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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도덕경과 활
이곳은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구절 중에서 활쏘기와 관련하여 도움이 되는 부분을 활의 관점으로 해석해보는 곳입니다. 그 전에 먼저 다음 장을 한 번 보겠습니다.
天之道, 其猶張弓與, 高者抑之, 下者擧之, 有餘者損之, 不足者補之, 天之道損有餘而補不足, 人之道則不然, 損不足以奉有餘, 孰能有餘以奉天下, 唯有道者, 是以聖人爲而不恃, 功成而不處, 其不欲見賢.
노자 제77장
하늘의 도는 활을 얹는 것과 같다. 솟은 곳을 억누르고, 꺼진 곳을 추켜 올린다. 남음이 있는 것을 덜어 내고, 부족한 곳을 보충한다. 하늘의 도는 남는 것을 덜어내고,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 것이다. 사람의 도는 즉 그러하지 않다. 부족한 것을 덜어내어서 남는 것을 받든다. 누가 능히 남음으로써 천하를 받드는가. 오직 도가 있는 자이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행하되 기대지 않는다. 공이 이루어도 거기 거쳐하지 않는다. 그 슬기로움이 드러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곳의 해석은 아주 간단합니다. 도를 설명하는데 활쏘기의 비유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번역본에서 <張弓>을 활을 당기는 것으로 옮겼더군요. 그러나 활 당기는 것은 보통<挽弓>이나 <彎弓>이라고 합니다. <張弓>이란, 전후 사정을 모르고 옥편을 찾아서 해석하면 당긴다고 할 수도 있지만, 활쏘기에서 이 말은 부린활을 얹는 것을 말합니다. 부린 활은 이궁(弛弓)이라고 표기합니다. 이 이궁을 어떤 곳에서는 늘어진 활이라고도 옮기는 것도 보았습니다. 활터의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지요.
활을 부린다는 것은 활터 사람들이면 누구나 다 아는 말입니다. 각궁은 여러 가지 재료를 합성해서 만들기 때문에 시위를 걸어놓으면 탄력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시위를 풀어놓습니다. 이렇게 풀어놓은 것을 부린활이라고 하고, 쓰기 위해서 시위를 얹는 것을 얹은 활이라고 합니다. 각각 이궁과 장궁이라고 표기합니다.
그러니 첫 글자를 잘못 해석했으니, 그 뒤에 나오는 모든 글자들이 제대로 해석될 리 없습니다. 각궁은 요즘의 화공재료로 만든 활과 달라서 시위를 얹으면 기우뚱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위아래 균형이 맞도록 잡아주어야 하는데, 이때 화로의 은근한 불에 쪼이면서 발로 살살 밟아줍니다. 너무 살아오른 곳은 발로 자그자근 밟아서 내려주고, 너무 죽은 부분은 다른 부분을 눌러서 균형을 맞춰줍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활터에서는 <미립을 낸다>고 말합니다. 미립을 잘 냈다는 것은 활이 가장 좋은 모양으로 얹어졌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잘 해야만 활의 탄력이 좋아집니다. 이렇게 밟고 누르고 해서 균형을 맞추는 것을 <高者抑之, 下者擧之, 有餘者損之, 不足者補之>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활은 어느 한 쪽이 약하면 그 부분만 못 쓰는 것이 아니라 활 전체를 쓰지 못합니다. 기우뚱한 활을 계속 쓰다가는 시위가 벗겨지면서 부러지고 맙니다. 활의 양쪽 끝을 고자라고 합니다. 윗고자에서부터 아랫고자까지 힘이 골고루 맞아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한쪽으로 몰리면 부러집니다. 하늘의 도가 이처럼 활의 상태와 같다는 것은 자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느 한 쪽이 틀어지면 전체의 균형이 무너진다는 얘기입니다.
성인의 도가 이렇다는 것입니다. 큰 일을 이루었어도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그 집착은 자연의 이법과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도덕경은 두 부분을 이루어져있다. 절반의 앞부분은 도에 관한 것이고 절반의 뒷부분은 덕에 관한 것이다. 도는 원리이고 덕은 그것이 관념과 제도로 굳어진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 둘을 합쳐서 도덕경이라고 한다. 지금은 도덕경이라고 이름을 하지만, 마왕퇴에서 발굴된 글은 도경과 덕경 부분이 반대로 편집되었다. 즉 덕경이 앞에 나오고 도경이 뒤에 나온다. 따라서 어느 시기엔가 이것이 바뀐 채로 도덕경이 되어 지금에 이르는 것이다.
