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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27) - 2024 .09. 07(토)-08(일) |
성지순례 27차는 동해안 일원이다. 강원도 가장 북쪽에 있는 양양 성지로부터 강릉의 행정 공소, 강릉대도호부 관아, 임당동 성당, 금광리 공소, 순교자 라파트리치오 신부 순교터, 동해의 묵호 성당, 그리고 맨 아래 삼척의 성내동 성당에서 끝이 난다. 성내동 성당은 원주교구이다. 그러니까 춘천교구 소속이 6개소이고 원주교구가 1개소이다.
이번의 경우도 서울의 신 모세 형제와 함께하는데 당일 서울서 내려오기가 어려워 6일(금요일)에 미리 경주에 와서 우리집에서 1박을 했다. 젊어서부터 가족 모임을 해온 터라 그때 그집은 아니더라도 그렇게 낯설지는 않다.
코스 일정은 우리가 평소에 하듯 8일 아침 성건 성당을 출발하여 영덕, 울진을 거쳐 삼척 성내동 성당에서 순례를 시작하여 북상하면서 위에서 밝힌 7개 성지를 차례대로 순례를 한다. 그리고 마지막인 양양에서 1박을 하고 친구는 바로 상경하고 우리는 내려오기로 했다.
07:00 승용차로 성당 출발. 날씨는 잔뜩 흐려서 더위의 지배를 받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소나기가 온다는 예보가 있지만 우산을 준비하면 그만이다. 영덕 휴게소에서 한번 쉬고 바로 성내동 성당에 도착하니 10시 반이다.
성내동 성당 - 삼척 언덕에 우뚝 솟은 진 야고보 신부의 순교 성당 |
강원도 삼척시 성내동 3-1
강원도 삼척시 성당길 34-84
본당의 설립
성내동 성당은 1946년, 강릉 본당 주임 갤라허(F. Gallagher, 葛) 신부에 의해 설정된 삼척 공소를 모태로 한다. 삼척 공소의 신자가 꾸준히 증가하자 강릉 본당에서는 삼척읍 남양 2리의 개인 주택과 대지를 사들여 성당과 사제관으로 개조하였다. 그 결과 1949년 10월 7일 삼척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됨과 동시에 골롬반 외방선교회의 매긴(J. Maginn, 陳) 야고보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매긴 신부가 1950년 7월, 북한 공산군에게 피살되었고, 이듬해 2대 주임으로 부임한 버크(P. Burke, 表) 파트리치오 신부가 본당의 기틀을 다져 나갔다.
삼척 본당은 설립 당시엔 춘천교구 소속이었다가 1965년 3월 22일에 원주교구 소속으로 변경되었으며, 1966년 10월 5일 사직동 본당이 분리되면서 성내리 본당으로, 1988년 10월 18일에는 다시 성내동(城內洞) 본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주보는 천주 성삼이다.
성전 건립
설립 당시의 성내동 본당은 지금의 성당 자리가 아닌 인근 남양리에서 출발했다. 설립 당시 100여 명에 불과했던 본당 신자가 급격히 늘어나자 3대 주임이었던 데니스(K. Denis, 姜) 디오니시오 신부는 성당 신축 부지를 물색했고, 여러 군데를 둘러본 끝에 지금의 자리에 성당을 짓기로 마음을 굳혔다. 돌이 거의 없는 밭이었고 무엇보다 인근에서 가장 높은 장소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신축에 나선 이는 데니스 신부 후임으로 1955년 11월에 부임한 코너스(K. Conners, 高) 가비노 신부였다. 당시 25살의 젊은 나이의 코너스 신부는 10명이나 되는 땅 주인들을 일일이 만나 설득하면서 땅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선뜻 땅을 팔려고 하지 않았다. 성당 부지에 주민들이 매년 섣달 그믐날 고사를 지내는 성황당 고목(古木) 두 그루가 있는데, 성당을 짓느라 이 고목들이 망가지면 동네에 큰 재앙이 온다는 미신 때문이었다. 이때 코너스 신부는 “고목에 제사 지내는 것보다 성당에서 매일 제사를 지내면 훨씬 더 큰 복을 받을 수 있다.”라는 말로 두려움에 떠는 주민들을 달랬다고 한다.
