자에 근접하고 있는 것이다. 실업률은 8월에 이어 9월에도 6.1퍼센트로 고공행진을 계속하고 있는 중이다. 이처럼 미국 경제 전체로 병이 전염되기 시작했지만 구제금융법은 주택시장이나 실물경제 안정화와 관련된 어떠한 요소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아직도 미국 경제는 응급실에 있다. 당장은 금융부실이 심각하여 응급조치가 필요했던 상황이었다. 실물경제 부문은 아직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여기에는 수술비가 추가로 얼마나 들어갈지 알 수도 없다. 응급실을 거쳐 중환자실에서 심장에 경색된 혈관을 수술한 뒤 실물경제라는 몸통은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지 정해진 것이 없는 상태다. 내심 미국 재무부의 기대는 금융부실 안정화 → 신용경색 완화 → 기업 자금조달 회복 → 기업경기 활성화 → 고용과 민간소비 회복이라는 메커니즘이겠지만, 이렇게 순환기 응급조치로 경제 전체가 선순환을 타면서 살아나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 보인다. 금융부실 수술만으로 끝난다면 미국경제는 향후 장기 입원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하이에나와 장의사들의 시대가 왔다 구제금융법안 통과 여부를 둘러싸고 전 세계가 미국 의회를 주시하고 있는 동안, 월가는 부실로 먹잇감이 된 여섯 번째 규모의 와코비아 은행을 차지하려는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지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월가의 금융위기가 전방위로 확산되던 지난 9월 와코비아 은행 역시 부실에 몰려 인수자를 구하는 처지가 되었다. 자신도 상당한 모기지 부실을 안고 있던 씨티그룹이 나섰고 연방예금보험공사(FDIC)의 지원 아래 와코비아의 은행부문을 21억 달러(주당 약 1달러)에 인수하는 합의를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은 지난 10월 3일, 미국 웰스파고 은행은 주당 7달러(인수가격 151억 달러)라는 훨씬 좋은 조건으로 미국 정부지원도 필요 없이 와코비아 은행 전 부분을 인수하겠다고 나섰고 와코비아는 당연히 동의를 했다. 씨티그룹은 즉각 씨티그룹과 와코비아가 배타적 협상(exclusivity agreement)을 하기로 했으니 웰스파고와의 합의는 무효라고 반박하고 나섰고, 분쟁이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10월 4일 연방 대법원이 나서서 씨티그룹이 와코비아의 배타적 협상자이니 법원의 추가적인 명령이 있을 때까지 씨티그룹과의 협상안을 유지해야 한다고 비상명령을 내린 상태다. 와코비아를 둘러싼 씨티그룹과 웰스파고의 쟁탈전은 앞으로 월가에서 어떤 풍경이 벌어질 것인지를 잘 암시해주고 있다. 화려했던 월가의 주요 금융회사들이 이후에도 계속 무너져 내릴 것이고 그 와중에 상처만 입고 생존한 금융회사들은 무너진 다른 기업들을 인수합병하여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는 문자 그대로 정글의 살풍경이 벌어질 전망이다. 현재로 보아서 미국 재무부의 7,000억 달러는 그나마 힘센 금융기업들이 인수합병 전쟁을 치룰 실탄을 대는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을 수도 있다. 특히 지난해까지만 해도 미국 기업 인수합병의 1/3을 차지하면서 월가의 떠오르는 스타로 동경의 대상이 되었던 사모펀드들이 지금은 레버리지가 극도로 위축되어 숨죽이고 있지만, 월가의 고물상으로 자임하고 나서면서 인수합병을 주선하거나 주도할 가능성도 있다. 외환위기로 초토화된 한국 금융시장에 소리 없이 들어와 뉴브리지 캐피탈이 제일은행을, 한미은행을 칼라일이, 그리고 외환은행을 론스타가 가로채서 구조조정을 거친 후 비싸게 팔아버린 일이 본토인 미국에서 재연되지 말란 법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살아남은 투자은행들은 먹고 먹히는 인수합병 전쟁의 와중에서 인수합병 자문을 명목으로 수수료를 챙기고자 할 수도 있다. 명성 높은 총잡이들과 보안관들이 모두 없어진 월가에 당분간 하이에나와 장의사들이 휘젓는 19세기 미국 서부개척시대가 펼쳐지리라 상상하는 것은 허황될까.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새사연)은, 우리 정부가 월가의 고물상들이 던지는 미끼에 현혹되어 철없이 ‘월가 쇼핑’을 운운하며 부실한 금융기업을 헐값에 인수해 보겠다거나 미국의 고급 금융인력을 스카웃하겠다고 기웃거리는 어리석음을 보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은 러시아를 방문한 지난 30일, “미국 의회에서 (구제 금융안이) 통과되면 시장이 안정될 것으로 본다”며 “우리 정부가 긴급한 상황에 대해 선제 대응을 해 나간 것이 지금 생각하면 아주 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현실감이 극히 떨어지는 주장을 하고 있는 마당이니 월가보다 우리의 상황이 더 아찔해 보인다.
고삐 풀린 부동산과 금융, 국민경제 벼랑 끝으로 내몬다 |
[이슈해설] 이명박 정부, 부동산과 금융 규제완화 서두를 일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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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30 ㅣ 김병권/새사연 연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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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는 미국 금융위기와 실물경제 위기를 수습하고자 급하게 미국 정부가 내놓은 ‘7,000억 달러 구제금융 법안’이 9월 29일 의회에서 부결되었다. 부시 대통령이 직접 나서 법안 통과를 호소했고, 헨리 폴슨 재무장관을 비롯하여 메케인 공화당 후보와 오바마 민주당 후보까지 거들며 나섰다. 정부관리들은 입에 담지 못할 ‘대공황 위험’까지 운운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러나 당연히 통과되리라 믿었던 법안은 보기 좋게 부결되었다. 즉시 월가는 대혼란에 빠졌고 주가는 무려 7퍼센트에 달하는 777포인트나 폭락했다. 이 여파는 대서양 건너 유럽으로 확대되어 영국을 필두로 한 금융기관 파산이 줄을 잇고 있다. 이제 세계는 미국이 저지른 엄청난 금융사기극을 막아낼 방도를 잃고 사분오열하고 있다.
자멸한 미 금융시스템, 국민들도 외면
부결의 결정적 원인에는 금융사기극에 분노한 미국 국민들과 선거를 앞두고 지지표를 저울질 해야 했던 미국 의원들이 있었다. 미국 전체 1억 2,000만 가구 가운데 모기지 대출을 받은 가구가 5,000만, 문제의 서브프라임 대출을 받은 가구는 전체 모기지 대출 가구의 15퍼센트에 해당하는 약 750만 가구다. 이 가운데 약 500만 가구가 모기지 대출 연체 내지는 주택 차압을 당하여 생활기반의 붕괴 위기에 내몰려 있다.
고수익을 좇던 미국 금융회사들은 자신들이 고안하여 유통시킨 각종 파생상품과 이의 대규모 거래를 위해 끌어들인 엄청난 차입으로 인해 자신들 스스로 금융시스템을 붕괴시켜 버렸다. 이로 인해 월가뿐 아니라 특히 미국 국민들은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런데 7,000억 달러 구제금융은 그 최대 피해 당사자인 미국 국민이 아니라 문제를 발생시킨 주범인 월가의 금융회사들을 구제하도록 설계되었다. 처음에는 이들 주범에 대한 어떤 ‘징벌 조치’도 없이, 이들 자산에 대한 어떤 제재도 가하지 않고 오로지 국민의 세금을 쏟아부어 이들을 ‘구제’해 주는 것이었다. 거센 비판 여론이 일자 나중에서야 경영자 스톡옵션 제한, 부실자산 인수기업 지분 인수권 확보 등을 끼워넣었지만, 이런 조치는 미국 국민들의 분노를 잠재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문제를 일으킨 주범들에 대한 어떤 징벌도 없이 그들을 구제해 주면서 막상 최대 피해자인 미국 국민들에 대한 구제대책은 없다. 이라크 전쟁비용 6,500억 달러를 뛰어넘는 7,000억 달러 세금을 투입하는 법안에 찬성할 국민이 몇이나 될까. 폭스 비즈니스 닷컴이 공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 국민의 64퍼센트가 구제금융을 찬성한 의원들에게 표를 주지 않겠다고 응답했고, 표를 주겠다고 답한 국민은 10퍼센트에 불과했다. 미국 여론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다. 결국 11월 4일 대선과 의회 중간 선거를 앞두고 미국 정치인들은 표를 계산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 구제금융 법안은 찬성 205표, 반대 228표, 기권 1표로 부결되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피해를 본 미국 국민들에 대한 대책은 고사하고 다시 국민 세금을 동원하여 문제를 일으켰던 금융회사를 살려주는 것이 아무리 못마땅하더라고, 자칫 미국 전체를 공멸할 수도 있는 금융시스템을 복원시키는 것이 먼저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정도의 양해를 구하기에 30여 년 된 신자유주의는 미국 사회의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미국민의 불신을 너무 키운 것으로 보인다. 이 또한 미국 신자유주의와 이를 선도했던 미국 금융회사들의 자업자득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게다가 미국 정치인들의 무능함과 친기업적(금융적) 행태가 문제 해결을 가로막았다. 경제 위기가 정치 위기로 번져가고 있는 상황을 목격하게 된다.
미국 보고도 한국은 부동산과 금융 규제 풀려나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가. 한국 정치인들은 더 나을 수 있을까. 과거 전통적 동양사상에 따르면 통치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치산치수’라고 했다. 이것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자면, 부동산과 금융 관리라 할 만하다. 현대에서 가장 민감한 토지 문제는 부동산이고, 현대 금융은 산업의 혈맥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기에 부동산과 금융은 특히 국가에 의해 철저히 관리되어야 하고 감독되어야 한다. 완전히 규제가 풀려버린 부동산과 금융이 잘못 만나면 경제에 어떤 파장을 몰고올지 자본주의 종주국인 미국을 통해 생생하게 보고 있다.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이 현실이 이런데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는 고집스럽게 부동산 경기 부양정책을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내고 있으며, 금산분리 완화를 포함한 금융규제 완화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이러는 동안 외환시장은 극도의 불안한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고, 중소기업들의 키코(KIKO) 파생상품 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태산 엘시디를 필두로 한 우량 중소기업들의 줄파산이 예고되고 있다. 한계 상황에 내몰린 600만 자영업자들의 생존은 이제 더 이상 놀랄 일도 아니게 되었다.