따라서 덕경이 앞에 오고 도경에 뒤에 온다면 먼저 현실속의 어떤 모습을 보여준 다음에 거기에서 우주와 자연과 현실을 지배하는 형이상학의 원리를 파악하여 드러낸 것이다. 그러다가 후대로 오면서 원리가 먼저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찾아낸 삶의 원리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도덕경은 한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시기에 걸쳐 보강된 책이다. 그러다 보니 여러 가지 견해가 뒤죽박죽 섞여있다. 그래서 해석을 할 때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해석을 달리 해야 한다. 여기서는 일단 세 가지 시각이 뒤섞여있다고 보고자 한다. 자신의 건강을 다지는 양생술, 세상살이의 지혜를 보여주는 처세술, 사회의 통치기술을 보여주는 치세술이 그것이다. 그런데 한 문장 또는 한 구절 안에서 이 세 가지가 섞여있기 때문에 서로 해석이 안 되는 부분이 나타나는 것이다. 특히 해석이 잘 안 되는 부분은 거의가 양생술과 연관된 부분이다.
양생술과 관련된 부분을 처세술이나 치세술의 시각으로 해석을 하면 전혀 엉뚱한 뜻이 된다. 그리고 대부분 해석이 잘 안 된다. 그래서 그것을 억지로 해석을 하려다 보니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이 되는 것이다. 그런 것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이 현빈(玄牝)이니 곡신(谷神)이니 하는 말들이다. 이것은 실제로 어떤 짐승이나 골짜기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연단술에서 몸속의 양생 원리를 나타내는 이미지들이다. 단전 수련을 하면 배꼽 밑에 어떠너 기운이 형성된다. 현빈과 곡신은 단전에 형성된 기운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기운을 숫자로 나타내면 하나(一)가 되고, 말로 나타내면 도(道)가 된다. 유명이니 무명이니 하는 것들도 다 그런 개념이다.
6. 谷神不死, 是謂玄牝,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綿綿若存, 用之不勤.
6장 직역
곡신은 죽지 않는다. 이를 일컬어 현빈이라 한다. 현빈을 일컬어 하늘과 땅의 뿌리라 한다. 끊임없이 이어져서 마치 있는 것 같아, 아무리 써도 다하지 않는다.
이 문장은 상식 선에서 이해할 때 풀기가 참 난감한 경우이다. 상식 선에서 풀기 어렵다는 것은 상식과는 다른 원리가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며, 그것은 그 원리로 보지 않으면 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도덕경을 사회 현상이나 처세술을 기록한 책으로 보면 이 부분은 풀리지 않는다. 따라서 처세술이나 통치술이 아닌 다른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풀리지 않는다. 그 다른 시각이란 양생술이다.
현빈은 양생술에서 쓰는 말이다. 단전 호흡 수련을 하다 보면 단전 부위에 평상시와는 다른 현상이 나타난다. 느낌은 여러 가지이다. 따스한 물이 고이는 것 같기도 하고, 조그만 풍선이 들어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달걀 같은 것이 들어있는 것 같기도 하고, 실뭉치가 들어있어서 숨을 쉴 때마다 감겼다 풀렸다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것은 호흡 수련의 결과 기가 쌓여서 일정한 기운을 뭉치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 바로 이것을 구멍(一竅)이라고도 하고, 숫자로는 하나라고도 하고, 이미지로는 현빈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빈이란 암컷을 나타내는 말이다. 현은 검다는 뜻인데, 신비한 측면을 나타내려는 뜻이다. 왕필은 원빈(元牝)이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골짜기의 신과 이 빈은 같은 것이니 단전에 서린 이 기운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천지의 뿌리라고 했으니, 이때의 천지는 실제의 하늘과 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몸의 비유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참동계에서는 머리를 하늘, 아랫배를 땅이라고 표현한다.