성당 신축 공사는 1957년 3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설계도는 춘천 교구장 퀸란(Quinlan, 具) 토마스 주교가 보내왔고, 시공은 강릉 임당동 성당과 묵호 성당을 시공한 경험이 있는 중국인 신자 가(賈)씨가 맡았다. 공사는 쉽지 않았다. 공사에 들어간 지 4개월 만에 인부 몇 명만 나오고 대부분 나오지 않는 사태가 벌어졌다. 알고 보니 돈이 많은 외국인 신부가 공사하니까 공사를 지연시키면 노임을 더 받을 수 있겠다는 욕심에 단체 파업에 들어간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공사는 재개됐고, 공사 막바지에 자금이 모자라게 되자 교구장 퀸란 주교는 갖고 있던 승용차를 팔아 공사비에 보탰다.
성당 봉헌식을 가진 것은 착공 9개월 만인 1957년 11월 5일이었다. 건평 133평의 성당과 30평의 사제관은 당시 춘천교구에서는 가장 큰 규모였다.
성내동 성당은 1950년대 후반의 지방 건축기술을 잘 보여준다는 점이 높은 점수를 받아 2004년 12월 31일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41호로 지정되었다.
진 매긴 신부의 순교정신이 서린 성당
초대 주임인 진 야고보(James Maggin, 1911-1950) 신부는 미국 몬타나(Montana, USA)주에서 1911년 11월 15일에 출생하여 1935년 12월 21일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인 1936년 한국에 입국하여 1937년부터 광주교구에서 선교생활을 시작했고, 1939년 강원도 지역이 서울교구에서 독립하여 춘천교구로 설정되자 강원도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1941년 12월 8일 미국과 전쟁을 시작한 일본은 미국 출신인 진 야고보 신부를 비롯해 평강 및 이천에서 활동하고 있던 신부들을 평강 감옥에 감금하였고, 12월 25일 춘천으로 압송하였다. 1942년에 석방되었으나 가택연금 조치를 받아 성사집행 및 전교활동을 할 수 없다가 해방 후 홍천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여 1947년까지 사목활동을 하였다.
1949년 휴가를 마치고 다시 입국한 진 야고보 신부는 삼척에 목조건물을 구입하여 100여명의 신자들과 더불어 1949년 10월 강릉 임당동 본당에서 분리된 삼척본당을 설립하였다. 진 야고보 신부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12.31).”는 말씀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자 노력하며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씻겨 주기도 하였고, 간혹 진 신부가 없는 틈을 이용하여 사제관에서 시계나 돈을 훔쳐가는 아이들을 사랑으로 꾸준히 타일러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였다.
진 야고보 신부가 삼척에서 사목활동을 시작한 지 일 년도 되지 않은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났다. 피난을 준비하고 있던 신자들은 진 야고보 신부에게도 피신할 것을 권했지만, 진 야고보 신부는 최후의 순간까지 성당을 지켜야 한다고 하며, 신자들의 강한 권유도 완강히 거부하였다. 또한 떠나는 신자들에게 금고에 있던 돈을 나누어주며 곤궁에 처할 때 요긴하게 쓰라고 하였다.
이후 공산군이 삼척을 점령하면서 진 야고보 신부는 체포되었고, “성당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올 테니 10분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제단 앞으로 가 기도를 한 이후, “나는 도망갈 사람이 아니오. 만일 내가 도망갈 사람이라면 벌써 도망쳤을 거요. 내가 도망가리라고 생각지 마시오. 다만 내 손을 묶지 말고 지금의 상태 그래도 놔주시오.”라고 말하고는 총구 앞에서 차분하고 의연하게 걸어갔다.
감옥에 갇혀 있던 진 야고보 신부는 7월 4일 지지리 마을 앞 하천변에서 피살되었고, 마을 사람들이 시신을 발견하여 가매장하였다. 1950년 10월 수복 이후, 가매장되었던 진 야고보 신부의 시신은 1951년 10월 죽림동성당 성직자 묘역으로 이전 안치되었다. 현재 진 야고보 신부는 근현대 신앙의 증인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가운데 한 명으로 시복 절차가 진행 중이다.
본당의 발전과 변모
성내동 본당은 영동 남부지방 복음전파 근거지이며 산실이다. 1956년 3월 10일에 근덕(根德) 공소, 1958년 4월에 동막(東幕) 공소, 1959년 12월 4일에 궁촌(宮村) 공소, 그리고 이듬해 7월 4일에는 호산(湖山) 공소를 연이어 실립하여 분할하였다.