중소기업과 자영업 살리기를 외면하면서 끝내 부동산과 금융의 잘못된 만남을 이끌고 있는 정부는 어떤 시간대를 살고 있는가. 미국 정치도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 그 공멸의 길을 한국 정치는 눈으로 보면서도 스스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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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의 금융정책에는 금융도 국민도 없다 |
[2008년 하반기 초점과 전망⑤] 자통법 앞둔 한국 금융시장의 지각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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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8 ㅣ 이한진/진보금융네트워크 준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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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자본시장통합법 시행을 앞두고 여의도 증권가에 지각변동이 일고 있다. 변화의 주된 방향은 자본의 성격과 국적을 불문하고 한국 증권업에 대한 선호도가 매우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여의도 증권가로 많은 돈이 몰리고 있다는 점이다. 증권사 상호간의 M&A보다는 신규진출과 업무영역 확장이 대세를 이루는 가운데 진입 형태는 크게 세 가지 특징을 보이고 있다. 첫째, 은행을 중심으로 한 기존 금융업계의 경우 주로 신규 설립을 선호한다는 점이다. 둘째, 국내 산업자본의 경우 초기 비용 부담에도 불구하고 기존 증권사를 인수함으로써 속도에 역점을 두고 있다. 셋째, 외국자본의 경우 현지사업을 강화하기 위하여 한국 금융업에 자금을 집중 투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의도(자본시장)로 몰리는 돈 돈 돈
금융업계의 증권업 신규진출 및 업무영역 확장 의지는 지난 5월 9일 금융위원회의 증권업 예비허가 심사 결과가 잘 보여주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신규 설립을 신청한 12개 회사 가운데 8개사에 대하여, 업무영역 확대 등을 신청한 기존 3개사에 대하여는 2개사에 대하여는 예비허가를 승인한 바 있다. 금융위원회는 7월말까지 이들 예비허가 회사들에 대하여 본 허가를 추진할 예정이다.
이렇듯 신규 설립이 급증하고 있는 데에는 정부의 정책기조 변화가 크게 한 몫하고 있다. 애초 정부는 자본시장통합법 제정 필요성의 하나로 증권업계의 구조조정이 미흡하여 업체가 난립하고 있다며, 법 제정을 계기로 겸업화 및 대형화를 추동함으로써 증권업계 내부의 자발적인 인수ㆍ합병을 유도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증권업계와 시장에서는 자본시장통합법 제정에 따른 위기 요인보다는 각종 규제 완화에 따라 미래 기회요인이 더 클 것으로 분석함으로써 증권사 주가가 급등하는 등 경영권 프리미엄이 급증하게 되자 시장 내에서의 ‘자율적 구조조정’은 말 그대로 공염불이 되어 버렸다.
이에 따라 금융위원회의 증권업 구조조정 정책기조는 급변하게 된다. 자본시장통합법 시행령을 통하여 신규 설립 기준을 대폭 완화하는 방향이 바로 그것이다. 자율적 구조조정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신규 진입을 대폭 확대하여 시장 내 경쟁을 격화시켜 자연스럽게 구조조정을 가속화시키겠다는 속셈인 것이다. 실제로 시행령에서는 매매, 중개, 집합투자(자산운용), 신탁, 투자자문, 투자일임 등의 6개 업무 분야를 모두 수행할 수 있는 대형금융투자회사의 설립 자기자본 기준을 당초 예상보다 크게 낮춘 2000억 원으로 최종 확정했고, 자산운용업의 자기자본 기준은 100억 원에서 80억 원으로, 위탁매매업의 경우 30억 원에서 10억 원으로, 투자일임업은 30억 원에서 15억 원으로 하는 등 진입장벽을 대폭 낮추었다.
이제 시작에 불과한 산업자본과 외국자본의 금융시장 유입
산업자본의 증권업 진출은 기존 증권사를 직접 M&A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바, 진입비용보다는 진입속도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지난해 3월 유진그룹의 서울증권인수 이후 현대차그룹, 두산그룹, 현대중공업의 증권사 인수가 뒤를 잇고 있다. LS그룹의 경우 온라인 증권사인 이트레이드증권 인수를 추진 중에 있다.
게다가 증권가에서는 롯데그룹, 아주그룹, GS그룹 등이 향후 증권사 M&A의 주체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있다. 더구나 이들이 증권사 신규 설립 신청을 하지 않은 점으로 볼 때 이들 또한 기존 증권사를 인수함으로써 보다 빠른 시간 내에 자본시장에 정착하겠다는 전략을 구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외국자본 또한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실제로 올 1사분기 외국인 직접투자액의 절반 이상은 금융업에 집중됐다. 올 1사분기 금융 분야 외국인 직접투자액은 13억 6,800만 달러로 전년 동기대비 235%나 급증했는데, 이는 총 외국인 투자액 27억 2,000만 달러의 50.4%에 해당하는 규모이다. 이러한 현상은 참여정부에 이어 이명박 정부 또한 금융업에 대한 과감한 규제개혁(특히 증권 및 보험관련업)을 약속하며, 금융기관의 이익극대화 논리를 적극 옹호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이로 인해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금융업은 제조업에 비해 매우 매력적인 투자대상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들 투자는 금융업 중에서도 규제 완화가 적극 추진되고 있는 보험 및 증권관련업에 집중되고 있다. 금융위원회 보도자료에 따르면 1,000만 달러 이상의 금융 분야 투자는 총 19건으로 분야별로 살펴보면 보험은 7건, 증권 2건, 자산운용 2건, PEF 2건, 비은행 5건, 은행은 1건인 것으로 나타났다. 투자자 국가별로 보면 영국(6억 달러), 미국(3억 7,000만 달러)이 전체 투자의 70% 이상을 차지한 가운데 주요 투자 목적은 점포 신설 등 영업력 확장을 위한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외국자본의 주된 전략은 한국 현지사업 강화임을 알 수 있다.
거대한 후폭풍 예고 - 대규모 구조조정과 외국 금융기관에 의한 시장잠식
국내 증권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변화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과잉ㆍ중복투자가 몰고 올 후폭풍과 외국 금융자본에 의한 시장잠식이라 할 수 있다. 애초부터 정부는 동북아 금융허브 전략의 일환으로 국제금융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 대형투자은행(IB)을 육성해야 한다는 논리에 과도한 집착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증권업 신규 허가로 2009년 증권사는 62개사로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금융위원회가 증권업 신규 진입을 허용한 것은 2001년 이후 만 6년여 만에 처음이다. 국내 증권사의 수는 지난 2001년 64개로 정점을 보이다가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2006년 54개사까지 줄었다가 다시 8개사가 증가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금융위원회는 자본시장통합법 시행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신규진입을 허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어 증권업계의 경쟁은 날이 갈수록 격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한편으로 정부는 퇴출기준도 강화하고 있다. 자본시장통합법 시행령에 금융투자회사의 퇴출기준인 ‘유지조건’을 신설해 자기자본 기준의 70%를 밑돌게 되면 인가ㆍ등록을 취소하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정부의 입장은 진입장벽 완화로 과당경쟁을 유도하여 시장에서 도태되는 업체는 약육강식이라는 정글의 법칙에 의거하여 걸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초 글로벌투자은행 육성을 위해 자발적인 인수ㆍ합병을 유도해봤지만, 기존 증권사의 경영권 프리미엄만 올라가고 대주주가 이에 안주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명분으로는 시장을 내세우면서 정부가 시장에 적극 개입하게 된 것이다. 금융위원회 홍영만 자본시장정책관의 “신규진입 및 영업확대에 따라 연내 1,100명 이상의 양질의 일자리가 창출되고, 증권산업 내 경쟁강화 및 라이센스 프리미엄을 낮춤으로써 시장의 역동성과 자율성을 활용한 증권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도모할 수 있다”는 발언 내용이 이를 잘 증명한다.
그렇다면 경쟁을 강화시켜 구조조정을 유도함으로써 소수의 대형투자회사와 특화된 중소투자회사로 시장을 재편하겠다는 정부의 발상은 어느 정도 현실성이 있는 것일까? 한마디로 장밋빛 환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금융허브 정책이나 자본시장통합법 제정 초기부터 구체적이고 단계적인 청사진도 없이 무모한 구호만 난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글로벌 투자은행의 육성을 통하여 금융허브로 도약하겠다는 정책기조에 대한 가치판단은 배제하고 판단하더라도, 한국 금융시장에는 이를 실현시킬만한 인적 역량도 물적 기반도 전혀 없다는 것이 구체적인 현실이기 때문이다. 정부 의도대로 성공적으로 글로벌 투자은행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사실 점진적이고 중장기적인 차원에서 치밀한 준비가 선행됐어야 했다. 국내 금융노동자의 교육ㆍ훈련을 통하여 전문적 자질을 높이고, 신상품 개발능력 제고를 통하여 편중된 수익구조를 개선하는 동시에 각종 리스크 관리능력이 사전적으로 개선되어야 국내 금융기관의 대내외적 신용과 신뢰가 확보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본적 인프라도 구체적 청사진도 전무한 금융허브 전략
이처럼 자본시장통합법은 동북아 금융허브 구축을 위한 최고의 매개수단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투자은행의 개념조차 분명하지 않은 상황이다. 대개의 사람들이 정의하는 투자은행의 기능은 현존하는 국내 증권사들이 주식, 채권과 같은 매개수단을 통하여 기업에 장기자금을 중개하던 기능에서 벗어나 자기계산 하에 투자하는 자기매매업무(Dealer)와 자기자본투자(PI, Principal Investment)를 본격화하는 것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제적인 투자은행들이 가지고 있는 경쟁력은 단순하게 자기자본의 규모가 크다거나, 이를 기반으로 기업들에게 싸게 자금을 조달해 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기업금융의 경쟁력은 해당 업체의 자금사정과 수요에 가장 적합하게 자금 조달구조를 만들어내고, 시장에서 이를 현실화시킬 수 있는 능력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결국 전통적인 금융상품이나 여러 가지 파생상품을 적절하게 조합하여 고객의 입맛에 맞는 상품을 만들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세계적인 IT 업계의 경쟁력이 단순하게 장비를 만드는 것에서 벗어나 솔루션과 패키지화함으로써 가능했다는 점과 내용적 측면에서 일맥상통한다.