호흡은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들숨과 날숨이 이곳에서 이루어지면 기가 몸에 쌓인다. 아무리 써도 닳을 리 없고 바닥날 리가 없다. <면면약존 용지불근>이라는 표현은 이것을 나타낸 말이다. 인체가 소우주이기 때문에 하늘과 땅이라고 표현한 것이고, 그것이 천지라는 말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니 정확히 말하면 이것은 처세술에 관한 글이 아니라 양생술에 관한 글인 것이다. 관점이 다른 것으로 접근하니 답이 나올 턱이 없는 것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문장 역시 하늘과 땅의 관계를 몸 안의 어떤 관계로 바꾸어 읽으면 전하 다른 답을 얻을 수 있다.
활에서는 어떨까? 역시 마찬가지이다. 활에서도 호흡을 생명처럼 여긴다. 활을 들어서 당기고 발시를 할 때까지 이루어지는 호흡이 천징의 움직임과 같고, 그 결과 불거름에 기운이 쌓여서 몸의 중심을 잡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무아지경에서 활을 쏘게 된다. 이렇게 하게 하는 불거름의 어떤 기운을 현변이라고 보면 된다. 그것이 곡신이다.
7.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非以其無私邪, 故能成其私.
7장
천지는 영원무궁하다. 천지가 영원무궁한 것은, 스스로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히 오래 살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그 몸을 뒤로 하나 그 몸이 앞서고, 그 몸을 외면하나 그 몸이 존재한다. 이것은 그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능히 그 사를 이룬다.
天長地久라는 표현은 한문에서 흔히 보는 표현으로 天地長久의 운을 바꾼 것이다. 예를 들면 사자소학에 父生母育이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운을 맞추느라 父母生育의 구조를 바꾼 것이다. 남자인 아버지가 사람을 낳을 수는 없으니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千變萬化도 그런 경우이다. 천만 가지 변화의 뜻이다.
스스로 태어나지 않는다거나 능히 오래 살 수 있다는 것은 땅바닥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사람의 생명에 관한 이야기일 때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스스로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원래부터 갖추어져있다는 얘기이다. 숨을 쉬는데 그 방법을 배우고 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태어나서 울면서 그 순간부터 숨은 저절로 쉬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생각에 쫓기고 마음에 시달리다 보니 점점 본래의 호흡을 잃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장수의 비결 또한 간단하다. 태어날 적의 그 호흡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생각을 줄이고 마음을 평온히 해야 한다. 그러면 호흡이 안정되고 저절로 아랫배에 기운이 쌓이면서 몸 역시 부드러워진다.
몸 밖이니 안이니 먼저이니 나중이니 하는 것은 모두 마음과 몸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욕심을 부리고 의지를 갖게 되면 생각이 생기고 생각이 생기면 마음이 움직여서 몸과 마음이 분리된다. 이렇게 되는 것이 바로 인위가 되는 것이다. 인위를 버리는 곳에 사사로움이 있다. 한 사람의 몸이 있다. 그 몸에 정직한 것이 자연이 준 품성을 보존하는 방법이다.
또 이 선후와 내외의 관계를 몸과 우주의 관계로 볼 수도 있다. 사람의 몸은 소우주이다. 그리고 대우주인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왔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만든 몸의 조건을 버리고 우주의 본래 모습과 일치시킬 때 진정한 건강을 이룰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의 욕망으로 인하여 우주의 리듬과는 다른 삶을 산다. 이것이 건강을 망치고 마음을 어지러뜨린다. 따라서 정말 건강한 사람이 되어 신선이 되려면 먼저 욕망이 만든 인위부터 없앨 필요가 있다. 몸의 리듬을 자연의 리듬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사사로운 감정을 버려야 한다. 완전히 짐승과 같은 자연 본래의 감각으로 돌아갈 때 모든 병으로부터 해방된다. 이것이 나를 버리고 우주를 얻는다는 말이다. 우주가 사사로움이 없다는 것은 그런 뜻이다.
이것을 활에서는 어떨까? 활의 만작 상태에서는 사람이 과녁에 온 정신을 집중한다.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완전히 잊으면 우주와 합일된다. 활이 우주의 리듬을 받아들이는 선도술의 도구로 훌륭한 것은 이런 까닭이다. 호흡이 깊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주의 기운을 배꼽 근처에 누적시키는 것이 신선이 되는 지름길이다. 그러면 그 힘을 바탕으로 몸이 우주의 본래 리듬을 되찾는다.
그러면 이제 이 곡신이라고 한 원빈의 다른 표현에 대해 알아보겠다. 먼저 구멍으로 바꿔 표현한 경우이다.
