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로의 산야초 이야기] 함백산&하늘말나리
꽃잎과 꽃잎사이,새끼 거미가 외줄을 탑니다.
내리꽂히는 빗방울을 피할 재간이 없네요.아무리 하찮은 미물일지라도 바람과 비는 본능적으로 피하건만,
하필이면 하늘을 이불삼아 집을 짓다니….장마전선이 태백준령을 넘나들며 물 폭탄을 쏟아 붓던 8월 첫
주말,함백산 만항재는 짙은 운무에 휩싸였습니다.해발고도 1330m,‘천상의 화원’이 생(生)과 사(死)가
뒤엉킨 전장으로 변한 겁니다.꽃잎을 기둥삼아 집을 지은 거미의 운명도 풍전등화(風前燈火)였지요.그래서
더 눈길을 끌었는지 모릅니다.만항재에 터 잡은 뭇 생명들이.
가늘고 긴 꽃대를 밀어 올려 꽃을 피운 하늘말나리는 군계일학(群鷄一鶴), 꽃 중의 꽃입니다.
비바람에 맞서 반쯤은 서고,반쯤은 기대면서도 결코 고개를 숙이지 않는 자존감.그 힘으로 8월의
폭풍우를 견뎠겠지요.만항재의 기후는 억세고 거칩니다.5월의 눈보라와 한겨울의 혹독한 추위가
낯설지 않은 곳.황적색 바탕에 자주색 반점을 찍은 함백산 하늘말나리의 생김새가 유난히 도드
라져 보인 것도 이유가 있었습니다.한 생을 보내며 겪은 시련과 고난의 체화(體化)!
사실,하늘말나리는 전국의 산과 들 어디에서나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산채(山菜),소근백합(小芹百合)으로 불리며 어린잎은 나물로,비늘줄기는 각종 질병의 치료제로
쓰였습니다.부인병과 신경쇠약, 불면증,가슴 두근거림,기관지염을 치료한 기록도 풍부합니다.
독성에 대한 주의가 요구됐으나 민간에선 크게 개의치 않았지요.비슷한 종으로 참나리와
지리산하늘말나리,누른 하늘말나리가 있으며 약성에는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고됐습니다.
요즘엔 식재료보다 관상용으로 더 인기를 얻고 있지요.
함백산 하늘말나리가 특별한 건 이 지역의 역사 때문입니다.
하늘말나리,동자꽃,노루오줌,마타하리,용담,고려엉겅퀴….서로 다른 이 이름 앞에 함백산과
만항재를 놓아보세요.어떤 느낌이 드시는지.부족하다면 자장율사,정암사,수마노탑,광부,탄광,
막장,다이너마이트,폐광,갱내수를 함께 불러보시길.어떻습니까?먼 과거에서 현재,미래로
나아가는 길이 보이는지요.그렇다면 다행입니다.함백산 생명들이 그 길을 내고 하루 하루의
일상을 기록했습니다.그러니 함백산과 만항재를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읽어 가슴에 담아두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