규모의 경제와 정보의 비대칭성 문제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한편 국내 금융시장을 무조건적으로 개방하여 선진 금융기법을 배우고, 이를 통해 우리도 해외시장에 나가 막대한 수익을 창출함으로서 금융산업을 신성장동력화 하겠다는 발상 또한 자본시장의 작동 메커니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환상에 불과하다. 자본시장은 기본적으로 규모의 경제와 정보의 비대칭성이 작동하는 시장이기 때문이다. 규모의 경제가 작동한다는 말은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금융기관이 무조건 유리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금융기관들의 총자산 및 자기자본 규모는 국제적 금융기관들에 비해 현격한 열세에 놓여있다. 국내 은행 상위 4개사 총자산(평균 1,497억 달러)은 미국 상위 4개사(평균 11,166억 달러)의 13.4%에 불과하고, 국내 대형 증권사의 자기자본규모 또한 세계적 투자은행과 비교할 때 6% 수준에 불과하다.
정보의 비대칭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IMF나 세계은행 그리고 국제적 신용평가기관이나 국제적 투자은행들이 정보의 양과 질 모든 측면에서 국내 금융기관에 비해 현격하게 우위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기관투자자나 펀드매니저가 가지고 있는 정보가 일반 투자자 보다 앞서는 것과 마찬가지 맥락이다. 이러한 규모의 경제와 정보의 비대칭성 때문에 국내 금융기관이 제3세계에 나가 수익을 창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현재 국제 금융시장을 주무르고 있는 대형 투자은행이나 사모펀드, 헤지펀드들이 돈이 되는 시장을 한국 금융기관에게 양보할리 없기 때문이다.
보조인력으로 전락한 금융노동자의 암울한 미래
결국 정부의 조급증과 무모함이 국내 증권사의 대외 경쟁력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는 셈이다. 시장규모가 일정한 현실에서 업체 난립을 통한 과당경쟁은 수수료 인하 등의 출혈경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어 수수료 수입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국내 증권사의 입지는 점점 축소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단기적으로는 정부의 생각대로 고용창출의 효과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정부의 최종 목적지가 대형화와 전문화에 있는 한 양적 팽창이 해소되는 시점에서의 대규모 구조조정은 불가피하기 때문에 2~3년 후에는 과잉유휴인력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은행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었듯이 금융기관의 겸업화 및 대형화가 고용을 확대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국내 금융시장의 고용 불안정성이 점차 심화될 것이라는 점은 국내 금융노동자 대다수(약 87%)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정부 정책변화로 인하여 보조인력이라는 평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각종 정부 회의 자료를 통해서도 추론이 가능하다. 지난해 11월 증권업 허가 정책 운용방향이란 금융감독원 보도자료에 따르면 증권업 재인가 및 신규 진입 시 세부 심사항목에서 전문인력 확보와 관련하여 해외소재 유수금융회사 경력자(자산운용, IB관련, 리스크관리, 조사분석, 내부통제 등과 관련된 업무) 채용 시 가점을 부여하겠다고 한다. 제2차 금융허브회의 자료(07.07.18, 금융발전심의회 전문가 중심 개편)에는 “런던, 뉴욕에 상응한 금융여건 구축 위해 금융발전심의회를 해외 전문가 중심으로 개편하고 월가 출신 부총리 자문관을 영입”한다고 나와 있다.
기간제법 및 파견법 시행령 개정도 심상치 않다. 전문직 종사자는 사용기간이 2년을 초과해도 무기계약 근로자로 전환되지 않는 소위 기간제한 특례 적용 조항이나 표준직업분류표상 전문가와 준전문가는 파견대상에 포함한다는 내용이 이미 시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은행, 증권, 보험 노동자 모두 전문가로 분류되기 때문에 기간제한 특례나 파견대상에 포함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번 발표된 자본시장통합법 시행령에서 위탁가능업무의 범위를 본질적 업무까지 대폭 확대하고 재위탁까지 허용토록 한 것은 향후 구조조정과 관련하여 대개의 금융노동자가 비정규직 지위로 추락할 가능성이 매우 높음을 예고하고 있다. 지금 당장 인력 수요가 급증하고 연봉 올라간다고 안심할 상황이 아닌 것이다.
선진금융기법의 핵심은 신용위험의 재가공 및 위험전가 구조
이러한 변화는 국민경제적 측면에서도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이는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를 통해서 쉽게 추론할 수 있다. 미국의 금융시장은 서브프라임 사태가 본격화하기 전까지 그야말로 승승장구해왔다. 그리고 그 호황의 주된 요인은 신용파생상품을 포괄하는 구조화증권의 존재에 있다. 부동산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에 존재하는 각종 신용위험을 재가공하고 포장함으로써 적절하게 위험을 전가할 수 있도록 만든 파생금융상품의 눈부신 발전이야 말로 선진금융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규제완화와 더불어 진행된 금융자본의 자기 증식과 팽창은 너무도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다보니 다양한 파생금융상품이 금융감독 당국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되었다. 금융감독 뿐만이 아니라 금융기관 스스로가 금융의 파생화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의 정도를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 바로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의 본질인 것이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한국의 금융정책에는 금융의 안정성과 공공성을 확립함으로써 중장기적으로 국민경제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국가 차원의 정책적 지향이 없다. 배울 것은 배우고, 버릴 것은 버린다는 비판적 시각이 배제되다보니, 오로지 남는 것은 무조건적인 개방을 통한 선진 금융기법의 습득이라는 장밋빛 전망뿐이다. 금융세계화의 주도국인 미국에서조차 다양한 시행착오와 경험을 통하여 금융에 대한 규제와 통제는 국민경제적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깨닫고 새로운 규제 조치들을 강화하고 있다. 결국 우리가 진짜 배워야 할 것은 이처럼 금융산업은 규제산업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역지사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금융을 국민경제적 차원에서의 인프라나 시스템(금융의 공공재적 성격)으로 이해하는데서 벗어나 금융자본의 수익성을 중시하는 산업적 관점에 매몰되게 된 계기는 IMF 외환위기다. IMF 당시 초국적 금융자본은 유동성 제공의 대가로 한국 금융시장, 특히 자본시장의 무조건적인 개방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정치권력 스스로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논리를 적극 편승ㆍ수용함으로써 자본의 요구와 이해에 자발적으로 복무하게 된 것이다.
금융허브(금융중심지)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국내 금융시장의 축을 자본시장(직접금융, 특히 유통시장)으로 이동시킴과 동시에, 금융자본의 보다 자유로운 수익창출 활동을 보장함으로써 국제금융시장과의 연결고리를 더욱 강화하여 초국적 금융자본의 국내 유입을 촉진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재벌 등 국내 주요자본의 금융자본화를 촉발시켜 국내 자본도 초국적 금융자본의 국제적 흐름에 적극 동참시키겠다는 전략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자본시장통합법 제정과 보험업법 개정을 매개로하여 한미FTA 협상을 타결함은 물론 금융기관의 겸업화와 대형화를 적극 추동하고 있는 것이다.
효율적 자산배분자에서 자산운용자로 정체성을 바꿔가는 금융자본
금융세계화 이전의 금융시스템이 금융 수요자로서의 기업에 장기자금을 공급함으로써 장기적인 성장관계를 구축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면, 현재 금융세계화 국면에서의 금융자본은 단기적 관점에서의 수익극대화를 추구하기 때문에 자원배분자라기보다는 자금운용자로 그 본질적 역할을 바꿔가고 있다. 금융허브 전략 역시 자산운용업을 그 중심에 놓고 있다.
공기업 민영화의 문제도 금융허브 전략과 맥이 닿아있다. 자산운용업 중심의 금융허브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국내 금융시장에 존재하는 각종 규제를 철폐함으로써 해당 사업을 유치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한편으로 국내 자본시장의 파이가 충분히 커져야 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한국 자본시장으로 몰려들 국내외 자본들에게는 다양하고 충분한 먹거리가 제공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단기간 내 이들 자본의 욕구를 충족시킬 만한 먹거리에는 공기업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국민들의 실생활에 꼭 필요한 공공서비스의 질과 양이 앞으로 어떻게 되건 말건 공기업을 민영화하여 금융 시장에서 사고 팔리는 상품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공기업 민영화의 이유인 것이다.
이처럼 금융(세계)화된 사회의 금융기관이나 공적 기업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국가적, 사회적 차원의 목적의식은 외면하고, 사적 기업으로서 이익창출에만 몰두하도록 자본과 시장이 요구하기 때문이다. 한편 금융의 사유화는 산업자본의 금융자본화를 본격적으로 추동하게 되어 경제의 지속가능성을 위축시키고 양질의 일자리를 위협한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다.
이런 차원에서 생각할 때 이명박 정부의 금산분리 원칙의 단계적 폐지와 비은행 금융지주회사 설립 규제 완화는 반드시 막아야 한다. 자본시장통합법을 매개로 금산분리 폐지 및 비은행 금융지주회사 설립과 국책은행 민영화를 가속화하겠다는 것이 이명박 정부의 핵심적인 금융정책이기 때문이다.