11. 三十輻共一, 當其無, 有車之用, 선치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鑿戶유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11장 직역
서른 개의 바퀴 살이 하나의 바퀴 머리에 모인다. 그 바퀴 머리의 빔에 수레의 쓰임이 있다. 찰흙을 빚어 그릇을 만든다. 그 그릇의 빔에 그릇의 쓰임이 있다.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든다. 그 방의 빔에 방의 쓰임이 있다. 그러므로 있음이 이롭게 되는 것은 없음의 쓰임 때문이다.
바퀴살은 바퀴 구멍을 향해 몰려있다. 이것은 바퀴 구멍이 바퀴를 움직이고 수레를 움직이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 핵심 원리는 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몸이 생명을 유지하고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호흡이다. 그리고 그 호흡은 앞서 말한 대로 배꼽 밑의 단전에서 이루어진다. 거기서 생명을 관장하고, 그 관장하는 방법을 이용하여 생명을 연장하려는 것이 양생술이다. 이 일곡이란 바로 이 원리를 말한다. 표현만 다르지 현빈과 같은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면 나머지 구절은 저절로 풀린다. 몸은 영혼이 담기는 그릇이다. 따라서 그 그릇의 쓰임과 방의 쓰임은 영혼이 외부와 교류하는 방식을 말한다.
단전에는 생명의 기운이 서려있다. 남녀 모두 생식기가 몸의 아래쪽에 있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앞서 현빈으로 표현된 단전의 기운을, 골짜기의 신이라고 표현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남녀 모두 생식기와 항문 사이에 회음혈이 있다. 단전에서 모인 기운은 이 회음혈을 나와서 임맥과 독맥을 통해 주유하고 다시 12경으로 통한다. 이것이 각기 소주천과 대주천이다. 생식기에 기운의 출입문이 있는 것이다. 회음혈은 바로 두 다리 사이에 있다. 그러니 사람을 산에 비유한다면 가랭이는 골짜기이다. 그래서 곡신이라고 표현하고, 현빈이라고 다시 설명한 것이다. 이런 표현이 노자를 양생술에 관한 책이라고 보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생명의 기운은 밧데리와 같아서 계속 닳는다. 그 속도를 늦추거나 멈추게 하는 방법이 호흡이다. 그렇다고 해서 단전이 몸 속의 어디엔가 장기처럼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존재한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 그것이 생명이고 단전이다. 그리고 그 단전의 기운은 스스로 느낄 수 있다. 달걀처럼 둥글기도 하고 말랑말랑하기도 하다. 무한하게 풀려나는 실뭉치 같기도 하다. 구멍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 한 구멍이 생명을 관장한다. 거기서 생긴 기운이 온몸에 바퀴살처럼 펴진 경락을 따라서 운행하면서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이다.
활도 마찬가지이다. 활 역시 호흡을 생명으로 하는 운동이기 때문에 수련을 계속하면 이런 증상을 느낄 수 있고, 원리 역시 같다. 그래서 호흡의 원리와 움직임을 잘 알아야 한다. 그리고 밖으로는 과녁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노릇을 한다. 활을 쏘는 순간 과녁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활의 목적은 맞추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건강에 있다. 그러므로 만작하고 있을 때의 그 호흡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다. 과녁을 맞추기 위해서 쏘는 것이 아니라 건강을 위해서 쏘는 것이다. 그릇 자체를 쓰는 것이 아니라 그릇의 빈 곳을 쓴다는 것은 이것을 말한다. 과녁에 집중하되 과녁이라는 사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 그것이 활이다. 과녁은 활쏘기라는 바퀴의 중심이지만, 과녁이라는 바퀴의 중심 구멍은 단전의 호흡이다. 이것을 잊으면 과녁의 노예가 된다. 과녁의 노예로 전락하는 순간, 활은 양생을 멈추고 놀이로 전락한다. 놀이는 놀이일 뿐이다.
이것을 이미지 대신 숫자로 나타내면 하나가 된다.
10. 載營魄抱一, 能無離乎, 專氣致柔, 能영兒乎, 滌除玄覽, 能無疵乎, 愛民治國, 能無知乎, 天門開闔, 能無雌乎, 明白四達, 能無爲乎, 生之畜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10 장 직역
혼백을 싣고 하나를 껴안는다. 능히 떠날 수 있겠는가?