1961년 11월에는 본당 구내에 성 요셉 의원을 개원하였고, 1963년 10월에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분원이 마련된 데 이어 이듬해 10월에는 수녀원을 신축하였다. 또 1963년 11월 1일에는 근덕 공소 강당(35평), 이듬해 12월 22일에는 궁촌 공소 강당(30평)의 축복식을 가졌다. 1972년 10월에는 평화유치원을 개원하였으며(1988년 2월에 폐원), 같은 해 10월에는 신용협동조합을 창립하였다.
1999년 10월 7일 본당 설립 50주년을 맞은 성내동 본당은 성당 뒤편에 진 야고보 신부 순교기념비를 건립해 축성식을 거행했다. 2009년 본당 설립 60주년을 준비하면서 삼척시의 지원을 받아 성당 정면에 시내와 연결되는 계단을 만들고, 계단과 시내가 맞닿은 곳에 광장도 조성하였다. 성당 정면 마당 끝에는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예수성심상이 자리하고 있다. 2009년 12월 2일 성당 옆 마당 끝자락에 야고보 신부 순교 60주년 기념 성삼 교육관을 준공했다. 2014년 10월 21일 진 야고보 신부 현양위원회를 구성해 시복 시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2015년 11월 18일 순교자 진 야고보 신부 흉상을 제작해 축복예식을 거행해 순교사적지로서의 의미를 살려가고 있다.
3시간 반 만에 성당 입구에 도착했다. 성당이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하기에 성당 표지석이 있는 입구부터 오르막길이다.
대부분의 성당은 입구에 들어서면 높은 종탑이 맞이하지만 이곳 성내동 성당은 좀 다르다. 입구가 정면 종탑의 반대쪽, 그리니까 성당 뒤쪽으로 나 있다. 이는 시내에서 성당이 바로 보이도록 하기 위함이다.
먼저 성당 오르기 직전 야외미사를 볼 수도 있는 넓은 잔디광장이 있고, 한쪽에 루르드의 성모상을 본뜬 성모동산이 있다. 다시 나와 성전 뒤쪽으로 가면 진 야고보 신부 순교기념비와 흉상 등이 있고 오른쪽으로 조금만 가면 성당 앞 광장에 이른다.
1974년에 세워진 진 야고보 신부 순교기념비는 참 소박하다. 앞면에는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람은 없습니다”라는 요한복음 15장 13절의 말씀이 새져져 있다. 진정 진 야고보 신부야말로 양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으로 당시 가족이 있는 희생자 대신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아우슈비츠의 꼴베 신부나 스스로 한센 병에 걸려 환자와 고통을 함께한 다미안 신부님에 못지않은 큰 사랑을 실천한 대인이시다.
본당 설립 50주년 기도문 비
약간 돌아가면 성 요셉 부자상이 있고 수녀원을 거쳐 성당 앞 광장에 이른다.
성전
1949년 성당 설립 당시에는 이곳이 아닌 남양 2리에 있었으나 1957년 이곳으로 이전하여 이 건물을 신축했다. 성대동 성당은 영동지방을 대표하는 성당으로 성전은 춘천교구에서는 가장 큰 건물이었다. 벽돌과 목재로 지은 로마네스크식 건물이며 높은 언덕 위에 있어 경관이 뛰어나 삼척 시내 어디에서든 성당을 볼 수 있다.
성당 내부는 천장과 벽이 모두 흰색으로 매우 깨끗하고 넓게 느껴진다. 제대 뒷 벽면은 성당의 주보인 천주 성삼위를 상징하듯 세 개의 아치가 있고, 제대 옆에는 대형 십자고상이 서 있다. 제대 뒤 작은 십자고상 아래에는 성 김대건 신부와 성 모방 신부의 머리카락과 일부 유해가 봉안되어 있다.
앞벽에는 좌우로 예수성심상과 성모상이 높이 자리하고 있다. 좌우 벽면에는 커다란 아치형 스테인드 글라스 사이에 성화형 액자 십자가의 길 14처가 지나간다.
아름다운 십자가의 길 14처는 성전 건립 당시 퀸란 주교와 친분이 있는 서울의 한 교우가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입체감이 느껴지는 작품성이 뛰어난 14처는 지금도 외지에서 사진을 찍으러 오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성전을 나오면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는 십자가 동산이 있다. 십자가의 길은 성전을 감돌아 성전 뒤편으로 이어진다. 십자가의 길 입구에 야고보 신부 흉상이 있다.