금산분리 폐지 및 금융지주회사 설립 규제완화에 대한 강력한 대응 필요
역사는 금융의 핵심적 역할 중의 하나는 산업자본(기업)에 대한 평가와 감시의 역할임을 입증하고 있다. 과거 IMF 외환위기 당시 외환유동성의 위기가 무분별한 사업영역 확장 탓에 과도하게 비대해진 일부 재벌그룹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금융기관을 소유한 재벌들이 모기업의 도산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자회사인 금융기관을 사금고처럼 이용함으로써 국내 금융시스템 전반의 위기로 이어져 국민경제 파탄이라는 결과를 경험한 바 있기 때문이다. 실례로 대우그룹은 IMF 당시 금융계열사 서울투신운용을 이용해 불법적으로 7조 6,000억 원에 달하는 자금을 조달하여 사용함으로써 그룹의 위기를 국내 금융시장 전반의 위기로 확산시킨 바 있다.
금융위원회는 금산분리 폐지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감안하여 1차적으로는 사모펀드와 연기금의 은행 지분 보유 규제를 완화하고, 2단계로 산업자본의 은행 지분 보유한도를 상향조정하며 최종적으로 사전적 소유규제를 완전히 폐기하겠다면서 에둘러가는 입장을 밝히고 있지만, 시기상의 문제일 뿐 최종적 목표는 금산분리 완전 폐기이다. 금융위원회의 입장이 바뀌지 않는 한, 형식이야 어찌됐건 시간이 갈수록 산업자본의 금융기관 지배는 더욱 공고화되리라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고객의 돈으로 운용되는 금융기관의 속성을 무시한 금산분리 폐지
금산분리 폐지는 금융의 본질적 속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금융기관은 대부분 주주의 돈(자본금) 보다는 타인의 돈(고객의 돈)을 가지고 영업을 하므로 특정 대주주가 위험한 자산운용을 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2007년 9월말 기준 국내 금융기관의 총자산 합계액은 2,212조 원인 반면 자기자본(자본금+자본잉여금+이익잉여금)은 188조 원에 불과하다.
산업자본이 일단 금융기관을 지배하게 되면 대주주의 입장에서는 아주 적은 비용으로 막대한 자금을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얻게 된다. 금융기관이 부실화되어도 자본금이 적기 때문에 스스로가 치러야 할 자기비용도 적다. 그런데 제조업체와는 달리 금융기관이 부실화되면 수많은 불특정 다수의 금융이용자가 피해를 입게 되고, 해당 금융기관은 물론이고 금융시장 전반의 안정성을 해치게 되는 등 경제 전반에 미치는 효과가 막대하다.
거대 금산복합기업의 도산은 국민경제에 재앙으로 다가올 것
즉 산업자본인 모기업의 이해에 따라 금융기관의 자금이 기업의 무리한 확장이나 위험한 투자에 과도하게 동원된다면 해당 금융기관의 건전성 악화는 물론이고 금융시스템의 안정성을 위협하게 될 소지가 큰 것이다.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이 결합된 거대금산복합기업의 탄생은 IMF 당시 경험했던 대마불사의 딜레마를 다시 연출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거대금산복합기업의 도산은 국민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부실이 생겨도 이를 조기에 해결하기 어렵게 만들 것이다. 이는 결국 부실의 심화라는 결과를 낳게 되고 종국에는 금융시장 전반의 위기로 확대될 것이고, 종국에는 국민경제에 재앙으로 다가올 것이다.
한편으로는 금융기관의 이윤이 계열기업으로 이전될 수 있다는 문제도 존재한다. 이는 자회사인 금융기관이 모기업이나 계열기업에 적정가격 이하로 금융서비스를 제공하거나, 역으로 관계회사로부터 구입하는 상품 및 서비스 가격을 적정가격 이상으로 높게 구입함으로써 가능하다. 게다가 자회사인 금융기관으로부터 과도한 배당금을 갈취함으로써 금융기관의 안정성이 하락할 가능성도 있다.
다음으로는 기업 활동에 있어서의 공정한 경쟁이 훼손될 것이라는 점이다. 산업자본의 금융기관 소유는 그렇지 못한 기업과의 경쟁에서 근본적으로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기업 활동의 성패가 원활한 자금조달 여부에 달려있기 때문에 금융기관을 소유하기 어려운 경쟁기업이나 중소영세기업의 경우 항상 시장의 실패자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금융기관을 소유한 산업자본은 해당 금융기관을 통하여 현재의 경쟁기업이나 잠재적 경쟁자는 물론이고 다양한 기업들의 정보를 속속들이 파악하게 되어 사업 확장과 팽창을 도구로 이용될 수 있다. 이는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일부 재벌(대기업집단)로의 경제력 집중이라는 근원적 문제점을 더욱 심화시킴으로써 우리 경제의 활력을 더욱 훼손하게 될 것이다.
금융환경 변화로 제2금융권에도 금산분리의 원칙 적용 필요
비은행 금융지주회사 설립에 대한 규제완화 또한 문제가 심각하다. 금융위원회의 방침은 금융자회사와 비금융자회사를 모두 지배하고 있는 현 재벌체제를 그대로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한마디로 이명박 정부가 재벌의, 재벌에 의한, 재벌을 위한 정부임을 만천하에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지금의 금산분리를 더욱 강화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금산분리가 적용되지 않았던 금융산업의 경우에도 금산결합의 폐해를 차단하기 위한 장치들을 보다 구체화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자본시장통합법의 경우 증권회사에 지급결제 기능을 부여하는 것은 물론이고 시행령을 통하여 신용공여ㆍ지급보증 등의 겸영업무를 허용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간접금융으로서의 은행이 지녔던 핵심 기능인 여수신 업무가 제한적으로나마 증권사에게도 허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험사의 경우도 보험업법 개정을 통하여 어떠한 형태로든 어슈어뱅킹(assure banking, 보험회사가 은행을 자회사로 두거나 은행 상품을 판매하는 행위)을 허용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게다가 이러한 추세는 금융의 겸업화, 통합화 현상과 맞물려 더욱 더 강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로 인해 지금까지는 국민들의 유휴자금 대개가 주로 은행의 예·적금으로 쏠렸지만, 앞으로는 이들 자금이 제2금융권인 증권, 보험으로 급격하게 이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금융기관의 사회적 의무와 책임을 더욱 강조해야
“금융기관이 아니라 금융회사로 바꿔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의 금융관이다. 이는 한마디로 현재 모든 금융기관들은 앞으로 다른 일반 기업과 마찬가지로 이익창출(혹은 주주이익)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기업(회사)으로 변신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금융자본의 수익극대화는 금융소비자인 국민들의 희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이명박 정부가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금융회사가 아니라 금융기관이라 칭했던 이유는 매우 분명하다. 금융기관은 금융시장에 기본적으로 존재하는 시장의 불안정성과 정보의 비대칭성을 극복함으로써 국민경제적 차원에서 효율적으로 자원배분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금융기관의 본원적 역할은 심장의 역할과 동일하다. 심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면 피가 인체 구석구석까지 제대로 돌지 못하여 사람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금융이 자원배분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국민경제를 위태롭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금융업은 공공성을 근거로 한 규제산업이라 분류된다. 실지로 은행법, 증권거래법, 보험업법 등 모든 금융관련법에서는 국민경제 발전에 이바지해야 함을 제일의 목적으로 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금융기관의 역할은 이미 돈벌이로 전락한 상태다. 대개의 금융기관 모두가 제조업에 비해 월등한 자기자본수익율(ROE)을 보이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미 구조조정을 통하여 대형화를 실현한 일반 시중은행들의 수익성이 매우 두드러진다. 하지만 이러한 고수익의 이면에는 국민의 혈세를 동원한 대규모 공적자금 투입과 정리해고를 통한 은행노동자의 일방적 희생, 서민금융과 기업금융의 포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더욱이 2005년, 2006년 상위 4개 은행의 자기자본수익율은 최저 15%대에서 최대 20%대에 달하고 있다. 시장금리의 4~5배에 달하는 규모이다. 그리고 외국인 지분율이 높을수록 순이익의 상당부분을 배당으로 빼가고 있다. 증권업계에서도 최근 지주회사 계열, 외국자본 계열, 대주주 주식소유비중이 높은 중소형사의 경우 심지어 당기순이익을 웃도는 고율배당이 실시되고 있다. 국민의 혈세로 기사회생한 금융기관 주주들의 이익은 어느 정도면 타당할 것인지에 대한 공론화 또한 매우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제한적 유동성과 자율성을 근간으로 보다 많은 수익을 창출하고자 하는 자본의 부절적한 욕망을 적절하게 통제하지 못하면 모두가 공멸할 수 있다는 공감대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오직 이명박 정부만이 오만과 독선 속에 무조건적인 개방과 규제철폐를 외치고 있다. 이명박 정부에게 기대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이미 분명해졌다. 결국 금융공공성을 확립하고 대안적 금융시스템을 구체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극복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는 금융노동자를 포함한 국민들의 몫으로 남았다. |
금융의 시대, 신자유주의가 무너지고 있다 |
실패한 신자유주의 따라가는 MB노믹스, 전면 전환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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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22 ㅣ 김병권/새사연 연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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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에서 현실화된 9월 위기설
얼마 전 외국 언론이 ‘한국의 검은 9월’을 운운하며 9월 위기설을 제기하여 한 때 한국 금융시장은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검은 9월은 신흥 금융시장인 한국이 아니라 금융자본주의 심장부인 월가에서, 그것도 가장 잔인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미국 정부보증 모기지 업체(GSE)인 패니매이와 프레디맥에 대한 2,000억 달러 구제금융 결정이 내려진지 일주일 만에 미국의 4위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가 파산보호 신청을 하고, 3위 투자은행인 메릴린치가 뱅크오브아메리카(BOA)에 인수합병되었으며, 급기야 7,400만 고객을 보유한 최대 보험업체인 AIG마저 사실상 국유화되었다. 1929년 대공황에서도 살아남았던 투자은행들이 불과 며칠 만에 줄파산 지경에 이르렀으니, 대공황을 능가하는 위기가 아닐 수 없다.
미국 정부개입에도 불구하고 하루만에 다시 주가는 폭락했고 1, 2위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마저도 불안한 상황을 보였다. 미국을 넘어 영국 금융가로 사태가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미국 정부는 7,000억 달러에 이르는 대규모 공적자금 투입 계획을 세우고 의회에 승인요청을 하기까지 이른다.