오로지 기로 부드러움에 다달아 능히 갓난아기가 될 수 있겠는가?
백성을 아끼고 나라를 다스림에 능히 지혜롭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그윽한 거울을 뜨물로 씯어서 흠이 없게 할 수 있는가?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데 능히 암컷으로 머물 수 있겠는가?
밝고 깨끗히 사방을 비추면서 능히 함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것이 생겨나고 그것이 쌓여 가네. 낳으면서도 낳은 것을 소유하지 않고, 지으면서도 거기에 기대하지 않고, 자라게 하면서도 자란 것을 다스리지 않네. 이것을 일컬어 그윽한 덕이라고 한다.
載營魄의 營魄은 靈魄이거나 魂魄의 오류로 보인다. 抱一은 하나를 감싼다는 말이다. 따라서 영혼을 실어서 하나를 감싼다는 말이다. 이 역시 양생술의 방법을 설명한 것이다. 백성 어쩌구 한 것은 후대에 첨가한 말이다.
양생술에서 하나(一)는 생명의 근본원리를 말한다. 결국은 숨을 말하는 것인데, 우리말로 그대로 목숨이다. 이것을 유지하는 것은 숨이다. 그러니 숨을 쉬게 하는 그 어떤 힘을 하나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이 둘로 분화된다. 당연하지 않은가? 들숨과 날숨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둘(二)이다. 여기에 다시 들숨과 날숨 사이에는 잠깐 멈춤이 있다. 이 멈춤까지 더하면 셋(三)이 된다. 들숨과 날숨, 그 사이의 멈춤이 끝없이 반복되면 몸에 기운이 쌓이고, 그 기운은 한방에서 말하는 경락을 따라 온몸을 돈다. 12경락과 기경팔맥이 그 길이다. 그래서 소우주인 몸에 일정한 흐름이 만들어진다. 다음에서 하나에서 둘이 나오고 둘에서 셋이 나오고 셋에서 다시 만물이 나온다는 말의 뜻이다.
또 다른 것은 단전의 문제이다. 단전은 보통 배꼽 밑의 어떤 지점을 말하지만, 사실은 인체의 단전은 셋으로 나눈다. 배꼽 밑의 것을 하단전, 가슴 부위의 중단전, 머리의 상단전이 그것이다. 하나에서 셋으로 분화하는 것은 이것을 말한다. 이 세 단전이 서로 교류하면서 생명을 유지한다.
이 단전에 각기 깃들어 사는 것도 다르다. 하단전, 중단전, 상단전에는 각기 정(精), 신(神), 기(氣)가 머문다. 그리고 백(魄), 령(靈), 혼(魂)이 깃든다. 그래서 사람을 구성한다. 각기 다른 곳에서 각기 다른 기능을 맡지만, 이 모두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이 생명의 작용에 충실하면 숨이 깊어지고 몸이 부드러워진다. 꼭 갓난아기처럼 된다. 이것을 막는 것이 지식이다. 이것 저것에 대한 지식은 반드시 개념을 만들고 개념은 무언가 형식속에 가두고 만다. 형식에 갇히면 집착이 된다. 집착은 경직된 사고를 낳고 경직된 생각은 몸마저 딱딱하게 한다. 어른들의 몸이 딱딱한 것은 이와 같이 생각에 시달리고 관념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푸는 방법이 호흡을 본래의 것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리고 활이라는 장비를 통하여 우리는 아주 쉽게 그 방향을 택할 수 있다.
생기고 쌓이고 낳아도 소유하지 않는다는 말은 모두 숨과 관련된 말이다. 숨쉬기는 사람이 어떻게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 먹고 집중하면 다른 생각에 또 흩어지고 딸려다닌다. 그래서 모든 번민을 씻고 자신의 내면에 집중할 때에 몸이 거기에 적응하여 호흡도 깊어진다. 소유한다든가 하는 것은 모두 욕심이다. 이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워야만 몸은 긴장을 풀고 자연의 본래상태로 돌아간다. 이렇게 몸이 풀리고 마음이 풀리는 것을 암컷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것의 생산성 때문이다. 여자의 몸이 부드러운 것은 생산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몸의 긴장을 풀어서 몸을 부드럽게 하는 것이 자연에 가깝게 가는 것이고 바로 호흡을 통해서 그것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양생술의 생각이다.