이 순교자 진야고보 신부 흉상(胸像)은 신부님의 고귀한 삶과 순교정신을 기리고 본받기 위해 2015년 11월 18일 봉헌되었으며 조각가 홍순태 요한의 작품이다. 억울하게 치명한 사람이 어쩌면 이런 미소를 지을까? 보기만 해도 공경하는 마음이 생겨난다.
진 야고보 신부가 이곳 삼척에 초대 주임으로 오던 당시 삼척 사람들은 ‘천주교’가 무엇인지, ‘신부’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잘 모르는 이들이 많았다. 아직 성당 건물도 없었고, 야고보 신부가 일반 가정집에 살고 있어 그저 외국인이 공기 좋고 풍경 좋은 곳에서 살려고 온 것이라 생각했다.
혈혈단신, 당시 야고보 신부에게 어울리는 단어였다. 한국어도 한국 풍습도 낯선 상황이었고, 가족도 친구도 동료 선교사도 없었다. 그런 신부가 삼척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한 방식은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매긴 신부는 삼척 사람들을 늘 신뢰하는 자세로 친절하게 대했다. 주변 굶주린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줬고, 누더기를 입을 정도로 가난한 이들에게는 자신의 옷을 내어주기도 했다. 그런 신부의 사랑에 사람들은 그를 아버지처럼 여겼다고 한다. 사랑으로 사람들의 아버지가 된 야고보 신부는 그야말로 영적인 아버지, 신부(神父) 그 자체였다.
광장 가에는 한쪽에 진 야고보관이 있고 맞은편엔 수녀원이 있다.
진 야고보관은 2009년 12월, 진 야고보 신부님 순교 60주년을 맞아 봉헌된 건축물로 최신시청각 장비와 무대가 갖춰진 1층 대강당은 각종 회합장소로 사용되며 2층에는 사무실과 친교실, 성물 판매소가 있다.
광장 가장 높은 곳에 2009년에 봉헌된 대형 예수성심상이 삼척 시내를 바라보며 서 계신다. 문을 나가면 나무 계단으로 시내와 연결된다. 한눈에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멋진 전망대 구실을 한다.
성당 순례를 끝내고 내려오는 길에 성 요셉관을 지났다. 1961년에 개원한 성 요셉의원 건물이다. 1963년부터 1982년까지는 성골롬반 외방선교회 수녀회에서 지역민을 위한 의료 혜택을 베푼 곳다. 성당이 지어질 때 건립되어 건축적 측면에서도 가치를 지니고 있다. 벽에 원주교구 사회복지회 장애인 재활원이라고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사회복지 활동으로 활용되었거나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1시 반이 가까워 오는 시간 묵호 성당으로 출발했다.
묵호 성당 - 착한 순교 목자 나 파트리치오 신부의 영혼이 깃든 성당 |
강원도 동해시 발한로 161
1931년 하경연 요셉에 의해 처음 복음이 전파된 묵호지역은 1940년 강릉 본당(현 임당동 본당) 관할의 묵호 공소가 설립되었으며 1948년 6월에는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주임으로는 맥간 프란치스코(F. McGann Francisco 1948~1949. 9) 신부가 부임하였다. 그러나 아직 성전이 없었기에 한 프란치스코 신부는 묵호항 부근의 일본식 가옥에 임시 사제관을 마련하고 미사를 집전하면서 사목활동을 하였다.
본당 설립 이듬해인 1949년 4월 제2대 주임으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출신 패트릭 레일리(Patrick Reilly) 신부가 부임하였다. 라 파트리치오 신부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패트릭 레일리 신부는 1915년 아일랜드에서 출생해 1940년 사제품을 받은 후 1947년 한국에 와서 2년 뒤 묵호 본당에 온 것이다.
하지만 부임 1년 후 한국 전쟁이 일어나 공산군에 의해 성당이 점거되었지만 라 파트리치오(Patrick Reilly) 신부는 성당과 신자들을 지키기 위해 성당을 떠나지 않았다. 전교 회장의 집에 잠시 피신하고 있던 중 결국 공산군에 의해 체포되어 강릉으로 이송 도중 옥계면 밤재굴 부근에서 순교하였다. 이후 전쟁으로 본당에 사제가 파견되지 못했다.