미국 정부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이 터진지 1년이 넘도록 이른바 ‘시장의 자기조정’을 내세워 종합적인 대책은 고사하고, 기준금리 인하와 유동성 공급만으로 대처했다. 그러다가 사건이 터지면 그 때마다 사후적으로 수습했다. 이런 미국 정부의 대응은 상황을 걷잡을 수 없는 혼란 국면으로 빠트렸다. 급기야 정리신탁공사와 같은 부실자산 인수기구를 만들 여유도 없어서 재무부가 직접 국채를 발행해 상황을 수습하겠다고 나섰으니, 그 절박함과 심각성은 오죽하겠는가. 이는 바니 프랭크 미 하원 금융서비스 위원장의 “별도의 법인을 만들기에는 시간이 없다”는 발언에서 잘 드러난다.
금융기관 파산 막기 위한 미봉책
말하자면 미국 재무부가 미국 정부의 세금을 쥐고 ‘주식회사 미국’이라는 최대 인수기업으로 직접 나서게 되었고, 골드만삭스 출신 헨리 폴슨 재무장관이 최고 경영자로 나서 이를 진두지휘하는 모양새가 연출된 것이다. 그렇다면 대형 금융기관의 파산을 막기 위한 대책 뿐 미국 경제위기에 대한 종합대책은 없으면서, 미국 정부가 시장 감독기능을 넘어서 별도 부실채권 정리기구를 설립할 겨를도 없이, 직접 최고 인수기업이 되어 국가 재정을 투입하는 결정으로 위기 국면은 끝나게 될 것인가.
유감스럽게도 누구도 상황 종결을 자신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이 지금의 위기의 심각성을 반증해 주지 않나 싶다. 그 이유로 첫째, 재무부가 발표한 최저가 매입 방식은 상당 수준의 영업실적과 자금 여력을 갖추고 있는 대형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정리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수많은 금융기관들은 정부의 매입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으며 당분간 이어지는 파산을 피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최소 100여 개, 많게는 1,000여 개의 금융기관들이 도산할 수 있다는 우려가 발생한다.
둘째, 역사상 가장 파격적이라고 하는 재무부의 대책도 일단은 월가의 대형 금융기관들의 도산을 막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을 뿐, GM과 같은 제조업의 파산위기에 대한 대책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향후 월가의 신용경색으로 인한 기업들의 자금조달 환경의 급격한 악화와 이로 인한 도산 역시 고려되지 않았다.
셋째로, 지금 금융위기의 출발점이자 최종 해결점이 될 미국 국민들의 신용회복과 지불능력 회복을 위한 대책 역시 아직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연체율은 여전히 24.48%나 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주택가격도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위기의 초기 국면이던 지난해 말과 올해 초에 일부 연체자 대출전환 정책과 1,600억 달러 세금 환급조치가 내려졌다. 하지만, 그 효과도 이미 사라졌고 미국 정부는 현재 여기에 관심을 쏟을 여력 자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민주당 일각에서 상환 연체자와 중산층에 대한 지원방안을 포함시키자고 주장하지만 가뜩이나 재정여력이 부족한 부시행정부가 이를 수용할지는 미지수다.
더욱이 위기는 이미 실물경제로 전이되어 장기불황의 조짐이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7,000억 달러의 공적자금 투입 결정이 당장의 대형 금융기관 줄파산을 진정시켜 금융시장 붕괴를 일시적으로 진정시킬 수는 있겠다. 그렇다고 1년 넘게 확대되고 있는 금융위기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는 아직 이르다. 즉, 미 정부의 이번 법안은 대형 금융기관 파산을 막기 위한 대책이지 미국 경제위기에 대한 종합 대책은 아닌 것이다.
시장의 실패를 떠안게 된 국가
갈수록 커지는 금융위기는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근거가 되어온 ‘시장의 자기 치유력’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동안 정부의 규제완화와 시장조절기능을 주장해왔던 굴지의 금융회사들이 앞다퉈 각국 정부에 손을 벌리면서 구원을 요청하고 있다. 정부가 구제해준 AIG는 회생의 기회를 잡고, 정부가 외면한 리먼브라더스는 파산으로 내몰렸다.
금융시장이 스스로 위험을 분산시키면서 투자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자유로운 투자행위를 보장해야 하며, 여기서 발생할 수 있는 손실과 위험은 시장 스스로 치유해야 한다는 주장과 정부는 시장에 개입하지 말고 단지 게임의 규칙만 정해주며,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개입하면 된다는 신념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다. 지난 3월 베어스턴스가 파산위기에 몰렸을 때만 해도 ‘시장에 맡겨두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주장들을 지금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동안 규제완화와 작은 정부를 완고하게 고집하던 보수주의자, 시장주의자들 마저 정부의 적극적 역할과 규제감독 강화를 주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리처드 실러 미국 뉴욕대 교수는 “지난 20년간 ‘정부는 해결책이 아니라 문젯거리’라는 레이건 행정부의 구호가 시장을 지배했지만, 이제 모두가 ‘시장이 문제이고 정부가 해결책’이라고 말한다”며 급변한 상황을 비판하고 있다.
“자기에게 이익이 될 때에는 시장경제를 주장하더니, 상황이 바뀌니까 국가의 개입을 주장한다.”(CNBC) “정부의 개입을 주장하는 가장 급진적인 민주당 조차 꿈꿀 수 없었던 대책을 부시 행정부가 내놓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NYT) “미국이 다른 국가에 요구했던 것을 자신은 실천하지 않는 국가가 되었다.”(NYT)
재정적자에 시달리는 미국 정부, 감당할 수 있을까?
이런 분위기는 부시 대통령마저 “오늘날 금융시장에서 전개되고 있는 위험한 사태와 미국 국민의 일상생활에 미칠 중대한 영향을 감안할 때 정부의 개입은 보장되어야 할 뿐 아니라 필수 불가결하다”고 주장하게 만들었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규제완화를 주장했던 존 메케인 공화당 대통령 후보조차 “월스트리트의 규제받지 않는 탐욕과 부패가 현재의 위기를 초래했다”고 발언하는 등 극적인 입장 변화를 가져왔다.
이런 상황에서 골드만삭스 출신의 철저한 시장주의자 헨리 폴슨 재무장관이 스스로 나서서 정부 재정을 담보로 재무부가 직접 부실자산을 인수하는 최고 경영자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이번 부실자산 인수법은 폴슨 장관에게 법원도 막을 수 없는 대공황 이후의 가장 강력한 권한을 부여해 주고 있는데, 공화당 리처드 셀리 상원의원이 폴슨 장관에게 “당신이 발행하는 백지수표에 서명하라고 요구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불만을 표시했지만 상황의 긴급성은 의회도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미국 정부가 모든 걸 떠안게 된 상황에서, 미국 정부의 재정 상태는 문제가 없는 것일까? 이 모든 부실을 떠안고도 버텨낼 수 있는 마르지 않는 샘이 될 수 있을까? 이론적으로야 달러화가 국제적인 지불수단인 기축통화이니 달러화의 파산은 거의 있을 수 없고, 미국 정부는 통화를 찍어내어 국채를 발행하는 방식으로 적자를 메워갈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한계는 있다. 향후에 눈덩이처럼 불어갈 미국 연방 재정적자는 미국 정부의 경제운용 운신의 폭을 갈수록 좁힐 것이며 달러화에 대한 국제적 신뢰도는 지속적으로 추락할 것이다. 금융위기 비용 말고도 이미 중동의 누적 전쟁비용 8,500억 달러(이라크 6,500억 달러, 아프칸 2,000억 달러)의 부담이 계속 늘고 있는 마당에 대선 공약에서 감세정책을 고수한다면 미국이라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미국 부실기업들의 사슬고리의 최상단에 서 있는 주식회사 미국이 자금조달 능력의 한계에 이르면 어찌할 것인가. 미국 재무부의 부실을 막기 위해 세계 각국 정부가 다시금 구원투수로 나설 것인가. 그러나 현재 다른 나라 사정도 그렇게 만만한 조건에 있지 않다. 전통적으로 미국을 지원해왔던 영국이나 일본을 포함하여 전 세계가 지금 미국 못지않은 불황국면으로 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무너진 신자유주의
“미국의 금융위기는 일개 은행의 실패가 아니라 시스템의 실패”(줄리오 트레몬티 이탈리아 재무장관) “미국 금융시장에 영원한 변화가 생겼다.”(블룸버그) “로널드 레이건 시대가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파이낸셜 타임즈) “미국 금융자본주의가 결정적인 전환점을 만들고 있다.”(월스트리 저널)
미국 재무부가 7,000억 달러 공적자금 투입결정을 내린 직후 선진국 언론이 보인 반응들이다. 바야흐로 30년 남짓 지속되어온 신자유주의 역사가 중대한 고비를 넘고 있어 보인다. 하다못해 보수적 국내 언론들 마저도 “금융위기에 흔들리는 미, 영 자본주의 모델”(조선일보 9월 19일), “미국, 30년 신자유주의의 종언”(중앙일보 9월 21일)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내보내고 있다.
그렇다면 글로벌 스탠더드로 추앙을 받으며 성장가도를 달리던 신자유주의에 이처럼 예기치 못하게 급제동을 걸고, 역사적 전환을 압박하는 이는 누구인가? 사실 그 어떤 외부세력도 아닌 바로 신자유주의가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이다.
1980년부터 본격화된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은 규제완화, 감세, 작은 정부 큰 시장, 민영화를 내걸고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기존의 경제 시스템을 재편해왔다. 이어 남미와 아시아에 자유화, 개방화를 강조하며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를 밀어붙였다. 규제완화와 시장화, 개방화 물결의 가장 큰 수혜를 입으며 신자유주의에서 가장 눈부신 성장을 이룬 것이 바로 금융자본주의다.