활이 추구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른 운동은 근육을 강화시켜서 몸을 돌덩어리처럼 단단하게 하는 것이지만, 양생술의 운동은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렇다고 근육과 상관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평상시에 쓰지 않는 근육을 활용해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역근이라고 한다. 활은 이런 역근과 호흡이 잘 어울린 운동이다.
42.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人之所惡, 唯孤, 寡, 不穀, 而王公以爲稱, 故物, 或損之而益, 或益之而損, 人之所敎, 我亦敎之, 强梁者, 不得其死, 吾將以爲敎父.
42 장 직역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을 등지고 양을 안고서 기를 비워서 조화롭게 한다.
사람이 싫어하는 바는 오직 고아와 과부가 되고, 곡식이 부족한 것이다. 그래서 왕과 벼슬아치의 잘잘못은 이것으로 저울질한다. 그러므로 사물은 혹 남은 곳에서 덜어서 부족한 곳을 채워주고, 부족한 곳을 채워서 남은 곳을 덜어낸다.
사람이 가르치는 바를 나 또한 가르친다. 강하고 힘센 자는 그 죽을 때를 얻지 못하니, 나는 이것(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으로 가르침의 아버지를 삼는다.
중간의 <人之所惡, 唯孤, 寡, 不穀, 而王公以爲稱, 故物, 或損之而益, 或益之而損>은 통치술에 관한 것이다. 나중에 끼워 넣은 구절일 것이다. <孤寡>는 <鰥寡孤獨>의 준말이다. 각기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없는 노인을 말한다. 이런 사람들이 많은 나라는 살기 안 좋은 나라이니 그것은 정치를 담당한 왕과 벼슬아치들의 잘못임을 지적한 것이다. 이건 통치술에 관한 글이다.
중간에 끼어든 이 글을 빼면 나머지는 더 이상 설명이 불필요할 정도로 몸 안의 변화를 가리키는 양생술의 설명임을 알 수 있다.
이곳의 숫자 1 2 3을 놓고 말들이 많다. 세상을 설명하는 구성원리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숫자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보는 자의 시각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뒤의 음양에 관한 말이 나오기 때문에 一을 태극으로 보는 것이 순리일 것이고, 2는 음양, 3은 천지인으로 보는 것이 흔한 생각이다. 그리고 이것은 세상과 인사의 구성원리로 봐도 된다.
그러나 양생술의 관점으로 보면 이와는 딴판이다. 양생술에서는 모든 것의 원리를 호흡으로 본다. 그렇기 때문에 도는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호흡의 원리이며, 1은 호흡을 말한다. 숨은 들숨과 날숨으로 나뉘기 때문에 1이 2를 낳는 것이며, 들숨과 날숨 사이에 멈춤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다시 3으로 나뉜다. 3이 만물을 낳는다는 것인 이 호흡의 삼박자 원리에 의해서 몸 속의 생명이 살고 작용하기 때문이다. 결국 만물은 12경락과 기경팔맥으로 설명되는 인체의 운영원리이다.
음을 지고 양을 안았다는 것은 음양의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인체에서는 등쪽을 양 배쪽을 음으로 본다. 등의 복판으로 독맥이 올라가고 배의 복판으로 임맥이 내려온다. 이 임맥과 독맥을 타통하여 기를 한 바퀴 회전시키는 것을 소주천이라고 한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기가 온몸에 고루 퍼지고 몸이 화평해진다. 이것을 가리키는 말이 <沖氣以爲和>이다.
<强梁者, 不得其死>란 몸이 유능제강(柔能制剛)을 잃을 때 병이 온다는 뜻이다. 梁은 들보를 뜻하는 말인데, 몸에 적용한다면 몸을 받치는 등뼈쯤에 해당할 것이다. 들보를 강하게 한다는 것은 등뼈를 경직되게 한다는 말이다. 몸이 경직되면 병이 먼저 온다. 몸을 부드럽게 하는 방법은 호흡을 통해 양생술을 익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장생할 수 있다.
이것을 가르침의 아버지로 삼겠다는 것은, 양생술로 자신을 다스리겠다는 얘기가 된다.
활쏘기 역시 호흡을 중시하기 때문에 이곳의 설명은 그대로 해당된다. 하나는 호흡이고, 둘은 들숨과 날숨이며, 셋은 만작 시의 멈춤까지 포함한 것이다. 활은 음이고 살은 양이라면 이 음양의 한 가운데에서 사람이 기운을 비워 몸을 화평하게 하는 것이다.