1954년부터 삼척 성내동 본당(현재 원주교구 소속)관할 공소였다가 1957년 6월 현재의 성전을 준공하면서 다시 본당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7년 본당이 다시 설립되면서 성당 내에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를 모시게 되었고 신자들의 신앙심 고취를 위한 피정 및 재교육에 몰두했다. 1962년 7월에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가 묵호성당에 진출하였다. 묵호성당은 지역사회의 가난한 가정의 자녀들을 위한 교육 사업을 목적으로 1968년 11월 남호실업중고등학교를 인수하여 남호고등공민학교로 개명하고 교육 사업을 진행하였으나 15년 후인 1982년 2월에 폐교하였다.
묵호 성당 설립 이래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사제들이 부임해 사목을 해오다가 1981년에 한국인 사제가 부임하여 본당 내 소공동체를 활성화시키고 각종 단체도 신설하는 등 활기가 넘치는 본당으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92년 1월에는 원주교구 소속의 천곡동 본당이 아파트 밀집 지역에 신설되면서 한 지역에 2개 교구의 본당이 존재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묵호성당은 교세의 감세추세로 돌아서게 되었다.
묵호성당은 순교자를 모시고 있는 공동체로서 본당 신자들이 순교자 라 파트리치오 신부에 대한 관심을 높일 수 있도록 교육하고 있으며 순교자 시복시성을 위한 기도도 끊임없이 드리고 있다. 1974년 라 파트리치오 신부 순교비를 처음 건립하였다가 2003년 성당 앞마당 성모상이 있던 자리에 순교비를 새로 건립하였다. 또한 라 파트리치오 신부의 거룩한 순교 신앙을 기리기 위하여 1994년 8월 29일, 파트리치오 상을 제정하여 본당 신자 가운데 이웃과 사랑을 나누며 실천하는 교우에게 수여하기도 하였다.
12시가 거의 다 되어 묵호 성당 입구에 도착. 입구 오른쪽에는 잔디광장 들머리에 묵호 바다의 별 성당 표지석이 엎드려 있고, 왼쪽에는 조경석으로 쌓아 조성한 언덕 위에 커다란 예수성심상이 팔을 벌려 환영하신다.
오른쪽 잔디 광장에는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고, 한쪽에 성모 촛불 봉헌대가 있다. 잔디 광장에서도 계단을 통해 성전에 갈 수 있는데 계단 입구에 라 파트리치오 신부 순교비가 있다.
라 파트리치오 신부 순교비 안내표지석에는 파트리치오 신부의 약력과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라는 요한복음 10장 11절의 말씀이 새겨져 있다.
성전에 오르면 성내동 성당처럼 정면이 아니라 뒷면과 측면이다. 측면의 성요셉 부자상을 돌아나가야 성당 정면이 나온다.
이런 낡은 의자도 옥좌보다 더 좋을 때도 있고, 옥좌 같은 자리가 이런 낡은 의자보다 더 불편할 때가 분명 있다. 등받이에 쓰인 말이 참 와 닿는다. “그대도 예전엔 작은 사람이었음을 기억하십시오”
성전을 나와서 성전 아래쪽 낮은 곳에 내려가면 사제관과 사무실이 있다. 두 건물이 나란히 붙어 있어 아주 큰건물로 보인다. 뒤쪽 더 높은 곳에도 건물이 있고 오르는 계단이 있는데 한 계단에 “그대가 발걸음을 돌려야 할 곳”이라는 통행 금지의 말이 재미있다. 한 교우 자매님께 물었더니 예전에 수녀원이었는데 지금은 비어 있다고 한다.
이제 우리도 발걸음을 돌려야 한다.
묵호 성당을 나오면서 동해 바닷가에서 해풍이라도 쐬며 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위치를 몰라 한 교우 자매님께 물으니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그래서 해안에 있는 회식당가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청해 수산횟집이라는 업소에 회를 주문했는데 그런대로 잘 차려 주고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았다. 설령 좀 비싸다 하더라도 묵호항 푸른 바다가 다 보상해 줄 정도로 경치가 좋다.
오후 2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라 파트리치오 순교터를 향해 출발.