신자유주의는 전통적인 금융상품인 예금, 적금 상품이나 주식, 채권 외에 이른바 위험 분산을 명목으로 파생상품을 개발하는 ‘금융혁신’을 이루어 금융시장을 급격히 팽창시켜왔다. 온갖 첨단 수학 기법이 들어간 파생상품은 위험을 분산시킨다는 당초의 취지 대신 고위험을 감수하여 높은 수익률을 올리는 최고의 고수익 상품으로 유통되고 있다.
규제가 여전히 까다로운 전통적인 상업은행을 대신해서 사실상 규제가 전혀 없는 헤지펀드와 사모펀드가 파생상품에 대거 투자하고, 기업 자체를 인수합병하는 기업거래시장을 창출한다. 파생상품 시장과 인수합병 시장에서 고수익이 창출되자, 처음에는 헤지펀드와 사모펀드에 대규모 대출(Leverage)를 해주며 시장을 키우던 투자은행과 상업은행들이 규제를 피해 직접 자회사를 세워 투기적 금융상품을 대거 매입하고 유통시킨다. 결국 금융시스템의 규제와 감독체제는 와해되고 만다.
침묵하는 보수적 기업 연구소들
한편 전통적인 제조업은 점점 경쟁력을 잃어갔다. 오히려 제조업들마저 금융영역에 진출하여 금융부분을 주력사업으로 수익을 올렸으며, 제조업들 자신은 투기적 금융자본의 이익 실현을 위한 기업거래시장의 상품으로 전락한다. 신자유주의 30년 동안 노동자와 중산층의 실질 소득은 늘지 않았고 대신에 금융자본은 갖가지 신용대출로 신용적 가수요를 만들어 소비를 조장했다. 그 결과 미국 국민들은 대규모의 채무자로 전락한다. 엄청난 금융자본을 동원하여 미국 국민들을 부동산 시장으로 내몰아 미국 국민, 모기지 업체, 정부의 부채를 한계점까지 끌어올리더니 마침내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로 파산을 맞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규제완화와 작은 정부, 시장화와 개방의 환경을 배경으로 해서 급성장한 파생상품과 인수합병 시장, 헤지펀드와 사모펀드, 그리고 여기에 자금을 동원했던 투자은행과 금융기관들 자신이 투기적인 부동산 시장에서 스스로 위험을 극대화시키고 전 세계로 전염시킨 것이다. 자기 내부에서 개발한 최첨단 금융시스템에 의해 자신을 무너뜨린 신자유주의는 이제 외부로부터, 신자유주의 밖으로부터 수습과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나서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100년 만에 올까 말까한 금융위기가 월가를 휩쓰는 동안, 경제의 해외의존도가 유난히 높고 특히 외국 금융자본의 자본시장 유입이 높았던 한국경제는 연일 큰 충격에 흔들리고 있다. 이런 와중에도 국책은행 총재인 민유성 산업은행 총재는 이미 파산보호 신청을 한 리먼브라더스 인수 시도가 글로벌 투자은행 진출의 기회였다는 고집을 꺾지 않고 있다. 전광우 금융위원장도 “규제완화를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고 호언하고 있는 실정이다. 쓰러져가고 있는 미국 금융시스템에 대해 월가의 미국인들 보다 더 강고한 신념을 갖고 있는 듯하다.
반면 경제현안에 대해 신속하고 발 빠른 대응으로 정평이 나있는 국내 주요 기업 연구소들의 침묵에 가까운 소극적 대응은 보는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할 정도다. 세계적으로 최신의 트렌드를 기민하게 소개하고, 최신의 경향과 동향을 민첩하게 분석해왔던 기업 연구소들의 과거 모습과는 전혀 다른 행동이다. 물론 이들 연구소의 개별적인 연구원들이 언론매체 등을 통해 현재 금융위기에 대해 의견을 피력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공식적으로 파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금융시스템에 대해 솔직하게 인정하는 모습은 찾기 어렵다. 어째서 유독 현재 금융위기에 대해 이토록 신중한 것일까.
신자유주의는 스스로 종언되지 않는다
이들의 침묵은 여전히 규제완화와 민영화를 향해 질주하는 이명박 정부의 외골수 경제정책을 사실상 방조하고 있다. 한국이 세계적인 금융위기 국면에 신속히 대처하여 다가올 혼란을 예방할 수 있는 길을 정부와 보수적 기업 연구소가 공동으로 막고 있다.
패니매이와 프레디맥의 구제금융 결정이 났을 때, 리먼이 파산하고 메릴린치가 인수합병되었을 때, AIG가 국유화되기로 결정되었을 때도 한국의 경제정책 담당자들은 ‘경제위기의 끝’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번번이 위기는 재발했고 정부 당국자들의 기대는 무너졌다. 이제 ‘위기의 끝’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끝’을 말하는 주장에 오히려 무게가 실리고 있는 형편이다. 신자유주의 앞날에 중대한 전환 국면이 확실해지고 있는 지금, 그것이 신자유주의 시즌 2로 성공적인(?) 진화를 할지 아니면 아예 또 다른 자본주의로 전환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 인류가 적극적으로 신자유주의 투기성과 위험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대안적인 경제시스템을 찾기 위해 직접 실험에 나서지 않는다면 신자유주의는 자신의 위험성을 회피하고 유보시키면서 제2, 제3의 신자유주의 변종으로 살아남으려 할 것이다. 수백 년 자본주의 역사에서 특정 형태의 자본주의가 스스로 자기를 부정한 적이 없듯이 말이다.
그런데 한국의 현실은 어떤가. 하루가 멀다하고 신자유주의를 찬양했던 보수적 학계와 기업계가 위기에 대해 침묵으로 답하고 있는 동안, 이명박 정부는 신자유주의 최신 버전도 아닌 30년 전 원시버전을 강행하고 있다. 지금의 금융위기를 지켜보면서도 말이다. 규제완화와 감세, 민영화와 자본시장 개방, 금융화는 바로 30년 전 미국의 레이건과 영국의 대처가 추진하려던 신자유주의 초기버전 그 자체이다. 지금 미국에서 한창 도입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최신 버전은 오히려 고삐 풀린 금융시스템에 대해 규제와 감독을 강화하고, 이미 민영화되어버린 금융기업들을 국유화하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 경제정책 전면 재검토 필요
이명박 정부는 이제라도 세계적인 금융위기 상황을 제대로 보고 추진 중인 경제정책들을 전면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변할지 모를 세계 금융시장의 속에서 당분간 자본시장 통합법 시행은 전면 유보해야 한다. 지금 미국식 금융모델이 절대 바이블이 될 수 없음은 물론이며, 더구나 30년 전의 미국 모델은 미국인들에 의해 부정되고 있다. 정부가 추진하려는 금융회사 신규 설립요건 완화, 파생금융상품 발행과 거래에 대한 규제완화, 산업자본의 은행 소유지분 한도 확대, 금융지주회사에 제조업 자회사 허용, 헤지펀드 허용, 채권보증 전문회사 설립 허용과 같은 규제완화 정책들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또한 산업은행과 기업은행 민영화 계획도 현재 상황에서 추진하기에는 무리다. 그나마 국내 시중은행들이 대부분 민영화되고, 외국인 지분이 다수인 상황에서 얼마 남지 않은 국책은행마저 민영화를 하겠다는 것은 금융불안에 대비할 최소한의 안전판마저 없애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향후 장기화될 중소기업 자금조달 어려움에 정부가 능동적으로 대처하기도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특히 지금과 같이 자본시장이 극도로 위축된 조건에서 민영화는 자칫 헐값 매각이나 주식시장 폭락을 초래할 가능성도 있다.
지금은 규제완화나 감세, 민영화를 추진할 시기가 아니라 이미 불황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는 한국경제를 살리기 위해 중소기업과 자영업의 자금조달을 터서 내수를 살리고 국민들의 소득과 소비여력 확충을 위해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준비하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특히 이번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이 보여주는 것처럼, 폭발성이 큰 신자유주의 금융위기가 대부분 부동산 거품과 금융공급이라는 잘못된 만남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유념하고 금융위기 국면에서 부동산 부양책을 동원하는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당장 23일 종합부동산세제 개편안 발표, 이후 공기업 선진화 3단계 계획안 발표, 그리고 26일과 30일 내년 예산안 발표에 이를 즉시 반영할 필요가 있다.
미국 경제학 교수인 루비니 교수는 현재 신자유주의 금융위기를 보면서 “이익은 사적으로 독점하면서 손실은 사회화한다.”고 공박한 바 있다. 이명박 정부가 잘못된 방향으로 고집스럽게 경제정책을 이끌고 간다면 일부 대기업과 부동산 부유층은 이익을 볼지 모르겠으나 대다수 국민들이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심각한 손실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이 새사연이 정책전환을 강력히 요구하는 유일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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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시장 사이에 또다른 주인은 '국민' |
[이슈해설] 실패한 시장에 ‘국가 개입'만이 능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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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23 ㅣ 손우정/새사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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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발 금융위기로 세계적인 공황이 또 올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 한편, 신자유주의를 추종했왔던 이들은 이상적 모델로 믿고 따랐던 미국에서 벌어진 이번 사태를 목격하면서 이미 ‘정신적 공황’에 빠진 듯 하다. ‘시장이 모든 것’이라는 슬로건 아래 각종 규제철폐와 감세,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쳤던 정부와 여당은 ‘시장에 대한 적극적 개입’을 선언한 미 부시 대통령이나 매케인 공화당 후보의 연설을 들으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공정한 시장주의자’?
이런 가운데 최근 ‘민주주의 2.0’이라는 토론사이트를 연 노무현 전 대통령은 미국발 금융위기의 원인이 ‘신자유주의’ 때문이라고 주장해 다시한번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1994년 김영삼 전대통령이 ‘세계화’를 선언하고,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본격화하면서 자유주의 개혁정부나 보수정부나 ‘신자유주의’의 모범생으로 불릴만한 정책을 펼쳐왔다. 노무현 정부 또한 신자유주의적 정책 기조를 그대로 계승하면서 신자유주의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한미 FTA를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았던가?