39. 昔之得一者, 天得一以淸, 地得一以寧, 神得一以靈, 谷得一以盈, 萬物得一以生, 侯王得一以爲天下貞, 其致之, 天無以淸, 將恐裂, 地無以寧, 將恐發, 神無以靈, 將恐歇, 谷無以盈, 將恐竭, 萬物無以生, 將恐滅, 侯王無以貴高, 將恐蹶, 故貴以賤爲本, 高以下爲基, 是以後王自謂孤, 寡, 不穀, 此非以賤爲本邪, 非乎, 故致數輿無輿, 不欲록록如玉, 珞珞如石.
39장 직역
옛날에 하나를 얻었다는 것은 이렇다.
하늘은 하나를 얻어서 맑고, 땅은 하나를 얻어서 편안하고, 신은 하나를 얻어서 영묘하고, 골짜기는 하나를 얻어서 차고, 온갖 것은 하나를 얻어서 나고, 제후와 제왕은 하나를 얻어서 천하를 바르게 한다. 이것은 그것이(하나가) 도달한 것이다.
하늘이 하나로써 맑음이 없으면 장차 찢어질까 두렵다.
땅에 하나로써 편안함이 없으면 장차 쪼개질까 두렵다.
신이 하나로써 영묘하지 않으면 장차 가물까 두렵다.
골짜기가 하나로써 차 있지 않으면 장차 다할까 두렵다.
온갖 것이 나지 않으면 장차 멸망할까 두렵다.
제후와 제왕에 고귀함이 없다면 장차 실족할 까 두렵다.
그러므로 귀함은 천함을 근본으로 삼고, 높음은 낮음을 기초로 한다.
이런 까닭에 제후와 제왕은 스스로 일컬어 고독하고, 부족하고, 곡식이 부족하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천함을 뿌리로 삼는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자주 가마를 타는 것은 가마를 안 타는 것만 못하다.
녹녹하여 옥석과 같기를 바라지 말고, 낙낙하여 보석 같기를 바라지 마라.
여기서 말하는 하나가 앞서 본 세상의 원리를 가리키는 것이라도 한다면 이 문장들은 풀리지 않는다. 이 하나는 얻을 수 있는 것인데, 하늘이 이를 얻고 땅이 이를 얻는다는 것은 말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하나는 자연현상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관한 묘사인가? 당연하게도 사람의 몸에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 것이다.
하늘이니 땅이니 골짜기니 하는 것은 모두 몸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이런 전통은 선가에서는 상식화한 것이어서 참동계에서는 모두 이런 은유로 나타난다. 머리는 하늘 배는 땅, 하는 식이다. 하늘이 맑다든가 땅이 편안하다든가 하는 표현은 실제의 천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몸 속의 하늘과 땅을 말하는 것이다.
골짜기에 대한 문구를 보면 이 또한 분명하다. <谷得一以盈, 萬物得一以生>, <谷無以盈, 將恐竭>에서 골짜기가 차면 만물이 생기고, 비면 고갈된다는 말은 양생술의 용어이다. 골짜기는 항문과 생식기 사이의 회음과 그 안의 단전을 말하는 것이다. 이곳에 현빈일규가 생성되면 몸이 살아난다. 이것이 숨을 통해 하나를 얻으면 만물이 생긴다는 말의 뜻이다. 또 뒷구절의 골짜기가 차지 않으면 고갈된다는 것 역시, 단전에 이런 기운이 생기지 않으면 기력이 소진되어 병에 걸린다는 말이다. 완전히 양생술에 관한 이야기이다.
맑다, 영묘하다, 편하다 같은 말들은 단전호흡 수련을 하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들이다. 그것을 말로 어떻다고 표현하기는 어렵다. 수련 과정에서 느껴지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제후와 제왕 어쩌구 하는 것은 이 글을 처세술로 오인한 결과 들어간 문구이다. 후대의 덧붙임으로 보인다.
이런 상태는 활쏘기를 하면 그대로 적용된다. 활을 쏘면서 시시각각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이러한 작용이 실제로 몸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건강할 때는 잘 못 느끼지만, 몸이 약한 상태에서 활을 쏘면 활의 효과를 금방 느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