순교자 라 파트리치오 신부 순교터- 착한 목자는 양들을 버리지 않는다 |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낙풍리 산 47-3번지
라 파트리치오 신부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패트릭 레일리(Patrick Reilly) 신부는 1915년 아일랜드에서 출생해 1940년 12월 21일 사제품을 받고 1947년 한국에 입국, 1949년 3월 묵호 본당 제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하지만 부임 1년 만에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1950년 6ㆍ25전쟁 발발과 동시에 인민군 육전대 병사 1,800여 명은 동해안 옥계, 정동진, 금진 지역에 기습 상륙, 그날 묵호를 점령하였다. 묵호 축항사무소(현 동해지방 해운항만청)에 근무하던 최창환 요셉이 배를 구해 레일리 신부를 찾아가 피난을 간곡히 권유했다. 하지만 레일리 신부는 "양들을 버리고 목자가 혼자 도망할 수 없다"며 그의 제의를 거절했다. 레일리 신부는 묵호성당이 인민군에게 징발되자 묵호읍 만우리에 있던 남봉길(프란치스코) 전교회장 집에 피신했다.
신자들이 피난을 가고 난 후 전교회장 남봉길 프란치스코는 성당을 지키겠다는 라 파트리치오 신부를 본인의 집으로 모시고 갔다. 남 회장의 집으로 간 라 신부는 공산당원들의 눈을 피해 2-3개월 동안 작은 골방에서 감옥 아닌 감옥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런 중에서도 그는 남 회장 가족과 기회가 될 때마다 미사를 봉헌하였다. 당시 함께한 신자들은 라 신부가 순교를 앞두고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듯 때로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증언하였다. 동네의 공산당원들은 여러 번 남 회장의 집에 와서 신부의 소재를 물었지만 지역 사람들에게 남다른 인품으로 인정을 받았던 남 회장의 집을 수색할 수는 없었다.
결국 남 회장의 집을 의심한 동네 자위대원들에 의해 라 파트리치오 신부와 남 회장은 체포되었다. 공산당은 라 신부를 체포하여 나무에 묶어놓고 매질하였으나 신부는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꿋꿋하게 견디며, 남 회장을 매질하지 말라고 하였다.
묵호 읍내로 끌려간 라 파트리치오 신부는 이후 1950년 8월 29일 다른 포로들과 함께 강릉으로 끌려가던 도중 아군 전투기의 폭격으로 불안해하던 공산군에 의해 묵호 성당에서 15㎞가량 떨어진 강릉시 옥계면 밤재 철도굴 부근(현 강릉시 옥계면 낙풍리 산 16-2)에서 학살당했다.
당시 군종사제였던 이경재 신부가 해군 사령관 백기조 대령과 함께 해군 장교 신자에 의해 도로변에 묻힌 라 파트리치오 신부의 유해를 찾아내 묵호 경비사령부 앞(현재 동해시립발한도서관 앞 주차장)에 매장하였다가 국군과 유엔군이 묵호를 재탈환한 뒤 묵호 성당으로 옮겼으며, 그뒤 시신은 춘천 죽림동성당 성직자 묘역에 이전 안치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후 묵호 성당 신자들은 라 파트리치오 신부의 순교와 얼을 기리기 위하여 신부의 유해를 수습한 장소인 강릉시 옥계면 낙풍리 산 16-2번지에 순교비를 세우고, 도보 순례를 하였다. 그러나 순교비가 영동선 터널 입구에 자리하고 있어 기차 운행으로 인한 위험 때문에 현재 강릉시 옥계면 낙풍리 산 47-3번지에 새로 성지를 조성했다.
라 파트리치오 신부는 "한국 교회의 근현대 신앙의 증인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시복 추진 대상으로 현재 시복 추진 중이다.
묵호항에서 식사 후 곧장 차를 몰아 라 파트리치오 신부 순교터에 오니 낮 2시 반경이었다. 입구에 공사 차량이 있었는데 올라보니 성지 조성 공사 중이었다. 공사 내용은 지금까지 있었던 조그만 순교터 표지석 위에 대형 십자고상을 세우고 제대를 만들어 야외 미사를 드리도록 하는 것이다. 벌써 십자가는 세워지고 이제 십자가 앞에 제대 터를 닦고 있었다.
십자가를 세워놓고 보니 이전의 순교터 표지석만 있을 때가 얼마나 초라했는지를 알 것 같다. 이제 야외 미사터가 완성되면 많는 신자들이 순교 신부의 순교 영성을 일깨우고 순교자를 현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라 믿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다음은 강릉 금광리 공소이다.