노무현 전 대통령 자신은 ‘왜곡된 시장주의’를 의미하는 신자유주의자가 아니라 시장 강자로부터의 자유까지 추구했던 ‘공정한 시장주의자’라고 변명하고 있지만 2006년 3월에 이미 스스로 ‘좌파 신자유주의자’임을 선언한 바 있다. 그 때와 지금의 신자유주의가 얼마나 다른지는 모르지만, 신자유주의를 부정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손’이 공정한 시장을 통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여전한 믿음은 자유시장의 ‘보이지 않는 발’이 사회적 약자를 걷어차 버리는 필연적 결과를 마치 별개의 문제인 양 다루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서로 차별성을 부여하기에 여념이 없지만, 최소한 경제정책 기조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많은 진보개혁 세력들이 우려했던 점은 노무현 정부의 단점(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은 그대로 되풀이하면서, 상대적인 장점(개혁성)은 전면 후퇴시킬 것이라는 예측 때문이었다. 이 예측은 이명박 정권 6개월이 지난 지금, 정확히 들어맞고 있다.
시장의 실패, 국가 개입이 유일한 대안인가
보수언론 조차 신자유주의 시대의 종언을 점치는 상황에서 유일한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은 ‘국가의 개입’인 듯하다. 미국 또한 초대형 모기지 업체인 패니매이와 프레디맥의 국유화에 이어 AIG 지분인수, 부실채권 정리를 위한 정부기구 설립 움직임 등 경제에 직접 개입하면서,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추종했던 이들의 뒤통수를 때리며 살 궁리에 발버둥치고 있다.
그러나 시장에 국가가 개입한다고 해서 신자유주의의 부작용을 차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논쟁에서 흔히 제기되는 국가와 시장 간의 관계문제에 하나의 중요한 주체가 빠져 있다. 바로 국민, 즉 주권의 소재 여부다. 민주주의 체제라면 민주적으로 통제되는 국가권력이 국민을 대신해 시장에 개입하고, 시장은 노동과정과 임금, 상품 등으로 국민의 생활에 개입하는 순환과정을 보장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국가가 모든 것을 지배했던 개발독재 체제나, 민주화세력이 집권했다던 김대중, 노무현 자유주의 체제에서도 국가에 대한 국민의 통제는 ‘선거’를 제외하고는 어떤 방식도 없었다.
노무현 정부의 참여민주주의 역시 ‘정치 시장’에서 선출된 엘리트들 간의 경쟁이라는 범위로 제한되어 있었고, 국민은 정치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소비자로 규정됐다. 따라서 다양한 거버넌스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파병과 한미 FTA 등 중대한 사안에 대해서 국민의 의사는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대신 미국식 신자유주의 사상으로 가득 찬 엘리트 관료들의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국민으로부터 통제받지 않는 국가는 이명박 정부의 지난 6개월이 보여주듯, 시장을 통제하지 않는 국가만큼 위험하다. 따라서 국가의 역할을 확대하기 이전에 민주주의를 보다 강화할 필요가 있다.
‘소통’은 과오 반성에서 출발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에 적지 않은 책임을 안고 있다 하더라도, 그가 미국발 금융위기에 대한 토론을 이끌어가지 못할 이유는 없다. 일각에서는 그가 만든 ‘민주주의 2.0’이 전직 대통령의 정치세력화로 귀결될 수 있음을 우려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을 꼭 나쁘다고만 규정할 수 없을뿐더러 ‘소통’이 부족한 한국사회에서 의미 있는 시도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의 자신을 재구성하는 태도는 어떠한 발전적 지평도 열어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지난 5월 2일 시작되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촛불이 던진 민주주의의 의미가 2004년 대통령 탄핵을 반대했던 딱 그 수준만을 의미한다면, 폭락하는 주가지수를 바라보는 만큼이나 허무할 것이다.
자신의 실책이 있었다면 떳떳하게 인정하는 게 옳다. 민주주의에서 소통이 중요한 것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잘못과 오류를 인정하고 수정하기 위함이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확인하고 반성해야,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소통을 통해 불붙은 촛불 또한, 이명박 정부를 지지했던 시민들의 반성이 동반되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
미국발 금융위기, '머니 워킹 이코노미'는 없다 |
제조업에 기반한 국민경제를 다시 생각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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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7 ㅣ 김병권/새사연 연구센터장 |
세계 금융위기, 그 끝은 어디인가
미국의 4위 투자은행인 리먼브라더스가 파산신청을 한데 이어 3위 투자은행인 메릴린치가 미국 최대 상업은행인 뱅크오브아메리카(BOA)에 인수합병 되는 결정이 내려졌다. 미국 양대 정부보증 모기지업체(GSE)인 프레디맥과 패니매이에 공적자금 2,000억 달러가 투입되기로 결정된 지 불과 일주일 만이다. 미국 5위 투자은행인 베어스턴스에 구제금융 300억 달러를 투입하고 JP모건 체이스와의 합병을 유도한 것이 지난 3월 14일의 일이다. 그 후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500포인트 이상 폭락한 미국 증시를 필두로 전 세계 주식시장이 폭락하고 세계경제는 심하게 요동치고 있다. 한국 주식시장도 추석 직후인 9월 16일, 1,400선이 맥없이 무너져 하루에 51조 원의 평가자산이 공중분해되고 환율은 외환위기 이래 최대치인 51원이 폭등해 1,160원으로 장을 마감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금융불안의 끝이 어디인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우리 정부를 포함한 일부 분석가들은 리먼브라더스와 메릴린치의 파산, 인수합병 결정으로 오히려 금융 불확실성이 상당부분 제거되어 금융 안정화에 한걸음 다가섰다고 자위하고 있다. 일부는 위기의 끝이 보이고 기회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성급한 전망을 내놓기도 한다.
그러나 이에 동의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지난 3월 미국 연준(FRB)이 베어스턴스 구제금융을 결정했을 때도 위기는 진정되었다고 믿었다. 일주일 전 매니매이와 프레디맥에 대한 지원을 결정했을 때도 이제는 상황이 진정될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로 움직였고 이제 다음은 누구인가 하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미국시각으로 9월 16일, 또다시 미국 연방정부는 파산직전까지 몰린 최대 보험사 AIG에 무려 850~900억 달러를 투입하여 지분 80%를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베어스턴스, 패니매이, 프레디맥에 이어 4번째로 민간기업에 대한 미국 정부의 직접적 구제금융이 전격 실시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다. 미국 최대 저축대부조합인 워싱턴뮤추얼이 다음 차례라는 얘기도 나돌고 있다. 남아있는 미국의 1, 2위 투자은행인 골드만 삭스와 모건 스탠리조차 금융위기를 피해갈 수 없다는 주장도 들린다. 최고의 투자은행인 골드만 삭스가 발표한 3분기 순이익은 무려 70%나 급감하면서 9년 만에 최대 감소를 보이기도 했다.
세계 주요 국가 정부들이 수백억 달러씩 유동성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는데도 금융 불안은 전혀 진정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모기지를 담보로 한 구조화 파생상품인 RMBS와 CDO에 이어 일종의 모기지 보증보험인 신용디폴트스왑(CDS)으로 부실이 확산되고 있는 징후도 보인다. 한 세기만에 올까말까한 금융위기가 왔다고 주장하는 마당에 누군들 그 끝을 장담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위기의 시발점이었던 주택담보 부실이 해소되지 않고 주택가격이 여전히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는데 어떻게 위기가 끝났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시장 스스로가 신뢰를 회복해야
현재의 심각한 상황을 진정시킬 대책으로 각종 언론매체와 분석가들이 입을 모아 주장하는 것이 바로 ‘시장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장 부실위험에 빠진 AIG나 워싱턴뮤추얼을 포함하여 주요 금융기관들이 ‘시장’이 신뢰할 만한 자구책과 자금조달 계획을 세워야 상황이 진정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위기가 어디에서 발생했는지 먼저 살펴보자. 금융시스템에 존재했던 각종 규제와 업무 장벽을 허물고,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기 시작하면서 금융위기와 파국의 씨앗이 잉태되었던 것 아닌가. 1930년대 대공황을 겪은 후 은행과 증권, 보험 업무를 분리시킨 ‘글래스-스티걸법’은 1999년 ‘그램-리치-브릴리법’으로 무력화되었고, 규제와 감독을 거의 받지 않는 헤지펀드가 등장하여 위험도가 극히 높은 각종 파생상품을 제한 없이 대량으로 유통시켰고, 규제가 풀린 투자은행과 상업은행들이 여기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오늘의 세계적인 금융파국이 초래된 것이다.
시장이 조장한 금융부실을 번번이 해소시켜준 것은 바로 시장이 아니라 국가였다. 이번 서브 프라임 모기지 부실이 베어스턴스로 확산되고, 양대 모기지 업체로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갈 때 그것을 막은 것은 미국 연방정부였다. 리먼브라더스의 경우 정부가 지원을 포기했기 때문에 곧바로 파산신청을 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지난 연말 모기지 부실로 인해 씨티그룹과 메릴린치 등 대형 은행이 불안해지자 이를 긴급히 구제해준 것은 바로 아시아와 중동의 국부펀드였다. 그러나 그 후 손실규모가 계속 확대되고 시장의 안정성을 보장할 수 없게 되자, 세계적으로 거의 유일하게 대규모 자금 조달을 할 수 있는 이들 국부펀드마저 미국 대형 은행들이 줄줄이 파산하는 상황을 보면서도 철저히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즉, 시장 메커니즘을 따라 확산된 파생상품 연쇄고리와 부실의 사슬이 너무 복잡하게 얽혀있어 이제는 정부가 나서서 몇 개 금융기업을 구제해준다고 해결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정부가 개입해도 해결이 용이하지 않을 만큼 상황을 복잡하게 만든 것은 바로 시장 자신이다.
따라서 지금 신뢰를 얻어야 할 대상은 바로 시장 자신이다. 불신의 표적이 되고 있는 것은 금융시장 자체다. 금융시장은 각국의 정부들과 국민들에게 자신이 안전하게 작동할 수 있다는 신뢰를 주어야 한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규제 풀린 시장만능의 금융시스템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설계해야 한다.
