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323) 막다른 길 (하)
유 대감 며느리는 강가에 버선과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두고
신랑의 무덤이 있는 시댁 선산을 향해 큰절을 두번 올렸다.
치마폭을 덮어쓰고 휘몰아치는 시커먼 강물로 막 뛰어들려는데 “허~억” 헛구역질이 나더니
“허억, 허억” 연거푸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청상과부 유 대감 며느리는 악몽에서 깨어난 듯 정신을 차렸다.
버선과 신발을 신고 맨머리를 매만진 후 시댁으로 돌아가는 길에 담 위로 뻗어나온
매실나무가지에서 신 청매를 따 아삭아삭 먹었다.
유복자를 잉태한 것이다.
유 대감과 안방마님이 뛸 듯이 기뻐했다.
시어머니는 더는 새벽마다 청상과부 방문 앞 우물가에서 주문을 외우지 않았고, 시시때때로
마루를 치며 내 아들을 살려내라고 악을 쓰지도 않았다.
이듬해 춘삼월에 달덩이 같은 아들을 낳았다.
작년에 장모 회갑연에서 과음으로 댓돌에 넘어져 죽은 유 대감의 맏아들이 살아서 돌아온 듯 집안이 들떴다.
젖을 물릴 때만 며느리가 안아볼 뿐 할아버지 유 대감과 할머니 안방마님이 서로 안으려고해 갓난아기
사지가 찢어질 판이다.
금이야 옥이야 손자 시온은 장마철 호박순 자라듯 무럭무럭 자라 다섯살이 되었다.
눈매와 인중이 죽은 제 아버지를 빼다 꽂았다.
그 사이 안방마님은 이승을 하직해 삼년상을 치렀다.
유 대감의 둘째아들 총각인 준하가 상주 노릇을 반듯하게 해냈다.
서당에 다니는 다섯살 시온을 한가운데 두고 이제는 집안에 웃음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겨우 스물네살이 된 청상과부 시온이 어미의 수심은 얼굴에 그대로였다.
시온은 서당을 다니고부터는 할아버지 옆에서 잤다.
청상과부 이실댁은 동지섣달 기나긴 밤을 한숨으로 지새우고 꽃 피고 새 우는 춘삼월에는
춤추는 나비 한쌍을 보고도 숨이 막혔다.
시온이 일곱살이던 어느 봄날, 할아버지께 큰절을 올리고
“할아버님, 다녀오겠습니다. 부디 옥체 건강히 지내십시오” 하며 술잔을 올리자
단숨에 잔을 비운 유 대감이
“너는 우리 집안의 장손이다. 큰 뜻을 품고 자중자애하여라” 했다.
시온은 후원 별당으로 가 제 어미 이실댁에게 작별인사를 건넨 뒤 삼촌과 함께 나귀를 타고 집을 나섰다.
머나먼 한양으로 유학을 떠난 것이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 손을 흔들고 아낙네들은 눈물을 훔쳤다.
이실댁은 어린 아들이 돌아올 날도 기약하지 않고 떠나는데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게 말없이 또 세월은 7년이 흘렀다.
사동이 고삐를 잡고 노인 둘을 태운 나귀 두마리가 까딱까딱 내를 건너고
고개를 넘고 해가 지면 주막에 들어가 너비아니 안주에 청주를 마시고
이튿날이면 또 길을 나서 구름 따라 흘러갔다.
두 노인은 한평생 친구 사이이자 사돈간인 유 대감과 이 대감이다.
한달 보름 만에 두 노인네가 다다른 곳은 조용한 강변마을의 저녁연기 피어오르는 아담한 기와집이다.
부엌에서 나온 안주인은 안마당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이 대감의 딸이자 유 대감의 며느리, 이실댁이다.
어느새 훤칠한 젊은이가 된 유복자 손자가 사랑방에서 글을 읽다가 뛰쳐나와
땅바닥에 엎드려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께 큰절을 올렸다.
텃밭에서 호박과 고추를 따서 어린 아들딸과 대문으로 들어오던 이 집 가장도 땅에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그는 유 대감의 둘째아들 준하가 아닌가! 그때가 언제였던가.
나라에 봉직하던 유 대감이 휴가를 받아 어머님 병문안을 왔다가
삼십리 밖 선친의 묘소를 찾았던 때가 동짓달이었다.
함박눈이 퍼붓는데도 발길을 돌릴 수 없어 산속을 헤매는데 폭설의 기세는 더욱 세차고 날은 저물었다.
칠흑 같은 밤, 북풍한설에 허리춤까지 차오른 눈밭을 얼마나 헤맸을까.
추위와 허기 그리고 공포로 유 대감은 정신을 잃었다.
얼마 만에 깨어보니 약초꾼 너와집이었다.
폐병에 걸린 약초꾼이 열두어살 난 아들과 단둘이 살고 있었다.
얼마 후 약초꾼은 이승을 떠났고 유 대감은 약초꾼의 아들을 데려와 자신의 호적에 아들로 입적시켰다.
그가 바로 둘째아들 유준하였다.
7년 전 유준하를 파양했다.
호적에서 유 대감의 차남을 지워버리고 원래 이름, 전천석으로 돌려놨다.
그는 시온과 함께 한양 유학을 가는 척 먼저 나섰다가
밤중에 몰래 이실댁을 데리고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천석과 이실댁 사이에 아들딸이 태어났다.
모든 것은 유 대감이 꾸민 것이다.
유 대감과 이 대감은 그곳에서 보름을 머문 뒤 고향으로 향했다.
어미 품에서 벗어나도 될 나이가 된 유시온을 데리고.
첫댓글 편안한 마으으로 즐거운 휴일
여유롭고 기분좋은일 가득한 하루
활기차고 행복이 가득한 멋진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