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한용의 장편소설 『소리 숲』(푸른사상 소설선 34). 고창의 역사와 함께해오며 참회의 삶을 살아가는 노인의 수수께끼 같은 삶과 그의 자서전 대필을 제안받은 청년의 서사가 교차된다. 인간 성장과 깨달음의 과정이 담긴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충만한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숲의 소리가 들린다. 2022년 5월 31일 간행.
■ 작가 소개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국어교육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같은 대학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문학과 문학교육을 연구해왔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다. 1986년 『월간문학』에 소설 「고사목 지대」로 작품 활동을 시작해 근 10년 동안 매년 소설집을 한 권씩 냈다. 그가 과업으로 삼은 과제는 환경(장편소설 『생명의 노래(1, 2)』), 폭력(장편소설 『악어』), 식민지와 노예제도(소설집 『수상한 나무』), 인간의 성장과 자아 형성(장편소설 『심복사』 『소리 숲』) 등이다. 이런 주제는 우리가 인간적 위의(威儀)를 지키면서 자연과 더불어 오래 살아가야 하며, 자생력을 가진 자연을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는 일종의 윤리 의식을 토대로 한 생태학적 상상력의 반영이다.
■ 작가의 말 중에서
나에게 숲은 유토피아의 표상이다.
나는 평생 숲에서 살고 싶다. 숲은 지극히 풍성한 생명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풍성하다는 것은 모자람이 없다는 뜻이다. 물질 측면에서는 물론 정신 차원에서도 숲은 충만한 공간이다. 숲은 너그럽다. 숲은 정신을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 올린다. 숲에서 인간은 성장한다.
세속의 삶이 끝나면 나는 숲으로 돌아가고 싶다. 세속에서 지은 죄를 사죄하는 과정이 될 터이다. 그것은 이승의 때가 묻은 육신을 숲에 들여보내 정화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내 육신을 자연으로 돌려보내고 싶은 심정은 순박하다. 그러나 유토피아 표상을 직설적으로 그리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느낌을 먼저 시 형식으로 제시하고자 했다.
대개는 그렇다. 느낌이 먼저 오고 이야기는 뒤에 따라온다. 소설이 힘든 이유는 느낌을 이야기로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그럴듯한 작품이 된다. 그럴듯하다는 건 사리가 맞는다는 뜻이다. 소설가는 느낌과 사리 사이를 오가면서 작업을 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산다는 게 이야기 속에 느낌을 버무려놓는 일이 아니겠나 싶다.
■ 작품 세계 중에서
『소리 숲』은 누구를 주인공으로 보는가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호기심 많은 스물세 살 젊은이 윤종성이 주인공이라면 이 소설은 그의 성장담으로 교양소설, 성장소설이 될 것이다. (중략) 여든 다 되어가는 김대성이 주인공이라면 이 소설은 죽음으로 귀결되는 한 인간의 삶을 그린 전기소설, 혹은 의미 있는 죽음/삶을 준비/마무리하는 노년소설이 될 것이다. 또한 단순한 배경에 그치지 않고 살아 숨 쉬는 땅, 고창과 그에 발 딛고 사는 사람들이 주인공이라면 이 소설은 지역소설이 되고, 고창으로 상징되는 이 땅의 삶과 역사, 그리고 자연을 포착하고 의미 짓는 탐구의 주체인 대학과 그 학문적 앎이 주인공이라면 이 소설은 대학소설, 지식소설이 될 것이다.
사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이 모두이면서 또 이 모두를 넘어선다. 윤종성과 김대성, 대학과 고창, 인간과 자연을 연결하고 그것을 모두 품으면서도 그것을 넘어서 존재하는 것, 그것은 숲이다. 그 숲이 내는 소리가 이 소설이고 고로 ‘소리 숲’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은 읽어서는 안 되고 들어야 한다. 아니 듣기 위해서 읽어야 한다. 읽는 것은 지향적인 행위이지만 듣는 것은 주체가 사라진 순수경험이다. 마치 맥놀이가 나의 의지, 지향성과는 상관없이 내 귀를 통해 마음속에서 울리듯이. 이 소설에서 통주저음으로 끊임없이 울리고 있는 이 맥놀이, 숲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이 소설을 읽어야 한다. 이 모순 속에 이 소설의 독법이 있다. 읽어라, 그러면 들릴 것이다.
- 윤대석(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 작품 평설 중에서
■ 작품 속으로
맥놀이는 일종의 여운(餘韻)이다. 범종의 소리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종신에 새겨진 당좌를 당목으로 타격함과 동시에 발생하는 타음(打音)은 콰르르릉 천지가 무너지는 소리이다. 이어서 꾸웅하고 울리는 원음(遠音)이 잠시, 삼사 초간 이어진다. 그리고 이후 여음(餘音)은 몸을 뒤틀면서 멀리 퍼져 나가는데, 높낮이를 달리하는 소리가 우웅우웅 무한공간을 향해 흘러가게 된다. 그 소리가 삼십삼천 도솔천으로 인간 영혼을 실어 나른다고, 불가에서는 이야기한다.
“사람도 마찬가지, 깊은 울림을 주는 사람은 한 몸에서 주파수가 다른 소리를 낸다고 할까. 청정무구한 영혼과 죄로 더럽혀진 몸뚱이가 하나의 자아 속에 통일을 이룬다면, 그걸 인격이라 해야 할 게 아닌가? 성인들의 생애가 대개 그렇게 이질적인 것의 통일을 보여주지.”
(26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