GM의 구제요청을 들어줄 겨를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의 위기는 오직 금융기업에 국한되는가. 실상은 그렇지 않다. 미국 산업을 대표해왔던 GM과 포드 등 전통 제조업들도 수년전부터 심각한 위기에 빠져있으며, 최근 금융위기로 이들 역시 파산위기에 직면했다. 이들 기업은 자동차 분야에서 일본의 도요타에게 추월당한 것은 물론 신용상태도 이미 정크본드 수준으로 추락했다. 현재 GM의 회사채 금리는 17~27%, 포드의 회사채는 15%에 거래된다. 사실상 신용이 거의 바닥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블룸버그 통신에 의하면 GM과 포드는 올해 2분기에만 약 240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사상 최악의 경영상황에 내몰린 GM, 포드, 클라이슬러 등 자동차 3사는 현재 미국 연방정부에게 ‘에너지 고효율 자동차 개발’ 명목으로 500억 달러 자금 지원을 요청해 놓고 있다. 연방정부는 250억 달러 자금 지원을 결정하고도 여전히 집행을 못하고 있다. 한마디로 금융시스템 부실의 파급을 막는데도 힘에 부쳐, 제조업을 살리기 위한 여지가 없는 상태다.
물론 이런 결과는 미국 산업이 자초한 측면이 크다. 1980년대 이후 미국은 철저히 금융산업에 의존하는 성장을 해왔다. 미국 기업의 순이익 가운데 1/3가량이 금융기업에서 나올 정도다. 최근 파산위기에 직면한 투자은행들이 하나같이 50대 글로벌 기업 안에 드는 대규모 기업들이라는 사실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한때 GM은 자동차 제조업에서 밀리는 경쟁력을 금융부분 투자로 만회하려고 했다. 그래서 GM의 수익가운데 금융자회사인 자동차 할부금융회사 GMAC의 비중이 갈수록 커졌다. 하지만 모기지 부실 사태가 커지고 신용경색이 시작되면서 GMAC은 GM의 수익 원천이 아니라 손실 원천으로 탈바꿈됐다. 뒤늦게 GMAC은 인력 규모가 1만 4,000명에 달했던 모기지 자회사인 레지던셜캐피털의 규모를 대폭 축소하는 등 구조조정을 서둘렀다. 그러나 이미 7개 분기 연속 적자 행진을 기록하면서 총 72억 달러의 손실을 본 상태다. 결국 도요타의 자동차금융 및 리스사업 자회사인 도요타파이낸셜서비스가 미국 시장 상반기 시장점유율 6.35%를 기록하며 6.2%를 차지한 GMAC를 추월했다.
GM과 같은 적자 기업은 물론 우량기업들도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면서 전체 실물경제가 위기에 처하고 있다. 프리츠 핸더슨 GM 사장은 지난 15일, "기업의 신용시장 차입이 대부분 중단된 상태"라면서 리먼브라더스 위기로 "당분간 상황이 더 나빠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동시에 "최소한 몇 주 아니면 몇 달간 험난할 수밖에 없다"면서 "AAA+등급 기업 정도나 금융시장을 통한 차입이 가능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민주당 버락 오바마 후보가 선거운동 연설에서 “월스트리트 위기가 문제가 아니라 메인스트리트(실물경제) 위기가 더 문제”라고 한 지적은 그런 점에서 전적으로 타당하다.
그러나 IT를 비롯한 몇몇 분야를 제외한 제조업 분야에서 상당부분 경쟁력을 상실한 미국경제가 비금융 분야에서 경제회생의 기회를 다시 잡을 수 있을지는 매우 불투명하다.
산업은행의 리먼브라더스 인수를 청와대가 막았다?
세계 금융위기로 유수의 글로벌 투자은행들이 줄줄이 파산하거나 파산선고를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 한국은 글로벌 투자은행 육성이라는 장밋빛 미래를 향해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어처구니 없는 것이 바로 산업은행의 리먼브라더스 인수시도였다.
현 정부는 산업은행을 민영화한 후 투자은행으로 전환할 계획을 세운 상태다. 이에 전 리먼브라더스 한국지사 대표였던 민유성씨를 산업은행 총재로 임명했고, 지난 6월에는 부실에 빠진 리먼브라더스 인수합병을 시도했다. 명목은 세계 굴지의 글로벌 투자은행을 인수하면 “한국 금융기관들의 눈높이가 일제히 월스트리트 수준으로 높아지면서 말로만 외치던 금융세계화의 문이 열릴 것”이라는 것이다.
이후 8월에는 보다 구체적인 인수협상에 들어갔다. 민유성 산업은행 총재는 9월 16일 기자들과의 얘기에서 “위험을 분리하고 구조조정을 거쳐 리먼을 인수했더라면 국익에 도움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며 강한 집착을 보였다. 실제 9월 10일까지 자금 투입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내년 2월에 자금을 투입하는 구체적인 일정까지도 준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프레시안>에 의하면 <조선일보>를 비롯한 유력 보수 일간지 역시 최근까지 산업은행의 리먼브라더스 인수를 권유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8월 27일자 <조선일보>에는 “만년 금융 후진국인 우리가 요즘과 같은 가격에 세계 일류를 인수할 기회는 자주오지 않는다. 리먼의 위험만큼 기회가 커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라는 주장이 실렸다.
이처럼 리먼브라더스 인수를 종용했던 보수 언론들은 리먼브라더스가 파산신청을 하자 전혀 다른 주장을 한다. <미디어 오늘>이 보도한 바에 의하면 <동아일보>의 경우 9월 16일자 기사에서 "산업은행이 국제금융시장을 뒤흔든 리먼브러더스 인수를 한때 강력 추진했으나 청와대의 반대로 최종 단계에서 포기했던 것으로 16일 알려졌다"고 주장하여 리먼브라더스 인수포기에 청와대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음을 내비쳤고, 이어 청와대가 이를 전면 부인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초 리먼브라더스 인수에 구체적 관심을 가졌던 금융기관은 메릴린치를 인수한 뱅크오브아메리카 외에 미국과 항상 긴밀한 공조를 취해왔던 영국계의 바클레이 정도였다. 유럽의 어떤 금융기관도, 아시아와 중동의 국부펀드도 부실 덩어리인 리먼브라더스 인수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위험만큼 기회가 컸던 것이 아니라” 오로지 ‘손실 위험’만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명색이 국책은행이고 정부가 총재를 임명하는 산업은행에서 자그마치 60억 달러를 투입해야 했던 리먼브라더스 인수 협상을 독자적으로 결정해서 추진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더욱이 지금은 우리나라도 달러 수급 부족에 허덕이고 있고 9월 위기설로 외환시장이 요동치던 상황아닌가. 리먼브라더스가 파산신청을 한 ‘챕터11’은 법원 감독아래 기업회생절차를 밟게 한 것으로 공식적인 청산을 의미하는 ‘챕터 7’은 아니다. 산업은행의 자금 투입 여지가 남아있다는 뜻이다. 지금은 굴지의 글로벌 금융기업마저 줄줄이 파산위기에 몰리고 있는 상황이다.
제조업에 기반한 국민경제를 다시 생각할 때
금융혁신을 내세우며 세계 경제를 주름잡던 월가 금융기업들의 첨단 금융기법이 고수익을 내며 승승장구하던 시절은 길게 봐야 30년, 한 세대를 갓 넘겼을 뿐이다. 금융위기의 진원지인 미국에서는 현재 첨단 금융기법의 총아였던 파생상품의 위험성에 대한 논의가 일고있다. 한발 더 나아가 현재 금융위기의 중심부가 되고 있는 ‘투자은행 수익모델’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마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월스트리트저널조차 9월 16일자 기사에서 현재 세계 금융위기로 기존의 투자은행 모델이 지고 전통적인 상업은행이 세계 금융의 중심으로 다시 부상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고작 연 3~4% 이익밖에 보장되지 않는 과거식 자산운용을 벗어나 단기간에 30~40%의 수익률을 좇아갔던 최근의 관행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나라는 내년 2월 자본시장 통합법 시행을 앞두고 유력 제조업들마저 금융시장에 뛰어들 채비를 하고 있다. 국민은행 등 유력 은행들이 글로벌 은행으로 가겠다며 빅뱅을 서두르면서 이들 역시 투자은행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여기에 정부마저 기업은행과 산업은행 민영화를 앞세워 투자은행 시장을 키우는데 조력하고 있는 형편이다. 조만간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자금이 투자은행 시장으로 유입될 상황이다.
사실 지난 신자유주의 30여년의 역사는 경제 금융화(financialization)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런데 금융화란 무엇인가? 국민경제에서 금융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고, 제조업 상품의 생산이나 교역보다는 금융 상품과 금융 거래를 통한 이윤 창출의 계기와 규모가 커지는 것이다. 또한 세계적으로 자본 이동의 자유와 속도가 빨라지고 금융시장의 통합성이 높아지는 현상이 금융화의 표면적 모습이다. 지난 수십년 동안 이 모든 현상은 ‘금융 혁신’, ‘금융 첨단화’라는 이름 아래 정보통신기술의 혁명과 맞물리면서 초고속으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금융은 세계적으로 급팽창하였고 미국 월가는 글로벌 경제의 심장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더 이상 사람이 노동을 하고 노동이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일하는 경제(Money working Economy)’, 우리가 잠든 사이에 돈이 지구를 돌며 부가가치를 창출한다는 발상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금융이야 말로 선진국 경제가 발전하는 원동력이자 ‘미래의 핵심 성장 산업’으로 추앙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오늘날 신자유주의를 글로벌 스탠더드로 일궈냈던 금융시스템은 신자유주의를 끝없는 함정으로 몰아넣었다. 그 결과가 현재의 세계 금융위기다. 금융기업에 밀려 찬밥신세를 면치 못했던 제조업들에 다시 주목하자는 것이 첨단을 거스르는 구태의연한 발상일까? 아니면 지금 목도하고 있는 금융위기에서 우리가 진정 다시 찾아야 할 정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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